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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SE Jun 14. 2020

서글픈 길 위의 이방인들

델마와 루이스 vs 노킹 온 헤븐스 도어

델마와 루이스(Thelma & Louise), 리들리 스콧 감독, 수잔 서랜든, 지나 데이비스 주연, 1991


노킹 온 헤븐스 도어(Knockin' On Heaven's Door), 토마스 얀 감독, 얀 요제프 리퍼스, 틸 슈바이거 주연, 1997




   90년대 말, 너무나 감동적인 영화라며 강추를 날렸던 친구 덕에 영화 <노킹 온 헤븐스 도어>를 보게 되었다. 사전에 영화 관련 정보를 일부러 찾아보지도 않을 만큼 기대를 갖고 백지상태에서 봤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감동적이긴 했다, 하지만... 너무 기대가 컸던 탓일까? 성에 차지 않는 그 무엇이 있었다. 영화는 분명 눈물샘을 자극하며 관객들을 폭풍 감동으로 몰아가는 요소는 제대로 갖추고 있었다. 특히, 201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던 포크 음악의 전설 밥 딜런의 명곡 "Knockin' On Heaven's Door"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아무리 메마른 감성의 소유자라 할지라도 기어이 눈물을 훔치게 만드는 연출과 영상미를 보여주고 있다. 물론 필자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영화 내내 그런 감동을 상쇄시키는 무언가가 있었으니, 그것은 어떤 기시감 같은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기시감의 원천이 이 영화보다 6년 앞서 만들어졌던 리들리 스콧의 <델마와 루이스>였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렇다, 비슷한 형식을 가진 두 개의 로드 무비가 있다. 하나는 여성 커플이, 다른 하나는 남성 커플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각각 워맨스(Womance)와 브로맨스(Bromance)를 자랑한다. 내용에 있어서도 두 영화 모두 각 커플들의 의도하지 않은 일탈로 시작해서 점차 증폭되는 험한 사건을 겪으면서 점점 더 단단해지는 우정을 보여주지만 그 일탈의 끝은 비극적 종말로 막을 내린다. '수잔 서랜든'과 '지나 데이비스'가 여성 커플로 등장하는 영화가 1991년 '리들리 스콧'이 감독한 <델마와 루이스>고 1997년에 감독 '토마스 얀'이 배우 '얀 요제프 리퍼스'와 '틸 슈바이거'를 남성 커플로 내세워 감독한 독일 영화가 <노킹 온 헤븐스 도어>다. 두 영화 모두 별도로 언급해도 좋을 만큼 매력적이고 훌륭한 영화지만 두 영화를 함께 다룰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노킹 온 헤븐스 도어>를 독일판 <델마와 루이스>로 불러도 될 만큼 두 영화가 매우 유사한 구성을 갖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먼저, 두 영화의 줄거리를 간단하게 정리하고 나서 지금 언급했던 유사성과 그것을 구성하는 요인들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그녀들 I

   한스 짐머의 노래 "썬더버드(Thenderbird)"의 전주가 잔잔히 흐르는 가운데, 아열대 성의 건조하고도 광활한 대지에 위치한 산을 향해 뻗은 길을 흑백으로 보여주며 영화는 시작한다. 무채색의 풍광은 서서히 컬러로 전환되어 페이드 아웃되는 것에 맞춰 배경음악도 켈리 윌리스의 "리틀 허니(Little Honey)"라는 경쾌한 노래로 바뀐다. 손님들로 가득 찬 분주한 식당, 바쁘게 음식을 서빙하던 웨이트리스 루이스(수잔 서랜든 분)는 잠깐 짬을 내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루이스의 전화를 받은 주인공은 전업 주부인 델마(지나 데이비스 분)다. 오랜 절친 사이인 둘은 3박 4일 일정으로 오랜만에 둘 만의 산악 캠핑 여행을 떠나기로 했는데 이 날이 그날이었다. 하지만 델마는 여전히 남편 대럴(크리스토퍼 맥도널드 분)에게 여행 사실을 이야기 못하고 전전긍긍한다. 이런 전반부의 상황에서도 알 수 있듯이 독신의 루이스는 능동적이고 주체적이며 매우 주도면밀한 여성인 반면 델마는 전형적인 가부장적 남편 밑에서 기도 제대로 펴지 못하는 우유부단한 성격의 소유자다. 짐을 싸는 것만 봐도 둘의 성격을 알 수 있다. 루이스는 계획 하에 옷과 여러 물건들을 단정히 정리해서 캐리어에 집어넣었지만 뭘 준비해야 되는지도 잘 모르는 델마는 이것저것 무조건 쓸어 담아 들고 갈 캐리어의 수만 늘리고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쓸어 담은 물품들 중에는 작은 권총이 하나 있었는데 이것이 그들의 운명을 뒤바꿔 버릴 것이라고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여행 역시 루이스의 주도 하에 계획되었지만 델마는 당일까지도 출근하는 남편에게 결국 여행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했다. 델마는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여행 가방을 챙겼고 그날 저녁 집 앞으로 픽업을 온 루이스와 함께 환호성을 지르며 둘 만의 여행을 떠났다.


그들 I

   영화는 가수 진주가 불렀던 "난 괜찮아"의 원곡인 글로리아 게이너(Gloria gaynor)의 "I Will Survive"를 배경으로 한창 쇼를 준비 중인 스트립 바의 분주한 모습을 비추면서 시작한다. 이곳은 무대를 갖춘 창녀촌으로 책임자는 조폭 중간 보스다. 쇼 준비를 지켜보는 두 남자가 있으니... 덤 앤 더머같이 좀 덜떨어져 보인다. 중간 보스는 압둘(모리츠 블라이브트로이 분)과 헹크(티에리 반 베르베케 분)란 이름의, 단무지(단순, 무식, 지랄)에다 똘기로 충만한 이 두 친구에게 중요한 지령을 내린다. 연청색의 벤츠 230을 가리키며 이 차를 몰아 보스에게 갖다 주라고 한다. 중간에 절대 멈춰서는 안 된다고 강조를 하는 것으로 보아 이 차가 매우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서로 운전하겠다고 티격대며 출발하는 이 두 얼간이를 바라보는 중간 보스의 얼굴에는 근심이 서려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 영화는 두 남자의 이야기지만 덜떨어진 이 둘은 아니다. 물론 이 둘은 영화 내내 등장하여 주인공들과 동선이 겹치면서 줄거리 전개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를 담당한다. 이제 배경 음악은 "Tequila Love"라는 신나는 곡으로 바뀌어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코를 막으며 겨우 기차의 흡연칸을 빠져나와 금연칸에 자리를 잡고 앉은 루디(얀 요제프 리퍼스 분)라는 남자, 선량해 보이는 얼굴에 소심하고 겁이 많은 성격을 가진 인물이다. 루디의 맞은편 자리에 털썩거리며 앉은 또 다른 남자, 바로 옆 칸이 흡연칸임에도 굳이 루디 앞에 앉아 줄담배를 피워대는 마틴(틸 슈바이거 분)은 강인한 인상에 건달같이 행동하지만 허세로 가득 찬 남자다. 이날 우연히 만난 둘이지만 루디에게 나쁜 인상만 남긴 채 둘은 헤어졌다. 하지만 우연은 둘의 최종 목적지를 동일한 곳으로 설정했으니, 종합 병원에다 2인실의 같은 병실이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진단 결과 마틴은 뇌종양 말기이고 루디는 골수암 말기다.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두 주인공은 그렇게 한 병실에서 동거하게 된다.



