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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os 지니 Oct 13. 2017

<총 균 쇠>:
인류가 원하는 것, 생존인가 가치인가


인류 역사에서 발전이라는 개념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한마디로 인간을 중심으로 한 지배 개념의 확대와 강화의 과정이었다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수렵채취의 이동생활에서 정착생활로 접어들게 된 계기 역시 다양한 식물을 내 손 안에서 길들이는 과정인 경작에서 시작한다. 식량과 고기를 취하기가 수월해진 것은 곧 식물, 동물을 길들인 결과였다. 가축화된 동물은 운송수단으로도, 농사짓기 등 동력으로도 이용되었다.


이런 지배능력은 보다 풍요로운 생산을 가능하게 하면서 국가권력을 탄생시키기에 이른다. 막강해진 집중된 힘은 타 대륙으로 이동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면서 동식물의 지배를 넘어 타민족을 지배할 우월한 수단이 되었다. <총 균 쇠>는 이러한 과정을 추적하며 대륙 간 문명의 차이, 민족 간 지배 관계를 규명해가는 흥미진진함을 선사한다. 그러면서 대륙 간 다르게 발전해 온 원인을 인간의 생물학적 차이가 아닌 환경적 차이 때문이라고 결론짓는다. 대륙 간, 지역 간 문명의 차이가 인종 간 두뇌의 차이에서 오는 것인지에 대한 그동안의 논란을  ‘왜 어떤 인종은 타 인종을 지배하거나 멸종시켜올 수 있었는지’에 대한 통찰력 있는 분석을 통해 정리한다. 우열의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책이다.


 착취의 인류 역사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Jared Mason Diamond)가 추적 분석한 인류 역사를 들여다보면 인류가 성취해 낸 발전이라는 가치는 끝없는 착취의 역사요, 착취할 수 있는 능력자의 역사였음을 새삼 확인해준다. 오늘날 우리 사회 일각에서 공들이고 있는 공유의 개념과 가치가 이러한 발전 법칙의 대세를 넘어설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대목이다. 인류의 발전 개념이란 것이 끝없는 지배의 역사로밖에 설명할 수 없는 것이라면 인류가 생존해야만 할 당위성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그러한 발전 법칙을 수용하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 인류의 숙명이라면 그 질문은 거두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숙명이라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긍정하고 살수밖에.’ 라고 말한다면 나는 이 숙명을 전제로 한 인간의 실존 자체를 강하게 부정하고 싶다. 인간이 삶의 터전으로부터 내몰리고 죽어가면서 얼마나 비참하게 자본에게 예속되어 왔는지를 알고서도 숙명과 긍정을 말해야 한다면 말이다. 바로 중세의 농노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전환이 시작되는 15C 이후,  영국을 비롯한 유럽 사회가 치열한 자본주의 경쟁체제로 달려왔던 과정은 혹독함이라는 말로도 다 표현할 수 없었던 가까운 과거 역사이다. 역사는 한 번도 인간들끼리 평등하게 공유하는 삶을 구현한 적이 없었다. 계급사회를 거쳐 우리를 보호해줄 것이라 믿었던 새로운 근대 국가 역시 부(富)의 수준이 절대 권력이 된 이 새로운 지배계급 사회에서 여전히 불평등한 인간 삶을 방치하고 있다. 


1865년 당시 자본주의 중심국이었던 영국에서 ‘공중위생’에 관한 조사 결과를 보고한 사이먼 박사의 주거 상태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을 보면 자본주의 폐해가 어느 정도였는지 그대로 실감 난다.    


“나의 공식적인 관점은 단지 의사로서의 관점일 뿐이지만, 그냥 보통 인간성의 관점에서는 이런 폐해로 인한 다른 측면들도 무시할 수 없다. 이 폐해의 정도가 심해지면 거의 필연적으로 모든 섬세한 관심이 무시되며, 육체와 육체적인 기능이 불결하게 뒤섞이게 되고, 성적인 무지도 드러나게 되는데, 이런 것들은 인간적이라고는 할 수 없는 동물적인 것들이다. 이런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곧 타락을 뜻하며, 이런 타락은 그 폐해가 지속되면서 더욱 심화되어간다. 이런 저주받은 운명 속에서 태어난 아이들에게 그 저주는 곧 파렴치로 이끄는 세계이기도 하다. 이런 환경에 놓인 사람들이 육체적, 도덕적 순결을 본질로 하는 문명의 분위기를 갈망한다는 것은 도저히 바랄 수 없는 것이다.”(자본 1-2)


