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아미엘: 써머스비(Sommersby)
남북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내슈빌의 어느 재판정, 증인석에 선 아내(조디 포스터 분)는 피고인인 자신의 남편(리처드 기어 분)이 남편이 아니라고 줄기차게 증언한다. 하지만 살인죄로 기소된 남편은 자신이 증인의 남편이며 자신의 이름은 "잭 써머스비"라고 반론을 펼친다. 스스로가 그의 아내였기에, 그리고 아내가 남편을 몰라볼 수 없기에 그는 써머스비가 아니라고 단호하게 증언하는 여자와, 법정에서 재판이 진행 중인 가운데 자신의 변호사까지 파면해가면서 자신이 써머스비라고 직접 변론을 펼치는 남자... 여기 이상한 재판이 있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함께 살면서 막 애기도 출산했고 더 이상의 행복은 없을 거라 생각했던 여자는 마을 사람들 모두가 그를 써머스비라고 증언하고 있음에도 스스로 직접 증인으로 나서서 아무런 다른 물증도 없이 혼자만 남편을 부정하고 있다. 변론권을 얻기 위해 자신의 변호사마저 파면한 남편은 직접 아내를 심문한다. 심문의 후반부를 그대로 따라가 보자.
남편: 날 위하는 마음은 있어?
아내: 그럼요!
남편: 그럼 왜 이러는 거야?
아내: 당신은 잭이 아니니까!
남편: 그걸 어떻게 알지?
아내: 아내는 남편을 알아요.
남편: 증거도 없잖아?
아내: 증거는 필요 없어요!
남편: 아무도 당신을 안 믿어!
아내: 내 느낌이 더 확실해요.
남편: 당신 느낌만 믿어? 정말 못 말릴 여자군!
아내: 당신이야말로 고집불통이죠! 왜 잭 행세를 계속하는 거죠?
남편: 당신이 어떻게 알아?
아내: 왜냐면···
남편: 어떻게 아느냐고!
아내: 당신을 사랑한 만큼 남편을 사랑한 적은 없으니까...
이야기인즉슨, 남편을 사랑하기 때문에 남편을 부정한다는 것인데...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무슨 신파적인 요소로 흘러가는 듯하다. 하지만 재판의 핵심은 사실 실존의 문제, 남편 잭 써머스비의 목숨이 걸린 문제라는 데 있다. 잭 써머스비는 전쟁에서 포로로 수감 중이었을 때 살인을 했다는 이유로 기소되었고 당시는 살인죄로 판결을 받을 경우 무조건 교수형에 처해지는 때였다. 써머스비는 당연히 자신은 살인자가 아니라고 했지만 유력한 증인이 있었기에 유죄 판결이 거의 확실해진 상황, 아내는 변호사를 내세워 그가 잭 써머스비가 아니라 호레이스 타운센드라는 사람이라고 주장했고 그가 타운센드임을 증언하는 증인까지 내세웠다. 써머스비는 증인의 증언이 신뢰할 수 없음을 밝혀냈지만 반대로 그가 타운센드가 아니라 써머스비라는 사실은 더욱 명백해졌다. 그 사실은 곧 그가 교수형에 처해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그가 호레이스 타운센드라면 징역 몇 년을 사는 것으로 끝나지만 잭 써머스비라면 그는 죽음을 맞이해야만 하는 운명이다. 아내는 남편의 죽음을 막기 위해서 남편을 부정했고 남편은 그런 아내의 증언을 부정함으로써 스스로 죽음을 택한다. 1993년에 개봉했던 영화 <써머스비>는 이렇게 "잭 써머스비"의 진위 문제를 중심으로 사랑을 포기하면서라도 연인을 살리려는 여자와 죽음을 택하더라도 사랑으로 남으려는 남자의 안타까운 이야기로 영화의 후반부를 전개하고 있다.
영화는 남북 전쟁이 막 끝난 시점의 미국을 배경으로, 한 남자가 어떤 시신 위로 돌무덤을 쌓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 남자는 며칠에 걸쳐 먼 길을 걸어 어느 한 마을에 당도한다. 황무지가 된 땅을 성의 없이 갈고 있던 어떤 사람에게 아는 체를 하는 그 남자. 땅을 갈던 사람은 한참을 보더니 깜짝 놀라면서 그를 반긴다. 그리고 주위에 이렇게 소리친다. 잭 써머스비가 돌아왔어! 영화의 주인공 잭 써머스비는 포도 농장의 주인이었지만 남북 전쟁의 발발과 더불어 남군으로 참여했다 6년 만에 이렇게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다. 흑인 시동이 급하게 큰 저택 쪽으로 달려간다. 저택 주변 밭에서는 남자와 여자 둘이서 땅을 갈고 있다. 시동이 잭 써머스비의 귀환을 알렸을 때, 함께 밭을 갈던 남자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고 여자는 서둘러 저택으로 달려간다. 저택 정문 앞에 앉아서 놀고 있던 아이를 일으켜 끌며 아빠가 돌아왔다고 말하곤 다급하게 집 안으로 들어간다. 저 멀리서 마을 사람들이 떠들썩하게 잭 써머스비를 데리고 집으로 오고 있었고 아내 로렐은 대충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그를 맞이하러 저택 바깥으로 나왔다. 6년 만의 재회... 하지만 아내의 표정이 그리 밝지만은 않다. 흔히 그러듯 전쟁 나간 남편의 생사도 모른 채 마냥 기다리는 여자와 그런 여자를 흠모하는 이웃 남자. 그 남자는 여자에게 모든 정성을 다해 친절을 베풀었고 여자는 조금씩 마음이 흔들렸을 것이리라. 6년의 기다림에 지친 여자는 친절하고 자상한 이웃 남자에게 일 년 후에도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와 결혼하기로 약속한 터였다. 하지만 남편은 돌아왔고 로렐을 도와 같이 밭을 갈던 이웃 남자 오린 미첨(빌 풀먼 분)의 표정은 당연히 좋을 수는 없었을 것이리라.
