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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왜 고통을 겪는가. 고난이 넘쳐나는 삶에서 -

인간의 고통을 딛고 태어난 인간. 그렇게 태어난 인간 또한 고통을 겪는다

인간은 왜 고통을 겪는가.


특별한 이유가 없다. 아니 때로는 조물주의 특별한 계획으로 고난을 통해 정금처럼 나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상당수의 고난에는 뜻깊고 세밀한 의미가 숨겨져 있어 그것을 알게 기보다, 인간이 길을 가다가 예기치 못하게 오르막길을 만나는 형국일 때가 많다. 설령 고난의 뒷머리에 고차원적인 뜻이 있다고 해도, 신은 그 뜻을 일일이 알려주지 않는다. 대부분 인간은 정확한 이유를 모르고 고통을 받는다.


고난이 괴로운 이유 중 하나는 내가 고난을 당하는 까닭을 명료하게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열심히 사는데 세상이 나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내가 선한 뜻으로 사람을 대해도 외면당할 때가 있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상사는 나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최선을 다해도 때때로 사람들과 지곤 다. 직장에서 살 만하면 집에서 일이 생기고, 집이 안정될만하면 직장에서 괴로워진다.


특별히 남에게 큰 죄짓고 살지 않은 것 같은데, 인생이 편안해지지 않고 늘 한편에 불안이 잠재되어 있다.

  

세상에 산이 있고 바다가 있듯 인생에는 고난이 있다. 산 없앨 수도 없고 바다를 마르게 할 수도 없다. 인간은 그렇게 할 수 없다. 그게 인간의 한계이다.


인생이라는 거대한 지형 가운데 고난이라는 작은 지형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내 의지대로 없애지 못했다. 그래서 산을 등반하바다를 건너듯이 그저 고난에 적응하고 대처하며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고난은 미리 오지도 않고 늦게 오지도 않는다. 고난은 인간이 고난을 겪어야 하는 바로 그 정각에 온다. 고난의 기간을 인간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없다. 대게 고난은 인간이 두 손을 들 때까지 떠나지 않는다. 고난은 고난이 떠나야 하는 그 시각에 정확하게 떠난다. 다만 인간이 고난이 마무리되는 시점을 예측하지 못할 뿐이다. 


 점이 인간의 소망이자 비애이고 아픔이다.

 

인간은 약한 존재이다. 인간이 강해지려고 노력한다는 것 자체가 약함을 전제로 한다. 강한 사람은 물론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그렇게 강해지까지 많은 상처를 받고 많은 눈물을 흘렸다. 고통으로 다져진 이후에야 그 사람은 강해진 것이다. 인간은 상처 받는 존재이고 앞으로도 상처 받는 존재로 살아갈 것이다.


인간은 혼자 살지 못한다. 서로 모여서 힘을 주기도 하고 얻기도 하며 살아간다. 인간이 혼자일 때 고독한 이유는, 원래 인간은 모여 살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자신의 힘만으로는 살지 못한다. 나의 역량이 아무리 뛰어난다 한들 회사가 나를 원해야만 입사할 수 있다. 내가 상대를 좋아한다고 무조건 친구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사람도 나를 친구로서 좋아해야 비로소 진짜 친구가 된다.  


이렇게 인간은 자신의 힘만으로 누릴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내가 삶에서 누리는 모든 것들 중 상당수가 타인의 도움과 선택으로 버무려져 있다.


인간은 혼자 있을 때는 고독하고 같이 있을 때 갈등한다. 서로 마음이 잘 맞아 말을 안 해도 통하는 사이라면 좋겠지만, 인간은 모두 다 다르게 생겼다. 눈, 코, 입이 있는 것만 똑같 외모가 다 다르듯이, 인간의 마음은 다 다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맞지 않는다. 맞지 않아서 맞춰가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생긴다. 맞춰가는 게 힘들다. 매일 어긋나고 불협화음이 난다. 너는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나는 네가 이해가 안 가 하면서 상대와 다투게 된다.


그러다가 결국 서로 갈라진다. 싸우다 지쳐버린 거다. 애초부터 인간은 혼자이며 독립적인 존재로서 서로에게 온전히 용납되기 힘든 존재라는 걸 아는 데까지 인간은 꽤 큰 대가를 지불하곤 한다.


인간은 왜 그렇게들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가. 직장에서도 무슨 말들이 그렇게 많은지, 누가 무슨 행동만 해도 그게 발화가 돼서 미움을 받는다. 일일이 해명할 수도 없고 답답할 때가 많다. 그려려니 하려고 해도 억울함이 치솟아 오른다.


그런데 그게 인간의 특성이다. 인간이 원래 못되게 생겨먹었다. 착하게 사는 태도는 인간이 의지를 갖고 본성을 거스를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착하게 사는 건 어렵다. 착하게 사는 게 어려워서 착하게 살려고 하다가 대부분의 인간은 그걸 포기한다. 착하게 사는 게 어렵기에 못되게 사는 사람이 많다. 못되게 사는 게 익숙해져서 나중에는 못되게 살아도 그게 못된 건지 모른다. 무뎌지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에는 나쁜 일들로 넘쳐난다.  

