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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SE May 06. 2019

엑소시즘, 전과 후의 이야기들

레퀴엠 vs 엑소시즘 오브 에밀리 로즈

   엑소시즘을 다룬 영화들은 많다. 엑소시즘이 주제가 되는 영화의 레전드 격인 <엑소시스트(The Exorcist), 윌리엄 프리드킨 감독, 1973>를 필두로 관련된 수많은 영화들이 꾸준히 이어져 왔다. 특히, 몇 년 전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엑소시즘을 주제로 하는 최초의 영화 <검은 사제들(The Priests), 장재현 감독, 2015>이 개봉되어 주목을 끌기도 했었다. 이 글을 쓰기 위하여 최근에 관련 영화들을 다시 챙겨보기도 했지만 1973년에 제작된 영화 <엑소시스트>는 지금 다시 봐도 왜 이 영화를 엑소시즘 계열의 프로토타입으로 꼽는지 재차 확인할 수 있었다. 솔직히 <엑소시스트> 이후의 이런 종류의 영화들은 작품성을 논외로 한다면 모두 아류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후의 엑소시즘 관련 영화들 중 이런 아류라는 분류에서 비켜날 수 있는 두 개의 영화가 있으니 바로 오늘 소개할 <레퀴엠, 2006>과 <엑소시즘 오브 에밀리 로즈, 2005>다. <엑소시스트>를 비롯하여 그 아류라고 불릴 수 있는 영화들의 대부분은 구마의식이 진행되는 과정에 집중하고 있다. 의식 중 빙의된 악마의 목소리, 관절 꺾임, 흉측한 얼굴 변화, 공중부양 등을 통해서 엑소시즘 과정의 공포를 배가시키며 일련의 의식들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고전적인 테마, 즉 신성 vs 악마, 선 vs 악의 충돌이 중심이 되어 이야기가 전개되는, <엑소시스트>가 진작에 짜 놓은 프레임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영화들이다. 하지만 지금 소개할 두 영화는 비록 엑소시즘을 주제로 하고 있지만 구마의식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치르기 이전과 치러진 이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서로 1년의 간격을 두고 출시된 이 두 영화는 특이하게도 모두 동일한 특정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한 편은 실화의 중심이 되는 구마의식 이전을 다루며 다른 한 편은 그 이후를 다룬다.



.레퀴엠(Requiem, 2006)

   두 영화가 공통으로 다루고 있는 실화는 수십 번의 구마의식 후에 1976년에 사망하게 되는 독일 태생의 아넬리제 미헬(Anneliese Michel, 1952~1976)이라는 여성이 주인공이다. 미헬은 1952년 독일 바이에른주 라이블핑의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가톨릭이 모태신앙이었기에 자연스레 신실한 가톨릭 신자로 성장한다.


구마의식 전의 미헬


   하지만 16세가 되던 해에 심한 경련을 일으켰고 병원에서는 간질로 판정했다. 그녀는 기도하는 동안 환각에 시달리게 되었고, "너는 저주받았다", "너는 지옥에서 썩게 될 것이다"라는 환청을 자주 들었다고 한다. 끊임없는 환각과 환청을 동반한 우울증으로 인해 계속 치료도 받았으나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그녀 나름대로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 병원을 다니며 약을 먹는 등 꾸준히 노력했지만 환각이나 환청은 더 심해졌으며 심지어는 아무데서나 오줌을 누고는 그것을 핥아먹는 이상 행동까지 하게 된다. 특히, 십자가나 묵주를 보면 자신의 몸이 거부 반응을 보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악마가 빙의된 것이 아닌가 스스로 의심하기 시작했다. 의학에 의존한 치료에도 불구하고 호전되기는커녕 이런 현상이 더 심해지면서 그녀는 스스로 구마의식을 가톨릭 교회에 요청하게 된다. 물론, 교회는 처음에 그것을 거부했으며 병리적인 차원의 문제로 판단하여 그녀에게 병원 치료를 권유했다. 당연히 교회에서도 구마의식이 미칠 사회적 파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런 이유로 교구장 주교의 허락이 있지 않는 한 구마의식을 거행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헬이 사는 근교의 교구장 대리인인 에른스트 알트 신부가 스스로 구마의식을 원하는 미헬을 꾸준히 살펴본 결과 내린 결론은 미헬이 평범한 간질 환자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미헬의 몸에 악마가 빙의했다고 판단한 신부는 교회에 구마의식을 정식 요청하게 된다. 1975년 요제프 슈탕글 주교는 외부에 철저히 비밀로 부칠 것을 조건으로 알트 신부와 렌즈 신부로 하여금 구마의식을 거행토록 허락했다. 결국 미헬은 병원과 약물을 통한 치료를 중단했고 스스로 원했던, 구마의식이라는 힘겨운 싸움에 돌입하게 된다.


레퀴엠(Requiem), 한스 크리스타안 슈미트 감독, 산드라 휠러, 버그하트 클로브너 주연, 2006


   영화 <레퀴엠>은 바로 미헬이 구마의식을 받기 직전까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영화는 미헬이 겪게 되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과 고통을 극복하기 위한 내적 갈등과 종교적 고민을 보여주며 그런 처절한 고민 끝에 스스로 구마의식을 결심하게 되는 과정을 그린다. 따라서 이 영화는 주인공의 심리 묘사와 각성이 주가 되는, 어찌 보면 한 개인의 성장 드라마라고도 볼 수 있다.


   1970년대 중반 독일의 어느 시골 마을, 한 여고생이 자전거로 힘겹게 언덕을 오른다. 언덕 꼭대기에 위치한 성당에 들른 그녀는 손을 꼭 모아 절하게 기도를 한다. 집으로 온 그녀는 우편함에 있는 우편물 하나를 확인하곤 만면에 피어나는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 부모에게 달려간다. 미카엘라 클링글러(산드라 휠러 분)란 이름을 가진 그녀는 21살이 되던 해 튀벵겐에 있는 어느 대학으로부터 온 합격 통지서를 부모 앞에 자랑스레 내밀었다. 하지만 부모의 표정은 떨떠름하기만 하다. 미카엘라는 간질을 앓고 있었고 그것 때문에 대학 입학도 포기한 채 몇 해를 병원에서 보내야만 했다. 물론 병원의 소견으론 여전히 재발 가능성을 안고 있었기에 보호자도 없이 혼자 도시에서 생활하는 딸의 모습을 부모는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딸의 꿈을 위해 엄마(이모젠 코게 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빠(버그하트 클로브너 분)는 대학 기숙사를 얻어 주었고 입학 기념으로 타자기까지 선물했다. 혼자서도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고 부모를 안심시킨 미카엘라는 동급생들보다 몇 년이 늦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상기시키며 공부에 매진한다. 수업 시간에 우연히 고등학교 동창인 한나(안나 블로멜러 분)를 만나게 된다. 고등학교 때 갑자기 사라져 안 보이다 몇 해 지나 홀연히 나타난 미카엘라였기에 처음에 한나는 그녀를 그리 달갑게 여기지 않았지만 한나 역시 기숙사 생활을 했기에, 그리고 미카엘라가 한나의 과제를 적극적으로 도와주었기에 한나는 그녀에게 마음을 열었고 둘은 빠르게 친해졌다. 병리학에서 간질이라 부르는 잠재된 병을 안고 큰 도시에서 홀로 불안정한 생활을 해야 했던 미카엘라는 한나를 매개로 하여 학생이라면 당연히 영위해야 할 평범한 학창 생활에 자연스레 녹아든다.


