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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스트는 불안함을 잠재우려고 OO을 이용한다

안 친한 사람이 인생 조언을 건넬 때 딱 잘라 거절하자

나르시시스트에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 특히 그는 인긴 관계에서 남을 깎아내려서 자존감을 얻는다

나르시시스트는 교만하다. 

교만의 특징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자아성찰을 하지 못한다. 


자신을 돌아본다는 것은 과오를 인정하고, 스스로에게 개선을 약속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그동안 미처 몰랐던 결핍된 자아와 대면한다. 

그리고 나르시시스트는 그러한 자신과의 진솔한 조우를 힘들어 한다. 

수치스럽기 때문이다.  


게다가 원래 인간은 타인에게는 엄격하면서도 자신에게는 한없이 관대한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런 방어적인 마음을 내려놓고, 자기반성의 길로 나아간다면 더 나은 사람이 될 것이다.   

나르시시스트가 조직에서 도태되는 이유는 독불장군처럼 행동하기 때문이다. 모든 업무의 과정에서 자신은 잘했는데 타인이 잘못해서 일이 어그러졌다는 궤변을 펼친다

나르시시스트는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더 독선적이고 폐쇄적인 사람이 되어 간다. 


사회적 지위에 걸맞은 성품과 역량이 너무 부족한데, 다른 사람들의 도덕성을 일을 삼아서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혹은 자기중심적인 성격 탓에 손절을 잘 당하는 자가 타인에게 인간관계에 대한 조언 비슷한 걸 하겠다고 난리를 친다. 

 

나르시시스트는 타인의 눈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이 어떨지 늘 신경쓴다. 

그러면서도 도덕적으로 하자가 있는 행동을 반복한다. 

그의 자의식은 무척 비대하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을 쉽게 무시한다. 

습관적으로 타인을 폄하하고 막말을 한다.


나르시시스트는 어릴 때 수련회장에서 있을 법한 조교 흉내를 낸다. 

사소한 일에도 그런 것도 모르냐고 타박하거나 함부로 훈계하는 것이다. 

그는 안다 혹은 모른다의 개념에 집착하는 편이다.  

그런데 원래 무지한 사람이 매사에 아는 척을 하는 법이다.  

 

그러다가 나르시시스트는 결국 사람들에게 인심을 잃는다. 

자의 반 타의 반 홀로 남겨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문제의 원인을 모른다. 

대신 남 탓을 한다.  

나르시시스트는 윗사람 앞에서 기가 막히게 오만을 감춘다. 서열에 따라서 오만함을 감추고 공손한 척하는 게 나르시시스트의 특기다. 누구 앞에서 두 손을 모으는지 스스로 알 거다

나르시시스트는 서열에 목을 맨다. 

회성이 있다면 어느 정도 서열에 신경쓰기 마련이다. 

윗사람에게 더 많이 웃고, 아랫사람에게 더 많이 찡그리는 사람들은 수두룩하다. 


하지만 나르시시스트는 해도 해도 너무할 정도로 행동이 극단적으로 갈린다.   

나르시시스트의 태세 전환은 역겨울 정도다.   

윗사람에게 하염없이 약해지고 비위를 맞추려고 꼬리를 살살 흔든다. 

그러면서 경쟁자 혹은 낮은 직급을 가진 사람들을 괴롭히려고 고민하고, 적극적으로 행동에 옮긴다. 

성격이 원래 욱한다는 덧붙이면서 말이다. 

분노조절이 힘들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치유법은, 그들을 마동석 앞에 데려가는 것이다. 


나르시시스트의 세계에서 동등한 관계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위 아니면 아래로 사람을 나누고, 그 프레임 안에서만 논다. 

중간지대가 없는 거다.

자신보다 서열이 높으면 나를 빛나게 해 줄 것이고, 자신보다 서열이 낮으면 비난으로 짓눌러서 나를 빛나게 해 줄 거라고 나르시시스트는 계산한다

그 세계에서 나르시시스트와 비슷한 힘을 가졌거나 동등한 힘을 지닌 사람은 없다. 

자신과 비슷하거나 같은 위치에 있는 경쟁자가 있다 해도, 그는 그런 사람을 괴롭혀서 미끄러뜨리려고 노력한다.  


