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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정의가 무엇이길래> B가 크리스천을 싫어한 이유

"교회 세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B가 이 질문으로 나를 테스트했다

B는 기독교인을 싫어했다.

내가 기독교인임을 알고 난 후 그는 나 또한 싫어했다.

하지만 미움을 교묘하게 감추고 싶어 했다.


어느 날, B가 내가 속한 팀의 팀장이 되었다.

회의를 주재한 그는 앞으로 취재할 영역을 발표했다.

"... 것들 포함해서 그리고 교회도."

교회 담임 목사의 뒤를 이을 사람은 내정되어 있었다

당시 OOO 교회의 OOO 목사가 그의 핏줄인 OOO에게 목회 자리를 물려주겠다고 발표해 파장이 일고 있었다.

그동안 OOO 목사는 자신의 위치를 세습하지 않겠다고 공표했지만, 어느 날 태도를 바꿔서 기습적으로 세습을 발표했다.


OOO 목사는 친자식 OOO에게 고단한 십자가의 길을 물려주기로 ‘어쩔 수 없이’ 결심했다는 프레임을 내세웠다.


그 교회는 웅장한 건물과 명성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정황상 세습의 진짜 의도가 ‘눈물을 머금고 가시밭길을 물려주는 아버지의 비통한 결단’인지 논란이 생겼다.

유신론자들은 물론 무신론자들까지도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개척 교회가 아닌 대형 교회에서 발생한 목회 세습.

그러한 세습에 반대하는 입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습을 강행하는 입장.


신이 만든 정의의 저울대에 두 입장을 올려놓을 때, 무엇이 옳은지는 이미 판가름 난 일이었다.

한산한 식당에서 그가 나에게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몇 년 전 B는 나에게 물었다.

"세습하는 교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나는 말했다.

"세습은 반대하죠. 교회는 기업이 아니니까요. 교회를 사유화할 때 세습이 생겨난다고 봐요."


B가 과장된 표정을 지었다.

"뭐? 세습해도 괜찮다고?"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지난 식당은 나를 포함해 3명밖에 없어 고요했다.  

내가 한 말을 반대로 알아들을 상황인가?

B도 다른 사람들처럼 인정 욕구가 있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좋은 사람, 센 사람으로 봐주길 바랐다

예전부터 B는 이상한 말을 했다.   


그가 학생을 대상으로 취재해야 하는 일을 나에게 맡긴 적이 있다.  

B는 학생의 나이대가 어려서 그런다고 부탁한 이유를 덧붙였다.


- 얘들이 나를 무서워할까 봐 그래.


B는 눈이 작고 날카로워서 선한 인상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목구비가 옅어서 여러 번 봐야 기억될 평범한 외모였다.

게다가 체질상 마르고 근육이 없어서 왜소했다.


정말 B는 아이들이 자신을 무서워한다고 인식했을까.

아니면 사람들이 무서워하기를 바란 걸까.

둘 다일까?


나중에 알고 보니, 말로 과시하는 화법은 험한 세상에서 자신을 지키고자 B가 고안한 생존법이었다.     

언젠가 전화통화를 하던 B는 상대방의 어떤 말에 무척 자존심이 상했는지 빈 방으로 들어가 고성을 내며 싸웠다. 화를 내서 상대방을 제압했다고 느꼈을 때 그는 기분이 좋아졌다

평소에도 그는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생기면 날 잡고 소리 지르며 화내는 걸 예사로 알았다.  

분풀이 대상은 대체로 연차가 적은 직원들이었다.


B는 속으로 상대를 타깃으로 정해뒀으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한다.  

웃으며 인사하고 감정 없이 공적으로만 대하는 것 같지만 사실 상대에게 보복할 명분을 엿본다.


그러다가 그 타깃 때문에 조금이라도 일이 어그러지면 마치 이런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돌변한다. 

틈을 노리며 벼르던 B는 일을 핑계 삼아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그동안 상대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와 울분을 풀었다.  

