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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스트가 가장 충격받는 말은 OOO이다

나르시시스트는 나름대로 멋진 조언자 역할을 하겠다고 허우적댄다

나르시시스트는 타인의 시선을 과도하게 의식한다.  

그래서 완벽한 이미지를 연출하려고 노력한다. 

특히 그는 '안다'와 '모른다'는 개념에 집착한다.   


"넌 잘 모르겠지만 난 알아."

"내가 뭘 모른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아니거든?"

"난 그럴 줄 알았어." 


사사건건 뭘 안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것이다. 

대단한 걸 안다는 말은 아니다. 

지극히 지엽적이고, 사소한 정보를 말하는 거다. 

몰라도 그만인 내용 말이다.  


나르시시스트는 본인이 아는 것을 상대도 아는지 늘 궁금해한다. 

상대가 모르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그럴 때마다 나르시시스트는 우월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상대가 아는 것을 자신이 모른다면, 그는 충격을 받는다. 

누군가가 모를 수도 있지 않냐고 다독여주면, 또 그것대로 자존심 상해 한다.   

그 전까지 나르시시스트는 상대가 자신을 우러러보는 줄 알았는데, 오히려 이해를 해주는 인물이라는 걸 알아서다. 

관계에서 차등이 있다고 여겼는데, 상대는 동등한 사이라고 해석한다는 것에 상처를 받는 것이다. 

스스로를 특별하다고 믿었는데, 그 믿음이 망상임을 간접적으로 알아버린 거다.   


사람이 무언가를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다.

다만 세상을 보는 시야가 좁고, 자기중심적으로 사고한다면 사소한 걸 안다는 것에 크게 자부심을 느낄 수가 있다. 

지식이 얕으면 많이 안다고 착각하기 마련이다. 

그 착각은 남을 무턱대고 무시하는 무례함으로 이어진다.  

나르시시스트처럼. 


사실 과도한 우월감의 이면에는 어두운 열등감이 자리 잡고 있다.  

나르시시스트는 명확한 자아 정체성이 없다. 

자신이 누구인지 잘 모르는 거다. 

대신 그는 멋있어 보일 것만 같은 이상적인 자아를 설정해 두고, 그 자아를 흉내 낸다. 

가상의 존재를 본연의 모습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가품을 보고 어색함을 느끼듯이, 나르시시스트와의 대화에서 이질감과 부연스러움을 느낀다.     


나르시시스트의 인정욕구는 비정상적으로 결핍돼 있다. 

그래서 그는 매사에 타인의 인정을 받으려고 희생양을 억지로 쥐어짠다. 

자신을 추켜세우면서 타인을 깎아내린다. 

폭언한다. 

비난한다. 

조롱한다. 

무시한다. 


나르시시스트가 의도적으로 폭언을 하는 또 다른 이유는, 희생양이 자신의 말로 고통받는 모습을 보고 싶기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힘 있는 존재라는 망상에 빠지는 것이다. 

이렇게 그는 타인을 공격해서 가짜 자아를 만들어 간다. 


또 하나의 이유는, 나르시시스트는 희생양이 본인의 눈치를 보고, 비위를 맞춰주길 바라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의견을 내면 상대방이 무조건적으로 동조하길 기대한다.

절대적 지지를 원하는데 또 이건 애정을 갈구하는 것과는 양상이 다르다. 

나 외에는 아무도 인정하지 않겠다는 독재자의 심리인 거다.  


하지만 자아가 성장한 성인은 어느 정도 호불호를 표현한다.

성향, 경험, 가치관 등을 종합해서 상황을 판단하고, 분별한다.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태도다. 


그런데 문제는 나르시시스트는 이런 인간적이고, 보편적인 행위마저 용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결국 나르시시스트의 높은 기대치가 실망으로 귀결되고, 사람들은 그에게서 멀어져 간다. 


나르시시스트의 자아는 오른팔은 아주 큰데 왼팔은 아주 작은 괴물과 같다. 

스스로를 대단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열등감에 찌들어 있다.