그녀들 II

   환호성을 지르며 신나게 달리던 길, 잠깐 쉬어 가기로 하고 휴게소에 들렀다. 하지만 델마는 물 만난 고기처럼 신이 났다. 그동안 집안에만 틀어박혀 가사와 남편 시중이나 들던 델마는 술도 마시고 춤도 추면서 오랜만에 해방감을 만끽하고 있었다. 루이스에게 그런 델마는 마냥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다. 루이스가 화장실에 간 사이 처음 보는 남자와 신나게 춤을 추던 델마는 취기가 올랐고 술도 깰 그 남자와 바깥으로 나갔다. 하지만 그것이 화근이었다. 남자는 갑자기 델마를 덮쳤고 델마가 거부하자 폭력까지 행사한다. 강간을 당할 뻔한 순간 루이스가 그 남자에게 총을 겨누었다. 그 총은 델마가 별생각 없이 들고 온 것이었지만 총앞에서는 남자도 어쩔 수 없었다. 맞아서 입가에 피를 흘리며 훌쩍거리는 델마를 데리고 돌아서며 루이스가 한 마디 남긴다, 기억해 둬, 여자가 저렇게 우는 건 재미있어서가 아니야! 하지만 남자는 되려 억울하다는 듯 욕을 뱉어낸다. 뭐라고? 격분한 루이스가 되물었다. 내 거시기나 빨라고 했다, 왜? 이 말에 순간 격분한 루이스는 그만 방아쇠를 당겨버렸고 남자는 피를 튀기며 꼬꾸라져 버린다. 얼떨결에 주사위는 던져졌고 둘은 이미 루비콘 강 한가운데 있었다. 그 길로 둘은 바로 차를 타고 달아나 버린다. 그래도 그 와중에 루이스는 쓰러진 남자에게 '입조심했어야지'라며 한 마디 남기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들 II

   시한부 환자 둘만 있는 병실, 마틴은 며칠 살지 못할 것이다. 루디는 그나마 형편이 조금 나은 듯하다. 기차간에서의 첫 만남이 그리 유쾌하지 않았던 루디는 마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마틴은 체념한 채로 간호사가 금연임을 강조했음에도 연신 줄담배만 피워 댄다. 그리고 조용히 있으려는 루디에게 시비를 걸었고 티격대다 서로가 곧 삶을 마감해야 할 운명임을 알게 된다. 그 순간, 신의 계시인 양 벽에 붙어 있던 십자가가 떨어지면서 공용 수납장을 때렸고 그 충격에 수납장의 문이 열렸다. 그 속에는 선물처럼 데낄라 한 병이 놓여 있었다. 둘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데낄라를 들고 레몬과 소금을 찾아 나섰다. 병원 주방을 다 헤집어 놓았을 즈음 역시 선물인 양 싱크대 아래 수납장에서 레몬이 쏟아져 나왔고 루디는 소금 한 포대를 찾았다. 바닥에 자리 잡고 앉아 즉석 술판을 벌였다. 취기가 상당히 올랐을 때 마틴은 손가락에 소금을 잔뜩 묻혀 루디 앞으로 뻗으며 시를 한 수 읊었다, 해변에선 짜릿한 소금내, 바람은 파도에 씻겨지고, 뱃속은 무한한 자유의 따사로움으로 가득 차네, 입술에는 연인의 눈물 젖은 입맞춤이 쓰게만 느껴지네. 루디는 쓴웃음을 지으며 거대한 사건의 도화선이 될 한 마디를 내뱉었다, 난 바다를 본 적이 없어... 차마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마틴의 표정, 정말이야? 하지만 루디는 진지하다. 우리는 지금 천국의 문 앞에서 술을 마시는 거야, 세상과 작별할 순간이 다가오는데 그걸 못 봤단 말이야? 그리고 마틴은 나긋하게 말을 이어간다, 천국에 대해 못 들어봤나? 그곳엔 별다른 얘깃거리가 없어, 바다의 아름다움과 바다에서 바라본 석양을 이야기할 뿐이야, 물속으로 빠져들기 직전 핏빛으로 변하는 커다란 공, 사람들은 자신이 느꼈던 그 강렬함과 세상을 뒤덮는 바다의 냉기를 논하지, 영혼 속의 불길만이 영원한 거야. 이 시점에서 루디의 눈은 반짝인다. 근데, 넌... 별로 할 말이 없겠다, 바다를 본 적이 없으니... 이제 둘은 환자복을 입은 채 맨발로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간다. 술 김에 즉석에서 바다로 가기로 의기투합한 것이다, 바다를 보지 못한 루디를 위하여... 주차장으로 나갔을 때 마침 문이 잠기지 않은 벤츠 한 대가 있다, 키도 함께 있었다. 주차장 출구를 찾지 못해 헤매던 터에 검은 양복을 입은 두 사람이 주차장으로 들어온다. 출구를 물었고 그들은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그 길로 둘은 병원을 빠져나와 무작정 차를 몰았다.



그녀들 III

   델마는 어찌할지 몰라서 울며 불며 안달이다. 루이스 역시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우발적인 상황이었다지만 사람을 죽였다는 것은 물릴 수 없는 사실이다. 정당방위라며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자는 델마의 말에 식당의 모든 사람들이 델마가 그 남자와 춤추는 것을 보았다며 누가 자신들의 말을 믿어주겠냐고 반문했다. 여전히 멘붕 상태인 델마와는 다르게 루이스는 차분히 상황을 정리했다. 그런 식으로 감옥에서 청춘을 썩히긴 싫었다. 루이스는 남자 친구 지미(마이클 매드슨 분)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가 되었을 때 그렇게 씩씩하던 루이스도 잠깐 무너지는 순간을 맞이했지만 역시 그녀답게 극복했다. 아무 이유도 없이 다짜고짜 6,700 달러를 빌려 달라고 했다. 한 시간 뒤 오클라호마에서 돈을 건네받기로 하고 여전히 어찌할 바 몰라하는 델마를 으르고 달래서 함께 그곳으로 떠났다. 루이스는 도중에 다시 지미에게 전화해서 정확한 약속 장소를 받았다. 델마는 집으로 전화했지만 예상대로 남편은 광분하며 당장 돌아오라고 난리다. 순간 델마도 화낼 줄을 안다. 당신은 내 남편이지 아빠가 아니에요, 이 당연한 말에 대한 수꼴 남편의 반응은 충분히 예상 가능하리라, 루이스한테 못된 것만 배웠다며 오늘 돌아오지 않으면 끝이란다. 청천벽력 같은 사건을 겪은 델마는 이제는 예전의 그녀가 아니다. 델마는 차분히 이 한 마디만 던지고 전화를 끊어버린다, "Go fuck yourself!" 공중전화 부스에서 나오던 델마는 옆에 앉아 있던 젊은 남자와 부딪혔다. 미안하다는 사과와 함께 루이스는 곧장 차로 돌아왔지만 이 남자, 델마 부근에서 얼쩡거리며 차를 좀 태워 달랜다. 제이디라는 이름을 가진, 훤칠하고 매우 잘생긴 이 젊은이에게 델마는 호감이 간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브래드 피트가 그 역을 맡았다면 말이다. 하지만 철벽녀 루이스는 델마의 애절한 눈빛에도 불구하고 단칼에 거절해 버린다. 하지만 가던 도중 다시 제이디와 조우하게 되고 결국 이 녀석을 차에 태우게 된다. 


그들 III

   근데 이 차, 매우 눈에 익다. 또한 길을 가르쳐 준 양복 입은 두 사람도 마찬가지다. 영화 초반에 등장했던 두 얼간이 헹크와 압둘이다. 길을 가르쳐주었을 때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출발하는 차를 보며 압둘이 말한다, 봤어? 우리 차랑 똑같아... 순간 둘은 섬뜩하다, 자신들의 차가 사라진 걸 그제야 알았다. 서로 운전하겠다고 다투다 압둘이 막무가내로 총을 드리미는 바람에 헹크는 운전을 양보해야만 했다. 하지만 호기와는 다르게 압둘의 운전은 서툴렀고 기어이 보드를 타던 아이를 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데리고 간 병원이 하필이면 마틴과 루디가 입원한 병원이었다. 심부름 중이었고 도중 사고를 치지 않기 위하여 참고 참으며 잠깐 있을 요량으로 차문도 잠그지 않은 채 아이를 응급실로 데리고 간 것이다. 하지만 영악한 그 아이가 계속 둘을 붙잡아 두는 바람에 엉뚱하게도 마틴과 루디가 그 차를 가져가 버렸다. 차 안에서 자다 요란한 총소리에 깨어난 루디, 과음으로 인해 전날 밤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바깥은 호숫가이고 마틴이 총을 쏘고 있다. 훔친 차에다 그 안에 총도 있었다고 한다. 루디가 바다를 본 적이 없대서 바다로 가는 길이라고도 했다. 순진한 루디는 훔친 차로는 도저히 함께 못할 것 같다고 했지만 그러면 천국에서 할 말이 없을 거란 마틴의 말에 일탈을 이어가기로 한다. 하지만 그들은 환자복에 돈도 한 푼 없다. 우선 차에 기름을 넣어야 한다. 비용은? 돈 대신 총이 있다. 주유소를 털었다. 다음은 옷이다. 옷가게에 들러 신중하게 옷을 골랐다. 하지만 주유소에서 턴 돈으로는 모자란다. 잠깐만 기다리란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간 마틴, 그의 선택지는 은행이다. 총이 있으니 일이 잘 풀린다. 은행을 털어 적지 않은 돈을 구했고 그 돈으로 멋진 옷을 사 입었다. 이제 본격적인 출발이다. 



