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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이 나를 비판할 때 OO을 해서 대응해야 하는 이유

세상에는 진품 비판과 가품 비판이 존재한다. 비판을 분류해 수집하자

어떤 사람이 당신을 지적하거나 비판할 때 어떻게 대응하는가.


누구나 비판을 받는다.

비판을 듣고 내가 변화할 점을 깨닫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비판은 유익하다.

하지만 모든 비판을 진중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미간을 찡그린 누군가가 확신에 찬 말투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릴 때, 순간 우리는 ‘정말 내가 그랬나?’하는 생각에 마음이 흔들리곤 한다.


며칠 동안 나에 관한 부정적인 평가와 이전에 겪었던 안 좋은 경험을 연관시켜 확대 해석한다.

폐부로 파고드는 그 말을 현미경을 들이대 유심히 관찰한다.


그러다 결국 자책감에 빠져 허우적댄다.

내가 어리석고 부족해 보여 괴로워한다.    

비판 때문에 속상한 것은 자연스러운 감정의 흐름이다.

오히려 비판을 듣고도 아무렇지 않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면, 그는 감정을 느끼는 걸 회피하는 성향의 사람일 수 있다.

아니면, 사회성의 결함으로 외부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비판을 듣고 힘들어하기 전에 우리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의 중심을 잡아야 한다.

뾰족한 비판의 칼에 찔려 흠칫 놀라 물러나지 말고, 비판의 저의와 내용을 세세하게 분석해야 한다.

비판받는 사람은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다.

여러 사람 앞에서 누군가가 나를 지적한다면, 비판의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나의 명예가 실추될 수 있다.


비판을 듣는 순간 마음의 통증 때문에 우리는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쉽게 비판에 동의해버리기도 한다.

그 비판에 내가 억울하다고 느낄 만한 지점이 있더라도, 비판에 반박하는 법을 몰라 비난받는 상황을 대충 넘기기도 한다.


이렇듯 비판을 받는 자는 아픔이라는 대가를 감수한다.

그러므로 나에게 비판이 합당한 것인지 먼저 분별해야 마땅하다.


대가를 치러가면서 들을 정도로 그 비판이 진실하고 합당한가?

객관적인 사실에 기반해 비판이 이루어졌는가?

비판을 받을 때, 이렇게 반문하자.  


비판을 곧이곧대로 순진하게 흡수하지 말자.

처음 비판과 맞닥뜨렸을 때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은 힘든 상황에서 한 발짝 떨어지는 것이다.

그런 다음 나를 향한 비판자의 표정과 제스처를 유심히 관찰하자.

비판하는 내용 속에 담긴 형용사, 조사, 뉘앙스까지도 해부하자.

언어의 수술대 위에 그것들을 올려두자.

상대가 그 단어를 쓴 진짜 의미를 파악해보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이 아닌 비판, 오해에서 비롯된 비판, 모함하기 위한 정치적 비판, 비판자의 편협한 시각이나 오만한 태도가 근간인 비판, 비판을 가장한 비난은 과감히 거절하자.

비판을 선별하는 것은 음식을 골라 먹는 편식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고 존중하는 행동이다.


비판을 피하자는 취지가 아니다.

모든 인간은 어느 정도 비판을 들어야 성장한다. 


오히려 지금까지 비판을 전혀 듣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이상한 기질을 지녔을 수 있다. 

정말 이상한 캐릭터에게 사람들은 이상하다는 말조차 하지 않는다. 

이미 그를 진지하게 대화할 수 있는 대상에서 제외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간간이 비판을 듣는 사람들은 건강한 대인관계를 꾸려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예외도 있다. 


절대적인 권력을 누리고 있는 자는 솔직한 비판을 듣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 권력 때문에 피해를 볼까 봐 상당수의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침묵을 선택한다. 

단지 뒤에서 솔직한 속내를 드러낼 뿐이다. 


사실 친한 사람들은 나를 지켜보다가 촌철살인을 날린다.

그들은 애정과 사실을 동력 삼아 진심 어린 조언을 할 때가 많다.   

인간은 신이 아니기에 완벽하지 않다.

인간은 동그라미가 되려고 해도 늘 세모나 네모 같다.

인간은 아무리 노력해도 늘 어딘가가 부족하다.

그래서 매사에 너무 완벽해지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괜찮다.


다만 자신의 잘못이나 단점을 자각하고, 할 수만 있다면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야 한다.

인성을 가다듬고, 높은 실력을 겸비하고자 노력하는 태도는 성숙으로 향하는 지름길이다.

그럴 때 인간은 더욱 고귀한 존재로 거듭난다.

