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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정의가 무엇이길래>만약에 신이 존재한다면

하지만 신이 없다는 객관적인 증거도 없다

오전 전체 회의를 마친 고위 관계자가 B를 찾아왔다.

B가 일어날 듯 말 듯하며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했다. 

"팀 개편 때문에 E로 팀장이 바뀌었어."

간단한 통보를 남기고 고위 관계자는 떠났다.


하루아침에 B는 경쟁자에게 밀려 좌천되었다.

작은 세모의 꼭짓점에서 순식간에 굴러 떨어진 그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B는 책상을 정리하고 팀장 자리 대각선 쪽에 다시 둥지를 틀었다.

그가 떠난 자리를 새 팀장 E가 메웠다. E와 B는 마주 보게 되었다. E가 떡하니 팀장 자리에 앉은 모습을 근거리에서 매일 봐야 하다니. B에게 고역스럽고 가혹한 일이었다.   


B는 모름지기 어른이라면 감정이 흔들리는 것을 남에게 들키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내면 유약해 보일 거라고 그는 예단했다.


B는 애써 괜찮은 척했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날카로운 톱니바퀴에 흠집 난 시멘트 바닥처럼 그의 표정은 괴상했고 무기력했다.


회사 사람들이 B의 강등을 두고 설왕설래할 정도였는데 당사자는 오죽했겠는가.


그는 혼자서 말없이 앉아있을 때가 많았다.

생각에 잠겼던 건지,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던 건지.

아니면 그답게 보복의 칼이라도 갈고 있었던 건지.  


상대가 작은 실수를 범하면 가차 없이 구박하고 감정적인 분풀이를 해대던 B였다. 

하지만 중차대한 사안을 가볍게 구두 통보한 회사의 방침에 그는 항의 한번 못한 채 풀 죽어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


어느 날 B가 권력의 최고 정점으로 달리던 경주마를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보도를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보도는 권력자의 추악한 이면을 보여주는 충격적이고 비도덕적인 사건이었다.


뉴스가 방송 전파를 타자마자 메가톤급 핵폭풍이라는 평가가 뒤따랐고, 정치권의 지형은 완전히 달라졌다.

그 일의 시작점이 바로 B였다.


보도 이후, 사람 좋기로 소문난 고위 간부가 B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는 허리를 굽히며 공손하게 두 손으로 간부의 손을 붙잡았다. B가 보도한 내용은 그 정도로 파급력 있는 것이었다.   


갑작스러운 강등으로 그는 자존심에 큰 타격을 입었지만 앞으로 승승장구할 일만 남은 듯했다.  


그러나 돌연 B는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는 외국으로 공부를 하러 간다며 가족과 떠나버렸다.


B의 거취를 두고 회사에서는 일파만파 소문이 퍼졌다.

그가 최고 권력자 자리를 예약한 정치권의 거물을 건드려 보복당하게 되자, 그 보복을 피하고자 부리나케 외국으로 떴다는 내용이었다.


게다가 얼마 전에 B는 외국으로 유학을 다녀왔었다.
당시 그는 유학을 갈 때 짐을 줄이려고 옷을 많이 버렸다고 했었다.
그런 에피소드를 나눴던 때가 오래지 않았었다.

그런데 또 유학을 간다니.
게다가 그 나이에.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사람들은 그의 결정이 부자연스럽다고 여겼다.


의아해하는 시선을 모른 척한 채 B는 외국으로 떠났다.  


B의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과거에 그는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B는 아버지의 빚으로 허덕였다. 돈이 주는 가혹함 앞에 B는 참패감을 맛봤다.


또 사회의 경쟁구도에서 약점을 노출하면 남에게 공격당하기 일쑤였다.


그에게 세상은 버겁게 감당할 수밖에 없는 무겁고 매정한 돌덩이었다.


그래서 B는 독해져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압박에 시달렸다.
그는 자신이 살기 위해 나쁜 사람이 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약육강식의 논리가 제대로 통하는 이곳에서 B는 아무도 깊게 믿을 수 없었다.


만약 신이 있다면, 신은 고통당하는 인간을 도와야 마땅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나 세상은 억울하다고 울부짖는 피해자, 죄의식 없이 깔깔거리며 거리를 활보하는 가해자로 넘쳐났다.


B는 이런 불공정한 세상을 바라보며 신은 없다고 굳게 믿었다.


게다가 선을 외치면서도 악하게 행동하는 기독교인을 취재하며 그는 다시 한번 기독교를 향한 마음을 닫았다.


B의 눈에 기독교인은 허무맹랑한 믿음을 소중하게 간직한 종교인 같았다.
기독교인은 길가에 버려진 돌을 안고 다이아몬드라고 말하는 사람이라고 그는 판단했다.

그에게 기독교인은 착하고 바르게 살자고 그럴듯하게 말하면서 그 기치에 위배되는 행동을 반복하는 위선자였다.  
그에게 기독교인은 남들은 아니라고 해도 자신이 보고 들어 생긴 믿음이 참 믿음이라고 주장하는 허위 제보자였다.

