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시스트는 별 것 아닌 일에 과도하게 집착한다. 예를 들어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남이 모른다고 말하면, 규격에 안 맞는 분노를 보인다. 마치 타인이 중대한 법을 어긴 것처럼 그는 흥분한다.
나르시시스트는 남보다 우위에 있기를 원한다. 그래서 뭘 모른다고 표현하는 상대를 발견하면 기뻐한다. 서열을 확실히 정리하는 절호의 기회라고 여긴다.
그는 즐거움을 감춘 채 그런 것도 모른다며 상대를 타박한다. 정작 나르시시스트는 지식의 깊이가 얕은데 말이다.
수십 년 전, 내가 사회 초년생 시절 겪었던 일이다.
어느 학원에 면접을 보러 갔다. 당시 카카오 맵이 없었기에 약도를 보고 장소를 찾았다. 학원은 구석진 골목에 있어서 찾는 게 여의치 않았다.
여기저기 네온사인이 켜지고, 퍼렇게 질린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 도대체 학원이 어디 있다는 거지?
면접 시간이 가까워올 때 학원 원장이 전화를 했다. 자초 지경을 말하자 그는 학원 위치를 설명했다.
- 파스쿠찌 있는 건물 쪽입니다.
파스쿠찌? 그때도 그 카페가 유명했었나. 주로 믹스커피만 타 먹던 나는 처음 들어보는 카페명이었다.
- 파스쿠찌요?
내가 되물었다. 그때였다. 존댓말로 차분하게 학원 위치를 설명하던 원장의 태도가 돌변했다. 그는 신경질을 버무린 반말로 이렇게 쏘아붙였다.
-아니, 파스쿠찌도 몰라?
그가 씹다 버린 껌처럼 끈적하고 불쾌한 잡음을 뱉었다.
나는 그 사람과 대면한 적도 없었다. 면접 때문에 전화통화만 한 번 했을 뿐이었다. 엄연히 말하면 서로 잘 모르는 사이였다. 그런데 그 입장은 원장도 마찬가지 아닌가?
파스쿠찌를 모른다는 이유로 면접자에게 짜증을 내다니. 고작 상호명 하나 때문에. 학원 위치를 묻는 평이한 상황에서도 원장은 망설임 없이 부정적인 감정을 표출했다.
나는 당황했다. 지금이라면 원장의 몰골이 눈에 훤히 그려져 면접을 취소했을 거다. 하지만 당시 나는 막나가파 유형을 많이 만나지 못했었다.
당연히 파스쿠찌 발언으로 원장이 이상한 사람이라는 건 감지했다. 다만 그가 내뱉는 불쾌한 신호음이 구체적으로 의미하는 바를 짚지 않고 넘겼다. 게다가 면접은 기회였다 (물론 그 기회는 썩은 동아줄이었다).
면접관의 태도는 회사의 이미지와 직결된다. 반말과 신경질의 투 트랙을 가차없이 밟는 원장을 보니, 학원의 이미지도 순식간에 나빠졌다.
이처럼 나르시시스트도 인간관계의 초입부에서만 친절한 태도로 가식을 떤다.
설령 그 순간만큼은 진심이어도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속담처럼 나르시시스트는 정상적인 태도를 유지하지 못한다. 결국 그는 본성에 유혹당하고 만다.
나르시시스트는 예의를 갖추는 척하면서 수박 겉핥기식으로 좋은 사람을 '흉내 낸다.' 그러나 속마음은 다르다.
그가 몸에 휘감은 화려한 포장지는 삭은 종이로 만들어졌다. 그 종이는 조금만 타격을 받아도 풀풀 먼지를 내며 초라하게 찢어진다.
나르시시스트는 존댓말, 매너 따위로 악의를 대충 감추고, 본심을 드러낼 기회를 기다린다. 그러다가 파스쿠찌를 모른다는 말에 터무니없는 분노를 보이는 것처럼 나르시시스트는 엉겁결에 못난 면을 삐죽 드러낸다.