나의 부족함을 스스로 깨달으면 좋겠지만, 자신에게 관대하고 남에게 엄격한 인간의 속성 때문에 꼭 남이 말해야 진실을 알기도 한다.

그러므로 때로는 비판을 인정하고, 나의 자양분으로 삼아야 할 때도 있다.


어떤 축구선수는 매일 혹독한 훈련을 받으면서도 반성일기를 썼다고 한다.

비판을 듣는 것도 힘들지만, 제3자의 관점에서 스스로를 비판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아마 그 축구선수는 훈련을 치르며 이미 많은 지적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자발적으로 일기까지 쓰며 자신을 채찍질했다.

그 축구선수가 반성일기를 쓴 이유는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이기 때문이다.

프로는 비판 듣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프로는 비판하는 것도 능숙하다.

비판을 뜨거운 감자 다루듯 대하지 않는다.


프로는 칭찬만을 원하지 않는다.

진실하고 합리적인 비판을 원한다.

비판을 피하지 않고 정면 돌파한다.

그래서 더욱 성장한다.

세상을 향해 진지한 관심을 가진 사람만이 건강한 비판을 할 수 있다.  

관심이 없으면 깊이 생각하지 않아서 할 말도 없다.

고민하지 않으니 비판할 거리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알맹이 없는 칭찬만 기계적으로 반복하며 사람을 표면적으로 대할 뿐이다.

속마음을 날것으로 주고받지 않는 인간관계를 맺으면 기분 나쁠 일은 별로 없다.

하지만 이런 대인관계는 매일 인스턴트식품만 사먹는 것처럼 배만 부르고 실속이 없다. 


그러니까 간혹 누군가가 진지하게 조언한다면 새겨들을 줄도 알아야 한다.

애정을 밑바탕으로 하는 그의 말은 나에게 아마 유익할 것이다. 

이런 진품 비판 말고, 가품 비판을 분류해야 한다.

주도적으로 비판을 검열하면, 우리는 쓸데없이 오해받거나 부당하게 대우받는 경험을 줄일 수 있다.


잘못된 비판을 비판할 때, 우리는 오해를 바로잡고 진실을 알려 상황을 역전시킬 수도 있다.

비판자도 자신의 오해나 편협한 사고방식을 바로잡을 기회를 맞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판이 적합한지 꼼꼼히 검토하는 것은 자신을 비롯해 타인에게도 선한 행위다.

비판을 엄격하게 평가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타인을 공격하는 수단으로 비판을 활용하는 인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비판의 출처는 중요하다. 

비판의 출제자가 질 나쁜 사람이라면 그의 주장은 이상한 점이 많을 것이다. 


이 세상에는 비판을 가장한 비난으로 낮은 자존감을 채우는 빌런이 살고 있다.

입만 열면 불평과 비난을 토하듯이 쏟아내는 사람은 왜곡된 렌즈로 모든 상황을 해석한다.  


병들어 있는 마음을 숨긴 채 오로지 본인은 비판하는 것만 본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비판하는 행위 자체를 뿌듯하게 여긴다.

단지 그들은 비판을 할 때 자신의 위치가 올라간다는 미련한 발상을 한다.

그들은 삶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증명하지 못하고, 비판으로 정체성을 드러내려 한다.

그래서 희한하게 상황은 다 다른데, 늘 자신은 잘했고 상대가 잘못했다는 식의 궤변을 펼친다.  


그런 빌런은 정작 상황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지 못한다.

그냥 저 멀리서 불난 집을 불구경하듯이 보며 말로만 평가할 뿐이다.

마치 축구도 못하면서 축구 중계를 하는 사람 같다.

그들은 입만 살아있기에 상대적으로 실전에서는 약한 모습을 보인다.

다만 그들은 자신의 지적을 들은 다른 사람들이 기분 나빠하거나 무안해하는 장면을 즐긴다.

남이 타격을 받아 괴로워하는 걸 보면, 자신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생각에 빌런의 초라한 자아가 순식간에 팽창한다.

그래서 타인의 고통이 그들에게 기쁨이 되고, 힘이 되는 것이다.


이런 저급한 발상 때문에 빌런은 쓸데없는 잔소리를 퍼붓는다.  

그래서 빌런의 조언은 상황에 동떨어져 있고, 따라서 영양가가 없다.

그럴 때 오히려 빌런의 태도를 지적해 무분별한 비판을 지양하는 분위기를 만들어가야 한다.


불필요한 비판을 낚아채 언덕 위로 하찮게 날려버릴 때 함부로 남을 지적하고 평가하는 빌런에게 경고를 날리는 효과도 있다.