하지만 아내의 표정이 밝지 못했던 것은 단지 그 이유만은 아닌 듯하다. 그날 밤, 써머스비의 귀향을 축하하는, 마을 사람 전체가 참여한, 한바탕 떠들썩한 환영 파티가 벌어졌다. 파티 도중에 써머스비에게 인사하러 온 흑인 소작농 가족을 써머스비는 다정하게 반겼고 써머스비의 친구는 그가 변했다고 핀잔을 준다. 파티가 끝나고 집으로 집으로 왔을 때 아내는 전쟁 전에는 서로 각방을 썼다면서 그를 다른 방으로 보낸다. 아내가 지정해준 방으로 젠틀하게 돌아갔던 써머스비는 귀향 동안 털북숭이처럼 자란 수염을 깎아달라고 아내의 방으로 다시 간다. 아내의 면도를 받으면서 써머스비는 전쟁 전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 이런저런 대화를 시도한다... 아내가 대답했다, 돈이 문제가 아니었죠. 써머스비가 다시 물었다, 사랑이 문제였나, 그랬었나? 동시에 자연스럽게 그의 손이 아내의 엉덩이를 스치면서 허리를 부드럽게 감쌌다. 그럴지도 모르죠, 순간 면도날이 써머스비의 목선에서 섬찟하게 멈춰 선다. 흠칫 놀란 써머스비의 손은 이내 아내의 허리를 떠난다. 계속되는 아내의 대답, 최소한, 약간의... 다정함! 면도를 마치고 써머스비는 아내의 손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서로 익숙해지려면 이렇게 해야겠지? 그러곤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다.
다음날 아침, 써머스비는 자신의 포도 농장을 둘러보러 말을 타고 떠났다. 밭을 갈고 있는 로렐 곁으로 오린이 다가왔다. 오린은 둘 사의의 관계에 안타깝게 매달렸고 로렐은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남편은 돌아왔다'며 매정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농장을 둘러보던 써머스비는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황폐해져 버린 농장을 보며 혼자 화를 낸다. 오린이 이번에는 그를 찾아왔고 둘 사이의 대화는 그리 달갑지는 않다. 써머스비는 아내가 자신을 택했다고 했지만 오린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떠난다, 아니, 원래 자네는... 아내 곁을 지키는 남편은 못되쟎나? 집으로 돌아온 써머스비는 아내에게 오린과의 관계에 대해 묻는다. 하지만 추궁이 아니라 이해를 담은 다정함과 자신을 기다려준 아내에 대한 감사를 에둘러 표현한 물음이었다. 그날 밤, 로렐은 마침내 써머스비를 받아들였다. 아들을 만들었던 날 기억해요? 임신한 그날이요. 당연하다는 듯 써머스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술에 취했었잖아요. 다소 놀란 표정의 써머스비, 미안해. 그날 이후론 내 몸에 손도 대지 않았죠. 조금 당황한 듯한 써머스비, 난 이젠 달라졌어. 로렐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러면... 다른 방에서 주무실래요? 먼산을 바라보며 주저하는 척하던 써머스비, 아니... 그제야 로렐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좋아요! 로렐이 먼저 깡충거리듯 침대로 뛰어 올라갔고 자신이 자리 잡은 침대 옆자리를 손으로 통통 두드렸다. 써머스비는 웃으며 그 옆에 누웠고 뜨거운 키스가 시작되었다. 영화에서 등장한 이후 처음으로, 행복으로 충만한 로렐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아침 일찍 써머스비는 여전히 사이가 서먹서먹한 아들을 데리고 읍내로 나간다. 어린 아들에게 마차를 직접 몰도록 하면서 둘 사이의 거리를 조금씩 좁혀 간다. 읍내 신발가게에서 신발을 맞추러 들런 써머스비. 신발가게 주인은 전쟁 전에 맞춰 두었던 써머스비의 발 표본을 그의 발에 갖다 대고는 써머스비의 발 치수가 두 사이즈나 줄었다고 말했다. 신문을 보던 써머스비는 술에 취해서 치수를 잰 것 아니냐고 핀잔을 주고는 갑자기 벌떡 일어서선 신문 기사를 가리키며 주제를 전환시킨다. 그가 신문에서 착목한 것은 담뱃닢 재배였다. 농장으로 돌아간 그는 마을 사람들을 모두 불러 모았다. 땅이 이미 황폐화되어 더 이상 포노 농사는 지을 토양이 못되기에 그는 담뱃닢 재배를 마을 사람들에게 제안했다. 자신의 땅을 나눠주고 수확의 반을 땅값으로 지불하되 그런 식으로 땅값을 모두 치르고 나면 땅의 소유권을 넘겨주겠다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대신 담배 종자 구입을 위해 각자 집안에 숨겨둔 돈 될만한 물건들을 자신에게 투자할 것을 제안했다. 그는 로렐의 도움을 받아 이래저래 반대하는 마을 사람들을 설득시켰으며 특히, 검둥이와는 함께 일을 할 수 없다는 일부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흑인 소작농의 동등한 참여 역시 관철시켰다. 