사람들로 가득 찬, 또는 도대체 사람이 거주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조차 없는 상태라는 점에서 제1위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런던에 대해 헌터 박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두 가지 점에서 확실하다. 첫째, 런던에는 약 20개의 커다란 빈민굴이 있고 각 빈민굴마다 대략 1만 명 정도의 사람이 살고 있는데 그 참상은 지금까지 잉글랜드 어느 지방에서도 본 적 없을 정도로 지독한 것이다. ~ 둘째, 이들 빈민굴의 가옥이 사람들로 가득 차 썩어빠진 상태는 20년 전보다 훨씬 심해졌다. 런던과 뉴캐슬의 수많은 지구들의 생활 상태는 지옥과 같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자본 1-2)


그럼에도 오늘 우리가 여전히 희망을 말하고 있는 이유는 이런 불평등에 끊임없이 저항해온 또 다른 인류의 모습을 여러 차례 목격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오랜 지배의 역사라는 속성은 굳건한 DNA로 자리 잡았을 만도 하지만, 여전히 그러한 불평등에 끊임없이 저항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래서 더욱 놀라운 일이기도 하다. 최근 공유경제(사회적 기업, 협동조합 등), 공유 사회(부탄의 생활공동체, 미국의 브루터호프 마을공동체 등)들도 그러한 시도들이다. 그러나 이들 공동체 사회의 존립 근거는 지배와 수탈의 역사적 산물인 현대 사회의 능력(경제, 사회, 과학기술 등)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그 한계를 가진다.


4차 산업혁명에 대한 유토피아적 환상을 깨야하는 이유도 바로 이 지점이다. 인류사회에서 모두가 평등하고 평화로운 상태로 지속된 적이 한순간도 없었으며, 앞으로도 힘을 가진 그룹이 그 평온함을 지켜만 보고 있지 않을 것이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결국 힘의 논리에 대응하려면 이들 공동체 사회 역시 그 힘의 논리를 무력화할 또 다른 힘을 갖추어야 한다는 얘기다. 과연 그러한 힘의 균형이 가능한 것일까? 설령 가능해진다 하더라도 얼마나 지속할 수 있을까.


 끝없는 경쟁은 당연한 것인가?


살아남는 자가 이기는 자라고 누군가 말한다. 이 말에는 두 가지 함축적 의미가 있다. 하나는, 존재하기 위해서는 이겨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삶의 의미는 살아남는 것 이상이 아니라는 것. 그러나 나는 이 말에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한다. 왜 우린 끝없이 살아남기만 해야 하는가. 이 도박 같은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끝없이 싸워야만 하는 것인가. 


「인사담당자 100명이 밝히는 ‘채용의 법칙’은?」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은 인사담당자들 인터뷰를 읽었을 때 나는 한 마디로 해머로 머리를 맞은 듯 멍한 기분이 들었다. 


“채용이란 것도 결국 시스템의 부품을 뽑기 위해 만들어진 또 하나의 시스템이니까요. 그리고 이 시스템의 목적은 오직 한 가지예요. 바로 떨어뜨리기,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겠어요? 처음 취업준비생이 취업을 하기 위해 맞이해야 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는 거예요. 바로 시스템, 이 시스템의 목적을 떨어뜨리기라면 처음 취업준비생이 해야 하는 준비는 붙기 위한 준비가 아니에요. 떨어지지 않기 위한 준비인 거죠.’


무슨 씻나락 까먹는 소린가 했다. 말장난이 너무 심한 것 아닌가 싶기도 했고. 기업이 내심 이런 생각을 하고 있더라도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인간 중심 경영'이니 '인간존중'이니 인간을 위한 조직인 듯 포장이라도 했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너희들은 기업의 소모품일 뿐이고 경쟁에서 이기지 않으면 그 소모품으로도 쓸모가 없다.'는 뉘앙스의 말을 대놓고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자본가의 입이 아닌 자본가가 고용한 고용인의 입을 통해서 말이다. 


