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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이 나르시시스트인지 미리 알아보는 법

나르시시스트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나르시시스트라는 신호를 보낸다

나르시시스트는 악하다.

상대가 아무리 잘 대해줘도 결국 미워하고야 만다. 

그가 본질적으로 사람을 혐오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르시시스트에게 호의를 베풀어 줄 필요가 없다. 

그의 혐오감을 자극하는 계기만 되니까 말이다. 


그런데 나르시시스트가 가장 증오하는 존재는 사실 따로 있다. 

그 대상은 바로 나르시시스트 자기 자신이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가 그토록 쉽게 상처받는 것이다. 

이미 스스로를 미워하고 있기에. 


나르시시스트는 열등감 덩어리다. 

그래서 열등감이 건드려질 때마다 자꾸 비교를 한다. 

습관처럼 누구보다 내가 낫다는 식의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다.


나르시시스트는 소소한 일에 복수심을 깊게 품는다. 

그의 성격은 편집증적이다. 

의심이 많은 거다. 

그래서 누군가가 호의로 하는 말조차 공격성이 있다고 해석한다.  

공격적으로 대하는 것도 공격받는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스트가 가장 어려워하는 것이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다.

원수를 용서하느니 미워하고 괴롭혀서 분풀이하는 게 나르시시스트의 본능이다.   

B는 면접관이다. 

A를 면접자다.

기본적으로 면접은 면접관이 면접자를 다각도로 알아보는 시간이다. 

그런데 면접을 보는 1시간 내내 B는 A에게 별로 질문을 하지 않았다. 

대신 회사의 사규와 고충을 털어놓았다. 


당시 A 앞에는 물 잔이 있었다.

그런데 B가 주야장천 혼자서 말만 하자 A는 물을 마시기가 애매해졌다.

결국 A는 한 모금의 물도 마시지 않고, 컵도 그대로 둔 채 면접을 마쳤다.  

A는 그 회사에 입사했다. 

그리고 한 달 뒤에 B는 컵 얘기를 꺼냈다.


"그때 네가 두고 간 컵 있잖아. 그거 내가 버렸어."


정말 사실일까. 

A는 그 말을 완전히 신뢰하지는 못했다. 

이미 B가 몇 차례 소소한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다.  


저 말이 사실이라는 가정 하에 그의 마음을 예상하자. 

그는 컵을 손수 치우며 자존심이 뭉개졌을 것이다.

면접자의 심부름꾼 노릇을 했다는 생각에 모멸감마저 느꼈을 것이다.  

A는 자리에서 일어날 때, B가 컵을 보면서 기분 나빠한다는 걸 알았다. '어...'라는 그의 단말마에 싸한 감정이 실려 있었다.


설마 이 일을 마음에 담아둘까 싶었다. 

하지만 정말 마음이 다쳤던 것이다.

A가 순간적으로 느꼈던 직감이 맞았다.  


어느 날, B는 C를 불렀다. 

그는 매우 심각한 표정이었다. 


아까 B는 C에게 서류 2개를 복사해달라고 업무를 지시했다. 

C는 그 말을 듣자마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까 서류 2개를 복사해서 줬다. 

뭐가 문제지. 


그의 말을 들어보니 상황은 이러했다.  

그는 서류를 ‘회의실’에서 달라고 말했단다(‘회의실’에서 서류를 달라고 말했다는 건 본인의 주장이다).


그런데 C가 회의 시작 직전에 B에게 서류를 전달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회의를 코앞에 두고, C가  ‘자기 자리’에 있는 B에게 서류를 줬다는 이유에서였다. 

‘회의실’에 있는 B에게 서류를 줘야 하는데 말이다. 


C는 그 말을 듣자마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회의실에서 주든 회의 직전에 주든 그게 뭐가 중요한가. 

그는 장소를 문제삼는 것인가? 

B의 분노한 포인트는 그냥 장소인가? 