마을 사람들은 각자 집안의 소중한 물건들을 내어놓았고 써머스비는 자신의 이름으로 사인을 한 차용증을 모두 발급했다. 써머스비는 마을 사람들의 소중한 물건들을 마차에 싣고 담배 종자를 구하기 위하여 길을 떠났고 마을 사람들은 기대에 부풀어 그가 돌아오기 전까지 담뱃닢 재배에 맞도록 땅을 일구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합심해서 열심히 땅을 갈아 씨만 뿌리면 되도록 만들었고 써머스비의 귀환을 목놓아 기다렸다. 조금씩 마을 사람들의 의심이 자라날 즈음에 마침내 그는 돌아왔고 마을 사람들은 그가 구해온 씨를 뿌리고 재배를 시작했다. 함께 일하면서 써머스비와 로렐의 관계는 더욱더 돈독해진다. 써머스비는 마을 사람들에게는 온전힌 신뢰를 받는 마을의 리더가 되었고 집안에서는 이전과는 다르게 아내에게 충실하고 아들에게는 직접 호머의 트로이 전쟁을 읽어 주는 자상한 아빠가 되었다. 로렐은 그런 변화에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곧 무너져 내릴 것만 같은 행복에 젖어 들어갔고 그 결실로서 둘째를 임신하게 된다.
마을 전체의 희망으로 쑥쑥 자라던 담배 작물에 위기가 닥친다. 담뱃잎을 갉아먹는 벌레가 작물 전체에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오린이 그쪽으론 전문가였지만 마을 사람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써머스비는 연적이었던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치는 것을 거부했다. 그 시점에 일용직으로 일자리를 구하는 외지인들이 마을로 들어왔다. 임신 때문에 집 테라스에서 쉬고 있던 로렐은 멀찍이 써머스비와 세 명의 외지인들이 이야기를 하다 다투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로렐은 써머스비에게 그들이 누군지 물었지만 오히려 그는 벌레가 문제라며 화를 낸다. "헤밀턴 세이어"라는 묘비명을 가진 무덤 가에서 제초 작업을 하던 오린. 마침 써머스비와 문제를 일으켰던 세 명의 외지인들이 지나가다 오린에게 물을 좀 달라고 요청한다. 장면이 바뀌고 담배벌레를 제거하느라 여념이 없는 써머스비를 오린이 하얀색 물이 가득 담긴 양동이를 들고 찾아온다. 써머스비가 요청하지 않았음에도 오린은 자신이 들고 온 하얀색 물을 밑 고랑에 뿌리라며 손수 시범을 보여 준다. 비눗물이지, 헤밀턴 세이어가 가르쳐 준 거야. 그에게 고맙다고 해야겠군. 써머스비의 이 대답에 오린은 야릇한 미소를 지어 보인다.
로렐이 하녀와 우유통을 들고 집으로 왔을 때 오린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이 시점에서 그동안 의도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써머스비의 정체성에 관한 문제가 정면으로 부각된다. 영화의 흐름으로 보면 전쟁 전의 써머스비와 전쟁 후의 써머스비는 정반대의 사람임을 짐작할 수 있다. 백인 우월주의자이자 술 주정뱅이 망나니에다 물려받은 재산을 믿고 일도 하지 않는, 가정은 내팽켜치고 아내를 막 대하는 전쟁 전의 그와 젠틀하고 합리적인 성격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신뢰를 주며 가족과 가정에 충실한 전쟁 후의 그. 사람이 바뀔 수 있다지만 써머스비의 부재를 전제하는, 참전이라는 시간의 단절이 안겨준 커다란 그 변화는 전쟁 전후의 두 써머스비가 육체적으로도 동일한 사람인가라는 의심을 던져 주기에는 충분하리라. 로렐이 하녀를 돌려보내자마자 오린은 작정한 듯 이야기를 쏟아낸다. 그녀를 위해 6년을 일했지만 남편이라는 작자가 돌아왔고 그녀를 위해서 자신은 참고 비켰다지만 오늘 만난 외지인들을 통해서 그가 가짜 써머스비라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전에 써머스비를 알고 있었고 일부러 그를 찾아왔다고 했다. 써머스비의 가슴에는 흉터가 있는데 오늘 본 그의 가슴에는 흉터가 없었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해밀턴 세이어가 그의 절친이었음에도 써머스비는 해밀턴이 죽은 사실도 전혀 몰랐다고 했다. 이제 오린은 진실에 관한 심문으로 돌입한다. 당신은 알고 있었지? 그가 우리는 속일 수 있어도 당신은 알았을 거야, 왜 그랬어? 왜 남편으로 받아들이고 집으로, 침대로 끌어들여 애까지 만든 거지? 오린은 점차적으로 기독교 원리주의적인 편집증을 드러낸다. 그건 무서운 죄야, 알아? 당신과 아이는 저주를 받을 거야! 그녀의 양쪽 팔죽지를 잡고 흔들어대는 오린을 뿌리치는 로렐, 비켜요! 이리 와, 뭔지 알아? 오린은 양동이에 가득 담긴 담배벌레들을 쏟아내고 그것을 가리킨다. 이곳에 저주가 내렸다는 징조야, 저주가... 잘 봐! 저주가 내릴 거야...