그녀들 IV

   돈을 받기로 한 호텔에 도착했을 때 지미가 직접 와 있었다. 무작정 큰돈을 빌려달라는 뜬금없는 요청에 지미는 용처를 묻지도 않은 채 깜짝쇼라도 연출할 요량으로 직접 와서 기꺼이 돈을 건네주었다. 지미는 똑 부러지는 이 여자를 진정 사랑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물론 그녀 입장에서는 말할 수 없었겠지만, 떠나려는 루이스에게 청혼 반지를 건네며 붙잡았다. 하지만 그녀는 떠나야 한단다. 사랑하기에 떠난다는 아주 진부한 헤어짐이지만 우리는 그 이유를 이미 알고 있다. 그렇게 애절한 이별의 대가로 빌린 이 소중한 돈을 루이스는 델마에게 맡겼다. 하지만 사기꾼은 어떻게든 돈 냄새를 맡는가 보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밤, 델마의 방문을 누가 두드린다, 제이디다. 은근히 아닌 척했지만 사실 델마는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이디를 방으로 들였고 술과 함께 그의 정체를 물었다. 그는 가석방 상태였는데 은행을 털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은행을 턴 무용담을 털어놓았고 델마는 눈을 반짝이며 진지하게 듣는다. 다음 날 아침, 모텔 식당에서 지미는 담담하면서도 쿨하게 이별을 받아들였고 진정 그녀의 행복을 빌며 떠났다. 그렇게 지미를 떠나보낸 루이스 앞에 매우 흡족한 표정을 한 델마가 나타난다. 젊은 녀석, 제이디와의 뜨거운 밤을 보낸 모양이다. 이제 델마는 남편한테 치이던 그런 천덕꾸러기가 아니다. 하지만 늦바람이 무섭다고, 그런 경우 모든 경계를 해제한 상태로 올인하게 된다는 단점이 있다. 물론 델마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신이 나서 제이디와 보냈던 시간을 떠벌리던 델마는 지미에게 빌린 돈의 행방을 묻는 루이스의 질문에 그대로 얼어버린다. 역시나 루이스의 예상이 맞았다, 급하게 델마의 방으로 달려갔지만 그 사이 제이디는 지미가 빌려 준 돈을 모두 챙겨 달아나고 없었다. 그때까지 그렇게도 씩씩했던 루이스는 이제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그동안의 험한 과정을 겪는 동안 델마와 다르게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았던 루이스의 눈에서 기어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젠 체념이 루이스를 완전히 장악해 버렸다. 하지만 델마 역시 예전의 델마가 아니었다.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절망한 루이스를 이번에는 델마가 달랜다, 자신이 해결하겠다고 장담하며 루이스를 데리고 차를 몰았다. 마트 앞에 차를 세우고는 뭐 좀 사다 줄까? 그러곤 마트로 들어간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멍하니 앉아 있는 루이스, 갑자기 시동을 걸라는 델마의 고함 소리에 깜짝 놀라 운전석으로 옮겨 앉았다. 델마가 차에 타자 마자 우선 출발했다. 어리둥절해하는 루이스에게 델마는 돈뭉치를 흔들었다, 마트를 털었단다. 기가 차서 말을 잇지 못하는 루이스에게 델마가 말한다, 멕시코 가야지?


그들 IV

   차를 도난당한 헹크와 압둘은 중간 보스에게 쥐어 터지고 나선 차를 찾지 못하면 죽을 줄 알라는 통첩을 받는다. 방법을 찾지 못하던 두 얼간이는 중고차 판매소에 들러 동일한 기종의 차를 찾았다. 판매소 사장은 75,000 마르크를 불렀고 헹크는 총을 꺼내려는 압둘을 말려야만 했다. 하지만 역시 단무지답게 곧장 은행으로 향했다. 은행에 들어서자마자 총을 들이밀었지만 은행 직원의 허탈한 한 마디, 죄송하지만 한 발 늦으셨네요... 그들이 털고자 했던 은행은 마틴이 막 털고 나갔던 곳이었고 당연히 경찰에 신고가 들어갔던 터였다. 헹크와 압둘이 밖으로 나갔을 때는 이미 경찰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똘기로 뭉친 그들은 그칠 것 없다, 무식하게 총을 쏴대며 경찰의 포위망을 빠져나갔다. 한편, 양복을 좌악 빼입고 다시 길을 떠난 마틴과 루디, 은행에서 훔친 돈을 세어 보니 무려 78,000 마르크, 둘은 신이 나서 차를 몬다. 그러다 갑자기 차가 흔들리는데... 운전하던 마틴이 뇌종양으로 인해 발작을 일으킨 것이다. 진통제를 먹고 겨우 정신을 차린 마틴, 자신의 생이 진짜 얼마 남지 않았음을 실감하게 된다. 그것을 지켜보던 루디 역시 마찬가지다. 정말 구름 위에 앉아서 바다를 얘기하게 될까? 루디가 하늘을 보며 물었다. 마틴 역시 하늘을 보며 답했다, 물론이지... 하지만 그런 꿀꿀한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들이 차 트렁크를 열었을 때 은빛 007 가방 하나를 발견한다. 가방 안에는 웬걸? 무려 백만 마르크라는 큰돈이 들어 있었다. 중간 보스가 왜 그렇게 그들이 훔친 벤츠에 환장하는지 이유가 이제 드러난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리 없는 둘은 진짜 신이 났다. 백만 마르크를 바로 뒤에 두고 은행을 털다니, 둘은 그렇게 행복한 자책을 하고 있다. 곧장 최고급 호텔로 향했고 그 호텔에서 제일 비싼 방을 얻었다. 심지어 호텔 보이에게도 그가 당장 호텔을 그만두게 할 만큼 두둑한 팁을 주었다. 저녁 식사도 최고급으로 주문했고 발음하기도 힘든 프랑스 요리를 사전을 찾아가며 먹었다. 이제 둘은 나란히 침대에 누워 버킷 리스트를 작성했다. 쓰다 보니 얼마 남지 않은 삶을 감안한다면 리스트의 항목이 너무 많았다. 둘은 서로 상대방의 번호를 하나만 지목하여 죽기 전에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물론, 루디를 위해 바다로 가는 것은 기본이었다. 마틴의 소원은 엄마에게 캐디락을 선물하는 것이다. 엘비스의 광팬이었던 엄마는 앨비스가 자신의 엄마에게 캐딜락 플리트우드를 선물했는데 그 장면을 TV로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자신도 그렇게 하고 싶단다. 순진한 루디의 소원은 죽기 전에 두 여자와 동침하는 것이다. 마틴이 잠만 자는 거냐고 놀리며 서로 낄낄거리는 동안 다시 마틴의 발작이 시작되었다. 어쩔 줄 몰라하던 루디는 겨우 마틴의 웃옷에서 진통제를 찾아 마틴의 입에 밀어 넣었다.  



그녀들 V

   당연히 경찰의 추격이 전개된다. 살인 사건이 발생한 식당 주차장에서 담당 형사 할 슬로컴은 주변인들을 탐문하고 있다. 목격자들의 진술을 수집하던 할은 델마와 루이스를 서빙했던 웨이트리스도 취조를 했는데 그녀의 말에 따르면 둘 다 살인을 저지를 사람들은 아니란다. 죽은 남자는 평소 행실이 나빴고 언젠가 그렇게 죽을 거라 예상했다고 한다. 은 델마의 남편을 찾았고 루이스의 집도 방문했으며 지미도 만났다. 그렇게 탐문을 이어가던 중 델마와 루이스 둘 다 평범한 소시민이며 살인은 우발적이었을 거라 짐작하게 된다. 관료적으로 행동하는 경찰들 속에서 아마도 유일하게 심정적으로 그녀들과 공감한 인물이 할 슬로컴이라는 이 캐릭터다. 할 역은 '하비 케이틀'이 맡았는데 여담으로 언급하자면, 루이스의 남자 친구 조지 역을 담당한 '마이클 매드슨'과 형사 할 역의 '하비 케이틀'을 <저수지의 개들>에서도 함께 볼 수 있었기에 반갑기도 했다. 하지만 반장은 둘에 대해 지명 수배를 명했다. 할은 예상했다, 둘이 도망치는 과정에서 우연이 끼어들어 의도치 않은 더 큰 사고를 벌이게 될 거란 것을, 그러기 전에 둘을 어떻게든 체포해야 했다. 그리고 그의 예상이 맞았다. 남편 대럴을 경찰서로 불러 할은 CCTV 녹화분을 보여 주었다. 녹화된 화면의 장소는 마트였고 주인공은 총을 든 델마였다. 제이디는 델마를 속였지만 그녀에게 가르침도 주었다. 제이디의 은행털이 경험담을 차분하게 그대로 재현한 덕분에 아무도 다치는 일 없이 델마는 유유히 돈을 담아 마트를 떠날 수 있었다. CCTV에 주연으로 출연한 아내를 본 대럴은 기가 차서 그저 '제기랄'만 반복할 뿐이다. 게다가 제이디마저도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에게는 현금 6,600 달러가 있었고 그 출처를 순순히 자백했다. 이제 둘을 체포하기 위한 전담팀이 꾸려졌다. 델마가 집으로 전화할 것을 예상하고 대럴과 함께 집에서 전화를 기다리며 잠복에 들어갔다. 