인간사회라는 것, 국가라는 것, 경제라는 것, 기업이라는 것, 이 모든 기반은 도대체 왜 필요했던 것인가부터 차분히 돌아볼 때인 것 같다. 바로 인간이 존재했고 그 인간들의 필요로 생긴 조직이요 제도요 기반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왜 우리 인간은 항상 이런 본질을 망각한 채 역으로 인간을 위해 존재해야 할 이 조직과 기반의 부속품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것일까. 나아가 그 부속품에서 제거당하지 않기 위해 전 인생을 바쳐가며 노력하고도 불안과 강박에 시달려야 하는 것인가. 


 기술혁신을 위한 경쟁의 가치는 인류 행복과 반비례했다


<총균쇠>에서 저자는 적당한 경쟁관계가 형성되었던 유럽의 환경 조건이 중국을 앞서게 한 원인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유럽이 중국을 능가할 수 있었던 배후에 대부분 역사가들이 제시한 직접적인 요소들(예를 들면, 중국의 유교 대 유럽의 유대 그리스도의 관습, 서구 과학의 발생, 유럽의 중상주의와 자본주의의 발생, 영국의 석탄 보유와 결부된 산림 벌채 등)보다는 좀 더 궁극적인 무언가가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직접적인 요소들의 배후에 다름 아닌「최적 분열법칙」이 있다고 말한다. 적당히 분열된 유럽은 박해받는 개혁자에게 피난처와 그 외의 지원책을 제공하고 각 나라 사이의 경쟁을 촉진함으로써 기술, 과학, 자본주의의 진보를 육성했지만, 통합된 중국은 그러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 ~ 그 분열이 최적인지 아닌지는 당시에 적용된 최적의 기준에 따라 변할 것이다. 기술혁신을 위해서는 최적 상태의 정치적 분열이라 할지라도 경제적 생산성, 정치적 안정성, 인간 행복에는 최적이 아닐지도 모른다.’’라고. 즉 기술혁신을 위해 최적의 상태였다 해도 인간을 만족하고 행복하게 한 환경이었는지는 별개라는 말이다.


그렇다. 그 기술혁신의 환경에서 인간은 불행할 수도 있었다는 전제, 그렇다면 그 기술혁신은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가. 최적 상태의 정치적 분열로 기술혁신을 초래했고 중국을 앞서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문제의 그 경쟁체제, 유럽에서는 15세기 이후부터 자본주의라는 극단적 경쟁체제로 나타났고 광적일 정도의 엄청난 노동자 착취가 있었다. 반면 덜 경쟁적이었던 동양 사회를 보면 역시 계급사회이긴 했지만 그 정도로 광범위하고도 집요하게 수탈하는 수준은 아니었다는 점, 이 부분을 우리는 주목해야 할 것이다. 과연 중국사회가 통합의 사회였기 때문에 뒤쳐진 것이고 통합된 국가였으므로 이들의 발전이 저해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첫 번째 의문>이 드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 첫 번째 의문에 대해 다시 세부적인 두 가지 질문을 하고 싶다. 첫째, 인류사회의 발전이라는 것이 경제적, 물질적 혁신의 결과만을 지칭하는 것인가, 아니면 생존의 질적 측면을 포함하는 것인가. 둘째, 기나긴 인류 역사의 과정에서 수세기 동안 앞서 왔다는 상황만으로 전체가 혁신의 결과였다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인가. 뒤쳐졌다고 판단되는 당시의 환경조건이 오히려 향후의 혁신을 이루기에 더 적합했던 적은 없었던가 하는 것이다.


<두 번째 의문>은 ‘그렇다면 우리 인류가 추구해야 할 가치는 무엇인가’로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된다. 저자가 추적해온 역사적 논리들이 향후의 인류 역사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변할 수 없는 법칙이라면, 인류가 어떤 가치를 추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며, 인류는 무엇을 추구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여전히 “경쟁의 원리와 이기주의 심리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속성이고 이런 원리에서 이기는 문명만이 살아남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얼른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l  정치적 분열로 인한 경쟁은 그만큼의 착취도 동반해왔다


저자는 정치적 분열은 경쟁을 위한 건설적인 토론의 장을 제공했다는 점 외에도 좀 더 복합적인 효과를 낳았다면서, 예를 들어 경쟁은 건설적인 만큼 파괴적이라는 사실(제1,2차 세계 대전을 생각해보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경쟁의 부정적 효과가 저자가 얘기하는 것처럼 1,2차 세계 대전만 있었던 것일까?


