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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스라이팅하는 나르시시스트의 진짜 심리를 파헤쳐보자

가스라이팅의 본질은 거짓말이다.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다

나르시시스트들의 모습은 다 다르지만 내면은 동일하다

나르시시스트들의 나이와 직업은 각양각색이다. 

하지만 그들은 소름 끼칠 정도로 공통점이 많다. 

마치 쌍둥이처럼. 


나르시시스트는 타인의 언행을 최대한 부정적으로 해석한다. 


A는 여러 사람들과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나르시시스트는 그의 원활한 사교활동으로 다른 이들이 소외감을 느낀다고 불평했다. 

게다가 친하지 않은 사람들과는 친해질 생각을 안 한다고 손가락질했다. 


과연 이게 맞는 말일까?

우리는 나르시시스트의 주장을 논리와 이성으로 쪼개 분해해 볼 필요가 있다.  


A에게는 더 친한 사람과 덜 친한 사람이 있다.  

그리고 앞으로 친해지고 싶은 사람들도 있다. 

친하지 않은 사람들과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한다. 

친해진 사람들도 그 전에 안 친한 사람들이었다. 

A가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 있었고, 잘 지내다 보니까 정말 친해진 거다. 

친한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안 친한 사람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했다는 거다. 


그러니까 친하지 않은 사람들과 친해질 생각을 안 한다는 나르시시스트의 주장을 틀렸다. 

이렇게 조금만 따져 보면 나르시시스트의 비난은 허술하다는 걸 잘 알 수 있다.

그의 주장은 비상식적이고,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그런데 너무 순수한 사람들은 이런 나르시시스트의 말도 안 되는 비난을 진짜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왜냐면 그는 이런 말들을 할 때 나름대로 꽤 심각한 표정을 짓거나 고압적인 말투를 쓰기 때문이다. 

겉으로 볼 때 그럴 듯해 보이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나르시시스트도 더 친한 사람이 있고 덜 친한 사람이 있다. 

그는 자신이 같은 입장일 때 그걸 문제라고 보지 않았다. 


그리고 누구나 똑같은 깊이로 호감을 느끼지 않는다. 

따라서 모든 사람과 동일한 깊이로 잘 지내는 것은 힘들다. 

타인이 나로 인해 소외감을 느낀다는 것은 관심이 평등하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에게 당연히 같은 깊이의 사랑을 주지는 않는다. 

사랑의 특징은 독과점이라는 것이다. 

단 한명에게만 극히 소수에게만 향하는 게 진정한 애정의 시그니처다. 

나르시시트는 정말 이걸 모를까?


그리고 나르시시시스트야말로 친해질 생각을 못하고 남을 괴롭히고 싶어한다. 

그는 대다수의 사람에게 큰 불만을 가지고 있다. 

딱히 문제될 것 없어도 다 문제라고 보기 때문이다. 

자신의 시선이 왜곡돼서 굴절된 세상을 볼 뿐인데 나르시시스트는 본인이 문제라는 생각 자체를 못한다. 


그는 '다른 이들'이 소외감을 느낀다고 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누군가인지 말하지는 못했다.  

어쩌면 소외감을 경험한 사람은 나르시시스트 본인 아닐까. 

'다른 이들'이라는 제3자를 등장시켜 본인의 감정을 투영하는 건 나르시시스트의 처세술이다. 


나르시시스트는 남의 자아를 깎아내리는 걸 즐긴다.  


'자아'의 정의다.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이나 관념. 

정신 분석학에서는 이드(id), 초자아와 함께 성격을 구성하는 한 요소로, 현실 원리에 따라 이드의 원초적 욕망과 초자아의 양심을 조정한다. 


-출처: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인생은 자아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은 성숙의 척도를 가늠하는 축이다. 

내 모든 말과 행동은 자아정체성에서 비롯된다. 

그만큼 자아는 중요하다. 


그런데 나르시시스트는 인간을 인격체로 만드는 '자아정체성'을 공격한다.

왜냐면 나르시시스트는 자아는 텅 비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정말 내가 누구인지 알려고 하지 않는다. 

대신 되고 싶은 이상적인 모습이 자기 자신이라고 우긴다. 


나는 고칠 점만 봐. 

나는 의심이 많아. 

새인은 이렇게 주장한 적이 있다.