그들 V

   경찰은 CCTV를 통해 마틴의 신원을 확인했다. 백설공주란다, 이 말은 아무런 전과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호 위반 한 번 없던 자가 갑자기 은행을 털었다니... 반장이 마틴에 대한 수배를 내리라고 했지만 이 명령을  받드는 켈리라는 형사, 이 친구도 만만치 않은 얼간이로 보인다.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반장의 얼굴에도 근심이 서려 있다. 다음날 아침, 루디가 베란다에서 기지개를 켜며 밖을 내려다보는데, 경찰들이 진을 치고 있다. 재빨리 둘은 가방을 챙겨 방을 나왔지만 경찰과 마주친다. 순간 마틴은 기지를 발휘해 루디를 인질로 삼았다. 이제부터 마틴은 인질범이, 루디는 인질이 되어 경찰과의 코믹한 대치로 영화는 전개될 것이다. 인질 놀이를 통해서 둘은 경찰들의 옷을 벗겨 자신들이 입었다. 경찰인 척하며 자연스럽게 밖으로 나와서 벤츠로 갔을 때, 아뿔싸, 마침내 헹크와 압둘 이 두 얼간이와 마주하게 된다. 둘은 경찰 무전을 도청해 경찰이 벤츠를 추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이날 아침 경찰을 따라 호텔까지 오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두 얼간이는 경찰복을 입은 마틴과 루디를 알아보지 못한다. 두 얼간이가 이틀 전에 도난당한 자신들의 차라고 하자 경찰은 차 키를 손에 쥐어주며 키를 아무 데나 두지 말라는 친절한 충고까지 남기고 떠난다. 그렇게 마틴과 루디가 벤츠 대신 경찰차를 타고 떠났을 때 헹크와 압둘은 신이 나서 벤츠를 몰아 의기양양하게 중간 보스에게 가져갔다. 하지만 백만 마르크가 든 돈가방이 사라진 차라면... 당연히 중간 보스는 노발대발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압둘은 경찰이 돈가방을 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그녀들 VI

   멕시코를 향한 그녀들의 질주, 한 명은 살인을 했고 다른 한 명은 무장 강도가 되었다. 원하지 않았던 그녀들의 일탈은 이제 거칠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질주에는 뭔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쾌감이 느껴진다. 도로를 질주하던 중 알짱거리며 그녀들에게 불쾌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혀놀림과 함께 음담패설을 늘어놓는 커다란 유조차를 애써 무시하고 앞질러 갔다. 휴게소에 내려서 집에 전화를 건 델마, 하지만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남편의 목소리는 평소와는 다르게 다정스럽다. 경찰과 함께 있다는 것을 눈치챈 루이스가 대신 전화를 건네받았다. 집에서도 할이 수화기를 잡았고 자신을 소개했다. 할은 차분히 상황을 설명하며 살인이 아니라 심문을 위해 수배가 내려진 거라 했다. 시간을 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델마가 전화를 끊으려 하는 순간 할이 말한다, 멕시코까진 못 갈걸요, 얘기를 합시다, 돕고 싶어요... 순진하게도 델마는 제이디에게 자신들의 계획을 다 말했고 심문 과정에서 제이디는 들은 그대로를 경찰에게 모두 털어놓은 것이다. 이젠 지체할 시간이 없다, 밤이 되었지만 사막과 협곡을 가로지르는 그녀들의 여정은 계속되어야만 했다. 그렇게 말없이 차를 몰던 중, 어둠에 쌓인 채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아름다운 풍광 앞에 잠시 차를 세우고 한 숨을 돌린다. 루이스는 델마에게 뭔가를 말하려고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아마도 자신들이 원래 계획했던 것이 이런 곳에서의 여유로운 휴식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지금은 증폭되는 엄청난 사건의, 평범한 자신들로서는 결코 상상하지도 못했던 사건의 주인공이 되어버린 아이러니를 목도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낮에 만났던 그 뻔뻔한 유조트럭 운전자와 다시 조우를 했고 예의 그 음담패설은 똑같이 반복되었다.


그들 VI

   훔쳐 탔던 경찰차가 중간에 퍼져 버렸고 마틴과 루디는 경찰 신분을 이용해 어리바리한 시민의 차로 갈아타고 시내로 돌아왔다. 경찰복 대신 양복을 한 벌씩 빼 입은 후 다시 길을 가던 중 또 마틴의 발작이 시작된다. 루디가 진통제를 꺼냈지만 당황한 나머지 알약을 모두 수챗구멍으로 흘려버렸다. 루디는 급하게 주변의 약국을 찾았고 마틴의 진통제를 요구했지만 그 약은 병원 처방이 있어야만 하는 약이라며 약사가 거부한다. 마틴을 살리기 위해서 루디는 용기를 내어 권총을 꺼내고는 약 진열대를 향해 한 방 당겨 버린다. 효과가 있었다, 순순히 약이 그의 손에 들어왔고 그것으로 마틴은 살렸지만 그 사이에 이미 신고가 들어간 상태다. 경찰들과 방송사들이 들이닥쳤다. 둘은 어느 식당으로 들어가서 다시 인질 놀이를 했고 그렇게 장시간의 대치가 이어진다. 이 상황을 방송국은 생방으로 중계했고 총을 든 납치범 마틴과 겁에 질린 인질 루디의 모습이 떠들섞하게 전국을 달궜다. 뉴스뿐만 아니라 그럴 때면 언제나 등장하는, 소위 관련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토론과 인터뷰가 이어졌고 스톡홀름 증후군이니 하는 용어도 TV를 통해 흘러나온다. 물론 압둘과 헹크 그리고 중간 보스도 그 뉴스를 보았다. 하지만 보스의 눈에 또렷하게 들어온 것은 권총을 휘두르고 있는 마틴의 손에 들린, 백만 마르크가 든 은빛 가방이었다. 가방의 행방을 명확히 인지한 중간 보스는 자신 쪽의 전문가를 불렀다. 한편, 마틴과 루디는 바다로 향하는 자신들의 길을 가야만 한다. 선심 쓰듯 밥값으로 돈 한 뭉치를 건네고는 다시 루디가 인질이 되어 대치 중인 경찰과 기자들 사이를 헤집고 나와 아무 차나 타고 그 현장을 빠져나왔다. 인질이 있기 때문에 반장은 둘이 시내를 빠져나갈 동안 몰래 추적하라고 지시했지만 수십 대의 경찰차들이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를 울리며 떠들썩하게 둘의 뒤를 따른다. 하지만 이들뿐만이 아니었다. 시 외곽으로 왔을 때 가방을 찾던 조폭들도 완전 무장을 하고 도로를 막아선 채 이들을 맞이한다. 앞으로는 조폭이고 뒤로는 경찰들이다. 총격전이 시작되었고 루디는 도로 옆 옥수수밭 속으로 차를 돌렸다. 조폭과 경찰들이 전쟁이 난 것처럼 서로 총질을 해대는 사이, 앞도 보이지 않는 옥수수 밭을 가르며 무작정 직진하던 루디와 마틴의 차는 그곳을 빠져나오자마자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만다. 헬기로 반장과 얼간이 형사 켈리가 뒤따라 왔지만 둘은 이미 차에서 빠져나간 뒤였다.