그날 밤, 써머스비의 저택은 을씨년스럽다. 방으로 와서 서랍에서 무언가를 찾는 로렐. 뒤편 등받이 의자에 조용히 앉아 혼자 술을 마시는 써머스비. 그가 말했다, 내가 누굴까? 약간 취해 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 내가 누구든, 나를 사랑해? 취했군요, 로렐이 조용히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아무튼 난 당신을 사랑해, 당신도 그래? 로렐이 작심한 듯 대답한다. 그렇다면 날 속이지 말아요! 당신이 아니라면 잭은 죽었나요? 당신이 죽여 묻었죠? 난 여기 있어, 조금 변했지만 난 아냐! 거짓말! 로렐은 서랍에서 총을 꺼내서 그에게 겨눈다. 미친 짓 그만하고 당장 이 집에서 나가요! 총부리 앞에서 두 손을 들고 있던 써머스비는 뒤로 물러나며 문을 나서다 말고 돌아선다. 난 갈 수 없어, 여긴 내 집이고 난 안 나가. 로렐이 소리친다, 당신은 내 남편이 아니에요! 가만히 듣고 있던 써머스비가 겨누고 있는 총부리 앞까지 뚜벅뚜벅 걸어온다. 그리고 결연하게 말한다, 아니라면 차라리 죽겠어. 써머스비는 돌아서 방을 나갔고 여전히 총을 겨누고 있지만 조준점이 흔들리는 로렐, 차라리 그가 그렇게 대답해주기를 바랐다는 듯 미묘하게 그녀의 얼굴 표정은 흔들린다.
잠깐의 폭풍처럼 그렇게 긴장의 시간이 지나고 술에 취해 소파 위에서 꼬꾸라져 자고 있던 써머스비는 유리창 깨지는 소리에 놀라서 깬다. 창 밖 마당 가운데에는 없던 십자가가 불에 타고 있었다. 물 양동이를 들고 급하게 집 마당으로 달려 나갔을 때 하얀 복면을 쓴 채 횃불을 들고 말을 탄 KKK 단원들이 등짝이 피범벅이 된 흑인 소작농 한 명을 집 마당 앞에 던져 놓고 총을 겨누고 있다. 그들 중 두목 격으로 보이는 놈이 왜 때렸냐는 써머스비의 질문에 흑인은 땅을 가질 수 없다는 법을 어겼다고 한다. 써머스비는 그가 땅을 합법적으로 구입했으며 이젠 전쟁이 끝났다고 그들을 타일렀다. 갑자기 두목이 물어봤다. 어디서 본 적이 있는데, 너... '클락'에서 선생질하던 놈이지? 써머스비는 단원들 중에서 의족을 위한 핀이 신발에 박힌 것을 보고 오린도 그들 중 한 명이란 것을 깨달았고 목소리를 통해 또 다른 한 명 역시 마을 사람이란 것을 밝혀냈다. 이에 당황한 그들은 그냥 돌아가고 만다. 그렇게 소동은 정리되고 써머스비는 놀란 아이를 달래기 위해 트로이 전쟁을 계속 읽어 주고 옆에선 로렐이 얼굴에 미소를 담은 채 다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본다. 다음 날, 담뱃잎을 말리기 위한 건조 창고를 만들고자 자신의 낡은 창고를 개조하던 중 오린이 횃불을 들고 들어온다. 오린은 노골적으로 그의 정체를 캐묻기 시작했다. 거짓말, 사기꾼, 이렇게 험한 말들이 오갔고 결국 한 바탕 싸움이 벌어진다. 한참을 서로 치고받고 싸우던 와중에 갑자기 나타난 아들 때문에 그 싸움은 중단된다. 아빠, 엄마가 아기를 낳아요. 로렐은 건강하게 딸아이를 출산했고 써머스비는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아기 이름을 장모의 이름을 따서 레이첼이라고 정하고는 써머스비는 가만히 로렐을 바라보며 묻는다, 내가 아빠인 줄 알까? 로렐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알고 말고요.
