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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스트가 오버액션을 하는 이유는 OO 때문이다

중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시장 골목을 걷다가 소리를 질렀다

전통시장 거리를 걷고 있었다. 

차와 오가는 사람들이 뒤엉켜 항상 전방을 살피며 가야 하는 길이었다. 

그때 저쪽에서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아이들이 떼 지어 걸어왔다. 

그들은 큰 소리를 냈다. 


'길막(길을 막는 행동의 준말) 하지 맙시다!'

'***(성별이 섞인 욕설)아!'


행인들은 힐끗 아이들을 쳐다봤다. 

익명의 사람들이 아이들을 바라봤다

누군가와 싸우지 않는 이상 사람들은 공공장소에서 큰소리로 쌍욕을 하지는 않는다. 


언뜻 들으면 친구들끼리의 대화인지 특정 행인에게 시비를 거는 건지 불특정 다수를 향한 불만인지 모호했다. 

그들의 말에 주어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기들끼리 대화하는 게 맞다면 사람들이 쳐다볼 정도로 소리를 지를까?) 


재밌는 현상은 아이들의 태도였다. 

대로로 뻗은 공간이면 좋겠지만 시장은 그렇지 않다. 통행에 대한 불편을 감안해야 한다

첫째, 아이들은 '길막하지 맙시다!'라고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길을 막고 있는 당사자는 아이들이었다. 


한 명이 앞서 걷는 친구한테 한 말이라고 치자. 

그들은 서로 몸을 바짝 붙인 채 몰려다녔다. 

그러다 보니 앞에 선 친구가 길을 막았다고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친구가 바로 앞에 있는데 존댓말로 소리지를 가능성은 낮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들으라는 듯 혹은 들어도 상관 없다는 듯이 길을 막지 말라고 생떼를 부렸다. 


아이들의 통행을 막는 행인들은 없었다. 

사람들은 배려심을 발휘해 타인에게 거리를 두고 있었다. 

시장에서 사람들은 최대한 서로 몸이 닿지 않도록 상호작용을 한다

시장은 북적거린다. 

그래서 컨테이너 벨트 위 물건들이 줄지어 지나가는 질서 정연함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거리는 일방통행이 아니었다. 

시장의 처음과 끝은 도로로 이어져 있다. 

주민들은 물론 차들이 쌍방으로 오간다. 


사람들은 요리조리 갈지자로 걸었다.  

마주 오는 행인들끼리 부딪히지 않도록 비켜가면서 말이다.  


차들도 앞과 뒤로 오는 사람들을 확인하며 천천히 움직인다. 

행인들도 차가 오가는 곳인지라 나름대로 신경 쓰며 걷는다.  

서로 밀착되지 않도록 알아서 비켜간다.  

좁은 길에서 일렬로 걸어가는 사람들과 마주 볼 때 나는 난감하다

그런 상호작용이 오가는 길이다.

그런데 아이들처럼 다섯 명씩 나란히 가로로 줄지어 우르르 걷는다면?

다른 사람들의 통행이 불편해진다. 

아이들은 그걸 정말 몰랐을까. 


길을 막는 빌런은 길을 막지 말라고 고성방가를 한 그들이다. 


둘째, 표면적으로만 볼 때 아이들은 타인의 시선에 불편해하지도 뻘쭘해하지도 않았다. 

학생들은 누군가를 향해 신경질적으로 욕설을 했다.  

아이들이 왜 그랬을까. 무엇을 향한, 누구를 위한 쌍욕이었을까

아이들의 소란스러운 태도에 사람들은 불쾌해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시장에서 흔하게 보는 광경은 아닌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쳐다볼 사람은 쳐다보라는 듯이 기세 등등했다. 


이상할 정도로 시시덕거리며 쌍욕을 하는 그들의 태도는 어쩌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행동의 결과가 아닐까. 


통제당할 만한 행동을 했지만 사람들에게 통제당하지는 않았다.

그들의 엇나감에 사람들은 도덕적 잣대를 들이밀지 않았다. 


어른에게 깊은 상처를 받은 아이들이라면 오히려 그런 상황에서 소소한 승리감을 느꼈을 수 있다.  

아이들의 행위는 인터넷 공간에서 익명으로 악플을 다는 심리와 같았다. 나의 기분이 안 좋으니 비논리적이고 우격다짐 격인 악플로 다른 사람들의 기분을 나쁘게 하는 것

왜 사람들은 아이들의 사리 분별없는 태도에 별 말을 하지 않았을까.

