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마음만 먹으면 모든 지구인들과 행복하게 소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꽤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 친구를 만들었다.
친구를 사귀는 가장 큰 비결은 밝은 에너지였다. 나는 잘 웃고 쾌활했다. 내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즐겁게 하려고 애썼다. 광대가 되어도 좋았다. 주고받는 농담 중에 은근히 내가 낮은 위치가 되어도 몇 번 참을 수 있었다.
왜냐면 나는 사람의 마음을 얻고 싶었으니까. 약간 손해보고 상대와 친해지는 게 안 친해지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열린 마음으로 먼저 다가갔다. 내가 호의로 대하면 남도 호의로 답할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누군가를 알아가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참 나는 사람을 좋아했다.
어떤 이들은 적극적으로 친해지려는 나를 부담스럽게 여겼다.
'너는 꼭 인터뷰하는 사람 같아.' 대학교 앞 버스정류장에서 B가 말했었다. 아직 B와 친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연히 만났을 때 친해질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겼다. 그래서 대화를 이어가려고 그의 신변에 관한 질문을 했었다.
그런데 B에게는 누군가의 질문이 부담이었다. 얼마 전에 B는 화장실 거울 앞에서 머리를 정돈하며 인간관계가 시간낭비라고 건조하게 말했다. 그는 사람한테 여러 번 데었는지 대인관계에 회의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해맑게 다가가자 오히려 뒷걸음을 친 것이다. 적극적인 사람일수록 그는 더 멀어지고 싶어 했다.
하지만 찡그린 사람보다 웃는 사람이 환영받는 법이다. 호의를 힘껏 드러낸 나의 대인관계는 선순환이었다. 사람을 만나 농담을 건네며 깔깔깔 웃는 게 행복했다.
고등학교 때도 반마다 돌아다니면서 친구를 사귀었다. 재수하던 시절 같은 학원에 다녔던 사람들과 같은 대학교에 입학했었고 여전히 친하게 지냈었다. 친구의 친구가 곧 나의 친구였다.
나는 친구들을 웃기는 게 좋았다. 그들이 나를 재밌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길 원했다. 그럼 그들이 나를 더 좋아할 테니까. 심지어 나의 개그 타율은 높았다. 10개의 개그를 던지면 8개는 터졌다.
그들은 나의 미소에 늘 반갑게 화답했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은 적었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많았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싫어하는 이유는 다양했다.
나의 말투가 단정적이라는 이유로, 내가 교회에서 임원이 됐다는 이유로, 나의 농담이 과하다는 이유로, 내가 고민하는 내용이 거슬린다는 이유로.
중요한 행사 때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적절한 위로를 해주지 못했다는 이유로, 일을 제때 못한다는 이유로, 처음 회사에 입사했다는 이유로, 서운하게 말했다는 이유로.
그 밖에 여러 가지 까닭으로 사람들은 나를 거절하고 미워했다.
처음에는 나를 싫어하는 인간들을 보며 당황했다.
속마음이 뻔히 보이는 못된 행동을 하는데, 애써서 좋게 해석한 적도 있다. 인정하면 마음이 아프니까.
설마 저 사람이 이렇게까지 날 싫어할까 싶기도 했다. 나는 그 사람에게 호감이 있었으니까. 그 사람이 나를 미워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미움받는 이유를 깊이 곱씹지 않고, 어떻게 하면 배타적인 그들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허겁지겁 고민했다.
나는 공들여 호의를 표현했다. 더 많이 웃고 배려했다. 언젠가 나의 진심이 그들의 딱딱한 심장을 녹일 거라고 여겼다, 순진하게.
하지만 이상적인 예상은 비켜갈 때가 많았다. 나의 호의를 그들은 곁눈질로 힐끗 한번 볼 뿐이었다.
그들은 나의 따뜻한 의지를 하찮게 인식했다.내가 웃을수록 그들은 더 싸늘해졌다. 더 무례해졌다. 더 잔인해졌다. 나의 친절을 경험할 때 그들은 나를 더 싫어하게 됐다.