따라서 나에게 친절하다는 이유로 타인을 한치의 의심 없이 믿을 필요가 없다. 나르시시스트도 친절을 무기로 공격할 타깃을 고르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스트가 어설픈 따스함을 거두고 진심을 보일 때는 이미 그와 친해진 뒤라 관계를 정리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상대가 좋은 사람이라 친절한 것인지 나르시시스트라 일시적으로 친절한 것인지 구분해야 한다. 다시 말해 테스트가 필요하다. 적어도 세 번 정도는 상대의 의중에 어긋나게 행동해 보라.
만약 그가 나르시시스트라면 눈웃음 뒤로 숨겼던 기묘한 어둠을 드러낼지 모른다.
만약 그가 나르시시스트라면 확 짜증을 낼 수도 있다. 그가 작은 일에 과한 액션을 하면 상대는 일단 당황한다. 분노하는 나르시시스트를 가라앉히느라 그럴 필요 없는데 구구절절 변명하게 된다. 친구를 만난 후 뭔가 속은 것 같고 억울하다는 감정이 쌓인다면 그가 나르시시스트인지 돌아봐야 한다.
초반에 나르시시스트는 힘든 게 있으면 얼마든지 얘기하라며 웃는다. 그러나 막상 상대가 마음을 털어놓으면 그는 공감하기는커녕 빈정거린다. 피식 웃거나 별 것 아니라는 반응으로 상대의 의견을 깎아내린다.
사실 나르시시스트가 속마음을 말하라고 유도하는 것은 일종의 '아랫사람 취급받아도 보복하지 않을 사람 구하기' 구인광고다. 그 자리는 정규직인데 월급이 없다. 오히려 월급을 뺏길지도 모른다.
그는 덫을 놓고 상대가 오길 기다린다. 나르시시스트와 친해지면 그가 그동안 나에게 서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놀란다. 그 마음을 꾹 눌렀던 나르시시스트는 친해진 다음에 서서히 보복심을 표출한다.
나르시시스트는 소소한 일에도 커다란 복수심을 경험한다. 심지어 그는 자신을 따뜻하게 대하는 사람에게도 결국 보복감을 느낀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는 불타오르는 증오 때문에 자꾸 상대를 비꼬고 비웃는 것이다.
드디어 나는 건물을 찾아냈다. 어두운 복도를 거쳐 좁은 계단을 올랐다. 2층 벽에 매달린 학원 간판이 보였다. 학원으로 들어가는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런데 인기척이 없었다.
학원인데 학생들이 보이지 않았다. 하교 후라서 시간대도 적절한데 아무도 없었다. 학생들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학원을 정식으로 열기 전이었나. 그런데 개원을 앞뒀다고 보기에는 복도나 게시판에 세월의 때가 묻어 있었다.
이렇게 조용한 곳에 파스쿠찌도 모르냐고 히스테리 부리던 원장이 있다고? 골목을 헤맨 데 이어 텅 빈 건물 안을 눈으로 휘적거리며 나는 반신반의했다.
그때 불이 켜져 있는 공간을 발견했다. 직사각형의 좁은 방에 학원 원장이 앉아 있었다. 나는 원장실로 들어갔다.
정장 차림의 원장은 예상보다 평범한 인상이었다.
원장은 형식적인 질문을 던지다가 이런 질문을 했다. 처음 들어 보는 유형의 질문이었고, 이후에도 수십 년 간 면접을 보며 같은 질문을 들은 적이 없다.
- 너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
알고 있었다. 얼굴도 본 적 없는 면접자한테 카페명을 모른다고 신경질 부리던 사람. 그래서 학원 이미지도 도미노처럼 무너지게 만든 원장. 그게 다였다. 뭐가 더 있을까.
-.....
나는 답변하지 않았다. '누구인지 알아?'라는 질문은 '내가 학원 원장이라는 걸 알아?'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원장은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입이 근질거렸다. 그래서 징검다리용으로 불필요한 질문을 던졌다.
침묵이 감돌았다.
원장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책장에서 OO일보를 꺼내 들었다. 미리 봤는지 신문의 각 면이 흐트러져 있었다. 원장이 들이민 부분은 작은 사진과 함께 실린 기사였다.
'OOO 원장, 가난한 학생들을 위해 전 재산을 독서실 건립에 바쳐'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신문 기사 한편에 낯익은 얼굴 사진은 학원 원장이었다.