그녀들 VII

   그랜드 캐년의 협곡 사이를 가로지르는 그녀들의 질주는 계속된다. 보조석의 델마가 갑자기 웃는다. 왜냐는 질문에 뜬금없이 죽은 남자 이야기를 꺼내는 델마, 그냥, 그 표정 말이야, 예상하지 못했을 거 아냐, 내 거시기나 빨아... 미친 듯이 혼자 웃어대는 델마, 하지만 그 말에 루이스의 표정이 바뀐다, 난 하나도 웃기지 않아... 델마가 말한다, 알아, 네가 겪은 일이지? 텍사스에서... 네게도 일어난 일이었지? 도로가에 차를 세우고 루이스는 정색해서 말한다, 경고하는데, 다시는 그 얘기는 꺼내지도 마! 델마를 강간하려고 했던 그 남자, 그런 행동을 하면서도 하등의 잘못도 느끼지 못하는 남자, 그렇게 여성을 인간이 아니라 단순한 성적 도구로만 취급하는 남자, 루이스 역시 그 시대가 만든 그런 괴물에게 당했던 아픈 상처가 있었다. 그래서 멕시코로 가고자 한다면 누구나 당연히 떠올릴, 텍사스를 통과하는 제일 가까운 그 경로를 애써 외면하고 동부 해안을 따라 그렇게 멀리 돌아가고자 했던 것이다. 또한 살인은 우발적이었지만 그 우발성은 과거의 트라우마가 무의식을 뚫고 뛰쳐나온 결과일 것이다. 루이스는 한 사람에게 지우지 못할 상처를 남길 뻔하고도 결코 사과할 줄 모르는, 시대가 정당화시켜버린 그 뻔뻔함을 응징한 것이리라. "입조심했어야지"라는 이 말은 어쩌면 그가 입에 발린 말이라도 사과를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에둘러 표현한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질주 도중 또 한 번 그 시대의 상징으로 대변되는 남성상과의 충돌이 발생하는데... 과속으로 교통경찰에게 걸리고 만 것이다. 제복에 모자를 푹 눌러쓰고 위압감을 동반하며 면허증을 요구하는 이 경찰, 마치 나치 장교 같다. 신원 조회를 위해 운전석의 루이스를 경찰차로 데리고 간다. 이미 그녀들은 전국에 수배령이 떨어진 터, 이대로라면 그녀들의 장정은 여기서 마감될 판이다. 이제 델마는 확실히 변했다. 신원 조회를 하려는 순간 델마가 총을 들이민다. 상황은 갑자기 반전된다. 그토록 근엄함과 위압감을 과시하던 이 경찰은 순간 쫄보가 되어 처자식이 있는 몸이라며 살려 달라고 질질 짜고 있다. 이제 모든 것이 델마의 주도로 상황이 통제된다. 앞서와는 다르게 이번에는 루이스가 델마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르고 있다. 경찰의 총을 뺏어서 무전기를 쏴 부숴버렸다. 총으로 뒷 트렁크 문짝에 숨구멍을 낸 후 트렁크에 들어가라고 경찰을 협박했다. 울면서 트렁크에 웅크리고 들어간 경찰, 3일 전만 해도 이런 짓은 꿈도 못 꿨어요, 제 남편을 보면 이해가 갈 거예요, 부인한테 잘해 주세요, 정말 미안해요, 이 말만 남기고 델마는 트렁크의 문을 쾅 닫아 버린다.


그들 VII

   택시를 타고 다시 시내로 들어간 둘, 역시 택시 기사(이 영화의 감독인 토마스 얀이 카메오로 직접 출연했다.)에게 분에 넘치는 금액을 지불하고 그들이 간 곳은 마틴의 버킷 리스트를 해결해 줄 곳, 전날 압둘과 헹크라는 두 얼간이가 들렀던 중고차 판매소다. 엄마에게 선물할 연분홍 캐디락을 주문했고 판매소 사장이 씌운 바가지 요금에도 불구하고 현금으로 깔끔하게 지불한 후 둘은 캐디락을 타고 떠난다. 하지만 이 시점의 이들은 더 이상 듣보잡이 아니라 신문과 방송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핵인싸가 되어 있었다. 판매소 사장은 신문 1면을 대문짝만하게 장식한 그들의 사진을 바라보며 경찰에 전화를 건다. 둘은 마틴의 집으로 향한다. 어느새 밤이 되었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엄마가 사는 부근에 차를 멈추고는 자신들이 마음에 드는 이름을 가진 주소들을 임의로 골라 쓰고 남은 백만 마르크를 나누어 우편으로 모두 부쳤다. 그리고 엄마가 사는 집의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중고차 판매소 사장의 신고로 이미 경찰들이 부근에서 잠복한 상태였다. 엄마를 불러냈을 경찰들이 출동했고 마틴은 다시 총을 겨누어 대치 상태로 들어간다. 루디는 이제 그만 포기하자며 총을 내려놓으라 외쳤지만 마틴은 단호하다, 바다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을 위해서라면 바다는 나중에 봐도 된다고 루디가 달랬지만 마틴이 울먹이며 말한다, 그렇겠지만 난 아냐... 그렇다, 사실 바다를 번도 보지 못한 쪽은 루디만이 아니었다, 마틴도 마찬가지였다. 순간 권총이 마틴의 손에서 떨어진다. 마틴이 순순히 투항을 했다고 경찰들은 생각했지만 그 자리에서 마틴은 스러지고 만다. 다시 발작이 시작된 것이다. 루디가 달려갔고 구급차를 부르라고 소리를 질러댔다. 미적이던 경찰은 그러지 않으면 시체를 체포하게 될 거라는 루디의 엄포에 구급차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이제 루디도 단호해졌다, 마틴에게도 바다를 보여줘야 한다. 그렇기에 루디는 구급차에 동승하겠다고 고집했고 그런 루디의 고집에 경찰은 이해할 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인질이 납치범을 친구라고 하다니... TV에서 주워들은 것은 있어서 얼간이 형사 켈리가 마디 거든다, 헬싱키 증후군이야... 



그녀들 VIII

   이렇게 둘의 심경은 확연이 바뀌었다. 도주가 계속될수록 심지가 무뎌지는 루이스다. 차를 몰던 중 갑자기 자신의 잘못이라고 한다, 나 때문에 이 지경까지 왔잖아, 경찰서로 갈 걸 그랬어... 하지만 지금의 델마는 그렇지 않다, 네 입으로 말했잖아? 아무도 안 믿어 줄 거라고... 이래도 저래도 인생은 엉망이 되었을 거야, 그놈은 내게 고통을 줬어, 네가 나서지 않았다면 더 끔찍했을 거야, 지금은 재미라도 있잖아? 그러고는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자신의 감정을 확실하게 매듭짓는다, 그놈한테 미안한 감정은 없어, 내 손으로 죽이지 못한 게 안타까울 뿐이지... 휴게소에서 루이스는 할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구 위에는 계시죠? 할의 다정한 목소리다, 낯선 분 같지가 않아요, 그리고 현실적인 충고를 한다, 계속 움직일수록 문제가 더 커집니다. 단순한 사고였다면 믿겠냐는 루이스의 질문에는 이렇게 답했다, 믿고 말고요, 모두 믿어야 하고요, 문제는 사고로 보이지 않는다는 거죠, 게다가 아무런 설명도 없고요. 할은 질문을 이어갔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해요, 살고 싶지 않으세요? 생각이 많아지는 루이스, 감금, 전기의자형, 무기형 같은 말들이 계속 맴돌아요, 살고 싶지 않냐고요? 글쎄요, 전... 순간 루이스는 멀찍이 서 있는 델마를 돌아다보곤 잠시 뜸을 들였다 대답한다, 모르겠어요, 생각해 볼게요. 할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설득을 이어간다, 뭐든 도울게요, 왜 도망치는지 압니다, 텍사스 일도 알고요... 이때 델마가 다가와서 일을 망치지 말라며 수화기를 뺏어 끊어버렸지만 경찰이 가까스로 위치 추적에 성공한 뒤였다. 델마는 한번 더 확인을 요구한다, 너 포기한 거 아니지? 그 사람들이랑 협상 안 할 거지? 난 협상 같은 거 안 해, 루이스는 재차 마음을 다잡고 차에 오른다. 그렇게 다시 도로 위로 올라선 그녀들, 서로 깨어있음을 확인하며 절대로 협상에 응하지 않겠다고, 다시는 과거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둘 뒤로 자신들에게 음담패설을 늘어놓았던 문제의 트럭이 또 나타났다. 하지만 이미 결심이 그녀들이다, 이번에는 그냥 넘어갈 없다. 공터로 그를 따라오게 하여 차를 세웠다. 사타구니를 움켜쥐며 어떤 기대를 잔뜩 품은 채로 내린 트럭 운전사, 모르는 여자한테 그러는 어디서 배웠어? 누가 당신 어머니나 여동생, 부인한테 그런다면 좋겠어? 특히, 움직이는 구역질 나, 도대체 무슨 뜻으로 그러는 거야? 당황한 운전사는 미친년들이라며 돌아 섰지만 루이스는 사과를 요구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Fuck you" 뿐이었다. 시크한 표정으로 둘은 총을 빼들었고 트럭의 유조통을 쏘아 터뜨려 버린다. 하늘을 향해 붉게 솟아오르는 불기둥과 화가 치밀어 질펀하게 욕을 쏟아내는 트럭 운전사를 뒤로 하고 그녀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다시 차를 몰았다. 한 번 사고를 것이다. 살인 혐의에 강도, 경찰 감금에 트럭 폭파까지, 이제 경찰은 델마와 루이스를 단순 수배에서 뉴멕시코, 애리조나에서 발생한 무장 강도, 경찰관 납치 감금 및 살인 무기를 사용한 무장한 위험인물로 간주했고 수많은 경찰과 헬기까지 동원하여 그녀들을 쫒는다. 얼마 가지 않아 도로를 달리던 순찰차와 마주쳤고 이때부터 추격전이 시작된다. 이제 어떻게 될진 모르겠지만 너랑 함께라서 기뻐, 델마의 이 말과 동시에 루이스는 액셀을 힘차게 밟았다. 수많은 경찰차가 서로 무전을 주고받으며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그녀들을 추적했지만 루이스는 아슬아슬하게 추격을 따돌렸다. 하지만 점점 포위망은 좁혀졌고 결국 그랜드 캐년의 거대한 낭떠러지 앞에서 차를 멈춰야만 했다.