   가족 전체가 신실한 가톨릭 집안이었기에 미카엘라 역시 신앙심에 충만한 학생이었다. 간질을 앓으면서도 성녀 캐서린의 삶을 흠모했고 믿음으로 자신의 병력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마을 교구에서 매년 떠나는 순례 여행에 그 해도 가족들과 함께 했던 미카엘라. 순례지에서 첫날밤을 보낸 미카엘라는 아침 일찍 눈을 떴고 혼자 라운지에 내려가서 식탁에 앉았다. 엄마에게서 선물 받은 묵주를 꺼내보고는 물을 한잔 마시는 동안 묵주가 바닥에 떨어진다. 떨어진 묵주를 주우려 바닥으로 손을 뻗었던 미카엘라는 자신의 손이 묵주에 닿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무리 노력해도 묵주를 주울 수 없었고 그 순간 갑자기 무시무시한 환각과 환청에 휩싸여 괴로워하다 바닥에 쓰러져 기절해 버린다. 마침 아빠가 아래로 내려왔고 딸을 안아 달랬다. 순례 여행에서 학교로 돌아온 미카엘라는 무언가 결심한 듯 긴 머리를 자른 후 한나를 따라 파티에 참석한다. 거기서 미카엘라는 스테판(니콜라스 라인케 분)이라는 남학생을 만났고 호감을 느꼈다. 자신이 안고 있는 알 수 없는 그 병에 반항이라도 하듯 미카엘라 쪽에서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섰고 스테판이 이에 응했다. 밖으로 나와 키스를 나누던 도중 갑자기 미카엘라가 춤을 추고 싶다며 안으로 들어간다. 딥 퍼플의 노래 "앤썸(Anthem)"에 몸을 맡겨 취한 듯 몸을 흔드는 미카엘라, 펄럭이는 단발머리 사이로 힐끗 드러나는 그녀의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눈물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그런 그녀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스테판의 얼굴도 보인다.


   다음 날, 한나는 평소와 다르게 방에서 나오지 않는 미카엘라를 깨우러 그녀의 방으로 갔다. 하지만 미카엘라는 방에 스러져 있었고 다급히 그녀를 흔들었을 때 미카엘라는 무서운 무엇을 본 것처럼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가서는 몸을 움츠렸다. 미카엘라를 겨우 진정시킨 후에야 한나는 감히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숨겨둘 수밖에 없었던 친구의 사연을 듣게 된다. 고등학교 때 갑자기 학교에서 사라진 사연, 여전히 간질로 고생하고 있으며 병원을 다녀도, 약을 먹어도 나아지지 않는 병에 대하여, 또한 바깥의 시선이 두려워 그 고민을 함께 나눌 수 없었던 사연도... 한나는 진심 걱정했지만 그녀 역시 해 줄 수 있는 말은 병원에 가 보란 말밖에는 없다. 미카엘라는 결국 집 부근 교구의 본당 신부를 찾았고 자신의 고통을 털어놓았다. 환각과 환청, 묵주나 십자가에 손을 대지 못하는 상황, 그녀 스스로의 진단에 의하면 그 고통의 원인은 바로 종교적인 것이었다. 이미 미카엘라는 신부에게 종교적인 처방을 암묵적으로 요청하고 있었지만 신부는 펄쩍 뛰면서 병리적인 문제로 치부했고 무조건 병원에 가라면서 그녀를 꾸짖기만 할 뿐이다. 크게 실망한 채로 성당을 나왔지만 미카엘라는 그래도 스스로 무너지지 않기 위해 아무렇지 않은 듯 일상을 영위하고자 한다. 공부도 더 열심히 하고 친구들과 함께 뱃놀이도 가고 스테판과 한나와도 더 친밀하게 지냈으며 병원도 꾸준히 다녔다. 그런 그녀의 행위들은 자신도 일상의 지극히 평범한 삶을 영위할 수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기 위함이기에 그 노력이 안쓰럽게 여겨진다.


   하루는 본당 신부가 그녀를 돕기 위해 교구 신부 보조인 보케트 신부를 데리고 미카엘라를 찾아왔다. 이전 그녀의 요청에 본당 신부는 그녀의 문제를 병리적인 관점으로 몰아 매몰차게 그 요청을 거절했지만 신부 역시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암묵적인 요청은 구마의식이었고 그것은 커다란 사회적 파장을 불러올 수 있었기에 지극히 신중해야만 했다. 그래서 본당 신부는 구마의식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보케트 신부에게 도움을 청했기에 신부가 그녀를 직접 보러 온 것이다. 보케트 신부는 그녀를 달랬고 기도를 통한 종교적 힘으로 그녀의 문제를 극복하자고 제안하며 미카엘라에게 힘을 보탰다. 그 후로 한 동안 미카엘라는 스테판과 한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안정적인 일상을 보낸다. 그들과 보내는 지극히 일상적인 삶의 과정들이 전개되는 동안 배경으로 흐르는 Amon Duul의 "Paramechanical World"라는 음악은 역설적이면서도 매우 인상적이다. 그렇게 크리스마스가 다가왔고 교수는 남들 놀 때 공부하는 기분을 느껴보라며 정초 연휴가 끝날 때까지의 과제를 하나 던지고 종강 수업을 마무리한다. 한나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온 미카엘라는 언제나 자신을 아끼는 아빠와 언니를 따르는 동생, 그리고 항상 차갑기만 한 엄마와 재회를 한다. 스테판에게 잘 보이기 위해 산 이쁜 옷을 엄마에게 자랑하지만 "그 옷이 네게 어울린다고 생각하니?"라는 차가운 말만 돌아온다. 크리스마스 이브의 화기애애한 가족 모임, 서로 선물을 주고받으며 크리스마스를 축하했다. 성탄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옷을 갈아입으러 방으로 온 미카엘라, 하지만 튀빙겐에서 사 온 그 옷이 없다. 동생을 의심해서 몰아세웠지만 쓰레기 통에 버려진 옷을 발견했고 엄마가 버렸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결국 엄마와 심한 말다툼을 벌였고 미사에 참석했지만 도중 미카엘라는 밖으로 나와 집으로 돌아와 버린다. 방에서 혼자 엎드려 울던 미카엘라에게 다시 발작이 왔다.


   다음 날, 아빠는 미카엘라를 보케트 신부의 집으로 데려갔다. 보케트 신부는 미카엘라를 달랬지만 미카엘라는 불행한 자신의 처지에 비관하고 신부 역시 기도의 힘만으로 극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신한 듯하다. 신부와의 만남도 별 소득이 없었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마지막 보루였던 아빠마저도 이제는 지쳤다며 괴로워했다. 미카엘라는 조용히 짐을 챙겨 다시 기숙사로 돌아왔다. 절망적인 상황에 내몰린 마카엘라, 하지만 절친 한나는 교생 실습으로 한 달 정도 기숙사를 비워야 했고 그 상황을 오롯이 홀로 견뎌야만 했다. 미카엘라는 미친 듯이 학위 논문에 매달린다. 학위 논문은 어찌 보면 그녀가 정상임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마지막 행위일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그 마무리를 위해서 그녀는 혼자 신성에 반하는 힘과 싸우면서 겨우 겨우 논문을 타이핑했고 제발 이것만 끝내게 해 달라고 빌었다. 하지만 불경스러운 그 힘은 그녀를 방해했고 타자기를 두드리는 것조차도 어려웠다. 중간에 타자기 먹지가 떨어져 스테판을 불렀고 스테판이 대신 타이핑을 해 주면서 이틀 밤을 꼬박 새워 기어이 논문을 1차로 완성했다. 한나와 다르게 미카엘라의 상황을 알지 못했던 스테판은 느꼈을 것이다, 논문에 대한 이상스러울 만큼 집요한 그녀의 집착을... 잠이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미카엘라는 뭔가에 홀린 듯 또 스테판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클럽에서 미친 듯이 혼자 몸을 흔드는 미카엘라, 그 모습을 바라보던 스테판은 기어이 밖으로 나와 버린다. 미카엘라가 따라왔지만 끔찍한 이틀을 경험했던 스테판은 이별을 통보했다.