왜 이 부정적 부분에서, 기술 혁신으로 촉발된 산업혁명과 함께 급속히 이행된 자본주의 경쟁체제를 빼고 얘기한 것일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토지에서 쫓겨나고 굶주렸으며 수명을 다하지 못한 채 사망하고, 영양결핍에 시달렸는지, 심지어 4살 어린이까지 노동에 투입되었던 초기 자본주의의 파괴적 환경은 왜 지적하지 않고 지나친 것일까. 차지 농업 시기는 농지를 빼앗는 과정에서 비위생적인 오두막 공간으로 내몰린 사람들이 남녀노소 구분 없이 섞여 자는 열악한 환경에서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사고 자체를 할 수 없었던 암흑의 시대였다. 그 착취의 역사, 암흑의 시대를 거쳐 자본주의는 무한 경쟁의 경지에 도달했다. 그런데 이 자본주의 경쟁체제를 그저 인류 전반에 ‘부’를 안겨준 개념으로 타 대륙을 능가하게 만든 요인이라고 보았던 것일까?

 

오늘날 자본이 저지르고 있는 횡포의 전형인 젠트리피케이션의 개념도 그 초기 자본주의 시기에 이미 형성된 것이었다. 토지에서 쫓겨난 농민들(귀족들의 거대한 놀이공원인 사슴 수렵장으로 만들기 위해)이 바닷가 등 척박한 토지로까지 쫓겨나자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 척박한 땅을 개발하기 시작하자 차지 농업가들이 그마저도 차지로 착취해갔던 오랜 역사적 개념인 것이다.


l  경쟁은 지속되어야 하는 가치인가?


“분열 자체는 획일적인 것이 아니라 다면적인 개념이다. 혁신에 미치는 분열의 영향은 자유와 같은 요소들에 의지한다. 자유로운 사상과 인간은 파편화된 그들이 각각 별개의 것이거나 단지 새로운 복제한 것에 불과하든 간에 그 파편 사이의 경계를 가로지를 수 있다.”라고 그는 말한다

여기서 다시 드는 의문점 두 가지. 그 간의 긴 역사적 사실의 인과관계(즉 어느 종족은 살아남게 되었고 또는 타민족에 비해 우월한 지위를 갖게 되었는지)가 결국 경쟁을 통한 혁신의 문제였다는 점까지는 논리상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향후에도 인간은 이 논리 위에서 경쟁과 혁신을 지속해야만 하는가의 문제이다. 더구나 1,2차 세계대전, 자본주의의 경험과 같이 인간을 피폐하게 만들었던 그 경쟁을 말이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는 경쟁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서로 경쟁하지 않는 느슨한 경제공동체들이 생겨나고 있다. 아니 경제공동체가 아니라 삶의 공동체가 맞을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이미 인간 삶의 전반을 지배하는 기반이 되긴 했지만, 어찌 보면 경제는 인간 삶에 필요한 다양한 기능 중 한 부분일 뿐이기 때문이다.


물론 인류사회에서 경쟁체제에 뒤떨어진 원주민들은 몰살되거나 흡수되거나 멸종되어 왔다. 결국 살아남은 자가 승리한 것이었고 인류의 진실이 되어버렸다.(그 화려했던 잉카제국 마지막 황제 알타우알파의 사망에서 보았듯이) 이 지점에서 우리는 잠시 생각하고 넘어가야 할 두 번째 의문과 마주하게 된다. '과연 인류가 끊임없이 진화하고 발전해간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왜 우린 경쟁하고, 서로 죽이고, 지배하고 약탈하는 끊임없는 과정을 삶이라고 규정해야만 할까? 모두가 힘든 이런 과정을(현재의 자본주의도 마찬가지) 왜 우리 모두는 멈출 수 없는 것일까? 이쯤에서 그 발전이라는 것을 멈추어도 크게 불편할 것이 없지 않은가? 이젠 공존의 문제로 돌아볼 수는 없는 것일까?


사실 협동조합이나 공동체 사회 역시 이 경쟁체제의 단위적 산물인 국가나 사회가 어느 정도 방패 역할을 하고 있어 가능한 것이다. 국가라는 방패가 있어 이 지구촌의 전쟁 위협, 핵 위험 등 거시적 상호 위협에 직접 맞설 필요가 없는 것이고 지역단위의 이런 움직임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이런 공동체 사회의 움직임이 지속 가능할 수 있는 것인지, 국가나 사회가 위험해지면 함께 위험해지는 것이 아닌지는 너무나도 분명해진다. 그렇다면 경쟁이 아닌 새로운 가치를 향한 미래사회는 영 불가능한 것인가?