그러니까 이게 자기가 되고 싶은 이상적인 모습을 말하는 거다. 

이런 사람처럼 보이고 싶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가 보여주고 싶은 이미지와 실제 모습과는 차이가 있었다. 

새인은 대다수의 사람을 다 험담했다. 본인의 남편과 시어머니, 시아주버니, 주변 친구들, 본인의 어머니, 모임에서 만난 사람들 등 모두가 다 그의 뒷담화 대상이었다. 

그는 잘 지내는 사람들을 다 부정적으로만 해석했다. 

그리고 그들을 한참 욕한 후에 덧붙였다. 

"나는 안 그랬어." 

"나는 저 사람들처럼 행동하지 않았어."

"저 사람들처럼 행동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저런 말을 하는 새인이야말로 통상적인 사고체계를 가지지 못했다. 


어린시절 그는 가까운 어른들에게 끊임없이 비난받으며 자랐다. 

자아를 확립하지 못한 시절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그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크고 작은 일에 지적을 받아야 했다. 

그게 정말 객관적인 비판인지 분별할 틈도 없었다. 

그래서 새인은 마음 속에 깊은 상처를 받게 됐고, 자신을 방어하는 게 습관이 됐다. 


그는 생존을 위해서 자신에게 가장 상처 준 사람의 행동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무조건 비난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스스로를 '욱한다'고 치장했다. 

하지만 이 말은 상처를 잘 받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는 마음에 묻어 둔 수치심이 문득 올라오면 만만한 사람들에게 스트레스를 부렸다. 

마음이 자꾸 다치다 보니 다투게 되고, 손절당하는 상황이 되풀이됐다.


나르시시스트는의 방어력은 생각보다 약하다. 그는 비판받는 것을 두려워한다. 신발을 안 신고, 맨발로만 땅을 걸으면 발에 상처가 나기 쉽다. 나르시시스트의 마음이 그렇다 

나르시시스트는 다른 사람을 무안하게 하거나 핀잔을 준다. 

또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하는 경향이 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맞닥뜨리는 상황은 다양하다. 

그런데 어떤 일로 시시비비를 가릴 때, 나르시시스트는 매번 본인은 잘했는데 남이 잘못했다고 궤변을 늘어놓는다. 

하지만 그러한 주장은 나르시시스트가 만든 허구 세계에서나 통할뿐이다.   

나르시시스트의 사고 회로는 자기중심적이고 단순하다.  

흑과 백으로만 칠해진 세상에서 그는 항상 '백'의 입장이라고 주장한다. 


자기 보호본능이 강한 나르시시스트는 어떤 상황이든지 최대한 본인은 옳고, 남은 틀리다고 큰소리친다.

만만한 상대를 겨누고 경솔하게 비난하면서, 막상 본인이 비판을 들으면 분해서 어쩔 줄 몰라한다. 

만약에 누군가가 솔직하게 나르시시스트를 비판하거나 가르치려 하거나 그의 주장에 의문을 품는다면, 나르시시스트는 큰 상처를 받는다.    


나르시시스트를 '흑'이라고 정의한 사람은 곧 나르시시스트의 적인 셈이다. 

그는 적을 물리쳐야 생존한다고 믿는다.  


이런 과정에서 나르시시스트는 가스라이팅 화법을 구사한다.  

가스라이팅의 본질은 거짓말이다.

거짓말의 본질은 두려움이다. 

인간은 진실이 드러나는 게 두려울 때 거짓말을 한다. 


진실은 인간에게 연약함을 인정하고, 잘못을 반성하라고 암시한다. 

그래서 진실 앞에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두려움을 느낀다. 


거짓말은 진실과 두려움을 가장 편하게 외면하는 처세술이다.

성적이 떨어진 학생이 부모님께 혼나지 않으려고 성적표를 조작하는 것처럼 나르시시스트도 타인의 비판을 피하고 초라한 내면을 감추고자 마구잡이로 현실을 조작한다.


나르시시스트는 스스로 공부해서 성적을 올릴 생각은 안 하고, C+를 다 A+로 고쳐서 이게 본인의 원래 성적이라고 무작정 우긴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가 상황을 판단하거나 해석하는 걸 들으면, 상대는 묘한 이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어떤 아이가 완성된 그림에 크레파스로 규칙 없이 선을 죽죽 긋는다고 가정하자. 