어처구니없지만 그 일로 B는 분노했다. 

그리고 그가 회의실 안에서 서류를 달라고 한 건 실체가 없는 주장이다. 

말귀를 못 알아듣네, 특이한 것 같네 막말을 쏟아내며 신경질을 부렸다.

그게 기분 나빠할 사건이란 말인가.


단순히 B가 주문한 대로 직원이 실행하지 않아서 그랬던 걸까.

설마 B는 C가 준 서류를 ‘들고’ 회의실에 입성하는 게 불쾌했던 걸까. 

그는 끝까지 왜 기분이 나쁜지 이유를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이렇듯 나르시시스트는 티끌 같은 일에 미친 듯이 집착한다. 

하나도 안 중요하고, 다소 엉뚱한 포인트에서 발작을 한다. 

그래서 그의 분노는 상황에 맞지 않게 오버스러웠다. 


만약 본인이 불 같은 성격이라고 자평하는 누군가가 소소한 일에 과도하게 언성을 높인다면 나르시시스트일 수 있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존감이 낮고, 열등감이 심하다. 

그래서 남과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하면서 더 나은 부분을 찾으려고 애쓴다. 

하지만 그 시도는 실패할 때도 많다. 

기본적으로 자존감이 낮으니까 모든 걸 주관적으로 해석한다. 

나르시시스트 본인이 부족하다는 결론을 낸다는 거다. 


그래서 그는 마음 속으로 갈등이 심하다.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는다. 

하지만 그런 내밀한 감정을 솔직하게 말하지는 못한다. 

대신 남들에 비해 나는 괜찮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는 일부러 남을 무시하거나 모멸감을 주는 발언을 해서 자신의 열등감을 감춘다. 

D는 A가 힘들다고 전화할 때마다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곤 했다.

D는 비슷한 경험을 했는데 A와는 다르게 본인은 잘 대처했다는 취지였다.


A는 황당했다.

지금 힘들다고 하는 사람 앞에서 D는 어려움에 잘 대처했다고 자신을 자랑하고 있었다.

D가 자부심이 묻어나는 말투로 A와 자신을 ‘비교’했다.


사실 평소에도 D는 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남과 비교해 왔다.
D는 본인이 남보다 특별하다고 주장했다.

특히 남들과 다른 점 중 하나가 ‘비판’하는 성격이라고 자부했다.


'누가 뭘 잘 모르는 것 같아서 내가 잘 알려줬어.'

'그 사람들이 나쁘게 행동하길래 나는 올바르게 행동했어.'


D는 도덕성이나 지적 능력이 남보다 더 특출하다고 말했었다.

물론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나르시시스트는 윤리의식이 흐릿하고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 때문에 상황을 객관적으로 해석하기 힘들어한다.

E는 직장에서 신입사원을 앞에 두고, 툭하면 신입사원과 기존 경력직 직원을 비교하면서 비난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아, 그런데 비교하자는 건 아니에요.’


물론 E의 변명은 거짓말이었다.

비교를 하면서 비교를 하는 게 아니라니.


E는 ‘비교’하는 태도가 건강한 방식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런데도 ‘비교’하고 싶었다.


원래 E는 자존감이 매우 낮았다.

자신과 타인을 비교하며 자신감을 잃어버릴 때가 많았다.


그래서 E는 해결하지 못한 열등감을 억누르고자 상대방을 또 다른 누군가와 ‘비교’하면서 감정을 전가했던 것이다.


만약 그 사람이 끊임없이 본인과 타인을 비교하거나, 타인과 타인을 비교하는 습관을 드러낸다면 의심하자. 그는 나르시시스트일 수 있다.

나르시시스트는 상대와 동등한 관계를 맺길 두려워한다.

상대가 자신을 윗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을 때 그는 모욕감을 느낀다.


그는 친구를 친구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내가 한수 가르쳐야 하는 존재로 여긴다.

