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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INSE Dec 07. 2018

뒤늦은 속죄, 하지만 돌이킬 수 없는

조 라이트: 어톤먼트(Atonement)

어톤먼트(Atonement), 조 라이트 감독, 제임스 맥어보이, 키이라 나이틀리 주연, 2007





   거대한 도끼로 단번에 내려친 듯 깎여버린 하얀 속살을 드러낸 절벽을 배경으로 활처럼 휘어진 해안선을 따라 펼쳐진 그림 같은 바닷가. 한 쌍의 남녀가 만면에 웃음꽃을 피운 채 모래사장 위로 서로의 발자욱을 좇고 있다. 누가 보더라도 한눈에 연인 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팡~ 하며 이제 막 터지는 팝콘처럼 피어나는 웃음소리를 하늘 속으로 흩뿌리며 그렇게 두 연인은 난류같이 어지러운 발자욱들을 모래사장에 남기고 곧바로 그 흔적은 파도에 의해 지워지기를 반복한다. 곧 두 연인은 해변가와 조화를 이루며 서 있는 한 채의 별장으로 향한다. 이제 영화는 하얀 절벽과 푸른 하늘과 맞물린 수평선과, 우아한 곡선을 드러내는 해안선을 배경으로 하는 하얀 별장을 화면의 중심에 두고 서서히 페이드 아웃되며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간다. 



  이 행복하고도 흐뭇한 장면은, 하지만 음악 감독인 다리오 마리아넬리(Dario Marianelli)의 곡 "Cottage on the beach"가 배경으로 구슬프게 흐르면서 마치 잡히지 않을 한 편의 꿈과 같은 바람(Wish)인 듯 그렇게 어떤 회한이 되어 진한 여운으로 남는다. 그것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커다란 아쉬움이자 안타까움으로서, 마지막 장면이 그것을 더욱더 애잔하게 만들어 관객들에게 강렬한 울림을 던져주고 있다. 어떤 울림일까? "어톤먼트(Atonement)"는 속죄를 의미한다. 누구의 속죄일까? 그리고 그 속죄는 무엇에 대한 속죄이길래 마지막 장면을 이렇게 처리함으로써 보는 이의 마음을 그토록 아리게 만드는 것일까? 그러면 2007년 개봉된 조 라이트 감독의 영화 <어톤먼트>의 이야기를 천천히 따라가 보자. 단, 스포가 있음을 미리 밝혀 둔다.





   풍부한 상상력을 주체하지 못해 어릴 때부터 작가의 꿈을 품고 글을 쓰는 열세 살의 브라이오니(시얼샤 로넌 분), 그날도 오랜만에 귀가하는, 초콜릿 사업을 하는 오빠를 위해 공연될 연극의 극본을 막 마무리했다. 엄마에게 떨리는 마음으로 작품을 보여주곤 사촌인 쌍둥이 동생과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사촌 언니 엘리에게 극본을 나눠주고 연극 연습할 시간이 모자란다고 투덜거린다. 영국 귀족 가문의 막내딸인 그녀에겐 으레 그 나잇대 소녀들이 나이 차이가 좀 나는 동네 오빠에 대한 동경을 품듯 그녀가 좋아하는 로비(제임스 맥어보이 분)가 있다. 로비는 그녀의 집안 식모의 아들이었지만 공부를 곧 잘했기에 그녀의 아버지가 학비를 계속 지원해서 지금은 의대에 다니고 있다. 로비와 동갑인 그녀의 친언니 세실리아(키이라 나이틀리 분)는 어릴 때부터 로비와 남매처럼, 동성 친구처럼 자랐기에 서로 자주 티격태격하는 사이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둘은 사춘기를 지나면서 이성으로서 서로 관심을 갖게 되지만 어린 시절부터 막역하게 지내온 터라 친구에서 연인 사이로 발전하지 못하고 서로 주춤하며, 그러다 서로 어색해지는 그런 사이다. 그런 둘의 관계를 시기 어린 눈빛으로 지켜보는 브라이오니. 친오빠 레온(패트릭 케네디 분)이 귀가하는 그날도, 우연히 분숫가에서 둘이 티격태격하는 장면을 목격했다.



