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권 UX의 현실

금융권 UX 기획자는 ‘딜리버러’ : 기업 구조가 설계한 소외

by char

금융권이 UX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한 건 대략 5~6년 전쯤이다.

그 시기를 전후로 은행과 금융사들은 UX 디자이너와 UX 기획자를 적극적으로 채용하기 시작했다. 조직도 만들어졌고, 직무명에도 ‘UX’라는 단어가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그 계기는 분명했다.

모바일 뱅킹 환경에서 더 이상 기능만으로는 차별화가 어려워졌고, 카카오뱅크나 토스처럼 사용성이 뛰어난 서비스들이 빠르게 시장을 잠식하고 있었다. 여기에 비대면 금융 확대와 디지털 전환 압박까지 더해지면서, 금융권도 UX를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분명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외부 광고와 마케팅에서 금융사는 더 젊어지고, 더 유연해지고, 더 혁신적으로 변하고 있음을 말했다. 나는 은행이라는 조직이 가진 보수적인 문화는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제는 많이 달라졌겠지..’ 하고 부정적인 측면보다 기회 영역이라는 설레임을 가지고 입사했다.

하지만 조직 안에서 마주한 현실은 달랐다.


UX라는 단어는 공기처럼 떠다녔고, UX 조직도 존재했으며, 내 명함에도 ‘UX’라는 직무명이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UX가 결정되어야 할 가장 중요한 순간마다, UX는 늘 없었다.

입사한지 얼마 안되어 바로 이런 문제점들이 다 보였다. 처음엔 회사를 알아가는 시기여서 마음만 바빠보이는 내 스스로를 자책하기도 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내린 결론은, 이건 개인의 역량 문제가 아니라 견고하게 짜여진 구조적인 문제였다.





1. UX 기획자는 설계자가 아닌 ‘검토자’


은행에서 UX 기획자의 역할은 생각보다 단순하고 명확하다.

새로운 서비스를 설계하는 사람이기보다는, 이미 만들어진 방향을 한 번 더 확인하는 단계에 가깝다.


대개 흐름은 이렇다.

서비스 기획 조직에서 사업 방향과 기능 구성이 먼저 정해진다. 스토리보드의 큰 틀도 이미 그려져 있다.

UX 기획자는 그 다음에 호출된다. 기존 표준 가이드에 맞는지, 규정에서 벗어난 부분은 없는지를 점검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디자이너는 화면으로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이 과정에서 UX 기획자는 프로세스에 포함돼 있기는 하지만, 방향을 정하는 위치에 있지는 않다. 사용자의 맥락을 근거로 다른 의견을 내더라도, 그 의견은 ‘고려 사항’ 정도로 취급된다. 실제 결정은 이미 끝난 경우가 대부분이다.


“말씀하신 취지는 이해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 방향으로 가야 할 것 같아요.”


처음에는 내 전문성을 의심받고 있다는 느낌으로 돌아와 불쾌했다. 그리고 자존감도 조금씩 낮아져 ‘내가 잘 못따라가는 것인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건 개인역량이나 전문성과는 관련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애초에 UX 전문가에게 의사결정을 주도하는 역할이 부여되어있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은행에서 UX는 방향을 만드는 주체라기보다, 정해진 방향이 문제없이 실행되는지를 확인하는 역할로 배치돼 있다. 결과적으로 UX 기획자는 ‘왜 이 서비스가 이렇게 만들어져야 하는지’를 묻기보다, ‘이미 결정된 것을 어떻게 문제없이 구현할지’를 고민하게 된다.





2. 금융 UX는 ‘전략’이 아니라 ‘인터페이스’다

(모든 금융사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금융권에서 말하는 UX는 종종 ‘보기 좋은 화면’으로 수렴한다.

버튼의 정렬, 컬러의 통일감, 최신 트렌드를 반영한 움직임과 컴포넌트..... 이 요소들은 분명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UX의 전부가 되는 순간,
UX는 사용자 경험을 설계하는 도구가 아니라 덜 복잡해 보이도록 포장하는 인터페이스로 관점이 축소된다.


이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는 배경도 있다. UX 전문가로 채용된 인력 대부분이 앞서 말한 검토 역할과 운영 업무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업무 범위가 제한되다 보니, 실제 서비스가 왜 만들어졌는지, 어떤 비즈니스 판단 위에서 설계되었는지를 깊이 이해할 기회가 거의 없다.


서비스를 충분히 알지 못한 상태에서 UX는 기존 표준과 규칙을 지키는 역할에 머문다. 여기에 금융권 특유의 법적 규제, 준법 감시, 리스크 관리라는 강력한 전제가 더해지면, UX가 할 수 있는 일은 자연스럽게 더 좁아진다. 결국 “이걸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보다는 “어떻게 하면 덜 불편하게 전달할까?”로 고민의 방향이 변경된다.


이때 UX는 전략이 아니다. 방향을 바꾸는 도구가 아니라, 이미 정해진 방향을 설명하는 도구다.

결정을 재설계하기보다는, 사용자가 그 결정을 견딜 수 있게 만드는 역할에 가까워진다.


그래서 금융권에서 UX는 혁신의 주체로 자주 언급되지만, 실제로 허용되는 범위는 인터페이스 수준에 그친다. 금융이 가진 복잡성과 위험을 드러내기보다는 감추고 정리하는 역할, 사용자를 설득하기보다는 기존 시스템의 구조를 벗어나지 못한 채 이해시키는 역할이다.