저자는 한 발 나아가 글로벌 컨설팅 회사 맥킨지가 작성한 보고서에서 추출한 결론을 토대로 독일, 일본, 미국 기업들의 조직 구조 유형과 혁신의 과정을 예로 들었다. 그리고는 ‘그러한 과정들이 단체 조직에 관한 일반적 원리를 추출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시사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만약 당신의 목표가 혁신과 경쟁의 가능성이라면 당신은 과도한 통합이나 개별화를 원치 않을 것이다”라며 이런 적당한 경쟁논리의 긍정적 근거를 오늘날 기업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이 경쟁체제가 내포하고 있는 분명한 것은, 누군가는 도태되고, 상대적 빈곤과 지배를 받게 되는 끝없는 반복의 과정일 것인데 말이다. 인류사회의 발전의 태양이 생물학적인 요인이 아닌 지리적 환경에 의한다는 그의 지적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환경 요인 결정론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막연했던 추측을 속 시원히 입증해 주었으니까. 그러나 그러한 인류발전 경향을 오늘날 기업과 조직에 적용해보려는 가정은 또 무엇인가 의아했다. 왜냐하면 그 발전과정에서 누군가는 도륙당했고 핍박받거나 멸종되어갔던 그런 법칙이 지금까지 지배해 왔으며 앞으로도 그 논리는 적용될 것이니 앞서 그 법칙을 이해하고 활용한다면 누군가는 또 다른 누군가를 지배할 수 있을 것이라는 논리이기 때문이다.


아마 역사 연구도 하나의 과학이라고 생각하는 저자의 생각, 즉 특정한 조건이 충족되면 동일한 변수에 대한 결과는 동일하게 나타난다는 과학적 법칙이 적용될 수 있다는 강박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자. 경쟁의 의미나 경쟁하려는 의도는 다름 아닌 상대방과의 상대적인 ‘차이’를 유발하려는 목적성 행동이다. 이런 상대적인 차이가 발생하지 않는다면(즉, 모든 개인이나 모든 조직이 똑같이 경쟁하고 혁신한다면) 이미 그 사회는 혁신하는 사회가 아닌 일상적인 사회일 뿐이다. 결국 혁신의 의미는 어떤 이상적인 의미가 아니라 상대방을 이긴다는 상대적 우위의 의미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결국 이 세상 전체를 치열한 경쟁체제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의미 이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인류를 지배해 왔던 발전 법칙을 영원히 바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일까? 그 발전 법칙이 숙명이라면 인간이 정신세계를 추구하고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시도는 얼마나 무의미하고 어리석은 행위인 것인가.


지금까지 인류 역사의 발전 과정의 규명, 그 방대한 흐름에 대한 <총 균 쇠>의 대단한 탐구과정에 가슴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한 흐름과 결과를 이해함으로써 인류, 인종에 대한 편견을 깰 수 있었고, 각자의 몫이 되겠지만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생각하게 했으니까. 


그런데 저자 스스로도 예상치 못했던 세 번째 확장이었다는 <3부>에서 뜬금없이 기업들 얘기를 하며 기업이라는 조직이 운영되려면 어떻게 조직, 운영해야 하는지에 대해 제시하려 했다는 점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우리가 과거를 들여다보려는 것은 미래도 과거대로 답습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좀 더 다른 모습으로 가고자 함이 아닐까. 자본주의가 인류의 삶의 근간이 되면서 이를 일찍이 도입했던 나라들이 늦게 도입했던 나라들을 앞지를 수 있었던 중요한 사례였음을 말하고 있는 저자에게 질문하고 싶다. 잘 알다시피 15세기 이후 유럽에서 시작한 자본주의는 지독한 인간성 파괴를 기반으로 성장한 물질만능주의적 가치였는데 이를 과연 앞서간 문명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로 인해 중국이 한 때 서구 사회에 뒤쳐진 것이었음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앞서간다는 것, 그래서 결국 인류가 발전해간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자본주의를 일찍이 도입한 나라들이 타 대륙을 식민지로 삼아 수탈해간 역사는 눈을 뜨고 볼 수 없었던 약탈의 역사였다. 어찌 보면 우리나라를 포함한 자본주의 후발국들은(다른 모든 부작용은 논외로 하더라도) 초기 자본주의의 지독한 기간이 생략된 채 어느 정도 완성된 자본주의를 받아들였기에 초기 자본주의의 혹독함을 피해갈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과연 이 기간을, 그리고 지금의 극단적인 양극화 사회를 발전된 문명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살아남았으니 문명이라는 것인가. 그렇다면 과연 문명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단지 타민족을 딛고 일어서 생존을 쟁취해내는 그것이 문명이라는 것인가. 인류에게 의미 있는 유일한 가치는 경쟁에서 살아남는다는 것, 단지 그것뿐이란 것인가.


l  과거를 입증하는 미래가 아닌 새로운 가설을 실현하는 미래이면 어떨까?


