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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os 지니 May 02. 2017

공장이 문을 닫는 것을 보고 ‘자본이로군!’

아이작 줄리언(Isaac Julien) 개인전 : PLAY TIME


“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아, 이게 중력이로군!」라고 말하는 것처럼
공장이 문을 닫는 것을 보고「아, 이게 자본이로군!」


자본은 보이지 않으며 잡을 수 없고 만질 수도 없다는 데이비드 하비(David Harvey)는 “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중력을 알 수 있는 것처럼, 공장이 문을 닫는 것을 보고 자본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강남구 학동역 근처에 소재한 플랫폼-엘 컨템포러리 아트센터에서 아이작 줄리언(Isaac Julien)의 설치작품 (플레이타임)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마감 하루를 앞두고 나는 이곳 전시장을 찾았다. 금기시되어오던 마르크스의 자본을 주제로 한 영상물이 자본의 심장으로 상징되는 강남구 한복판에서 상영되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이를 관람하고 있다는 현실에 감회가 새로웠다.


중앙의 초대형 스크린을 중심으로 아치형 벽면을 따라 양쪽으로 둥글게 배치된 7 스크린의 입체감과 함께 복합적 사운드로 포위된 채, 시작한 표제작 <PLAY TIME>은 생생한 자본의 현장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가운데 긴 직사각형의 대형 채널과 그 옆으로 그보다 작은 채널들로 둘러싸인 동시 다채널 공간을 연출함으로써 우리의 시선과 귀는 자연스럽게 좌우를 따라 움직이면서 한층 몰입하게 된다.



   플레이타임(전체 3부) 영상은 무엇을 말하고 있었나


< 1부 >  PLAYTIME, 2014


총 러닝 타임 70분의 이 영화는 런던의 헤지펀드 매니저, 두바이의 필리핀 출신 가정부,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의 작가이자 부동산 개발업자 등의 이야기를 통해 전 세계적인 자본의 흐름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실체를 볼 수 없는 자본의 현상은 미술 작품 경매 장면에 이르러서 더욱 적나라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도박과도 같은 자본의 행태를 보여주는 헤지펀드, 무리한 대출로 실업자가 된 채 들녘을 바라보면서 독백처럼 자신의 삶을 복기하는 듯한 레이캬비크의 파산 작가, 사막 위에 세워진 신기루 같은 두바이 대도시로 생존을 위해 이주한 필리핀 가정부, 눈시울이 벌겋게 상기된 채 경매시장을 역설하는 경매사(국제적 명성의 경매사 쉬몬 드 퓨리가 직접 출연)와 그를 인터뷰하는 리포터 역할의 장만옥(화양연화 출연)이 등장하여 단순히 경제활동에서만이 아니라 미술 분야까지도 자본의 탐욕의 대상으로서 예외가 아님을 실감 나게 이끌어간다.

출처 : 플랫폼-엘


< 2부 >  KAPITAL, 2013


1부에서 숨 가쁘게 돌아가는 자본의 현장으로 우리를 이끌어 갔다면, 2부에서는 보다 작은 두 개의 스크린 앞으로 바짝 다가앉게 함으로써 자본이라는 주제의 담론으로 우리를 이끌어 동참하게 한다. 세계적인 명성의 데이비드 하비의 등장으로 ‘자본은 왜 포착되기 어려운가?’라는 질문과 함께 시작하는 자본에 대한 담론을 눈앞에서 보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하는데 바로 아이작 줄리언의 두 번째 작품인 KAPITAL이다.


영국의 유명한 사상가 데이비드 하비와 스튜어트 홀(문화연구 이론가)이 2013년 런던의 헤이워드 미술관에서 청중과 벌인 ‘자본론’ 공개 대담을 담은 다큐영상으로 비물질적이면서도 또한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자본의 구체적 힘을 생생하게 느끼면서 그 실체를 이해하게 한다. 대담 중간중간 등장하는 자본의 상징인 증권거래소 전광판의 급격한 화면 변화는 시각적 효과와 함께 자본의 속성을 극대화한다.

