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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스트와의 싸움에서 이기려면 OO적 대화를 해라

나르시시스트는 싸움에서 이기려고 거짓말을 한다

나르시시스트는 타인에게 시비 거는 것을 즐긴다.  

 

회사에서 타 부서 직원과 외근을 나간 적이 있다.

당시 나는 에메랄드 색깔의 백팩을 메고 있었다.

그런데 직원이 가방을 유심히 보더니 한 마디를 툭 던졌다.    


"가방 모양이 왜 그래요?"


부드럽고 흐물거리는 재질이라서 가방 형태가 동글했던 것이다.

윗부분도 살짝 눌려 있었다.  


난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게 대수인가.        

그의 뉘앙스는 지적 같았다. 

한편으로는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좋게 해석하면 관심의 일환일 수도 있겠다. 


만약 나르시시스트가 이렇게 운을 띄운다면 해석의 방향이 달라진다.

그는 나르시시즘을 실현하려고 매사에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다. 

미세한 영역부터 검은 발을 들이는 게 그 시작점이다.  

누군가가 소소한 비난과 지적을 반복한다면 면밀하게 관찰해 보자. 

그는 나르시시스트일 수 있다. 


나르시시스트는 희생양의 의견을 무조건적으로 반박한다.   

상대가 정말 문제적인 발언을 해서가 아니다. 

원래 나르시시스트는 남을 공격해서 자존감을 얻는다. 

그런데 이유 없이 무턱대고 공격한다면 후폭풍이 크다. 

오히려 역공격을 당할 수도 있다.  

그에게는 공격하는 걸 정당화할 만한 명분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희생양의 발을 걸고 넘어진다. 

내가 누군가를 지적하는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서 말이다.  

이것은 희생양을 길들이는 나르시시스트 특유의 방식이다.   


희생양이 그의 의견에 반대한다면 나르시시스트는 정말 크게 상처를 받는다. 

그의 자존심은 유리알 같다. 

작은 충격에도 쉽게 금이 가고, 깨져버린다.  


나르시시스트는 서열에 민감하기 때문이다.  

그는 희생양을 서열의 밑바닥으로 해석한다. 

그런데 본인보다 아래라고 생각하는 대상에게 지적을 받는다? 

이건 나르시시스트가 크게 충격받을 일이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는 크고 작은 일에 과잉 반응을 보인다. 

극단적인 수치심을 느끼기에 지적받을 것 같은 상황을 예방하는 데 골몰한다. 

희생양은 조심스럽게 반대 의견을 말해도 나르시스스트는 상처를 크게 받아버린다. 

그래서 자주 짜증을 낸다. 

불안하기 때문이다. 

예기치 못한 충격에 자꾸 노출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르시시스트는 그 점을 인정 못한다. 

대신 욱하는 성격이라며 자신을 포장한다. 

보편적 상식을 가진 이들은 나르시시스트의 이상한 고집을 납득하기 힘들다. 


나르시시스트는 비판을 잘한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는 트집 잡는 걸 잘한다.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인 일에도 특정 의견을 고집하며 목에 핏줄을 세운다. 


그리고 일방적으로 비난을 퍼붓는 걸 잘한다.  

거기에 논리나 철학은 없다. 

본인의 주관적 잣대에 불과하다. 

그러니 설득력이 없다.  


말하기는 힘을 상당히 소모하는 행위다. 

그렇게까지 자발적으로 수고를 감당하는 목적은 명확하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의 말에 누군가가 이리저리 휘둘리는 모습을 즐긴다.  

이런 상황이 나르시시스트의 자부심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통제적으로 남을 조종해서 마음의 커다란 구멍을 채우는 것이다.   


하지만 처음에 그도 쥐꼬리만 한 사회성을 발휘한다. 

명령조를 남발하거나 무턱대고 비난하지 않는다. 

상대가 떠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희생양 후보의 눈치를 보는 거다. 

대신 친절을 흘린다. 

그리고 상대와 진짜 친해졌다고 느낄 때에 본색을 조금씩 드러낸다.  

좋은 의도라고 본심을 포장하면서 본격적으로 불만을 제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꾸며낸 모습은 오래가지 못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르시시스트의 표정은 굳어진다. 

말투도 고압적으로 변한다. 

그리고 상대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전가하기 시작한다.  

 

예를 들자.


사람은 기분이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다.

그런데 나르시시스트는 감정을 드러내는 상황 자체를 다 문제 삼는다. 

기뻐해도 문제라고 손가락질하고, 슬퍼해도 문제라고 비난한다. 

내 판단과 평가에 기계적으로 반대하거나 부정적으로 반응한다.


심지어 꽃다발을 드는 자세까지도 문제 삼는다.

어떻게 들든 상관없는데 말이다. 

꽃다발을 드는 행위에 꼭 지켜야 하는 법칙이 없다. 그런데 나르시시스트는 이처럼 지나치게 지엽적인 영역에 과도하게 집착한다. 하나도 중요하지 않고, 남들은 관심도 없는데 말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것에 과도하게 집착한다.

충분히 일어날 수 있고, 보편적인 관점에서 용인 가능한 일들도 다 문제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는 프레임 놀이다.

모든 현상에 문제라는 프레임을 씌워야 상대를 발아래 둘 수 있다고 나르시시스트는 믿고 있다.  

그래서 모든 다 문제라고 억지를 쓰는 것이다.   


희생양이 웃으면 웃는 게 문제가 된다.

찡그리면 부정적 감정을 노출한다고 문제가 된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면 친해지기 힘드니 말 좀 하라고 불평한다.  

자기가 말한 대로 업무를 수행해도 문제가 된다. 

업무의 내용은 동일한데 갑자기 상대는 잘못했다고 트집을 잡는 것이다. 


평범한 행동일지라도 큰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비난한다. 

이때 나르시시스트가 과장스러운 말투와 제스처를 첨가하는 게 특징점이다.


처음에는 남다른 관심의 표현이라 느낄지 모른다.

나를 잘 알아서 세심하게 신경 쓴다고 여길 수도 있다.  

친밀해지는 과정이라고 착각할지 모른다.


맞다.

착각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선의로 충고하는 것처럼 애매하게 군다.  

진지한 관심이 있다고 착각하게끔 의도적으로 상황을 연출한다.  


그리고 소소하게 칭찬하다가 핸들을 확 꺾어 부정적인 평가를 배설한다.