오린의 비눗물은 효과가 있었다. 더 이상 담배벌레는 나오지 않았고 작물은 풍작을 이루었다. 기쁨에 소리를 지르는 써머스비... 담뱃잎 수확이 시작되고 마을 사람들은 합십해서 담뱃잎을 따고 건조 창고에 널기 시작했다. 그렇게 마을의 희망은 축복받은 결실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새로 태어난 딸 레이첼의 세례식을 마치고 교회에서 나오던 써머스비 가족을 말을 탄 두 사람이 막아선다. 연방정부의 체포 명령이라며 영장을 내밀고 '찰스 콩글린'이란 사람을 살해한 혐의로 그를 체포한다고 한다.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결국 그는 수갑을 찬 채 내슈빌의 법정으로 끌려가게 된다. 그의 무죄를 확신하는 로렐과 마을 사람들은 함께 가겠다고 따라나섰다. 이제 살인죄로 그는 기소되었고 흑인 판사가 주재하는 재판이 곧바로 개시되었다. 검사 측이 증인을 내세워 심문을 시작했다. 첫 번째 증인은 당시 콩클린이 함께 카드 게임을 하던 써머스비와 시비가 붙어 둘은 밖으로 나가서 다퉜고 그 와중에 써머스비가 총을 쏘아 콩글린을 죽이고 도망을 쳤다고 했다. 그리곤 재판정에 있던 써머스비를 손가락으로 지목했다. 다음 증인은 바깥에서 본 목격자였는데 싸우는 상황을 묘사했고 첫 번째 증인과 진술이 거의 일치했다. 마지막 증인은 여관 주인이었고 숙박부에 서명한 써머스비의 사인을 보증해 주었다. 그렇게 당일 재판은 휴정에 들어갔고 다음 날 속개하기로 했다. 정황으로 볼 때 써머스비의 살인 혐의는 사실로 인정되는 분위기였고 이는 곧 교수형을 의미했다. 재판을 지켜보던 오린은 이 상황을 이용해서 로렐에게 접근해선 그를 살릴 묘책을 제안한다. 써머스비가 자신이 아님을 자백토록 하는 것이며 이를 증명할 증인까지 준비해 두고 있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로렐은 오린과 결혼해야 한다는 것이다. 로렐은 써머스비를 면회했다. 정체를 밝히면 풀어줄 거예요, 로렐의 말은 그가 타운센드임을 법정에서 자백하라는 것이었다. 그건 못해. 해야 돼요! 써머스비는 끝까지 자신이 써머스비라고 주장했고 로렐은 결국 "고집쟁이!"라며 화를 내고 일어선다. 하지만 "당신을 그냥 둘 수는 없어요."라는 말을 남기고 면회실을 나섰다. 이제 로렐은 호텔 방문 앞에 섰다. 노크를 한다. 문이 열리고 오린이 서있다. 로렐은 결심한 듯 말한다, 당신 말대로 할게요.
다음날 재판은 속개되었다. 하지만 재판은 검찰 측이나 써머스비에게나 생각지도 못한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써머스비의 변호인은 증인으로 로렐을 내세웠다. 증인석에서 선서를 마친 로렐은 변호사의 질문에 단호하게 남편을 부정하기 시작한다. 이 법정에 남편은 없다는 것이다. 법정은 술렁이기 시작했고 써머스비와 검찰 측 모두 극렬하게 반발한다. 법정을 진정시킨 후 판사는 로렐에게 질문한다, 그럼 피고는 남편이 아니란 말이오? 로렐은 너무나 단호하다, 절대 아닙니다. 가짜 남편이란 말이오? 그렇습니다. 본격적으로 변호인 심문이 시작되었다. 남편이 아니란 사실을 언제 알았죠? 외모는 비슷했지만 너무 변했고 모르는 게 많았고 개도 짖어댔고 장인 얘기도 몰랐고 신발 치수도 달랐고 그를 찾아온 나그네들과 칼을 들고 싸우고자까지 했다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잠자리에 들었을 때 써머스비가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고 하면서 여자가 남편을 몰라볼 수 없다고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판사가 남편도 아닌데 왜 마을 사람들까지 남편으로 믿게 했는지 물었을 때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가 그이기를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남편을 살리려 수작을 부린다며 노발대발하는 검사를 제지하고 판사가 다시 물었다, 증인도 있소? 변호인은 기다렸다는 듯 '매튜 폴섬'이란 사람을 증인으로 내세웠다. '클락'의 농장주인 증인은 변호인의 질문에 막힘없이 대답을 이어갔다. 이름은 호레이스 타운센드로 클락에서 선생으로 1년간 애들을 가르쳤다고 했다. 말발은 좋아서 늘 유식한 소리만 하더니 학교를 새로 지어야 한다고 1천2백 달러 모금을 해서 그 돈을 갖고 도망쳤다고 했다. 폴섬 씨, 피고가 정말 그 사람이요? 네, 저놈이 잡힌 걸 알면 클락 사람들이 무지 기뻐할 겁니다. 결혼했다가 도망치고 입대하고도 탈영했다죠? 폴섬의 증언은 계속되었다. 남군이 지니까 비겁하게 도망치다 북군에 잡혔다는데 그 뒤로는 소식 못 들었소. 그러니까 결국 한마디로 말해서 저놈은 사기꾼이요! 이름은 호레이스 타운센드고! 이제 최종적으로 변호인이 판사에게 말했다. "판사님,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피고는 범인이 아닙니다."