원장은 면접관의 본분을 망각하고 자신이 기사에 실렸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 돌발적인 행동을 했다.
원장이 두툼한 손가락으로 사진을 툭툭 치면서 흐뭇하게 말했다.
- 난 이런 사람이야.
그래. 그런 사람이다. 그래서 뭘 어쩌란 건가. 감탄이라고 하라는 건가.
원장은 면접을 무엇이라고 여기는가. 그는 면접자의 입장이 된 적도 없나. 면접자가 어떤 마음으로 이 자리에 왔을지 알고나 저러는가.
엉뚱한 상황에 나는 리액션을 하지 않았다. 원장은 실망했을 것이다.
원장은 신문을 조심스럽게 오므려 제자리로 꽂았다. 면접도 저 신문처럼 원위치로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행동이 이상하게 보인다는 걸 의식하지 못했다.
- 학원계는 연예계하고 비슷해. 잘 나가는 사람들은 1% 정도이고 나머지는 주변부에 있지.
일단 원장은 1%에 속하지는 않은 듯했다. 설령 화려한 과거를 지녔더라도 현재 쇠락해가는 중이었던 걸까. 원장의 말투에 씁쓸함과 체념이 배어 있었다.
- 내 말대로만 잘 따라오면, 학원가에서 네가 뜰 수도 있어. 그렇게 할 수 있겠어?
그 말을 하는 원장의 태도는 무척 비장했다. '내가 시키는 대로만 군말 없이 따라오면, 네가 학원계에서 유명해질 수도 있어.'라는 막연한 공수표였다.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원장은 1차로 파스쿠찌를 발판 삼아 날 공격했고, 2차로 신문을 발판 삼아 날 공격(?)했다. 보이지 않는 주먹으로 2방을 맞았는데, 바람 잡는 듯한 저 말이 좋은 의도로 들리지 않았다.
이해심을 넓혀 본다면, 원장이 신문을 보여 준 행동은 이 학원이 믿을만한 곳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함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내가 누군지 알아?'라는 질문은 신뢰를 얻으려는 느낌이 아니었다. 원장의 말투, 표정, 제스처로 볼 때 그 뉘앙스는 자기 자랑이었다. '나는 좋은 일을 해서 신문까지 실린 사람이야. 나는 꽤 괜찮고 유명한 사람이라고.'
물론 학생을 위한 독서실 건립은 선행이다. 하지만 선행을 적극적으로 알리는 원장의 태도는 지나친 자화자찬 같았다. 나는 거부감이 들었다.
면접은 면접자를 심층적으로 알아보는 시간이다. 그러나 원장은 나에게 별다른 질문도 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만 이어갔다. 면접이 이런 식으로 끝나나 싶었는데 방심하면 안 되는 거였다.
원장은 3차 공격으로 굳히기(?)에 들어갔다.
- 나랑 일하려면 모든 걸 말해야 해.
뭘 말하라는 건가. 이야기의 맥락이 전혀 다른 데로 튀었다. 그리고 일한다는 것과 내가 그 원장에게 모든 걸 말해야 한다는 게 도대체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가.
결정적으로 면접관이 시종일관 나에게 반말을 하는 게 이상했다. 그는 원래 알았던 사람을 대하듯이 나를 지나치게 편하게 대했다. 등받이 의자에 깊숙이 기댄 그의 자세가 오만하고 삐딱했다.
얼굴을 본 지 한 시간도 안 됐는데 다짜고짜 모든 걸 말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원장이 황당하기만 했다.
원장은 이런 질문을 했다.
- 너는 OO친구(여자 친구 혹은 남자 친구) 몇 명이나 사귀어봤어?
-....?
모든 걸 말하라는 게 남의 사생활을 캐고 싶다는 건가. 그리고 OO친구 사귀어봤냐는 것도 아니고, 몇.명.이.나.사.귀.어.봤.냐.는 거였다. 몇.명.이.나. 대답할 가치도 없는 질문이었다.
결론적으로 나는 면접에 합격했다. 그런데 합격이 전혀 기쁘지 않았다.
원장이 국어와 수학 문제집을 주며 강의안을 준비해오라고 했다.
문제집을 들고 오면서 오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학원에서 강사로 일한다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길을 가게 된다.