이 지점에서 나르시시스트가 보여주는 긍정적 반응에 가치를 부여하지 말아야 한다.


결국 그는 자신의 뜻대로 상대가 행동을 조절해 주길 원하는 것이다.

희생양을 통제하면서 나르시시즘적 우월감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의식이다.     

자기중심적인 나르시시스트의 사고체계는 이처럼 기이하게 왜곡돼 있다.  


그래서 희생양으로 찍히는 사람들은 대개 온순하고 수용적이다.

부정적인 감정을 억제하지만 남의 불평과 불만은 받아준다.

둥글게 지내고 싶어서 비판보다 위로에 치중한다.

사람들과의 대립을 되도록 피하고, 평화를 절대적으로 지지한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걸 어색하게 여겨서 감정이 올라오면 일단 부정한다.

나에게 배타적인 사람들과도 잘 지내려고 애쓰고, 잘 안 되면 내 탓을 한다.

죄책감을 잘 느끼고 남 탓을 잘 못한다.   


그리고 나르시시스트는 이 점을 이용한다.  

시간은 진실이 무엇인지 제보하는 역할을 한다. 나르시시스트는 초반에 자신을 많이 꾸민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본색을 드러낸다. 자기 모습이 아닌 건 오래가지 못한다

나르시시스트는 친절한 향기를 풍기는 대상을 혐오하면서도 친절한 사람과 가까이 지내려고 애쓴다.

그들은 너그럽기에 우호적인 관계를 구축하기 수월해서다.

따뜻한 온도를 가진 자는 희생양의 조건에 부합한다.

이런 역학관계 안에서 나르시시스트는 자존감을 얻으려고 발버둥 친다.  


그러니까 그를 공격하려면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그것이 불합리할 때 이를 선명하게 인지해야 한다.

나르시시스트는 미세한 영역부터 통제하기 시작한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 통제욕구를 구현하기에 작은 틈조차 주지 않는 게 좋다.

이상한 느낌을 애써 누르면서 넘기지만 말고, 인과관계를 차근차근 복기해 보는 것이다. 

매번 말로써 표현하지 않아도 좋다.

마음속으로라도 상황을 나만의 언어로 재해석하자.


나르시시스트는 무조건 상대에게 문제가 있다고 구박한다.

누군가 매사에 너무 과장스러운 제스처로 지적한다면 눈여겨보자.


그리고 어떤 점이 문제라고 생각하는지 주장에 대한 근거를 묻자.

이때 핵심은 구체적인 답변을 듣는 것이다.

누가 봐도 타당한지 객관성을 검증하는 것이다.     


그 답변을 유심히 듣고, 문제점을 찾아내자.

나르시시스트의 화법은 논리적이지 못하다.

그는 맥락이 뚝뚝 끊기고, 원인과 결과가 맞지 않는 말을 구사할 것이다.


퍼즐을 흐트러뜨려 퍼즐의 전체 그림을 보기 힘들게 만드는 거다.  

그리고서 자신에게 유리할 것 같은 퍼즐 한 조각만 들이민다.  

한 조각의 퍼즐만 가지고는 전체 그림을 보기 힘들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이 유리할 것 같은 퍼즐 한 조각만 들이민다. 그 조각을 제자리에 둬서 전체 그림을 살피자

이럴 때 우리는 퍼즐 조각을 다 맞춰서 전체 그림을 직관해야 한다.

이게 바로 나르시시스트의 막무가내식 화법을 물리치는 길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주체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을 가장 경계한다.

그러니까 나의 상황 판단력과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감정을 확신하는 게 중요하다.

누군가가 내 생각을 공감하지 않거나 지지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상대의 기분을 배려한답시고 대립각을 무디게 만들지 말자.

최대한 타격을 받도록 각을 뾰족이 세우자.  

그리고 준비운동을 마친 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는 거다.    


누가 옳고 그른지 진지하게 생각하자.

나를 솔로몬이라고 가정하고 말이다.  

세상의 다양한 소리를 잠시 음소거해 두고, 오로지 혼자서 한 번 판단해 보는 거다.  

주도권을 절대 넘기지 말라.

생각의 힘으로 악을 분별하자.   

그래야 나르시시스트를 퇴치할 수 있다.  


한 번 물러나면 두 번 물러나기란 더욱 쉬워진다.

나르시시스트의의 발을 밟고서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승리의 땅에 가까워진다.  

나의 정신에 침투하려는 자들에게 선을 그어야 한다. 고유한 나만의 영역을 적군에게 내어주지 말자

건강한 자의식은 자기 자신을 아는 것에서 비롯된다.


일평생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알아간다.

인간은 우주와 같다.

그 안에 아무도 발견하지 못한 미지의 영역이 존재한다.

그리고 아직 우리는 자아를 탐험하고 있다.

이 탐험은 영영 끝나지 않을지 모른다.  

그래서 때로 타인이 나의 새로운 점을 발견할 때 동의가 안 되기도 한다.


하지만 나르시시스트는 스스로를 잘 모른다.

알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이미 다 안다고 착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는 열등감이 가득한 내면을 들여다보길 꺼린다.  


다만 이상적인 자아를 전시한 채 그것이 나라고 우긴다.

하지만 그도 무의식적으로 안다.

자신의 표면적인 모습뿐이라는 걸 말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울타리에 타인을 가두려고 시도한다.

상대를 통제하지 못하면 자존감이 급격히 하락한다.

그래서 그는 작은 말에도 크게 상처받는다.

자유롭게 감정과 생각을 공유하면 그의 자존심에 크게 타격을 주게 된다.


나르시시스트가 지적하는 것도 방어기제의 일환이다.

그가 나름대로 상처받기 쉬운 자존심을 미리 지키는 방법인 것이다.


그런데 희생양은 나르시시스트가 말한 점을 신경 쓰는 게 어색하다.  

지극히 작은 문제로 여겨서다.   

그리고 예측하지 못한 영역에 불만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르시시스트가 주장하는 문제점은 납득이 안 될 때가 부지기수다.

뜬금없다는 감상이 드는 것이다.


나는 나쁜 의도로 말하지 않았는데 왜 경계하지?

갑자기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내 의견과 무조건 반대로 말하는 것 같은데 일부러 저러는 건가?

내 뜻과 영 다르게 이해한 것 같은데?

짜증을 내면서 공격적인 어투로 반박하는 저의가 뭐지?


점차 대화의 분위기가 변해간다.