   학교로 부모와 본당 신부, 보케트 신부가 찾아왔다. 미카엘라 앞에서 기도를 했지만 미카엘라는 그것을 거부했다. 이제 보케트 신부는 어느 정도 확신한 듯했고 구마의식을 제안했다. 본당 신부와 아빠는 극구 반대했지만 이미 주교의 허락까지 받았다고 한다. 아빠는 미카엘라에게 애원했다, 아니라고, 약을 먹고 있으며 점점 나아지고 있다고, 정상이라 말하라고... 미카엘라는 그렇다고 했지만 신부의 손길마저 거부하는 마카엘라의 상태는 그 불경스러운 힘이 빙의되어 구마의식을 막기 위해 자신은 정상이라고 계속 우기는 듯하다. 다음 날, 한나가 돌아왔고 그전까지 자신에게 고통을 호소하는 미카엘라가 아닌 다른 그녀를 느꼈다. 한나는 스테판을 찾아 미카엘라의 상태를 이야기했고 더 이상 그녀를 방치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스테판에게 먼저 미카엘라를 고향 집으로 데려다주게 했다. 스테판과 함께 집으로 온 미카엘라... 하지만 또다시 발작이 시작되었고 그 정점에 다다른다. 가족들을 거부하며 부엌으로 가서는 집기를 집어던진다. 아빠가 기도를 했지만 그것에 극단적인 반응을 보이고 사태는 점점 더 악화된다. 동생은 공포에 질려 계단 벽에 기대고는 언니의 비명 소리에 귀를 막을 뿐이고 스테판은 어찌할 줄을 모른다. 결국 본당 신부와 보케트 신부가 왔다. 보케트 신부가 미카엘라를 진정시키려 하지만 상황은 이를 거부했고 저절로 구마라는 의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빙의된 악령을 몰아내려는 보케트 신부의 격한 주문과 귀가 찢어질 듯 이를 거부하는 미카엘라의 괴성... 한 참의 소란이 마무리되었고 미카엘라는 침대에 누웠다. 정상으로 돌아온 미카엘라는 가족들과 스테판에게 스스로 희망을 보여 주고자 했고 신부에게는 그녀가 언제나 동경하던 성 캐서린의 삶을 이야기했다. 미카엘라가 잠든 사이 한나가 집으로 달려왔고 잠든 미카엘라를 깨웠다.


   한나는 울음을 터뜨렸지만 미카엘라는 평온해 보였다. 한나의 제안으로 둘은 차를 몰고 산책을 나섰다. 고향 시골의 언덕을 오르며 신선한 바람을 느낀다. 언덕 아래 넓게 펼쳐진 고향의 논과 밭들의 풍경이 매우 아름답다. 언덕의 벤치에 앉아 한나는 둘이서 튀빙겐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병원 치료를 받으며 정상적인 학교 생활이 가능하다고 힘을 북돋웠다. 하지만 미카엘라는 학교가 아니라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한다. 이미 결심이 섰고 스스로 결정을 내린 듯하다. 성 캐서린을 언급하며 자신의 그 모든 상황이 신에 의해 결정되었음을 강조한다. 그녀의 고통, 그것은 신의 시험이며 자신의 몸에서 불경스런 그 힘은 기어이 빠져나갈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미 그녀는 각성했다, 구마의식을 받기로 스스로 결정했기에 그녀는 이제 오히려 평온하다. 결코 과학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하지만 정상의 범위에서 의학이라는 또 다른 권력이 이성과 과학이라는 명분 아래 진단이라는 행위를 통해 정신이상이라고 분류해버린 알 수 없는 힘과의 오랜 사투를 거쳐 이제, 그녀는 의학적 대안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확신했기에 구마의식이라는 종교적 대안을 스스로 담담하게 받아들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영화는 집으로 가기 위해 차에 올라 탄 미카엘라의 얼굴을 전면에 담는다. 어린 나이에 이미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인 양, 하지만 앞으로 자신이 맞닥뜨려야만 할 구마라는 무시무시한 고통의 과정을 기대하듯, 인정과 체념과 희망이 혼재하는 미카엘라의 담담하고도 미묘한 표정과 더불어 다시 딥 퍼플의 "앤썸(Anthem)"이 처연하게 흘러나온다.



   지금까지 간략하게 정리한 영화의 내용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엑소시즘 관련 영화라고 해서 영화에서 오컬트 류의 호러물을 기대한다면 크게 실망할 것이다. 독일에서 제작된 <레퀴엠>은 유럽 영화 특유의 1인칭 시점을 고수하고 있다. "특유의 1인칭 시점"이란 것은 영화는 오롯이 주인공의 의식을 흐름을 따라서 전개되지만 관객은 객관적 위치에서 그저 주인공을 바라보게만 만든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써 3인칭 관찰자 시점의 소설처럼 관객을 철저하게 제삼자의 자리에 둠으로써 객관성과 리얼리티를 확보하는 동시에 주인공의 탁월한 내면 연기를 통해서 실질적으로는 1인칭 시점의 이야기가 전개되도록 한다. 이준익 감독 특유의 인물 묘사로 필자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던 영화 <박열>이 일본에서는 예술 영화관에서 개봉되어 인기를 끌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소위 예술 영화로 분류되는 분야에서의 전통도 강하고 나름 깐느에서 인정을 받고 있는 일본에서 <박열>이 예술 영화로 분류되어 제한된 공간에서 개봉되었다는 것 자체도 재미있지만 어찌 보면 <레퀴엠>이 우리나라에서 개봉되었더라면 이런 분류에 따라 이 영화 역시 예술 영화관으로 갔을 것이라 확신한다. 이 말은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흥행과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는, 지루함을 동반하는 영화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류의 유럽 영화들은 두 번, 세 번 보게 된다면 영화의 내용을 곱씹게 되면서 그 진가를 새삼 느낄 수 있게 만드는 그런 성격의 영화다.