결국 써머스비는 참지 못하고 직접 나섰다. 변론은 변호사만 가능하다는 판사의 말에 써머스비는 그 자리에서 변호사를 해고하겠다고 했고 판사는 그를 자기 쪽으로 불렀다. 당신이 타운센드라면 목숨은 건지는 거요. 써머스비는 비장하게 대답한다, 이름을 잃으면 목숨도 없는 거죠! 그렇게 써머스비는 반론권을 갖게 되었고 이제 직접 자신을 변론하게 된다. 먼저, 폴섬을 심문한다. 그가 며칠 전 KKK단의 난동 때의 주범이었다는 걸 확신하고 그 사실을 집중 추궁했다. 이에 흥분한 폴섬은 흑인 판사 앞에서 인종차별적 발언을 서슴없이 내뱉었고 판사는 그를 퇴장시킨 후 그의 증언을 모두 삭제하라고 기록원에게 명했다. 써머스비는 자신이 써머스비임을 증언할 사람을 요청하자 로렐을 제외한 마을 사람들 모두가 증인으로 나서겠다고 했다. 써머스비는 증인으로 아내 로렐을 직접 심문하기로 한다. 다시 증언대에 선 로렐.
남편: 내가 남편이 아니야?
아내: 아녜요.
남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믿게 하고선? 왜 그랬지?
아내: 당신이 남편이길 바랐으니까요.
남편: 왜?
아내: 힘든 일에 외로웠고... 내 아들도...
남편: 우리 아들?
아내: 내 아들에겐 아빠가 필요했죠
남편: 처음부터 나를 의심하다니... 내가 그렇게 나빴나?
아내: 정반대죠! 잭은 날 한 번도 사랑한 적 없어요!
남편: 사람들은 지금 혼란스러워해. 당신과 평생을 살아왔는데 당신이 설마 그럴 수 있을까?
내가 잭이라고 믿고 계약했는데 잭이 아닌 낯선 사람이라...
그럼 계약은 모두 무효가 되는 거고 땅이니 농사니 모두 속은 거야, 그러길 바래?
또 우리 애들은? 내가 잭이 아니라면 뭐가 되지? 레이첼은... 사생아가 되는데 그래도 좋아?
또 당신은? 사기꾼에게서 사생아를 낳고 저 착한 사람들을 일 년이나 속인 거야, 그걸 믿을까?
아내: 사람들은 내 마음을 몰라요.
남편: 그야 아무도 모르지.
아내: 당신은 절대 잭이 아녜요!
남편: 우리 모두 믿는데 당신과 오린 둘만 우기는군. 둘이 뭔가 약속했나?
아내: 안 그래요.
남편: 그럼 오린은 왜 왔지? 밤에는 하얀 가면을 쓰는 놈과 무슨 약속을 했지?
아내: 그만 해요!
남편: 오린에게 뭐라고 했어?
아내: 예전 약속을 지킨다고요...
남편: 예전 약속? 사랑 없이 결혼한다고? 하긴 난 사기죄로 감옥에 갈 테지.
아내: 그래도... 죽진 않잖아요!
남편: ...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어...
그리고 이 글의 도입부에 나온 남편과 아내의 대화 그대로 심문은 이어진다. 로렐의 마지막 그 말, 지금의 그를 사랑한 만큼 남편을 사랑한 적은 없었노라는 그 말에 잭은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진심으로 말해봐, 내가 당신 남편이야? 단호한 표정 대신 이번엔 슬픈 눈망울을 그리며 로렐은 겨우 대답했다, 네... 써머스비는 더 이상 질문이 없다면서 심문을 종료했다.
며칠이 흘렀고 그 사이 마을 사람들은 말린 담뱃잎을 경매 시장에 내어 놓았다. 100g당 8달러를 예상했지만 12달러라는 호가가 불려지자 환호성을 울린다. 써머스비를 면회 온 로렐은 그 소식을 전했고 그도 너무나 기뻐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교수형을 선고받은 상태였고 그 날이 마지막 면회이자 교수형에 처해지는 날이었다. 써머스비는 아이들의 안부를 물었고 로렐은 큰 아이는 혼란스러워한다고 했다. 써머스비가 말했다. 아버지는 죄가 없다고 말해줘... 로렐이 반문한다, 그럼, 타운센드는요? 갑작스러운 반문에 써머스비는 자리를 옮겨 앉아 혼잣말을 하듯 말을 이었다. 호레이스 타운센드라... 누군지 잘 알지. 법정에서 당신이 들은 얘기는 모두 사실이야. 난 그가 싫었어... 운 좋게 감옥에서 똑같이 생긴 남자를 만났지. 외모도 같았고 성격도 같았지. 4년간 함께 지내며 속속들이 서로를 알게 된 거야. 그런데 그가 죽었어! 누가요? 호레이스가... 당신이 죽였나요? 그가 콩클린을 죽인 날 밤 칼에 찔렸는데 결국 그도 죽었지. 내 손으로 직접 묻어 줬어. 잭을? 호레이스를, 영원히 묻었지. 로렐은 애원하듯 절박하게 매달렸다, 판사에게 그렇게 말해요! 저를 평생 안을 수 있어요, 절 사랑한다면 함께 살고 함께 늙어야죠, 이제 집으로 가요! 하지만 써머스비는 거부한다, 그러고 싶어, 하지만 내가 호레이스라면 집은 없어. 로렐의 목소리는 더 애달프다, 상관없어요! 써머스비가 단호하게 말한다, 절대 안 돼, 다시 호레이스가 될 수는 없어! 로렐, 차라리 죽겠다고요? 나도 살고 싶어, 써머스비로 살 수만 있다면... 도대체 어쩌란 거죠? 밤마다 잠을 깨고 옆에 누운 당신을 보며 생각했지. 이건 기적이라고... 나 같은 놈이 당신을 만나다니 지금도 꿈만 같아. 당신의 남편이라... 정말이지 너무 행복했어.