나르시시스트는 이 두 자아를 왔다 갔다 하면서 방황한다.

B는 자신을 이런 말로 평가한다.


"저는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엄청나요. 그런데 자존감은 바닥이에요." 


이 말은 나르시시스트 특유의 심리를 투명하게 반영한다.   

  

B는 다른 사람들을 무척 오만하게 대하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부서에 새로 들어온 인턴이나 타 부서에서 잠깐 파견 나온 직원 등을 괴롭히곤 했다.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에 편집증적으로 집착하면서 잔소리를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때로는 사소한 일에도 상처를 받았다고 폭풍 문자를 보내기도 했다. 

B는 나르시시스트적인 면모가 짙었고, 그는 성격적 결함으로 직장 동료가 거의 없었다.  

늘 무표정한 표정을 지은 채 혼자 다니고, 혼자 밥을 먹으면서도 그는 남을 괴롭히는 걸 멈추지 못했다. 

하지만 알고 봤더니 그건 진짜 마음을 감추는 포장지였다.


B는 남들보다 뒤처질까 봐 두려워했다.

진짜 실력이 알려져서 망신을 당할까 봐 전전긍긍했다. 

그래서 같은 일을 해도 다른 사람들에 비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그는 순수한 마음으로 일을 잘 하고 싶어하는 게 아니다. 

다만 일을 못해서 지적을 받거나 이미지가 깎이는 게 두려운 거였다.  


그가 객관적으로 실력이 대단하다면 실체를 들키는 걸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

남과 비교하지 않아도 된다. 

본래 일을 잘하는 사람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B는 무의식 중에 자꾸 남과 비교를 했다. 

저 사람보다 못할까 봐 불안해하는 마음이 '비교의식'으로 발현된 것이었다.  

그는 초조함을 다독이려고 희생양을 비난했다.  

'일'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감정적으로 대우했던 것이다.  

남을 지적하는 이미지를 연출하면 일에 능숙한 사람처럼 보일 거라고 여겼다. 


사실 일상에서 나르시시스트의 여린 자존심은 수도 없이 상처받는다.

그는 모든 상황을 다 서열의 역학관계 혹은 자존심으로 직결시킨다. 

그리고 남보다 월등하게 나아야 한다고 스스로를 압박한다. 

그런데 현실에서 나르시시스트는 실패할 때도 많고, 허술할 때도 많다. 

그때마다 나르시시스트의 열등감은 폭주한다.

C는 안면을 튼 지 얼마 안 된 사람에게 이런 자기소개를 한다.

"나는 고칠 점만 봐."


그의 목소리에 자부심이 묻어났다.

하지만 저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먼저 누군가를 고칠 자격이 그에게 없다.

스스로가 특정 역할을 자처한 것 뿐이다.


그리고 고칠 점이라고 확신하는 근거가 무엇인가.

비판이란 주관적 프레임 걸기에 불과할 때도 많다.

누군가가 단점으로 여기는 면이 또 다른 누구에게는 장점이다.

고칠 점은 아니라고 반박한다면 대항할 논리가 있는가.   

C의 실언이었다. 

그는 원래부터 부정적인 감정을 자주 느꼈다.

그래서 쉬지 않고 불평과 원망을 늘어놓았다. 

특히 서열상 위치가 아래라고 여겨지는 대상에게 가차없이 부정적인 감정을 표출하며 폭언을 해댔다. 

그래서 사람들과 갈등이 잦았지만, C는 자신이 원인이라는 인지가 없었다. 


그는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관점을 지녔다고 주장했다.

사실 그 말은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을 정당화하기 위한 말이었다. 

사람의 생각은 다양하다.

관점사도 각양각색이다.  

옳다 그르다 무 자르듯 답변하기 힘든 사안도 많다.


그런데 C는 모든 사안에서 자신의 의견만 맞다고 주장했다. 

반대의견을 내는 이들을 공격적으로 대하면서 깎아내렸다. 

많은 사람들은 막무가내식 비난을 받은 뒤 떠나갔다. 