누구나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가면이 있다. 그런데 B는 그 가면이 몹시 두꺼웠다

그에게 폭발적으로 화내는 성격은 무기였다.   

감정적으로 분출하는 모습을 보여줘서 만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이미지를 구축하길 바랐다. 

그런 자잘한 소망 때문에 이상한 말을 한 거였다.


- 얘들이 날 무서워할까 봐 그래.  


타인의 평가에 민감한 사람들은 누가 묻지 않아도 자꾸 자아를 확대 해석하면서 으스댄다.


상 B는 다른 사람이 자신을 공격할 수 있다고 생각해 쉽게 긴장했다.  

왜냐면 평소에 그가 다른 사람의 약점을 물고 늘어지기 때문이었다.

본인이 상대의 틈을 파고들어 밟는 처세술로 세상을 살아가니 상대도 비슷할 거라고 굳건히 믿었다. 


연약함을 수용받지 못한 사람은 B처럼 생각한다. 

내가 강해 보여야 남들이 얕잡아 보지 못할 거라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것이다. 


그런 사상을 지닌 사람은 소위 착하게 행동하는 사람을 가식적이라고 치부하거나 아래라고 속단한다. 

유하고 부드러운 사람들은 나름대로 마음의 여유가 있기에 타인을 더 헤아리는 건데 말이다. 


B는 웃는 사람들도 경계하고, 찡그린 사람들도 경계하느라 마음의 쉼이 없었을 것이다. 


선배, 후배들과 잘 지내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그는 마음의 장벽이 높아 속내를 투명하게 알기 힘들었다. 

'사람들이 날 때릴지도 몰라. 맞기 전에 먼저 선방을 쳐야 해.' 그는 이런 생각에 골몰했기에 타인의 말에 조금만 기분이 상해도 지나치게 방어적이었다

B는 후배 C를 챙겨주면서도 끝내 경계심을 내려놓지 못했다.

회식 때 그는 그 후배와 엮인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내가 C를 3번까지 봐줬어.

그런데 또 인터뷰를 안 갔으면서 갔다 온 것처럼 나를 속이더라?

그래서 내가 날 잡고 완전 뭐라고 했지.

그 후에 걔가 나를 피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일 잘한다고 막 띄워줬어.

그러니까 또 열심히 일하더라고.


C는 좋은 대학을 나왔거든. 

영어도 잘해.

그러니까 한 마디로 걔는 자기가 좋은 대학 나왔으니까 내 머리 꼭대기에 있다고 생각한 거야."


그의 말에 따르면 후배는 B를 의도적으로 속였다.

하지만 그 내막을 B는 눈치챘고, C와 조화로운 협업을 도모하고자 능숙하게 훈계와 칭찬을 반복하며 일했다는 내용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C를 잘 모르는데, 그 사람들 앞에서 B는 C의 의도를 왜곡해서 전달했다

그런데 그의 주장 중에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다.


정말 C가 좋은 대학을 나왔다고 B를 무시했을까?


그가 속한 직군에서 B는 유수한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

객관적으로 C가 그보다 더 좋은 대학 출신이었다.  


그렇지만 B의 생각처럼 대학 때문에 C가 그를 만만하게 본 건 아니었다.


C는 밖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는 현장 취재나 인터뷰를 힘들어했다.


물론 C는 정말 똑똑했다.

하지만 그런 사실과는 별개로 외근은 C의 성향과 맞지 않았다.

그는 외근할 때만큼은 소극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C가 ‘인터뷰에 가지 않았음’을 B에게 알리지 않은 이유가 ‘대학’ 때문이라고 판단한 것은 사실과 동떨어진 결론이었다.


B는 대학의 ‘네임벨류’에 자격지심이 있었다.

그는 열등감 때문에 C의 행동을 편파적으로 해석했다.

B는 남이 기분 나빠할 말을 하면서 웃는다. 겉과 속이 다를 수 있는 건데, 그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안 그래도 얼마 전에 그가 B를 찾아왔다.