그래서 자꾸 신경질을 내면서 그것도 모르냐는 말을 반복하는 것이다.


사실 그 말의 진짜 의미는 이거다.  

'나는 아는데 너는 왜 몰라? 내가 너보다 더 나은 사람 같지 않아?' 


나르시시스트는 타인이 '아랫사람’ 역할을 해주길 바란다.

그 바람을 실현하고자 상대의 주장이나 의견을 부정한다.


그 사람이 느끼는 감정이 정당하고 의견이 보편적인 생각이어도 나르시시스트는 훈수를 두고 싶은 욕구 때문에 무리하게 반대하는 것이다.


가르쳐야 하는 대상이 오히려 당당하게 의견을 말할 때 그는 당황한다. 자신의 자리를 뺏길 것 같은 오묘한 기분을 느낀다.


그래서 급하게 엉성하게 논리를 짜서 허심탄회하게 심정을 털어놓은 상대에게 대뜸 훈계하기 시작한다.


나르시시스트가 타인의 불행에 관심 있는 것은 오로지 지적과 비난으로 지위를 올리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의 말에는 궤변이 많다.

남의 고민거리에 관심이 없으면서 의견을 말하자니 진정성도 떨어지고 논리 구조가 엉성하다.


앞뒤로 대화의 맥락이 이어지지 않는 게 나르시시스트의 화법이다.

상대가 이상하다고 느껴서 가만히 있으면 그는 대화에서 이겼다고 생각한다.


나르시시스트에게는 대화도 싸움이다.

그에게 대화란 상대보다 위에 있다는 걸 증명하는 대회와 같다.

야구나 축구처럼 승패가 존재하는 장이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는 남과 대화할 때 수시로 긴장한다.

긴장감의 축적으로 그의 얼굴 근육은 굳어 있다.

웃으면서 전쟁을 치르는 사람은 없으니까 말이다.

전쟁은 남을 공격하고,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

나르시시스트는 상대방보다 우위에 서려고 조언으로 공격한다.


그 누구보다 자기중심적인 그는 비판하는 ‘자신’을 바라보며 만족해한다.

조언하는 입장에 설 수 있기에 그는 은근히 타인의 불행을 바란다.


나르시시스트가 타인을 필요로 하는 순간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때뿐이다.

그는 인간이란 존재를 리액션 로봇이자 보조 배터리로 인식한다.


그는 타인이 자신의 지적에 기분 나빠하면서도 반박하지 않고, 작은 칭찬에 크게 웃기를 바란다.

그럴 때 자신의 존재 가치가 올라간다고 믿는다.


나르시시스트가 곡예사처럼 공 돌리듯 작은 칭찬과 큰 비난을 번갈아 사용하는 이유가 거기 있다.

상대를 길들일 때 나르시시스트의 자존감이 높아진다.


그와의 대화가 기분 나쁜 이유는 꼭 내가 놀림당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내 말을 하찮게 여기면서도 작은 칭찬을 던지는 나르시시스트를 보면 자기 검열을 시도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말 한마디에 상대가 놀아나길 바란다.

나르시시스트는 타인의 감정을 쥐락펴락할 때 힘이 세진다는 망상에 빠진다.

그리고 그런 비열한 시도를 무시하는 누군가는 적으로 규정한다.

 

만약 그 사람과 만나서 자주 기분이 가라앉고 초라해지는 감정을 느낀다면 의심하자. 그 사람은 나르시시스트일 수 있다.

기분은 생각보다 중요하다.

기분은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알게 되는 중요한 신호로 작용한다.


항상 자신의 감정을 기민하게 관찰하라.

내가 느끼는 감각은 나르시시스트를 알아내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만약 대화의 방식이 이상하다고 낌새를 눈치챈 누군가가 시큰둥한 답변을 하거나 나르시시스트의 물음 자체를 무시한다면, 그는 곧 나르시시스트의 적으로 신분이 바뀐다.


