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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SF와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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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SE Nov 04. 2019

유토피아를 향한 절망적인 몸부림

후쿠토미 히로시: 총몽(銃夢 , Gunnm)

총몽(銃夢 , Gunnm, Battle Angel), 후쿠토미 히로시 감독, 1993




   1999년 초부터 필자는 상당 기간 홀로 일본에 있었다. 1998년 중후반에 입사했지만 회사는 입사 한 달 반 만에 일본어도 전혀 불가능한 필자를 일본의 나고야(名古屋)란 도시에 혼자 떨궈 버렸다. 물론 먼저 가 있었던 선발대와 무사히 합류를 하긴 했지만 1999년 새해 벽두부터 선발대와 함께 사고를 쳐버렸고 그 똥을 치우느라 이번에는 그곳에 진짜 홀로 버려졌다. 일본어도 불가능했기에 대화도 거의 없이 하루 온종일 협력 업체 사무실에서 혼자 일하고 혼자 밥 먹고 혼자 산책을 했더랬다. 밤늦은 시간까지 혼자 야근하고 호텔로 돌아오면 잠도 오지 않았고 알아듣지도 못할 말만 쏟아내는 TV는 의미가 없었기에, 그렇다고 딱히 혼자서 할 일도 없었기에 일본어 독학을 했더랬다. 그러다 울컥 짜증이 밀려올 때편의점에서 맥주 몇 캔을 사서 혼자 마시면서 어쩔 수 없이 TV를 틀고는 그저 외계어일 뿐인 일본 방송을 멍하니 시청할 따름이었다. 어쩌다 운 좋은 날엔 강수지나 조성민 특집이 방영되기도 했는데, 이상한 말들만 쏟아내던 TV에서 간간히 모국어가 들릴 때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혹은, 지금은 명작이 되어버린 일본 애니메이션이 어쩌다 방영되기도 했었는데 말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영상만으로도 빛바랜 사진처럼 여전히 맘속에 아련히 각인되어 버린 일본 애니메이션 두 편을 우연히 건지기도 했다. 그 두 애니메이션은 시간이 흐른 뒤에 일본어를 어느 정도 알아듣게 되면서, 그리고 찾아보고 물어보면서 알게 되었던 <기억은 방울방울(おもひてぽろぽろ),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 1991>과 오늘 소개할 <총몽(銃夢)>이라는 작품이었다.


 



   물론 <총몽>의 경우는 한참 시간이 흐른 후 기억을 되살리게 되었는데 그것은 오롯이 <엘리시움(Elysium)>이라는 영화 덕분이었다. <엘리시움>은 <디스트릭트 9>으로 나를 들뜨게 했던 감독 닐 블롬캠프가 2013년에 맷 데이먼과 조디 포스터라는 쟁쟁한 두 배우를 내세워 만든 SF 물로서 오염과 인구 폭발로 병들어버린 21세기 말과 22세기 초의 지구를 배경으로 한다. 땅 위에서의 삶이 힘들어지자 인류는 하늘로 향했고 "엘리시움"이라 불리는, 선택받은 극소수의 부유층을 위한 파라다이스가 대기권 밖에 건설된다. 이로 인해 가난에 허덕이는 인구의 대다수가 딛고 사는, 하지만 이미 디스토피아가 되어버린 지상은 소수의 부유층이 향유하는 유토피아인 우주 정거장 엘리시움을 위한 물자를 조달하는 거대한 공장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렇게 영화는 "대다수의 빈자들이 거주하는 디스토피아 지구" vs "극소수의 부유층이 거주하는 유토피아 엘리시움"이라는 대립 구도를 바탕으로, 지상의 빈자들 중 한 명인 주인공 맥스가 수많은 역경을 딛고 결코 닿을 수 없는 먼 곳인 엘리시움에 기어이 도달해서는 그곳을 전복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엘리시움(Elysium), 닐 블롬캠프 감독, 맷 데이먼, 조디 포스터 주연, 2013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는 그리 인상적이지 못했으며 솔직히 <디스트릭트 9> 때문에 적지 않은 기대를 걸었던 닐 블롬캠프에게 실망하게 된 영화이기도 하다. 물론 블롬캠프는 <엘리시움>에 이어서 <채피>라는 영화로 필자를 더욱더 실망시키기도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엘리시움>이란 그저 그런 작품을 여기서 굳이 언급하는 이유는 바로 이 영화가 가슴 한켠에 깊숙이 숨어 잠들어 있었던 <총몽>의 기억을 일깨워주었기 때문이다. 비록 <엘리시움>이 주인공의 고귀한 희생으로 소수만을 위한 천상의 세계를 전복하고 다수가 사는 지상의 세계를 구원하는, 철저하게 할리우드적인 메시아 모델을 채용하고 있지만 선택받은 소수를 위한 천상의 구조물 엘리시움과 그러지 못한 대다수가 살아가야 하는 디스토피아적 지상이라는 양극화 모델을 바탕으로, 물자 공급처가 되어버린 지상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래에서 위로 향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엘리시움>이란 영화의 세계관은 <총몽>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왔다고 볼 수밖에 없다. <엘리시움>이 그린 이런 구도는 1999년 세기말의 나고야 한 호텔방 TV에서 각인되었던 다음의 장면으로 순식간에 필자를 데리고 갔고 그렇게 <총몽>을 다시 찾게 만들었다.