고난이 많은 이유는 인간이 본성대로 행해서이다.


"이런 고난을 당해서 제가 더 성숙해졌습니다. 오히려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는 사람이 있다. 그 고백 자체는 훌륭하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그런 고백을 하는 사람을 주목하는가. 왜 그런 사람들이 매체까지 나와서 힘들었던 경험과 감사를 동시에 고백하는가. 왜 매체는 고난과 감사를 주제로 뭔가를 만들어 우리에게 자꾸 인사이트를 주려고 노력하는가.


고난을 겪는 상당수의 사람은 그 고난으로 인해 두고두고 고통받는다. 잘 생각해 보면 겪지 않는 게 나을 뻔한 고난이 꽤 많았다.


고난 뒤 감사하는 이유 중 하나는 상황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상황에서 인간이 반응할 수 있는 최선이 감사이기 때문이다. 최선의 길을 택한 그 의지는 거룩하고 선한 것이기에 마땅히 인정받아야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 고난으로 인해 실질적인 트라우마를 겪는 것 또한 사실이다.


고난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꿔보라고 누군가는 충고할지 모른다. 그러나 무작정 그 충고를 새기기엔 깊은 상처로 삶에 지장을 받는 사람이 많다. 관점을 바꾸라고 충고하는 그 사람도 동일한 고난을 겪으면 정말 의연하게 감사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관점을 바꾸는 건 당사자의 몫이고 고난을 대하는 태도를 제삼자가 결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고난 덕에 가족의 소중함을 알게 됐다고 누군가는 이야기한다. 맞는 말이고, 좋은 의미가 담긴 말이다. 그러나 때로는 고난 때문에 친구는 물론 가족마저 철저히 타자화되는 경험을 한다. 부모도, 형제도, 자식도 내가 겪는 이 고통을 물리적으로 대신 겪을 수는 없다.


물론 옆에서 힘들어하고 아파하는 사람도 가족이지만, 결국 내가 아니기 때문에 온전히 나의 고통을 함께할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가족은 고난을 겪는 당사자를 더 몰아붙이기도 한다. 가족은 당사자를 너무 잘 알아서 위로는커녕 매운 소리를 하며 벼랑 끝으로 밀어 넣기도 한다.  


그래서 인간은 고난 속에서 철저한 고독을 겪는다. 인간 결국 혼자라는 말을 체감한다. 어디선가 들어왔던 그 말은 나에게 살아 움직이는 실제가 된다. 그런 경험이 잊히지 않는 상흔으로 남는다. 절대적인 외로움 속에서 평소에 잘 찾지도 않던 신까지 애절하게 찾는다.


인간은 늘 무언가를 의지하고 싶어 한다. 고독의지대상이 있기를 바라는 소망이 무력화될 때 나타나는 감정이다. 고독은 인간이 인간과 함께할 수 없다는 절망에서 비롯된다. 있는 힘껏 팔을 뻗어 누군가를 잡으려 해도 아무도 없다는 걸 아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따라서 고독은 인간이 스스로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자 바꿀 수 없는 명제이다.


인간이란 존재 옆에 늘 고독이 따라다닌다.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모르다가, 고난이라는 거대한 암초를 만나면 그제야 슬며시 고독이 고개를 든다. 나 여기 있었어. 너는 잠시 날 잊고 있었던 것 같은데. 나 사실 네 옆에 계속 있었거든. 고독이 나에게 친근하게 말을 건다.  


고난 겪는 인간은 요즘 말로 하면 "현타"가 온다. 나는 누구이며 무슨 죄를 지어 여기에서 이런 일을 겪는가 자괴감이 든다. 이름 모를 섬에 부딪혀 난파된 배 조각처럼 시간 속을 표류하며 괴로워한다.


그런 대가를 치르면서라도 고통이 유익이 되면 좋은데 그렇지 못한 경우가 부지기수이다. 두고두고 상처라는 굴레 속에 자신을 얽매게 된다.


밝았던 사람이 어두워진다. 인간관계에 적극적이던 사람이 점차 소극적인 태도로 바뀐다. 씩씩했던 사람이 점차 기운이 없어진다. 사람이 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어른이 되어가는 거라지만, 상처를 많이 받는 게 어른이 된다는 의미라면 참 슬픈 것이다.  


인간은 왜 고통을 겪는가. 악이 팽배한 이곳에서 고난을 면하기란 어렵다. 그리고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우리 왜 이 고난을 겪는지 모른다. 고난이 고통스러워서 괴롭고, 고난의 이유를 몰라서 괴롭다. 괴로워한다고 일일이 이유를 알 수 있는 게 아니라서 더 괴롭다. 그렇게 인간은 고난을 겪으면서 이중으로 고통받는다.


이 글을 다 읽고 난 다음에도 인간은 고난을 겪을 준비를 해야 한다. 인간은 내일 일을 알 수 없다. 그래서 어떤 고난을 겪더라도 이겨낼 거라는 마음의 준비 운동을 해야 한다.


인간의 삶은 고난을 겪는 시간, 고난을 겪기 전에 준비하는 시간으로 크게 나눠진다. 때로는 삶에 행복도 오지만, 행복의 특성은 내 곁에 오래 머무르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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