교회에서 알고 지냈던 동생 D는 나를 싫어했다. D와 친하지 않았지만 먼 사이도 아니었다. 나는 그에게 화를 낸 적도 없었다. 깊은 대화를 한 적도 없었다. 그래서 그가 나를 미워한 이유를 정확히 모른다. 혼자 추측할 뿐이다. 그가 속마음을 말하지 않았으니까.
나는 D를 조심스럽게 대했다. 오래전부터 알아온 동생이라 잔정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내가 D를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교회의 모임을 이끄는 리더였다. 그를 대할 때도 리더로서의 책임감이 발동했다. 이 교회에서 교인이 정 털리지 않도록, 좋은 기억을 갖도록 리더는 노력해야 하니까.
외국으로 선교를 간 적이 있다. 그때 D와 그의 친구들도 함께 갔다.공공장소에서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있든 말든 나에게 냅다 소리를 지르며 신경질을 냈다. 옷가게에서 같이 옷을 고르고 있었는데, 걔가 왜 고함을 쳤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교회 사람들과 윷놀이 게임을 하는데,우리 팀이 D가 속한 팀의 말을 몇 차례 잡았었다. 그리고 우리 팀이 꼴찌를 한 것으로 게임이 끝났다. 그런데 갑자기 D가 내 옆에 서 있던 E에게 다가가 소리를 지르며 성질을 부렸다. 타깃은 E가 아닌 나였다.
D가 선택한 공격 스킬은 'A에 대한 욕을 E에게 해서, 옆에 있던 A에게 모욕주기'였다. 그 순간만큼은 E가 D에게 이용당했다. 그는 우리 팀이 말을 잡은 게 분했던지 결국 심은 대로 거두는 법이라며 나를 비난했다.
내가 잘못한 건가. 게임일 뿐이지만 그래도 인정상 한 번쯤은 D팀을 봐주는 게 맞는 걸까. 그럼 반대로 D팀은 우리 편 말을 잡을 기회가 생겼다면 안 잡았을까. D는 여러 사람 앞에서 적극적으로 나를 망신시키곤 했다. 그런 아이가 정말 내가 속한 팀의 말을 내버려 둘까.
어떤 상황이든 내가 개입하면 D는 고조된 감정을 내비쳤다. 그는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스무스하게 넘기지를 못했다. D는 제멋대로 굴었다. 내가 금을 밟았다고 이야기해주지 않자 그는 막 나갔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이 차이도 얼마 안 나는데 동생이라는 프레임 때문에 내가 D의 실체를 외면했던 것도 같다. 좀 철없을 뿐 착하다고 그를 미화했다.
그가 다른 사람들한테는 친절한 모양이었다. 왜냐면 D가 가끔씩 교회에 친구를 데려왔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나한테 하듯이 별나게 굴었다면, 그 사람이 교회에 올리가 없었다. D는 유독 나를 마크했다. 그는 내킬 때마다 신나게 부정적인 언변으로 나를 찔러봤다.
D는 자신이 무뚝뚝하고 시크한 캐릭터로 알려지길 원했다. 그는 소위 센 캐릭터로 자신을 치장했다. 험한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한 D의 생존법이었다. 친구들도 그의 이미지 놀이에 합류해줬다.
그 캐릭터 때문에 나를 향한 그의 진심이 가려졌다. D는 본인의 성격 때문에 나에게 공격적인 게 아니었다. 그는 나의 말과 행동을 하나하나 보다가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기다렸다는 듯이 냉큼 손가락질했다. 나를 싫어했기 때문에.
그때 D는 내가 아껴야 마땅한 동생이었다. 놀이터에서 남의 그네를 뺏어 타는 식으로 노는 인간일지라도, 내가 일관된 태도를 유지하면 그가 마음을 돌릴 거라 막연하게 믿었다. D의 온갖 구박에도 불구하고, 내가 친절함을 버리지 않는다면, D도 언젠간 내 진심을 알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때는.