   장남이 동업을 하는 친구 폴 마샬(베네딕트 컴버배치 분)과 함께 집으로 왔다. 장남의 귀가로 저녁에 만찬이 있을 예정이었고 레온은 그 만찬에 로비를 초대했다. 저녁 만찬에 가기 위해 준비하던 로비는 타자기로 세실리아에게 그날 분수대에서 있었던 일에 대한 사과와 더불어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글을 쓴다. 고민 고민하며 써 내려가던 그는 "너의 은밀한 그곳에 키스하고 싶어..."라는 마지막 문장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하지만 이내 혼자 피식 웃고 말았고 다시 평범한 사과의 문장만을 담은 글을 타이핑하고 근사한 슈트로 갈아입은 후 세실리아의 저택으로 향한다. 가던 도중 우연히 브라이오니를 만났고 세실리아에게 자신이 쓴 편지를 전해달라고 했다. 호기심 많은 브라이오니가 그냥 전달할 리가 없었다. 편지를 들고 집으로 뛰어들어간 브라이오니가 카드 봉투를 열어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 로비 역시 편지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냈다. 그가 처음 썼던 낯 뜨거운 고백을 담은 편지가 실수로 전달된 것이다. 편지를 읽은 브라이오니의 표정은 심각해졌고 봉투는 버린 채 편지만 세실리아에게 그대로 전달한다. 세실리아는 브라이오니가 그 편지를 읽은 사실을 알았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하는 브라이오니에게서 영악한 아이의 모습을 본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기에 로비는 정면 돌파하기로 했다. 저택 문 앞에서 종을 울렸고 세실리아가 나왔다. 사과를 했지만 세실리아는 말없이 뒤돌아 집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그녀는 서재로 들어가선 책상 위의 스탠드 불을 켰다. 곧바로 그녀를 뒤따라온 로비는 무언가 결심한 듯 서재의 문을 닫았다. 몇 마디 어색한 말들이 오갔고 그제야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다. 이어지는 열정적인 키스와 더불어 둘은 서재의 대형 책꽂이에 기대어 뜨거운 사랑을 나눈다. 하지만 그 사랑의 행위도 마무리되지 못했다. 미처 완전히 닫히지 못한 서재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은밀한 불빛을 따라 들어온 브라이오니의 목소리에 그들의 몸짓은 얼어붙은 듯 그대로 멈춰 버리고 말았다. 울먹이는 브라이오니를 뒤로 하고 둘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옷매무새를 고치고 서재를 나간다. 물론 로비가 잠깐 멈칫했을 뿐이다.



   저녁 만찬 시간, 탁자 아래로 서로 손을 만지작거리는 둘, 하지만 쌍둥이가 사라지는 일이 발생했고 곧바로 사람들이 찾아 나섰다. 혼자 랜턴을 들고 호숫가 부근에서 쌍둥이들을 찾던 브라이오니는 무서운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이상한 소리에 플래시를 비쳤을 때 호숫가 수풀 더미에서 어떤 남자가 사촌 롤라를 뒤에서 성폭행하려 하고 있었다. 놀라서 소리를 내며 플래시를 떨어뜨렸을 때 그 남자는 재빨리 사라지고 말았다. 롤라는 그 남자를 보지 못했음에도 브라이오니는 그 남자를 로비로 만들기로 했다. 변태에다 서재에서 언니를 공격했다, 그래서 문제의 그 남자는 로비여야만 한다. 집안은 시끌벅적해졌고 롤라는 침대에서 간병을 받게 된다. 집안사람들이 문제의 그 남자로 집안 하인 중 한 명을 추궁하고 있을 때 브라이오니는 그가 로비라고 주장을 했고 자신이 목격했다고 실토했다. 하지만 로비는 보이지 않았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로비를 기다리던 세실리아... 마침 로비가 왔다는 소식에 급하게 밖으로 나갔을 때 로비는 저기 멀리서 쌍둥이 중 한 명은 목마를 태우고 나머지 한 명의 손을 잡고 의기양양하게 걸어오고 있었다. 멍하니 그를 바라만 보는 세실리아와 자리를 황급히 피하는 브라이오니, 수군거리는 사람들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서 있는 경찰들... 로비는 무슨 일이냐는 듯 천진난만한 표정을 지었고 세실리아는 그런 그의 표정을 보고 그가 범인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했다. 그는 곧바로 경찰차에 실려 저택을 떠나게 된다. 안타깝게 붙잡는 세실리아로부터 로비를 억지로 떼어낸 경찰들은 그를 차에 태우고 저택 정문을 나설 때 로비의 엄마가 경찰차를 막아서고 아들은 죄가 없다고 소리치며 난동을 부린다. 광경을 이층에서 복잡 미묘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브라이오니의 얼굴이 점차 클로우즈 업되는 동시에 타자기 소리도 함께 증폭되며 다른 모든 소리들을 집어삼킨다.