나에게 무표정하던 C가 그에게는 ‘선배’라고 부르며 살갑게 웃었다.

B는 반가워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직한 후에도 B를 보려고 사무실까지 찾아온 걸 보니 같이 일하면서 두터운 친분이 생긴 듯했다.

그들은 차 한잔 마시면서 담소라도 나눴겠지.


좋은 선후배 사이처럼 보였지만 거기에는 B의 가식이 숨어 있었다.


당사자가 없는 데서 그는 ‘좋은 대학 나왔다고 선배를 얕잡아보는 캐릭터’라며 C를 험담했다.

회식 자리의 중앙을 차지한 B는 팔짱을 낀 채 확신 어린 말투로 C가 어떤 마음가짐을 지녔는지 떠들었다.

그가 C를 진심으로 생각했다면 여러 사람 앞에서 그렇게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B는 착하게 살고 싶어 했지만 싫어하는 사람을 괴롭히는 것만큼은 절제하지 못했다. 좋은 사람이고 싶지만 마음이 따라주지 않을 때, 인간은 자신의 의도를 미화해서 죄를 합리화한다

B는 나에게도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냈다.

누군가를 공격하고 싶지만 공격당하고 싶지는 않을 때 인간은 우회적인 화법을 사용한다. 


그는 마치 나를 생각하는 척하면서 교활한 뱀이 바닥에서 머리를 비비는 것처럼 빈정거렸다.  


내가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다.


B는 팀원 D와 교회의 세습 취재를 상의하다가 갑자기 대화의 화제를 돌렸다.


"우리 팀에는 기독교 전문가 A가 있어. A에게 뭐든지 물어봐."


자, 사회생활에서 겪는 난감한 연출이다.


나는 B의 앞자리에 앉았다.

B의 시야에 내가 들어온다.

그러나 B는 내가 아닌 D에게 나에 관해 큰소리로 이야기했다.   


B가 D에게 정말 내가 기독교 전문가임을 알리고 싶었을까.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을 에둘러 D에게 하는 속내가 뭘까.  

정말 기독교 전문가가 본인의 팀에 있어서 든든했나.

B는 아이템이 무산되어 실망하는 사람을 어른답지 못하다고 질책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B 자신은 그 아이템 때문에 마음고생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수심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처음으로 이 팀의 팀장이 된 그는 좋은 아이템을 취재해야 한다는 압박에 고민이 깊었다.

방송 날짜가 다가올수록 B는 다크서클의 영역이 넓어지고, 얼굴 피부의 탄력이 떨어질 정도로 속앓이를 했다.


그러니 나의 존재 덕분에 그가 흔들리는 심신의 안정을 찾았다면 다행이다.


심지어 B는 그 사건을 취재하지도 않을 거면서 나에게 개인적으로 문자로 교회에서 일어나는 불미스러운 일을 알아보라고 했다.

기독교인은 말 그대로 기독교인이고 거기에 어떤 특징이나 인격적인 부분은 고려되지 않았다

B의 태도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나를 기독교인이라는 인간 유형으로만 바라봤다.


그의 편협한 관점에서 나는 인격이기 이전에 기독교에 대한 자신의 반감을 해소할 수 있는 기호이자 도구였던 것이다.


회식 때 그는 사장에게 손가락질한 적이 있었다.


옆에 앉은 사람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 태도를 지적하자 B는 송구스러워 어쩔 줄 몰라했다.

사장의 비위를 거스를까 싶어 눈치를 살살 보면서 억지로 웃는 그의 모습이 어색해 보였다.  


만약 기독교인이 상사였다면 결코 그는 상대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을 것이다.

B는 사람에게 예의를 갖춘다는 개념은 알았지만 나에게 그걸 실천하지 않았다.

 

그는 노골적으로 사람을 가렸고, 그런 태도가 엄청 티 나는 것을 잘 모르는 듯했다.   