왜 아무도 그들에게 옳은 길을 제시하지 않는가. 


첫째, 그 아이들이 십대이기 때문이다. 


사회는 십대에게 많은 걸 기대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른도 한때 청소년이었다. 

그 마음을 모르지는 않는다.   


물론 그들이 잘못했다.  

누군가가 자신의 통행을 막았다고 느낄 수 있지만 그 정도의 일로 공공장소에서 소리 지르고 욕설하는 행동은 경솔한 거다.   

 

발랄하고 과격한 10대 시기가 어떤지 사람들은 알고 있다.

청소년기에 욕설 한 번 안 해본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10대에게 욕설은 금기가 아니다. 자신의 기분을 분출하는 기호이다. 그들에게 욕설은 과일과 같다. 향긋하고 먹음직한 귀여운 과일

질풍노도를 겪으면 모든 것에 남다르게 반응한다.   


별 것도 아닌 일에 껄렁거린다. 

자기 자랑으로 고통받는 자아를 감싼다.


상처를 받는 게 두려워서 반동형성처럼 일부러 허세를 부린다.   

불특정 다수에게 과도한 분노를 표출하며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내가 센 사람처럼 보이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함부로 대하지 못할 거야. 먼저 주먹을 휘둘러야 해. 어렴풋이 세상의 냉혹함을 알아가는 시기에 인간은 분노할 수 있다

둘째, 아이들의 분풀이 대상이 불분명했다. 


'길막하지 맙시다, ***(욕설)아'라는 비명에 주어가 없다. 


자신들이 지목한 상대방이 모르도록 의도적으로 주어를 제외했나.   

자기들끼리 한 말이니까 굳이 주어가 필요 없었나. 

아이들의 언어 표현력이 부족했나. 


속사정을 다 모른다. 


주어가 누구인지 특정할 만한 근거도 없다. 

따라서 아이들이 원망한 대상은 정체가 명확하지 않다. 


그래서 소년들의 들썩거림이 시끄럽고 무례하다고 느끼지만 자신과는 상관없다고 사람들은 판단할 수 있다. 

'제가 지금 빨간 연기를 피울 테니 저를 바라봐주세요.' 관심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가끔 엉뚱한 방법을 쓴다. 사람들에게 해를 입히는 방식으로 그들은 움직인다

셋째, 사람들은 아이들을 자신이 상대하면 안 되는 무리로 치부했을 수 있다. 


요즘 사람들은 십대뿐 아니라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뚜렷하다. 


공공장소에서 어떤 사람이 사회적 규범을 어기는 행동을 한다.

한 시민이 그런 사람을 통제하지만 오히려 보복성 범죄에 노출되는 등 피해를 겪는다. 

이 시대에 우리는 이런 뉴스를 접하며 살아가고 있다.  

'나는 빌런입니다.' 빌런은 자신이 빌런이라고 얼굴에 써 붙이지 않는다

지적을 받을 때 사람은 상처를 받는다. 


사회적 규범을 어긴 대다수는 진심으로 반성하지 않는다. 

오히려 보복심을 갖는다. 

그래서 지적한 당사자에게 호전적일 수 있다. 

비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어떤 행동을 취할지 모른다.  

 

상대의 잘못을 바로잡는 것보다 스스로를 지키는 게 더 중요하다.  

일시적인 불쾌감을 표출하는 일보다 자신이 더 귀하다. 

우선순위에서 타인의 잘못을 지적하는 행위는 아주 밑단계에 있다.   

위기일 때 사람의 실체가 드러난다. 누군가로부터 공격당할 때 사람은 가장 자신과 근접한 자아를 표출한다

상대에 대한 낮은 기대치 혹은 포괄적 이해.


아이들의 분풀이 대상이 애매모호하다는 판단. 

(욕설의 주인공이 적어도 나는 아니라고 행인들은 여겼을 거다)  


특별한 사유 없이 소리치는 그들을 잠재적 말썽쟁이로 본 관점. 


이런 생각으로 사람들은 아이들의 행동을 유야무야 넘겼을 수 있다. 

나는 그쪽을 바라보지는 않았다. 누군가가 급하게 움직이는 것 같아 고개를 돌렸다

아파트 단지에 들어섰는데 누군가가 마스크를 내린 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사람들이 나타나자 그는 바로 담배를 발로 비벼 끄고, 마스크를 고쳐 쓴 뒤 부리나케 자리를 피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담배를 핀 사람은 아파트 단지에 나타난 사람들을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단지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인기척을 느끼고, 곁눈으로 사람들을 봤던 것이다.  