회사에 다닐 때, 타 부서와 협업한 적이 있다.

내가 아이템을 발제했고, 그 사건과 연관된 피해자들도 만나 사실관계를 크로스 체크했다.


문제는 우리 부서의 팀장 B였다.

B는 취재를 주도하는 사람이 나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그는 고의적으로 나와 협업하는 타 부서의 PD에게만 아이템에 관해 물어봤다.


B는 자타공인 기독교 혐오자였다.

그래서 기독교인인 나를 겨냥해 기독교의 교리를 빈정대고, 교회에서 일어나는 안 좋은 일들을 언급하며 몹시 즐거워하곤 했다.

그랬던 그는 정작 일을 할 때만 나와 말을 섞지 않으려고 애썼다.

회의할 때도 B는 일부러 사람들의 이름을 불러가면서 질문한 다음 나를 건너뛰었다.

그는 의도적으로 나의 발언권을 뺏어가는 파렴치한 행각을 이어갔다.  


B는 나를 앞에 두고 다른 사람에게 내가 기독교 전문가이니 무엇이든 물어보라고 비웃기도 했다. 

여러 사람 앞에서 나를 겨냥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이해가 안 된다는 식으로 조롱하는 건 애교였다. 


그는 기독교인의 도덕성을 비판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비도덕적인 행동을 반복했던 것이다. 


그는 기독교를 싫어한다는 명목으로 부당하게 나를 차별했다.

그리고 차별의 연장선상에서 취재하는 나에게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취재가 마무리될 무렵, 타 부서의 PD가 이 아이템의 진행을 중지하라는 부장의 지시가 있다고 전달했다.

피해자의 직접적인 증언이 아닌 피해자에게 얘기를 들은 제3자의 간접적인 전언이 취재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타 부서의 부장이 어떤 경로로 어떤 보고를 들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피해자들과 일일이 교류하며 꼼꼼하게 취재했다.

그들이 직접 겪은 상황을 인터뷰했는데, 그 일과 상관없는 사람들의 전언이 많다는 건 당연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나는 어쩔 수 없이 B에게 면담을 하자고 말했다.

B는 회의실 의자에 앉자마자 으레 그랬던 것처럼 나를 비아냥거렸다.


나는 그 자리에서 그동안 취재한 것들을 기록한 프린트물을 그에게 주었다.

그리고 피해자가 직접 겪은 일들을 취재한 게 대부분인데, 도대체 부장이나 B가 말하는 전언의 내용이 무엇인지 이 프린트물에서 한번 짚어보라고 B에게 요구했다.

재미있게도 B는 버벅거리며 아무런 답을 하지 못했다.

B는 전언과 증언을 구분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내가 취재한 것들에 대해 무지했다.


취재한 당사자에게 물어보지도 않았으니 그는 아이템의 내용을 잘 모를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나를 지적하려면 내가 취재한 내용은 정확히 아는 게 기본 아닌가.

취재를 업으로 삼는 B였다. 

그런데 그는 이 사건은 제대로 취재도 안 한 채 일단 잘못됐다고 단정했다.


누군가가 지적을 할 때 무엇을 보고 판단한 것인지 구체적으로 되묻자.

비판의 근거가 타당한지 반드시 확인해야 부당한 평가를 퇴치할 수 있다.

나의 질문에 B의 기세 등등한 태도가 한풀 꺾였다.

나의 질문에 답변할 차례가 되자 그는 본인이 아이템에 대해 잘 모르면서 비난만 하고 있다는 입장을 각성했다. 


B는 팀장으로서의 지위가 내려가는 것 같아 불안해했다.

그는 답변을 회피하며 프린트물에 증언과 전언을 구분해서 체크해달라고 말했다.


내가 먼저 운을 떼고 나서야 아이템을 알아보려는 그의 역량이 무척 부족해 보였다. 

B는 나를 싫어한다는 감정에 휩쓸려 일까지 놓칠 뻔했다.


증언과 전언의 내용도 모르면서 무조건 취재물이 잘못됐다고 주장하는 게 보도국에서 얼마나 어이없는 일인지 알고는 있겠지.

나는 무척 화가 났지만 그간 취재해온 게 아까웠다. 

그래서 시력만 있으면 누구든지 알아볼 수 있게 문제집에 답을 표시하듯이 프린트물에 증언과 전언을 표시했다.

그날 회식이 있었다.

나는 회식 자리에서도 취재를 중단하라는 지시를 어떤 경로로 전달받았는지 B에게 재차 확인했다.


알고 봤더니 그는 그냥 타 부서의 부장이 보낸 메일 한 통을 읽어본 게 전부였다. 