사형 집행인이 사형 언도를 낭독하는 동안에도, 목사의 마지막 기도가 울려 퍼지는 동안에도 써머스비는 군중들 사이에서 안타깝게 로렐을 찾았다. 차마 보지 못하던 로렐은 사형장 앞으로 군중들을 헤치며 달려갔다. 로렐! 로렐! 잭! 저 여기 있어요! 그제야 잭은 미소를 지었다. 로렐도 함께 미소 지었다. 그의 얼굴에 하얀 복면이 써지고 이제 장면은 써머스비가 그렇게 부흥시키고자 했던 마을 전경을 비춘다. 써머스비의 약속대로 교회 지붕 탑은 수리를 시작했고 로렐의 집도 수리 중이다. 그렇게 카메라는 마을 전체를 천천히 돌아 비춘다. 마을 뒤편 언덕 멀리 길을 따라서 한 여인이 꽃을 들고 언덕을 오르고 있다. 카메라의 시선은 다시 천천히 움직여 언덕 위의 무덤과 묘비를 클로즈업한다. 로렐은 묘비 앞에 한 무더기의 꽃을 놓아둔다. 그 묘비에는 "존 로버트 써머스비, 1831-1867"라고 새겨져 있고 그 아래로는 "사랑스러운 남편이자 자상한 아버지, 존경받는 시민이었다"라는 문구도 함께 새겨져 있다.
영화 <써머스비>는 1982년에 출시된 프랑스 영화 <마틴 기어의 귀향, 다니엘 비그네 감독, 제라르 드빠르디외, 나탈리 베이 주연>을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마틴 기어의 귀향>은 16세기 프랑스에서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이지만 <써머스비>는 프랑스 중세의 이야기를 남북전쟁 직후의 미국 남부로 그 배경을 자연스레 옮겨 새롭게 제작함으로써 원작과는 또 다른 느낌을 관객들에게 선사한다. 잭 써머스비... 아니, 호레이스 타운센드, 그는 사랑을 위하여 잭 써머스비라는 이름을 택했고 죽음을 맞이했다. 영화 막바지에 비로소 써머스비는 로렐에게 자신이 호레스 타운센드였음을 자백한다. 처음에는 이런 결말이 다소 아쉽게도 느껴졌다. 마지막까지 그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은 채 그 판단을 관객들에게 맡기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다. 그런 모호성으로 끝맺는 것이 열린 결말로서 더 호소력이 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는 그가 써머스비가 아니라 타운센드라는 사실을 밝힌다. 또한 로렐에게는 현재의 그가 써머스비이든 타운센드든 이제는 더 이상 상관없다. 그저 그가 살아 있기만 하면 된다. 그럼에도 그는 써머스비라는 이름으로 죽음을 택했다. 다시 생각해봤을 때 바로 이 '그럼에도'가 중요한 듯하다. 타운센드라는 이름으로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음에도 그는 왜 써머스비로 죽음을 맞이했을까?
<써머스비>의 경우 진실의 문제, 정체성의 문제 등의 다채로운 질문들을 던지지만 여기서는 기표라는 관점에서 이름의 문제를 중심으로 이 영화를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스위스의 언어학자 소쉬르(1857~1913)는 자신의 저서 "일반언어학 강의(최승언 옮김, 민음사)"에서 언어학의 분석 대상을 `랑그'와 `파롤'로 나누고 언어학이 착목해야 할 대상은 파롤이 아닌 랑그라고 했다. 이때 파롤은 다양한 소리들의 구체적인 실제 발음 행위이고 이 다양한 모든 구체적 소리들을 추상화한, 인간의 머릿속에 그려지는 하나의 대표, 즉 청각 영상과 개념이 결합하는 것이 랑그라고 정의했다. 우리들의 머릿속에서 개념과 청각 영상의 관계에서 드러나는 정신적 결합들의 체계가 랑그이고, 이 결합들의 결과로 입을 통해 구체적으로 발화된 상태가 파롤인 것이다. 그러나 이때 언급되는 랑그는 이미 구체적 발화들이나 그 기호가 가리키는 지시체, 즉 실제 대상과는 이미 관계가 없다. 파롤은 화자의 상태에 따라 다양하고 천차만별이지만 이런 다양함 속에서도 청자의 귀를 통에 정신 속에서 남는 동일성이 랑그이다. 그렇기에 파롤은 다양하지만 랑그는 동질적이다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랑그 체계의 요소로서 기호는 기표(記表, 시니피앙-Signifiant)와 기의(記意, 시니피에-Signifié)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데 이 각각은 청각 영상과 개념에 해당한다. 문제는 바로 이러한 기표와 기의의 관계가 이전까지 주장되어 오던 것처럼 고정된 일대 일 대응관계가 아니라 자의적이라는 것이다. 아버지란 개념에 우리말에서는 ‘아버지’란 기표가, 영어에서는 ‘Father’란 기표가 대응된다. 하지만 이 자의성은 의미 그대로의 자의성이 아니라 어떤 제약을 전제한 그것이다. 기표와 기의의 관계는 자의적이지만 이 자의적 관계는 인위적으로 형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체계의 관계 속에서 결정된다. 자의성은 공시성과 통시성을 함께 제한하게 되는데 간단하게 말하면 "언어는 변하지만 언어 행위 주체들은 그것을 변경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자의성은 체계 속에서의 자의성을 의미하며 동시에 체계를 전제하는 자의성이다. 마찬가지로 이것은 기표와 기의의 가치 체계 속에서 성립될 수 있다.