걷다가 발이 돌멩이에 부딪히듯이 의문점과 의아함이 동시에 느껴진다.       


아니면 지나치게 미세한 부분이라 큰 감정 없이 관대하게 수용할 수도 있다.

 

물론 이 사례는 누구나 겪을 법한 에피소드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르시시스트가 비판을 가장한 비난으로 우리를 공격하는 양상과는 다르다.

처음부터 의도적인 공격인지 아닌지 분간하기 힘들다.


이럴 때는 그의 행동을 분석해 보자.  


나르시시스트는 미시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다가 관심의 면적을 넓혀간다.

성격과 대인관계 맺는 기술까지 마수의 손길을 뻗치는 것이다.


이때 희생양의 반응을 두 갈래로 갈린다.  


맥락 없는 비난에 어리둥절해져서 침묵으로 넘긴다.

별 감정이 안 들지만 뇌리에 기분 나쁜 찜찜함이 잔존한다.

부당하다고 느끼지만 표면적으로 근거를 잡기가 애매하다.


아니면 화를 내다가 지쳐서 멀어지려고 결심한다.


한 달 전에 영지는 새인과 같은 동아리에서 만났다.

나름 처음보다 친해졌다고 느껴졌을 때였다.  

카페에서 차를 마시다가 새인이 운을 뗐다.

아까 했던 대화의 맥락과 무관한 내용이었다.   


네가 감정을 드러내면 사람들이 당황하잖아.

그런데 나는 나이가 많잖아(웬만한 일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아).


저 말의 숨은 뜻은 이거다.


너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감정을 드러내는구나.

그런데 나는 경험이 많아서 마음이 단단해진 편이야.

네가 화내도 상처받지 않을 자신이 있어.

심리적 거리 시점에서 이 말을 들여다보자.


영지와 새인은 아직 서로를 잘 모른다.

아직 거리를 좁혀가는 단계다.

친하지 않다.


그는 이 시점에서 감정을 드러내는 걸 운운했다.

심적 거리에 비해 어색하고 과도한 관심이다.

 

그리고 이성적인 측면에서 들여다보자.

상대가 구체적으로 어떤 감정을 드러냈다는 것인지 설명하지 않았다.

아마 부정적인 감정을 뜻하는 것 같은데 그 이상의 설명이 없다.  

영지의 감정 때문에 흔들린 타인들이 누구인지 명시적으로 말하지 못했다.

도대체 어떤 상황에서 누가 당황했는지 핵심이 두루뭉술하고, 초점이 없다.  


그리고 새인이 나는 흔들리는 편이 아니라고 자부하면서 타인과 비교한 태도도 문제가 있다.

비교하는 태도는 건강하지 않다.

비교의 본질은 열등감과 닿아 있다.

독립적인 자아의 힘이 약한 이들이 비교의식에 쉽게 휘둘린다.   


이후에도 새인은 누군가와 본인을 비교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영지는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몰라 살짝 곤혹스러웠다.   

새인에게 그동안 억눌러 온 열등감이 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묻지도 않았는데 굳이 내가 어떤 사람인지 너무 줄줄이 설명하려는 태도에서 나르시시즘이 묻어났다.


게다가 새인은 언젠가부터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새인은 영지의 행동이 마음에 안 들면 그 자리에서 애써서 표현하곤 했다.

당사자 앞에서 제삼자에게 영지를 욕하거나 사소한 일에 짜증을 내는 일도 잦아졌다.


나중에 이를 문제 삼자 새인은 자신의 무례함을 두둔했다.


난 원래 욱해서 그래.

나도 내가 그런 걸 잘 알아.  


아니, 다른 사람들이 영향을 받으니까 감정을 드러내지 말라면서?


그리고 '네가 어떤 행동을 해도 아무렇지 않다'는 뉘앙스로 말한 것도 설득력이 없어 보였다.

그가 저 주장과 반대되는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새인은 말로써 자꾸 자신을 어필하는 습관이 있었다.

특히 자신은 쉽게 상처받는 사람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내가 복도에서 지나가도 춘희가 인사를 안 하더라?

나만 인사했어.

내가 나이도 많은데.

그런데 나중에 걔가 사과를 하더라고.

하하하, 그런데 사실 난 아무렇지 않았거든.


인사를 일부러 안 한 건데 상식적으로 상처를 받을 만하지 않을까.  

오히려 이것을 이야기의 소재로 삼은 것 자체가 상처를 받았다는 뜻이다.

정말 마음에 흠집이 나지 않았다면 입에 올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울러 정말 그는 마음이 단단했을까.

관찰해 본 결과 그것도 역시 사실이 아니었다.


새인은 영지 앞에서 격한 감정을 여러 차례 쏟아냈었다.  

 

두 개의 약속이 갑자기 취소됐다고 운다.

그리고 시댁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아무 말도 못 한 채 뒤에서만 억울해한다.

블로그를 열심히 꾸몄는데 친구들이 자기 노력을 알아주지 않는다며 눈물을 흘리느라 전화를 끊는다.


우는 건 자연스러운 감정의 표현이다.

강하면서도 눈물이 풍부한 사람이 있다.   

여기에서는 그가 운 게 요지가 아니다.


다만 평소 새인이 경솔하게 자꾸 자신을 애써 설명했던 게 패착이었다.

그는 남을 혼내고 기게 센 사람이라는 홍보성 멘트를 종종 뱉었던 것이다.
새인의 말과 현실은 많이 달랐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를 '고칠 점만 보는 사람'이라고 정의하면서 자신을 방어했다.

새인은 부정적인 감정을 자주 느꼈다.

사람들의 말에 영향을 쉽게 충격을 받고, 보복감을 가졌다.  

결국 새인은 상처를 잘 받았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하고 있을 때는 네가 감정을 드러내면 사람들이 당황하잖아.

나는 나이가 많아서...


이건 조언도 충고도 아니다.

새인이 영지에게 상처를 받을까 봐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방어하는 쪽에 가까웠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영지는 꽤 호의적이었다.

그래서 스스럼없이 새인에게 다가갔었다.

어쩌면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데 망설임이 없거나 인간적 호감을 고스란히 드러냈던 게 오히려 새인의 경계심을 자극했었을 수도 있다.

   

나르시시스트는 충고 비슷한 걸 차용해서 자신의 불안한 감정을 상쇄시키곤 한다.  


나르시시스트는 타인에게 관심이 없다.