원본은 아깝게 훼손되고 유치원생이 크레파스로 칠해버린 흉측한 몰골만 두드러진다. 


나르시시스트의 주장을 듣는 것은 마치 아이의 장난질로 망가진 그림을 감상하는 것과 비슷하다. 


나르시시스트는 이렇게 자신이 유리한대로 현실을 왜곡하는 진짜 이유는 자아성찰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내면을 탐구할 때 애써 외면했던 진실과 직면한다.  


비대한 우월감, 타인에 대한 분노, 보복심, 자괴감, 우울 등 어둡고 습한 감정을 마주 보는 일은 힘겹다.    


하지만 나의 실체를 깨달은 인간에게 살아 숨 쉬는 양심이 있다면, 부족한 점을 인정하고 좋은 방향으로 변화하고자 노력한다. 


회개와 갱생은 자아가 깎이는 고통을 수반한다. 

달리던 기차가 노선을 틀려면 엄청난 힘이 필요하다.  

자칫 잘못하면 기차가 철로에서 이탈할 수도 있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의 실체를 알려고 애쓰지 않는다.

나르시시스트는 진실을 거부하고, 진실을 설파하는 그 사람과 멀어지려 도망친다. 


나르시시스트가 현미경으로 자신의 내면을 관찰하는 일은 고통스러운 행위에 불과하다.

그래서 지적을 당한 나르시시스트가 그토록 노발대발하는 것이다. 

비판을 들으면 자연스럽게 본인의 심연을 들여다보게 된다.  


비판이 자아성찰의 트리거가 되는 셈이다. 

바로 그런 성찰의 과정을 겪는 게 나르시시스트는 죽기만큼 싫은 것이다.  

 

극한의 두려움을 느낀 나르시시스트는 오히려 본인의 단점이나 열등감을 다른 사람에게 뒤집어 씌운다. 

진실이 맞다고 생각할수록 나르시시스트는 더욱 강한 거부반응을 보인다. 

나르시시스트는 두려운데 두렵지 않다고 말한다. 


나르시시스트는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말한다. 


나르시시스트는 타인이 이상하지 않은데 이상하다고 말한다. 


나르시시스트는 악의적으로 시비를 걸고, 나중에 상대가 나르시시스트의 의도를 지적하면 선의로 말한 거였다고 거짓말한다. 

만약 본인의 잘못이나 약점을 인정하면 나르시시스트는 두꺼운 가면 뒤에서 무너진다.

젠가 게임을 할 때 나무토막이 무너지듯이 나르시시스트의 자아가 허물어진다. 


늘 다른 사람의 이모저모가 잘못됐다고 주장하는 나르시시스트의 행동에는 결점을 감추려는 악다구니가 숨어 있다. 

나르시시스트는 옳고 그름을 가리는 판단력이 부족하다. 

그래서 그들은 잘못을 잘못이라고 인지하지 못한다. 


나르시시스트는 악하게 행동할지라도 자신이 선하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선과 악의 경계가 불분명해서 온갖 변명을 늘어놓으며 나쁜 행동도 정당하다고 말한다. 


나르시시스트는 악을 감추는 방법으로 거짓말을 택한다. 

거짓말도 악한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선하다고 주장하기 위해 악한 거짓말을 일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온갖 미사여구를 동원해 잘난 척하는 나르시시스트의 실체는 속 빈 강정이요, 깡 없는 겁쟁이일 뿐이다.

 

그게 바로 나르시시스트의 이면이다.  


나르시시스트가 비판을 대하는 방식은 아이가 숨바꼭질을 할 때 가구 뒤에 숨지 않고, 자신의 눈을 가리는 것과 같다. 

나르시시스트에게는 자신을 기분 좋게 하는 건 진실이고, 자신을 기분 나쁘게 하는 건 거짓이다.


평생 거짓을 진실이라고 세뇌하며 살아온 나르시시스트가 진실을 인정하기란 산꼭대기에서 흘러나오는 용암으로 세수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진실이 가장 논리적이다. 

듣는 이가 자연스럽게 납득할 수 있는 사실은 진실에 가깝다. 


거짓은 논리적이지 않다. 

나르시시스트의 주장이 궤변이 많고, 큰 맥락에서 앞뒤가 안 맞는 이유가 여기 있다. 