다르지만 비슷한 면이 분명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시장 속 아이들과 아파트 단지에서 담배를 끄고 가버린 사람. 

이 둘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그들은 한 번도 다른 사람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보다도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고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 

사람들의 관점.

사람들의 평가. 

사람들의 판단.

사람들의 비판. 

사람들의 비난. 


바로 이런 것들 말이다. 

저 사람들을 나를 어떻게 볼까?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가 중요하다. 


누구나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나르시시스트도 마찬가지이다. 


좋은 사람이라고 인정받으려면 남이 나를 '좋은 사람'으로 평가해야 한다. 

사람들의 인식에 '좋은 사람'으로 각인되어야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다. 

나는 어떤 사람을 좋은 사람이라고 여길까

좋은 사람의 조건들 중 하나가 성품이다. 


아무리 훌륭한 업적을 남겨도 사생활이 비도덕적이라면 지탄을 받는다. 


그리고 좋은 평판을 다져온 그의 사회적 명예가 하루아침에 실추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람들은 많은 곳에서 더욱 더 친절하려고 애쓴다. 

인의 평가와 자신의 평판이 서로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르시시스트가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밟는 과정은 좀 다르다. 


좋은 사람이 되려고 그는 다른 방법을 택한다.

나르시시스트는 좋은 사람이 되기 힘들다. 이유는 아래와 같다

나르시시스트는 친구나 배우자를 아랫사람 취급하길 즐긴다.  

그들은 상대를 생각해주는 척하면서 통제하고 무시한다. 

작은 일에 경멸 어린 폭언을 한다. 


그들은 타인보다 윗사람으로 사는 게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르시시스트가 알고 있는 덕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명령조로 호령하며 거들먹거리는 것이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는 끊임없이 거만함을 받아줄 대상을 찾아다닌다. 

누구보다 나쁜 사람이 되고 싶은 나르시시스트

타인이 자신의 똑똑함을 인정하는 것. 


그가 '가르쳐 주세요.' 하며 애교섞인 미소를 보이는 것.


나르시시스트가 패악질을 해도 '죄송해요. 제가 더 잘할게요.'라고 말하는 것. 


나르시시스트가 '머리를 더 조아려. 더 조아려.' 하면 '네, 알겠습니다. 나르시시스트님.' 하는 것. 


유치 찬란하고 비현실적인 나르시시스트의 세계여. 


나르시시스트를 보고 큰 소리로 웃어도 된다. 

나르시시스트를 비웃자. 

다 같이 비웃자. 

나르시시스트의 마음 단면은 씁쓸함 그 자체이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정의가 없다. 그들은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하다

허점이 많은 나르시시스트는 실수도 많이 한다. 

하지만 그는 잘못을 최대한 책임지지 않는다. 

대신 다른 사람들에게 책임전가를 한다. 


'나는 멀쩡한데 네가 문제야. 너 정말 어떡할래?'

그는 이렇게 멀쩡하지 않은 주장을 한다.

 

마음이 건강한 사람은 타인의 호감을 얻고 싶어 한다. 

그래서 친해지고 싶은 사람에게 호감이 될 만한 행동을 한다.

둥글게 말한다. 

칭찬을 한다. 

부정적인 언변을 삼가한다. 

감정을 절제한다. 

자주 웃는다.

덜 찡그린다. 


나르시시스트도 타인의 호감을 얻고 싶어 한다. 

사실 호감보다 추앙을 받고 싶어 한다. 

그러나 나르시시스트는 그런 바램에 걸맞게 행동하지 않는다. 

꽃의 특징은 향기가 있다는 거다. 그런데 나르시시스트는 향기가 없다

나르시시스트는 희생양을 괴롭힌다. 

괴롭히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엄청 괴롭힌다. 

매사에 간섭하고, 통제하며, 비난한다. 

그것도 끊임없이.  

원수가 되고 싶은 건지 의심 갈 정도로. 


소풍을 가는 일행이 있다고 하자.  

소풍 장소로 가는 버스를 간신히 탔다. 

간발의 차로 버스를 놓칠 뻔했지만 어쨌든 골인이다. 


하지만 나르시시스트는 버스 시간을 못 맞췄다고 일행을 구박한다. 


나르시시스트는 일행만 아니면 버스를 일찍 탔을 거라고 한다.

