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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약한 괴물 나르시시스트의 생존 비법은 OOOO이다

나르시시스트는 대상에 따라서 태도를 변화무쌍하게 바꾼다. 변신의 귀재처럼

나르시시스트는 유약하다.


그들은 왜 유약할까.  

나르시시스트는 타인의 비판이나 충고를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조언하는 것을 좋아한다. 


어떤 사모임의 리더였던 B는 애정이 가는 사람에게 문제 해결책을 알려준다고 자랑하곤 했다. 

그는 가르치는 게 본인의 적성에 잘 맞을뿐더러 그런 역할을 좋아한다며 흐뭇해했다.  


어느 날, 모임의 일원인 C가 B는 아직 사람들하고 친하지 않은 것 같다고 지적했다. 

그러자 그 자리에서 B는 큰 충격을 받고 분노했다. 


얼마 전 그는 교통사고를 당했었다고 하소연했다. 

몸이 아팠고 마음의 여유도 없어서 사람들과 잘 못 지냈을 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교통사고가 난 시점은 최근이었다. 

이미 그는 1년이 넘도록 사람들 사이에서 철저하게 겉돌고 있었다.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했던 사실이었다.  

처음에 B는 무척 활달했다. 하지만 비관적이고 우울한 기질이 그의 실체에 더 가까웠다. 시간이 흐르면서 가면은 벗겨졌다. B는 웃음을 거두고 사람들에게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B를 좋아하지 않았다.

호감도가 뚝 떨어진 원인은 바로 그에게 있었다.

 

B는 예민했다. 

그래서 사소한 일로 상대를 지적하거나 소리를 지르다시피 하며 짜증을 냈다. 


그런 자잘한 에피소드가 쌓여 B의 행동은 구전처럼 전파됐다. 

어떤 상황이든 부정적인 감정을 자주 표출하는 사람은 환영받지 못한다. 


또 그는 남에게 이렇게 해야지 저렇게 해야지 말하면서 함부로 충고할 때가 많았다.   

난데없는 지적과 훈계는 다른 사람들의 자존심을 건드리기에 충분했다. 

B는 제대로 인심을 잃어가고 있었다.

B도 사람들과 잘 지내고 싶어 하긴 했지만, 어떻게 친해지는 방법을 모르기도 했다

게다가 그는 대인관계 맺는 기술이 부족해서 가까이 지내는 이들이 없었다.

남들과 교류가 없으니 B가 알고 있는 정보가 턱없이 부족해졌다. 


아무리 대단한 사람도 혼자서만 생각하고 혼자서만 결론 내리면 생각의 오류가 나기 마련이다. 

따라서 B는 자신이 타인에게 어떻게 비치는지에 대해 무지했다.

  

상대방과 소통하면서 모임을 이끌어가야 하는데, 그는 일방적인 전달과 훈계로 일을 진행했다. 

그러니 사람들의 불만 사항이나 괴로움 등을 들을 기회가 없었다. 

아니, 기회가 있다고 해도 B는 아마 귀 기울이지 않았을 것이다. 

B는 강한 사람처럼 보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떠나가는 이들을 보면서 많이 외로웠을 것이다. 

사람에게 스며들듯이 자연스럽게 다가와야 거부감 없이 친해질 수 있다. 


그런데 B는 사람들에게 급하게 다가갔다. 

그러다가 조금만 안면을 트면 갑자기 지적을 해서 상대방이 당황할 때가 많았다.  


그런 루틴이 반복되자 불필요한 갈등을 일어나기도 했다.   

심지어 B에게 크게 화를 내거나 모임을 떠나는 이들까지 생겼다. 

그는 친절했다가 갑자기 소리 지르며 비판하길 반복했다. 사람들을 길들이고 싶었던 걸까. 그의 대중없는 태도에 실망하는 팀원들이 꽤 있었다

또 보수적인 성향의 그는 상대의 나이가 적으면 고압적인 태도를 취했다. 

넌 잘 모르고, 난 잘 아니까 내 말대로 따라오라는 그의 모토가 정말 부담스러웠다.


가르치는 걸 좋아한다는 게 지적과 비판으로 상대를 누르고 싶다는 의미였나. 