그의 어둡고, 비관적인 정신세계를 목격해서였다.  

이런 경험이 C에게는 트라우마였다. 

그래서 그는 사람과 친해지는 시점에 걱정이 앞섰다.

버려지는 것에 두려움이 생겼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버려지는 걸 걱정하는 자기 자신을 인정하기 싫었다. 

아쉬운 입장으로 전락한다고 여겨서다.  

그래서 본인은 고칠 점만 본다고 미리 방어막을 쳤다. 

만약 상대가 같은 이유로 떠난다면 자신의 비판을 못 받아들여서라고 위로하면 되기 때문이다.   

"저는 막 짜증 내요." 


D는 새로 입사한 직원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이 말의 껍데기를 벗기고, 여린 속살을 읽어보자.  


당신에게 짜증 내고 싶어요.

감정을 경박하게 드러내도 전 무사할 테니까요.

그리고 제가 여기 더 오래 다녔잖아요?   


아무리 새로 왔다지만 상대와 안면을 튼 지 하루도 안 지났다.

서로 잘 몰라서 어색하니까 조심스러워하는 게 마땅한다.   

하지만 그는 먼 사이를 지나치게 편하게 인식하는 우를 범했다.

그리고 난데없이 '짜증 낸다'는 어둡고 습한 단어를 내뱉었다.

이는 그는 우울하고 어두운 감정에 젖어 있을 때가 많다는 걸 의미한다.  


오히려 잘 모르는 사이니까 본색을 함부로 드러내는 사람이 있다. 

섣부르게 부정적인 개념을 선뜻 꺼내는 인물은 위험할 수 있다.

이상한 방향으로 스트레스를 분출시켜 해를 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 말에서 그들이 정성껏 신경 쓰는 게 무엇인지 투명하게 읽을 수 있다.  

과육처럼 외부의 자극에 쉽게 허물어지는 약점이 숨겨진 것이다.

 

고칠 점을 운운했다면 비판받는 걸 유난히 두려워하는 사람이다.


실제로 그는 대부분의 사람을 부정적으로만 표현했다.

그가 매사에 누군가를 별로라고 생각하는 이유를 구구절절 연설했던 것이다.

재밌는 점은 부정적으로 묘사한 인물과 자기 자신을 비교한다는 점이었다.

자기 자랑으로 대화가 귀결되는 희한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가장 뜨악했던 것은 자신에 관한 비판은 무조건적으로 거부하는 태도였다.

그는 감정이 격해져서 막말하는 경향이 있었다.

본인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상대가 사과를 요구하면 그렇게 말한 적 없다고 발뺌을 하는 것이다.

뻔뻔한 것인가.

기억을 정말 못하는 것인가.

둘 다 인가.  


나중에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나는 원래 우기는 스타일이야.  


짜증 낸다고 말했다면 대인관계에서 감정을 쉽게 다치는 경향을 지닌 사람이다.


이런 유형은 외부의 자극에 민감하다.

그래서 타인에게 잘 다가가지 못하고, 표면적인 관계만 유지한다.  

얼굴도 알고 인사도 한다.

하지만 상대와 감정과 생각의 상호작용이 없다.

그들은 감정이 조금만 상하면 바로 손절을 택한다.


실제로 그는 오랫동안 한 회사에 다녔지만 친구가 없었다.

어디든지 그가 혼자 다니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하다 못해 회사 근처 카페에서 동료와 화기애애하게 차 한잔 마시는 모습을 못 봤다.  

선배는 물론 동료와 후배들이 수백 명이 되는데 말이다.

그리고 사람들도 그에게 다가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떤 선배는 그를 떠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걔는 좀...

그 선배는 말끝을 흐렸다.  


평소에 그가 워낙 무표정해서 감정에 둔감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경직된 표정 너머에는 얼어붙은 마음이 있었다.

그는 남의 말 한마디에 감정에 크게 흔들리곤 했다.

그래서 기분에 영향받지 않으려 애쓰느라 오히려 로봇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게 그의 전부는 아니었다.

