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존중하며 타인을 배려하는 법
매일 그들이 찡그린 얼굴로 나를 맞이한 이유가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모 중학교 근처에 한 문구점이 있었다.
중학생이던 나는 펜과 공책을 살 때 주로 그 가게에 들렀다.
다른 문구점에 비해 물건이 좋고 내부도 깔끔했다.
특히 하이테크 펜을 사려면 그곳에 꼭 가곤 했다.
그런데 한 가지 불만사항이 있었다.
문구점의 주인들이 너무 불친절하다는 것이었다.
물론 내가 친절을 바라진 않았다.
다만 불친절한 대우만큼은 받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그들은 일관적으로 불친절했다.
문구점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부부였다.
키가 크고 깡마른 그들의 공통점은 표정이었다.
그들은 늘 찡그리고 있었다.
물건을 사러 온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을뿐더러 말투도 딱딱했다.
지금의 나라면 평범한 상황으로 인식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중학생이던 나는 그 점이 불편했다.
말랑한 찹쌀떡 같은 성격의 친구들과 깔깔거리다가 그 가게에 들어가면 왠지 표정이 굳었다.
그렇다고 딱히 나쁘게 대하지도 않았기에 최대한 그 문구점을 애용했다.
그날은 저녁 즈음이었다.
하늘이 남색으로 물들고, 하나 둘 켜진 네온사인이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나는 급하게 살 물건이 생겨 집을 나와 문구점 쪽으로 향했다.
문을 닫았을까 봐 발걸음을 재촉했는데 다행히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들어가니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부부는 이제 막 문을 닫을 참이었나 보다.
물건을 정리하느라 카운터는 비어 있었다.
나는 학교에 가져갈 준비물을 고른 후 카운터 주변을 서성이며 사람이 오길 기다렸다.
잠시 후 남자 사장인 아저씨가 왔고, 이내 계산기를 두드렸다.
여자 사장인 아주머니는 말없이 쌓인 물건들을 마저 정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유난히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었다.
사람의 한숨이 가득한 느낌이었다.
두 사람의 표정도 어느 때보다 어둡고 침울했다.
돈을 내고 물건을 받는데 아저씨가 운을 띄었다.
그리고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했다.
오늘 우리 아들 기일이야.
아저씨는 무척 슬퍼 보였다.
자식을 잃은 부모를 보는 게 나는 처음이었다.
우두커니 그들을 바라보기만 했다.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뭐라고 해야 했을까.
지금 생각하면 침묵했던 게 제일 나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어떤 위로도 위로가 아닐 테니까.
자식을 잃은 부모를 위로할 수 있는 말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도 그들을 위로할 수 없을 것이다.
앞으로도.
그동안 무뚝뚝하고 차가운 사람들로만 여겼다.
껄끄러운 마음에 물건만 사면 후다닥 나오기 바빴다.
심지어 그들이 나를 싫어한다고 생각하기까지 했다.
한 없이 찡그리던 그들.
찡그리고 찡그리고 또 찡그리던 것은 살아 있는 자가 고통을 견디기 위함이었다.
무겁게 침잠해 끌어올리기 힘든 괴로움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아픔을 이겨내느라 찡그렸다.
때로는 이겨내지 못해서 찡그렸다.
문구점을 지나 조금만 올라가면 중학교가 있었다.
수많은 학생들이 그 가게에 들렀다.
나를 포함해서.
그 부부는 매일 학생들을 보면서 매일 자식을 떠올렸을 것이다.
나는 슬펐다.
겉모습은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걸 알 때가 있다.
오히려 겉모습은 속마음과 반대되기도 한다.
인간이란 존재가 참 입체적이다.
서늘하고 경직돼 보이는 사람이 속마음은 따뜻할 수 있다.
유들유들 잘 웃고, 성격이 둥글둥글해 보이는 사람은 앞에서만 그럴 뿐 뒤에서 이간질 선수로 뛰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생각이 많아서 오히려 말이 없다.
수많은 생각 중에서 무엇을 붙잡아야 할지 몰라 차라리 가만히 있는 편을 택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말이 많다.
알고 보니 그는 원래 침묵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정적이 흐르면 어색해지는 게 불편해서 아무 말 대잔치를 했던 것이다.
남에게 자주 핀잔주는 사람은 상처받기 싫어서 먼저 선수 치는 건지 모른다.
완벽주의자라고 스스로 강조하는 사람은 완벽해 보이지 못할까 봐 매일 초조해한다.
남에게 거침없이 다가가는 사람이 손절도 잘 당하고, 손절도 잘하는 경우가 있다.
영숙이가 떠나면 미란으로 대체하고, 미란이가 떠나면 영희로 대체한다.
그저 친구가 필요할 뿐 깊이 있는 관계를 맺는 것에 관심이 없다.
외로움을 채워 줄 수 있는 누군가면 그만인 것이다.
지나치게 존댓말을 쓰고 친절했던 이가 사실 상대를 얕잡아봤다는 걸 알 때가 있다.
착해 보였지만 실상은 도덕적 우월감으로 타인을 대했던 것이다.
그런 유형은 상대를 내가 도와주는 존재로 바라보고, 친구로는 생각하지 않는다.