   이제 장면은 바뀌어 4년 후 북부 프랑스, 2차 대전이 발발했고 감옥에서 썩을 것인지 아니면 연합군으로 전투에 참가할 것인지에 대한 선택권이 외통수로 로비에게 주어졌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세실리아와 헤어져야만 하는 길을 선택했고 6개월 간 전투를 치르며 그렇게 북부 프랑스까지 오게 된다. 감옥에 있는 동안 면회도 되지 않았기에 둘은 서로 만나지도 못하다 참전 직전이 되어서야 로비는 군복을 입은 채로, 간호사를 지원한 세실리아는 간호사 복장으로 재회하게 된다. 여전히 애틋하게 그가 돌아오기를 바라는 안타까운 마음을 전하는 세실리아. 하지만 병원으로 곧 복귀해야만 하는 그녀를 배웅하면서 둘은 약속을 한다. 세실리아는 친구에게서 흰색 나무에 파란 창틀이 있는 바닷가의 별장을 하나 빌렸다고 했다. 다음 휴가 때 거기서 둘은 만나기로 약속하고 너무나도 안타까운 이별을 해야만 했다. 세실리아는 로비에게 사진 한 장을 건넨다. 만나기로 한 그 별장의 사진이다. "가서 여길 생각해..." 마지막 키스를 뒤로 하고 그렇게 버스는 떠났고 로비는 한 참을 따라 뛰어갔다.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하는 남자와 기다리는 여자... 이제 로비에게는 반드시 살아서 돌아와야만 하는 존재의 이유가 생겼다. 총알이 빗발치고 폭탄이 터지는 참혹한 전장 속에서 로비는 그 사진 한 장만을 보고 또 보며 버텼다.



   프랑스 북부에서 전투 중 고립된 로비와 두 명의 동료 병사. 그들은 본대에 합류하기 위해 정처 없이 헤매게 된다. 세실리아는 브라이오니가 캠브릿지에 합격해놓고서도 가지 않고 간호학교를 지원했노라며 자신과 만나고 싶다는 편지를 보내왔다고 했다. 자기가 어떤 짓을 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고 적혀 있었기에 아마도 속죄하는 마음으로 그랬다고 추측했다. 이런 내용을 담은 편지를 사랑해, 기다릴게, 돌아와 줘...라는 문장으로 마무리한 세실리아는 우편함에 편지를 넣기 전에 정성스레 편지에 입을 맞추었다. 로비는  세실리아가 보내온 그 편지를 읽고 또 읽었고 '돌아와 줘'를 의무처럼 되뇌었다. 어느 날, 약속했던 바닷가의 별장 사진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문득 가슴에 난 상처를 보게 된다. 하지만 세실리아에게 돌아가야만 하는 그에게 그 상처는 별것 아닌 것이었을 것이다.