그는 좁쌀만 한 사회성을 발휘하기도 했다.

서열이 높은 대상에게 잘 보이려고 다른 사람이 들고 있는 차까지 뺏어서 갖다 주곤 했다.

(그럴 것까지는 없잖아?)

날카로운 심정을 감추고, 싹싹한 자아를 들이밀었던 것이다.

참고로 그는 무척 승진하고 싶어 했다.

   

대신 그는 낯선 사람이나 불이익을 줄 것 같지 않는 대상에게만 노골적으로 본색을 드러냈다.


제가 막 짜증 내요.


이 말 한마디에는 그가 대상에 누구인지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는 발언이었던 것이다.


어떤 사람은 본인이 과각하는 영역에서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기도 한다.


나르시시스트가 잘난 척하는 모습 뒤에는 열등감이 숨 쉬고 있다.

별것 아닌 일에 지나치게 아는 척을 한다.  

반대의견을 표명하는 사람에게 과도한 공격성을 드러낸다.   

이런 행동은 연극적이다.

만들어진 형상이다.

자신감을 표출하는 것은 나르시시트의 내면을 감추는 커튼인 것이다.  


자존감이 낮은 나르시시스트는 의존적이다.

타인의 관심에 목마른 것도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다.

칭송에 가까운 대우를 받으려고 희생양을 괴롭힌다.

다른 사람을 눌러야 위로 올라가야 생존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칭 빼어난 면모를 알리고자 희생양과 자신을 비교하기 시작한다.

어느 정도 가까워지면 나르시시스트는 곤충이 변태를 하듯이 태도를 탈바꿈한다.


인공적인 따뜻함을 지하에 가둬둔다.

감춰 둔 까탈스러운 태도를 다시 장착한다.


그리고 상대보다 내가 우위에 있다고 주장하기 시작한다.

희생양을 통제하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통제의 방법은 여러 가지다.


희생양에게 칭찬과 비난을 섞어 쓰는 처세술을 구사한다.

‘지적’이나 ‘충고’를 남발하다 ‘칭찬’을 맛소금처럼 뿌리는 것이다.


이때 희생양의 태도가 중요하다.

칭찬에 감사하다고 말할 필요 없다.

비난에 잘못했다고 인정할 필요도 없다.

그렇게 대하면 오히려 나르시시스트에게 먹이를 던져주는 게 된다.


온탕과 냉탕에 오가는 그에게 발맞춰 주지 말자.

차라리 무심하게 대응하는 게 낫다.

나르시시스트가 과한 제스처를 취한다고 똑같이 크게 반응해 주지 말자.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간단하고 명료하게 제스처를 취해 보자.       

 

그리고 긍정과 부정을 섞는 처세술은 사실 속이 너무 빤히 들여다보인다.

칭찬을 쿠션어로 깐다는 걸 듣는 사람은 안다.

상대가 기분 나빠할까 봐 나름대로 위로한다는 제스처를 취하는 건데 맥락에 맞지 않는 칭찬은 무척 당혹스럽다.  


긍정어 뒤에 부정어를 쓰고, 부정어 뒤에 긍정어를 쓰는 것 자체가 부자연스럽다.

딱 봐도 영혼 없는 리액션 정도로만 읽힌다.

그런데 스스로는 능숙하게 상황을 잘 통제하고 있다고 믿는 것 같아 안쓰럽다.

나르시시스트는 작은 칭찬을 던져 나쁜 의도로 상대를 판단한 게 아니라 객관적으로 판단해서 충고했을 뿐이라고 둘러댄다.

상대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쓴소리를 했다는 자기 보호성 발언이다.


그런 되풀이가 화학작용의 전말이다.


그 되풀이가 나르시시스트를 기쁘게 한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이 화낼 때 상대가 울고, 자신이 칭찬할 때 상대가 웃기를 바란다.

그런 상황을 맞이할 때 자신이 힘센 사람이라는 병적인 환상에 매몰되는 것이다.