누군가가 거짓말하면 당장 딱 집어 말하기 힘들지라도 말에 어폐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나르시시스트가 가스라이팅을 할 때, 듣는 사람은 그가 동문서답을 하고 사리에 안 맞는 주장을 한다고 판단한다.


나르시시스트의 친구는 딱히 할 말이 없어 나르시시스트의 말에 수긍했다가도 집에 돌아와 그의 말을 곱씹게 된다. 

나르시시스트의 주장이 대화의 맥락에도 어긋나고, 보편타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다만 나르시시스트가 평범하고 친근한 표정을 짓거나 센 척을 하면서 가스라이팅하는 바람에 경계심이 없던 사람은 이상하다고 느껴도 스무스하게 넘어갈 뿐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인성이나 실력으로 승부를 볼 생각을 하지 않고, 가스라이팅으로 승부를 본다. 


예전에 나는 억울한 일을 겪어서 모 건물에 설치된 CCTV를 돌려 본 일이 있다. 


거기에서 이상한 정황을 발견했고, 그 정황을 만든 B에게 전화를 걸어 취조했다. 


처음에 B는 이렇게 말했다. 


- CCTV도 안 보고 그런 얘기하시는 건가요?

초반에 나는 CCTV를 봤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B는 본인은 범인이 아니라고 큰소리쳤다. 

오히려 내가 전후사정을 확인도 안 하고 생사람을 잡는다며 따졌다. 


나는 이미 CCTV는 확인했다고 알려주었다. 

내 말을 들은 후 B가 이런 말을 한 게 가관이었다. 


- 아니, CCTV 영상만 보고 지금 그러시는 건가요?

B는 내가 CCTV도 안 봤으면서 애먼 사람을 잡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CCTV를 확인한 걸 알게 되자, 이번에는 내가 CCTV만 확인한 게 문제라고 대화의 논점 자체를 바꿔버렸다.   


그는 내가 CCTV를 안 봐도 문제라고 주장하고, CCTV를 봤더라도 그것만 보고 자신을 나쁘게 생각한다며 허술한 논리를 들이댔다.  

결국 B는 잘못을 인정하기 싫어서 나의 지적을 요리조리 피해 다니려고 아무렇게나 핑계를 댔던 것이다. 


그게 나르시시스트의 화법이다.

지적과 비난을 즐기는 나르시시스트가 가장 많이 흔들릴 때가 본인이 비판당하는 순간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의 추한 실체가 드러나는 걸 극도로 두려워한다. 

그래서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불리한 상황이 되면, 물불을 안 가리고 변명을 대며 자기변호를 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의 말이 앞뒤가 안 맞고, 논리구조가 엉성한 것이다.

두려움에 잠식된 인간의 사고방식은 한 가지에 꽂힐 때가 많다. 


지적과 비난을 좋아하는 나르시시스트가 공포감을 느끼는 순간은 아이러니하게도 본인이 비판받을 때다.  

비판을 거부하려고 나르시시스트는 무슨 말이든 마구 뱉어본다.  


자신이 하는 말이 상식적으로 납득될 만한 얘기인지는 나르시시스트에게 중요하지 않다. 

소위 말하는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긴다’ 화법이다. 

나르시시스트는 기세 등등 하게 자신은 잘못하지 않았다고 떵떵거린다. 

주변의 물건을 닥치는 대로 던지며 내 방에서 나가라고 가족에게 소리 지르는 아이처럼 행동한다.  


누군가가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가는 주장을 반복할 때, 그 사람의 사고방식도 괴기해 보이기 마련이다. 


하지만 나르시시스트는 당장 눈앞에 닥친 위기를 모면하는 게 중요해서 그때만큼은 체면이든 위신이든 안중에도 없다.  

아니, 어쩌면 본인의 궤변이 진실이라고 스스로 세뇌하는 중일 수도 있다. 

A는 C에게 가끔 전화를 걸어 자신의 고충을 몇 번 털어놨었다. 

그런데 C는 종종 상대를 조롱하거나 무안을 주곤 했다. 

A는 곰곰이 그의 태도를 되짚어보니 화가 나 C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A: 지난번에 제가 힘들다고 하니까 초등학생 같다고 비웃었죠?


C: 내가 너한테 초등학생 같다고 말했었어?


A: 정말 기억 안 나요? 충격인데. 말한 사람은 잘 기억을 못 하나 봐요. 들은 사람만 기억하네. 