저 말의 출처를 물어도 어차피 그는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이 부분은 나르시시스트의 길들이기 시도로 봐도 되겠다.

 

비난의 내용이 얼마나 구체적이고 일관적이냐를 따져 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대개 나르시시스트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논거를 설득력 있게 말하지를 못한다.            


나르시시스트는 상대를 위해 '조언'한다고 우긴다.  

쓴소리지만 약이 되는 충고라고 치장하기도 한다.

너를 '잘 알아서' 얘기하는 거라고 생색을 낸다.    


하지만 전형적이고 허울 좋은 거짓말에 속지 말아야 한다.

나르시시스트는 거짓말로 남도 기만하고, 자기 자신까지도 속이는 자다.


어떤 이는 자신을 이렇게 설명한다.


나는 못됐어.


그는 정말 못됐다.

그래서 저 말은 자기 고백적인 말 같다.


하지만 나르시시스트의 세계에서 못된 것은 강한 것이다.

그래서 대개 착하고 잘 웃는 사람을 희생양 후보에 올려둔다.

그는 선한 것을 추구하는 자를 업신여기기 때문이다.  

서열의 싸움에서 불리할 거라고 여기는 거다.


나르시시스트는 생존본능에 충실하다.

그래서 친절한 대상에게 못되게 굴고서도 죄책감이 없다.  

이 험악한 세상에서 밟히지 않으려면 먼저 밟는 게 최선이라고 여긴다.

단순하고 이분법적으로만 사고하면 저런 발상을 하게 된다.  

그러니까 그의 세계관에 비춰 보면 결국 못됐다는 말조차 자기 자랑인 셈이다.


남을 깎아내리는 언변.

명령조의 말투.

작은 일에 과하게 무안을 주는 무례한 태도.

기타 등등.


저런 행위는 나르시시스트의 디폴트다.

지나치게 까탈스럽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하다.

성정이 예민한 것과 인품이 모자란 것은 다르다.

나르시시스트는 후자다.


그는 고삐 풀린 말처럼 희생양을 열렬하게 구박한다.

그러면서 서열이 높은 사람 앞에서는 눈망울이 초롱초롱해지면서 복종하기 바쁘다.


B는 A에게 막말을 했다.

그러다가 정작 상대가 정색하며 사과를 요구하자 그는 이런 궤변을 늘어놓았다.


나는 짜증 난다는 말을 안 써.

나는 바가지(싸가지) 없다는 말을 안 써.

그런 말을 속으로만 생각하지 앞에서 말하지 않아.


하지만 B는 스스로를 이렇게 표현하기도 한다.  


나는 못됐거든.

내가 원래 욱해.

난 다혈질인데?

원래 화나면 아무렇게나 해, 나는.


진짜 짜증 나게 하네.

이전 전화통화에서 B가 새된 소리를 질렀었다.


사실 저 말이 강도가 센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말조차 안 쓴다면서 화나면 원래 아무 말이나 한단다.

다혈질이라면서 기분이 나빠도 표현을 안 한단다.  

모순적이다.


나르시시스트가 저런 궤변 섞인 변명을 하는 이유가 있다.

그는 지적받는 걸 두려워한다.  

두려워하는 것은 상처를 받는 게 아파서다.

그러면서 평소에 남의 고칠 점만 본다고 기세등등하게 말하곤 했다.  


나르시시스트는 야비하고, 교활하다.

대인관계에서 유리한 입지를 선점하려고 때론 선하고 정의로운 가면을 뒤집어쓴다.

비판을 피하려고 방어책을 구비한 거다.


나르시시스트는 서열을 분명히 하려고 남을 비난한다.

그의 의식 속에서 서열은 시소와 같다.

한쪽이 내려가면 한쪽이 올라간다.


누군가의 비판은 내용과 상관없이 나르시시스트의 자존감을 한껏 뒤흔든다.

건전한 비판은 나르시시스트의 자존심에 제대로 일격을 가할 수 있다.

그래서 누군가가 지적하기 시작하면 도망칠 궁리부터 한다.  

그러다 보니 저런 모순적인 말을 내뱉게 된다. 결국 저 궤변의 한 줄로 정리하면 이렇다.   


나는 좋은 사람인데 못된 사람이야.  

나르시시스트와의 대화가 불쾌하다면, 수시로 그가 타인을 공격하는 말을 하기 때문이다. 공격받을까 봐 두려워하는 나르시시스트는 웃으면서 은근히 친구를 깔보는 말을 한다

다음은 나르시시스트의 거짓 페르소나다.  


매사에 객관적인 판단력을 발휘해 문제의 핵심을 날카롭게 파악한다.

복잡다단한 사회 현상의 원인과 결과는 물론 대응책까지 안다.

타인보다 윗단계의 생각을 한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의견이 대립되면 무조건 남이 고차원적인 생각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왜곡해서 해석한다.    

그는 내 생각은 틀릴 리 없다고 확신한다.

물론 이에 걸맞은 객관적 증거는 없다.

실체 없는 주장인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인간을 전인격적으로 이해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그래서 상대가 생각의 오류가 잦다고 일찌감치 결론을 짓는다.  

무시하는 발언을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발언의 수위를 점점 높인다.

상대를 희생양으로 낙인찍었다는 위험한 신호다.  


그동안 묵혔던 감정을 하나씩 풀어놓는 것이다.

사실 그는 초기부터 부정적인 생각을 쌓아가고 있었다.

다만 얕은 친절함 뒤에 실루엣만 보이게 그 감정을 감춰뒀을 뿐이다.   


그런데 나르시시스트는 스스로를 굉장히 높이 평가하는 말을 많이 한다.


누가 이렇게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나는 가르치는 걸 좋아해.

그래서 좋아하는 사람들한테 막 해결책을 알려 줘.


이 말을 듣고 이질감을 느꼈다. 저 말의 속뜻에서 이상한 전제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나는 가르치는 걸 좋아해(다른 사람들은 내가 가르쳐야 하는 대상이야)

그래서 좋아하는 사람들한테 막 해결책을 알려 줘(나는 상대보다 정신적인 우위에 있어).


물론 저런 생각을 할 수는 있다.

생각은 자유니까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은밀하게 주장한 것과 그의 실체가 달랐다는 점이다.

실제로 그는 남들보다 정신적으로 수준이 높거나 우위에 있지 못했다.