B의 경솔한 행동에 일침을 놓거나 따뜻하게 조언할 만한 이들도 없었다. 

사람들은 그를 기피대상으로 판단하고, 멀리하기 바빴다. 

B가 잠시 자존심을 접고 마음을 연 채 자신을 돌아볼 기회가 있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타인의 조언이 트리거가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멀리했다

그런데도 B는 본인의 태도에 심각한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다.

그저 사람들이 자신을 이유 없이 배타적으로 대한다며 서러워했다. 


가르치는 게 천성이라던 그는 누군가가 부족한 점을 꼬집어주면 자존심 상해할 뿐이었다. 


그동안 참았던 상대는 기회를 봐서 솔직하게 말한 거였다.

하지만 그는 다른 모임의 리더도 팀원들과 거리를 두고 지낸다고 항변했다.

즉, C가 잘 몰라서 본인을 지적했다고 받아들였다.   

그의 넘쳐나는 자의식을 상대방은 부담스러워했다. 그는 교만했는데 스스로 겸손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고쳐야 할 점을 간과하고 남이 고쳐야 할 점을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었다

친한 사람에게는 조언으로 애정표현을 한다며 큰소리치던 모습과 대비되는 장면이었다. 

막상 누군가에게 지적을 받자 그는 딴 사람처럼 변했다.

책상에 볼펜을 탁탁 두들기며 급격하게 불안해했다.


여러 사람 앞에서 남의 외모와 몸매를 평가하던 그가 역공을 당하자 작고 초라한 자아가 드러났다. 

그는 어떻게든 구겨진 체면을 피려고 궤변 섞인 변명을 늘어놓았다.   

 

타인에게 부정적인 평가와 비판을 듣는 게 그에게는 모독적인 어퍼컷이요, 자존심의 흠집을 내는 유리조각이었던 것이다.  


물론 비판과 지적은 오해에서 비롯될 때도 있다.


하지만 나르시시스트를 향한 부정적인 평가는 솔직하고 현실적이라 밀도 높은 진실일 때가 많다.  

나르시시스트는 그토록 훈계하길 좋아하면서, 남이 자신에게 한 마디 충고를 날리면 몹시 억울해한다

문제는 진실한 조언일수록 나르시시스트가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는 사실이다.  


조언을 인정하는 순간 잘못과 약점이 만천하에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그때 나르시시스트의 자존감은 깊은 구덩이로 낙하한다.

그는 작디작은 자아가 더욱 쪼그라드는 상황을 견딜 수 없다.


나를 아프게 하는 사실을 외면하고 멀어지는 게 나르시시스트의 특기다.

진실과 마주할 때 겪는 불쾌감을 경멸하기에 그는 가상현실로 도피한다.

나르시시스트의 이상은 완벽한 자신이 타인 위에서 군림하는 것이다. 물론 그 이상은 실현될 가능성이 낮다. 물론 나르시시스트는 절대 완벽하지도 않다

즉 나르시시스트가 가면을 써서 허상으로 실체를 덮는다는 의미다.


그들은 나르시시스트의 관점에서 가장 멋져 보이는 캐릭터를 연기한다.

수시로 남에게 충고하고 마음껏 신경질 부리면서 자신이 특별한 인물이라는 느낌을 받고 싶어 한다. 


나르시시스트는 남에게 훈계하기를 즐긴다.

반면 자신에게 조심스럽게 충고하는 사람들을 질색한다.


타인의 조언에 나르시시스트의 실체가 적나라하게 담겨있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스트가 부정했던 본모습을 마주하는 게 끔찍하기 때문이다. 

가면은 진실이 아니다. 이런 당연한 명제를 나르시시스트는 인정하지 못한다

나르시시스트 앞에 반듯한 진실은 온데간데없다.


그의 초라한 내면이 묻어 난 현실은 피해야 할 통증에 불과하다.  


얼마나 자신이 멋진 사람인지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나르시시스트가 본인의 못난 점을 지적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얼마나 위축되는지 모른다.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은 나르시시스트는 타인의 충고를 전부 바닥에 묻어버릴 것이다.