   미리 언급해 둘 것은 여기서 소개하는 <총몽>은 1993년에 제작된 애니메이션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이다. 사실 애니메이션 <총몽>은 1990년부터 1995년까지 연재된 "키시로 유키토(木城 ゆきと)"의 SF 만화가 원작이다. 이 연재는 95년에 총 아홉 권으로 완결되었으나 작가가 마무리를 너무 급하게 했다는 비판이 거세게 일었고 그 이유에서인지 2001년부터 <총몽: 라스트 오더>라는 이름으로 연재가 재개되었다고 한다. 만화 <총몽>은 수많은 덕후들을 양산했지만 다시 시작된 연재의 산만한 이야기 전개에 일부 덕후들은 <총몽>이 점차 산으로 가고 있다고 불평을 쏟아내고 있다고 한다. 애니메이션 <총몽>은 90년부터 95년 사이에 연재된 시리즈의 일부 이야기를 93년에 "후쿠토미 히로시(福富博)" 감독이 OVA(Original Video Animation)로 제작한 것으로서 TV로 방영되었다. OVA는 두 파트로 구성되었으며 첫 파트는 "Rusty Angel", 두 번째 파트는 "Tears Sign"이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물론 이 두 파트는 서로 내용이 연결되며 원작 만화 1권과 2권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필자의 경우 <총몽> 원작은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 글은 순수하게 애니메이션 <총몽>만을 보고 작성된 글임을 밝혀 두는 바이다.





   시기를 가름하기 어려운 먼 미래, 이 시기는 사이버네틱스 기술이 고도로 발달하여 인간들이 거부감 없이 기계 장치들을 몸에 이식하고 인체를 사이보그로 개조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 그러기에 온전한 사람이 드물고 반인반철(半人半鐵)이 일반화된 사회, 온전한 인간과 기계 인간의 공존이 너무나 당연시되는 시대를 상정한다. 애니메이션에서는 그리 자세히 언급되지 않지만 원작 만화를 빌어 보자면 <총몽>에서의 사이보그는 인간의 온전한 뇌를 전제로 한다. 즉, 뇌만 온전하다면 인공 신체, 인공 기관, 인공 장기, 인공 척수 등, 뇌를 제외한 신체의 모든 부분을 기계로 대체할 수 있으며 이런 이식 자체가 윤리적으로 하등 문제가 되지 않는 시기를 상정하고 있다. 그렇기에 목이 잘리더라도 뇌가 살아있는 동안 기계 장치로 뇌를 제외한 전체를 대체한다면 정상적인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다. 따라서 사이보그라 하더라도 '인간'이라는 정체성의 문제가 제기될 필요가 전혀 없으며 스스럼없이 '인간'으로 불리는 시기가 <총몽>이 상정하는 시기다.



   고철 더미들이 쓰레기 산들을 이루고 있는 지저분하고 황폐한 어느 마을. 이 마을은 넘쳐나는 고철들을 이용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앞서 언급한 대로 기계와 공존하는 인간들이다.)로 구성되어 있기에 고철 마을로 불린다. 이 마을 위로는 팽이 모양의 거대한 구조물이 구름 위로 떠 있고 그곳은 가느다란(거대한 자렘의 규모에 비해 가늘다는 의미지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실제 엄청나게 굵은) 튜브로 지상과 연결되어 있다. 공중에 떠 있는 이 거대한 구조물은 하늘의 도시 "자렘"으로 불렸고 이 곳은 선택받은 소수의 사람들이 사는 천상 낙원으로 알려져 있다. 자렘 아래쪽으로 난 커다란 구멍으로는 자렘의 쓰레기인 폐고철들이 끊임없이 지상으로 배출되고 있다. 이 고철 마을은 자렘의 쓰레기로 살아가지만 반대로 튜브를 통해서 자렘에서 사용될 물자를 공급하는 역할도 담당하고 있으며 '팩토리'란 기관이 이 업무를 총괄하고 있다. 이 마을에서 사이보그를 치료하는 의사로 활동하는 기계 의학 전문가 '이드'는 가난한 사이보그 환자들의 치료를 위해 매일같이 쓸만한 고철 덩어리를 찾아 고철산을 헤매고 다닌다. 그날도 역시 고철 더미를 뒤지다 머리와 목만 남은 사이보그 여자 아이를 발견했다. 아직 목숨이 붙어 있고 탐지기를 통해서 뇌가 온전하다는 것을 인지하게 된 이드는 아이를 집으로 데려와서 쓸만한 몸체를 만들어 온전한 아이로 재생시켰다. 하지만 깨어난 아이는 기억잃어버렸고 자신의 과거를 알지 못했기에 이드는 '갈리'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고 친히 그녀의 보호자를 자처했다. 갈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몸에 익숙해졌고 이드의 딸마냥 자연스레 가족으로 녹아든다.



   이드는 한때 자렘에서 최고의 사이버네틱스 기술자였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스스로 자렘을 떠나서 고철 마을에 정착을 했고 곳에서 병원을 열어 인심 좋은 사이보그 의사의 삶에 만족하며 살고 있다. 하지만 병원 유지를 위해 밤에는 헌터 워리어라고 불리는 현상금 사냥꾼으로 활동한다. 한때 경찰이라 불렸던 국가 기관은 사라진 지 오래기에 지상에서의 치안은 헌터 워리어들이 담당했다. 자렘의 법을 어긴 범죄자들에 대하여 팩토리가 현상금을 걸면 헌터 워리어들이 그 현상금을 목적으로 범죄자들을 잡아들이는 대체 경찰 노릇을 하게 된다. 밤마다 외출하는 이드가 궁금해서 몰래 따라나섰다 현상금이 걸린 사이보그와 싸우는 이드를 목격했고 이드가 위기에 처했을 때 갈리가 나서서 대신 무지막지한 사이보그를 처리한다. 갈리는 과거의 기억은 없지만 그 현란한 전투술을 자신의 몸이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이드처럼 헌터 워리어가 되기로 결심한다. 이런 갈리가 나쁜 길로 빠질까 봐 염려하는 이드는 반대를 했지만 갈리의 결심은 굳건하다. 그 이유는 바로 '유고'라는 남자아이 때문이다.