출처 : 플랫폼-엘


< 3부 >  THE LEOPARD, 2017


3부에서는 다시 전면 전체를 커버하는 대형 스크린이 나타나는데, 마치 스크린을 향한 이외의 시선을 불허하는 듯 꽉 찬 영상공간과 1:1로 마주하게 되는 분위기의 단채널 영상을 만난다. 스크린 반대편 벽면 끝 바닥에 놓인 방석에 등을 기대고 털썩 주저앉아 마주한 대형 스크린의 수평선 위치와 시선을 맞추면, 작은 보트에 의지한 채 북아프리카에서 지중해를 건너며 생과 사를 오가는 위험천만한 난민들의 영상을 만나게 된다. 아름다운 해변가의 행복한 사람들의 모습이 이들 난민들 모습과 번갈아 대조되면서 처절함이라는 복잡한 상황을 경험하게 되지만, 곧 이들은 서로 무관한 관계라는 듯 소외되고 잊혀버린다.


보트피플, 생사를 넘나드는 여정의 순간들이 픽션과 다큐멘터리 그리고 판타지와 현실이 혼재된 영상으로 생생하게 전개되는 동안, 어느덧 많은 시신들이 해변가로 흘러들어와 즐비하게 흔적을 남기고, 살아난 자는 죽은 자의 옷가지 등 잔해들을 말없이 바라볼 뿐이다.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의 화려한 바로크 풍의 궁전을 배경으로 촬영한 이 작품은 동일한 장소에서 영화를 촬영한 이탈리아의 영화감독 루키노 비스콘티의 <The Leopard>에서 제목을 빌려왔다고 한다.


화려하게 겉모습을 치장한 바로크 풍의 그 호화로운 궁전을 바라보며 기쁨을 넘어 환희의 미소를 짓는 한 여성의 모습이 클로즈업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희생된 수많은 인간 군상들의 존재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채 눈앞에 드러난 화려한 모습에 그저 황홀해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 격조 높은(?) 궁전에 자신의 품격을 맞추려는 듯한 모습이 소외되어 잊혀져간 난민들의 모습과 함께 머리속에 겹치면서 문득 허망함이 스쳐 지나간다.  

출처 : 플랫폼-엘


   우리는 자본의 존재를 눈치채고 살아가는가


이렇게 1부 <PLAY TIME>이 대형 복합 스크린을 통해 스펙터클한 자본의 이미지를 보여준 <표제부>였다면, 2부 <KAPITAL>은 다소 차분한 분위기로 돌아와 공개 대담을 통해 자본의 속성을 정리하고 풀어가는 과정으로 이어간다. 다시 3부 <THE LEOPARD>에서는 대형 화면과 시선을 맞춘 채 생명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현장과 마주하게 되는데, 생사의 기로에서의 처절함이 거대한 글로벌 자본주의 사회에서 마치 보이지 않는 작은 몸부림일 뿐이라는 듯 그저 격리된 채 무심하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오늘 우리가 이루어낸 거대한 가치라며 감탄하는 도시의 건축물들과 문화적 산물들 곳곳에 스며든 자본의 그림자, 심지어는 인간의 사상과 감정이 녹아든 예술의 세계까지 철저한 돈의 가치로 점령해버린 자본의 집요하고도 냉정한 속성을 보면서 문득 인간 존재 역시 자본의 쇠사슬 속 한 부분일 뿐임을 잊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빽빽한 고층건물 사이사이 잘 구획된 도로를 따라 자동차들이 물 흐르듯 흘러가고 있는 모습의 야경은 마치 전자회로의 흐름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그 거대한 자본 시스템을 고층건물 창밖으로 바라보는 화자들은 그 자본에 경탄하기도(펀드매니저, 경매사), 좌절하기도(가정부, 작가이자 부동산 개발업자)하지만, 그들 역시 이 거대한 폐쇄회로의 작은 부품일 뿐임을 객관적 시각으로 일깨워준다. ‘자본이 우리를 지배하는 수학적 알고리즘’이라고 아이작 줄리언이 말했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어떻게 자본에 이끌려가고 있는가 (Play Time의 사람들)


 01  융자본의 중심가 런던의 헤지펀드 매니저


아직 아무런 집기도 들어오기 전의 자본이 흘러들어올 곳이기도 한 빈 공간. 그곳에서 옥스퍼드, 캠브리지 대학 등을 나온 최고 엘리트들이 헤지펀드 매니저로서 일종의 도박처럼 느껴지는 헤지펀드 전략을 구사한다. 이들이 ‘낙수효과’ 등을 이야기하는 대화 장면은 거대 자본 위주의 정책을 이야기할 때 우리 사회에서도 자주 목격되곤 하는 그림이기도 하다.