그리고 희생양이 괴로워하고 자책하면, 일시적으로 나르시시스트의 자아상은 벌크업 된다.


그래서 사람의. 고통은 나르시시스트에게 기쁨의 원천이다.  

그 순간 나르시시스트는 현실을 떠나 우주를 비행하며 허상으로 얼룩진 자아를 탐닉한다.   

나르시시스트는 ‘지적’이란 행위로 일시적인 흥분 상태가 된다.

흥분의 근본적인 원인은 ‘충고하는 나의 모습이 꽤 괜찮다’라는 허황된 느낌이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남을 공격해서 얻은 자존감은 신기루에 불과하다.

자존감을 올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남을 건드리는 행위는 구걸에 불과하다.

  

결국 나르시시스트의 자존감은 필연적으로 다시 쪼그라든다.

그럼 그들은 쪼그라든 자아를 부풀릴 적절한 도구를 다시 찾아다닌다.

 

이때 나르시시스트의 행위는 마약에 중독된 사람이 금단현상을 겪으며 마약을 구하는 것과 같다. 물 없는 사막에서 물을 찾는 간절한 몸짓과 같다.

나르시시스트는 청개구리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마치 그들은 상대의 말을 반박하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군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누군가가 나르시시스트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사람들하고 있을 때 겉으로는 밝게 행동해.

하지만 사실 속으로는 많이 힘들어하고 있어.”


나르시시스트가 응수한다.

“그래도 네가 견딜힘이 있어서 밝게 지내는 게 아닐까?”


누군가가 나르시시스트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마음은 힘들지만 사람들하고 있을 때 밝게 지내려고 노력해.”


그럼 나르시시스트는 이렇게 말한다.

“마음이 힘든데 남을 의식해서 일부러 밝게 지내려고 노력할 필요까지 없잖아.”


누군가가 나르시시스트에게 이렇게 말한다.

“다른 사람이 이 상황에서 어떤 감정인지 잘 느껴져서 마음이 불편해질 때가 종종 있어.”


나르시시스트는 응수한다.

“그런데 그 사람이 기분 나쁠 거라고 느끼는 건 너만의 오해일 수 있잖아.”


누군가가 나르시시스트에게 이렇게 말한다.

“내가 상대의 감정을 잘 예측하지 못하는 편인가?”


그럼 나르시시스트는 이렇게 말한다.

“네가 그렇게까지 둔한 사람은 아니야.”


누군가가 나르시시스트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 가족과 친척이 자주 다퉈서 힘들어.”


나르시시스트는 응수한다.

“내가 아는 어떤 집안은 친척이랑 돈 문제로 심하게 다퉈서 의절하고 심지어 재판까지 한다고 난리가 났더라고.”


누군가가 나르시시스트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 집은 친인척끼리 모이면 오랫동안 대화도 나누고 같이 재밌게 노는 편이야. 화기애애해.”


그럼 나르시시스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내가 아는 어떤 가족은 친인척이 아파트 옆 동에 산대. 그래서 일주일에 한 번씩 다 같이 음식 싸들고 대모임을 해. 완전 잔치를 하더라고.”

이 대화의 특징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대화는 일종의 게임이다.


게임을 시작한 쪽은 나르시시스트이다.

저런 대화를 하는 순간부터, 게임인 줄 모르고 게임에 참여한 상대는 미로의 한 복판에 입실해 버린다.

일방적으로 한쪽이 싸움을 거는 형식이다. 그렇게 게임은 시작된다.

게임의 규칙은 ‘무조건 반대로’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엄마가 위험하니까 큰 길로만 다니라고 주의를 주면, 일부러 밤중에 골목길로만 쏘다니는 아이와 같다.

 

나르시시스트는 고장 난 청기 들기 백기 들기 인형이다.  

상대가 청기를 들라고 하면 나르시시스트는 백기를 들고, 상대가 백기를 들라고 하면 나르시시스트는 청기를 든다.

청기와 백기, 둘 다 큰 의미는 없다. 그저 '무조건 반대로'라는 규칙만 이행하면 된다.  