그 메일에는 전언이 많아서 아이템을 완성하기 어렵겠다는 사실과 동떨어진 의견이 허술하게 적혀 있었다. 


B는 부장이 한 말이니까 맞겠거니 하고, 안일하게 대응했던 거였다.

내가 전언을 취재한 게 아니라 B가 부장의 전언을 취재해서 이태껏 열심히 모은 팩트를 잘못 평가했다. 

명백히 그들의 잘못이었다.  

‘그럼 B는 메일만 읽고서 저한테 그런 말을 한 건가요?’

내가 되묻자 그는 차마 맞다고는 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했다.


정작 취재한 당사자에게는 사실 여부를 확인하지도 않았으면서 메일 한 통을 대충 읽고 일을 처리하려고 하다니.

나의 질문은 B가 일처리를 잘못했다고 에둘러 지적한 것과 다름없었다.


타 부서의 팀장도 분명히 증언이 많다고 말했는데 일이 이상하게 돌아갔다며 부장의 결정을 의아해했다.

부장의 판단 미스였고, B가 느슨한 마음으로 그 판단 미스를 그대로 흡수한 게 잘못이었다.

나는 증언을 밑줄로 표시한 취재 기록물을 다시 B에게 주었다.

피해자들의 증언이 대부분이었고, 증언이 구체적이고 일관된 내용이라서 신빙성도 있었다.

물론 증언을 다 녹취해두었기에 증거도 충분했다.   


뒤늦게 아이템을 제대로 파악한 B는 욕심이 난듯했다.

갑자기 타 부서와의 협업을 없던 일로 하고, 우리 팀의 이름으로 이 아이템을 방송하자고 말했다.

이후에도 나는 여러 경로를 통해 추가 피해자를 찾았고, 결정적인 사건을 알릴 제보자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사히 이 사건을 보도할 수 있었다.


방송에 나간 뒤 시청자의 반응도 좋았다.

이 사건이 방송이 된 후 사람들의 공분을 산 회사의 핵심 관계자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심지어 우리 팀은 이 취재 건으로 회사 내에서 상까지 받았다. 


만약 내가 부장이나 팀장의 판단에 문제제기를 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들의 비판에 내가 마냥 수긍했더라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어렵게 취재에 응해 피해사실을 증언한 사람들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피해자들을 설득하고, 그들의 증언을 끌어내고자 여러 차례 인터뷰했던 나의 노력도 물거품이 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 회사에서 불의한 일들은 반복되었을 것이다.

B는 왜 제대로 취재를 안 했냐고 나를 지적했지만, 정작 이 아이템을 똑바로 취재하지 못한 건 B였다.

나는 나를 피하던 B를 회의실로 불러냈고, 그가 알맹이 없는 지적을 했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B는 내가 그의 비판을 비판한 것을 계기로 아이템을 자세하게 숙지할 수 있었다.

급기야 내용이 괜찮다고 판단한 그는 아이템을 인터넷용이 아닌 뉴스 보도용 취재물로 제작하기로 노선을 틀었다.


이렇듯 비판을 수용하기 전에 그 비판의 근거를 되짚을 때, 가품 비판을 거를 수 있다.

가품 비판을 비판할 때 새로운 기회가 찾아오고, 그 기회로 역전을 노려야 한다.

그럴 때 모두에게 유익이 된다. 

B도 자신이 잘못 판단했다는 걸 알았고, 타 부서의 부장도 자신의 의견이 틀렸다는 걸 인지할 수 있었다. 

나도 취재한 보람이 있었고, 피해자들도 그 보도로 피해사실을 공론화할 수 있었다. 

비판을 받을 때 우리는 두 갈래의 길에 선다. 

비판을 그대로 수용할 것인지, 비판을 받아들이기 전 비판을 점검할 것인지 두 가지 선택지를 앞에 두게 된다. 


중요한 건 비판을 받아들인 후에 다시 비판을 반박하기란 어렵다는 것이다. 

세상은 겉으로 보이고 들리는 게 전부다.  

다시 말해, 내가 소리 내어 말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나에 대한 비판과 지적을 그대로 믿어버리기 십상이다.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말로 표현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게다가 내가 지적받는 상황에서 당황스러운 감정을 눌러가며 논리적으로 비판을 비판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가능한 일이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비판을 받는 찰나 단전에서 큰 힘을 끌어모으자. 

비판자에게 비판의 근거가 무엇인지 자세하게 인터뷰하자.

만약 그 비판자가 제대로 이유를 대지 못하면 이제 우리가 그에게 펀치를 날릴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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