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고 싶으나, 살고 싶지 않은 2월
한동안 글을 쓰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쓰지 못한 것이 아니라 쓰고 싶지 않았다. 글을 쓰는 행위는 언제나 나를 정면으로 마주보게 만든다. 그리고 요즘의 나는, 그 얼굴을 오래 바라볼 용기가 없었다.
요즘 들어 나를 찾아오는 이 감정은 낯설다. 분명히 이겨냈다고 생각했고, 이미 정리했다고 믿었던 기억들이다. 그런데 그것들은 어느새 다시 고개를 들고, 저편에서 나를 비웃듯 천천히 다가온다. 마치 “아직 끝난 게 아니다”라고 말하듯. 그 순간, 나는 설명할 수 없는 무기력 속으로 가라앉는다.
가슴은 터질 듯 답답하고, 화는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오른다. 그러나 예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제 나는 더 이상 그 화를 밖으로 쏟아내지 않는다는 점이다. 누구에게도, 심지어 나 자신에게조차. 감정을 억누르는 일이 성숙이라면, 이것이 어른이 되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른이 된다는 것이 감정을 삼키는 일이라면, 그 대가는 생각보다 크다.
지금까지 나는 가족을 위해 살아왔다. 자식을 위해, 배우자를 위해, ‘가장’이라는 이름을 위해. 그것이 삶의 이유였고, 존재의 증명이었다. 그래서 이제는 나를 위해 살아보자고 다짐해 보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단순하지 않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선은 여전히 나를 단단히 붙잡고 있고, 가장이라는 무게는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는다.
말 한마디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가슴을 파고든다. 의도하지 않았을 말들, 무심히 던져진 표현들, 그러나 그것들은 언제나 정확히 가장 약한 지점을 찌른다. 나는 그 말들을 이해하려 애쓰고, 참아내며, 스스로를 설득한다. “저들도 힘들 것이다.” “나만 견디면 된다.” 그렇게 또 하루를 넘긴다.
그러나 요즘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나는 왜 이렇게까지 버티고 있는가.
이것이 정말 ‘잘 사는 것’인가.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다기보다는, 잠시라도 이 역할들에서 내려오고 싶다. 아버지, 남편, 가장, 책임지는 사람. 그 모든 이름을 내려놓고, 아무도 나에게 기대하지 않는 자리에서 숨을 고르고 싶다.
나는 잘못 살아온 것일까.
아니면 가족이라는 혈연관계가 나를 너무 단단히 구속하고 있는 것일까.
철학은 늘 질문에서 시작한다고 한다. 그리고 질문은 답보다 오래 남는다. 지금의 나는 답을 찾기보다 질문 속에 머물러 있다. 살아야 한다는 이유와, 살아가기가 버거운 현실 사이에서 흔들리며. 살고 싶지만, 동시에 살고 싶지 않은 모순된 감정 속에서.
삶이란 결국 선택의 연속이라고들 말한다. 그러나 어떤 선택은 개인의 의지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책임과 관계, 기대와 의무는 선택의 자유를 조금씩 갉아먹는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을 ‘당연함’이라는 말로 포장하며 살아간다.
어쩌면 지금의 고통은 실패의 증거가 아니라, 너무 오래 성실하게 살아온 흔적일지도 모른다. 누구 하나 원망하지 않고, 묵묵히 자리를 지켜온 사람만이 느끼는 피로. 누구보다 책임을 다하려 했기에 생겨난 균열.
2026년 2월은 나에게 유난히 잔인하다. 계절 탓일지도 모르고, 마음의 체력이 바닥난 탓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시간 또한 나의 일부라는 사실이다. 외면한다고 사라지지 않고, 밀어낸다고 해결되지 않는 시간.
그래서 나는 다시 글을 쓴다.
도망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붙잡히지 않기 위해서.
무너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버티기 위해서.
아직 답은 없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렇게 흔들리고, 질문하고, 아파하는 나는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 그리고 살아 있다는 것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어쩌면 삶은 견뎌냄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오늘을 버티는 일이 내일을 보장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오늘을 살아냈다는 사실만은 남긴다. 그 사실 하나로, 나는 다시 하루를 시작해 보려 한다.
아주 조심스럽게, 그리고 조금은 지친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