그는 일행 때문에 늦어서 난감하다는 식이다.


그런데 나르시시스트도 늦게 탄 일행 중 한 명이다. 

하지만 버스를 놓칠 뻔한 게 남의 탓인 것 마냥 오기를 부린다. 

그런 다음 나르시시스트는 상대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나르시시스트는 남에게 쓸데없이 반창고를 붙이며 백의의 천사 흉내를 낸다

버스를 놓친 것도 아니고, 버스를 탔다. 

그리고 버스 시간을 정확히 못 맞춘 건 일행 탓이 아니었다.

 

이런 작은 일을 두고 나르시시스트는 남 탓을 한다. 

그들은 실컷 신경질을 부리고 상대를 위로한답시고 태도를 바꾼다. 


나르시시스트는 남에게 허술한 채찍과 누가 먹다 남은 당근을 준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나처럼 똑똑한 사람이 지적을 했어. 

지적을 당한 사람은 처음에는 속상하겠지만 큰 깨달음을 얻을 걸?

원래 몸에 좋은 약은 쓴 거니까. 

나는 나름 희생정신을 발휘해 그에게 가르침을 준 거야. 

바로 버스를 타려면 시간을 맞춰 와야 한다는 걸 말이야.'

나르시시스트는 자꾸 자신이 특별한 생각을 한다고 착각한다. 아주 기본적인 사실도 나르시시스트는 모를 때가 많다

버스 시간을 잘 맞추면 당연히 좋다. 

그 사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런데 나르시시스트는 근엄한 표정으로 단순하고 당연한 명제를 특별히 가르친다고 인식한다. 

인지적 오류와 거대한 착각의 콜라보가 나르시시스트의 뇌 속에 담겨 있다. 


이 시점에서 한 번 더 나르시시스트를 비웃도록 하자. 

그렇게 나르시시스트는 사람을 손바닥에 두고 장난질을 한다.  

사소한 일에 호들갑을 떠는 것은 나르시시스트의 전매특허이다. 


이런 행동을 받아주지 말아야 한다. 


그래 놓고 나르시시스트는 반대 입장이 되면 달라진다. 

누군가가 진지하게 문제제기를 하면 이렇게 시비를 건다.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


나르시시스트에게 묻고 싶다. 

왜 그대는 별 것도 아닌 걸로 수시로 짜증을 내며 심각해지는지. 

버스를 탔으면 다행이라고 생각해도 된다. 나르시시스트는 그 순간을 넘기지 못하고 남 탓을 한다

만약 입장을 바꾸어 버스를 늦게 탔다고 일행이 나르시시스트를 탓한다면?

나르시시스트는 흥분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것이다. 

'너도 늦게 왔잖아! 너도 마찬가지잖아! 너는 완벽해!?'


초라하고 비겁한 나르시시스트여. 


통행이 좀 막혔다고 쌍욕을 하며 고성을 지르는 아이들. 

'길막하지 맙시다! ***(욕설)아!'

나르시시스트는 마구 소리를 지른다. 자신이 피해 입지 않는 선에서만

만약 누군가가 아이들에게 '시장에서 너희들끼리 가로로 나란히 다니면 다른 사람들의 통행이 막힌단다. 너희가 큰 소리로 욕설을 뱉으면 사람들이 불쾌감을 느낀단다.'라고 말한다면?


아이들은 흥분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지도 모른다. 

'시장이니까 길막할 수도 있는 거 아니에요? 네? 네? 

기분 나쁘면 쌍욕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니에요? 네? 네? 

내가 쌍욕을 해서 당신들이 큰 피해라도 봤나요? 네? 네?'


바로 이게 순도 100%의 나르시시스트 관점이다. 

작은 고양이의 하악질처럼 나르시시스트는 하악질을 한다

나르시시스트가 오버액션을 하는 이유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스트는 타인의 평가에 예민하다. 

사람들이 자신을 좋은 사람으로 자신을 봐주길 바란다. 

하지만 나르시시스트의 기준에서 좋은 사람이란 결국 희생양을 괴롭히면서 자존감을 얻는 초라한 인간이다. 


이상한 사람인 나르시시스트는 좋은 사람이 되려고 만만한 상대를 타박하기 시작한다. 


'내가 너를 수시로 구박하고 지적하고 경멸할게. 그럼 네가 나를 우러러보게 될 거야. 맞지? 맞지? 나 어때?' 


나르시시스트여, 상식의 나라에서 짐을 챙겨 떠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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