D는 어른들의 보호 아래 특별한 제약 없이 자라 온 것 같았다. 유학, 골프 등 꽤 돈이 드는 일들도 그가 마음만 먹으면 경험할 수 있었다. 마치 부잣집 딸내미 같았다. 그럼 마음고생을 크게 해 본 적이 없어서 저렇게 오만방자하게 구는 건가. 아니다. 그건 이미지일 뿐이니까. 유복해 보이는 것은 겉모습이다. 그리고 돈의 크기가 행복의 크기와 반드시 비례하지 않는다. 부자도 죽는 세상이다. 또 풍족한 환경에서 자랐다고 인성이 삐뚤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는 자신의 행동을 누군가에게 제지받으며 자란 것 같지 않았다. 그럼 지나친 자율이 D의 태도에 안 좋은 영향이라도 준 걸까.
아니다. 성장과정을 내가 면밀히 지켜본 것도 아닌데 그가 평탄히 살았다고 확신하기는 좀 그렇다.
물론 D에게도 내가 모르는 아픔이 있을지 모른다. 그가 아픔이 있다고 해도,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은 D에게만큼은 낭설이었다.
혹시 D는 좋아하는 사람들한테는 잘하지만, 싫어하는 사람들한테는 못되게 구는 걸 즐겨서 저러는 걸까.
그는 자신의 남자 친구가 안 좋은 모습을 보이면, 그때부터 그 친구를 본격적으로 무시하기 시작한다고 자랑스럽게 떠들었다. 그는 누군가를 한 번 미워하면, 그 미움을 표현하고 싶어 안달복달하는 성격인 걸까.
그럼 나를 그렇게까지 싫어하는 구체적인 상황이 있었을 텐데. 나는 그에게 딱히 불친절한 적도 없었다. 늘 그에게 웃으며 인사하고, 젓가락으로 케이크를 집어주는 그의 소소한 호의를 고맙게 여겼는데.
혹시 내가 그의 공격에 반응하지 않았던 게 문제였나. D는 나에게 타격을 주고 싶어서 발버둥을 쳤고, 나는 그런 공격에 너무 무던했다. 뾰족한 그의 태도를 감내하고 웃어주는 건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행동이었나.
예전에 D가 중얼거리듯 '언니는 말투가 너무 단정적이야.'라고 말했다. 글쎄, 내가 그랬나. 그럼 나의 말투 때문에 내가 옷 고를 때도, 농담할 때도, 의견을 낼 때도 무례했던 거야? 그래서 내가 아무리 잘 대해줘도 선을 긋고 째려봤던 거야?
글쎄,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해하고자 노력한다면 말이다. 원래 사람을 싫어하는 데 거창하고 대단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다. 말 한마디에 자존심이 상하고, 눈빛 하나에 껄끄러울 수 있는 거다.
작은 이유로 사람을 싫어하는 게 타당한 일이라고 치자. 그럼 나도 D에게 소리 지르고, 화를 내도 될까? 나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는 거니까. 하지만 내가 D를 그렇게 대한다면, 그는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설마 D는 교회에 대한 불만을 나에게 분풀이한 걸까. 그러기에는 교회와 깊이 연관된 교역자를 D는 무척 좋아했다. D는 그 교역자가 다른 교회로 떠났을 때,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
D는 미움을 똘똘 말아 내 옆구리를 찔렀다. 나는 함부로 마음의 가시를 휘두르는 그를 내버려 뒀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난처했다. 그가 나에게 고함을 치며 버럭버럭 따질 때 그의 친구들도 말리지 않았다. 다만 D가 없을 때 걱정스럽다는 듯 나에게 물어볼 뿐이었다. '언니, D가 그러는 거 괜찮아?'
안 괜찮다. 안 괜찮으니까 지금이라도 말을 하는 거다.