저자는 이러한 논리를 현대 기업에 적용하려고 했다. 오랜 인류 역사에 대한 그의 통찰력을 따라갔던 숨 가빴던 여정이 한순간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과연 그가 말했듯이 역사도 하나의 사회과학인만큼 미래사회에도 논증이 가능한 것이라 생각한 때문이었을까?


그는 적절한 분열에 의한 경쟁관계가 혁신을 가능하게 했고 유럽사회의 그런 환경이 중국을 앞서게 한 요인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반대로, 혹시 중국이 통일된 국가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 그리고 유교라는 독특한 정신세계를 이룩했던 것이, 그래서 중국 역시 계급사회의 기간이었음에도(인간의 수탈이 비참한 모습을 띠긴 했지만) 같은 시기 유럽에서의 인간 삶보다는 조금은 나았던 원인은 아니었을까. 물론 어떤 환경이 더 바람직한 것이었는가를 가려내고자 함은 아니다.


인간 역사가 과학이나 물리학과 다른 부분은 바로 가치라는 개념을 끊임없이 존속시켜 공유해왔고, ‘인간적’이라는 의미를 실현하기 위해 항상 공존의 의미를 부여하려 애써왔던 부분 아니었을까. 게다가 저자의 생각처럼 역사의 발전 법칙, 인류의 생존법칙이 지리적인 환경 조건에 따라 달랐다면, 앞으로의 사회는(이미 지리적 요건이 더 이상 변수가 되지 않을 미래 사회는) 물리적 환경이 아닌 또 다른 환경이 지배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가정일 뿐이다. 미래는 과거를 답습하는 입증의 시대가 아닌 새로운 가설, 가정의 세계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분열적 상태가 미래에도 적용될 발전 법칙이라고 누가 단언할 수 있겠는가. 중국이 대체로 통합의 시대를 거쳤지만 다양한 학문의 세계를 발전시켜왔던 또 다른 가치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당연히 자본주의를 발전시켜 왔던 유럽 사회는 이를 세계에 전파시켜 한 시대를 대표하는 절대적인 가치로 만들어버렸으니 근대사회라는 일정한 기간 내에서는 중국이 유럽에 뒤쳐진 것이라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물질적 가치가 미래사회에도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될는지는 단언하기 어렵다. 과거의 발전 법칙이 미래에도 여전히 유효할 것이라는 단정은 이르다고 생각되는 부분이다. 더구나 인간에게 지독히 가혹하게 작용했던 그런 법칙은 더욱 그렇다. 그런 경쟁의 법칙을(자본주의에서 핵심적 존재는 기업, 자본) 미래의 기업 조직에 적용해보려 했다는 점에서, 그의 연구대상이었던 과거 13000년간 인류사의 흐름을 너무 단순 논리화한 것은 아니었는지 아쉬움이 많았다.    


“~ 간단히 말해서, 과학 분야 중에서 역사가 그리 중요하지 않고 작용하는 변수들도 소수에 지나지 않은 분야의 문제들을 이해하는 것보다 인류사를 이해하는 것이 훨씬 어렵다는 점은 시인한다. 그러나 몇몇 분야에서는 이미 역사적인 문제들을 분석하는 데 효과적인 방법론들을 속속 얻어냈다. 그리하여 공룡, 성운, 빙하 따위의 역사는 오늘날 일반적으로 인문학보다 과학에 더 가까운 분야라는 인정을 받고 있다.”    


“~ 따라서 나는 인간 사회에 대한 역사적 연구도 공룡에 대한 연구에 못지않게 과학적일 수 있음을, 그리고 그것은 어떤 일들이 현대 세계를 형성했고 또 어떤 일들이 우리의 미래를 형성하게 될 것인지를 가르쳐줌으로써 오늘날의 우리 사회에도 보탬이 될 것임을 낙관하고 있다.”    