   세 명이서 독일군을 피해 미친 듯이 헤매 다니던 그들은 마침내 브레이 듄스 해변가에서 본대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해변가의 상황도 만만치 않았다. 던커크 후송 작전으로 불린 그 작전에서 본국으로 병사들을 실어 나를 배는 침공으로 난파되어 버렸고 그 수많은 병사들이 모두 해변가에서 발이 묶여 버렸다. 반쯤은 자포자기로, 그래도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은 버리지 못한 채 병사들은 여기저기서 광기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로비 역시 그런 광기의 분위기에 전염되기 시작한다. 어쩌면 자신 스스로가 그런 광기 속으로 걸어 들어갔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의 몸은 뜨거웠고 목이 말랐고 세상이 흔들리고 있었다. 정처 없이 해변가 건물을 배회하던 그는 엄마를 본 것 같기도 했다. 정성스레 발을 닦아주는 엄마에게 그는 말했다. "돌아가야만 해요, 그녀는 절 사랑해요, 기다리고 있어요." 말없이 웃기만 하는 엄마... 순간 폭탄 소리가 울려 퍼졌고 그는 군화를 벗은 채로 밖으로 나왔다. 다행히 동료 병사가 그를 발견하고는 들떠있는 그를 진정시켰다. 하지만 로비는 계속 바닷가 별장 이야기와 세실리아 이야기를 반복할 뿐이다. 동료 병사는 그 별장은 여기서 가깝다고 그를 달랬고 조금만 참으라고 진정시켰다. 반쯤 부서진 건물 안으로 로비를 데려간 병사는 구석에 그를 누이고 잠을 좀 청하라고 했다. 누워서도 성냥불을 켜서 바닷가 별장 사진을 확인하던 로비는 잠이 든 것 같았다. 그리고 꿈도 꾸었다. 꿈속에서는 모든 장면들이 거꾸로 흐른다. 마침내 그 사건이 났던 그 시점으로 돌아가 있었고 경찰차로 호송되기 직전 세실리아가 그의 귀에 대고 안타깝게 속삭이고 있었다. 사랑해, 돌아와 줘... 옆에서 자던 동료 병사가 그를 깨워 속삭였다, 조용히 하라고, 계속 소릴 지른다고. 로비는 여전히 그녀가 기다리고 있다는 말만 반복했고 병사는 좋은 소식을 전해 주었다. 다행히도 내일 7시에 배가 오기로 했고 무사히 본국으로 귀국할 수 있다고, 그러니까 그때까지 더 자두란다. 승선이 시작되면 깨워 주겠다고 했다. 로비는 7시 전에 꼭 깨워달라고 간청하고는 다시 잠을 청한다.




   간호학교에서 간호 교육을 받는 18살의 브라이오니(로몰라 가레이 분). 그녀가 매일 보는 것은 여기저기 부러지고 잘려나간, 살점이 뜯겨 나가고 피로 흥건한 병사들의 참혹한 모습들이다. 전장에서 부상을 입고 후송된 참혹한 병사들을 묵묵히 치료하는 그녀... 그렇다, 그녀의 선택은 속죄였다. 곱디곱게 자란 온실 속의 그녀가 전쟁이라는 이 참혹한 현실 속에서 버텨낼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속죄였다. 그렇게 밤늦게까지 병사들을 치료하고 취침 시간에는 몰래 숙소 다락방에 올라가서 타자기를 두드렸다. 브라이오니는 그렇게 글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세실리아에게 편지를 썼다. 그렇게 힘든 상황을 버틸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자신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속죄라고... 그러던 어느 날, 병사들이 모여 있던 강당에서는 종군 뉴스가 상영되고 있었다. 그 속에는 후방 뉴스로 영국 여왕이 전쟁에 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은 거대한 초콜릿 공장을 방문하는 내용을 담은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공장의 주인 폴 마샬과 그녀의 약혼녀 롤라 퀸시가 여왕을 견학시켜 주고 있었다. 그것을 보던 브라이오니는 뭔가 결심한 듯 옷을 갈아입고 어딘가로 바쁘게 걸어간다. 그녀가 간 곳은 성당이었고 그곳에서는 폴과 롤라의 결혼식이 거행되고 있었다. 신부가 이 결혼에 반대하는 사람은 손을 들라고 했다. 그 순간 브라이오니는 의자에서 조용히 일어났다. 그날 그녀가 플래시를 비췄을 때 롤라의 뒤에서 바지를 내리고 있었던 사람이 뒤를 돌아봤고 그때 브라이오니는 그 남자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그는 바로... 폴 마샬이었다. 하지만 어린 브라이오니는 자신의 눈으로 똑똑히 봤던 그 남자는 로비였다고 판사 앞에서 증언하고 있었다. 신랑, 신부가 퇴장을 했고 브라이오니는 아무 말도 없이 무기력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성당에서 나온 브라이오니는 발햄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제는 수간호사가 된 세실리아의 집이 있었다. 편지를 썼는데 답장이 없어서 직접 찾아왔노라 핑계를 댔다. 할 말이 있다고도 했다. 집안으로 들어간 브라이오니는 언니에게 그날 판사에게 했던 증언을 바꾸고 싶다고 했다.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해서 용서도 기대하지 않는다고 했다. 세실리아는 용서할 생각이 없노라고 차갑게 응수한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고 했다. 브라이오니가족들에게는 그 사실을 털어놓고 싶다고 했지만 세실리아는 더 이상 불쾌한 과거는 떠올리기 싫다고 냉랭하게 거부해 버린다. 그때 안방에서 로비가 나온다. 로비 역시 차갑게 브라이오니를 대한다. 솔직히 말해서 너의 목을 부러뜨릴까 아님 계단 아래로 집어던질까 생각 중이야! 내가 네 사촌을 건드렸다고 믿어? 브라이오니는 아니라고 했다. 그때는 믿었던 거야? 그래, 그리고 아니기도 해. 지금은 왜 아니라고 확신하는데? 지금은 컸으니까... 난 그때 13살이었어. 얼마나 나이를 먹어야 사리분별을 하겠니? 열여덟이 되어서야 고백할 수 있었나? 전쟁통에는 열여덟에 죽어가는 병사도 있어!