   갈리는 이드의 집 환풍구를 수리하러 온 유고를 보았고 그 아이를 좋아하게 된다. 유고는 어릴 적 가족을 잃었음에도 혼자서 성실하고 착하게 살아가는, 고철 마을에서 인정받는 아이였다. 유고가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이유는 자신의 꿈 때문이었는데 그 꿈은 자렘으로 가는 것이다. 자렘으로 가기 위해 유고는 악착같이 돈을 모았고 그런 그의 꿈에 보탬이 되기 위하여 갈리는 헌터 워리어를 자처하게 된다. 하지만 유고가 돈을 모으는 방법은 사이보그들의 척수를 빼내어 몰래 판매하는 불법적인 방식이었고 그것이 들통나면 바로 현상 수배범이 되어 헌터 워리어의 타깃이 되는 위험천만한 일이다. 밤의 유고를 몰랐던 갈리는 유고에게 호감을 표했고 그렇게 둘은 친밀한 관계가 된다. 어느 날 유고는 자신의 집을 찾아온 갈리를 데리고 자신의 집 지붕 위에서 나란히 누웠다. 거대한 자렘이 가까이 보였고 유고의 말에 따르면 자렘이 가장 잘 보이는 장소란다. 그렇게 자렘을 바라보며 천진난만하게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는 유고를 미소 띤 얼굴로 바라보는 갈리. 자렘에서 내려온 갈리와 반대로 갈리의 기억이 사라진 곳 자렘으로 올라가고자 하는 유고... 하지만 자렘을 향한 그의 동경은 집착적인 경향을 띠면서 그 이면에는 자신이 사는 세계인 고철 마을에 대한 강한 거부감과 비난을 담고 있다.



   한편 유고 못지않게 자렘을 동경하는 또 다른 이가 있었으니 바로 '치렌'이라는 여자다. 치렌의 경우는 정확히 말하자면 자렘으로의 복귀가 목표다. 그녀 역시 이전에 자렘의 사이버네틱스 기술자였고 한때 이드와 연인 사이였다. 하지만 이드와는 다르게 자렘에서 밀려난 듯했고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이 냄새나고 역겨운 지상 세계를 떠나 자렘이라는 천상 세계로 돌아가고자 했다. 물론 이드와 같이 가고자 했지만 이드는 고철 마을에서의 삶에 만족했으며 자렘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했다. 한때 연인이었지만 사이버네틱스 기술자로서 치렌을 언제나 이인자로 만들었던 이드였기에 치렌은 모짜르트에 대한 살리에르와 같은 질투심을 품고 있다. 치렌은 어떡해서든 이드와 함께 자렘으로 돌아가고자 했고 그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기술력으로 이드를 좌절시켜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자신이 재생시켰던, 지금은 현상 수배범이 된 격투기용 사이보그가 만신창이가 되어 그녀를 찾아왔다. 바로 이드가 위기에 처했을 때 갈리가 나서서 퇴치한 사이보그였다. 연유를 전해 들은 치렌은 만신창이가 된 사이보그를 이전보다 훨씬 성능이 개선된 사이보그로 개조했다. 이드가 만든 갈리를 파괴함으로써 그를 좌절시키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다시 이드와 갈리를 찾아가서 결투를 벌였지만 한번 더 처참하게 깨지고 만다. 자렘으로 복귀하고자 하는 치렌의 욕망은 패배의 좌절감과 모멸감에도 불구하고 그녀를 더욱더 집착으로 몰아넣는다.



   유고와 치렌의 부질없을 꿈을 실현 가능한 것으로 믿게 만드는 공통의 인물이 있으니 바로 '벡터'라는 악당이다. 벡터는 자렘에 물자를 공급하는 팩토리의 수장으로서 자렘으로 가는 것은 자신과 같은 지상의 버려진 혼종들에게는 부질없는 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그는 공급해야 할 물자를 빼돌리는 방식으로 부를 축적하여 지상계를 지배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는 자신의 사업에 도움이 된다면 어떤 짓도 마다하지 않는 인간이다. 1,000만 칩을 모아 오면 자렘으로 보내 주겠다는 거짓말로 유고로 하여금 미친 듯이 타인의 척수를 빼오게 만들었으며 치렌에게는 자렘으로 복귀시켜 주겠다는 거짓말로 그녀의 몸을 취하고 사이보그 격투 대회에 출전할 사이보그를 불법 개조하는데 그녀의 기술을 취했다. 유고는 손님으로 위장한 헌터 워리어의 척수를 빼내려다 그에게 동료를 잃게 되고 겨우 도망가게 된다. 하지만 자신의 얼굴과 이름이 노출되어 유고는 현상 수배범으로 방송을 타게 되었고 어쩔 수 없이 벡터에게 전화를 걸어 피신을 요청한다. 벡터는 헌터 워리어로 점차 유명해지는 갈리를 사이보그 격투 대회에 출전시키기 위하여 그녀를 유인할 방도를 찾았고 갈리가 사랑하는 유고를 이용하기로 한다. 이제 자렘으로 치렌을 복귀시켜줄 마지막 요구라며 치렌에게 유고와 갈리를 찾아 데리고 올 것을 명한다.