   <레퀴엠>에서는 몇 차례에 걸쳐 미카엘라의 발작 증세를 보여준다. 하지만 여느 다른 엑소시즘 영화와는 다르게 철저하게 3인칭 관찰자 시점을 고수한다. 다시 말해, 오컬트를 표방하는 다른 엑소시즘 영화라면 미카엘라가 경험하는 그 무시무시한 환청이나 환각을 확대, 과장하여 자극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주인공의 시점을 그대로 관객에게 전이시켰겠지만 이 영화는 무미건조할 정도로 자극적인 과장 없이 철저하게 관객을 제삼자로 머물게 만들어 미카엘라가 보고 느꼈을 공포는 오롯이 미카엘라만의 주관적인 주장으로 머물게 한다. 묵주나 십자가에 닿지 못하는 미카엘라의 떨리는 손을 보여주지만 관객의 입장에서 그것은 단지 미카엘라의 행위일 뿐이며 정말 닿지 못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남긴다. 그 결과로 미카엘라의 그 행위는 관객 입장에서도 단순한 발작 증세로밖에 머물지 않는다. 결코 과잉된 행위나 이상 현상을 볼 수 없기흔히 엑소시즘 류의 빙의를 생각하면 떠올리게 되는 초현실적 공포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관객들로부터 억지 공감을 이끌어내기보다는 관객들에게 주인공이 진짜로 빙의가 되었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심어줌으로써 주인공의 입장에 대한 판단을 결국 관객 개개인에게 맡겨 버린다. 하지만 영화는 동시에 내레이션 등의 수단을 통한 내면적 독백이 전혀 없는 철저한 1인칭 시점을 고수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내면 연기에 대한 주연 배우의 개인기에 의존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주인공의 말 하나, 몸짓 하나, 표정 하나에도 집중해야만 할 영화이기도 하다. 자신의 내적 고통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시선 때문에 그 고통을 밖으로 표출하지 못하고 안으로 삼켜야만 하는 모순된 개인의 처지를 철저하게 개인적인 대사, 몸짓, 표정을 통하여 자신의 내면을 관객에게 보여줘야 하며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을 그런 내면의 독백을 통해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과 변화, 종국의 각성을 호소하고 전달해야 하기에 주인공 '산드라 휠러'의 그 연기를 칭찬할 수밖에 없다. 실로 딥 퍼플의 "앤썸"에 몸을 맡긴 채로 몸을 흔드는 와중에 언뜻 비치는 미카엘라의 눈물이나, 또한 "앤썸"과 함께 하는 엔딩에서의 그녀의 처연한 얼굴 표정은 그녀의 내적 고통과 각성을 있는 그대로 토로하고 있는 듯하다. 3인칭 관찰자 시점과 1인칭 주인공 시점이라는 이런 서로 모순되는 방식을 통해 이 영화는 개인의 믿음과 사회의 합리성 사이의 대립을 보여줌으로써 세속과 신앙, 이성과 믿음, 과학과 종교 사이의 충돌까지 나아가는 거대 담론으로 관객을 밀어 넣는다. 또한 이를 통해 주체적 각성으로 귀결되는 의식의 흐름을 전개하면서도 그 각성에 대한 공감 여부는 역시 관객 개개인의 판단의 몫으로 남게 된다.



.엑소시즘 오브 에밀리 로즈(The Exorcism of Emily Rose, 2005)

   구마의식은 1975년부터 1976년까지 대략 10개월 동안, 주당 1~2회씩 총 67차례 거행되었으며 최대 네 시간까지 걸린 의식도 있었다고 한다.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미헬은 음식을 거부했고 자해를 일삼았으며 점차 흉폭해져서 남자 세 명이 그녀를 붙잡고 쇠사슬로 묶어놓아야 할 정도까지 이르렀다고 전해진다. 


구마의식 중의 미헬, 앞서 게시된 사진과 동일 인물이다.


   신부들은 구마의식 과정을 녹음을 했는데 후에 재판에서 증거로 제출된 녹음기에서 흘러나온 미헬의 기괴한 음성은 다음과 같은 말을 담고 있었다고 한다.


내가 바로 그다
나는 카인에게도 있었고
네로의 몸속에도 있었다
한때는 유다와도 함께 했다
나는 레기온에게도 있었다
내가 바로 베리알이다
나는 인간의 지배자 루시퍼다


   수십 차례의 구마의식 끝에 그녀는 23세의 나이로 결국 사망한다. 1971년 7월 1일 잠자던 중에 사망했으며 사망 당시 몸무게는 30.91Kg이었다고 한다. 1년여에 걸친 기아 상태로 인한 영양실조와 탈수가 사인이라고 부검 보고서는 밝히고 있다. 이어서 검찰은 미헬의 부모와 에른스트 알트 신부, 아르놀트 렌츠 신부를 고소했고 민감한 법정 공방이 전개된다. 영화 <엑소시즘 오브 에밀리 로즈(이하 에밀리 로즈)>는 바로 미헬 사망 후의 이러한 법적 공방을 다루고 있다. 그녀의 사망은 세속의 법적 논쟁을 일으킨다. 검시관의 부검 결과 여러 자해 흔적과 영양실조에 의한 사망이라고 결론이 났고 검찰에서는 구마의식을 거행한 신부를 과실 치사로 고발한다. 영화는 이러한 법적 재판 과정을 그리고 있으며 그렇기에 <에밀리 로즈>는 오컬트 류의 호러 영화가 아니라 법정 스릴러 형식을 취하게 된다.


엑소시즘 오브 에밀리 로즈(The Exorcism of Emily Rose), 스콧 데릭슨 감독, 로라 린니, 톰 윌킨슨, 제니퍼 카펜터, 캠벨 스코드 주연, 2005


   영화는 독일이 아니라 미국의 어느 시골 마을로 배경을 옮겨서 시작된다. 황량하고 을씨년스러운 시골의 어느 허름한 저택, 주변의 풀도 다 말라버렸고 마당엔 썩은 나뭇잎과 과일들이 제멋대로 뒹굴고 있으며 너구리과의 들짐승들만이 돌아다닌다. 오랜 시간 동안 관리가 되지 않은 듯 저택의 처마 아래에는 벌집이 이미 크게 자랐다. 잿빛 하늘을 머금은 우중충한 날씨마저 을씨년스러움을 더하고 있는 이곳에 중년의 한 남자가 저택으로 들어선다. 저택 안에는 중년의 부부와 가톨릭 신부, 그리고 경찰관 한 명이 있다. 안내를 받아 2층의 어느 방으로 들어간 그 중년의 남자는 얼마 후 거실로 나와서 조심스레 말을 꺼낸다; 말씀드리기 죄송합니다만 따님의 죽음은... 아무래도 자연사가 아닌 것 같습니다. 검시관인 이 중년 남자의 말이 끝나고 잠깐의 정적이 흐른 후 경찰관이 한 마디 거든다; 신부님... 같이 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제 장면은 법원 앞으로 바뀌었다. 시끌벅적하게 모여 있는 수많은 기자들이 법원에 출두하는 무어 신부(톰 윌킨슨 분)와의 인터뷰를 따기 위해 난리법석이다. 사법부는 골치가 아프기만 하다. 구마의식으로 인해 에밀리 로즈(제니퍼 카펜터 분)라는 한 소녀가 죽었고 어떻게든 조치를 취해야 했기에 우선은 의식을 주재한 무어 신부를 과실 치사로 기소했다. 하지만 종교와 연관되어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는 사안이기에 일반 범죄 다루듯 다룰 수는 없다. 기계적이라 불리더라도 종교와 세속 사이에서의 아슬아슬한 중립은 유지해야만 한다. 고심 끝에 가톨릭 신자는 아니지만 감리교 신자인 에단 토머스(캠벨 스코드 분)라는, 깐깐하지만 합리적인 검사를 배치했다. 그렇다면 가톨릭 쪽의 대응은? 교회는 살해 혐의로 기소되었고 범죄 사실이 거의 소명되어 실형이 떨어질 확률이 매우 높았던 밴 호퍼라는 범인을 변호해 무죄를 이끌어내어 유명세를 탄 에린 브루너(로라 린니 분)를 변호사로 선임했다. 교회의 바람은 간단했다, 무어 신부가 법정의 증인석에 서는 것을 막는 것이다. 구마의식이라는 중세 시대의 산물을 현대에서도 용인했다는 비판을 피하고 최대한 조용히 사건을 덮는 것이 교회의 목적이다. 하지만 피의자 신분으로 구금된 무어 신부는 확신범이었다. 사법부 역시 종교계와의 분쟁을 원치 않았기에 재판을 피하기 위해 최소한의 형량으로 합의를 시도했지만 어떠한 형량도 상관치 않을 무어 신부는 요지부동이었다. 이에 교회는 비록 살인범의 변호를 맡았더라도 무죄를 이끌어낸 에린의 능력을 높이 싸서 그녀로 하여금 신부를 설득하게 할 요량이었다. 에린 역시 야망이 있는 전도유망한 변호사였기에 자신이 소속된 로펌의 공동 대표 자리를 조건으로 내걸어 누구도 맡지 않을 무어 신부의 변호를 수락하기에 이른다. 