타인이 비판할 때 그들은 딴청을 피거나 기계적으로 반사한다. 

자신의 잘못을 남의 잘못인 것처럼 떠넘기고, 자신의 약점을 타인의 약점으로 둔갑시키려고 별 말을 다 한다. 


- 난 그런 적 없어.

- 네가 잘못 기억하는 게 아닐까?

- 네가 오해했겠지.

- 나는 나쁜 의도가 아니었어. 널 생각해서 한 말이야.

- 네가 나한테 그런 말 할 자격이 있어?

- 그렇게 말하는 너는 완벽하니?

- 네가 지적한 내용은 나에 관한 게 아니라 너에 관한 게 아니니?

나르시시스트는 타인의 비판이 맞다고 생각할수록 도망친다. 별별 이유를 대서라도 최대한 반성하지 않는 게 나르시시스트의 특징이다

악착같이 안 좋은 평가를 피해 다니는 나르시시스트는 본능적으로 타인을 평가절하한다.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저 사람은 이런 면이 있어서 별로라며 불평한다.

평소에도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이 남을 판단하는 특별한 권리라도 가진 것처럼 으스댄다.


하지만 누군가가 나르시시스트를 조금이라도 안 좋게 평가하면, 나르시시스트는 태도를 바꾼다.


그는 땀을 뻘뻘 흘리며 궤변을 늘어놓는다. 

그런 의도가 아니었고, 오해할 줄 몰랐으며, 억울하다고 하소연한다. 

항변하느라 이전에 했던 말도 바꾸고 사소한 거짓말을 늘어놓으며 좋은 사람인 것처럼 연기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이 되고 싶은 이상적인 자아를 내세운다. 

나는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라 현실에 맞는 충고를 했을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타인의 현실적이고 솔직한 피드백을 부정한다.

나르시시스트는 타인이 자신을 안 좋게 말하면 일단 거부하고 본다

나르시시스트가 막무가내로 잘못이 없다고 우기는 바람에 친구들은 애정 어린 조언을 하거나 비판하기를 결국 체념한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는 진솔하고 깊이 있는 피드백을 듣지 못한다. 


주변에 깊이 있게 친밀감을 나누는 사람이 없다 보니 나르시시스트의 대인관계는 표면적이고 추상적이다.

친구들의 손절과 방치 가운데 그들은 나머지 세월을 흘려보낸다.   

타인보다 우월하다는 '느낌'을 받는 게 나르시시스트에게는 중요하다

관계의 악순환으로 정서적 교류가 끊긴 나르시시스트는 혼자만의 세계에 고립된다.  


물론 자신이 좁은 세계에 갇혔다는 것조차 모르기에 그는 현실 파악을 못한다.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스스로 깨달으면 좋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살지 못한다. 

친구들, 연인, 직장 동료, 직장 선배 혹은 후배와 갈등을 겪고 사이가 나빠지면서 본인의 결점을 알 때도 많다.  


그런데 나르시시스트는 갈등이 일어날 정도로 친한 사람이 거의 없다. 

결국 친구도 나르시시스트의 곁을 떠날 때가 많기 때문이다. 

불균형한 관계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이 위에 있다는 착각에 빠져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불균형한 관계가 필요하다

나르시시스트의 성격적 결함을 이해하려면 부당한 대우를 참는 수밖에 없다. 

나르는 아무렇지도 않게 남이 기분 나빠할 말을 툭툭 던지며 평가한다. 

모든 일에 부정적으로 반응하면서 본인에게만큼은 지나치게 낙천적이다. 


반면 상대가 나르시시스트를 조금만 비판해도 어차피 너도 마찬가지라는 헛소리만 하면서 도망가버린다. 

그러니 나르시시스트가 넓은 초원에서 관계의 가뭄을 겪는 건 당연한 결과다. 


나르시시스트는 세상 일에 대해 온갖 아는 척을 하면서, 정작 진짜 알아야 할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무지한 사람이 된다. 

물론 무지하다는 사실도 나르는 인정하지 못할 것이다. 

자신만의 세계에 갇힌 나르시시스트는 고독해한다. 그러나 고독의 근본적인 원인은 무례하고 오만했던 행동임을 나르시시스트만 모른다

나르시시스트는 왜 유약할까.

