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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없다고 하는 건 태양의 반대방향으로 뛰는 것이다

인간이 태양 아래에서 태양의 도움을 받아 살아간다는 걸 부인할 수 없다

신이 없다고 하는 건 태양의 반대방향을 향해 열심히 뛰는 것과 같다.


지구에서 태양은 작디작은 빛 알갱이처럼 보인다. 


그러나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사실 태양은 무척 커다랗다. 


지구와 태양 간의 거리 때문에 인간의 눈에 작게 보일 뿐이다. 


육안으로 태양이 작아도, 태양의 실제 크기가 조그마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누가 우리를 붙잡고 태양은 사실 보이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존재라고 설득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미 태양이 크다고 믿는다. 

'나는 태양을 가까이에서 본 적이 없으니까, 태양이 크다는 너의 말을 믿을 수가 없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태양은 저렇게 작은데?


 직접 나의 두 눈으로 태양을 볼 때까지 너의 주장을 믿지 않을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까?


굳이 우주선을 타고 태양 근처로 가지 않아도, 우리는 태양이 얼마나 큰지 알고 있다. 

그리고 인간이 태양을 가까이에서 직관할 수도 없다. 


태양에 가까이 가기도 전에 인간은 타 죽게 될 것이다. 


태양을 보면 인간의 눈이 멀어버릴 것이요, 피부와 뼈가 다 녹아서 존재 자체가 소멸돼버릴 것이다. 


그러나 존재의 소멸이라는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태양이 내뿜는 빛의 에너지가 얼마나 강력한지, 태양이 얼마나 커다랗고 절대적인 존재인지 우리는 알고 있다. 

만약 지구에서 보이는 것처럼 태양이 작은 빛 알갱이에 불과하다면, 태양이 뜨는 낮에 세상이 온통 이렇게까지 환할 수 없을 것이다. 


태양의 존재를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태양은 인간의 관점에서 재단되지 않는다. 


누군가가 태양이 작다고 정의해도 실제로 태양은 작은 존재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들이 태양을 작다고 평가하든 크다고 평가하든 태양의 존재 자체가 변화하지는 않는다. 


태양은 인간의 정의와 상관없이 늘 태양이 있는 자리 바로 그곳에 존재한다. 


누가 뭐라고 한들 태양은 계속 태양으로 존재한다.

신이 없다고 하는 것은 태양의 반대방향을 향해 열심히 뛰는 것과 같다.


우리는 늘 태양의 영향을 받는다. 


인간뿐이랴. 동물도. 식물도. 살아있는 모든 존재는 태양의 영향을 받는다. 


인간은 낮에 활동하고 밤에 잠을 잔다. 


인간은 태양이 떠오를 때 일상을 시작하고 태양이 넘어간 뒤 일상을 마무리한다. 


태양이 다시 떠오르면 인간은 다시 잠에서 깨어나 일상의 문을 연다. 


인간의 스케줄은 해를 중심으로 재편된다. 일생이 그렇다. 

우리는 태양을 사용하겠다고 누군가에게 허가받지 않았다.


우리는 태양을 사용하겠다고 월세를 내듯 누군가에게 사용료를 내지 않는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응당 그래야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태양이 주는 유익을 누린다. 

인간은 태양을 손에 쥐어본 적이 없다. 그래서 태양의 촉감을 모른다. 


물론 인간의 손은 태양을 쥘 만큼 크지도 않고, 태양도 인간의 손에 쥐어질 만큼 작지 않다. 


좌우지간 인간은 태양을 물리적으로 느낀 적 없다는 이유로 태양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즉 태양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삶을 통해 확실하게 알고 있다. 


태양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태양의 존재는 확실시되고 오히려 부각된다. 

태양의 반대방향으로 인간이 온 힘을 다해 뛴다고 한들 어디까지 뛸 수 있을까. 


언제까지 뛸 수 있을까.

 

아무리 뛰어도 죽을 때까지 뛰어도, 지구에 사는 인간은 태양의 영향력 바깥을 벗어나지 못한다. 

'나는 태양을 믿지 않아. 태양의 빛도 필요 없으니 더 이상 빛이 나의 피부가 닿지 않게 해 줘.' 


인간이 애절하게 말해도 태양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빛나고 있다. 


태양은 엄청난 에너지로 인간이 살아가는 내내 빛을 공급한다.