C: 그러게. 앞으로는 대화할 때 녹취해야 하나? 그런데 그때 옆에 D도 있었잖아. D랑 나도 그런 얘기를 한 적 없다고 느끼면….


A: (그런 이야기를 안 했다고 주장하는 근거가) 느낌인 거죠? 


C: …


A: 내가 기억을 못 하는 일은 말 그대로 기억을 못 하는 거라고 말하면서, 막상 C가 어떤 일을 기억 못 하면 그 일은 없던 일이라고 말하는 건가요? 

A는 C가 점점 자신에게 짜증을 내고 막말을 한다고 느꼈다. 

C는 A에게 자신을 짜증 나게 한다고 소리를 지르며 신경질을 냈었다.

그 부분을 A가 지적하자 C는 이렇게 말했다. 


C: 아, 네가 혼동이 있는 것 같다.


A: 혼동이 있는 건 아니에요. 


C: 아니야. 나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어. 네가 혼선이 있나 봐. 


A: 상대의 말을 듣고 기억할 뿐인데 거기에 무슨 혼선이 있죠?


C: 네가 그렇게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것 아니야?


A: 생각하는 게 아니라 기억을 하는 거죠. C가 그 부분을 기억 못 하는 거고요. 


C: 다른 사람하고 통화하고서 오해한 것 아니야?


A: C랑 통화했다니까요. 


C: 나는 그런 말을 원래 안 해. 


A: C가 혼자서 본인이 그런 말을 안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아닌가요. 


C: 아닌 것 같아. 나는 짜증 난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 네가 너한테 진짜 짜증이 난다고 해도 짜증이 난다고 하겠니? 짜증 나는 상황이 있어야 짜증이 나지. 

하지만 C는 나중에 그 상황에서 화가 났었다고 고백했다. 짜증이 안 났다는 건 C의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시간이 좀 흐르고 나서, A는 C의 대처를 지적했다. 


A: 오히려 저한테 신경질을 내면서 녹취를 해야겠다는 식으로 말한 게 불쾌합니다. 마치 녹취를 안 해서 본인이 억울한 일을 당한 것처럼 이야기를 하니까 좀 그렇네요. 


C: 아니, 녹취가 아니라 녹음이라고 했어. 그리고 너무 많은 이야기를 했고 그걸 다 기억 못 하니까 (녹취하자고 했어)


A: 그런 뉘앙스 아니었거든요?


C: 어쨌든 녹취라고는 안 했어.


A: 녹취라고 하셨어요. 녹취나 녹음이나 그 말이 그 말이죠. 


C: 그런 의미로 받아들여졌을… 어쨌든 나는 비판을 많이 하고 뭐든 고쳐야 할 점을 보는 것만 있어. 


A: 그런데 꼭 고쳐야 할 점만 보는 건 아니에요. 그냥 C의 주관적인 견해일 뿐이에요. 

이 대화에서의 문제점을 살펴보자. 


C가 본인이 기억을 못 하기 때문에 초등학생이라고 말했거나 짜증 난다며 소리 지른 기억이 없다고 주장한다. 

통화한 사람이 헷갈린 게 아니냐고 말하기까지 한다. 


물론 C의 그런 추측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다.

A가 통화한 다른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C는 할 말도 없다.  

A가 다른 사람과 통화했다는 건 C가 궁지에서 벗어나고자 자신을 보호하려고 지어내본 말일뿐이다. 

나르시시스트는 비판을 받을 때 극도로 민감하다.

그래서 어떤 비판이든 내용과 상관없이 최대한 부정하려고 애쓴다. 

또 그 비판이 진실과 가까울수록 더욱 지적을 거부한다.    


C도 A가 다른 사람과 통화한 걸 말한 게 아니냐, 나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등 별 말을 다하면서 사력을 다해 비판에게서 도망친다. 


발화자를 착각할 확률이 도대체 얼마나 될까. 

그렇게 말하는 C는 화자를 자주 착각하는가. 

그래서 남도 자신처럼 애먼 사람을 잡는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리고 당연한 명제를 말하듯 '원래 나는 짜증 난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네가 들었어도) 나는 그럴 리가 없어'라고 주장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자신이 했던 모든 말을 기억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장담하겠는가. 