교회에서만큼은 조용했던 내가 어느 날부터 본의 아니게 앞에 나서는 일이 많아졌다. 우리 교회는 청년부에 사람이 많지 않았다. 이런저런 이유로 한 번 청년부 회장이 됐고, 모임도 이끌게 됐다. D는 내가 감히(?) 교회의 리더로 활동하는 게 불쾌했을 수도 있다.
D는 내가 수동적이고, 한없이 웃는 사람이라고 착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과연 이 세상에 수동적인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나는 그런 편이 아니었다.
그리고 대부분 사람들은 주도적이지 결코 수동적이지 않다. 자기 의견을 밝히고 자기 의지대로 행동하며 산다, 누구나. 누구에게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내가 나의 생각과 의견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시작하자 그는 이전에 나를 봤던 관점을 바꿔야 했다. 교회 의자에 앉아서 사람들의 말에 판단하지 않고 웃으며 끄덕이는 모습은 그의 편견이 빚어낸 허상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나를 리더로 인정하는 게 싫었을 수 있다. '언니가 무슨 자격으로 나를 이끌려고 해?' 어쩌면 D는 그런 말을 하고 있던 게 아니었을까.
원래 모든 현상에는 오로지 하나의 이유만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열거한 이유 중에 두세 가지가 섞였을 수도 있다. 물론 내가 아직 모르는 제3의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때문에 곤란했다. 그리고 일부 원인은 나에게도 있었다. 나는 그와 잘 지내고 싶어 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했다. 대놓고 D가 나를 손가락질하는 진짜 이유는 당연히 내가 싫어서다. 미움의 이유가 무엇이든 계속 매몰차게 대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를 돌아보려고 한 게 문제였다.
내가 교회를 옮긴 뒤에도 D는 연락 한번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내가 사라져서 속이 시원했을까.
회사에서 나는 F와 친했다. 나는 그에게 차를 종종 샀다. 돈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오히려 나는 남들에게 차 살 돈을 월급에서 미리 떼어놓기까지 했다. 내가 호의를 표현하는 방식 중 하나가 차를 사는 거였다.
그런데 그 차를 마시다가 사달이 났다. F는 차를 마시면서 집에서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의 비전에 대해 좋은 전망을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래도 사회경험을 위해 이 일을 좀 더 해보는 게 좋지 않겠냐고 그가 나에게 되물었다.
같은 직종에 있었던 나는 이 일에 대해 밝은 전망만 한 건 아니어서 좀 그렇다는 식으로 답했던 것 같다. 그때 F의 표정이 굳어졌다. 그는 뒤로 물러나면서 한 마디 했다. '왜 그래요?'
나의 답변이 그의 기대에 어긋난 것 같았다. 차를 다 마시고 같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그의 표정이 안 좋았다. 이후 F는 내가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태도를 바꿨다.
그는 이전처럼 나에게 적극적으로 말을 걸지 않았다. 일부러 툭툭 기분 나쁘게 건드리기 시작했다.
내가 컴퓨터에 블루라이트 차단 필름을 붙여서 눈이 아프지만 건조하지는 않다고 말했다. F는 내 말을 듣고, 다짜고짜 내 말이 말이 안 된다며 비웃었다.
컴퓨터 화면 빛 때문에 눈이 아프기는 한데 이전처럼 눈도 못 뜰 정도가 아니어서 한 말이었다. 말이 안 된다는 그의 말이 말이 안 됐다. 그냥 F는 나에게 시비를 걸었다.
그리고 그는 본인이 돌직구를 던지는 편이라면서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식으로 몸집을 부풀려 홍보하기 시작했다.
우리 회사는 타회사와 운동경기를 해서 진 적이 있다. 회식자리에서 F는 상사에게 이 회사가 최약체 아니냐는 당황스러운 질문을 했다. 그런데 '최약체'라는 질문이 살짝 무례한 말이었다. 그리고 최약체까지는 아니었는데. 누군가가 '너 돌직구구나.'라고 살짝 잘못을 짚어주었다.