   수배범이 되어 어딘가에 숨어버린 유고를 찾아 헤매던 갈리와 그런 갈리를 미행하는 치렌... 버려진 어느 건물에 숨어있는 유고를 갈리가 찾아냈다. 유고가 진짜로 그런 범죄를 저질렀는지 물었지만 강건한 유고의 꿈이 그 질문에 그렇다고 답을 한다. 유고는 자렘을 포기하지 않았고 꿈을 위해 수많은 헌터들이 자신을 노리고 있겠지만 목숨을 걸고서라도 벡터에게 가야만 한다고 했다. 자신은 지금 자신의 꿈을 가로막고 있는 이 고철 마을과 싸우고 있으며 결고 지지 않겠다고 한번 더 결의를 다지면서 자신의 싸움이기에 갈리에게 그만 돌아가라고 했다. 이때 갈리는 자신의 마음을 급작스레 유고에게 고백한다. 널 좋아해, 넌 날 어떻게 생각해? 진지하게 대답해줘! 이 급작스런 고백에 당황했던 유고는 미소 띤 얼굴로 갈리의 뺨을 쓰다듬으며 이제 공범이 되었다는 말로 답을 대신한다. 그 순간 갈리는 기습적인 입맞춤을 하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후 갈리는 유고가 왜 그렇게 자렘에 집착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들을 수 있었다. 어릴 적 유고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형네 부부와 함께 살았고 형과 형수가 자신을 자식처럼 키웠다고 했다. 팩토리의 기술자였던 형은 근면했으며 형수는 매우 다정했다고 했다. 그런 형의 동경의 대상이 자렘이었고 자렘으로 가기 위해 몰래 기구(氣球, Balloon)를 설계하고 제작하고 있었다. 자신에게로 향하는 수단이 될 수 있기에 자렘은 하늘을 나는 장치는 그 어떤 것도 불법으로 규정하였다. 따라서 기구 제작 사실이 알려지면 형은 수배범이 되고 헌터 워리어의 타깃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꿈을 실현하기 위하여 몰래 기구를 만들었고 기어이 그 완성을 보고야 말았다. 하지만 자렘으로 기구를 띄우기로 한 전날 밤, 헌터 워리어가 들이닥쳐 형을 죽여 버렸다. 슬프게도 형을 밀고한 사람이 바로 형수였으니... 형수의 소식을 물었을 때 어디선가 잘 살고 있을 거라는 원망 가득한 유고의 답이 돌아왔다. 갈리는 같은 여자로서 형수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자신이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의, 여전히 자신과 같은 공간에서 함께 하는 사람의 궁극적 지향이 자신이 아니었다는 사실, 그것이 주는 실망과 허망함, 곧 실현될 이별에 대한 거부가 낳은 비극일 것이다. 이는 닿지도 않을 공허한 이상을 찾아 항상 떠나고자만 하는 남자와 그런 그와 함께 영원히 머물고자 하는 여자라는 구도가 만들어낸 비극이다. 동시에 그런 구도는 유고와 갈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자신의 꿈을 찾아 떠나고자 하는 유고와 이제 막 사랑을 확인한 그와 함께 머물고자 하는 갈리... 하지만 갈리는 남자의 꿈도 이해했다. 950만 칩을 모은 유고에게 현상금 사냥을 통해 자신이 모은 60만 칩을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벡터에게 가는 동안 득실거릴 헌터들로부터 유고를 지켜주기 위해 함께 동행하겠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갈리는 말했다,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을 거라고... 갈리를 미행해서 둘의 이야기를 엿듣고 있는 치렌... 갈리의 마지막 말이 치렌의 마음을 흔들었다. 외투 안주머니에서 한때 다정했던 이드와의 추억이 담긴 사진을 꺼내보고 치렌은 미소 지었다. 갈리는 칩을 준비하라고 먼저 유고를 보냈고 예쁘게 보이기 위해서 머리를 매만지고 있던 순간 비명 소리가 들렸다.