아주 단순한 게임이다.

게임에는 승자와 패자가 있다.

 

나르시시스트는 상대의 말을 수시로 반박한다.

상대가 나르시시스트의 반박에 이견이 보이지 않는다.

그럼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이 게임에서 승리했다고 여긴다.


나르시시스트가 저렇게 단호하고 확신 있게 반박하기에, 순간적으로 상대는 애매하게 동의하는 제스처를 취하곤 한다.  

그런데 상대는 나르시시스트와의 대화를 마치고 묘한 불쾌감을 맛본다.


왜 상대는 불쾌함에 휩싸일까?

겉으로 볼 때, 이 대화는 조금 울퉁불퉁하지만 큰 흠은 없어 보인다.


나르시시스트가 상대의 말을 듣고, 그런 상황에서 다른 면도 있다는 걸 말할 뿐이다.

그런데 바로 그게 문제이다.

저 상황에서, 실제로 나르시시스트는 상대의 고민이나 의견에 별로 관심이 없다.

그들은 상대의 말을 들으면서 오로지 자신이 보일 반응을 골똘히 생각한다.


어떤 반응을 보일지 고민한다는 것은, 대화의 주제가 무엇이든 나르시시스트가 타인을 훈계하려고 기회를 엿본다는 뜻이다.


타인의 말에 동의해도 되는데, 나르시시스트는 억지로라도 반박해 타인이 부족한 주장을 하는 것처럼 몰아간다. 그래야 자신이 훈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타인이 자신은 겉으로는 활발하지만 속으로는 힘들어한다고 말한다.

그럼 나르시시스트는 그의 ‘힘듦’보다  ‘견딜 힘’을 강조해 그 힘듦을 일축한다.

 

반대로 타인이 힘들어도 남 앞에서는 밝게 지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럼 나르시시스트는 그를 지나치게 노력해서 인위적으로 어둠을 감추는 사람으로 일축한다.


타인이 기민해서 감정의 전도율이 높다.

나르시시스트는 그런 기민함을 ‘오해’라는 일반적인 가능성을 내세워 부정한다.

 

반대로 타인이 자신은 남의 감정을 잘 예측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럼 나르시시스트는 그 정도면 보통이라고 타인의 자평을 부정한다.

 

타인이 가족과 친척이 사이가 안 좋아 괴롭다고 말한다.

나르시시스트는 ‘너보다 더 힘든 사람들도 있던데.’ 라며 타인의 고통을 축소한다.


반대로 타인이 자신의 가족은 친척과 사이가 좋다고 한다.

그럼 나르시시스트는 그를 사이좋은 친인척들은 많은데 혼자 유별나게 자랑하는 사람으로 깎아내린다.


나르시시스트는 어떤 이유를 대서라도 상대의 의견이나 주장을 반박해, 상대에게 무안을 준다.

 

아니면, 나르시시스트는 상대를 뭘 모르는 사람이라고 멋대로 규정한 다음, 자신이 대단한 걸(?) 가르친다는 듯 유별나게 군다.

나르시시스트는 신경 써서 타인의 의견에 이견을 내세워 뭔가를 가르쳐주는 느낌을 받고 싶어 한다.


그들은 일방통행 같은 훈계로 모든 대화를 마무리한다.

     

나르시시스트는 그렇게 순정의 대화를 망친다.


자신의 반박을 듣고 동조하거나 얼굴을 붉히거나 난감해하는 타인의 모든 반응이 나르시시스트에게 이상할 만큼 힘을 준다.


반박을 통해 타인의 생각이나 가치관을 통제하고 조종하기를 나르시시스트는 간절히 원한다.


이 대화의 특징은 나르시시스트가 타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숨도 안 쉬고 반박을 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대화에 끼어드는 타이밍을 보면 나르시시스트의 특징이 드러난다.  

바로 나르시시스트 고질병이라고 불리는 '타인에 관한 생각의 부재'다.

나르시시스트는 타인의 고민이나 생각에 별로 관심이 없다.