“총 균 쇠에서 다룬 문제들을 확장시키면 세계 경제학의 중심 문제 중 하나에 속하게 된다. 왜 미국이나 스위스 같은 나라는 부유한데 파라과이나 말리 같은 나라는 가난한가. 라는 질문은 경제학 교수들이 해결해야 할 고용에 관한 이론 중 자극적인 질문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정책적 시사점이기도 하다. 만약 우리가 그 답을 알아낼 수 있다면 빈곤한 나라들은 그들을 가난하게 하는 요소를 바꾸고 부유한 나라로 만드는 조건을 채택하는 데 집중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주장하는 위 글에서 ‘빈곤한 나라들의 가난하게 하는 요소’ 안에 얼마나 많은 다른 요소들이 숨어 있는지(여전히 강대국들의 보이지 않는 약탈이 작용하고 힘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는 현실) 그는 감안한 것인지 궁금했다. 그가 여전히 내부의 문제 즉, 내부의 혁신 부족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확실한 답 하나는 그러한 경제적 불균등이 부분적으로 인간 제도의 차이에서 기인한다는 점이다. 즉 효과적인 법률 체계와 계약 집행, 사유 재산권의 보호, 부패의 부재, 낮은 암살 빈도, 무역과 자본 흐름의 개방성, 투자를 위한 장려 등이다. ~ 좋은 제도를 둘러싼 관점에 대한 비평은 두 가지 주요 유형이 있다 하나는 좋은 제도 외에도 공중위생이나 농업 생산성에 영향을 끼칠 토양과 기후적 제한과 환경적 민감성과 같은 다른 직접적 가변성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 두 번째 유형은 좋은 제도의 기원과 관계가 있다. ~ 그런데 좋은 제도란 어느 곳에라도 나타날 수 있는 임의의 변수가 아니라 지리에 근거한 근본적 원인에서 출발해, 제도를 형성할 직접적인 의존 변수들끼리 긴 역사적 연결 고리 속에서 발생해 온 것”이라며 만약 우리가 현재 좋은 제도가 결여된 나라에 빨리 그것을 만들어주려 한다면 그 고리를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고 말한다. 


그러면서 “~ 좀 더 빨리 그 사슬로 전진하도록 개발도상국을 돕기 위해 풀어야 할 중요한 문제는 도시 사회와 농업의 오랜 역사로부터 현대의 경제적 발전에 이르는 상세한 인과율의 사슬을 이해하는 일이다. 곧 <총 균 쇠>의 주제는 고대 세계를 이끈 원동력뿐만 아니라 현대 세계의 연구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가 과거 인류 역사에서 차용하려는 원리는 다름 아닌 경쟁의 문제이다. 그리고 그가 비교한 국가의 대상은 지금보다 물질적으로 잘 사는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그런데 그 ‘지금보다 잘 사는’의 기준은 ‘부유한 나라’와의 상대적 의미의 개념이다. 결국 나라들은 끝없이 상대보다 잘 살기 위해 경쟁할 것이고 영원히 평온하게 잘 사는 순간은 오지 않을 것이라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여전히 우리 앞에는 살아남아야 하는 생존의 가치가 있고 그 가치는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임에 틀림이 없다. 그리고 우리가 생존해야 하는 ‘이유’까지는 철학적 가치이므로 인류학에서 다룰 문제는 아닐 것이다.  ‘살아서 어떤 가치를 지켜내야 할지, 지금까지와 다르게 미래에는 무엇을 고민할 것인지’, 적어도 이 책에서 그 부분을 언급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은 것이었다면, 기업에 혁신을 가능하게 하는 기준(?) 같은 언급 역시 부적절했다는 것이다. 


역사는 실존했던 사실이다. 그 역사성에 과학적 가치를 부여하여 일정한 발전 법칙을 찾아내려는 노력은 훌륭한 일이지만, 그가 탐구해왔던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를 돌아볼 때 그 법칙을 비판 없이 미래에도 적용해보려는 시도는 잔인한 일이 아닐까? 사회과학의 가변성을 무시한 것일 뿐 아니라, 인간 존재, 인간 삶이 단순한 물리적 현상과 같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 편의상 '중국'이라는 표현을 했지만 현재의 중국을 이르는 말이 아니라 중국이 차지하고 있는 영역의 지역적 문화권을 지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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