그들은 타인에게 공격당할까 봐 과도하게 걱정하며 경계하기 때문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외부에 대한 적절한 경계심을 가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나르시시스트가 느끼는 경계심이란 항상 상황에 비해 과도하다.  

평생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을 방어하며 살았다.

그들은 타인을 경쟁자나 적으로 보기 때문에 쉽게 긴장하고, 쉽게 상처받는다.  

나르시시스트는 누군가를 무찔러야 한다는 쓸데없는 강박관념 때문에 수시로 타인의 평가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적으로 가득 찬 세상은 나르시시스트에게 전쟁의 장이며 평화 없는 카오스다.

나르시시스트에게 세상은 위협적이고 두렵기만 한 곳이다. 사람들을 늘 방어하고 경계하는 게 나르시시스트에게는 일상이다

물론 세상은 전쟁과 갈등으로 가득하다.

역사는 인간이 서로 반목하고 화해하는 과정으로 빚어졌다.

여기에서 '화해'도 있다는 게 중요하다.  


나르시시스트는 '반목'에만 집중할 뿐 '화해'를 간과하다.

그래서 그들은 자아가 위축되거나 사람을 경계하거나 타인이 웃으면서 하는 말도 나쁜 의도가 있는지 살피며 방어하기 바쁘다.     

 

나르시시스트의 생존비법은 할 수만 있다면 최대한 남을 밑으로 찍어 누르는 것이다.

적을 찍어 눌러야 나르시시스트가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최대한 두꺼운 보호막으로 자신을 가린다. 전쟁을 겪느라 타인을 배려할 여유도 없다

힘든 세상이지만 모든 순간이 전쟁은 아니라는 걸 나르시시스트는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는 여유로운 척하면서 끊임없이 분노하며 상대를 미워하게 되는 것이다. 


' 언제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나의 적을 공격하면 좋을까?'

나르시시스트는 이런 궁리를 하느라 혼자 스트레스를 받고, 남을 골탕 먹일 계획을 세우는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는 공격을 당하면 반격을 하고자 사람들의 언행에 귀를 쫑긋 세운다.

그들은 군복을 입고, 모든 무기를 몸에 장착한 채 경직되어 있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의 얼굴 윗근육이 굳어 있다. 

나르시시스트는 사람들의 호의마저 상당수를 트로이 목마처럼 생각한다

상대는 나르시시스트를 공격할 마음이 없을 때도 많다.


그러나 나르시시스트는 타인이 호의를 보일 때조차도 분기탱천해 호전적으로 나온다.


웃기지만 나르는 본인을 보며 웃는 사람들을 볼 때 짜증이 난다. 

그 사람들이 자신을 편하고 만만하게 봤다고 해석하기에 은근히 충격을 받는다. 

나르시시스트의 입장에서는 사람들이 내 눈치를 보고, 비위를 맞추려고 아양도 떨어야 하는데 그들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이는 것이다.  


타인의 불안을 보면서 나르는 자존감을 얻는다. 

잘 웃는 그들을 보면서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이 패배하고 있다고 믿는다.

나르시시스트가 해맑게 웃는다면 속으로 딴생각을 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저 사람을 어떻게 찍어 누를지 연구하는 중일 수 있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는 의도적으로 남의 의견을 반대한다.

상황에 안 맞는 충고를 하면서 우위를 점하고, 훈계하는 이미지를 구축하려고 애쓴다.  


물론 오히려 나르시시스트의 불필요한 잔소리를 관심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다.

초반에 나르시시스트와 친해지는 사람들은 알맹이 없는 충고를 진심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도 나르의 본심을 알게 될 테지만 말이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지금은 속상하겠지만 내 충고가 너에게 도움이 될 거야. 나르시시스트는 이런 거짓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습관적인 거짓말쟁이는 자신이 거짓말하는지 모른다

게다가 나르시시스트는 작은 일에도 규격에 맞지 않는 분노를 보인다.


어떤 나르시시스트는 부담스럽다는 평가를 들은 후 패드립까지 하면서 평가한 그 사람을 비난했다.