따라서 사안마다 주관을 거친 고유한 의견도 없다.

다만 길이 나 있는 곳으로 많은 사람이 지나다니듯, 나르시시스트는 자주 사용하는 생각 통로를 무심결에 돌렸을 뿐이다.

겉으로는 그들의 반박이 ‘조언’ ‘충고’ ‘가르침’ 따위의 말들로 포장된다.


‘조언’ 등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말은 때때로 상대를 아프게 한다.


원래 진실은 아픈 법이니까 말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그런 종류의 진실 말이다. 오죽하면 ‘팩트 폭행’이라는 말이 생겼겠는가.

그러나 나르시시스트의 그것은 상대를 고려하지 않는 행위이다.

그들이 반박 조로 조언 따위를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이타적인 동기가 없다.


나르시시스트에게 상대는 도구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상대의 언행을 자신을 빛내기 위한 재료로 여기는 인식의 오류를 범한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는 타인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기보다, 자신이 반드시 고쳐야 할 ‘고장 난 부품’처럼 여긴다.

나르시시스트는 물건을 망치로 탕탕 치고, 휘어진 철근을 바로잡는 자칭 세공사이자 명인이다.  


문제는 나르시시스트가 세공사 자격도, 명인 자격도 없다는 거다.

그들이 자격이 없는데 자격이 있는 것처럼 함부로 지적과 훈계를 남발해 문제를 일으킨다.  


나르시시스트의 취미는 ‘가상 캐릭터 흉내내기’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일상 속에서도 의식적으로 연기를 한다.


연기라는 것은 무엇인가.

속마음을 꾸밈없이 표현하는 게 아니라, 대본에 묘사된 가상 캐릭터에 걸맞게 행동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르시시스트가 채택한 가상 캐릭터는 누구인가.

이성적이고 분석적이며 무엇이든 남보다 한 발 앞서가는 유형이다.


가상 캐릭터는 완벽하다. 실수가 없다.

그는 남에 비해 감정을 잘 절제하며 흔들리지도 않는다.

그는 남에게 조언과 훈계를 아끼지 않는다.

그는 좋은 의도로 의미 있는 말을 하고 다니는 사람이다.

물론 가상 캐릭터가 말이다.

그러나 가상 캐릭터는 가상 캐릭터일 뿐이다.

가상이기에 현실과는 접점이 없다.  


자, 현실을 보자.

나르시시스트는 망가진 자아상을 세우고자, 타인을 진흙 삼아 자아의 빈 공간을 메운다.

쩍쩍 갈라지고 구멍이 숭숭 뚫린 헛헛한 자아에, 자신과 가까운 친구를 짓이겨 바르려고 한다.


나르시시스트의 충고는 그런 모양새이다.

그들의 말은 타인의 감정을 상하게 할 뿐, 타인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들은 타인에 대해 고민하지 않기 때문에 덩달아 효율적인 해결책도 내지 못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객관적이라고 자평하며 악착같이 남을 훈계한다.   


자, 객관적이라는 의미는 무엇인가.

누가 보아도 인정할 만한 논리, 통상적으로 납득 가능한 보편적인 상식, 대다수의 사람들이 용납할 만한 건강한 인식이다.


그러나 나르시시스트는 객관적일 수가 없다.

나르시시스트의 판단력은 오래전에 고장 나버렸다.

오로지 그들은 자존감에 화려한 덧칠을 하고자 상대를 이용한다.


상대가 무슨 말을 하든지 나르시시스트는 성급하게 반박을 한다.

그리고 반박한 뒤, 반박을 보충할 근거를 나중에 찾는다.

그래서 그들은 궤변을 말할 때가 많다.

논리가 없는 말,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말을 한다.

그런 시도를 무한 반복해 온 나르시시스트의 내면은 엉망이다.

그들의 내면은 한 번도 치운 적 없는 거미줄 낀 빈 방이다.


낮은 자존감의 바다에 빠진 나르시시스트는 만성적으로 허우적거린다.