그런데 F는 그 말의 진위를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는지 그 뒤부터 자신을 돌직구 캐릭터로 몰고 간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그가 귀엽긴 했다.
어쨌든 그는 회식 때도 일부러 나와 다른 테이블에 앉고, 밥을 먹을 때도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내가 성의껏 무언가 물어봐도 그는 퉁명스럽게 '몰라요.'라고 말할 뿐이었다.
나는 차를 마시면서 내가 한 말 때문에 감정이 상했냐고 물어볼 여유도 없었다. 무조건 관계를 회복하려고 애썼다. 문제는 내가 웃으며 말을 붙일수록 F가 짜증을 낸다는 거였다.
처음에는 한두 번 그러더니, 점차 만성적으로 신경질을 부렸다. 내가 선을 긋지 않자, 아예 그는 자리에 누워서 칼춤을 췄다.
그런 와중에 나는 판단 미스를 하기도 했다. 상사가 맛있는 걸 먹으라고 우리 팀을 배려해 카드를 준 적이 있다. 그래서 F와 외식을 했다. 그럴 필요 없는데, 나는 우리가 온 식당이 너무 비싸다고 한 마디 했었다.
그 말을 들은 F가 '그럼 우리 다른 식당 갈까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비싸다고 해봤자 얼마나 비싸겠나. 내가 무심결에 한 말이었다. 안 해도 되는 말이었다. 옮기자고 물어본 걔도 웃겼고, 그럼 옮기자고 한 나도 웃겼다.
이후에도 F는 또 다른 일로 나에게 감정적인 분풀이를 했다. 대낮에 길을 가다 물바가지를 쓴 듯한 상황에 나는 잠시 자리를 비웠다. 내 옆자리에 그가 앉은 구조여서 같이 있는 게 순간 불편했다. 얼마 후 돌아온 나를 보더니, 그가 슬슬 내 눈치를 봤다.
나는 그의 마음을 돌리려고 심지어 SNS 친구 신청까지 했었다. F와 이대로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소중한 관계성을 잃고 싶지 않았다. 흔쾌히 친구 신청을 받은 그는 어느 날 보란 듯이 내가 믿는 종교에 대한 험담을 누군가의 피드 댓글에 적어놓았다.
사실 F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가까이하는 편이 아니었다. 그나마 나에게 마음을 열던 그였는데, 나의 한마디 말에 그의 마음이 닫혔다. 나는 그 지점이 속상했다.
선의로 시작한 관계도 실타래처럼 엉켜 안 좋게 끝나는 것.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마음 아픈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가 생기는 것. 인간관계의 특성이다.
내 마음대로 안 된다. 그들과 잘 지내고 싶어 할수록 그들은 더 못되게 굴었고, 난 더 우스운 사람이 됐다. 그들이 나를 푸대접하는 게 언제부터 당연해졌다. 당연한 건 절대 아닌데 말이다.
나의 문제점은 모두와 잘 지내고 싶어 한다는 거였다. 내가 모든 사람의 기준에 맞출 수도 없고, 맞출 필요도 없다.
내가 부족한 경우도 있었고, 그들이 부족한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상대가 나를 거절한다는 생각에 무척 당황했다. 그래서 상황을 수습하려고 진위 여부도 가리지 않은 채 무조건 나를 깎아서라도 그들과 친해지길 원했다.
그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나를 존중하지 않았다. 나는 무리를 해서 그들에게 맞추려 했지만 그로 인해 얻는 유익이 없었다. 나에게 서운함이나 불만이 있었다 해도 지속적인 푸대접에 대한 정당화가 될 수는 없다.
사실 사람을 싫어하는 데는 보통 이유가 있다. 말 한마디에 기분이 나쁘고, 작은 사건 하나로 단짝과도 멀어질 수 있는 법이다. 그리고 일일이 기분 나쁜 걸 말하는 것도 용기가 필요하니까, 아예 말없이 멀어지는 경우도 많다.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는 거다.