부담스럽다는 말이 그렇게까지 기분 나빠할 건가?

타인의 반응에 과도하게 집착하고, 그 사람이 나쁜 의도로 그랬다며 길길이 날뛰는 게 나르시시스트의 실체다.

 

이랬던 나르시시스트는 직장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사람이 괴로워할 때 이렇게 말한다. 


- 네가 알아서 기면 되잖아. 


예전에 그 나르시시스트는 선배들에게 사람 취급도 못 받았다고 하소연했으면서 막상 남이 비슷한 일을 겪었을 때는 말이 달라졌다. 

나르시시스트는 공감력이 떨어진다. 남이 아파할 때 그는 기뻐한다. 상대가 힘들어할 때 보복하고 싶어 한다. 그러니까 나르시시스트가 아무리 구슬려도 고민상담을 해서는 안 된다. 먹이

사실 나르시시스트는 선배들에게 당한 데로 후배들을 대했다. 

그리고 상대를 후배로 인식했다. 


부당한 대우에 분노하는 상대를 본 나르는 자신이 선배에게 대들지 못했던 과거가 생각났다. 


그 선배 때문에 기분 나빴던 일화를 조목조목 말하는 사람을 보자니 과거에 상사가 하대했던 걸 꾹 참았던 자신이 떠올라 수치심이 몰려왔다. 


나르시시스트는 그 감정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본인이 똑똑하고 센 것처럼 보이고 싶은데 선배들에게 당한 걸 생각하면 원하던 이미지에 흠이 갈 것 같다. 


그리고 과거에 선배들에게 잘 보이려고 자존심도 굽히고 애썼던 본인의 노력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싶었다. 

그래서 상대가 느끼는 감정의 정당성을 훼손하려고 시도했다.  


나르시시스트는 과거를 떠올려 자책하느니 본인이 선배에게 길 때 겪었던 굴욕감을 타인에게 전가하기를 택했다.  


남을 위해서 말하는 것 같지만 무늬만 그럴 뿐 사실 나르시시스트는 본인이 겪었던 상처를 엉뚱한 사람에게 되갚고 싶어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르시시스트를 대할 때 '황당' '당황' '어이없음' '난처함' '분노' 이런 종류의 감정을 겪는다. 

나르시시스트가 상황에 걸맞지 않은 짜증을 낼 때 사람들은 의아해한다

나르시시스트는 왜 유약할까.

그들은 진정한 사랑을 실천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는 미움이 먼지처럼 쌓인다.

쌓인 미움은 더 큰 미움을 낳는다.


그들은 미움에 압도되어 미움이 정체성이 된다.

미움은 마음을 메마른 논바닥처럼 만든다.

메마른 논바닥은 작은 충격에도 부서진다.


그게 미움의 실체이며 나르시시스트의 실체이다.

나르시시스트 뇌를 해부하면 뭐가 나올지 뻔하다. 나르시시스트는 세상 자체를 경멸한다. 곧 사람을 경멸한다

사랑을 모르는 나르시시스트는 상대에 대한 경멸로 가득 차 있다.

사실 나르시시스트도 자신이 상대를 싫어하는 이유를 정확하게 모를 때도 많다.

 

그들은 외부의 자극에 평탄한 반응을 보이지 못한다.

나르시시스트가 느끼는 가장 큰 감정은 미움, 경멸, 증오, 적대감, 무시 등이다.


나르시시스트에게 사랑은 온전한 사랑이 아니다.

그들에게 사랑이란 시혜적인 태도의 최상 치일뿐이다.


그들에게 사랑이란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낮은 위치에 있는 상대에게 물질이든 지식이든 무언가를 베푸는 태도이다.

나르시시스트는 모든 것을 계급으로만 생각한다. 위 아니면 아래이다

나르시시스트가 자신이 남보다 우월하다고 병적으로 믿는다.

그 병적인 믿음을 기반으로 나르시시스트는 사랑을 흉내 낸다.

물론 나르시시스트만의 인지적 오류에서 비롯된 사랑 흉내내기이다.


인지적 오류에서 출발한 행동은 이기적이고 오만한 냄새를 풍긴다.  