   무어 신부를 접견하기 위해 구치소에 들른 에린, 예상대로 무어 신부는 확신범이었다. 신부는 에밀리의 구마의식을 법정에서 있는 그대로 증언하고자 했지만 에린은 막아야 했다. 하지만 신부는 자신의 증언을 변호인 선임의 조건으로 내걸었기에 우선 에린은 수용했다. 검사 에단이 에린을 찾아와 재판을 원하지 않는다는 재판부의 의견과 더불어 형량 협상을 다시 제안했지만 에린은 재판으로 가기로 한다. 그렇게 사회적인 주목을 받으며 종교 대 세속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 재판은 단순히 그런 구분의 문제를 넘어선다. 종교 대 세속일 뿐만 아니라 믿음이라는 지극히 주관적인 의지를 바탕으로 하는 신앙과 이성에 근거하여 객관적 합리성을 추구하는 과학, 좁게는 의학의 대립이다. 비록 종교의 일을 세속에서 판단하지 말라는 종교적 불문율이 있지만 현시대의 종교는 세속과의 교집합 속에서 서로 겹치는 공동체를 구성하기 때문에 로마의 법에 따라야만 했고 세속에서의 구마의식은 우리가 익히 느끼게 되는 황당무계한, 어찌 보면 광신과 사이비의 영역에서나 속할 일이었다. 다시 말해서, 이 재판은 상식이라는 차원에서 보더라도 무어 신부에게는 지극히 불리한 게임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재판은 상식적으로 예상 가능한 선에서 진행된다. 에단 검사는 배심원들에게 구마의식 전의 에밀리와 구마의식 후의 에밀리의 사진을 대비시켜 보여준다. 다음으로 에밀리의 주치의를 증인으로 내세워 에밀리의 간질 증세와 약물 치료의 효과를 증언케 하여 신부가 약물 치료를 중단케 함으로써 충분히 치료 가능했을 간질을 악화시켜 죽음에 이르게 하였음을 증명코자 했다. 이에 에린이 주치의의 논리적 허점을 짚어냄으로써 증언의 모순을 지적하면 에단은 더 권위 있는 의학박사를 증인으로 내세웠고 에린 쪽에서는 또다시 논리가 가질 수밖에 없는 빈틈을 예리하게 찾아냈다. 


   하지만, 사실 에린의 반박은 다소 궁색할 수밖에 없었고 반론의 폭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주치의나 의학박사 모두 의학이라는 과학적 논거를 통해 에밀리의 병을 치료할 수 있다고 확신했고 에린의 반박은 그 확신 자체가 백 퍼센트의 과학적 근거를 갖지 못하는 사적 견해로 몰아가는 방법이었지만 상식이 일방적으로 기대고 있는 과학적 논거를 확실하게 뒤집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경험론에 대한 반박의 경우로, 까마귀는 검다는 사실에 대한 증명의 예를 들어보자. 경험론자들은 귀납적 방법으로 한 마리의 검은 까마귀로 시작해서 10마리, 100마리의 까마귀가 검기 때문에 다른 모든 까마귀도 검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으로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한 마리의 흰 까마귀가 나오지 말라는 보장이 있는가?라는 식의 논거를 펼침으로써 일반화의 오류에 해당하는 역공을 펼치지만 현실은 까마귀는 검다는 것이 정설일 수밖에 없다. 에린의 반박은 이런 종류의 것이었고 묘한 설득력을 지니지만 상식의 선에서 보면 억지스러운 측면이 있음을 부정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구마의식 현장에 있었던 에밀리의 아버지나 그녀의 남자 친구 모두 당시의 초현상적인 상황을 증언하여 무어 신부의 편을 들었지만 그런 현상들 역시 의학적 소견으로 풀어낼 수 있음을 예시하는 에단의 논거에 힘이 빠지는 상황이다. 이에 에린은 빙의라는 현상이 가능함을 증명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구마의식을 주재했던 다른 신부들을 증인으로 신청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가톨릭 외부에서는 엑소시즘 자체에 대한 인식이 구시대의 산물로, 미신적인 요소로 여겨졌고 교회 스스로도 철저한 자체 검증 하에 간헐적으로 용인하여 비밀리에 치러지는 의식이었기에 신부들의 증언을 교회가 허용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에린은 정신 의학자이자 인류학자로서 초자연 현상과 빙의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전문가인 아다니 박사를 증인으로 내세웠다. 박사는 약물 치료가 에밀리를 더 악화시켰고 구마의식을 실패하게 만들었다면서 자신의 연구를 토대로 빙의가 가능함을 설득력 있게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에단은 그녀를 단순히 선무당 취급하는 전략을 취함으로써 그녀의 반론을 무력화시킨다.


   그렇게 에린이 궁지에 몰리고 있을 때 그녀의 보좌관이 뜻밖의 증인을 찾아냈다. 바로 무어 신부의 신자였고 오랫동안 정신 질환을 다뤄온 베테랑 의사 그레이엄 카트라이트 박사였다. 무어 신부는 구마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에밀리의 건강 상태를 염려하여 카트라이트 박사를 참관인으로 참여시켰다. 하지만 의사의 요청으로 무어 신부는 박사에 관해서는 에린에게 일절 이야기하지 않았다. 에린이 그 의사를 찾아가서 증인석에 서 줄 것을 설득했지만 의사는 알 수 없는 겁에 질려 있었고 증언을 거부했다. 대신 신부가 자신에게 맡겼던 것이라며 구마의식 과정을 녹음한 녹음기를 그녀에게 내놓을 뿐이었다. 재판을 뒤집을 수 있는 결정적인 희망이 꺾이는 순간이다. 그런 상황에 더하여 신부는 처음 약속대로 지금부터 자신이 증언대에 직접 서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이젠, 지금까지의 방식을 전환해야 할 순간이다. 에린의 방식 역시 과학에 대하여 과학으로 반론을 펼치고자 하는 것이었고 결국 한계에 봉착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었다. 그 원점은 바로 신성의 영역을 세속의 판단에 맡기지 않는 것이다. 이는 결국 무어 신부가 증언대에 서야 함을 의미한다. 그 무렵 에린 역시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에밀리가 경험했던 새벽 세 시의 사건들이다. 무어 신부의 말을 빌리자면 새벽 세 시가 악령들의 기운에 가장 강해지는 시간이라고 한다. 사건을 맡고 무어 신부를 만났던 첫날, 집에서 잠을 자면서 자신의 시계가 새벽 세 시에 멈춰 버렸으며 그녀 역시 그 시간에 에밀리나 신부가 겪었던 이상한 현상을 직접 겪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겪으면서 그녀는 두려움을 느꼈고 잠들기 전에 누우면 자신의 눈 위치에 시간을 확인할 수 있게 두었던 전자식 시계를 반대로 돌려놓기도 했다. 또한 그런 두려움은 스스로 자신이 확신하고 있었던 무신론적 관점에 의문을 던지게 만들었으며 에린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계기로 작용한다. 지금까지는 철저하게 성공을 위해 악인이라도 변호를 맡았던 에린이었고 또한 교회의 바람대로 무어 신부를 증언대에 서는 것을 막기 위해 그를 설득했지만 그런 자신의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하게 된다. 특히 사건의 배후를 추적하던 도중 이전에 익명으로 묻혀 있던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떨치게 만들었던, 자신이 변호하여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 주었던 살인범 벤 호퍼가 또다시 젊은 부부를 살해했다는 뉴스를 접하게 되면서 그 회의는 이제 반환점을 만났고 에린은 직접 증언대에 서겠다는 무어 신부의 요청을 수락하기에 이른다. 물론 이 과정에서 로펌 대표와의 불화는 어쩔 수 없는 것이리라. 