B는 틈만 나면 적극적으로 연락하면서 어떻게든 나를 놀리고 싶어 했다

그는 특정 교회의 세습을 나와 연관 지으려 애썼다.


OOO 교회에서 일이 났을 때, B는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의 목소리는 급하면서도 들떠 있었다.

B는 고대했던 블록버스터 영화가 극장에서 개봉된다는 소식을 처음으로 들은 사람 같았다.


"A야. 지금 OOO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세습을 발표한다던데, 네가 가야겠어."


만약 내가 그 전화를 받고 현장으로 달려갔다면 B는 흐뭇했을 것이다.

그게 B의 소소한 계획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나는 그의 기대에 어긋나는 답변을 했다.

"제가 지금 개인적인 일로 지방에 내려왔습니다."


주말인 그날 진짜 개인사로 지방에 있었다.

게다가 서울에서 아주 먼 곳이었다.

현장에 달려가기 여의치 않았다.

여러 명의 사람들 중에서 콕 나만 집어서 대화를 안 하고, 여러 사람들 중에서 콕 나만 집어서 연락하는 의도가 너무 뻔했다

나는 그렇다 치고, 문제는 B였다.

B는 들썩이는 교회 한복판에 어떻게든 나를 끌어들이고 싶어 했다.


그는 타칭 기독교 전문가인 A가 가야 마땅하다는 현명한(?) 판단을 내렸고, 그 결정에 내가 기꺼이 부흥해주기를 바랐다.


나의 대답을 듣고 B는 애석해했다.

그렇게 그가 세운 야심 찬 계획은 본의 아니게 틀어졌다.


기독교인이 기독교에서 일어난 논란을 취재하길 바랐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기독교인의 제 살 깎아먹기’라는 느낌을 받고 싶어 했다.

그럴 때 그는 기독교인에게 손수 보복한다는 통쾌함을 느꼈다.  

  

B는 팀장이었다.

팀원에게 일을 지시할 권한이 있었다.

그에게 유리한 상황이었다.


B는 그 역할을 십분 활용해, 기독교인에게 기독교가 모순 투성이라는 신념이 맞는지 증명하라고 요구했다.

B는 기독교인에게 기독교가 이상하다는 답변을 얻고 싶어 했다. 그래서 기회가 닿는 대로 내 앞에서 교회를 비판했다

평소에도 B는 교회를 화두에 올려놓고 얘기하기를 즐겼다.


언젠가 B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난색을 표했다.

"야, 기독교인들은 교회가 잘못해서 비판받으면, 오히려 교회가 핍박당한다고 생각한다며?"


언론에 오르내리는 교회 관련된 비판은 정당한 게 많다고 생각한다.

그런 비판마저도 핍박으로 주장하는 기독교인을 봤던 걸까.

그는 특유의 빈정거리는 말투로 교회가 상식적이지 못한 집단이 아니냐는 식으로 말했다.

나를 다분히 의식한 발언이었다.


그는 간접적으로 자꾸 나에게 잽을 날렸다.

하지만 그도 천주교인이었다.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나는 B가 천주교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네가 나를 천주교인이라고 지목한 진짜 이유가 뭐야?' B가 묻는다면 나도 할 말이 있다

내 말을 듣고 충격을 받은 그는 크게 당황했다.

그리고 표정을 수습한 다음 친척들은 성당에 나가지만 본인은 나가지 않는다며 천주교인임을 극구 부인했다.


평소에 나를 '종교'로 공격했기에 나의 발언 역시 자신을 공격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래서 그는 불쾌해하면서도 딱히 받아칠 말이 없어 궁색하게 천주교인이 아니라고 변명하며 어쩔 줄 몰라했다.


B와 식당에 있었을 때, 나는 내가 기독교인이라고 밝혔다.

교회의 세습을 물어본 이유는 그가 나의 정체(?)를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나를 테스트하고 싶어 조소를 머금고 질문을 던졌다.