오히려 여러 가지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일단 평소 그의 행실은 이타적이지 못한 성정을 지니고 있었다.

워낙 사람들에게 막말을 했기 때문이다.


햇병아리 주제에!

거지근성이 있어!

은주는 연극할 때 어색하니까 너희가 와 어색하네 이렇게 대사를 해 봐.


소리를 질러가며 꽥꽥거리는 그의 모습에서 인격적 결함을 발견했다.

그는 사람들과 진지하게 교류하지 못했다.

그와의 대립으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아 교회를 떠났다.

같은 동료들과도 관계가 깊지 못했다.

모 동료의 전언에 따르면 사무실에서 한 마디도 말을 안 해서 미스터리했단다.


사실 어린 시절 그는 아버지에게 일방적으로 폭언과 폭행을 많이 당했더란다.

괴팍한 아버지는 공부를 잘하는 동생과 그를 비교하며 혼냈다.  

심지어 상습적으로 때리기까지 했단다.


결국 그에게 큰 정서적 결핍이 생겼다.

그리고 구멍 난 마음은 쉽게 치유되지 않았다.

상처는 현재진행형이었던 것이다.

치유는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웃자란 지금의 모습을 괜찮다고 말해줄 수는 없었다.

잘못은 잘못이고, 거기에 어떤 변명도 붙을 수가 없다.

그리고 힘들게 자라도 성품이 좋은 사람들이 존재한다.

어쩌면 그는 원래부터 결함을 지닌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어렸을 때 감당할 수 없는 폭력을 당했던 자기 자신을 혐오하고 있었을 수도 있다.

동생보다 못하다는 느낌에 열등감에 타올랐던 자아가 남아있었을지 모른다.

다른 성도들을 공격적으로 대하던 모습은 사실 초라한 자아를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이었을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나르시시스트의 말에는 이면이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높이는 말은 사실 자기 자신이 되고 싶은 모습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동시에 아직 이상적인 모습에 아직 다다르지 못한 현실을 인정하기 싫어서 나온 말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들이 나를 어려워하더라고.

내가 누구를 엄청 혼냈어.


누군가가 자신을 어려워한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쓰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자신을 누군가가 어려워하길 바라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아서 나온 말일 수도 있다.


그런데 저런 말들은 수많은 대화 중에 일부의 조각이지만 나중에 조각의 범위가 점점 넓어지고, 나중엔 대화 전반을 뒤덮는다.

전염병이 창궐하는 양태처럼 말이다.

   

물론 실제 나르시시스트와는 거리가 먼 이미지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요소들로 이루어진 인물은 나르시시스트가 아니다.

저런 모습은 단지 그의 지독한 자기중심적인 해석이 빚어낸 허상이다.

나르시시스트의 세계에서는 환상이 곧 진실이지만 말이다.

네가 모르는 걸 내가 가르쳐주고 싶어. 사실 네가 무엇을 아는지는 관심이 없지만 말이야. 나는 내가 똑똑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을 뿐이야. 이게 나르시시스트의 본심이다

나르시시스트는 현실 감각이 떨어진다. 자기중심적이기에 남에게 딱히 관심이 없다.

코 앞에 놓인 현실을 고민하기보다 이상적인 모습을 구현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그래서 남의 비판을 잘 듣지 않는다.

다만 인정 많고 사리분별력이 뛰어난 나를 상대가 오해했다고 믿는다.


정말 나르시시스트를 잘 몰라서 하는 말일까?

사실 그의 실체를 제대로 파악했기에 분노하며 진실을 폭로하는 것은 아닐까?


나르시시스트는 만만한 상대를 괴롭혀서 자존감을 높이려는 미성숙한 인간이다.


그는 땅으로 깊숙이 내려앉은 자존감을 극복하려고 흡혈귀처럼 타인에게 기생한다.

나르시시스트는 자기 자랑을 하려고 틈만 노린다. 멋지고 센 나를 인정받으려고 인간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그 모든 행동의 이면에는 초라하고 말라빠진 나르시시스트의 내면이 작동한다

특히 나르시시스트는 친절하고 배려있는 사람에게 이빨을 들이댄다.


남의 자존감을 떼어 와 자신의 구멍 난 자존감을 채우는 것이다.


몹쓸 도둑이 따로 없다.  


그는 죄 없는 타인에게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쏟아부으며 비뚤어진 자아를 표출할 뿐이다.


그런 비겁한 태도에 그럴싸한 사족을 붙여서는 안 된다.   


평소에 나르시시스트는 못되게 행동하면서, 누군가가 그런 점을 꼬집으면 그제야 태도를 바꾼다.

타인의 불행을 바라는 나르시시스트가 과연 친구를 위해서 조언을 할까? 그는 자신이 불리해질 때만 선한 사람을 연기한다. 그의 번지르르한 말에 속을 필요가 없다

나는 좋은 의도로 한 조언인데 기분 나쁘게 들을 줄 몰랐다.  

원래 내가 냉랭하기는 하지만 못된 사람은 아니다.


내가 당황스러워서 한 말이다.   

네가 잘못 기억하는 것 같다.


이렇게 나르시시스트는 카드 돌려 막기처럼 멘트 돌려 막기를 해서 타인의 정직한 비판에 철벽을 친다.

저 변명은 다 거짓말이다.


그는 악행을 합리화하려고 궤변을 늘어놓는다.

그러다가 그 궤변을 지적당하면 또 다른 궤변을 끌어온다.


자신의 허점을 미화하려고 대화의 소재를 돌린다.

상대방이 가해자라는 프레임을 씌운다.  

나르시시스트는 지적을 피하려고 묘기를 부린다. 검은 걸 희다고 말한다. 왼쪽을 오른쪽이라고 말한다. 거짓말을 해서라도 어떻게든 타인의 저격을 벗어나려고 노력한다

도둑이 경찰을 피해 골목길에서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것처럼 나르시시스트는 혐의가 드러날까 봐 얕은 술수를 쓰며 꽁무니가 빠지게 달아난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와의 대화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다.


그는 앞인데 뒤 같고, 뒤가 앞 같은 모순과 궤변으로 대화의 장을 쑥대밭처럼 만든다.

대화의 맥락에 어긋나는 말을 하고, 묻는 말에 직접적인 대답을 회피하며 딴청을 피운다.


나르시시스트를 혼쭐 내는 사람은 이럴 때 인내심을 발휘해야 한다.

