해피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은 아주 희미하다.
작고 갈색털이 윤기가 흐르는 해피는 다정한 엄마, 그리고 주인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할머니는 항상 맛있는 음식을 줬다. 해피는 엄마도 좋고 할머니도 좋았다. 해피는 이름 그대로 행복했다.
어느 날, 아침을 먹을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 할머니가 일어나질 않았다. 엄마가 그랬다. 할머니의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해피는 어렸기에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며칠 동안 사람들이 오가고 할머니는 사라졌다.
해피는 무서웠다. 둘은 아주 작은 방에 갇혀 지내게 됐다. 밖은 보이지만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그곳이 애견보호소의 작은 케이지라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보호소는 밥이 맛이 없었다. 할머니가 주는 밥이 맛있었는데, 하고 해피는 생각했다.
할머니가 안 온다는 걸 깨달은 것은 해피가 다른 사람의 품에 안겨서 나가는 날이었다. 그 사람에게서 이상한 냄새가 났다.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엄마는 같이 가지 않았다. 왜 엄마는 같이 가지 않는지 몰랐지만 해피는 슬펐다. 이유를 몰라도 슬펐다.
그 사람은 해피를 어느 낯선 곳에 데려왔다. 할머니와 살던 곳보다 좁고 답답했다. 여기도 이상한 냄새가 났다. 해피는 눈물이 났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해피는 계속 울기만 했다. 낯선 사람이 손을 뻗었다. 해피는 그만 콱, 하고 그 사람의 손을 물었다.
앗, 하는 외마디 비명과 그 사람의 손에서 피가 흘렀다. 그 사람도 우는 것 같았다. 해피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울음을 그쳤다. 그 사람의 피 묻은 손을 핥았다. 그러자 그 손 해피를 쓰다듬었다. 그제야 해피도 따뜻한 손길을 받아들였다.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을 언니라고 불렀다.
시간이 지날수록 해피는 언니가 좋아졌다. 언니와 해피는 같이 산책도 하고 잠도 같이 잤다. 언니가 주는 밥은 다 맛있었고, 불편하지만 가끔 옷도 입혀줬다.
어느 날, 언니는 아침에 해피를 혼자 두고 나갔다. 좋아하는 장난감에 정신이 팔려 놀다가 고개를 둘러보니 언니가 없었다. 해피는 언니가 없으니 심심했다. 기다리고 기다려도 언니는 오지 않았다. 불안함이 밀려왔다.
어둠이 깔리고 밤이 되고서야 언니가 돌아왔다. 해피는 너무 신이 났다. 해피의 꼬리가 너무 빨리 움직여서 그대로 헬리콥터처럼 하늘로 날아갈 것 같았다. 언니는 해피를 꼭 안아주었다. 포근하고 안심이 되었다.
해피는 하루 종일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언니와 산책하는 시간이 가장 행복했다.
그다음 날 아침, 언니는 또 나갔다. 해피는 다시 혼자 지루한 시간을 보냈다. 장난감은 같이 산책을 나갈 수 없어서 속상했다. 해가 지고 언니가 돌아왔다.
해피는 다시 기분이 들떴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나니 해피는 언니가 오는 시간을 알게 됐다. 멀리서 언니의 발소리가 들리면 심장이 쿵쿵댔다. 그런데 오늘은 산책을 나가지 않는다. 언니는 씻고 침대에 누웠다. 해피가 나가자고 문 앞으로 가도 언니는 반응이 없었다.
한참을 졸라대던 해피는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내일은 나갈 수 있기를 바라며 해피는 언니 옆에 몸을 웅크렸다.
언니는 점점 더 늦게 돌아왔다.
산책을 하는 날보다 집에 있는 날이 많아져갔다. 그래도 해피는 언니가 있어서 행복했다.
어느 날 언니는 해피를 데리고 나왔다. 산책인 줄 알았는데 차를 타고 갔다. 어디로 가는지 몰랐지만 해피는 즐거웠다. 어딘지 모를 곳에서 언니는 해피만 내려놨다. 해피는 기다렸지만 언니는 내리지 않고 가버렸다.