내게 가르치는 재능이 있는지 검증되지 않았다. 재능의 유무는 원장도 모른다. 원장은 아무것도 모른다. 모르는 상태에서 합격한 게 찜찜했다.
가르치는 분야에 관심이 있어서 지원했지만 막상 강의를 준비하려니 마음이 달라졌다.
문제집 내용은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국어국문학과나 수학과를 나오지 않았다. 타 분야를 갑자기 준비해서 강의한다는 게 무리인 듯했다.
내가 수업을 듣는 것도 아니고, 수업을 진행하는 거다. 가르치는 사람은 한 분야에서 정통해야 한다. 이치상 내가 최적의 적임자는 아니었다.
어린아이가 어제 새로 산 장난감을 자랑하듯 '내가 누군지 알아?'라는 뻣뻣한 태도를 고수하는 원장.
자신의 태도가 타인에게 어떻게 비칠지 전혀 모르는 분별력 없고 무감각한 원장.
밑도 끝도 없는 자랑질과 황당한 질문에 시달린 나는 집으로 돌아와 한숨 잤다. 그리고 악몽을 꿨다. 그것도 이틀 간이나.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았다. 이곳은.
나는 면접자다. 합격을 무르면 다시 백수가 된다. 합격까지 했는데 안 오겠다는 면접자를 학원 측도 안 좋게 볼 것이다.
그런데 상관없었다. 학원이 나를 안 좋게 본다고 해도, 내가 학원을 안 좋게 보는 것만큼은 아닐 것이다.
이미 원장은 본인의 언행으로 알아서 신뢰를 깎아먹고 있었다. 애초부터 징조가 나빴다. 첫인상이 전부는 아니지만, 적어도 원장은 파스쿠찌를 모르네 아네 했던 첫인상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전화로 안 오겠다고 전달했지만 원장은 일단 다시 와서 이야기하자고 닦달했다. 그래서 문제집도 돌려줄 겸 다음 날 학원으로 갔다. 내가 그만두겠다고 통보하자 원장의 얼굴이 푹 익은 토마토처럼 새빨개졌다. 그리고 그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한 마디를 날렸다.
- 정말 특이한 얘(?)야.
내가 아니라 학원 원장이 정말 특이했다.
면접자가 합격한 회사에 가지 않는 것은 예외적이다. 그러나 특이하지는 않다. 면접관 때문에 회사에 대한 호감도가 떨어져 입사를 거부한 사례가 정말 특이한 걸까.
나는 원장에게 왜 이상한 질문을 하냐고 따지지 않았다. 여러 모로 당장 가르치는 게 힘들고 내 길이 아닌 것 같다는 부분적인 진실을 말했다.
더군다나 학원에 학생이 없는데 당장 안정적인 수익 창출도 어려워 보였다.
무엇보다 원장은 월급을 얼마나 줄지 확답이 없었고, 무조건 강의안을 준비해오라고 했다. 중요한 부분을 어물쩍 넘기려는 태도가 별로였다.
오로지 돈 때문에 직장을 다니는 것은 아니다. 돈도 돈이지만 자아실현이라는 목표도 있다. 때로 돈보다 자아실현의 목적이 앞설 때도 있다.
그렇다고 예비 고용주가 월급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는 걸 용납하고 싶진 않다.
원장은 '내가 누군지 알아?'라는 질문으로 자신을 거창하게 알렸다. 그랬던 원장이 정작 월급에 대한 언급은 제쳐버린 것이다. 나에게 열정 페이라도 강요하는 게 아닌지 싶었다.
또 강의 역량과 OO친구를 사귄 횟수 따위는 상관관계가 없다. 뭐가 그렇게 궁금해서 경박한 질문을 마구잡이로 해 대는가.
왜 파스쿠찌를 모르면 안 되는가. 우리나라 대통령이 누구인지 모른다는 것도 아닌데. 시답지 않은 일에 왜 혼자 호들갑을 떠는가. 대면도 안 한 사람한테. 아니, 설령 얼굴을 봤더라도 그건 무례한 행동이었다.
'내가 누군지 알아?' 이런 질문은 왜 하는가. 알면 뭐하고 모르면 뭐할 건가. 면접 분위기 싸해지는 건 정말 몰랐는가.