너와 내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내가 착해 보여?
어떤 사람이 여러 명한테 묻는 걸 본 적이 있다.
나는 그 질문 자체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는 상대가 너는 안 착해 보인다고 답해주길 바랐다.
착해 보이면 약해 보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약해 보이면 남들이 무시할까 봐 두려웠기에 착해 보이냐고 떠본 것이었다.
그는 누가 한 번만 잘못해도 그걸로 끝이라고 자랑스럽게 말했었다.
그는 상처받는 것에 민감했고, 조금만 상처를 받아도 관계를 정리할 정도로 후유증을 앓았던 것이다.
그래서 못된 사람 마케팅으로 자기 자신을 보호하고 싶어 했다.
착해 보이냐는 질문은 상처받기 싫다는 그의 우회적인 고백이었다.
남을 향해 끊임없이 부정적인 감정을 표출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모든 사람을 실시간으로 비난한다.
이 사람은 이게 잘못됐고, 저 사람은 저게 잘못됐다.
그러면서 그들을 자기 자신과 비교하기 시작한다.
나는 저들과 달리 잘하고 있다며 스스로를 치켜세운다.
결국 그는 자기 자랑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타인을 나쁘게 평가한 것은 본인을 좋게 봐달란 의미였다.
인간의 마음은 여러 가지 요소들로 얽히고설켰다.
과거에 겪은 경험, 미래에 대한 기대, 자라온 환경에서 만들어진 가치관, 다양한 감정이 공존한다.
힘든 일을 겪고 감정을 처리하는 방식도 각각 다르다.
누군가는 승화시킨다.
누군가는 보복을 꿈꾼다.
누군가는 인생사가 그런 것이겠거니 하면서 관조한다.
이렇게 인간은 복잡하고 개성 있는 존재다.
그러니 겉모습만 보고 상대를 평가한다면 추측이 빗나갈 때도 많을 것이다.
그 빗나간 추측이 바로 ‘편견’이다.
사람에 대한 인식은 어떻게 보면 편견의 산물이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정성스럽게 고민하고 생각한다.
하지만 타인에 대해서는 단순하게 평가하고 쉽게 재단한다.
겉모습과 속마음이 일치한다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타인을 수박 겉핥기식으로 보면 인식의 틀이 좁아지고, 편견을 진실이라고 믿게 된다.
약간의 편견은 인생의 위험을 피할 때 도움이 된다.
하지만 원론적으로 편견 자체는 유익이 없다.
편견은 차별로 표현된다.
인간은 누군가가 차별하는 모습을 보고 배운다.
차별의 악습이 이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 친구에게서 저 친구에게로 대물림되는 것이다.
세상이 차별로 가득한 것은 편견으로 가득하다는 말과 동일하다.
편견을 조금이라도 걷어내는 방법은 사람에게 진실한 관심과 긍휼함을 가지는 것이다.
그 사람에게 관심이 있으면 궁금해지고 자연스럽게 관찰하게 된다.
진지하게 살피다 보면 생각보다 더 많은 정보를 얻는다.
그 정보를 토대로 겉모습 뒤에 숨겨진 상대의 진짜 마음을 알 때가 있다.
입은 웃지만 눈빛이 슬프다든가.
괜찮다고 말하지만 말투에 기운이 없다든가.
저 사람이 싫다고 하지만 대화의 맥락을 살펴보면 서운함을 풀고 더 잘 지내고 싶어 한다든가.
건너 건너온 소문은 이 사람이 전파한 내용이 다르고, 저 사람이 아는 내용이 다르다.
출처도 불분명해서 진위를 따지려면 누구에게 물어야 할지 모른다.
소문의 실체를 적극적으로 파헤치는 자도 없는데 알고 싶은 자도 없다.
결국 소문은 소문 자체로 즐길거리가 되고, 소문 때문에 진실은 더 가려진다.
하지만 현장에서 내가 직접 보고 들은 정보는 이러한 소문과 질적으로 차별화된다.
피차 힘든 인생이다.
그러니 최소한의 긍휼함을 가지고 상대의 마음을 알고자 노력해야 한다.
노력의 일환은 관찰이다.
애정 어린 마음으로 그 사람을 살피면 진실에 가까운 사실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이타적인 관심을 가지는 것은 나 자신에게도 도움이 된다.
인간에 대한 혜안이 생기고, 세상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
인생의 풍파에 부딪히거나 사람 때문에 고달파질 때, 결국 관찰로 얻은 통찰력은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튼튼한 버팀목이 된다.
학교 앞 문구점 이야기로 돌아온다.
그 이후 내가 그 가게를 다시 갔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문구점이 계속 있었던 걸로 봐서 아마 다시 찾았을 것이다.
이제 나에게 그 가게는 메마르고 불친절한 대우를 받았던 곳이 아니다.
자식을 하늘로 먼저 보낸 부모가 슬픔을 견디려고 몸부림쳤던 공간으로 남아 있게 됐다.
그리고 바로 그게 문구점의 진실한 모습이었다.
지금도 아주 가끔씩 그들이 떠오른다.
특히 아주머니의 찡그린 얼굴이 기억에 남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