심지어 자신의 반대방향으로 도망가는 사람에게도.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손바닥으로 태양을 가릴 수도 없다. 


물론 일시적으로는 인간이 태양을 가린 척할 수 있다. 


인간이 손바닥의 각도를 조절해 시야에 보이는 태양을 막으면 된다. 


그러나 그때도 손가락 사이사이로 들어오는 빛을 피할 수는 없다.

그리고 손바닥의 그림자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빛을 받고 있다.


심지어 그림자조차도 태양 때문에 생기는 부수적인 결과물이다. 


태양은 인간의 손바닥에 가려지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이 두 손으로 해를 막는 순간에도 태양의 영향력은 계속되고 있다.   

태양은 그 자리에서 계속 빛나고 있다. 


손바닥의 각도를 조금만 틀어도 다시 해가 시야에 들어온다.  


태양은 인간의 손바닥에 절대 가려지지 않는다. 

신이 없다고 하는 것은 태양의 반대방향을 향해 열심히 뛰는 것과 같다.


세상을 살면서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내가 잠들고 싶은 시간에 잠들 수 있다면 세상에 불면증으로 고생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내가 누군가와 친하게 지내고 싶다고 무조건 사이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면 세상에 왕따라는 개념은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날 수 있다면 세상에 아동학대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은 내가 바라는 바와 상관없이 움직일 때가 얼마나 많은가. 


때로 세상은 나를 약 올리는 것처럼 나의 소원과 역방향으로 갈 때도 상당수다. 


연봉을 올리고 싶은데 이번 연도에도 회사는 연봉 동결이란다. 


친구를 사귀고 싶은데 그 친구는 내가 다가갈수록 거부감을 느끼는 듯하다. 


열심히 공부를 해도 시험에서 떨어지고 열심히 취업 준비를 해도 1차 서류 통과가 쉽지 않다. 

그 소망이 나를 위한 것이든 가족을 위한 것이든 인류를 위한 것이든 인간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고자 평생을 노력하며 산다. 


때로 인간은 내가 왜 그것을 원하는지도 잘 모른 채 소망에 시달리며 소망의 완성을 위해 향방 없이 달려간다. 


그러다 결국 최선을 다한 결과로 최선의 참패를 맛보곤 한다. 


이런 현상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결국 인간은 자신의 힘만 갖고 이 세상을 살 수 없다.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수많은 경험을 통해, 우리는 나의 의지와 소망뿐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이 작용함으로 삶이 완성된다고 정의해야 한다. 


그래서 인간은 기도하는 존재로 태어났다. 

기도는 소망의 구현을 위해 인간이 민낯으로 신에게 다가가는 것이다.


사회적 지위와 가족 안에서의 역할 등 나를 둘러싼 모든 장신구를 내려놓고 진실함 하나로 신과 만날 수 있는 통로가 기도이다. 


기도할 때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난다. 

아무리 꾸미려 하고 아무리 입에 발린 말을 한들 마음속 깊은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말한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이 그게 아니잖아.' 


기도는 신의 마음을 알아가는 대화의 장이요, 오로지 자연인으로서 자신의 무의식까지도 들여다보는 유일한 순간이다. 


그렇게 인간은 소망을 이루고자 기도하다가 묻어두고 싶었던 자신의 내면과 조우한다. 

사실 신은 인간이 기도하길 기다려왔다. 


인간이 신을 잊은 순간에도 인간이 신을 부정하는 순간에도 신은 인간이 기도하길 기다려왔다.


인간이 자신은 기도하는 게 처음이라고 고백할 때, 신은 이렇게 응답할 것이다. 


'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네가 기도하길 기다려왔어.'


다만 인간이 그동안 신의 진심을 몰랐을 뿐이다. 

인간은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아 기도하고 기도함으로써 신을 알아간다. 


소망의 보류, 소망의 부재, 소망의 실패를 통해 인간은 신과 만난다. 


태양을 얻기 위해 인간이 한 것은 없다. 


마땅한 권리처럼 인간은 자유롭게 태양이 주는 유익을 누린다. 


인간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햇빛을 쬘 수 있다. 


인간은 팔만 뻗으면 신을 만날 수 있다. 


신은 태양처럼 늘 그 자리에서 빛을 공급하며 인간이 기도하길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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