수많은 작은 상자들로 나뉘어진 듯한 창틀과 네모난 유리창을 통해 바쁘게 일하는 사람들이 보이는 외부에서 바라본 건물 이미지는 자본이 만들어낸 전형적인 상징처럼 느껴진다. 거대한 컴퓨터들 사이를 걸으며 ‘자본 없는 자본’ ‘실체 없는 자본’을 이야기하는 헤지펀드 매니저의 모습은 마치 실물경제와 무관하게 부풀려져 숫자로만 존재하는 자본의 본질을 중얼거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체 없는 그 자본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가고 있는 분명한 객관적 실체임을 그는 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02  생존을 위해 두바이로 이전한 필리핀 가정부


“영화에서의 필리핀 노동자는 보이지 않는 노동자이고, 그녀의 이주는 보이지 않는 자본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도 전쟁이나 가난 때문에 이주자들이 많은데 이것도 자본의 보이지 않은 손에 이끌려 가는 것이다. 두바이의 비가시적인 존재가 그것을 보여준다.” 어느 인터뷰에서 아이작 줄리언이 한 말이다.


이주의 역사는 어찌 보면 자본의 확대와 함께 거스를 수 없는 삶의 방식을 따라가는 행위이다. 자본은 보다 싼 노동력을 찾아 나서고 점차 자본으로 확대되어 가는 후진국들의 사람들은 자본의 프레임에서 살아가기 위해 자본이 필요로 하는 장소로 이동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자본이 바라보는 노동력이란 다른 생산시설처럼 값을 지불한 물질적 가치일 뿐이면서 제한된 시간 안에서 최대한 효율적으로 많은 결과를 창출해낼 대상일 뿐 인간의 가치는 언제나 배제되어 왔다. 고용주의 비인간적인 처우와 고통스러운 노동조건을 눈물로 증언하고 있는 필리핀 가정부의 삶을 보면서, 우리가 그토록 숭고한 것이라고 외쳐온 노동이라는 것이 자본의 그늘에서만 가능한 생존의 절박한 수단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출처 : 플랫폼-엘


03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의 파산자


“아이슬란드 경제 위기에서 내가 보여주고 싶은 것은 자본은 계속 움직인다는 것이다. 자본이 경제위기를 만들고 그것이 우리를 덮치고 더욱 심해질 것인데, 이것이 자본이 하는 방식이다. 이는 플레이 타임을 보는 방식이다.”라고 아이작 줄리언은 어느 인터뷰에서 말한다.


아이슬란드의 얼음 화산지대를 배경으로, 무리한 대출로 파산한 한 남자가 비통에 젖어 자신의 과거를 복기하듯 독백하는 장면이 나온다. 어렸을 적 그의 희망은 커다란 산업 공간 같은 건물을 갖는 것이었다. “수도 레이캬비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집을 짓기 위해 아이슬란드의 은행을 찾았더니 그 땅을 담보로 저에게 아무런 규제 없이 대출을 해주더군요. 나머지 대출은 건물이 지어지면 해주겠다고 합니다.” 그는 정성스레 집을 지었고, 얼마 안 되어 2008년 금융위기와 함께 자신이 지은 그 집은 금융자본의 손에 넘어가 있었다. 세계 금융위기는 그에게 파산을 안겼으며, 가족들도 다 떠나버린 채 그에게 남은 것은 텅 빈 집뿐이었다.


‘산업 공간 같은 집’은 하비가 말한 자본의 상징인 '공장’을 떠올리게 하는데 그 남자가 어려서부터 이유도 모른 채 동경했던 것은 다름 아닌 바로 그 자본의 그림자였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의 텅 빈 집은 문을 닫은 공장처럼 자본의 존재를 확인시켜주고 있는 듯했다. 어린 시절 그에게 익숙해져 버린 자본의 모습이 어른이 되어서 흉측한 본래 모습으로 그에게 되돌아와 자본을 각인시켜준 것처럼 말이다.


거대 금융자본들이 자주 구사하는 전략이란, 경기를 무제한으로 부양하여 키워놓은 뒤 이를 파산으로 유도하여 저평가된 자산을 마구 사들이는 전형적인 방식이다. 한 남자가 무리한 대출로 땅을 구입하여 집을 지어 가치가 올라갔지만, 호황기의 무리한 대출이 파산으로 이어지면서 그 집은 그 상태 그대로 자본가 손에 들어가게 되는 모습, 이는 나라마다 겪고 있는 IMF 금융위기의 축소판과도 같았다.