나르시시스트는 '저 사람은 나보다 못한 사람'이라는 틀에 최대한 상대를 욱여넣는다. 

그 과정에서 타인을 구기고, 찌그러뜨리고, 납작하게 누른다. 

그의 의식에서는 자신과 동등한 존재가 없는 것이다. 

있어도 없다. 

아니, 없어야 한다.

나르시시스트와 대화하면 벽 보고 말하는 것 같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신만의 세계를 건축하고 그 안에서 산다. 최고인 나를 떠받드는 사람들이라고 타인을 인식하기에 대화가 어긋난다

어차피 나르시시스트가 만든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나르 한 명이다.

 

나르시시스트 한 명이 대통령이고, 국무총리이고, 시장이고, 구청장이고, 국회의원이고, 국민이다.  

물론 나르시시스트가 만든 세계에서만 통하는 논리다. 

왜냐면 나르시시스트의 왕국에는 나르 혼자만 산다. 

나르시시스트의 주장을 가치 판단하는 사람이 없다. 

있어도 없다. 

어차피 나르가 듣지 않기에, 있어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평생 나르시시스트는 정신적 고아다. 

너른 들판에서 혼자 풀을 뜯는 정신적 거지다.

두 명이 시소에 타면 한쪽은 내려가고 한쪽은 올라간다. 나르시시스트는 시소게임을 즐긴다. 내가 빛나기 위해서 남을 어둠 속에 가둬야 한다. 비난과 훈계를 하는 나르의 심리다

나르시시스트는 동등한 위치에서 대화하는 대인 관계를 힘들어한다. 

타인과 동등하게 지내면 자신이 밑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본인이 푸대접받을 사람이 아닌데 상대가 뭘 몰라서 하대한다고 느끼는 것이다. 

아니면, 나르시시스트 본인의 성품이 훌륭해서 타인의 수준으로 기꺼이 내려가 상대한다고 착각한다. 

물론 상대는 감정과 생각을 자연스럽고 솔직하게 나눌 뿐인데 말이다. 

 

이렇게 나르시시스트의 태도는 현실감각이 떨어진다. 

모든 상황을 병든 자의식으로 재해석한 덕분에 점점 더 병들어 간다.

자신이 시혜적으로 지혜와 지식을 베푼다는 망상이 나르시시스트에게는 너무 당연한 명제다.


까탈스러운 나르시시스트가 누군가에게만 자애롭게 행동한다면, 그 태도의 이면에는 이런 망상이 존재한다. 

그래서 나르와 대화하는 상대가 사람에 대해 기민하다면 묘하게 불쾌해지는 것이다. 


저 사람이 왜 나에게 뭔가 베푸는 것처럼 행동할까? 뜬금없군. 

마음이 건강한 사람은 이런 생각이 들게 되고, 결국 나르시시스트에게 큰 불편을 느낄 것이다. 


나르시시스트가 원하는 친구상은 정해져 있다. 

본인에게 숙이고, 훈계를 들으며, 못된 말을 들어도 실실거리는 사람이 나르시시스트의 이상형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지적을 받으면 큰 상처를 받으면서, 본인이 남을 훈계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나르시시스트는 사람들을 만나면 본능적으로 이런 생각부터 한다. 

'이 사람이 나의 인생에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 


나르가 자신의 인생 속에서 비서, 하녀, 무수리 역할을 뜻하는 것이다.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전가해도 가만히 있을 만만한 상대를 찾는다.

나르는 사람은 인격이 아니라 수단이라고 인식한다. 

나르시시스트의 뇌는 인격체를 제대로 인지할 힘이 없다. 

관련 기능을 하는 뇌 회로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인간을 인간으로 이해할 수 없기에 나르시시스트의 인간관계는 피상적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지독하게 자기중심적이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의 마음은 모순과 궤변으로 얼룩덜룩하다. 자신의 잘못은 다 이유가 있고, 남이 잘해도 잘못했다고 우긴다

나르시시스트는 '이 사람도 나보다 못해, 저 사람도 나보다 못해'라고 속으로 재빨리 결론 내린다. 

나르는 자신이 더 낫다고 결론 내려야 비로소 편안해진다.

그런 결론을 내리지 못하면, 나르는 불안해한다. 