나르시시스트는 그런 사람을 찍어두고 시기를 노리다가 어느 순간부터 웃는 얼굴로 변장해 살살 괴롭히기 시작한다.

나르시시스트는 상대가 기분 나쁘게 하는 게 낙이다.


그래서 상대의 옷, 구두,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성심성의껏 부정적인 꼬리표를 붙인다.

비난을 하는 입가에 냉소와 환멸을 잔뜩 묻어난다.

상대를 혐오하기에 최대한 머리를 굴려서 보복한다.


나르시시스트는 야비해서 대놓고 미워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마치 조언하는 것처럼 위장해 상대를 비난한다.  


그 말을 듣고 상대가 실족하기를 원한다.

절망하기 전문가인 나르시시스트는 상대도 절망하길 바란다.

사실 인간관계에서 나르시시스트는 약자다.

그가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생존 본능 때문이다.


나르시시스트는 남에게 고통을 줄 때 본인이 힘이 세진다고 여긴다. 

한마디로 나르시시스트는 자존감을 구걸하는 비렁뱅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르시시스트의 자존감은 땅의 내핵까지 떨어진다.


그는 지적과 비난을 미친 듯이 좋아하면서, 조그마한 지적과 비판을 받으면 마음이 쿵 내려앉는다.

그러니 나르시시스트에게 일상은 일상이 아니다.

충격과 공포로 뒤덮인 전쟁터다.

나르는 맨 몸으로 그 전쟁터에서 버림받은 민간인이다.


결국 살려고 나르시시스트가 택한 방법이 다른 사람의 자존감을 약탈하는 것이다.

나르는 자신의 힘으로 자존감을 높일 생각을 못하고, 남의 자존감으로 텅 빈 공간을 채우려는 어리석은 우를 범한다.

유약한 약탈자인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에게 기꺼이 자존감을 내어 줄 사람을 찾아 헤맨다.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남을 의존하는 게 나르시시스트가 자신을 보호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나르는 강자인 척 하지만 약자이고, 자신을 입증하고자 남을 괴롭히는 악인일 뿐이다.

나르시시스트는 미움의 노예나 다름없다.

노예는 자기 몸의 결정권이 없다.

주인이 시키는 대로 노동한다.


나르시시스트는 악을 행하는 주체로서 살지 못하고, 악에게 휘둘리며 악이 주장하는 대로 이끌려 다닌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의 정신세계는 늘 혼란하고 번잡하다.


나르시시스트가 악에게 함몰되어 있으니, 나르의 주장이 자연스럽게 납득되기란 힘들다.

나르시시스트가 뱉는 말은 모순과 논리적 비약으로 얼룩져 있다.


악의 특징은 무질서다.

질서가 없으면 세상은 아수라장이 되고 만다.


신호등을 어긴 사람은 교통사고를 당하고, 가지 말라는 경고 표지판을 무시한 사람은 낭떠러지에서 떨어진다.

나르시시스트의 실체를 미리 알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우리는 '그 사람이 나르시시스트인지 몰랐어요.'라는 소리를 심심치 않게 듣고 있다.


나르시시스트도 자신의 분풀이 대상을 찾을 때 나름 친절하다.

그 겉모습에 사람들은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그런데 바로 그때가 나르시시스트의 실체를 드러내기 딱 좋은 순간이다.


조금씩 비난의 온도를 올리는 나르시시스트 때문에 상대는 안 좋은 직감을 들어도 넘겨버리곤 한다.


툭툭 작게 때리다가 점점 세게 때리고, 상대가 넘어질 때까지 주먹을 쓰는 사람을 상상하자. 나르시시스트가 지적하는 태도도 마찬가지다.

나르시시스트와 대화한 후 몸 안에 독이 퍼지듯이 기분 나빠지는 이유는 명확하다.

그가 자꾸 무엇 때문에 기분이 나빠지고, 그 감정을 해소하려고 남에게 힘껏 짱돌을 던진다.