   

기독교인의 불완전함은 기독교인이 믿는 신의 불완전함을 연상케 했다.

그런데 신이 불완전하다는 전제는 애초부터 성립될 수 없다.

왜냐하면 신은 말 그대로 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은 없다.

그게 B의 논리였다.


그에게 종교란 인간이 현실을 도피하고자 만들어낸 환상이었다.

B에게 종교인은 얼토당토않은 환상에 세뇌된 인물이었다.


B는 역경의 순간마다 스스로의 힘으로 이겨내 왔다고 자부했다.

B의 관점에서 볼 때 신은 인생의 굴곡마다 그를 돕지 않았다.


그는 고독, 두려움, 죄책감, 모욕감, 슬픔 등을 혈혈단신으로 참아왔다.  


B는 아플 때마다 넉넉한 보호를 받지 못했다. 위기의 순간마다 혼자라는 감각을 익힐 뿐이었다.


만약 신이 있다고 해도, 그 신은 B에게 무신경한 존재였다.

그러므로 신은 인간을 버렸다고 그는 믿었다.

아니, 애초부터 신은 없기에, 신에게 버림받은 적도 없다고 B는 믿었다.


B에게 기독교는 비논리적이고 비합리적인 종교였다.

자신을 이성적인 인간이라 자부하는 그가 보이지 않는 신을 믿는 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존재하는가.
'신 있다'는 완벽하고 객관적인 증거가 없기에 '신없다'라고 무신론자는 주장한다.


하지만 '신없다'는 완벽하고 객관적인 증거도 없다.


그리고 신의 존재를 뒷받침할 ‘누구도 이견을 달 수 없는’ 증거가 없음을 신이 없다는 의미로 직결하는 것은 논리적인 비약이다.  


그러므로 신이 없다는 주장은 일종의 믿음이다.

그래서 세상은 유신론자와 무신론자로 나뉜다. 

교회를 욕하는 B는 정의로운 사람일까. 아니다.


여기에서 ‘욕’과 ‘비판’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욕은 말 그대로 욕이다.

사람 혹은 사건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욕’으로 통용한다.

그래도 정색하고 ‘욕’과 ‘비판’을 구분하자면, ‘내용’보다 내용을 말하는 ‘태도’라고 본다.


B가 정의감으로 교회를 비판했다면, 그는 타인을 비웃거나 얕보는 태도를 고수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싫어하는 대상을 소소하게 괴롭히면서 희열을 느끼는 부류의 인간이었다.

그런데 B는 자기 자신이 나름대로 정의롭다고 맹신하는 듯했다.


도덕적 해이가 존재하는 교회는 정의로운가. 아니다.


그리고 어떤 대상을 향해 불의하다고 평가할 자격이 있냐는 질문에 나도 자유롭지 못하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 질문에 딱 떨어지는 대답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정의는 무엇일까.

 

정의를 외치는 불의한 자들.

정의를 외치는 만큼 비례해서 불의해 보이는 아이러니한 현실.


정의를 강조하는 사람일수록 그가 불의하다는 사실만 확인될 뿐이었다.

정의를 강조할수록 그의 불의가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B는 결혼 후 입양을 꿈꿨으며 어려운 이웃을 돕는 특정 단체에 정기적으로 기부금을 냈었다.


그러나 그는 회의 때마다 누군가를 의도적으로 따돌리고, 자신의 후배를 뒤에서 모욕했으며, 자신의 경쟁자였던 E의 사생활을 타인에게 함부로 떠벌려 빈축을 샀다.


틈나는 대로 B는 교회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이해가 안 된다거나 웃기다는 식으로 매번 조롱했다.

적극적인 혐오, 적극적인 배척, 적극적인 무시. 삼박자를 고루 갖춘 행동이었다.  


B는 나에게 물었었다.

"세습하는 교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나는 말했다.

"세습은 반대하죠. 교회는 기업이 아니니까요. 교회를 사유화할 때 세습이 이루어진다고 봐요."


내 말을 들은 B의 얼굴에 안도감이 감돌았다.

그리고 안도감 뒤에 미세한 아쉬움이 따라왔다.

그 아쉬움의 근본적인 원인은 B가 원하는 대답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는 나에게 원하는 대답이 있었다.


B는 교회의 세습을 옹호하는 기독교인을 만나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런 주장을 하는 기독교인에게 그는 세습의 부당함을 설명하고 싶어 했다.


B는 자신의 주장을 듣고 기독교인이 난처해하며 반박하지 못하길 바랐다.  

그런 통쾌하고 재밌는 경험을 놓쳤을 때 느껴지는 아쉬움이었다.


B는 교회의 세습이 잘못됐다고 말했지만, 정작 나에게는 다른 답을 듣고 싶어 했다.


B의 이야기는 정말 여기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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