실시간으로 자존감이 내려간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는 급하게 서열을 정리하고 싶어 한다.

저 사람보다 내가 나은 사람이라는 걸 증명해야 하는 게 나르시시스트의 인생 숙제다. 웃으며 인사하는 나르시시스트가 있다면 다만 타인을 관찰하고 있을 뿐이다

누군가가 나르시시스트에게 웃으며 악수라도 청한다면, 나르시시스트의 뇌에 비상벨이 울리는 셈이다.

해맑게 악수를 청하는 행위는 나르시시스트에게 결투 신청을 하는 것과 유사하다. 

이제 나르에게 숙제가 떨어졌다.

사회성 있는 사람이라면 호감을 주고 싶어 한다. 그래서 웃는 거다. 그런데 나르시시스트에게는 그런 부드러운 태도를 공격으로 인지하는 경우가 많다

당당하고 활기찬 타인이 나르시시스트는 미워졌다. 

타인이 밝게 웃을수록 나르는 솟구치는 미움에 당황한다. 

나르시시스트는 미움을 정당화하려고 타인을 지적하기 시작한다.  

나르시시스트는 본인이 틀린 생각을 안 한다고 굳건히 믿는다. 

사이비도 이런 사이비가 없다. 

나르는 자기 자신이 종교다.

미움도 불합리하고, 미움 때문에 튀어나오는 지적도 불합리하다. 

그러나 나르시시스트의 세계에서 그 모든 감정과 판단은 가장 합리적이다.

나르시시스트는 표정이 없을 때가 많다. 편집증적으로 남의 잘못을 캐다 보니 스스로 와해된 상태다. 스트레스와 긴장감으로 얼굴 근육이 굳어 있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유롭게 말하고 행동하는 타인을 보면 불안해진다. 

상대가 자유롭다는 것은 나르시시스트와 동등한 사이가 될 가능성을 암시한다. 

그 가능성을 나르는 배척 한다.

나르의 뇌에는 작은 시소가 있다. 

그 시소는 무조건 한쪽이 올라가면 한쪽이 내려간다. 

타인이 웃으면 나르가 찡그린다. 

타인이 찡그리면 나르가 웃는다.  

나르시시스트는 의존적이다. 

나르는 남의 피를 빨아먹는 모기다. 

나보다 못한 사람을 내가 잘 개조시키고 있어. 

그게 나르시시스트의 자존감이다. 

그런데 저 사람은 문제가 없다는 듯이 자유롭다면, 나르에게는 뭔가 잘못된 신호다.

나르시시스트는 남을 통제할 때 쾌감을 느낀다. 사람들이 싫어해도 조언이랍시고 자꾸 불쾌한 말을 하는 건 통제감을 느끼고 싶어서다

자, 이제 나르시시스트의 입장에서는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고 그 상황을 되돌려야 한다. 


어떻게? 

지적과 비난으로. 

불평과 불만으로. 

분노와 짜증으로. 

궤변과 모순이 뒤섞인 주장으로 나르는 상대를 불쾌하게 하려고 준비운동을 시작한다.


나르시시스트의 준비운동은 간단하다. 

처음에 상대를 찔러보는 거다. 

이때 상대가 나르의 실체를 아직 모른다면? 

상대는 나르의 지적을 관심으로 해석한다.

재밌는 공놀이를 하려면 바람이 빵빵하게 든 공을 찾아야 한다. 나르시시스트도 자신이 만든 놀이에 최적의 반응을 해 줄 부드럽고 경계심이 없는 인간을 찾아다닌다 

B는 상대를 만난 지 얼마 안 됐는데 이렇게 말한다.

- 나는 나이가 많잖아. 그래서 상대가 기분이 안 좋아도 흔들리지 않지. 그런데 다른 얘들은 (네가 기분이 안 좋으면) 흔들릴 수 있어.

A는 B의 말을 듣고 의아해한다. 


내가 남한테 기분이 안 좋다고 말한 적이 있었나? 

다른 사람들한테 내 얘기를 들은 적이 있나? 

다른 사람들이 나 때문에 힘들다고 한 적이 있나? 

뭘 보고 저러지?