그러나 나는 그 상황을 인정하지 못했다. 회복할 수 있다고만 생각했다. 언젠가 내가 쏟아부은 정성이 빛을 발할 거라고 믿었다.
그런데 인간관계는 1+1=2 가 아니다. 친해지려는 노력도 사람을 봐가면서 해야지, 무조건 나의 마음을 투자한다고 그대로 돌려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
마음이 비우니 평안이 찾아왔다. 여유가 생겼다. 한 발짝 멀리 떨어져서 사람을 관망하니, 무슨 말을 들어도 크게 흔들리지 않게 됐다. 타인의 평가 한 마디 한 마디에 매달려 자괴감에 빠지지 않게 됐다.
무조건적으로 친해지려고 할 게 아니라, 내가 상대와 자연스럽게 소통하는 게 가능한지가 더 중요했다. 내 마음이 더 중요했다. 지나치게 자기 검열을 해야 하고, 일방적으로 한쪽이 기분을 살피는 관계는 오래가지 못한다. 또 오래가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친절한 태도를 보인다고 상대와 친해지는 것도 아니다. 잘 대해 줄수록 타인은 기대하게 되고, 높은 기대는 결국 실망으로 귀결될 때가 많다.
또 친절함으로 심리적인 거리를 급하게 좁히면 서로 부담스러워진다. 적당한 친절, 적당한 거리두기가 필요하다. 친절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친절한 사람에게 그만큼 되돌려줘야 할 것 같아 부담이 된다. 친절한 사람만큼 친절하지 않은 자기 자신을 보며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한번 더 부담스러워진다.
내 태도의 주된 정서가 친절함이라면, 상대는 친절한 나를 의심할지 모른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걸 알아버린 성인은 이유없이 친절한 사람을 경계한다. 선의임에도 불구하고 상대는 나의 진심을 왜곡해서 해석할 수 있다.
음식에 맛소금을 뿌리는 것처럼 친절해야 한다. 살짝 친절하고, 담백하게 친절하자. 그래야 그 친절이 더 가치 있어 보인다. 친절해지기 전에 나 자신을 먼저 챙기자. 나를 존중해야 남도 존중할 수 있다. 그 누구도 나보다 우선이 될 수 없다. 내 자존심을 깎고 희생해서 가공된 친절은 친절한 사람도 친절을 받는 사람도 지치게 할 뿐이다.
사람마다 기질이 달라서 같은 말을 들어도 누구는 기분이 나쁘지만 누구는 아무렇지도 않다. 정서의 결이 서로 너무 다르면 대화할수록 어긋난다. 서로 공감이 잘 안 되니, 억지로 이해하려 드는 게 오히려 스트레스다.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고, 사람 보는 눈을 길러서 더 좋은 사람을 찾아가야 한다. 지나가버린 사람에게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한다. 인연은 거기까지였고, 인간의 힘으로 붙들 수 없어서 멀어진 거다. 멀어진 원인이 나의 잘못이든, 타인의 잘못이든, 오해이든 말이다.
무엇보다 내가 먼저 좋은 사람이 되고자 노력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너무 애쓰지는 말자. 나를 노려보는 타인에게 시간과 에너지를 최대한 적게 투자하자. 나의 일관된 호의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나를 용서하지 않거나 오해를 풀지 않는다면, 적당한 시점에 관계를 포기하는 게 옳다.
모래를 잡으려고 주먹을 움켜쥘수록, 그 모래는 손가락 사이사이로 빠져나간다. 모래를 최대한 많이 움켜쥐는 유일한 방법은 주먹에 힘을 빼는 거다.
그럼 손에 가득히 채워진 모래의 따뜻함과 서걱거림이 느껴질 거다. 그래서 더 오랫동안 그 모래를 통해 행복한 기분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여전히 나는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고,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한다. 내가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려고 노력하지 않는 이유는 사실 진짜 친해지고 싶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