해피는 멀어지는 차를 따라 뛰어갔지만 이내 작은 점이 되어 사라졌다. 언니의 냄새가 멀어져 갔다. 해피는 다시 처음 내려졌던 장소에서 기다렸다. 항상 기다리면 언니는 다시 왔다. 그래서 해피는 밤이 되도록 움직이지 않고 기다렸다.
다시 해가 밝아도 언니는 오지 않았다. 해피는 배가 고팠다. 언니가 보고 싶었지만 당장의 본능이 해피를 움직이게 했다. 한참 주변을 헤매던 해피는 멀리서 나는 음식 냄새를 따라 움직였다.
그곳에는 할머니가 있었다.
예전 주인 할머니와 비슷해 보였다. 할머니는 해피를 보자 작은 고깃덩어리를 던져 주었다. 배가 고팠던지라 허겁지겁 주워 먹었다. 몇 번을 더 주워 먹고 마당 한쪽에 자리를 잡고 엎드렸다.
해피는 멀찍이서 할머니를 바라봤다.
할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당을 쓸고 있었다. 가끔 고개를 들어 해피를 보더니 작은 고깃덩어리를 하나 더 던져 주었다.
해피는 처음엔 조심스러웠다.
고기를 먹고 나면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 앉았다.
혹시 또 낯선 곳으로 쫓겨날까 봐 무서웠다.
하지만 할머니는 해피를 쫓아내지 않았다. 마당을 드나들며 밥을 먹고 가는 것을 그냥 두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해피는 점점 마당 가까이에서 머물렀다.
할머니가 문을 열고 나오면 꼬리를 살짝 흔들었다. 할머니는 그런 해피를 보며 "그래, 왔구나." 하고 중얼거렸다.
어느 날 비가 내렸다.
처음엔 조금씩 떨어지던 빗방울이 금세 굵어졌다. 해피는 마당 구석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털이 젖어 몸이 떨렸다. 그때 할머니가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처마 밑을 가리켰다.
해피는 잠시 망설이다가 천천히 그쪽으로 걸어갔다. 처마 밑은 따뜻하고 비를 맞지 않았다. 할머니는 작은 그릇에 밥을 담아 내려놓았다. 해피는 그날 밤, 그 자리에서 잠이 들었다. 그리고 오랜만에 행복한 꿈을 꾸었다.
그날 이후 해피는 그 집을 떠나지 않았다.
아침이면 할머니가 문을 열고 나왔다. 해피는 꼬리를 흔들며 마당을 빙글빙글 돌았다. 할머니는 웃으며 해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할머니의 손길이 참 따뜻했다.
시간이 천천히 흘렀다.
해피는 마당을 지키는 개가 되었다. 낯선 사람이 오면 먼저 짖었고, 밤에는 문 앞에 몸을 둥글게 말고 잠을 잤다. 할머니가 밭에 나가면 뒤를 졸졸 따라다녔다.
해피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어느 봄날, 해피의 배가 점점 불러왔다. 할머니는 그 모습을 보고 작은 상자를 가져와 수건을 깔아주었다.
며칠 뒤, 해피는 조용한 밤에 새끼들을 낳았다. 작은 몸들이 꿈틀거리며 해피의 품에 파고들었다. 해피는 조심스럽게 새끼들을 핥아 주었다.
할머니는 아침이 되자 새끼들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해피는 새끼들 사이에 몸을 둥글게 말았다. 작은 숨소리들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마당에서는 할머니가 천천히 빗자루질을 하고 있었다. 햇빛이 마당에 가득 내려앉았다.
해피는 눈을 가늘게 떴다. 예전에는 누군가를 기다리며 하루를 보냈다.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여기가 해피의 집이었다.
그날 밤, 해피는 오랜만에 깊이 잠들었다.
아주 따뜻했다. 몸이 점점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멀리서 할머니의 따뜻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해피는 그 소리를 따라 천천히 걸어갔다.
그곳에는 따뜻한 마당이 있었고, 햇빛이 가득했고,
작은 몸들이 해피 곁에서 숨을 쉬고 있었다.
해피는 더 이상 배가 고프지 않았다. 더 이상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다음 날 아침, 사람들이 길가에 멈춰 섰다.
작은 갈색 개 한 마리가 몸을 둥글게 말고 누워 있었다. 밤새 내린 비에 몸은 젖어 있었지만 마치 잠든 것처럼, 아주 편안한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