   증언대에 선 신부는 자신이 에밀리의 요청을 받아들인 과정과 구마의식의 과정을 상세하게 증언했다. 또한 구마의식 과정을 녹음한 녹음기도 증거로 채택되어 법정에서 재생되었다. 물론 녹음기와 녹음된 내용 역시 영화가 기반을 두고 있는 실제 사건 그대로 재연되어 변성된 에밀리의 목소리로 발화되는 라틴어와 더불어 앞서 언급했던 아넬리제 미헬의 '루시퍼 찬가'가 법정에 울려 퍼진다. 하지만 이 증거에 대하여 인간의 성대는 두 개라는 사실과 변성된 목소리는 활성화되지 않은 다른 성대에 의한 것이며 에밀리의 라틴어는 그녀가 고등학교 때 라틴어 수업을 들었다는 사실을 들어 에단은 반론을 펼친다. 그렇게 며칠에 걸친 무어 신부의 증언이 계속되는 동안 에린은 카트라이트 박사를 계속 설득하여 증인석에 서기로 약속을 받아냈다. 하지만 무어 신부에 대한 에단의 반박이 마무리되었을 때 오기로 했던 박사는 오지 않았다. 결국 증언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재판은 다음을 기약했지만 에린이 법원 밖으로 나왔을 때 카트라이트 박사가 법원 밖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매우 겁에 질려 있었고 자신의 주위를 배회하는 악마의 존재를 확신한다며 신부를 존경한다는 말을 전하고는 악마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뜻하지 않게 차에 치여 죽어 버린다. 신부를 다시 찾은 에린, 박사의 죽음을 전하며 이제 재판은 패배로 끝났다고 자조했다. 하지만 신부는 그렇지 않다며 법정에서 에밀리의 이야기를 마저 끝내야 한다고 주장하며 두툼한 편지 한 통을 그녀에게 건넨다. 구마의식이 실패로 돌아가고 식음을 전폐한 채 죽음을 기다리던 에밀리가 직접 쓴 편지라고 했다. 그녀의 편지를 읽은 에린은 로펌 대표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재판까지 무어 신부를 증언대에 세우기로 결심한다.


   재판 최종일, 에린은 증인으로 다시 무어 신부를 내세웠고 로펌 대표는 재판장을 박차고 나가 버린다. 증언대에 선 신부는 에밀리의 편지를 꺼내 들었고 그것을 낭독했다. 그 편지는 에밀리가 구마의식에 실패한 그날 밤의 체험을 쓴 것이다. 정신을 잃은 채 침대 위에 누워 있었을 때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들판으로 나갔다. 뿌연 안갯속에서 어느 순간 그녀는 들판 위에 쓰러져 있는 자신의 육신을 보았고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보았을 때 성모 마리아가 서 있었다고 했다. 성모께서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시면서 그녀의 고통을 잘 안다고 말씀하셨다. 그녀는 물었다, 왜 자신이 그런 고통을 당해야 하는지, 왜 악마가 자신의 몸에서 나가지 않는지... 안됐지만 에밀리, 그들은 계속 머물 것 같구나, 이제 육체에서 벗어나 나와 함께 가자꾸나... 물론 선택은 에밀리의 몫이었다. 성모는 계속 머물길 원한다면 고통은 영원할 것이지만 그 고통은 사람들로 하여금 영적인 세계의 존재를 믿게 할 것이라고 한다. 에밀리는 주저함 없이 머무는 쪽을, 육신의 고통을 선택했다. 곧바로 극심한 통증과 함께 에밀리의 영혼은 쓰러졌고 기어서 겨우 육신과 재결합했다. 다시 일어섰을 때 에밀리의 양 손에는 선명한 성흔이 새겨져 있었다. 에밀리는 결국 선이 악을 이길 것을 확신하며 자신의 체험으로 악의 존재를 깨닫게 하기 위해 순교를 택한 것이다. 편지의 마지막을 읽으며 신부는 눈물을 흘렸고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검사 에단은 최후 변론에서 성흔이 아니라 에밀리의 자해로 인한 상처였으며 에밀리를 죽음으로 내몬 것은 악마가 아니라 바로 무어 신부 자신이라고 역설했다. 최후 변론에 나선 에린은 이야기했다. '사실'이란 것은 모든 것을 배제하는 것이며 특히 사실이 배재하는 것은 바로 '가능성'이라고... 상식에 기대어 사실을 이야기하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을 부정할 수 있는지 배심원단에게 묻는다. 그리고 진정한 사실은 무어 신부가 진정으로 에밀리를 위했으며 마지막까지 에밀리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증언대에 섰다는 점이라고 역설했다.


   최종 판결이 나왔다. 배심원단은 무어 신부의 유죄를 인정했다. 대신 판사에게 형량 책정에 있어서 미결 구금일수를 반영해 줄 것을 권고했다. 판사는 그것을 수용했고 이렇게 말했다, "피고는 유죄입니다, 하지만 이제부터 자유입니다!" 미결 구금은 최종 판결이 날 때까지 피의자를 구금하는 제도이며 무어 신부 역시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구치소에 계속 구금되어 있었다. 배심원단은 비록 유죄라고 판단했지만 형량을 미결 구금일수만큼 하되 그 기간을 형량에 반영할 것을 권고했고 검사 에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판사가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무어 신부는 판결이 내려진 그 순간 자신의 형기를 모두 마친 셈이 된다. 종교와 세속의 경계를 아슬하게 넘나들어야만 했던 재판은 이렇게 양쪽에게 만족할 만한 최적의 판결로 종결되었다. 하지만 법조계의 전반적인 평가는 에린의 압승 쪽이었고 밴 호퍼 변호에 이은 연속된 에린의 승리였기에 그녀의 인기는 더욱 솟구쳤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재판 전의 야심으로 가득 찬 변호사가 더 이상 아니었다. 로펌 대표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고 에린에게 공동 대표 자리를 제안했지만 그녀는 정중히 거절했다. 에밀리와 무어 신부의 재판을 통해 그녀 역시 정신적인 성장을 했던 터였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공동묘지, 에밀리의 무덤 앞에 선 신부와 에린. 악마와 접촉한 사제는 당분간은 교회로 돌아가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신부는 에린에게도 약해지지 말 것을, 사악한 기운에게 계속 맞설 것을 당부했다. 에밀리의 묘비석에는 무어 신부가 직접 고른,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얻으라"라는 빌립보서 2장 12절의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그날 밤,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는 에린... 문득 이전에 무서워서 반대편으로 돌려놓았던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에린은 시계를 다시 자신 쪽으로 돌려놓고 잠을 청한다.