나르시시스트와 싸우려면 심호흡을 고른 다음 결정적인 순간에 타격을 줘야 한다

타인의 비판을 절대적으로 회피하려는 나르시시스트를 멱살 잡고 제자리로 돌려놔야 한다.


그가 가야 하는 제자리란 죄를 묻는 상대의 질문에 담백하고 솔직하게 대답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나르시시스트를 동서남북이 막힌 구석으로 몰아붙여서 진실에 가까운 내적 고백을 들어야 한다.   


죄를 무마시키려고 미사여구를 총동원해 자신을 포장하는 나르시시스트의 주장에서 논리적 허점을 찾아 공략해야 한다.

나르시시스트가 더 이상 도망가지 못하도록 그의 양 날개를 꺾어야 한다. 나르시시스트의 변명이 길어질수록 맥을 끊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해야 한다

그의 주장은 수박 겉핥기식의 원론적인 말이나 거짓이 섞인 자기 반명일 때가 많다.


나르시시스트는 조언을 명분 삼아 의도적으로 친구의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냈다.

못된 말에 베인 자존심이 조각나 땅에 떨어지면, 나르시시스트는 그걸 주워 먹으며 빈곤한 자아의 허기를 채운다.  


그런 철없고 이기적인 모습을 다짜고짜 선하게 묘사하려니 도무지 아귀가 안 맞는 말을 한다.


따라서 나르시시스트의 주장은 부실공사로 지어진 건물처럼 조악하고 편협하다.

그러므로 그 주장의 뼈와 살을 논리의 칼로 해체시켜야 한다.  


대화가 어그러지는 까닭은 나르시시스트가 잘못을 인정하는 걸 죽도록 싫어하기 때문이다.  

진실을 부정하려고 본인의 저의를 미화하려니 거짓말을 하게 된다.

나르시시스트는 자기 방어를 하려고 평생 갈고닦은 무기가 있다. 어떤 나르시시스트는 내밀한 고백을 했다. 본인이 우기는 성격이란다. 나르시시스트는 잘못하지 않았다고 무조건 우긴다

맞다.


나르시시스트는 거짓말쟁이다.
       

거짓말의 특징은 가변적이라는 점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어제 했던 말과 오늘 하는 말이 다르다.


행동과 말이 따로 논다.


완벽한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지키려고 논리가 허술한 주장을 펼치며 자기 보호하기에 급급하다.

상대가 그를 비판할 때, 나르시시스트는 추상적이고 모호하게 변명하면서 진짜 의도를 감춘다.


누군가가 나르시시스트의 가면을 벗길 때, 그는 맨 얼굴을 안 보여주려고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는 것이다.   

내 가면을 벗기지 마. 아아악. 나르시시스트가 비판받을 때 정신없이 이런저런 이유를 대면서 호들갑을 떤다. 가면을 벗기는 상대가 그는 두려운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는 본인이 거짓말하고 있다는 것을 모를까.

거짓말하는 게 일종의 습관이라서 거짓말한다는 인식조차 없는 걸까.

거짓말하는 자기 자신을 관망하는 데 익숙한 걸까.


나르시시스트의 마음속에 얼마나 지독하고 지질한 악이 들어 있길래 죄책감도 없이 태연하게 말을 지어낼까.


그가 나쁜 말을 했던 의도를 장황하게 설명할수록 의심하자.

자신의 검은 속내를 가리려는 거짓말일 수 있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의 힘으로 높은 위치에 다다를 수 없다고 생각할 때 남을 깎아내리는 쪽을 택한다

나르시시스트는 상대방을 낮은 위치로 끌어내리려고 조언, 훈계, 충고를 활용한다.


사회적 통념 안에서 문제 해결책이나 통찰력이 깃든 교훈을 주는 사람은 윗사람이고, 그걸 듣는 사람은 아랫사람이다.


나르시시스트는 관계에서 우위를 점하려고 윗사람의 언어를 모방한다.


동시에 상대에게 아랫사람이라는 역할을 슬쩍 부여한다.


물론 그가 직장 상사가 아닌 이상 만나자마자 사람을 하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초반에 나르시시스트도 내면에서 억지로 친절을 긁어모아 호감을 사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정서적으로 밀착되는 시점부터 그는 가식적인 웃음을 거두고 상대의 목을 옥죈다.


비판을 가장한 비난과 중요하지도 않은 것을 트집 잡아 지적하는 행위를 무기로 서열 정리에 힘쓰는 것이다.

강약약강의 논리에 완벽하게 수긍하는 자가 나르시시스트다. 서열에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나르시시스트가 희생양 후보를 찾기 쉬워지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인간관계에서 왕 노릇하려고 서열을 멋대로 직조한다.


성급하게 서열을 정리하는 가장 큰 이유는 비판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나르시시스트가 가장 충격받는 순간은 비판받을 때다.

그는 비판을 좋아하면서도 비판받는 것은 정말 싫어한다.


큰 풍선을 바늘로 찌르면 쾅 소리를 내면서 터져버린다.

그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쪼그라든 풍성 껍데기를 제외하고.

내가 최고라고 칭찬해 봐. 나르시시스트를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타인의 자유다. 그런데 나르시시스트는 남에게 그런 자유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한다

단점을 비판받을 때 나르시시스트의 자아는 그 풍선처럼 초라하게 터져버린다.

열등감과 적개심으로 똘똘 뭉친 실체가 들통난다고 여겨 그는 극한의 고통을 느낀다.

그래서 본인의 약점을 간파해서 한마디 하는 친구들을 깎아내리며 열렬히 미워하는 것이다.  


지적받는 상황만큼은 피하려고 나르시시스트는 고군분투한다.

다른 이들이 자신의 의견에 가치 판단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동조하게끔 방어막을 치는 것이다.


물론 권력의 분배로 이루어진 먹이사슬에서는 위에 있는 게 낫다.

자신보다 체급이 높은 상대에게 사람들은 함부로 주먹을 날리지 않는다

상사가 실수할 때 사람들은 열심히 비판하지 않는다.

하지만 신입이나 동료가 실수할 때 사람들은 득달같이 달려들어 훈계하고 가르친다.


상대의 기분을 고려하지 않은 채 네가 잘못했으니까 화내는 거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너의 자존심은 훼손돼도 상관없으니 나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내키는 대로 감정을 표현할 거야.

하지만 내가 너에게 난리 치는 것처럼 너는 나를 비판하면 안 돼.