   세실리아가 흥분한 그를 진정시켰다. 로비는 6시에 복귀 열차를 타야 하기에 시간이 없다면서 자신들을 위해서 부모님께 그날 호숫가에 있었던 모든 일들을 사실대로 말해달라고 했다. 세실리아와 로비는 그날의 범인이 하인인 대니 하드먼으로 알고 있었지만 브라이오니는 범인이 폴 마샬이라고 말해 주었다. 믿을 수 없다는 세실리아에게 방금 둘의 결혼식에서 오는 길이라고 했다. 그 말은 그날의 증언을 바꾸더라도 법적으로 폴 마샬을 단죄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의미한다. 폴은 완전히 면죄된 것이다. 브라이오니는 울면서 진정으로 사죄를 했다. 로비는 마지막으로 그녀의 속죄를 글로 남겨 줄 것을 요구했다. 변명도, 미화도, 설명도 필요 없이 진실만을 적어줄 것을 요구하면서 이제는 자신들을 그냥 내버려 두라고 했다. 밖으로 나온 브라이오니는 세실리아의 집 담벼락 아래에서 하염없이 서 있었다. 간호학교 숙소로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멍하게 정면을 응시하는 브라이오니의 얼굴을 카메라가 롱 테이크로 따라간다.






   잠깐만요, 브라이오니가 5분만 쉬자고 요청한다. 소설가로 대성하여 명성이 자자한 노년의 브라이오니(바네사 레드그레이브 분)는 자신의 21번째 소설을 출간하고 방송국에서 인터뷰 중이었다. 그녀의 소설 "어톤먼트" 출간 인터뷰였다. 대기실로 온 브라이오니는 힘들어하며 가방에서 알약을 하나 꺼내 먹는다. 다시 인터뷰가 이어지고 그녀는 21번째 소설이 마지막 소설임을 강조한다. 자신에게 치매 증상이 시작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이 책을 썼고 그래야만 한다고 했다. 전시에 성 토마스 병원에서 여러 번 습작을 했던 그 결과물이기도 한 이 소설은  자전적 소설이었다. 자신을 비롯해서 모두 실명을 사용했다, 진실만을 쓰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변명도, 미화도, 설명도 필요 없이...