   급하게 밖으로 뛰쳐나왔을 때 유고의 형을 죽인 헌터 워리어의 칼에 유고 역시 치명상을 입고 쓰러져 있다. 분노한 갈리와 막강한 파워를 지닌 헌터 워리어와의 치열한 싸움이 시작되었고 종국에는 번개를 이용한 갈리의 작전에 헌터 워리어의 몸은 불타 버린다. 급하게 유고를 흔들었지만 유고는 대답이 없었고 목숨이 끊어지기 일보 직전이다. 뒤에서 지켜보던 치렌이 갈리의 몸에서 전극을 끌어와 잘린 유고의 머리에 연결하여 생명을 연명하도록 응급처치를 해 주었다. 갈리는 유고의 몸과 머리를 들고 이드를 찾았고 유고를 살려 달라고 절박하게 애원했다. 이드는 곧바로 대수술에 착수했으며 유고는 갈리처럼 얼굴만 유지한 채 몸은 기계가 되어 정신을 회복했다. 유고는 수술실 밖에서 이드가 갈리에게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유고는 속고 있다는 것을, 돈을 모으면 자렘으로 갈 수 있다는 얘기는 거짓이며 지상에서 자렘으로 갈 수 있는 수단은 아예 없다는 사실을, 그것은 한때 자렘 사람이었던 자신이 하는 말이니까 틀림없다는 것이다. 거짓말이야!!! 격분한 유고는 그대로 뛰쳐나가 버렸다. 갈리가 곧바로 뒤따랐고 이드는 헌터 워리어 복장을 착용하고 무기를 챙긴 후 벡터를 찾았다. 거짓말로 유고를 극단의 상태로 몰아넣은 벡터를 향한 이드의 분노에 벡터는 그런 거짓말에 속은 놈이 잘못이라는 뻔뻔한 합리화를 한다. 게다가 이드에게 또 다른 충격적인 장면을 확인시켜 주었는데, 그것은 장기별로 분리되어 병 속에 깔끔하게 보관된 치렌의 찢긴 신체였다. 유고에 대한 갈리의 지고한 사랑에 흔들린 치렌은 자렘으로의 복귀라는 자신의 꿈이 덧없음을 깨달았고 벡터에게 돌아와서는 유고는 죽었으며 갈리는 찾지 못했다고 거짓말을 했다. 더 이상 치렌의 이용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벡터는 자렘에서 매달 요구하는 신체 장기 표본을 위해 치렌을 조각내 버렸다. 분노한 이드에 맞서 벡터는 격투용 사이보그 로봇으로 자신을 방어하려 했지만 이드의 분노를 이기지 못했고 이드가 휘두른 무기에 박살난 사이보그의 커다란 파편이 그대로 날아와 벡터의 몸통을 관통해 버린다.



   유고는 자렘으로 이어진 기다란 튜브를 아슬아슬하게 오르고 있다. 하지만 튜브가 닿은 자렘의 끝자락으로부터 톱니가 촘촘히 박힌 고리형 덧이 빠른 속도로 회전하며 아래로 내려오고 있다. 쥐들이 튜브를 타고 자렘으로 가지 못하게 막기 위한 장치였지만 미처 그것을 피하지 못한 채 유고의 발목은 잘려 나갔다. 더 이상 걸을 수 없음에도 유고는 놀라운 의지로 튜브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갈리는 재빨리 유고를 따라 올라갔다. 먹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는 자렘을 튜브에 의지하여 오르고 또 올랐고, 마침내 먹구름을 아래에 뒀을 때 때 파란 하늘 위로 거대한 자태를 자랑하며 위용을 뽐내는 자렘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유고는 감동에 몸을 떨었다, 자렘... 기어이 만났구나! 하지만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갈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유고, 마을로 돌아가자... 유고는 더럽고 무서운 마을 따위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이렇게 매달려서라도 주욱 자렘 곁에 머물겠다고 했다. 자신이 태어난 것 자체가 잘못이며 자신은 세계에 불필요한 인간이라고 스스로 비하한다. 갈리가 말했다, 유고는 겁쟁이라고, 고철 마을과 자렘만이 세계가 아니라고, 자신의 세계는 유고라는 단 한 명의 존재만이 필요하다고, 함께 하자고 애원한다. 한 동안 말을 잇지 못하는 유고... 마침내 유고는 갈리의 애원에 긍정으로 답했다. 유고의 대답으로 갈리의 얼굴에 기쁨의 미소가 번지려는 순간 유고 뒤로 엄청난 회전으로 돌진하는 톱니바퀴 덧, 미처 그것을 피하지 못한 유고의 몸은 산산조각이 나서 공중으로 흩날린다. 유고의 가슴 상반신에 연결된 팔을 갈리는 겨우 붙잡을 수 있었고 튜브에 칼을 꽃아 유고와 함께 매달렸다. 갈리의 손에 겨우 지탱하고 있는 유고의 팔과 상반신... 유고의 팔꿈치 부분이 늘어져 점차 끊어지고 있다. 유고는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너를 만나서 행복했어, 잘 있어... 그렇게 팔은 끊겨 버렸고 유고는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지상을 향해서 멀어지고 있다. 갈리의 손에는 이제, 허망하게도 끊어진 유고의 팔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그날 저녁, 갈리는 이드와 함께 조그마한 기구에 자신이 끝까지 놓지 못했던 유고의 팔을 담아 자렘을 향해 띄워 보냈다. 한때 유고 꿈이자 희망이었던, 아니 존재의 이유였던 자렘을 향해서 팔이나마 그렇게 두둥실 날아오른다. 이드와 갈리는 서로 말없이, 점차 멀어져 가는 기구를 하염없이 바라본다. 고철산 낮은 둔치에선 역설처럼 피어난 민들레가 홀씨 망울을 바람에 흩날리고 있다.






   OVA로만 봤을 때 <총몽>은 사이보그와 인간이 주인공인 영화지만 인식을 가진 로봇이나 사이보그 또는 복제인간 관련된 내용을 다룬 영화들에서 자연스럽게 나오게 되는 '인간 정체성'에 대한 질문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브런치 글: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죽음" 참조)>를 비롯하여 로봇 또는 사이보그, 복제인간을 다룬 수많은 영화들이 던지는 공통된 질문이 바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고유한 철학적 물음이고 이 물음에 대하여 다양한 답변들과 해석들을 끌어내고 있다. 하지만 <총몽>의 경우라면, 앞서 언급한 대로 고도로 기계화된 먼 미래를 넘어서서 기계 장치들을 몸에 이식하는 것에 전혀 거부감이 없는, 뇌만 온전하다면 신체 전체를 기계로 대체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따라서 온전한 사람이 드물고 반인반철(半人半鐵)이 일반화된 시대를 상정하기 때문에 이 질문은 다소 생뚱맞아 보인다. 총몽에서의 사이보그의 정의가 그러하기에 사이보그는 이미 인간이란 정의를 대체하여 결국 뇌의 존재 여부만이 인간의 정체성을 가름하는 기준이 될 뿐이다. 이는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가 그대로 이어받고 있는 설정이기도 하다. 애니메이션에 나온 그대로 헌터 워리어 자격을 얻기 위해서는 뇌의 패턴을 팩토리에 등록해야 한다. 이 뇌의 패턴을 뇌문(紋)이라 부를 수 있는데 요즘 시대에 사람들을 식별하는 지문(指紋)이나 성문(聲紋), 또는 홍채 따위는 신체 기관을 부품처럼 마음대로 교체할 수 있는 <총몽>의 시대에는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이런 세계관은 어찌 보면, 이전 <은하철도 999>부터 이어져 내려온 전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에 OVA <총몽>이라면 사이보그의 인간 정체성에 대한 문제는 전제에서부터 그 질문을 비켜가고 있다.