이유는 네가 더 잘 알지?

내가 너보다 더 위에 있잖아.

나는 강자니까 이렇게 해도 돼.


바로 이게 나르시시스트의 심리다.  

나르시시스트의 뇌를 해부해 보자. 그는 힘의 논리에 격하게 반응하는 전두엽을 갖고 있다

물론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일은 당연하다.

또 사람이니까 차질이 생길 때 감정적으로 반응할 수 있다.


하지만 신입이나 동료를 비판하는 것은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가 나보다 낮거나 동등하다고 인식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가 함부로 대해도 불이익이 없다고 판단했기에 상대에게 속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강자 앞에서 사람들은 본인의 행동을 자체 검열한다.


마치 시장에 나온 상품 중에 가장 좋은 것을 고르려고 이것저것 만져보는 행동과 같다.

가장 다듬어진 말, 가장 다듬어진 행동, 가장 다듬어진 매너를 갖추려고 애를 쓴다.


강자에게 좋은 사람으로 인식되는 게 이득이니까 알아서 매끄러운 태도를 보인다.

마음속으로 강자를 싫어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위해서 쉽게 찡그리지 않는다.


물론 사회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서열을 감안해 태도를 조절한다.  

나르시시스트는 강자가 되거나 약자가 되거나 둘 중 하나의 입장을 취할 때가 많다. 타인을 동등하게 생각하는 게 나르시시스트에게는 그렇게 어렵다

하지만 나르시시스트는 서열을 고려한다기보다 강박적으로 서열에 집착한다.

그는 본인이 조금이라도 위라고 판단하면, 도를 넘어선 비정상적인 태도를 보인다.  


특히 그가 누군가를 아랫사람으로 규정할 때부터 사달이 난다.


아랫사람이라는 프레임에 있는 사람이 해맑게 자신의 의견과 감정을 얘기한다면, 본의 아니게 나르시시스트의 발작 버튼을 누르는 격이 된다.  


나르시시스트가 직장 상사라면 네가 신입이니까 가르쳐주는 거라면서 사사건건 잔소리를 퍼부어대고, 수시로 극악한 분노를 표출할 것이다.

작은 일에도 직원을 신랄하게 비판하며 경솔하게 비웃고 조롱할 것이다.

나르시시스트가 상사일 때, 사람들은 상당히 곤란해진다. 그가 무슨 일 때문에 발작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상황에 맞지 않는 감정적 분풀이 너머에는 나르시시스트의 유약한 자존감이 자리 잡고 있다.


그는 상대의 말 한마디에 과도한 의미부여를 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 한다.

다른 사람의 반응에 의존해 자신을 규정하는 것이다.


의존적인 사람의 특징은 타인의 반응 하나하나에 깊게 상처받는다는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을 상대가 우러러보지 않으면 자존감이 무너져 절망한다.

그래서 다양한 방어기제로 시시각각 자신을 지키려 든다.

상사 나르시시스트는 수시로 직원들에게 전화해 지엽적인 일을 언급하며 신경질을 냈다. 그러나 사장 앞에서 그는 하염없이 공손한 인간으로 변신했다

그는 힘들게 쌓아 온 서열의 세계에서 미리 상대가 선을 넘을까 봐 겁낸다.

그래서 타인을 밀어내려고 실체보다 더 크게 자신을 부풀린다.  


나르시시스트는 활발하게 의견을 개진하는 사람을 본인의 영역을 침범할 존재로 인식한다.


반대로 사람들이 눈치 보고 할 말을 못 하는 걸 볼 때 기분이 좋아진다.

나르시시스트는 찡그린 타인의 얼굴을 보면서 자신이 힘세고 대단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상대가 기분 나빠할 때 나르시시스트는 안도감을 느낀다. 적으로 규정한 사람이 사기를 잃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공격당하는 것이 두려울 때 그는 상대를 꺾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르시시스트는 통제와 억압으로 타인을 억누르는 관계에 중독되어 있다.

비정상적인 관계를 정상적인 관계로 단단히 착각하고 있다.


그런 나르시시스트 앞에서 누군가가 편하고 자유롭게 감정표현을 한다?

그가 얼마나 화가 나겠는가.


사람이 웃는다는 것은 나르시시스트가 힘들게 세운 질서를 해맑게 밟아버리는 것이다.


만날 왜 나르시시스트 너만 호들갑이야?

왜 그렇게 매사에 혼자 심각해?

나르시시스트 너는 별 것 아닌 걸로 울상을 짓는구나.  

나르시시스트는 웃는 사람에게 이런 메시지를 받는다. 나는 너의 통제 안에 있지 않아. 네가 무슨 생각을 하든지 나와는 상관없어. 나르시시스트는 나에게 중요한 존재가 아니야

구김살 없는 상대가 나르시시스트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해 그는 더욱 자존심이 상한다.  


나르시시스트는 수시로 타인에게 눈금자를 들이댄다.

그 사람과의 관계에서 본인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그가 상대방에게 짜증을 내는 이유도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고 싶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스트는 방어적이다. 상대를 미리 경계하고, 자신의 이미지를 어필해 보호막을 쌓는다

나는 성격도 있고, 센 사람이니까 네가 내 입맛에 맞게 행동했으면 좋겠어.


사실 이런 메시지를 던지는 거다.


나르시시스트의 세계에서 나르시시스트는 홀로 특권을 지녔다.


배우자나 친구일지라도 그는 본인이 서열상 위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르시시스트의 표정을 살피며 비위를 맞춰주길 바라는 것이다.


악의가 없는 신입은 쉐도우 복싱하는 나르시시스트가 황당할 뿐이지만 말이다.  

사랑이 많고 친절한 사람은 나르시시스트에게도 따뜻하게 대한다. 그런 점 때문에 나르시시스트는 마음을 열곤 한다. 그러나 결국 나르시시스트는 편안해하는 상대가 곧 불편해진다

게다가 나르시시스트는 힘의 논리에 잘 승복하기에 강자에게 굴종적인 모습을 보인다.


어떤 상황에서 누구와 있든지 사람은 존중받고 싶어 한다.

그런데 강자 앞에서 나르시시스트는 존중받고 싶은 욕구를 마음 한편에 처박아 둔다.  


지나치게 순종적인 모습으로 자신을 어필하는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는 강자에게 숙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차곡차곡 굴욕감을 쌓는다.  

그리고 저장해 둔 수치심을 아랫사람이라는 이름표를 가진 사람에게 푼다.