짱돌에 맞은 사람은 아플 수밖에 없다.

사실 미움에 잠식 돼버린 나르시시스트가 가장 아픈 사람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맞다. 나르시시스트는 아파서 자신의 상처를 건강하게 해결하지 못한다.

대신 상처로부터 도망간다. 현실을 부인하고, 바꿔 말하고, 멋대로 꾸며서 말하는 게 나르시시스트의 특징이다.

F는 교회에서 소모임을 할 때 자랑스럽게 말했다. ‘사람들이 저한테 아무런 말도 못 해요.’


이 말은 거짓말이었다.

이십 대 초반인 F는 실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취직했다.


언젠가 F는 ‘상사 때문에 마음이 어려워. 혼날 때마다 내 모습이 점점 작아지는 기분이야.’라고 고백했다. 그런데도 F는 사람들이 자신을 어려워해서 할 말을 못 한다고 뻥을 쳤다.

어느 날, F는 교회에서 청년부 회장이 됐다.

F의 남다른 예민함에 청년부 담당 교역자는 자주 고충을 겪었다.


참다못한 교역자도 할 말을 하면서 감정을 표출했다.

하긴, 그렇게라도 안 하면 화병이 날 지경이었을 것이다.


나중에 F는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저한테 아무런 말도 못 하는데,  교역자 같은 사람은 처음이었어요.’


F는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본인이 센 사람이라 아무도 지적을 못한다고 허세를 부렸다.

심지어 F는 나와 싸우기까지 했다.

이후에도 여전히 그는 모임에서 큰소리로 지껄였다.


‘사람들이 저한테 아무런 말도 못 하거든요. 하하하!’


C의 뻔뻔한 거짓말에 그와 동갑내기인 G가 어이가 없었는지 큰 소리로 웃어버렸다.

그런데도 F는 그 웃음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F가 저렇게 말한 이유가 다 있다.

F는 사람들이 자신을 지적할 때마다 큰 상처를 받았다.

그는 자신이 무언가를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라서 남을 가르치는 역할을 해야 마땅하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F는 남들의 차가운 비판과 비난을 경험했다.

그런 경험으로 자신이 가르치는 지위를 박탈당했다고 느꼈다.


F는 내려간 위치를 올리고자 현실을 전면 부인하기로 선택했다.

F의 주장은 오른쪽인데 왼쪽이라고 말하고, 하얀색을 검은색이라고 말하는 격이었다.


나르시시스트는 순진하다.

나르는 자신이 ‘사람들이 저한테 아무런 말도 못 해요.’라고 말하면, 상대가 ‘아, 그렇구나.’ 이렇게 인정할 줄 안다.


나르의 말을 들은 사람은 나르가 굳이 저런 말을 꺼내는 저의를 알아본다.

사람들이 F의 주장을 믿지 않는다는 건 당연한 결과다.

그런 결과가 나올 것을 F만 모른다.

맞다.

나르시시스트는 모르는 게 참 많다.


그런데 세상을 가장 잘 안다고 착각한다.

그래서 나르는 수시로 주변 사람들에게 본인이 똑똑하다고 호들갑을 떤다.


H는 말했다.


‘나는 객관적인 사람이야. 그런 사람들이 있어.’


이 말을 하는 H의 목소리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H는 자랑스럽게 말하곤 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볼 때, 비판할 만한 면만 봐.’


H는 마치 자신에게 지적을 받는 사람들이 안타깝다는 뉘앙스로 말했다. 시혜적이면서도 현실 감각이 떨어지는 태도였다.


그래서 나는 H에게 진실을 말해주었다.


'H는 객관적인 사람이 아니다. 상대가 잘못하면 잘못했다고 비난하고, 상대가 잘하면 잘했다고 비난한다.’


내 말을 들은 H는 충격을 받았는지 아무런 답변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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