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넘으면 전문가가 될줄 알았지.
말콤글래드웰이 말한 1만 시간의 법칙에 따르면 10년 정도 동일 분야의 업무를 하면 전문가라고 칭할 수 있다고 했다. 근데 틀린 것 같다. 난 벌써 16년째 이 일을 하고 있는데 당당하게 전문가라고 말하지 못하고, 내 업무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한다.
UX 직무의 근본 파헤쳐보기
나는 'UX 리서처', 'UX 연구원', 'UX 컨설턴트', 'UX 기획자'라는 이름으로 10여년 정도 에이전시에서 커리어를 쌓아왔다. 이후 대기업으로 옮겨 지금은 금융권에서 'UIUX 기획', 'UX 디자이너'라는 직함으로 계속 일을 하고 있다. 직함은 조금씩 달랐지만 내가 하는 업무의 핵심을 한 단어로 말하자면 '기획'이다.
(기획도 진짜 많은 분야가 있기에 여기에서는 UX라는 틀에 한정해서 생각해야 한다.)
최근 들어 스스로에게 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던지게 된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과연 무엇일까?’
이 질문은 단순히 직무 명칭에 대한 호기심은 아니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UX OO(땡땡)’중 뭐라 불리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혼란에 가까웠다. 다들 비슷한 고민을 하겠지 싶어 주변 지인들과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나눠봤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대부분 자신의 직무를 비교적 명확하게 정의하고 있었다. 오히려 이런 고민을 하는건 나뿐이었다.
그래서 질문의 방향을 약간 틀어봤다. 내 직무를 어떤 ‘UX OO’으로 정의할 수 있느냐를 묻기보다, 내가 지금에 와서 왜 이런 생각이 드는건지 내 경험을 거슬러 올라가 보기로 했다. 직무가 모호한 것이 아니라, 내가 맡아온 역할 속에서 바라본 업무의 관점이 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에이전시에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당시에는 UX 전략 기획과 리서치, 컨설팅 업무를 주로 맡았다. UX 방법론을 실무에 맞게 재구성하고 이를 툴킷화하는 작업을 했고, 다양한 리서치를 직접 수행하며 서비스의 방향을 제시했다. 산업동향과 트렌드를 살펴보고, 서비스의 맥락과 방향에 맞춰 여러 관점에서 각 요소들의 연결점을 파악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도출했다. 나는 이 과정에 매료되었다. 천직이라고 느낄 만큼.
에이전시의 UX그룹은 늘 소규모 였다. (근데 이건 대기업으로 옮겨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UX 컨설팅 프로젝트가 없을 때면 자연스럽게 제안서 작성 업무를 맡았다. 제안서는 늘 시간에 쫓기는 일이었다. 한 번에 70~100장 가까운 분량을 작성해야 했고, 여유가 있을 때는 한 달, 짧을 때는 일주일 만에 완성해 제출해야 했다.
당시 구축 프로젝트에 투입되는 UI기획자들은 제안서 작성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제안서에 포함되는 동향 분석, 벤치마킹, 트렌드 분석은 컨설팅과 전략 기획의 영역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구축기획자들은 '우리는 요건 맞춰 화면을 설계하지, 제안서를 작성하는 역할은 아니에요' 라는 태도여서 이 역할 분담이 초반에는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이 업무를 반복할수록 물음표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물음표가 많아질수록 자신감이 점점 없어졌다.
'컨설팅'이라는 업무는 외부의 시선에서 보면 그럴듯한 말로 포장해놓은 허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말은 컨설팅 업무를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실무에서의 시선이 그렇다. 규모가 있는 프로젝트인 경우 구축 전에 컨설팅을 진행하는데 이후 실제 구축 단계에서 기획자, 개발자, PM 등 컨설팅 결과 보고서를 검토하면 열에 아홉은 이런 반응을 보인다.
"현실도 모르면서 이상적인 얘기만 했네. 구축을 안해봤으니까 이런 식으로 쓰지."
15년 전, 나는 이 말에 선뜻 반박할 수 없었다. 정말 구축을 안해봐서였다.
이 점이 나 스스로도 떳떳하지 못한 뭔가의 부족함으로 느껴졌다. 실제로 서비스 아이디어를 제안할 때 '실제 이게 가능하려나?' 하는 생각이 이따금 스쳤고, '내가 좀 제대로 알면 더 구체적이고 실행가능한 방향으로 제안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의심이 반복됐다. 그 의심은 시간이 지날 수록 갈증으로 변해갔다.
변화가 필요했다.