백번 양보해서 원장이 면접자에게 믿음을 주고 싶었다면, 애초에 파스쿠찌를 모른다고 면박 주면 안 됐었다. 그리고 존대를 해야 맞았다. 원장은 상식적인 반응을 보여야 마땅했다.
원장이 멋대로 신경질을 부린 배경에는 자신이 면접관이고, 면접자의 고용주가 될 수도 있다는 안도감이 존재했다. 그동안 그는 직급이 낮은 사람에게 '파스쿠찌도 몰라?'라는 태도로 일관했겠지. 따라서 무례함의 대가를 크게 치른 적도 별로 없었을 것이다.
원장은 상대를 내키는 대로 대해도 불이익이 받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다. 그는 허술한 확신에 오만하게 기대어 거들먹거리는 추태를 부렸다.
면접 중 원장이 이렇게 말했다.
- 내가 왜 이러냐면, 혹시 나중에 네가 안 올까 봐 그래.
합격자가 변심하기를 원하지 않았다면 원장이 진중하게 면접에 임했어야 옳았다. 이전에 합격한 면접자가 연락을 끊은 적이라도 있던 걸까. 그랬다면 원장은 자신은 멀쩡한데 면접자가 이상하다며 입장이 뒤바뀐 해석을 내놓았을 것이다.
철없는 원장의 질문에는 쓸데없는 호기심을 채우려는 의도가 있었다. 그리고 모든 걸 말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나와 일하려면'이었다. 본인이 고용주라는 입장을 부각해서 타인의 행동을 조종하려는 모습이 불쾌했다.
원장은 자신이 실린 신문을 본 상대가 "와, 원장님. 너무 대단하시네요. 이런 원장님이 있는 학원은 정말 좋은 곳이군요." 이럴 줄 알았을까.
글쎄, 그런 면접자가 없었을 거라고 장담하지 않겠다. 그런데 오히려 나는 과도한 액션으로 자신이 어필하는 원장의 꿍꿍이가 의심스러웠다.
그리고 대개 사람들은 'OO을 알아?'라는 형식의 질문을 받으면 불쾌해한다.
그런 질문은 자신이 아는 걸 상대가 모를 수 있다는 전제가 깔린다. 또 'OO을 알아?'라고 질문하는 사람은 그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오만해 보인다. 상대가 무엇을 아는지 모르는지 체크하려는 듯한 인상을 남긴다.
원장이 본인의 말만 잘 들으면 학원계에서 뜰 수 있다고 발언한 것도 꺼림칙했다.
설마 그런 말을 들은 상대가 "와, 원장님. 그럼 제가 원장님 말에 토 달지 않고 잘 따를게요. 그럼 저에게 정말 길을 열어주시는 거죠?"라고 감탄사라도 내뱉으며 좋아할 줄 알았을까. 원장이 그런 귀엽고 끔찍한 상상을 했다면 차라리 웃고 싶다.
원장의 태도를 봤을 때, 그의 의미 없는 장담은 면접자를 함부로 부리기 위한 밑밥이었다. 그리고 '내 말대로 하면'이라는 조건부는 상대가 의견을 표출하는 걸 사전에 막으려는 시도였다. 타인을 통제하는 말을 노골적으로 쓴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원장의 얼굴이 그렇게까지 빨개진 이유는 무엇일까.
원장은 고용주임에도 불구하고 심리적으로 아쉬운 입장이 됐다. 합격한 면접자가 입사를 거절했으니 말이다.
물론 원장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입사를 거절하면 나는 일자리를 다시 구해야 한다. 내가 더 힘든 입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장은 본인이 아쉬운 입장처럼 비치는 것에 불편해했다. 그는 거절을 당해 자신의 지위가 낮아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본인의 위치를 끌어올리고자 나에게 화살을 돌렸다. '특이한 얘' 운운하면서 말이다.
내가 딱 잘라 일자리를 거절한 행동은 고압적인 태도로 일관했던 원장에게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내 입장에서는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대처였다. 그렇게 안 하면 어떻게 거절하는가.