   차라리 문제가 될 요소라면 과연 뇌의 존재만으로 인간을 정의할 수 있는가일 것이다. 이런 정의는 인간의 이성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 존재하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요소인 감성이나 감정, 욕망, 정념 따위의 모든 비이성적 요소들 역시 뇌의 통제 하에 있다는 매우 위험하고 불온한 가정을 전제로 두고 있다. 사실 산만하게 전개되는 만화 <총몽>의 경우 이것이 문제가 된다고 한다. OVA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천상계와 지상계의 극단적인 대립 구도는 누구나 인지할 수 있듯이 빈부 격차에 따른 우리 시대의 양극화 문제나 더 나아가서는 신자유주의의 확산에 따라 더욱더 공고해지는 신식민지 지배의 문제에 그대로 대입할 수 있다. 만화는 기본적으로 자본 대 노동, 귀족 대 농노 등의, 고전적인 지배 계급과 피지배 계급의 대립 구도를 세계관으로 두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더 나아가서 만화의 산만한 전개에도 불구하고 유지되는 주제는 육체와 영혼의 관계며 이 역시 천상계와 지상계라는 이분법적 대립 구도에 그대로 매치가 된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마르크스가 헤겔의 변증법을 물구나무 선 변증법이라 칭했던 것처럼 <총몽>에서의 육체와 영혼의 구도는 기존의 관념론을 뒤집어놓은 구도라는 점이다. 기존의 관념론이라면 자기 무결성을 보장하는 이성을 담지한, 절대선이자 불순물이 제거된 무균질의 영혼과 외부 세계의 다양한 불순물들을 받아들이는 감각과 그로 인한 감성과 정념을 담당하는 불순한 욕망 덩어리인 육체의 관계는 각각 천상과 지상이라는 공간적 배치를 자연스럽게 상정하고 있다. 하지만 <총몽>에서의 구도는 땅 위의 존재는 뇌를 제외한 다른 모든 신체는 대체 가능하기에 이성적 사고를 담당하는 뇌-영혼은 지상에 위치한다. 반면에 하늘에 존재하는, 선택된 자들인 자렘의 사람들은 기계로 대체 불가능한 순수한 육체로 구성된 인간으로서 혼종의 지상인들과는 구별되는 상대적 우월성을 갖는다고 한다. 하지만 순수한 육체로만 이루어진 자렘인들의 머리에는 생체적인 뇌가 없고 전자 뇌가 그것을 대체하고 있다고 하며 이는 뇌-영혼 없이 순수한 육체로만 구성된 천상의 존재와 인간의 육체는 이미 의미가 없이 순수한 뇌-영혼으로 존재를 정당화받는 지상의 존재와의 대립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은 여기서 논할 주제가 아니며 <총몽>이라는 애니 자체에 집중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렇기에 이런 문제들과 더불어 사이보그를 과연 인간으로 볼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총몽>의 전제에 이미 녹아 있음을 언급했기에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대신 <총몽>에서 보여주고 있는 인간의 욕망, 위를 지향하는 본성에 대한 넋두리로 대신하고자 한다.


   애니메이션 <총몽>의 제목을 생각해 보자. 총몽 - 銃夢, 총(銃)은 살상 무기인 총을 뜻하고 몽(夢)은 꿈을 뜻한다. 다시 말해 "총의 꿈"이다. 꿈은 레토릭 그대로 지향, 동경, 목표를 의미한다. 그리고 총을 기계에 대한 환유로 본다면, 이때 기계는 더 나아가서는 기계화된 인간, 사이보그가 된다. 애니메이션 <총몽>에서의 사이보그는 인간을 의미하며 따라서 총몽은 땅을 딛고 사는 인간 일반이 그리고 갈망하는 그 무엇이 된다. 하지만 총몽이 이야기하는 것은 그 무엇이 아니라 그것을 지향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본성이 아닐까? 다시 말해 꿈꾸는 그 무엇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욕망으로서 그 무엇을 꿈꾸고 지향하는 행위 자체의 보편성을 보여주며 이것 자체가 바로 "銃夢"의 의미일 것이다. 사람은 무릇 꿈을 갖기 마련이다. 그 꿈이 소박하든 거창하든 언제나 꿈을 갖게 되고 그것이 자신의 지향이 된다. 하지만 우리가 이야기하는 꿈은 현실에 기반한 꿈이다. 하늘을 날겠다는, 당시의 허황돼 보이는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 낸 라이트 형제의 꿈도, 억압의 사슬을 끊어내고 예속의 세월을 전복시킨 혁명의 꿈도 다 현실에서 출발하는 그것이다. 현실을 딛고 서지 않은 꿈이라면 그것은 꿈꾸는 자를 한량으로 만들거나 염세와 허무로 밀어 넣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 기반하지 않은 꿈일지라도 그것을 품는 것 역시 인간의 본성인 동시에 욕망의 일부일 것이다. 꿈이란 것 자체가 자유의지라는 이름으로 언제나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중력을 거부하는 지향성을 갖는다. 어찌 보면 자유의지란 것이 낙하라는 자연법칙을 거스르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하층의 사람들은 상류 사회를 지향하고 어쩌면 그것은 종교의 관점에서 하늘을 우러러보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지향은 종국에는 자신이 그리는 이상향, 유토피아를 향하게 된다. 이것이 인간이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일지도 모르며 그렇게 하나의 욕망으로 표출되는 것일 수도 있다, 부질없는 욕망으로 말이다.