그러나 나르시시스트는 이런 자신이 꽤 이타적이라고 착각한다.   

나르시시스트가 보는 자신과 남이 보는 나르시시스트는 다르다

나르시시스트가 믿는 열렬한 사랑은 자신을 열렬히 사랑하기 위한 또 다른 방식에 불과하다.


정확히 말하면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을 증오하면서도 사랑한다. 

그들은 자신을 끔찍하게 아끼면서도 동시에 끔찍하게 혐오한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는 그 이중적인 감정을 감당하고자 새로운 탈출구를 만든다.

진정한 사랑은 이타적이다. 그러나 그 명제는 나르시시스트의 세계에서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결혼을 비롯한 인간관계는 자기중심적인 선택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이 도덕적이고 책임감 있는 인간임을 확인하고자 친구를 사귀고 배우자를 택한다.

 

친구 혹은 배우자는 나르시시스트만이 주인공인 연극에 초대된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는 단지 자신을 빛나게 해 줄 보조 출연자를 모집한 것뿐이다.

감독, 연출, 주인공 역할 등 나르시시스트는 홀로 모든 걸 감당한다. 주인공은 한 명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사람들의 허락도 받지 않고 일방적으로 역할을 정한다.


그 연극에서 (사실 일인극인데) 무조건 나르시시스트는 충고를 일삼고 나쁜 사람을 때려잡는 정의로운 캐릭터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나르시시스트의 훈계를 듣고 반론 없이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평면적 인물이다.

 

나르시시스트가 만든 세계에서 그들은 왕이고 초대된 이들은 신하이다.


왕은 이해심과 포옹력을 발휘해 신하들에게 돈을 주고 조언을 하고 충고를 하고 훈계를 하고 모독을 한다.   


나르시시스트는 건강하지 않은 방법으로 인정을 받고자 몸부림친다.

친절의 가면을 쓰고 스리슬쩍 마음을 주는 척한다. 

막상 상대가 마음을 열면 나르시시스트는 열린 척했던 마음을 닫아버린다. 

연기를 그만두고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다.

나르시시스트가 만든 연극은 지독하게 재미가 없다. 나르시시스트는 팝콘 각 장면을 연출하지만 지독하게 재미가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르시시스트의 실체를 잘 모르거나 혹은 나르시시스트의 속마음을 잘 알아서 그 상황극을 받아주기도 한다.


그러나 나르시시스트는 그런 사람들에 대해 전혀 고마워하지 않는다.

나르시시스트는 상대가 자신의 신경질을 받아준다 싶으면 역할극에 심취해버린다.

 

참다못한 상대가 결국 나르시시스트를 떠난다.

그럼 나르시시스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렇게 말할 뿐이다.

 

- 내가 뭘 어쨌는데?

나르시시스트는 상대가 불쾌해할 줄 몰랐다고 한다. 정말 몰랐을까

나르시시스트는 유약하다.

나르시시스트는 심리적으로 '누군가'에게 종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 나르시시스트가 의존하는 '누군가'는 구체적으로 누구인가.

 

그 대상은 파워 긍정형 인간이다.

성격이 유하고 친절하며 대체로 언행에 악한 의도가 없는 인간이다.

나르시시스트에게는 함부로 웃어주면 안 된다. 나르시시스트의 레이더망으로부터 최대한 멀리 떨어져라

그럼 나르시시스트가 그 유형에게 종속되었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나르시시스트는 파워 긍정형 인간을 함부로 구박하고 멸시한다. 

그러면서도 나르시시스트는 그들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 한다. 

웃기게도.


그들은 그 누구보다 상대를 하찮게 여기면서 그 누구보다 상대의 반응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상대의 반응이 어떠냐에 따라서 나르시시스트의 자존감이 결정된다.  

그런 점에서 나르시시스트는 파워 긍정형 인간에게 종속되어 있다. 

'내가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나르시시스트의 행동은 이런 물음을 전제로 한다

겉으로 볼 때 나르시시스트는 타인에게 군림하려고 애쓴다.