그런 보편적인 상황도 원장은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원장은 상대와 자신이 동등한 입장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물론 고용주는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은 넓고 사람은 많다. 살면 살수록 인간은 자신이 모래사장의 모래 알갱이 같은 존재라는 진리를 깨닫는다.
본인이 천년만년 학원 원장을 할 것도 아니다. 그가 고용주로 죽 산다는 보장도 없다. 그럼에도 원장이 대책 없이 타인을 깔보는 게 역겨웠다. 갑의 위치에 있다 해도 사람이라면 겸손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원장은 편협한 시각으로 면접자를 바라보며 면접관이라는 자신의 입장을 의식해 알량한 권력을 휘둘렀다.
안타깝게도 원장의 이런 태도 때문에 새로운 사람을 고용하는 건 힘들어 보였다. 면접자는 면접관을 관찰하면서 입사 이후의 상황을 그려본다. 예의를 갖추지 않은 면접관은 곧 예의를 갖추지 않는 회사를 의미한다.
'저 면접관 개인에게 문제가 있을 뿐이야. 사람은 다 다르잖아. 막상 입사하면 다른 직원들은 좋은 사람들일지도 몰라.' 면접자가 이렇게 생각할까, 과연?
면접관도 마찬가지다. 면접관은 예의를 갖추지 않는 면접자를 보고, 그가 입사해서 예의를 갖출 수도 있다고 예상할까?
나르시시스트도 이 면접관처럼 타인보다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라는 의식에 젖어 있다. 그리고 그 우월의식을 주체하지 못해 티 내고 싶어 한다.
그런데 나르시시스트의 특권의식은 뚜렷하고 타당한 근거가 없다. 근거가 있더라도 아주 미약하다. 수많은 기사 중 하나일 뿐인데 온갖 자랑을 했던 누구의 경우처럼 말이다.
내가 알고 지냈던 B는 전화통화 중에 이런 말을 했다. "나는 객관적이야. 그런 사람들이 있어." 그는 본인의 판단력이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다고 주장했다.
물론 사실이 아니었다. 평소 B는 타인을 바라볼 때 비판할 것만 생각한다고 자신을 자랑했다. 그는 누군가가 잘못해서 자신이 고쳐줬다는 식의 무용담을 종종 흘렸었다.
그런데 그냥 B는 모든 사람과 사물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 부정적인 관점은 객관적인 관점이 아니다. 그는 마음이 병들어 왜곡된 시선으로 모든 상황을 해석했다.
물론 B는 자신 자신을 평가할 때만큼은 비합리적일 정도로 낙천적이었다. 한 마디로 그는 지독하게 주관적인 사람이었다.
B가 '객관성'이라는 단어로 자신을 표현한 진짜 이유가 있었다. 그는 상대에게 자신의 의견이나 판단이 맞다는 반응을 얻고 싶어 했다. 그런데 B는 본인의 무의식을 인지하지 못하고, 자기만족을 위해 '객관성'이라는 카드를 불쑥 내민 것이다.
원장은 '내 말대로만 따르면' 뜨게 해 주겠다든가 '나랑 일하려면' 모든 걸 말해야 한다고 거들먹거렸다. 여기에는 '통제'의 개념이 포함된다. 나르시시스트의 태도가 이와 비슷하다.
나르시시스트에게는 진정한 친구가 없다. 왜냐면 그는 타인을 '통제'해야 하는 대상으로만 바라본다. 나르시시스트의 자존감은 그가 사람을 통제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판가름 난다.
나르시시스트는 상대가 자유롭게 생각을 말하고 감정을 표현하면 고깝게 생각한다. 왜냐면 나르시시스트의 입장에서 그토록 해맑은 상대는 통제 바깥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방적이고 건강한 마음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을 나르시시스트는 적으로 규정하고 괴롭힌다.
만약 언젠가부터 누군가가 나에게 툭툭 신경질을 내고, 사사로운 일에 핀잔을 준다면 그가 나르시시스트일 수도 있다고 의심하자.
그가 불쾌하게 구는 까닭은 내가 통제받지 않기 때문이다. 마음껏 들판을 누비며 쾌활하게 사는 나를 보면서 나르시시스트가 위협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수하로 부리고 싶은 사람을 마음 속으로 찍어둔다. 하지만 그 사람이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의지적으로 행동한다. 그럼 나르시시스트는 어이없게도 상처를 받는다.