소쉬르의 언어학은 기표와 기의를 분리시키면서 기표의 자의성을 처음으로 부각시켰다. 소쉬르 이전에는 대상과 그것을 지칭하는 기호는 하나로 묶여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대상(기의)은 본질이 되고 그것을 가리키는 기호(기표)는 부차적인 것이 된다. 하지만 소쉬르 이후로는 기표는 더 이상 기의에 종속되기를 거부하고 자율성을 획득하게 된다. 이렇게 전통적인 언어학의 관점을 탈피해버린 소쉬르의 언어학은 구조주의 언어학의 시조가 되었고 구조주의와 포스트 모던 그리고 해체 철학으로 대변되는 현대 철학의 단초가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기의에 닿지 아니하고 미끄러지고자 하는 기표들의 유희는 소쉬르 이후부터 시작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써머스비라는 이름의 기표는 전쟁 전의 망나니로 각인된 지시체-기의에 해당하는 써머스비며 그 관계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호레이스 타운센드라는 이름 역시 마찬가지로 그러한 기표와 기의로 연결된다. 이런 의미에서의 기표와 기의라면 전쟁 후의 써머스비의 실체 혹은 본질, 즉 기표가 지시하는 기의는 바로 호레이스 타운센드라고 명명되었던 사람이어야만 한다. 타운센드라는 인물은 적당한 교양과 적당한 교활함을 보유한 한량이자 로맨시스트였을 것이다. 전쟁에 참가했다 포로가 되어 우연히도 자신과 너무나 닮은 인물 써머스비를 만났고 감옥에서 4년을 그와 함께 보내면서 써머스비란 인물이 살아온 삶의 세세한 부분까지 알게 되었을 것이다. 전쟁이 끝날 무렵 하필 써머스비는 죽어 버렸고 타운센드는 직접 돌무덤을 쌓아 그를 묻어 주는 최소한의 예를 표한 뒤 자신이 써머스비가 되는 새로운 낭만을 찾아 떠났을 것이다. 써머스비라는 기표는 이제 타운센드라는 이름이 가리켰던 기의를 대신 가리키게 된다. 써머스비라는 이름으로 돌아온 고향에서 타운센드는 써머스비가 되는 낭만적 모험을 한다. 그 과정에서 로렐이라는 사랑을 발견했고 그는 어느 순간 영원히 써머스비로 남기로 했을 것이다. 그때부터 타운센드에게 써머스비라는 이름 자체는 자신의 본질 이상의 실존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 이름은 그만큼의 실존적 무게를 떠안게 된다. 그래서 써머스비라는 이름은 로렐에게 다른 이름으로 불렸을 때에는 단순한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겠지만 로렐이 써머스비라고 비로소 그 이름을 불렀을 때 꽃이 되는 그런 이름이다. 다시 말해 그 이름으로 불려야만 로렐에게 온전히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그녀에게 비로소 의미가 되는 이름이다. 이제 써머스비라는 이름에 내포된 두 관계항, 즉 기표와 기의의 관계는 자의성을 넘어서서 역전된다. 로렐에게 온전한 의미로 드러나는 써머스비는 더 이상 타운센드도, 전쟁 전의 써머스비도 아닌 전혀 새로운 써머스비다. 써머스비라는 기표가 요구하는 새로운 내용으로 구성된, 기존의 기의와는 전혀 다른 기의로서의 써머스비이어야 한다. 이제 기표는 자율성마저 넘어서서 기의를 생산하고 강제한다. 써머스비라는 그 기표는 로렐에게 충만한 의미로 드러나야만 할, 명목상의 기호에 지나지 않을 그 이름을 지키기 위해 목숨마저 포기할 수 있을 새로운 기의로서의 써머스비를 요구하고 있다. 그렇기에 새로운 기의는 그 이름의 무게를, 그리고 그 사랑의 위대함을 오롯이 감당해야 할 그가 되어야만 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