나르시시스트에게 순수한 마음으로 다가간다면 나중에 그에게 무슨 막말을 들을지 모른다. 차라리 처음부터 나르시시스트에게는 차갑게 대하며 거리를 둬야 한다

나르시시스트는 만만한 타인이 자신의 감정 분풀이 대상이 되길 원한다.


그런데 상대가 정색하고 나르시시스트를 지적한다면?

그는 자존심에 큰 타격을 받는다.  


시도 때도 없이 남을 공격하는 나르시시스트는 정작 타인에게 공격당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합당하고 실리적인 비판이어도, 혹은 그런 비판일수록 공격당했다고 인지할 뿐이다.  


비판자 때문에 본인의 이미지가 한 방에 날아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나르시시스트의 병약한 자아가 만들어 낸 확대해석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내가 얼마나 멋진 사람이 네가 잘 몰라서 그러는 모양인데. 나르시시스트는 실체를 숨기고 연기를 한다. 그런 연기에 속지 않는 사람들을 그는 미워한다

그동안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을 지성과 인성을 겸비한 사람이라고 어필했다.

그러니 그 이미지를 부정하는 얘기가 나왔을 때 격하게 거부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B는 누가 묻지 않아도 자신이 어떤 사람이 설명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스스로의 성격을 이렇게 규정했다.  


나는 비판할 점만 봐.


그는 본인이 객관적인 판단력을 지닌 냉철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을 홍보하기 위한 마케팅팀이 따로 있다. 수시로 남에게 좋은 이미지를 어필하려고 이런저런 말을 덧붙인다

B에게 비판은 낮은 자존감을 올려 줄 유일한 장치였다.  


B의 지적을 받고 찡그리는 사람들을 통해 그의 헛헛한 자아가 채워졌다.  

그는 타인의 고민을 들을 때 그 내용 자체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 상황에서 마치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세상만사를 다 아는 척하기 바빴다.

B에게는 본인의 주장을 타인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게 중요했다.


그래서 자신의 의견이 거부받을 것을 염려해 일부러 비판을 잘하는 캐릭터를 들이밀었던 것이다.

네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일 때 나의 자존감이 올라가. 네가 내 자존감을 올리는 역할로 희생하면 어때. 나르시시스트는 간접적으로 이런 요구를 하는 셈이다

물론 그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었다.

단지 B는 모든 사람과 상황을 부정적으로 해석할 뿐이었다.  


잘하는 사람도 이상하다고 하고, 못하는 사람은 더 이상하다고 주장했다.

그게 다였다.

그러니 모든 사람을 이상하다고 불평하는 그가 정말 이상한 사람 같았다.


문제는 B는 자기 자신을 평가할 때만큼은 한결같이 낙천적이었다는 점이다.


타인이 잘못을 지적하면 남도 그런 잘못을 한다며 대화의 물꼬를 돌려버렸다.

그리고 자신이 잘못한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며 열을 내며 변명했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 이런 이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랬던 거야. 나르시시스트가 매번 자기 합리화를 한다

B는 본인의 성격이 세고, 탁월한 혜안이 있어 남보다 앞선 사고방식을 지녔다고 믿었다.

그래서 소위 잘난 척을 하며 허세를 부렸고, 다른 사람들을 아랫사람 취급했다.  


또 자신의 잘못은 다 남 탓으로 돌렸다.


B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때 무논리적인 말을 들이댔다.


너는 한 번도 잘못한 적이 없니?

너는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려.

네가 나를 비판하는 내용은 너에게도 해당되는 것 아냐?

나르시시스트는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는 법이 없다. 꼭 다른 사람을 비하하거나 은근히 남 탓을 하며 자신의 문제를 남의 문제처럼 둔갑시킨다

예전에 나를 하대하던 C에게 참다못해 화를 내 적이 있었다.

C는 크게 놀라며 반문했다.


너는 완벽하니?

세상에 완벽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C가 완벽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게 문제라고 말한 것도 아니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완벽한 사람만 지적할 수 있다는 것인가?

그럼 C도 나에게 아무런 말도 못 해야 맞다.

그가 완벽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평소에 C는 여러 사람들 있는 데서 기세 등등 하게 나에게 짜증을 냈다.

내가 하는 말과 일 처리에 관해 명령조로 지적하며 훈계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완벽한 사람이 없는 건 당연한 거다. 나르시시스트가 굳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그럼 C는 본인이 완벽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나를 비난했단 말인가?


내가 C를 지적했을 때 본인이 무례하다는 것에 대한 해명은 전혀 없었다.


도리어 그는 나에게 비판할 자격이 있냐고 되물었다.


‘너는 완벽하니’라는 C의 질문은 자신이 잘못한 게 맞는데, 그 잘못을 말하는 사람의 자격이 문제란 뜻인가?


그럼 완전무결한 사람이 C를 지적한다면?

C도 스스로 잘못했다고 인정하고 태도를 시정할 것인가?


그냥 그는 잘못한 사람이 되는 게 싫으니까 체면치레를 하느라 궁색한 처세술을 시전 했다.

그럼 본인은 완벽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나를 지적했던 건가

나르시시스트는 비판받을 때 저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


나르시시스트는 역지사지가 잘 안 된다.

그의 내면 안에 객관성의 저울추가 고장 났다.


거짓말의 귀재.

하루 종일 모순을 뱉어내는 프로그래밍이 삽입된 기계.

궤변으로 타인의 기만하는 사기꾼.

친구의 자존감을 훔쳐가는 희대의 도둑.  

바로 나르시시스트다.


나르시시스트와의 논쟁에서 승리하는 방법은 논리적인 대화를 하는 것이다.

나르시시스트의 말은 안 맞는 퍼즐처럼 괴이하다. 논리점 허점이 많으니까 그 점을 집중 공략하자

논리적인 관점에서 나르시시스트의 거짓말과 궤변은 공격당할 허점이 많다.

  

물로 상대가 논리적으로 나르시시스트의 말을 반박해도, 그는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고 우길지 모른다.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말도 나르시시스트를 저격하는 내용이라면, 그는 타인의 비판을 수용하지 못할 수 있다.


결국 자기 권리감이 충분해서 부당한 대우를 지적하는 사람들은 나르시시스트를 떠나게 된다.

나르시시스트의 논리는 나르시시스트의 세계에서만 통하는 무논리적인 주장일 뿐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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