나르시시스트는 조언자 역할을 자초한다. 자꾸 뭘 고치라고 말하는데 실체 없는 잔소리다. 반면 남이 조금만 뭐라고 하면 나르시시스트는 정말 삐진다 

나르시시스트의 말은 암호 같다. 

의미가 있는 것 같은데 알맹이가 없고, 좋은 말 같으면서도 모호하고 추상적이다. 

나르의 지적은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을 보고 말하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배경 설명도 없이 하나마나한 말을 한다.

'너는 기분이 안 좋으면 티나 나네? 그런데 티 내도 돼? 그게 너의 단점 같아.' 

대충 이런 뜻으로 추정하자.

나르시시스트는 본심을 감춘 채 교묘하게 말을 돌려한다. 악의를 들키기 싫으니까 최대한 의도를 포장한다. 그걸 못 알아챌 줄 알고?

여기에서 주안점은 나르시시스트의 화법이다.

첫 번째로 주목할 점은 진짜 하고 싶은 말을 기묘하게 꼬아서 좋은 말인 것처럼 꾸미기 화법이다.

나르시시스트는 '간접적으로' 상대가 감정 컨트롤하는 방식을 비난했다. 처음에 나르가 타인을 건드릴 때, 조언이란 검은 비닐로 냄새나는 비난을 포장해 선물이라며 주기도 한다.

상대가 곧바로 반박할까 봐 나르는 자신에게 보호색을 입힌다. 

감정적으로 지적하고 싶은 본성을 누르고, 비난을 마치 좋은 말인 것처럼 꾸며 타인을 기만한다.

겉만 사탕이지 속은 시멘트라면? 먹지 못하는 사탕일 뿐이다. 결국 사탕이 아닌 거다. 좋은 의도로 한 말이라는 거짓말에 속을 필요가 없다 

두 번째로 주목할 점은 좋은 사람을 피상적으로 흉내내기 화법이다.

나르시시스트는 무조건 상대를 고치고 싶다는 병적인 심리를 감추고, 다른 이들이 힘들어할까 봐 어쩔 수 없이 충고한다는 태도를 취한다. 

뻔뻔하게도 나르시시스트는 이타적인 사람을 태연하게 흉내 낸다.

세 번째로 주목할 점은 나르시시스트의 비대한 자아 끼워 팔기 화법이다. 

나르는 작은 순간조차도 자신을 올려치기 한다. 

네가 기분이 안 좋아도 나는 의연하다는 걸 은근히 강조한다.


조언이라는 허술한 상품에 눈길도 안 가는 사은품을 하나 더 주는 느낌이다. 

물론 나르시시스트의 허세는 거짓말이다.

나르시시스트 광고회사의 광고 모델이 누구겠는가. 그가 하는 말마다 다 자기 홍보인데, 끝까지 그걸 감춘다

나르시시스트의 저 말을 해부해 보자.

정말 A가 기분이 안 좋을 때 다른 사람들이 그걸 알고 눈치를 봤을까? 아니, 애초에 A가 기분이 안 좋을 때가 있었나? 

나르시시스트의 비난은 실체가 없는 경우가 많다.  


망원경을 나르시시스트에게 돌려보자. 

나르시시스트는 감정 기복이 없이 항상 같은 태도를 보일까? 

나르는 기분이 안 좋아도 드러내지 않을까?

나의 언행을 지나치게 간섭하는 사람을 해부하자. 그는 내로남불이며 궤변의 선두주자일 테니까

저런 지적을 했던 B는 동아리에서 사람들과 모임을 진행한다. 

그런데 A 앞에서 B는 사람들이 만나자는 약속을 어겼다며 울었다. 

A는 B를 위로해야 했다.

B는 사람들이 자신의 블로그를 보고, 잘 사는 것 같다고 빈정거렸다며 또 울었다. 

B는 알 만한 사람들이 열심히 블로그를 만든 자신의 노력을 몰라준다며 서러워했다. 

감정을 추스르지 못한 B는 A와의 전화 통화를 서둘러 마쳤다.


나르시시스트는 이렇게 감정을 잘 다스리지 못한다. 

그러면서 활달하고 밝은 사람이 감정을 드러내서 주변인들을 불편하게 만든다는 엉뚱한 지적을 한다.  