그래서 더 나은 컨설턴트가 되기 위해 구축 프로젝트 경험을 쌓고자 이직을 했다.
일부러 규모가 작은 회사를 찾았다. 조직이 클수록 역할이 세분화되어 있어, 내가 원하는 구축 경험을 충분히 쌓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작은 회사에 합류한 뒤에는 클라이언트와 직접 업무를 조율하고, 화면 설계서를 작성하며 서비스 정책까지 정의하는 구축 프로젝트에 투입되었다.
하지만 이직 이후에도 나는 온전히 구축 프로젝트만 담당하지는 못했다. 이전 경험 때문인지 회사는 나를 하나의 역할에 한정하기보다 다방면으로 활용하려 했다. 그래서 UX 리서치와 제안서 작성 업무를 완전히 내려놓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사실, 그 일을 굳이 거부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제안서를 직접 작성하고, 그 프로젝트에 참여해 실제 구축까지 수행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지면서 업무의 맥락은 훨씬 또렷해졌다. 업무량은 늘었지만, 전략과 제안, 그리고 실행이 하나로 연결되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클라이언트, 디자이너, 퍼블리셔, 개발자까지 전반적으로 만나며 논의하며 배웠고, 그 경험들은 이전보다 더 넓은 시야에서 프로젝트를 바라볼 수 있게 해주었고 나 역시 성장하고 있음을 분명히 느꼈다.
당시 회사는 정규직보다 프리랜서 기획자를 더 많이 활용하고 있었다. 인력은 적은데 프로젝트는 꾸준히 들어오는 구조였기 때문에, 정규직을 늘리는 대신 경험 많은 프리랜서를 프로젝트 단위로 투입하는 방식이 현실적이었다. 또한 ‘검증된 기획자’를 찾기 어려운 상황에서, 다양한 프로젝트를 경험한 프리랜서의 실무 역량은 회사 입장에서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일하며 PM과 PL의 관점에서 프로젝트를 리딩하는 방식을 가까이에서 배울 수 있었다. 일정 관리, 리스크 조율, 이해관계자 설득 등 이전에는 깊이 체감하지 못했던 영역을 실전 속에서 익혀갔다.
그렇게 자신감이 점점 붙었다. 그러나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회사 사정으로 인해 그 흐름을 계속 이어갈 수는 없었다. 그리고 다시 에이전시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전처럼 앞단의 UX 컨설팅 프로젝트에 투입되는 비중이 높아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단지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실제 구현 과정을 경험해본 사람으로서 제안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전략을 이야기하면서도 동시에 실행 가능성을 함께 점검하는 시각이 자연스럽게 생겼다.
에이전시에서 오랫동안 일할 수 있었던 이유는 지루할 틈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양한 산업군의 서비스를 경험하며 각 서비스가 가진 특성과 맥락을 파악하는 과정이 무척 흥미로웠다. 하나의 서비스를 깊이 있게 파고드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지만, 당시의 나는 오히려 여러 분야를 넓게 접하며 서비스마다 반드시 짚어야 할 핵심 요소를 찾아내고, 그 위에 아이디어를 더해 구조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재미를 느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산업과 서비스가 달라져도 UX의 본질과 컨셉은 항상 동일함을 알았다.
사용자 중심, 빠르고 쉬운 사용성, 직관적인 구조, 통합적인 관점...
프로젝트마다 다른 옷을 입고 있었지만, 결국 반복되는 언어들이었다. UX 컨셉 모델을 구상하며 정리한 문장들을 다시 읽어보면, 어디에 가져다 붙여도 크게 어색하지 않은 표현들이었다. 서비스마다 구체화하는 포인트와 실행 방안은 달랐지만 핵심 메시지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UX의 본질을 다룬다면 결국 비슷한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 한번 낯익은 기시감을 느꼈다. 업무 초반에 느꼈던 ‘그럴듯하지만 어딘가 공허해 보이던 컨설팅’. 말은 세련되어 보이지만 실체는 흐릿한 채로 남아있는 듯한 모호함 말이다.
고민끝에 이제는 산업 안으로 들어가 깊이 있게 들여다보기로 했다. 반복성 업무일지라도 서비스 기업 안에서 전반적인 비즈니스를 보면서 맥락을 체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금융업에 발을 들이게 되었고, 운영 기획을 접하게 되었다.