내가 기독교인이라고 하자 B의 표정이 드라마틱하게 달라졌다.

B의 눈빛은 잊을 수가 없다.

환멸에 가득 찬 눈빛을 가까이에서 봤다

B는 나를 보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노려보고 있었다.

비웃고 있었다.

그의 작은 눈에 온갖 환멸과 혐오가 이글거렸다.


B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지만, 표정으로 수백 마디를 하고 있었다.

실례가 될 만큼 상대를 노골적으로 쳐다보면서, 얼굴이 그렇게까지 울그락풀그락해질 수 있다니.


사람이 사람을 보고,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구나.

다른 의미로 감탄했다.


마음이 눈에 보이는 형체라면, 그의 마음을 육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물론 B의 표정은 그의 마음을 완벽하게 대변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B는 나를 공정하게 대하지 않았다. 그는 불의를 싫어하면서도 불의를 저지르길 좋아했다

내가 가만히 있어도 B에게 ‘기독교인’인 나는 눈엣가시였다.

그는 구실을 만들어서 어떻게든 나를 걸고넘어지려고 안달복달했다.  


어느 날, B가 퇴근하려고 내 자리 뒤로 지나갈 때였다.


B가 내 자리를 지나칠 즈음 백스텝을 밟더니 살점 하나 없는 얼굴을 나에게 지나치게 가까이 들이밀었다.


사람과 사람에게는 적당한 물리적 거리가 필요하다.

그 거리를 초과하면 불쾌감을 느낀다.

B는 혐오감에 취해 기본 예의까지 간과했다. 

지금 그 교회가 처한 상황이 너무 재밌지 않아? B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그런 종류였다

B는 세습으로 얼룩지고 있는 OOO 교회 얘기를 꺼냈다.

한쪽 입꼬리가 올라간 웃음을 지으며 친절한 말투로 속삭였다.


"A야. 어떡해?"


뭘 어떡해?

B를 어떡하면 좋을까?


교회가 지탄받을 만한 일을 할수록 B는 평안과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논란의 불길이 타오르는 교회를 보며, B는 좋아서 어쩔 줄 몰라했다.


B는 소리만 안 낼뿐 교회가 서로 때리고 타인에게 두들겨 맞는 장면을 보며 배를 잡아가면서 웃고 있었다.


교회가 불행할수록 B가 행복해졌다.

아이러니한 광경이었다.

B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A야, 어떡해?'  결국 그는 그동안 나를 종교로 공격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시인하고 말았다. 미움은 감추기 어려운 법이다

"A야. 어떡해?"


B의 말은 이런 의미다. 


‘너 기독교인이지?

우리 팀에서 기독교의 치부를 취재하니까 기분이 어때?

나는 대충 짐작은 가지만 너에게 직접 소감을 듣고 싶어.


반성이든 자책이든 반응을 보여주면 안 돼?

내 앞에서.

괴로워하고 난감해하면 안 돼?

내 앞에서.

내가 재밌게 말이야.


기독교인들의 이면을 밝히는 내가 공명정대해 보이지 않니?


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니?

네가 당황하고 힘들어하는 걸 보고 싶은데 왜 반응이 없어?

혹시 나를 약 올리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니?


네가 말하지 않으면 내가 먼저 소감을 말할게.

일단 나는 기분이 좋아.


너는? 제발, 한 마디만, 제발.’

어쩌면 그가 날 괴롭힌 것은 자신의 상처 때문인지도 모른다

B는 기독교인에게 상처받은 경험이 있나.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기독교인에게 개인적으로 상처받았다고 고백한다.

그 경험 때문에 기독교인과 기독교 자체를 경멸하는 무신론자들을 만나곤 한다.


B는 종교인을 특정 가치관에 세뇌당한 사람으로 치부했나.


교회가 잘못으로 비판받으면, 이를 핍박으로 규정하는 종교인.

그게 B가 아는 기독교인의 이미지였나.

그래서 B에게 기독교인은 비꼬고 건드려도 무방한 대상이었을까.