   영화 <에밀리 로즈>는 재판 과정에서의 법정 다툼이나 등장인물에 좀 더 극적인 요소들을 각색했을지언정 실제 사건에 상당히 기반하고 있다. 미헬의 죽음 이후에 벌어졌던 재판은 독일 전체의 초미의 관심사가 된 것도 사실이었고 법원에서의 증언이나 판결 역시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영화에서 녹음기로 흘러나왔던 에밀리의 기괴한 육성과 루시퍼 찬가는 신부의 재판 과정에서 실제로 증거로 제출되었고 재생되었던 것이다. 실제 판결 역시 신부들에 대하여 유죄가 인정되었고 법정형이 선고되었지만 6개월의 집행유예도 함께 받아 영화와 마찬가지로 곧바로 풀려났으며 그 후 신부들은 항소를 포기하고 모든 인터뷰를 거부한 채 은둔 생활에 들어갔다고 한다. 결과론적으로 이 판결은 종교와 세속 사이의 적절한 균형점을 맞춘 판결로 평가받았다. 


   <레퀴엠>이 주로 개인에 초점을 맞추어 신앙 대 이성의 대립을  보여준다면 <에밀리 로즈>는 법정 논쟁을 통해서 종교와 과학, 신앙과 이성의 충돌을 더욱더 다채롭게 보여 준다. 이런 차이는 각 영화를 만든 제작 국가의 차이점에도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레퀴엠>이나 <에밀리 로즈> 모두 동일한 실화를 다루고 있지만 하나는 유럽 영화라는 점과 다른 하나는 미국 할리우드 영화라는 차이가 존재하며 <레퀴엠>의 경우 유럽 영화 특유의 1인칭 관점이 그대로 부각되어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을 무미건조하게 쫓아가는 반면에 <에밀리 로즈>는 재미적 요소를 추구하는, 철저히 할리우드식 방법을 따른다. 영화의 시기를 보더라도 후자가 실화에 대한 최대한의 객관성을 보장하면서 재미적 요소를 고려한 듯하다. <레퀴엠>이 구마의식 이전의 과정을 그렸기 때문에 <에밀리 로즈>가 어쩔 수없이 구마 이후의 과정을 선택한 것은 아닌 듯하다. <에밀리 로즈>가 1년 먼저 제작되었기 때문에 선택권은 <에밀리 로즈>에 있었고 재미라는 요소를 고려한다면 이미 다양한 법정 스릴러의 경험이 풍부한 할리우드였기에 의식 이후의 재판 과정을 선택했을 것이고 재미라는 요소를 법정 스릴러의 형식으로 녹여냈을 것이리라. 하지만 <에밀리 로즈>가 나름 차별성을 띄는 이유는 바로 신앙 vs 이성이라는 거대 담론을 다양한 법정 논쟁을 통해서 미시적으로 잘 풀어냈다는 점과 이런 논쟁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관객들을 배심원단의 일부로 위치시킨다는 데에 있다. 검사는 일관되게 과학적 논거를 통해서 배심원단에 호소를 했고 에린은 요소요소 논거의 허점을 짚어내면서 빙의라는 현상까지도 과학적으로 반증하려 했다. 이렇게 과학이라는 이름 하에 진행되는 논쟁에 한계를 느낀 에린은 그 틀거리를 벗어나는 극적인 전회를 통해서 또 다른 전기를 마련하고 관객들은 마치 배심원단이 된 것처럼 그 논쟁에 몰입하게 된다. 이런 과정과 함께 우리는 에린이라는 인물의 내적 성장도 목격할 수 있다. 무신론자였으며 적절한 기회주의자, 방관자였던 그녀는 무어 신부의 변호 과정을 거치면서 신의 존재 부정에 대한 판단 중지와 더불어 정의에 대한 공감, 불의에 대한 저항을 지향하는 존재로 변모한다. 이러한 에린의 자기 지양은 바로 재판 과정을 통해 스스로 깨달았고 역설했던 "가능성"에 대한 실존적 자각의 힘이었을 것이다.