그래서 자신이 부적절하다고 느끼는 모든 순간을 상쇄하기 위해 가면을 쓰고 남에게 충고하는 똑똑이 흉내를 낸다.


그 흉내는 바다에 빠진 나르시시스트가 익사하지 않기 위해 낡은 나무 갑판이라도 잡으려는 행위와 같다.   


그러니까 나르시시스트는 반박과 충고로 자존감을 높이고 자신의 존재를 지속적으로 확인하는 과정을 밟아야만 살 수 있다.


그런 과정에 있는 나르시시스트가 어떻게 객관적일 수 있을까.


‘이성적’ ‘분석적’ ‘통찰력’ ‘객관성’ 이런 말들은 나르시시스트와는 상관없는 말들이다.

‘감정적’ ‘무논리’ ‘궤변’ ‘주관적’ 이런 말들은 나르시시스트와 상관있는 말들이다.

에스키모인이 ‘나는 곰이다.’라고 한다고, 그 누구도 에스키모인을 곰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에스키모인의 착각이거나 잠꼬대라고 판단할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고 '객관성'이라는 허울을 뒤집어쓴다. 대놓고 자신이 '객관성'이 있다고 자평하는 나르시시스트를 우리는 종종 발견하곤 한다. 그런데 그게 사실일까?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이 곰이라고 주장하는 에스키모인이다.


그들이 가상 캐릭터 놀이에 심취해 타인을 조언이나 충고 따위로 통제할 때, 그의 자존심을 박살 내는 말이 있다.

바로 ‘나르시시스트는 욕쟁이’라는 말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이 ‘욕쟁이’라는 평가를 들으면 충격에 빠진다.

이 충격은 집의 유리창으로 큰 돌이 날아와 깨지는 듯한 강도이다.


나르시시스트 삶의 궤적을 보라.

그들은 ‘분별력 있는 조언자’라는 가상 캐릭터로 보이길 원했다. 그래서 그들은 목적에 맞게 모든 순간을 통제하려고 애썼다.


그런데 나르시시스트의 모든 노력을 한 방에 날리는 말이 바로 ‘너는 욕쟁이다.’라는 평가이다.


충격을 받은 나르시시스트는 기가 죽은 채 혹은 크게 신경질을 내며 그렇게 말한 사람이 문제라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나르시시스트는 욕쟁이’라고 평가한 누군가는 그의 언행을 근거로 종합적이고 현실적인 판단을 했을 뿐이다.


결국 누군가는 나르시시스트의 진짜 의도를 알아채고 그를 역공한다.

예기치 못한 공격을 받은 나르시시스트는 또다시 조언자의 가면을 쓰고, 그런 판단을 내린 누군가가 문제가 있어 보인다는 투로 방어할 것이다.


그때 나르시시스트는 겉으로 여유로워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내면은 ‘욕쟁이’라는 말에 심하게 울렁이고 있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이 욕쟁이가 아니라고 변호할 것이다.


“내 충고를 듣고 너는 기분이 나빴겠지만 나쁜 의도는 아니었어. 너는 이런 면이 있기 때문에 내가 좋은 의도로 뭔가를 알려주고 싶었어.”

이렇게 말이다.

그런데 그런 거짓말에 속을 필요 없다. 평생 남을 등치며 살아온 나르시시스트가 ‘욕쟁이’라는 평가를 받아들일 리 만무하다.  


나르시시스트는 상대를 어리숙한 사람으로 평가절하하고, 자신은 그 어리숙함을 채워주는 멋진 사람으로 시나리오를 만들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어리숙한 건 상대가 아니라 나르시시스트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의 실체를 감출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웬만한 사람은 그들의 부자연스러운 대화법을 통해 이상함을 감지할 때가 많다. 오히려 뭘 모르는 건 나르시시스트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이 모든 상황에서 최적화된 생각을 한다고 홀로 자부한다.  

그러나 그 인식은 나르시시스트가 만들어낸 환상의 세계에서 통할뿐이다.

나르시시스트는 그냥 ‘욕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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