   현실에 근거하지 않은 꿈이란 현실을 떠난 꿈을 의미한다. 즉, 이는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현실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볼 수 있다. 현실 자체는 말 그대로 현실이다. 그것은 사람마다 처한 상황에 따라 느낄 수 있는 천차만별의 것이다. 하지만 지향하는 그곳인 꿈과는 다르게 바로 그 자체로의 현실로서 그것은 살아 있는 생생한 경험들의 총체일 것이며 그렇기에 삶을 산다는 것의 의미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리얼한 삶의 현장이다. 그렇기에 현실에는 다양한 상황들이, 이야기들이, 체험들이 존재한다. 그 속에는 기쁨과 슬픔이, 환희와 고통이, 삶과 죽음이, 지배와 예속이, 자유와 통제가, 순수와 더러움이, 선과 악이 공존한다. 어느 한쪽을 거부하지 않고 이러한 상호 대립의 공존을 인정하고 그대로 맞닥뜨리는 것이 바로 현실에 근거하는 것이고 삶의 편에 서는 것이리라. 그렇기에 비루하고 비참한 삶이라도, 고통스런 순간의 연속일지라도 그것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것이 삶을 사는 것이요 그렇기에 현실에 근거한 꿈으로써 자신이 처한 상황과 반대되는 상황을 그리며 그것을 향해서 부단히 노력하고 투쟁하는 과정 그 자체가 살아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것이 인간다움의 근거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을 거부하고 회피하는 것, 인정하지 않고 그 대안을 꿈꾸는 것이 바로 현실에 근거하지 않은 꿈일 것이다. 그런 꿈은 고통, 슬픔, 죽음, 예속, 더러움, 비속함, 악이란 요소들을 거부하며 그와 반대되는 어떤 이상들을 그리게 된다. 그래서 고통과 슬픔을 야기하는 것들, 더럽고 비루하고 비속한 것들을 악으로 규정하고 그런 것들이 없는 순수의 결정체들만이 존재하는 하나의 이상향을 그리게 된다. 어떠한 불순물도 섞이지 않은 순수, 오로지 자체적 척도에 의해 규정된 선 자체로만 존재하는 순정들의 공동체로서의 유토피아라는 개념을 상정하게 된다. 이제 그 개념은 발로 딛고 서 있는 이 땅에서 두둥실 떠올라, 다시 말해 현실과 괴리되어 저 높은 하늘에 위치하게 된다. 그렇게 파라다이스라는 이름의 피안이 존재하게 되고 이데아의 세계가 마침내 구원이라는 이름으로 열리게 된다. 어쩌면 공상적으로 그려본 공산주의가 바로 이런 파라다이스일지도 모른다. 유토피아라는 이런 가상의 세계에서는 불순물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무균질의 세계다. 불순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차이가 제거된 것을 의미한다.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 동질의 세계, 순수한 선으로만 구성된 세계, 그런 세계를 상상해 보라. 그런 세계는 감각적 요인들, 감성이나 욕망, 정념이 제거된 세계를 전제로 한다. 그런 세계라면 문학이, 예술이 이미 사라져 버린 세계일 것이며 변화나 운동이 제거된 세계, 어찌 보면 파르메니데스가 정의 내린 존재의 세계로서 현실에서 우리가 정의하는 살아 있는 세계가 아닌, 이미 죽음의 세계, 엔트로피가 최대치가 되어버린 뜨뜻미지근한 세계일 것이다. 그런 세계는 뒤집어 이야기하면 모든 부정(不正)의 총집합체가 된다. 더럽지 않은, 슬프지 않은, 고통스럽지 않은, 비속하지 않은 세계인 동시에 우리가 딛고 살고 있는 이 현실을 완전히 부정한 결과물로 존재하는 세계일 것이다. 그런 세계를 지향하는 것도 어찌 보면 인간의 본성이자 욕망이며 그렇기에 종교의 존재도 가능할 것이다. 또한 그렇기에 현실에 근거할 수 없는 그런 꿈의 종착역을 향해서 바벨탑을 쌓아 올리는 것을 방지하고 위에 딛고 있도록 하는 역할을 맡은 것이 종교가 아닐까?