   두 영화 모두 동일한 실화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구마의식 자체가 서사의 중심이 되는 기존의 영화들과는 다르게 각각 구마의식 이전과 이후의 과정을 다룬다. 또한 다루는 방식도 전자는 한 개인의 내면 의식의 변화에 초점을, 후자는 법정 공방을 통한 공론화된 논쟁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두 영화가 공히 던지는 화두는 종교 vs 세속, 신앙 vs 과학, 믿음 vs 이성이라는 담론이다. 물론 두 영화 모두 화두만 던질 뿐 판단의 몫은 오롯이 관객에게로 돌리지만 "과학이 보증하는 것이 모두 진리인가"라는 물음이 바로 화두의 핵심이 될 것이다. 미카엘라의 경우 자신만이 느끼는 그 고통을 스스로 감내해야만 했다. 그녀의 고통과 저항은 외부인의 시선으로는 정상의 범위를 벗어난 행위로 보일 수밖에 없었고 의학이라는 과학은 그것을 간질이라는 전문적인 병으로 재단했고 약물 치료를 처방했다. 그녀는 그런 처방을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정상인으로 살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런 처절한 노력 끝에 과학이 내린 처방을 거부하고 구마라는 비이성적 수단으로 귀의하게 된 그녀의 선택을 단순히 종교에 미친, 광신적이며 비정상적인 행위라고 재단할 수 있을까? 에밀리의 죽음에 대하여 검찰 측은 과학의 이름으로 무어 신부를 과실 치사로 몰았다. 그 이면에는 과학이 보증하는 가정이 있는데 정상적인 의학적 치료가 있었다면 에밀리는 죽지도 않았고 완치되었을 거란 가정이다. 한낱 가정에 불과함에도 과학은 그것을 진리로 만들고 에밀리를 살리기 위한 무어 신무의 신중하고도 섬세한 모든 배려와 행위를 비정상적이고 비이성적인 것으로 재단해 버린다. '~했더라면'이라는 하나의 가정은 정상으로 간주하면서 '~하지 않았던' 그 행위는 비정상이라 확언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미카엘라나 무어 신부에 대하여 과학이 그렇게 재단할 수 있는 권리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미카엘라의 선택이나 무어 신부의 행위에 대한 과학적 판단에는 공히 정상과 비정상, 이성과 비이성이라는 구분이 암묵적으로 선행되고 있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는 자신의 저서 <광기의 역사(Histoire de la folie l' ge classique, 김부용 옮김, 인간사랑)>에서 의학이라는 특정 분야의 지식이 현대에서 어떻게 권력으로 군림하는가를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푸코 철학의 여정 전체를 지식의 고고학과 계보학으로 부를 수 있는데 그의 과업은 특정 시대에 특정 지식이나 담론이 어떻게 독점적 권력을 누리게 되는가를 추적하기에 고고학이라 불리며 지식 또는 담론과 권력 사이의 관계에 착목하여 전자가 후자를 생산하고 정당화하는 방법을 파헤치기에 계보학이라 불린다. 지식이 독점적 권력을 누린다는 것은 그것이 특정 시대에 소위 말하는 "에피스테메"를 생산하고 분류하고 결정한다는 점이다. 즉, 시대별 인간 인식의 근거를 특정 지식이 제공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그것이 이성과 비이성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고 윤리학과 희한하게 연결되어 선/악의 구분의 잣대로 작용하는 지점까지 나아간다는 점이다. 이것이 권력이라 불릴 수 있는 이유는 이러한 구분이 결국은 소외와 배제의 역사를 구성한다는 사실에 있다. 이러한 그의 <지식의 고고학>의 구체적인 사례에 해당하는 것이 <광기의 역사>인데 이 책에서는 의학이라 불리는 과학 또는 지식을 그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실증적인 고증을 위해 <정신병과 심리학>, <임상학의 탄생>이라는 책까지 별도로 쓰기도 했다. <광기의 역사>는 '정상'과 '광기'의 구분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를 고고학적으로 다루고 있으며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을 가능케 하는 특정 지식으로서의 의학을 핵심으로 다룬다. 왜 권력인가?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이라는 학문의 발전은 바로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하는 근거가 되며 이렇게 근거로서의 이 지식은 바로 '소외'와 '배제'를 가능케 한다는 점이다. 또한 이런 식의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은 자연스레 우리와 우리 아닌 타자들로, 이성과 비이성으로 나뉘어 신기하게도 별다른 저항 없이 선과 악의 구분으로 이어진다. 나치는 우생학을 통하여 게르만족을 선으로, 유대인을 악으로 규정하여 홀로코스트를 위한 근거를 마련했다. 푸코는 자신의 저서에서 19세기까지만 하더라도 광기는 결코 병이 아니라 종교적이고 신비한 무엇으로 취급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의 발전은 광기를 질병으로 취급하게 되었고 그렇게 병으로 간주된 광기는 비정상적인 것, 위험한 것, 따라서 가두고 격리시켜 감시해야만 하는 대상으로 분류되는 합리적 근거를 제공하게 되어 그때부터 배제와 소외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광기에 대한 이런  배제와 소외의 대표적인 물리적 공간이 정신병원이 된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현대에서의 '광기'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라면 과거가 광기를 취급했던 방식에 대한 푸코의 독특한 주장이 상당히 낯설 것이다. 하지만 영화 <웰컴 투 동막골, 배정 감독, 정재영, 신하균, 강혜정 주연, 2005>에서 과거가 광기를 어떻게 인식하는지에 대한 예를 볼 수 있다. 이 영화에서 여일(강혜정 분)은 머리에 꽃을 꽂은, 소위 말해서 미친년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녀를 미친 여자로 간주하지 않고 그저 독특한 아이, 손이 많이 가는 아이로 생각하며 우리라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간주한다. 다시 말해서 여일은 미친년으로, 정신 이상자로 취급되어 공동체에서 소외되고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라는 테두리 내에서, 즉 정상이라는 범주 내에서 자신의 자리를 점하고 있는 어엿한 주체다. 만약 그런 여일이 6.25가 발발한 줄도 모를 정도로 산중 깊숙이 위치한 산골 시골이 아니라 번화한 현대의 도시에서 살았더라면 어떠했을까? 당연히 여일은 정신병자로 취급되고 분류되어 정신병원이나 수용소에 수감되었을 것이다. 현대에 들어서면서 이렇게 의학의 분류에 따라서 인간은 정상과 비정상으로 구분되고 이성과 비이성으로 나뉘게 된다. 물론, 푸코가 말하는 권력은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권력이 아니다. 푸코가 말하는 권력은 "가정이나 일터 등 모든 위상의 사회에서 '복잡한 전략적 상황에 부여되는 이름'이며, 이에 따라 권력은 부모와 자녀, 의사와 환자, 교사와 학생, 군주와 신하 등의 세력관계의 총체에 등장하는 개념(성의 역사 1-앎의 의지, 이규현 옮김, 나남)"이라 볼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지식이 권력이 되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 많이 목도할 수 있다. 몸이 아파서 의사 앞에 선 여러분은 의사의 모든 지시를 충실하게 따른다. 법정 소송 때문에 변호사를 선임하게 되면 여러분은 변호사의 모든 발화를 진리로 간주해야 한다. 이렇게 환자 앞에서의 의사는, 소송 당사자 앞에서의 변호사는 신이 된다. 이렇게 의학이나 법학이라는 지식은 여러분들을 좌지우지하는 권력으로 군림하게 되며 이런 특정한 지식이 바로 참과 거짓을 나누고 진리를 보증하는 실체로서 우리 앞에 우뚝 설 것이다. 


   물론 여기서 다룬 두 영화도 그렇다. 우리는 특수를 일반화시키는 경향을 경계하면서도 반대로 특수를 일반화의 틀 내에 가두려 하고 그렇지 않다면 예외라는 이름으로 분류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런 분류 자체가 어찌 보면 특수를 그 자체로 보지 않고 배제시키는 프로크루스테스적 행위일 것이다. 그렇게 배제된 대상은 위협적인 존재가 되고 감금과 감시의 대상이 될 것이다. 우리는 미카엘라의 그 내적 고통을 확인할 길이 없으며 무어 신부의 행위에 대한 시비(是非)를 판가름할 명석한 잣대를 지니고 있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학이라는 과학의 분류에 따라 미카엘라의 선택을 비이성적이라고 재단하고 무어 신부를 흑마술로 에밀리를 죽음으로 몰아버린 사이비 신부로 취급한다. 또한 그런 판단을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라고 치부하는 근거 역시 의학에 있다. 의학이라는 과학은 합리적 이성이라는 명분으로 스스로 만든 테두리를 벗어나는 것들을 반과학, 비이성, 비정상으로 재단한다. 과학이라는 이성의 이런 분류법에 따라 정상과 비정상, 이성과 비이성을 가르고 후자를 위협적인 어떤 것으로 간주하는 동시에 선과 악이라는 심리적 분리도 후첨(後添)되어 그것에 대한 감시와 처벌을 은연중에 윤리적으로 정당화시키는 이런 과정이 계몽의 역사이면서 서구 이성의 역사일지도 모른다. 이제 다시 영화로 돌아가 보자. 미카엘라의 최후의 선택을 우리는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무어 신부의 행위를 여러분이 배심원단이라면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물론 각자의 종교와 세계관에 따르더라도 어쩔 수 없이 현대의 의학에 기댈 수밖에 없는 우리라면 대부분, 비이성적 선택이요 비정상적 행위라고 판단할 것이다. 그리고 현대의 의학은 그러한 판단이 근거하는 상식으로, 보이지 않는 권력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영화는 의학 자체의 옳고 그름에 대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대고 있는 그런 상식, 판단의 잣대 자체를 의심해볼 것을 요구하고 있다. 푸코의 주장은 옳고 그름, 참과 거짓의 문제를 제기한 것이 아니라 다름의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미카엘라나 무어 신부의 선택과 행위에 대한 판단 역시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차이의 문제로 접근해야 한다. 판단의 잣대로서의 의학에 대한 진위 여부가 아니라 주인공의 선택과 행위가 과연 의학이 판단할 수 있는 범주인지에 대한 회의(懷疑)가 먼저 요구된다. 다시 말해서, 주인공의 선택과 행위는 의학이라는 특수 지식에 의지하여 시비를 가리기 전에 과연 그 선택과 행위가 의학적 판단의 범주를 벗어난, 다른 판단의 잣대를 요구하는 범주에 속하는 문제일 수도 있다는 의심을 해야 한다. 그렇기에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르다고 할 수 있으며 그렇기에 에린은 애초에 종교적 범주에 속한 문제를 과학적으로 반증하려고 실패를 거듭한 후에야 비로소 종교 자체에서 답을 찾고자 전략을 바꿨을 것이다. 이렇게 바뀐 에린의 전략에 따라 미카엘라의 선택을 바라본다면 그녀의 선택 역시 비정상이라고 단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에린의 전회는 바로 '사실'이 아니라 '가능성'에 대한 긍정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이 배제해버리는 그러한 '가능성'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다름의 관점에서 접근할 때야만 비로소 드러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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