나쁜 사람인 나르시시스트는 좋은 사람이라는 페르소나를 쓴다. 습관적인 거짓말쟁이는 자신이 거짓말하는 줄도 모른다. 나르시시스트는 만들어진 페르소나가 본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처음에 물의 온도를 천천히 올리듯 예열부터 하는 나르시시스트도 있지만, 용수철이 튀어 오르듯 곧바로 실체를 드러내는 나르시시스트도 있다.

C는 인터넷 카페에 갑자기 A의 허락도 없이 A의 독사진을 올렸다. 

그런데 A를 지나치게 근접하게 찍은 사진이다. 

이 게시물을 본 D가 그 사진을 내리는 게 좋지 않겠냐고 댓글을 다니, C가 답글을 달았다.


[내가 그렇게 착해 보이니?]

며칠 전에도 C는 A와 둘이 밥까지 먹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해괴망측한 행동을 할까. 

나르시시스트의 행동에는 다 이유가 있다.

나르시시스트의 은밀한 괴롭힘을 안 누군가가 정색한다면? 그는 널 위해서 쓴소리 했다는 거짓말로 자신을 포장할 확률이 높다

얼마 전에 A는 동아리 회장으로 선출됐다.

평소에 C는 A를 조용한 사람으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임원이 된 A는 활달하고, 앞에 나서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C가 A의 겉모습만 몇 번 보고, 차분한 사람이라고 결론지었을 뿐이었다. 

C의 예측이 어긋났던 것이다. 

A가 사람들 앞에서 주도하는 모습이 C는 불쾌했다. 

C는 A를 본인이 이끌어야 마땅한 사람이라고 착각했다. 

혼자서 쾌활하게 활동하는 A의 모습을 보니 C의 자존감이 내려갔다.

나르시시스트의 마음속에서 한쪽으로 시소가 기우는 것이다.  

서열에 집착하는 나르시시스트는 본인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다고 착각한다. 그 망상을 깨뜨리는 인물들은 다 나르시시스트의 적이 된다. C가 A를 적으로 생각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게다가 A가 모임에 참여하는 사람 명단을 몇 시까지 보내달라고 단체 문자를 보냈다. 몇 시까지 명단을 달라고 말한 게 꼭 통제받는 것 같다. 그래서 C는 더 기분이 나빴다.

A를 아랫사람처럼 생각했는데, A가 윗사람처럼 행동하는 것 같아 불만이 생겼다. C는 A가 주제넘게 건방지다고 해석했다. 

늘 남을 통제하려고 애썼던 C였다. 

A가 본인의 통제 영역 안에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아니라는 걸 알았다. 

C에게는 그 사실이 충격이다.

나르시시스트가 교만하다는 사실을 나르시시스트만 모른다. C는 성격이 안 좋다고 누군가가 대놓고 말했을 때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진짜 그런 생각 안 해봤구나

그래서 C는 공격적으로 태도를 바꿨다. 

A보다 더 나은 사람임을 증명하고 싶었다. 

자신이 윗사람이라고 과시하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방법이 A의 독사진을 올리는 거였다. 

이렇게 나르시시스트는 구차하고 치졸한 면이 있다.  

나중에 댓글을 달았던 D는 B가 이상하게 나온 독사진을 올렸다. 

보복은 아니었고, 친하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장난스럽게 사진을 올린 거다. 

C는 그 사진을 보고 표정이 굳었고 불평했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업자득일 때가 많다. 세상의 순리를 무시하는 그는 못되게 굴면 언젠가 보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에 무지하다. 그러다가 된통 당한 뒤에 또 남 탓을 한다

- D는 내가 이상하게 나온 사진을 왜 올리는 거야?

나르시시스트는 은연중에 진짜 의도를 드러낸다.

A의 독사진을 당사자가 보고 기분 나빠하길 C는 간절히 원했다. 

그 사진을 올리며 C는 히죽거렸을 것이다. 

그래서 D가 A의 사진을 내리라고 지적했을 때 C는 정곡을 찔렸다.
 
나르시시스트는 지적받는 일에 취약하다. 

지적을 받으면 동시에 자존감이 푹 꺼지기 때문이다. 

C는 공개적으로 자신이 잘못한 사람이 됐다. 