3. 왜 디자이너의 목소리가 더 크게들리는가

흥미롭게도 금융권에서는 GUI 디자이너의 목소리에 더 힘이 실리는 경우가 많다. 이는 직급이 높아서도, 개인의 성향 때문도 아니다. 최상급자가 확인하는 결과물을 만드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임원 보고에서 테이블 위에 올라가는 것은 정교한 기획 문서가 아니라 화면이다. 논리보다는 인상이, 프로세스보다는 시각적 완성도가 판단 기준이 된다. 그렇기에 임원들에게는 UX는 ‘잘 만들어진 화면’으로 이해된다.

이로 인해 UX는 종종 그래픽 디자인과 동일시되는 오해를 받는다. 하지만 이는 UX가 실패해서라기보다, 은행 조직이 UX를 의사결정의 도구가 아닌 시각적 결과물로 보기 때문이다.


물론 GUI 디자이너도 UX의 일부이며 당사자이기도 하다.
간혹, GUI 디자이너들이 ‘내가 기획도 다해.’라며 자만할 때가 있다.
그럼 나도 그런다. ‘나도 디자인 할 수 있어.’ ㅎ.


두 역할의 전문성은 분명히 다르다. UX 기획은 문제를 정의하고 방향을 설정하는 일에 가깝고, 디자인은 그 방향을 시각적으로 완성하는 역할에 가깝다.

대부분의 IT 프로젝트에서 기획자는 디자인 결과를 검토하고 조율하는 역할도 맡는다. 그래서 결과물을 놓고 디자이너와 대화하며 수정해 나가는 장면은 그리 낯설지 않다. 오히려 자연스러운 협업 과정에 가깝다.


하지만 은행에서는 이 과정이 유독 어려웠다. 운영 업무에 초점이 맞춰진 구조 때문인지, 디자이너와 함께 결과물을 발전시키기보다는 시각적 요소에 대해 의견을 내는 것 자체가 조심스러운 영역으로 여겨졌다. 기획자는 방향성에 대한 논의에서는 빠지고, 현업 부서와 디자이너 사이에 서서 의견을 전달하고 정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의견도 못내고, 결정권도 없는데 조율은 해야 했다.


그 결과 협업을 통해 더 나은 결과를 만드는 방식이라기 보다는 이미 내려진 결정 이후의 마찰을 관리하며 추가적인 수정이 발생하지 않도록 방어하는 역할에 가까워졌다.






4. AI라는 변수, 그리고 얇아진 경계선

AI 시대로 빠르게 이동하고 있는 디지털 변곡점에서, 지금까지 언급한 문제들을 냉정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과연 은행에 UX 기획자는 여전히 필요한 존재일까?


현재 금융권에서 UX 기획자가 수행하는 업무의 상당 부분은 표준 확인, 가이드 준수 여부 체크, 산출물 검토, 문서 정리와 전달이다. 이 역할만 놓고 보면 역설적으로 AI가 더 빠르고, 더 정확하게 수행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본다.


AI는 규칙을 잊지 않는다. 표준을 예외 없이 적용하고, 방대한 가이드를 즉시 대조하며, 결과물을 실수 없이 만들어낸다. 정확도와 속도만 놓고 보면 인간보다 훨씬 빠르고 유리하다.


금융권 UX 기획자가 방향을 정할 권한도, 결정도 바꿀 책임도 없이 그저 ‘틀리지 않았는지’를 확인하는 역할에 머물러 있다면 AI가 이 업무를 대체하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이건 AI로부터 온 위협이 아니다. 은행이 UX 기획자의 위치를 그렇게 배치했다.

검토자 역할은 자동화될 수 있는 영역이다.





5. 구조를 깨지 못하면 직무는 희미해진다

그럼에도 은행에 UX 기획자가 필요하다면,

그 역할은 더 이상 규칙을 적용하는 사람이 아니라 규칙을 정의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AI는 주어진 기준을 완벽하게 따른다. 하지만 어떤 기준을 써야 하는지, 무엇을 우선해야 하는지는 결정하지 못한다. 그 판단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따라서 금융 UX 기획자는 설계자, 검토자 역할을 축소하고 의사결정에 개입하는 역할을 해야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표준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표준의 예외를 허용할 근거를 제시하는 사람

가이드를 해석하는 사람이 아니라, 가이드가 작동하지 않는 지점을 발견하고 대응하는 사람

산출물을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라, 결과에 대한 책임을 공유하는 사람


여기서 중요한 건 기술 관점이 아니라,

조직 관점에서 UX 기획자에게 어디까지의 판단과 책임을 허용해 줄 것인가다.


UX 기획자가 여전히 ‘틀리지 않았는지’를 확인하는 검토자 위치에 머문다면, 그 자리는 결국 AI에게 넘어간다. 반대로 UX 기획자가 의사결정의 맥락을 만들고, 그 선택의 결과를 감당하는 역할을 맡는다면 서비스의 질이 더 향상될 수 있고, AI는 도구일 뿐 대체자가 될 수 없다.


AI가 모든 것을 대체할 수는 없다.
금융 조직은 ‘잘 만든 화면’이 아니라, 복잡한 금융 구조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감당할 수 있는 인터페이스를 해석하는 업무에 UX 기획자를 활용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