거침없는 상대의 태도를 보고 나르시시스트는 혹시 자신이 만만하게 보이는 사람인가 의심하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스트의 열등감이 발현되는 순간이다. 상대는 그를 친구라고 생각해 허물없이 속마음을 이야기할 뿐이다. 하지만 나르시시스트는 자존심이 상해서 솔직하고 가식 없는 상대의 태도를 꺾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르시시스트는 타인을 자기 뜻대로 통제하고 싶어서 '길들이기'를 시도한다. 그는 타인이 본인의 눈치를 보기 원한다. 그래서 부정적인 감정을 계획적으로 표출한다. 그리고 그 감정에 타인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살펴보고 다음 스텝을 조정한다.
길들이기는 나르시시스트가 평생 해오던 놀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얼토당토않은 이유를 만들어서라도 상대의 주장이나 감정이 모두 틀렸다고 우기기 시작한다.
이때가 중요하다. 이때 나르시시스트를 친구라고 생각한 누군가가 '아, 저 말이 맞나.' 하면서 한두 번 그의 주장에 수긍한다. 그럼 나르시시스트는 양 날개를 힘껏 펴고, 친구가 말하는 모든 것들을 부정적으로 해석할 것이다.
그래서 애당초 나르시시스트에게 문을 열어주면 안 된다. 조금이라도 문을 열면 그는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다. 그리고 그는 안방을 차지할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의 방에 있는 것처럼 안방에서 뛰놀 것이다.
입가에 침까지 묻혀가며 나르시시스트가 비난할 때 나를 생각해서 충고하는 거라고 좋게 해석하지 말자. 그는 이타적인 마음이 없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을 소위 '윗단계'의 사람이라고 가스 라이팅 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난리를 칠 뿐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상대가 생각이나 의견을 표현하면 본능적으로 반감을 느낀다. 주도적인 상대가 나의 뜻에 따라주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두려움에 나르시시스트는 길들이기를 시전 한다.
그래서 타인이 기분이 좋을 때 나르시시스트는 기분이 나빠진다. 그는 내가 어떻게 하면 지위를 획득할까 고민하며 불쾌한 감정을 타인에게 전가한다. 나르시시스트의 유치한 놀음에 상대해주지 말아야 한다.
C는 눈이 많이 쌓인 길을 갈 때 나의 걸음걸이를 지적한 적이 있다. 눈이 적게 쌓인 곳을 골라 밟는 건데 지적할 게 뭐가 있겠는가.
나르시시스트는 아주 작은 순간에도 비상식적이고 비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가동한다. 그는 '지적' 혹은 '비난'으로 자신의 위신이 세워진다고 믿는다. 나르시시스트는 높은 위치에 도달하고 싶어 남의 피를 빨아먹는다. 건강하지 않은 방식으로 자존감을 채우는 것이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며 남을 탓한다. '비난'을 하는 이유를 '만들어내려고' 하니 결국 나르시시스트는 아귀가 안 맞는 주장을 하게 된다.
나르시시스트가 신변잡기적인 지적을 하면 칼 차단을 해야 한다.
- 너나 잘해.
- 네 걸음걸이가 이상한데?
- 얘가 또 쓸데없는 얘기를 하네.
-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 네가 그렇게 말하는 진짜 이유가 뭐야?
- 너 이상한 사람이구나.
- 걸음걸이가 뭐 어땠는데? 구체적으로 말해 봐.
- 어떻게 걸어야 좋은 건데? 네가 걸어 봐. 웃기네.
나르시시스트가 지적하면 정색한 다음 '어떤 상황에서 내가 어떻게 행동했고 그래서 그 행동을 나르시시스트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구체적이고 꼼꼼하게 반문하라.
사실 나르시시스트는 명확하고 실질적인 비판을 잘하지 못한다. 지적은 나르시시스트가 열등감에서 벗어나려고 허우적거릴 때 나타나는 신호음일 뿐이다. 이유를 대라는 타인의 물음에 그는 버벅댈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는 궤변을 늘어놓거나 당황하며 아무 말이나 한 다음 도망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