그는 위축된 마음을 감추려고, 오히려 '내가 착해 보여?'라는 허풍 섞인 물음을 던져 놓고, 허겁지겁 도망가버렸다.  

결국 못된 행동의 대가를 본인의 독사진으로 치렀지만, 어리석은 나르시시스트는 그게 대가인지도 모른다.   

나르시시스트는 불안할수록 더 기세 등등한 태도를 보이려고 한다. 감정을 드러내면 약해 보일까 봐 허세를 부리는 것이다 

A는 처음에 C가 진심으로 사람을 대한다고 생각했다. 

C는 동아리 모임에서 장을 맡았었다. 

모임에서 C는 상대와 친해지고 싶으면 둘만이 아는 비밀을 만들라든가, 언젠가 진심은 통한다든가 하며 열변을 토했다. 

그런 모습을 보며 A는 저 사람이 진지한 성격인가 싶기도 했다.

그런데 비밀을 안다고 다 친해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비밀을 나눈 상대방과 사이가 나빠지면 그 비밀은 약점이 된다. 

 

또 진심이 안 통할 때도 많다. 

C도 A의 진심을 모른 척했으면서 진심은 통한다고 설파했다. 

그냥 C는 제대로 자신을 돌아본 적이 없고, 아직 세상 물정에 순진해서 진심이 통한다는 말에 감격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날수록 허구는 가라앉고, 진실은 부표처럼 떠오르기 마련이다. 

A는 앵무새처럼 이상한 훈계를 반복하는 C의 모습이 부자연스럽다고 느꼈다. 

대화만 하면 묘한 불쾌감이 올라오고, 슬슬 C를 멀리해야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조언을 하는 타이밍, 조언의 내용, 조언을 하는 태도 등 C의 모든 게 어색해 보였다.


대화의 80퍼센트를 가볍고 겉멋 들린 훈계로 채운 의도가 순수하지 않았다. 

언뜻 듣기에는 그럴듯한 충고의 밑바닥에 타인을 통제해 자존감을 채우려는 욕구가 깔려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르시시스트의 밑천이 드러난다. 거짓은 오래가지 못한다. 허구의 인물을 연기하던 C에게 사람들이 이상한 느낌을 받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뭘 많이 아는 척하는 게 나르시시스트의 특기다. 

사실 뭘 잘 모르는 사람들이 충고를 많이 한다. 

충고하는 이유는 딱 하나다. 

나르시시스트는 타인보다 위에 있지 않으면 초초해지기 때문에 자신의 지위를 확인하고자 조언을 던져보는 것이다.

나르는 서열을 올리고자 남에게 충고한다. 

일단 내 말을 듣고 남이 고개를 끄덕거리는 게 나르에게 기쁨이다. 

자존감이 올라가기 때문에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라고 명분을 만든 다음 제멋대로 구는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이타적인 모습을 가장해 남에게 충고하지만 실상 그 모습은 누구보다 이기적이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의 충고는 깊이가 얕고 내용이 부실하다.  

나르시시스트는 누군가에게 조언할 입장이 못 된다. 

뭘 잘 모르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스스로 객관적인 사람이라고 말하길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나르의 거짓말이자 허세다. 그는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에 다각도의 관점에서 상황을 해석하지 못한다

나르시시스트는 특유의 자기 중심성 때문에 세상과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을 하기 힘들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에 대한 지대한 관심 때문에 세상과 타인을 돌아볼 에너지가 없다. 

관심도 없다. 

관심이 없으니까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하지 않으니 인간에 대해 더 무지해진다. 

나르시시스트는 세상과 인간에 대해 그 누구보다 무지하다.

내 말을 들으세요. 왜냐면 나는 객관적인 사람이거든요. 진짜 이렇게 말하는 나르시시스트가 있었다. 물론 사람들은 나르시시스트의 허언을 믿지 않았다

하지만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이 만사를 잘 안다고 자부한다. 

그래서 뜬금없이 자꾸 사람들을 가르치려 든다. 

내가 한 수 위니까 배워보라는 오만이 나르시시스트를 무지의 낭떠러지로 몰아간다.

무지의 낭떠러지에서 나르시시스트는 힘없이 떨어진다. 

아무도 나르시시스트를 붙잡아 주지 않는다. 

나르시시스트가 그저 죄의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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