그들 VIII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다. 이제 둘의 목표는 동일하다, 바다로 가는 것... 마틴이 정신을 차리자 둘은 다시 구급차를 탈취한다. 이제 바다로 가는 일만 남았다. 하지만 길을 달리던 중 눈에 띄는 화려한 건물 앞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으니... 압둘과 헹크가 소속된, 여전히 "I Will Survive"가 울려 퍼지는 그 스트립 바다. 이번에는 루디의 버킷 리스트를 실현할 차례다. 소원대로 루디는 아가씨 두 명을 골라서 뜨거운 밤을 보냈지만 압둘과 헹크가 그들을 알아보고야 만다. 이제 그들은 잡힌 신세가 되었다. 어두운 지하실에 갇혀 돈의 행방을 묻는 중간 보스의 질문에 마틴과 루디는 그저 웃기만 할 뿐이다. 다시 정색을 하고 묻는 질문에 마음에 드는 주소를 골라 다 부쳐 버렸다고 한다. 중간 보스는 죽어줘야겠다며 총을 겨누지만 둘은 전혀 두려운 기색이 없다. 죽여, 어차피 뇌종양으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거든... 당황한 중간 보스의 총구가 이번에는 루디 쪽을 향했지만 돌아오는 말은 골수암 말기란다. 중간 보스는 피가 튈까 봐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머리에 총구를 겨눴고 덩달아 압둘과 헹크도 그들을 향해 총을 겨눴다. 눈을 질끈 감은 채로 둘은 서로 손을 꼭 잡았다. 그때 덩치 큰 누군가가 지하실 창고로 내려온다, 보스였다. 뜬금없이 멋짐을 뿜어내며 나타난 이 보스 역으로 작년 7월 19일, 일흔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던 룻거 하우어가 카메오로 등장한다. 뉴스를 통해 이들의 사정을 이미 알고 있는 보스는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바다로 갈 겁니다, 본 적이 없거든요. 보스가 가벼운 미소를 띠며 말한다, 그럼 뛰어, 얼마 남지 않았거든... 천국에는 주제가 하나야, 바다지, 노을이 질 때 불덩어리가 바다로 녹아드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지, 유일하게 남아있는 불은 촛불 같은 마음속의 불이야...



그녀들 IX

   이제 영화는 막바지다, 최고의 엔딩씬을 자랑하는 <델마와 루이스>의 결말이다. 경찰의 추격을 피해 달아났지만 길이 막혔다. 앞으로는 그랜드 캐년의 거대한 낭떠러지가 버티고 있고 뒤로는 무장한 헬기와 더불어 경찰들과 저격수가 총을 겨누고 있다. 진정 사면초가의 상황이다. 곧이어 총을 버리고 투항하라는 경고 방송이 울려 퍼진다. 할은 자신이 그녀들을 달래 보겠다며 총을 거둘 것을 검사에게 요구했지만 검사는 요지부동이다. 그런 순간에도 방아쇠에 걸쳐진 저격수의 손가락엔 점점 힘이 들어간다. 이제 진정 선택의 순간이다. 영화 도입부의 테마였던 "썬더버드"가 잔잔하게 흐르면서 델마가 결심한 듯 말한다, 좋아, 잘 들어, 우리 잡히지 말자. 루이스가 놀란 표정으로 되묻는다, 무슨 소리야? 델마의 말, 계속 가는 거야! 루이스, 뭐라고? 델마, 가자. 루이스가 한번 더 되묻는다, 확실해? 델마는 웃으며 대답한다, 그래, 밟아! 둘의 눈가에는 눈물이 고였지만 입가에는 환희의 미소가 흐르고 있다. 갑자기 루이스가 델마에게 입을 맞춘다, 그리고 결심한 듯 힘차게 액셀을 밟았다. 뒤에서 할이 안타깝게 달려갔지만 이미 뽀얀 흙먼지를 일으키며 차는 출발한 후였다. 앞쪽으로 절벽이 점점 가까워진다. 둘은 각각 한쪽 손을 들어 서로 꼭 마주 잡았다. 그녀들의 자질구레한 옷가지와 함께 뒷좌석에 놓여 있던, 여행 출발과 함께 찍었던 둘만의 셀룰로이드 셀카 사진이 바람에 펄럭이며 날아올랐다. 둘은 마주 보며 환희에 가득 찬 웃음을 만면에 그렸다. 이제 절벽은 바로 앞이다, 그 순간 루이스는 액셀을 한번 더 세차게 밟았다. 그녀들을 태운 차가 날아오른다. 하얀 연기를 세차게 내뿜는 터보 엔진을 장착한 비행선마냥, 그녀들의 차는 뒤로 뽀얀 흙먼지를 내뱉으며 하늘을 향해 비상했다. 엔딩 테마 "썬더버드"가 웅장하게 클라이맥스로 치닫는 것에 보조를 맞추듯 광활한 그랜드 캐년의 험곡과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날아 오른 차가 비상의 정점을 찍고 하강하는 순간, 화면은 정지하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다.



그들 IX

   이제 영화 <노킹 온 헤븐스 도어>도 마무리할 시점이다. 이 영화 역시 <델마와 루이스> 못지않은 인상적인 엔딩씬을 자랑한다. 앰뷸런스를 훔쳐 달아난 둘은 기어이 해변 입구에 도착했고 바다 쪽으로 향해 난 오솔길 앞에 나란히 섰다. 짠내가 느껴져? 마틴의 질문에 '응'이라고 답하며 루디가 먼저 한 발을 내디뎠다. 뒤에서 마틴이 루디를 부른다, 할 말이 있어... 루디가 말을 가로챈다, 알아, 내가 먼저 말할게, 두려울 것 하나도 없어.. 이제 둘은 미소를 지으며, 데낄라 한 병을 손에 쥔 채 나란히 바다를 향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곧고 길게 뻗은 오솔길이 있고 그 너머로 바다가 있을 것이다. 세찬 바람과 함께 파도의 철썩임이 귀를 때린다. 오솔길을 따라 그들이 한발 한발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동안 카메라는 롱 테이크로 전환된다. 그렇게 그들이 앞으로 전진함에 따라 바다는 거대한 절벽처럼 점점 솟아오른다. 세찬 바람을 헤치며 나아가 거센 파도가 치는 바다의 모래사장 위에 나란히 섰다. 마침내 바다 앞에 선 둘의 눈에는 감격의 눈물이 그렁인다. 태어나서 처음 접하는 바다, 그들은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그 광대하고 웅장한 자태를 바라보며 단지 데낄라 병만 주고받을 뿐이다. 마틴은 모래사장 위에 주저앉아 말없이 담배만 태운다. 갑자기 마틴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하는 순간, 영화의 엔딩을 최고조로 애잔하고 눈물짓게 만드는 바로 그 노래, 밥 딜런의 "노킹 온 헤븐스 도어"가 처연하게 울려 퍼진다. 동시에 카메라는 바다를 배경으로 서 있는 루디와 앉아 있는 마틴의 뒷모습을 실루엣으로 잡는다. 앉아 있던 실루엣이 옆으로 픽 스러진다. 서 있던 실루엣은 말없이 다가가 스러진 실루엣 옆에 가만히 앉는다. 파도치는 바다를 배경으로 두 실루엣을 한 화면에 담으며 밥 딜런의 노래가 애절하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다.