B는 정의감에 불타는 기자의 자격으로 교회를 비판했나.

아니면 단지 기독교가 싫어서 어떤 방식으로든 욕하고 싶었던 걸까.


만약 B의 비판이 정의감에서 기인했다면, 왜 그는 교회의 불행을 기뻐할까.

하하하 웃으면서.

낄낄낄 비웃으면서.

그가 기독교인인 나에게 진짜 얻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상한 건 교회가 몸살을 앓을수록 그가 행복해한다는 사실이었다

교회가 생채기 나는 걸 감상하고 취재하던 B.


당연히 취재는 해야 한다.

그러나 B의 태도는 기독교에 대한 증오심을 발판 삼아, 교회를 무시하고 모독하는 형태를 띠고 있었다.


논란으로 교회가 몸살을 앓을 때마다, 그는 넷플릭스를 보는 온라인 관람객처럼 좋아했다.

그는 하이라이트 장면이 나올 때마다 손뼉을 쫙쫙 치며 몸을 배배 꼬았다.


B는 온몸으로 외치고 있었다.


"내가 그랬지? 기독교인들이 이상하다고.

OOO 교회를 봐. 저런 교회를 세습한다는 게 말이 돼?

온갖 성스러운 척, 정의로운 척은 다 하고 이제 와서 세습한다고 하네?

  

내가 기독교를 왜 싫어하는지 잘 알겠지?

저러니까 내가 기독교를 싫어하지. 하하하."


때로는 모든 상황을 동전의 양면처럼 봐야 한다.

B는 한 말을 뒤집어 보겠다.

말의 이면에는 진실이 숨겨져 있다

"나는 이중인격자인 기독교인과는 달라.

난 정의로운 잣대로 교회의 잘못된 점을 파헤치는 괜찮은 사람이야.


기독교인은 기독교만이 진짜 종교라면서 그들만의 독선을 밀어붙이지.


기독교인은 신을 본 적도 없으면서 뭘 근거로 하나님을 믿어?

팍팍한 현실 때문에 얄팍한 위로나 받으려고 무리하게 신의 존재를 가정하는 건 아니야?


신이 있다고 확신하는 객관적인 증거가 뭐야?

과학이 발전한 시대에서 기독교를 믿는다는 게 난 이해가 안가.


기독교인은 무신론자한테 기독교를 강요해.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서 그러면 안 되지.


대단한 진실을 안다고 확신하는 기독교인의 태도가 정말 싫다.  


교회에서는 착하게 살라고 권면하던데, 기독교인은 착하게 살아?

기독교인의 위선은 뭘로 설명할 건데?


OOO 교회를 봐.

세습해서 가장 이득을 보는 사람이 누굴까?


끝까지 거룩한 척하면서 다른 사람들 눈에 훤히 보이는 잘못을 인정 안 하잖아.

웃기지 않아?


난 앞에서만 점잖은 척하고 뒤에서 딴 말하는 교회의 실체를 알아.

다 취재했거든?


나는 객관적인 사실을 증거로 교회를 비판할 뿐이야.

아무리 교회가 거룩한 척해도 절대 안 속아. 하하하."

B는 위선적이었지만 위선적인 사람들에게 속는 것을 싫어했다

B는 교회의 안녕을 바라지 않는다.

B는 교회를 비판하면서 교회가 무너지기를 바란다.

교회의 몰락이 B의 소망이었다.  


정의감 때문에 분노했다면 그가 교회의 명예가 땅에 떨어지는 것을 반기지 않았을 것이다. 


B가 기분이 좋아지는 순간은 눈앞에 보이는 현상이 자신의 신념과 맞아떨어진다고 믿어질 때였다.

기독교가 허무맹랑하고 표리 부동하며 실체가 없는 집단이라는 신념 말이다. 


B의 비판은 기독교를 향한 증오심에서 흘러나왔다.