   소설의 내용은 모두 사실이었다, 단 한 가지만 빼고...  그녀가 경험하지 못했던 일들은 전해 들은 경험담들을 통해서 썼다. 감옥의 상황이라든지 던커크 후송 작전이라든지, 하지만 진실의 효과는 냉정하다. 브라이오니는 전쟁 중에 세실리아와 로비를 재회시켰다. 그러나 현실은 그 반대다. 브라이오니는 용기가 없어서 발햄으로 세실리아를 찾아가지도 못했고 그렇기에 함께 있던 세실리아와 로비에게 한 자백은 모두 그녀의 소설적 상상에 지나지 않았다. 그 자백은 불가능했다, 왜냐면 로비가 참전 직전에 세실리아와 짧게 만나서 해변의 별장 사진을 건네받고 거기서 만나기로 약속했던 그때 이후로 둘은 결코 다시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1940년 6월 1일, 던커크 후송 시에 로비는 브레이 듄스에서 패혈증으로 죽고 말았다. 열에 들떠 있던 그날 밤, 그는 잠들어 깨어나지 못했고 7시에 깨우기로 약속했던 동료 병사가 죽어서도 놓지 못하는, 세실리아의 편지 뭉치와 바닷가 별장 사진을 챙겨서 품에 넣었다. 세실리아는... 1940년 10월 15일, 발햄 지하철 역 위의 가스와 수도관에 투하된 폭탄으로 인해 그곳에 피신해 있던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수장되어 이미 숨진 후였다.


   하염없이 애타게 기다리는 여자와 목숨을 걸고서라도 어떻게든 돌아가려던 남자는 서로의 그 처절하고도 안타까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다시 만나지 못했다. 사랑은 사랑으로 남지 못했다.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음에도 뜨거운 애정 행각은 누구에 의해 중단되어야만 했었고 그리고 그 누구에 의해 그들은 헤어져서 역시 짧은 시간 단 한 번만 재회를 했고 남자는 전장으로, 여자는 직장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리고 그렇게 애타게 기다렸고 처절하게 돌아가려 했건만 죽음이 기다림과 돌아옴의 만남을 단절시켜 버렸다. 이 모든 것이 오직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그것은 바로 어린 시절 치기 어린 질투심에 무심히 내뱉었던 거짓말 때문이었다. 그 사소하고 무미건조한 작은 거짓말 하나가 나비효과가 되어 세실리아와 로비의 만남도, 사랑도 모두 막아버렸다. 브라이오니 스스로 고백한다. 언니와 로비는 그토록 원했고 누릴 권리가 있었던 둘 만의 시간을 보낸 적이 없다고, 그것은 바로 자신 때문이었으며 자신이 막았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더 나아가서 독자들이 그런 결말을 본다면 과연 희망이나 만족을 느낄 수 있겠냐고 반문한다. 그래서 그들이 현실의 삶에서 잃어야만 했던 것을 소설에서나마 주고 싶었노라고, 그것이 나약함이나 회피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단지 자신의 마지막 친절로서 그들에게 행복을 선사한 것이라고 뻔뻔스럽게 이야기한다. 


   과연 그것이 친절일까? 자신의 철없는 행위로 인해 서로를 애타게 그리기만 하고 결국에는 만나지도 못하고 그렇게 죽어야만 했던 연인에게 그것이 친절이 될 수 있을까? 그들은 그 친절을 받아들일까? 소설을 통해서 둘을 이어준 브라이오니의 행위는 이미 늦어버린 속죄에 대한 자기변명과 자기 위안일 뿐이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생각하자면 속죄를 승화시키는 또 다른 행태일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나약함 때문에 속죄를 미루기만 했고 그러다 결국 때를 놓쳐버렸다. 차는 떠나버렸고 그제야 흔드는 손은 아무런 의미 없는 몸짓에 지나지 않는다. 돌이킬 수도 없고 용서받을 길도 없는 속죄를, 속죄의 대상이 사라져 버린, 그래서 할 수도 없는 속죄를 해야 한다고 평생 가슴에 낙인처럼 지니고 살았다면... 그래서 그녀의 그런 변명과 자기 위안은 할 수 없는 속죄를 어떻게든 하기 위해 취할 수밖에 없었던 하나의 형식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부질없는 속죄인 동시에 피안이 만약에라도 있다면 그곳에서라도 두 연인의 재회가 성사되기를 바라는 그 소망에 대한 소설적 승화의 한 양태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마지막 장면은 마치 피안처럼 그려진다. 모래사장을 얇게 흩어놓는 파도와 깎아지를 듯 서 있는 하얀 절벽, 활처럼 휘어 펼쳐진 해안선, 더 넓은 푸른 하늘과 맞닿아 있는 수평선, 그 아름다운 풍광을 배경으로 안고 서 있는 예쁜 한 채의 별장, 그리고 거기서 천진난만하게 깔깔거리는 남자와 여자... 그곳이 진정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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