04  자본의 극치는 미술 경매시장에서도


상승하는 숫자를 부르는 미술품 경매사의 호가 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하얀 계단을 올라 도착하는 곳은 미술의 전시공간인 ‘화이트 큐브’라는 곳이다. 전시 벽면을 흰색으로 칠하여 전시될 작품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전시공간을 상징하는데, 영상에서는 미술 경매시장에서 호가 경매를 위한 상징으로 표현하고 있는 듯했다.


2008년 세계 금융시장이 붕괴된 후에도 미술시장은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해 왔다고 말하는 경매사는 자신의 어린아이조차도 자신이 좋아하는 비슷한 장난감들을 수집하려 한다면서 희소한 것을 소유하려는 것은 인간의 심리이며 이러한 심리를 기반으로 미술 시장이 거대 자본화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가 미술 경매시장에 대해 열변하는 모습은 한 인간이 자본의 손발이 되어 마치 상품을 생산하는 생산시설인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경매사의 호가 소리가 잦아들면서 마무리와 함께 내려치는 망치 소리에 대해 리포터(장만옥)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망치는 문장에서의 구두점과 같다. ~~ 그것이 끝났을 때 충분히 높은 가격으로 입찰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벌이 된다.” 오직 한 사람에게만 기회가 주어지고 그 기회는 더 큰 기회를 만드는 기반이 된다는 암시와도 같았다. 어디에도 경제를 지탱하는 실물 개념은 없었고 오직 투기와 도박으로 무한히 팽창해가는 자본의 위험천만한 게임을 보는 듯했다. 그리고 그 놀음에서 인간이 어떻게 소외되어 가는지는 이 전시회 전체에서 말해주고 있었다.



   자본. 그리고. 인간


그 흐름이 멈추는 순간 죽음을 맞는 것이 자본의 속성이라는 하비의 말처럼 자본은 끝없는 유통 과정을 통해 무한 증식을 하게 된다. 물론 그 유통을 위한 생산과정에서 과잉 노동이 사용되고 자본은 이 과잉 노동을 통해 잉여가치를 생산하여 더 큰 자본으로 성장한다.


플레이타임을 보면서 본이 인간에게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지 확실해지는 두 가지 측면이 보였다. 첫째 대다수 사람들은 삶에 필요한 물품을 생산할 생산시설을 가지지 못한 채 거대한 생산자본의 부속품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며, 그 부속품으로 일을 마친 후에 받게 되는 보수(임금)로만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 둘째, 자본만이 소유한 그 생산시설 하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제한된 구조 속에서 인간의 삶의 조건은 갈수록 나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14세기부터 17세기까지 산업혁명을 계기로 노동일 연장을 위한 강제법이 실시된 이후 표준 노동일(한 노동자의 건강이나 수명 등을 고려한)이 제정되기까지의 과정은 몇 세기에 걸친 투쟁의 결실로 나타난다. 당시 잉여 노동에 대한 자본의 갈망은 장시간 노동착취로 구현되면서 그의 노동자인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심하게 파괴하는 수준으로 치닫게 되었는데, 결국 단명, 허약, 어린이의 발육부진, 각종 질병 등으로 나타나고 있었음이 보건국 보고서, 감독관보고서, 아동노동 조사회원회보고서 등 각종 보고서를 통해 실상을 드러냈다.(자본Ⅰ-1, 8장 노동일, 칼 마르크스)


그로부터 200년 이상이 흐른 지금 자본에 구속된 노동 인격은 많이 달라져 있을까. 최근 발생한 tvN 한 인기 프로그램의 20대 PD의 죽음,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망사건 등 장시간 근로로 인해 인간의 기본생활이 무너지는 사례는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한 달에 며칠 출근하지 않는다는(지속되는 철야근무로 퇴근하는 날이 많지 않다는 의미) 어느 IT기 개발자들의 삶을 보면서 자본주의가 시작된 이후 수백 년 동안 노동인권이 과연 획기적으로 변화를 해왔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많이 남는다. 아이작 줄리언이 플레이타임을 제작해 이 시대 사람들과 공유하려고 했다는 점이 그 의문의 여지를 설명하고 있다고나 할까.


* 120분여 동안 상영된 영상물 전체를 기억에 의존해 정리하다 보니 인용문들에 다소 부정확한 부분이 있을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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