운영 기획 업무는 분명 반복적인 성격이 강했다. 다만 이전과 달랐던 점은 업무의 마감 시점이 비교적 명확하다는 것이었다. 업무는 주로 배포 일정에 맞춰 진행되었고, 긴급한 이슈가 아니라면 무리해서 야근을 하지는 않았다. 정해진 프로세스 안에서 요구사항을 정리하고, 배포 일정에 맞춰 화면과 정책을 점검하며, 이슈를 관리한다. 하지만 그 반복을 안정적으로 굴리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높은 수준의 체계성이 요구된다. 변경 이력 관리, 영향 범위 분석, 리스크 선제 대응, 그리고 부서 간 커뮤니케이션이 유기적으로 맞물리지 않으면 운영은 쉽게 흔들린다. 여튼 야근의 늪에서 처음으로 자유로워졌다. 운영 기획을 하면서 워라밸이라는 것을 체감하기 시작했다.
금융 서비스는 이해관계자가 많다. 상품 부서, 마케팅, 개발, 보안, 준법, 고객센터 등 여러 조직이 동시에 얽혀 있다. 하나의 작은 수정이라도 관련 부서와의 조율이 선행되지 않으면 배포 일정은 지연되고, 책임 소재가 모호해진다. 운영 기획은 단순히 ‘수정 사항을 정리하는 역할’이 아니라, 복잡한 이해관계를 조정해 서비스가 멈추지 않도록 만드는 일에 가깝다. 그런데 실제 현장은 달랐다. 프로세스는 존재했지만 일관되게 작동하지 않았고, 협업이 중요하다고 말하면서도 부서 간 관점 차이는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운영이 돌아가고는 있지만, 잘 돌아간다고는 말하기 어려운 구조였다.
UX 업무를 수행할 때 기획, 디자인, 퍼블 영역에서의 전반을 함께 하다보니 지나치게 비주얼 요소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다. GUI와 같은 시각적 완성도는 분명 중요한 요소다. 그러나 서비스의 방향성과 사용자 흐름이 충분히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비주얼 개선을 강조한다면 아무리 세련된 결과물을 내놓아도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빛좋은 개살구. 말 그대로 겉모습은 개선되겠지만, 속은 항상 그대로인 채로 남아 있게 된다.
최근 몸담고 있는 금융업계의 ‘UX 조직’은 대부분 전략적 의사결정에는 참여할 수 없고, 요청된 산출물을 전달하고 디자인하는데 관여하는 업무에 집중되어있다. 그래서 내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었는지, 이게 맞는건지, 계속 고민하게 되는 것 같다. 시니어가 되어 특정 산업에 갇혀있는 UX 조직을 경험하면서 나 스스로에대한 질문을 반복하고 있는 꼴이다.
처음에는 이게 금융의 특징인가 싶었는데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돌아가는 형태를 짐작해보면 그냥 대기업에서 이런 특징을 보이는것 같다. 제품이 아닌 무형의 서비스를 가진 대기업은 다 이런 흐름을 가지고 있는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UX는 비즈니스 모델을 기반으로 사용자 흐름을 설계하고, 서비스 전반에서 사용자가 어떤 경험을 하게 될지를 구조적으로 정의하는 일이다. 여기서 경험은 단순히 디지털 화면 안의 인터랙션에 한정되지 않는다. 사용자가 서비스를 인지하고, 접근하고, 이용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돌아오기까지의 모든 접점을 포함한다. 디바이스, 환경, 조직의 운영 방식까지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 정의는 학문적으로 보면 ‘서비스 디자인’에 더 가까울 수 있다. 그러나 나는 UX와 서비스 디자인을 엄격히 구분하는 데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User eXperience’라는 말 자체는 특정 플랫폼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본질은 사용자의 경험을 어떻게 구조화하느냐에 있다. 오히려 우리가 작은 공간안에 그 단어를 가둬두고 있다.
모바일의 확산과 함께 UX라는 용어가 빠르게 소비되었고, 눈에 보이는 결과물을 UX의 전부로 인지하는 곳이 아직도 많다.
UX는 장식이 아니라 구조다.
결과물이 아니라 방향을 정의하는 일이다.
사용자의 행동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흐름을 설계하고, 그 흐름이 비즈니스의 목표와 충돌하지 않도록 조율하는 것이 UX다.
에이전시에서 대기업으로 자리를 옮긴 결정이,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며 해오던 일에 대한 혼란과 내 업의 본질에 대해 고민을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고맙다고 해야 할까. 이 기회로 단순히 업에 대한 고민을 넘어 조직에 대한 고민까지 하게 되었다.
대기업에서 UX 조직이 갖춰지기 위해선 뭐가 필요할지, 천천히 고민을 풀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