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무신론자도 신을 향한 믿음을 지녔다는 증거가 있다

그 사람들은 죄짓고도 벌 안 받잖아. 그래서 나는 신이 없다고 생각해.

‘그 사람들은 죄짓고도 벌 안 받잖아. 그래서 나는 신이 없다고 생각해.’


점심을 먹고 회사로 들어가는 길에 직장 동료 B가 말했다.

무신론자인 그는 사람은 죽으면 끝이라면서 저런 말을 덧붙였다.  

전능한 신이 있다면 나쁜 인간은 벌을 받아 마땅하지만,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기는커녕 더 잘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이 세상은 못된 이가 거침없이 승승장구하는 듯하다.

오히려 착한 이가 더 힘들고 고되게 사는 것 같다.  

권선징악의 이야기는 동화 속에나 쓰인 순진무구한 판타지에 불과하다. 


현실에서는 악한 자더라도 형통의 길을 걷고, 선한 자는 복을 받기는커녕 억울한 일을 당해 고통받는다. 


현실에서 가해자는 죄를 인정하지 않고 턱을 치켜든 채 거리를 누빈다.  

피해자는 위로와 보상도 받지 못하고, 2차 가해에 시달리며 음지에서 살아간다.  

나에게 큰 상처를 준 사람들이 친구들과 활짝 웃으며 찍은 사진을 SNS에 올린 걸 발견할 때, 남모르는 분노가 치민다. 


지금도 나는 트라우마에 시달리는데, 무탈한 것 같은 그들을 보니 억울하기까지 하다. 

신의 저주로 걔네가 길을 걷다 벼락이라도 맞았으면 싶다. 

신은 전능하고 선한 존재로서 마땅히 선인에게 상을 주고 악인에게 벌을 내리는 재판관이라고 무신론자도 믿는다.


왜 못된 신격을 지닌 신을 상상하지 않을까. 

신의 품성이 나빠서 못된 인간을 좋아하기에 죄악으로 가득 찬 세상을 내버려 둔다고 생각하지는 않는 걸까.  


그렇게 여기는 무신론자는 별로 없는 것 같다. 

신이 선하다는 객관적인 증거가 없다.

그래도 사람들은 신이 선하다고 믿는다. 


무신론자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유로 나쁜 인간이 징벌을 받지 않고 호위 호식하는 것을 예로 든다. 


왜 무거운 죄를 저지른 인간들이 죄책감도 없이 멀쩡하게 잘 지내냐고 한탄한다.


만약에 신이 있다면 악인들이 망하도록 조치를 취해야 하는데 그들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은 선하고 전능하다. 


선한 신은 악을 싫어한다. 

그래서 신은 나쁜 인간을 벌한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나쁜 인간이 착한 인간보다 더 잘 사는 경우가 많다.  

나쁜 인간이 벌을 받지 않는 이유는 선한 신이 그를 내버려 두기 때문이다. 


신이 직무유기를 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신은 존재론적으로 직무유기를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신은 없다. 


B의 논리가 이것이다. 

무신론자가 신이 없다고 주장하는 근거로 세상에 만연한 악행과 착한 이가 불필요하게 받는 고난과 더불어 처벌받지 않는 악인을 예로 든다면, 결국 그는 신은 선하기에 악한 자에게 벌을 주고 착한 사람을 구원해야 한다고 믿는다는 의미다.   


무신론자는 신이 없다고 확신하면서도, 신을 향한 믿음을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때때로 신을 향한 확고한 믿음을 표현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 부자가 고통스러웠던 까닭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