   서두에서 언급한 대로, 그리고 앞서 소개한 두 영화의 줄거리를 비교해 보더라도 두 영화가 비슷한 구성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두 영화 모두 동성(同性)의 주인공 커플을 내세운, 그리고 둘 사이의 우정을 기반으로 전개되는 로드 무비란 점이다. <델마와 루이스>에서는 영화 제목과 동일한 이름의 두 여성이, <노킹 온 헤븐스 도어>에서는 마틴과 루디라는 두 남성이 주인공이다. 또한 영화의 주인공들은 뜻하지 않은 사건과 맞닥뜨리게 되면서 의도치 않은 일탈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들의 일탈은 증폭되는 사건의 연속으로 이어진다. 델마를 겁탈하려던 남자를 우발적으로 죽이게 되면서 생각지도 않았던 동반 도주라는 일탈을 감행하게 되는 <델마와 루이스>와 마찬가지로 <노킹 온 헤븐스 도어>의 마틴과 루디는 데낄라가 가져다준 용기에 의기투합하게 되고, 역시 술 김에 계획에도 없었던 바다행을 감행하면서 일탈이 시작된다. 일탈의 전개 과정도 비슷하다. 멕시코로의 가없는 도주를, 또는 바다를 향한 정처 없는 방랑을 무작정 감행하던 중 우연은 계속 둘을 난관 속으로 밀어 넣지만 이 난관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더 큰 사고를 벌이게 되면서 일탈의 상황은 더욱더 악화된다. 또한 계속 악화되기만 하는 일탈의 결과는 두 영화 모두 죽음으로 마무리된다. 


   이러한 일탈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또 다른 공통점은 비슷한 궤적을 그리는 두 주인공의 성격 변화다. 각 영화에 등장하는 커플들의 성격은 상당히 대조적이다. 루이스와 마틴은 적극적이고 외향적인 반면 델마와 루디는 수동적이며 내성적이다. 얼떨결에 휘말린 사건과 이어지는 일련의 험난한 과정을 겪으면서 두 주인공의 성격은 서로 전이가 되는데, 특히 수동적이고 내성적이었던 쪽의 변화가 영화를 이끌어가는 주요 동인이 된다. 델마의 경우 전형적인 가정주부로서 보수적인 남편의 기에 눌려 자신의 주장도 마음대로 펴지 못하는 삶을 살았지만 루이스와 함께 한 여정을 통해서 능동적이며 주체적인 여성으로 거듭나게 된다. 여정의 처음은 델마를 아기 다루듯 하는 루이스가 둘의 관계를 주도하지만 일탈의 막바지에 오게 되면 이 관계가 역전되어 오히려 델마가 루이스의 역할을 대체하며 주도적으로 행동한다. 그래서 형사 할의 제안에 루이스는 고민하지만 델마는 그것을 거부하고 마지막까지 둘의 여정을 그녀가, 소위 요즘 유행하는 신조어로, 하드캐리하게 된다. 루디의 변화도 델마의 경우와 비슷하다. 천성이 착하고 수동적이며 내성적인 루디는 자신을 함부로 대하는 마틴에게 찍소리도 못한다. 하지만 마틴과의 여정을 통해 루디는 이전의 자신이라면 결코 상상할 수도 없었던 난관을 경험하게 되고, 그 속에서 싹튼 마틴과의 우정이 점차 누적됨에 따라 소심하던 그의 성격도 조금씩 변하여 발작을 일으킨 마틴을 살리기 위해 직접 총까지 들게 될 정도로 발전한다. 처음엔 마틴이 주도하던 둘의 관계는, 후반부에 마틴의 허세가 드러나게 되었을 때 루디가 마틴의 자리를 대체하여 마틴을 끝까지 바다로 하드캐리하게 되는 관계로 변한다.


   마지막으로 두 영화의 공통점을 뽑으라면, 엔딩 신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 사상 최고의 엔딩씬을 꼽는 투표를 한다면 두 영화 모두 언제나 상위권에 당당히 자리매김할 정도로 매우 감동적이며 인상적인 엔딩 신을 자랑한다. <델마와 루이스>의 엔딩 씬은 영화상으로는 그랜드 캐년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그랜드 캐년에서의 촬영은 허용되지 않기에 실제로는 미국 유타주의 모압에 위치한, 그랜드 캐년 못지않은 웅장한 협곡을 자랑하는 "데드 호스 포인트" 주립공원(영화 <미션 임파서블 2>의 촬영지이기도 하다.)에서 찍었다고 한다. 이렇게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협곡에서 두 주인공은 사면초가의 위기에 처한다. 포기하고 순순히 잡힐 것인지 아니면 저항하며 총알받이가 될 것이지 선택해야 한다. 루이스는 포기할 수 없다며 저항을 위해 총을 장전하지만 델마는 제3의 길을 제안한다, 영화 포스터의 카피가 되는 대사 "Let's Keep Going(계속 가는 거야)"이다. 끝이 없을 자신들의 여정을 계속 이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둘은 서로의 진한 우정을 확인하고 환한 웃음을 서로 주고받으며 앞으로 전진했고, 영화의 결말처럼 하늘로 날아올랐다. <노킹 온 헤븐스 도어>의 엔딩 신을 장식한 아름다운 바닷가는 네덜란드 노르트홀란트 주에 속한 자치시인 텍셀 섬이라고 한다. 텍셀 섬은 한국인의 관점에서 보자면 네덜란드의 제주도라 할 수 있을 터인데 자연과 바다 생물, 새를 찾는 여행자를 위한 파라다이스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만큼 아름다운 해변을 자랑하는 곳이지만 영화에서는 거센 바람과 세찬 파도만 몰아치는 광폭한 바다다. 텍셀 섬의 이런 광폭하고도 거대한 바다 앞에 선 두 남자, 자신들의 소원이었던 바다를 바라보지만 그저 만감이 교차하는 듯한 아리송한 표정만 지을 뿐, 둘 다 아무 말도 없다. 형언할 수 없는 장관 앞에서 자신들의 삶의 끝을 예감한 그들은 그저 담담하다. 예상대로 마틴이 스러지고 옆에 앉아 먼저 가버린 친구의 곁을 지키는 루디의 뒷모습을 바다를 배경으로 담아낸다. 여기에 밥 딜런의 <Knocking' On Heaven's Door>가 처연하게 흐르게 되면 이 순간은 단순한 슬픔을 넘어 형용할 수 없는 진한 여운으로 관객에게 각인된다.  

   

   크게 보자면 두 영화는 모두 체념과 소외라는 정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소외'의 정서는 영화의 두 커플들이 모두 아웃사이더란 점에서 그렇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던 두 커플은 그 자체로 사회적 관심 밖에 있다. 게다가 시한부 판정을 받은 마틴과 루디, 그리고 도망자가 되어버린 델마와 루이스는 이미 아웃사이더로서 정상이라는 범위가 미칠 수 있는 공감의 영역을 벗어나 있다이 서글픈 두 아웃사이더 커플들은 물론  뜻하지 않은 사건들을 통해 지명수배라는 전국구 '핵인싸'가 되지만 여전히 서글픈 아웃사이더일 뿐이다(그래도 이런 아웃사이더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사람이 있어서 그나마 위안이 되기도 한다. <델마와 루이스>에서는 형사 할이, <노킹 온 헤븐스 도어>에서는 조폭 두목 커티스가 그렇다). 그리고 이런 아웃사이더들의 일탈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 바로 '체념'이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체념을 "희망을 버리고 아주 단념함"과 "도리를 깨닫는 마음" 두 가지 뜻으로 정의하고 있다. 한자 자체로는 '살필 체-諦'와 '생각할 념-念'으로 구성되어 그대로 직역하면 '생각을 살피다'라는 의미가 될 터인데, 특히 체(諦) 자에는 '살펴서 깨우치다'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기에 단순히 포기(暴棄)나 단념(斷念)의 의미와는 그 결을 달리한다. 그래서 체념이란 단어는 단념이라는 부정적 의미와 더불어 더 고차원적인 "도리를 깨닫는 마음"이란 의미도 함께 지니고 있는지도 모른다. <두 글자의 철학(푸른숲)>의 저자 김용석 교수는 이 책에서 '포기'와 '체념'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체념'은 원래 '도리(진리)를 깨닫는 마음'의 뜻이다.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서 자신의 의지를 스스로 거두는 것을 의미한다. 운명에 따르기는 하지만, 운명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지 깨닫고 그에 맡기는 것을 뜻한다. (......) '포기'는 '하던 일을 중도에 그만두어 버리는 것'을 뜻한다. 포기는 세상에 대한 이치를 깨닫거나 자신에 대한 성찰을 반드시 전제하지 않는다.