   자렘으로 가겠다는 유고의 꿈은 형이라는 존재가 심어준 집착일 수 있다. 총몽에서는 유고의 꿈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유고가 가고자 몸부림치는 그곳에서 온 갈리는 다른 꿈을 갖고 있다. 갈리는 기억을 잃어버렸지만, 그리고 그 기억 속에서는 유고가 그렇게 가고자 하는 자렘의 기억도 있겠지만 갈리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자신의 기억을 되살리고자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녀의 꿈은 유고이기 때문이다. 본성으로서의 꿈 꾸기는 어찌 보면 영원에 대한 갈망을 에둘러 표현한 것일 수 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의 인간은 존재에서 비존재로, 있음에서 없음으로, 삶에서 죽음으로 향할 수밖에 없는 운명에 대하여 끔찍한 공포와 거부감을 갖는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본성이다. 그래서 인간은 영원을 갈망하고 불멸을 소망한다. 그렇기에 진시황은 불로초를 찾았을 것이다. 어찌 보면 서구의 관념론 철학은 이런 영원에 대한 소망의 하나의 표현 양태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총몽에서의 기계화된 인간들 역시 불멸을 추구한 결과일 것이다. 그 본성은 이상향을 향한 부질없는 몸부림이며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욕망을 그리고 있다. 니체는 이러한 인간의 본성을 제대로 꿰뚫어 본 듯하다.  


   만화와는 다르게 애니메이션에서는 자렘이라는 세계에 대한 설명이 없다. 그냥 막연히 자렘이 하늘에 덩그러니 떠 있을 뿐이다. 그것이 왜, 언제,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이 그냥 막연히 전설처럼 전해지는 지상낙원이라고만 이야기되고 있다. 심지어 그곳에서 왔다는 이드나 치렌도 자렘에 대해 설명하지 않는다. 그렇게 자렘은 그냥 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자렘에 대해서는 이런 식으로 다시 쓰기가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자렘은 고철마을이라는 고통스런 디스토피아의 현실을 부정하고 그것을 떠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일지도 모른다. 언제 생겨난지도 모른 채, 어쩌면 그것은 언제라는 개념을 인식하기 이전부터 존재했으나 아무도 가 본 적이 없는, 결코 출입이 허용되지 않는 곳일지 모른다. 사실은 그곳은 텅 비어있는 무의 세계일지도 모른다. 물론, 이드나 치렌의 자렘에 대한 기억 역시 심어진 기억으로 말이다. 아마 그런 시대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낙원이라는 자렘에 대한 환상만 존재할 뿐이고 아무도 본 적이 없는 그런 세계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銃夢"은 말 그대로 인간사 자체를 의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 본다.




   마지막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기 전에 애니 <총몽>을 실사화한 <알리타: 배틀 엔젤>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로보캅>부터 시작해서 <토탈리콜>, <공각기동대>, <인랑>까지 과거 수작들을 리메이크하거나 애니메이션을 실사화한 영화들 모두가 망했다. 그리고 지금 언급한 영화들에 대한 글을 쓸 때면 항상 리메이크된 작품들에 대한 평가도 뒤따르게 마련이고 그 평가는 너무나 간결하고 가혹하게 마무리될 뿐이다. 그리고 애니 <총몽>을 실사화한 <알리타: 배틀 엔젤> 역시 그러한 가혹한 평가를 비켜날 수 없을 듯하다. 아니 리메이크나 실사화된 다른 영화들보다 훨씬 더 많은 혹평을 들어야 할 판국이다.


알리타: 배틀 엔젤(Alita: Battle Angel),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 로사 살라자르 주연, 2018


   사실 이 글은  <알리타>가 개봉하기 전에 마무리하려고 시작했던 글이다. 그러다 시간이 없어 마무리를 못했고 그래서 개봉했더라도 <알리타>는 보지 않은 상태에서 마무리하고자 결심했었다. 그나마 언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던 제임스 카메론이 제작이라도 담당했다고 들었기에 일말의 희망을 가져 보기도 했다만 앞선 수작들을 망쳐버린 리메이크나 실사 영화들 때문에, 그리고 할리우드에서 제작하는 것이라 크게 기대를 할 수 없었고 그래서 그런 실망 섞인 푸념을 늘어놓기 전에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했었다. 하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고 기어이 <알리타>를 보고야 말았다. 예상대로 기대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사실 <알리타>는 OVA <총몽>과 만화 <총몽>을 섞어 만든 듯하며 그렇기에 서사가 한 곳으로 모이지 않고 완전히 뒤죽박죽이 된 잡탕밥을 보는 듯했다. 이는 만화가 연재를 재개하면서 범한 오류를 그대로 이어받은 느낌이다. 물론 할리우드스럽게 3D를 기반으로 한 화려한 액션은 잘 심어 두었고 그렇기에 원작을 모르고 보는 관람객이라면 충분히 재미를 느낄 수도 있겠지만 3D를 통한 고철마을의 묘사나 액션이 중심이 되어버린 서사는 원작이 깔고 있는 허무와 애절함의 정서는 결코 살리지 못하고 있다. 마지막에 유고를 살려 해피엔드로 마무리하거나 시리즈물을 고려해서 죽은 유고를 다시 부활시키기 위한 떡밥으로 이스터 에그들을 심지 않기를 바랐었는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런 우려는 비켜갔다는 점이다. 하지만 흥행에 성공했을 경우 시리즈물을 고려했던 흔적은 마지막 장면에서 확인할 수 있다. OVA에서는 설명하지 않았던, 신비에 싸인 자렘을 <알리타>에서는 드러냈기 때문이고 이제 후속물에서 자렘의 이야기를 풀어가야 할 터이니 말이다. 결국 <알리타>는 원작의 기나긴 연작을 이것저것 다 건드리며 버무리려다 OVA의 감성을 죽여버린, 이도 저도 아닌 평범한 할리우드 SF 물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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