'C가 자신의 했던 말을 부정하는 태도는 초등학생이 물건을 훔쳐놓고, 훔친 게 들통나자 다른 친구가 훔쳤다고 우기는 격이다'라고 A가 C에게 말했다면, 그도 발끈했을 것이다. 


상대가 기분 나빠할 말이 분명하니까 C는 그렇게 말한 적이 없다고 우겼던 게 아닐까. 

나르시시스트는 곧 죽어도 잘못했다고 사과하기 싫어하니까 말이다. 


게다가 C는 사소한 것에 집착해 대화의 논점을 흐린다. 

녹취나 녹음이나 같은 의미여서 어떤 단어를 말해도 문제가 없다. 

그리고 C가 '녹취'라는 단어를 썼다. 

나르시시스트는 티끌만 한 일을 태산처럼 부풀려서 트집을 잡는다. 

그런데도 C는 대화의 맥락과 무관한 단어에만 집착해 그걸 상대가 틀렸다고 우긴다. 


대화의 굵직한 맥락은 C가 A를 쓸데없이 비하한 게 잘못이라는 거다. 

그런데 C는 녹음이라고 말했다며 지엽적인 단어에 집착해 대화의 물길을 돌리려고 시도했다. 

A가 C의 악의를 직설적으로 지적하자, 그 사실을 부정하고 싶어서 대화의 논점을 흐리는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는 남한테 못되게 구는 걸 좋아한다.

못된 게 강한 것이라고 착각하기 때문에 타인을 괴롭히는 걸 은근히 자랑스러워한다, 어리석게도. 


그런데 막상 누군가가 나르시시스트에게 못되게 굴지 말라고 충고할 때는 나쁜 의도로 말한 게 아닌데 오해를 받았다고 억지를 쓴다. 


왜냐면 나르시시스트는 지적받는 게 두렵기 때문이다. 


못된 언행을 좋아하지만, 못되게 구는 걸 지적받는 건 싫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는 거짓말로 진짜 의도를 포장한다. 


C가 녹취를 해야겠다고 말한 의도가 대화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기억하기 위해서란다.

사실일까?


A가 C의 잘못을 지적했고, C는 기억이 안 난다며 없던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런 대화의 맥락에서 C는 문제의 ‘녹취’라는 단어를 언급했다. 


과연 C가 서로 기억을 못 할까 봐 앞으로 녹취를 해야겠다는 의도로 말한 걸까?

명백한 거짓말이다. 

C는 자신이 결백하다는 입지를 굳히려고 녹취를 운운하며 과장된 제스처를 취한 것뿐이다. 

C는 특유의 빈정거리는 화법을 쓴 건데 A가 그걸 비판하자 그제야 나쁜 의도가 아니었다고 거짓말을 한다. 


A가 C는 좋은 의도로 녹취를 말한 게 아니라고 반박하자, C는 그 반박에 대해서 재반박을 하지 못한다. 

그리고 ‘어쨌든’ 자신은 녹음이라고 말했다며 대화의 화제를 돌리며 다시 우기기 시작한다. 

나르시시스트는 속지 않는 사람 앞에서 은근히 약해진다. 

사실 거짓말을 대변할 때 또 다른 거짓말을 끌어와야 한다. 


거짓말하는 것도 생각보다 머리를 많이 써야 하는 거다. 

거짓말인 걸 들키지 않으려면. 


그래서 거짓말을 거짓말이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나르시시스트는 버벅대며 논리적인 해명을 못한다.


C는 자신의 말이 거짓말이라고 시인하는 대신 아예 화제를 전환한다. 


녹취를 녹음이라고 우긴 것처럼 말이다. 


자신이 어떤 사람이라고 물은 사람이 없는데, 갑자기 꾸역꾸역 자신의 성향으로 대화의 주제를 돌리는 것처럼 말이다.

가스라이팅의 본질은 거짓말이다. 

나르시시스트가 거짓말을 하는 이유는 상대가 말하는 진실을 인정하길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나르시시스트를 비판할 때, 나르시시스트가 긴 시간을 들여 적극적으로 가스라이팅을 시도한다면 우리의 주장이 옳다는 반증이다.


나르시시스트가 기고만장하게 자신이 옳다고 우기며 떵떵거릴지라도 그들은 사실 진실을 말하는 자를 가장 피하고 싶어 한다.

나르시시스트는 진실에게서 도망치고 싶을수록 가스라이팅에 매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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