그들은 자신이 찍은 대상에게만 의도적으로 괴팍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나르시시스트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면 비정상적인 군림을 통해 타인에게 인정받으려는 쓸데없는 절박함이 있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는 타인의 비판에 유난히 예민하다.

비판 자체가 나르시시스트의 건강하지 않은 인정 욕구를 건드리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상대를 최대한 인정하지 않으려 발버둥 친다. 그러나 나르시시스트는 상대의 인정을 받지 못할 때 의아해한다. 지독하게 이기적인 관점이다

언제 터질지 모를 정도로 한껏 부푼 풍선이 나르시시스트의 민낯이다.


누군가가 그 풍선에 바늘로 좁쌀만 한 구멍을 낸다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풍선은 큰 덩치가 푹 꺼져 늙은 호박처럼 쪼그라든다.

얇은 풍선 껍질 안은 공기 외에 아무것도 없다.


커다란 풍선은 작은 구멍에도 쉽사리 꺼지는 허상일 뿐이었다. 


나르시시스트의 실체가 바로 그렇다. 

풍선 속에 들은 건 공기이다. 그 이상이 없다. 나르시시스트가 그렇다

나르시시스트는 빈약한 자아정체성을 들킬까 봐 염려한다.

나르시시스트가 가장 싫어하는 상황이 속마음을 들키는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는 내면에서 올라오는 불안감을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자연스러운 감정으로 치부하지 못한다.

나르시시스트에게 불안감은 유약함의 상징일 뿐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을 강하고 분별력 있으며 지식이 많은 캐릭터로 포장한다.

그런데 불안감은 그 유리가면에 균열을 낸다.

유리가면의 특징은 잘 깨진다는 거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는 자연스러운 감정을 토로하지 않는다.

감정이 올라오면 반작용으로 그들은 무던한 척 생활 연기를 한다.

오히려 요동치는 감정을 외면하고자 나르시시스트는 외친다.


- 나는 아무렇지 않아.


나르시시스트는 사람들이 공격할까 봐 걱정되면 외친다.


- 어떤 사람도 나한테 뭐라고 못해.


그들은 뻔뻔하게도 거짓말로 자신을 위장한다.

나르시시스트는 누더기 옷을 입고 있으면서 자신을 왕이라고 왕비라고 공주라고 왕자라고 칭한다

그 연기를 본 사람들이 대단하다며 손뼉 쳐주기를 나르시시스트는 간절히 바란다.

 

타인의 관심과 인정을 바라면서 동시에 타인에게 군림하려는 자.

모순으로 가득 찬 오만함의 결정체가 바로 나르시시스트이다.


나르시시스트는 '나의 연기에 속아 줘. 그래야 내가 괜찮은 사람 같잖아. 한껏 포장한 나의 겉모습을 인정해 줘.'라는 부당한 호소를 한다.


그렇게 나르시시스트는 선량한 자에게 심리적으로 종속된다.

나르시시스트가 인정받고자 시도하는 방식은 빈약하고 야비하며 자기중심적이다

아마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의 심리 구조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에 의해 좌지우지된다는 것 자체가 나르시시스트에게 타격이다.

남을 찍어 누르기 바쁜 나르시시스트에게 의존이란 개념은 발설하면 안 되는 진실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이런 일체의 행위를 자신에게 불이익을 주지 않는 대상에게만 한시적으로 드러낸다.


자신보다 높은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나르시시스트는 거대한 괴물 앞에서 초롱초롱한 눈으로 동정심을 구하는 고양이가 된다.

거기엔 자존심이고 군림이고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그런 걸 '강약약강'이라고 칭한다.

나르시시스트는 유독 권력에 취약하다

나르시시스트는 유약하다.

그들은 왜 유약할까.  


나르시시스트는 대상이 누군지에 따라 변화무쌍하게 태도를 바꾸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스트에게 세상은 계급으로 엮인 그물망에 불과하다. 

그들은 그물망 안에 스스로를 가둔 뒤 추하게 허우적거린다.   


나르시시스트에게 강약약강의 태도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행위이다. 


그들에게 정의란 권력 있는 자에게 복종하는 것이며 권력 없는 자에게 군림하는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는 그렇게 극단적인 이중성으로 세상의 불의에 기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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