물론 B가 교회를 비판하는 증거는 타당했다, 겉으로는.


기독교에서 부당한 일이 생겼을 때 사람들은 기독교 자체를 의심한다.

기독교인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대로 살지 않는다고 말한다.

비윤리적인 기독교인의 실체가 드러났다고 목소리를 높이며 기독교를 배척하는 이유가 타당하다고 강조한다.

교회에서 비윤리적인 일이 발생하는 것은 사실이다. 죄에 대한 대가는 치르게 된다. 그 진리는 나에게도 기독교인에게도 무신론자에게도 적용된다

도덕적 잣대를 댈 때 교회는 자유롭지 못하다.

교회가 잘못했다면 마땅히 죄를 인정하고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러나 정의가 기반이 된 비판이라면, B는 그토록 차고 넘치는 조롱과 경멸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교회를 비판할 때 B의 태도는 진지하거나 심각하지 않았다.

교회가 불의한 행동을 할 때, 그는 괴로워하지 않았다.

그는 그냥 교회에 대한 비판 자체를 재미있어했다.


혐오와 경멸을 수시로 섞어가며 비판을 즐겼고, 비판하는 자기 자신이 정의롭다고 해석했다.

세습하는 교회를 취재하면서 본인의 신념이 옳다고 확인받는 것 같았기에 B는 만족스러웠던 것이다.   

B는 기독교를 비판하면서 자신의 주장에 더 힘이 실리기를 바랐다

B에게 기독교를 향한 비판은 혐오의 표징이요, 증오의 완성이었다.

그리고 비뚤어진 방식으로 미움을 표현했다.


예를 들면, 교회의 세습을 논하던 중 나를 딱 집어서 ‘기독교 전문가’라는 호칭으로 비아냥거린다든가, 내가 기독교인이라고 밝히자 조소를 지으며 빤히 쳐다보는 식으로 말이다.


B는 회의 때마다 다른 사람들한테만 취재하고 싶은 아이템을 물어보고, 나에게만 물어보지 않았다.

한 명씩 이름까지 불러가면서 묻는 정성을 보였지만 나의 의견은 묻지 않았다.


팀원이 4명인데 특정인을 깜박하고 건너뛸 만한 경우는 없다. 

팀원들의 이름을 부른 건 나의 이름을 부르지 않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친 연막이었다.   

나는 B의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내가 다 보고 있는데 다른 PD를 불러서 내 아이템을 확인했다

B는 내가 기획하고 주도적으로 취재하는 아이템도 당사자와 상의하지 않았다.

나와 협업하는 다른 팀의 팀원 하고만 의논했다.

같은 사무실을 쓰면서도 눈앞에 보이는 나를 절대 부르지 않았다.


B는 감정을 드러내면 어른답지 못하다고 맹신했다.

그래서 취재가 엎어져 슬퍼하던 누군가를 비난했다. 

사회생활이 몇 년 차인데 아직도 그러냐고 말이다. 


그렇게 말하는 B는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 때문에 나를 배제한 걸까, 어른답지 못하게?


물론 B가 종교도 그렇고 ‘나’라는 개인을 싫어했을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나를 ‘기독교를 대표하는 존재’로 치환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존재를 괴롭히면서 기독교를 경멸하는 자신의 감정과 마주했다.


B는 내키는 대로 타인을 찌르며 교회로 인해 받은 스트레스를 풀었다.

나는 B의 분풀이 샌드백이요, 그는 기독교를 맨손으로 때리는 아마추어였다.


B는 역겨움, 경멸감, 짓밟고 싶음을 기독교를 대표하는 것 같은 누군가에게 쏟아부었다.


B는 자신감 있게 교회의 세습을 보도했고 좋은 반응을 얻었다.

뻥 뚫린 고속도로 위 차처럼 거칠 것 없던 그였다.


그러나 타고난 행운아를 제외하고는 인생에서 누구나 내리막길을 맞닥뜨리는 법이다.

B도 그 내리막길을 피할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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