   이어서 김용석 교수는 '포기'는 상대방의 힘을 아는 것이고 '항복'의 의미와 비슷하게 힘에 의해 꺾이는 것인 반면에 '체념'은 나 자신을 아는 것이며 스스로 힘을 거두는 행위로서 매우 성숙한 인간 행위라고 주장한다. 또한 체념은 깊은 깨달음이나 전환의 진통을 전제하기에 체념의 과정은 아프지만 이는 곧 변신을 의미한다라고도 주장한다. 일반적으로 체념이란 단어를 생각해 보면,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극단적 상황과 맞닥뜨렸을 때 선택하게 되는 행동으로서의 '포기' 또는 '단념'이라는 부정의 정서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체념의 순간 역설도 함께 하는데 이 역설은 이미 다 내려놓은 마당에 뭣이든 못할까?라는 또 다른 긍정이기도 하다. 그래서 체념 이전에 억눌러 왔었던, 불가능할 것 같았던 다른 소망으로 향하는 길을 보게 된다. 체념이란 한자에 내포된 이중의 의미와 더불어 김용석 교수의 말대로 체념은 어떤 깨달음의 순간이고 스스로를 내려놓는 순간이며 진통을 동반하지만 어떤 새로운 전환을 야기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체념의 순간 발견하게 되는 또 다른 길은 내려놓음, 버리고 비움이라는 성숙하고도 고차원적인 행위를 통해 열리는 새로운 길이다. 물론 그 길은 기존의 자신이 아니라 전혀 다른 자신으로의 전환을 전제하는 길이기도 하다. 우발적인 살인으로 인해 체념은 시작되었고 델마나 루이스는 체념의 행위를 통해서 이전과는 완전히 단절된 또 다른 사람이 된다. 이런 델마의 변화는 철저하게 비가역적이다. 껍질을 깨고 나온 새는 다시 껍질 속으로 들어갈 수는 없다. 마틴과 루디의 경우, 얼마 남지 않은 시한부 삶이란 선고를 받았을 때부터 체념은 이미 시작되었다. 체념이 열어준 길은 바다로 향하는 길이었고 마지막까지 그 길을 함께 하며 변화된 자신들을 발견하게 된다.


   비록 소외와 체념이라는 공통의 정서를 기반으로 비슷한 구성과 전개를 갖는 두 영화지만 드러나는 메시지는 차이가 있다. <델마와 루이스>는 사회 고발적인 성격이 매우 강하다. 이 영화는 두 여성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당대의 남녀차별에 대한 선명하고 직접적이 비판을 분명한 메시지로 전달하고 있다. 요즘은 PC(Political Correctness) 영화에 대한 반발이 상당하다. 그 이유는 영화의 맥락과 무관하게 의도적으로 PC를 억지로 집어넣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델마와 루이스>를 이런 의미에서의 PC 영화라고 부르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우선 감독인 리들리 스콧 자체가 여성이 주체가 되는 영화를 꾸준히 만들어 왔다. <에일리언>에서의 시고니 위버가 그 시작이겠지만 이 영화의 프리퀄인 <프로메테우스>의 루미 라파스나 <에일리언: 커버넌트>의 캐서린 워터스톤의 경우처럼, 단순히 남자 주인공의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여자 주인공이 아니라 단독 주인공이 되어 험난한 여정을 주도적으로 헤쳐 나가는 주체적인 여성상을 보여준다(물론 이것이 지나쳐서 육체적 차이까지 넘어서고자 오버했던 <지.아이.제인> 같은 영화도 있지만 말이다). 여하튼 스콧은 이전부터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가졌던 감독이기에 <델마와 루이스>가 내세우는 메시지는 결코 생뚱맞은 것이 아니라 원래 그런 맥락으로 기획된 영화일 것이다. 실제로도 이 영화가 만들어진 20년 전의 미국이라면 영화에서처럼 그런 남녀차별이 엄연히 존재했던 것도 사실이었고, 그래서 영화는 그런 차별의 거대한 바위를 향해 과감히 자신이 계란이 되어 부딪히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감독은 이런 남녀 차별의 문제를 당시의 남성성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와 희화화를 통해서 더 부각시킨다. 여성을 겁탈하려 하고도 사과하기를 거부하는 남자, 여성을 노골적으로 성적 대상으로만 취급하는 트럭 운전사, 이들 모두 여성에게 할 수도 있는 사과 한 마디가 자신의 자존심을 무너뜨리는 것으로 생각하는 남성 우월주의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이런 우월 의식은 전형적으로 강자한테 약하고 약자한테 강한 허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나치 장교 같은 교통경찰을 통해 그대로 까발리고 있다. 그렇기에 <델마와 루이스>의 엔딩에는 슬픔 속에서 승화된 어떤 카타르시스가 존재한다. 비극이지만 관객들은 이 결말에서 어떤 희열을 느낀다. 그것은 억압적인 남성 중심주의에 대하여 억눌린 아웃사이더가 행하는 자신들만의 통렬한 복수의 감정이다. 그것이 비록 바위를 때리는 계란이 될지언정 그녀들은 그렇게 자신의 여정을 끝내지 않음으로써 사회의 그런 통념에 나름의 통렬한 복수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성을 짙게 드러내는 <델마와 루이스>와는 다르게 <노킹 온 헤븐스 도어>의 경우 뚜렷하게 드러나는 메시지는 보이지 않는다. 감독은 아마도 <델마와 루이스>를 인식했을 것이고 그래서 <델마와 루이스>의 주제 의식을 다른 쪽으로 돌려야만 했을 것이다. <델마와 루이스>가 시종일관 진지한 영화라면 <노킹 온 헤븐스 도어>는 우선 코미디를 지향한다. 폭풍같은 감동을 안겨주는 짧은 결말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은 완전히 코미디로 도배된다. 이런 코미디가 그리고 있는 것은 어떤 희화화이자 풍자다. 우선 이런 희화화의 특정 대상은 공권력으로 향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같이 무능하고 뭔가 덜떨어진 경찰 조직을 묘사하면서 특히 켈리라는 얼간이 형사를 내세워 공권력에 대한 노골적인 희화화를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덜떨어진 인물들은 비단 경찰뿐만 아니다. 중간 보스를 포함하여 압둘과 헹크로 대변되는 조폭들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등장하는 간호사나 차에 치인 아이, 차를 뺏기는 시민이나 인질극 상황에서 취재를 하는 기자 등 일반인들도 어딘가 나사 하나는 빠진 듯한 모습들이다. 이는 어찌 보면 정상인이 아웃사이더를 보는 시선을 그대로 뒤집어 놓았다고 볼 수도 있다. 이런 희화화를 통해서 오히려 아웃사이더들이 정상이며 정상인들은 바보같이 묘사되고 있다. 이런 식으로 영화는 정상이 바라보는 아웃사이더들에 대한 시선을 통렬하게 비꼬면서도 엔딩을 통해서는 아웃사이더가 죽음을 대하는 또 다른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체념에서 출발했지만 체념이 열어준 길을 따라가면서 그들은 변화했고 그 변화의 끝에서 그들은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노킹 온 헤븐스 도어>의 엔딩은 후반부까지의 코미디를 완전히 반전시켜, 슬픔의 극대화를 통해 그 자체로 진한 여운으로 관객에게 남는다. 이렇게 희극과 비극의 극적인 대비를 통해 영화가 심어준 그 여운은 곧 어떤 회한으로 관객에게 가슴 에리도록 간직될 것이다. 


   두 영화 모두, 주인공들의 일탈은 체념에서 기인한다. 하지만 그 종말은 각 커플들에게는 환희의 종말인 동시에 일탈의 완성이다. 이 두 커플은 물리적이고 육체적인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들의 영혼은 자신들의 여정을 끝없이 이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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