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친했던 회사 동료가 갑자기 차갑게 돌변했다.
내 입장에서는 아무 일도 없었지만 상대의 마음은 싸늘하게 식었다.
그 사람의 관점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다.
태도를 바꾼 그를 어떻게 대해야 최선일지 고민한다.
따로 불러 이야기해볼까 싶다가도 나를 노려보는 눈빛을 보니 멈칫하게 된다.
이제 회사 휴게실에서 오순도순 얘기하던 일상은 낯선 과거이자 마음 아픈 흉터로 남았다.
시멘트에 생살이 갈리는 듯한 직장 생활 속에서 서로 고충을 나누며 위로를 얻었다.
하지만 그런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한순간에 데면데면해졌다.
복도에서 얼굴을 마두칠 때마다 각자 의식적으로 다른 곳을 본다.
불편함을 참으며 무심하게 지나치는 게 고역스럽다.
얼마 전 그 사람을 만나서 얘기한 적이 있다.
이야기 도중에 내 말을 듣더니 갑자기 그의 표정이 안 좋았었다.
그 순간이 마음에 걸렸었다.
그런데 역시 그날 이후로 마음을 닫은 듯했다.
인간이란 존재를 언제든지 깨질 수 있는 도자기처럼 여기며 조심스럽게 대해야겠다고 한번 더 다짐하게 된다.
타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 사람일수록 미처 드러내지 못한 상처가 많다는 생각이 든다.
인조바위같이 무미건조한 겉모습은 험한 세상에서 터득한 생존법의 일환이 아닐까.
상실감도 느꼈지만 인간의 연약함을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사람 덕분에 괴로웠던 경험은 생각보다 마음에 오래 남는다.
당시 별 감각이 없었다고 해도 시간이 지날수록 과거에 힘들었던 기억이 떠올라 우울해지기도 한다.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상했을 때, 망설임 없이 속내를 내비쳤다면 차라리 괜찮았을 것이다.
예고 없이 훅 들어온 상대의 잽에 당황하다가 불쾌한 대화가 어영부영 끝나버렸다.
타격받은 감정을 추스르기도 힘든데 솔직하고 매너 있게 불편함을 표현하기란 더욱 어렵다.
부정적인 견해를 전하려면 최대한 상대방의 자존심이 덜 다치도록 단어를 하나하나 골라서 표현해야 한다.
내 마음을 현명하게 설명하는 방법이 쓰인 매뉴얼도 없다.
그저 개인의 양심과 재량에 따라 속내를 고백해야 한다.
감정을 적절하게 말하는 것도 평소에 연습해야 실전에서 써먹는다.
슬퍼.
괴로워.
눈물 나.
짜증 나.
외로워.
쓸쓸해.
충격이야.
울었어.
죽이고 싶어.
모욕적이야.
다양한 감정의 스펙트럼 중에 어둡고 습한 것들을 해석하고, 언어에 얹어 공표하는 연습 말이다.
사람들 앞에서 속마음을 말해본 적이 별로 없거나 솔직하게 표현했다가 인신공격당한 경험이 있다면 지금 느끼는 감정이 정당해도 말하기가 꺼려진다.
그렇다고 본심을 숨기기만 한다면 마음은 더 곪아갈 것이다.
분노와 슬픔 등의 심적 괴로움을 분출하지 못하고 쌓아만 둔다면 언젠가 폭발하기 마련이다.
고민을 털어놓을 친구가 없어서 침묵할 때를 제외하고 마음을 어느 정도 투명하게 공개하길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아무렇지 않아.'
꼿꼿한 자세를 취하고 누가 묻지 않아도 저렇게 말하면서 태연한 척한다.
이들은 감정의 출렁임을 마음의 고통으로만 해석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고통을 회피한다.
그래서 그들도 아픔을 선사하는 감정 자체를 거부한다.
슬픔, 분노, 서운함을 순순히 드러내면 남이 나약하다고 손가락질할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의식적으로 속내를 꽁꽁 숨긴다.
오히려 힘들어하는 가족, 연인, 친구의 태도를 평가절하하거나 비웃는다.
날아오는 공에 맞는다면 성별과 나이에 상관없이 누구나 맞은 부위가 아프고 기분이 상한다.
그런데도 괜찮다고 억지로 읊조리며 신체적 아픔과 감정적 통증을 무시하는 행위는 어리석다.
온전한 인격체로서 때때로 고통스러운 상태를 표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우리는 감정이 주는 유익을 누려야 한다.
감정에 온전히 직면할 때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
만약 감정과 마주하길 부담스러워한다면 진짜 자신으로부터 멀어지게 될 것이다.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용기 있는 태도다.
단단한 내면을 가진 사람만이 연약함을 지닌 자기 자신을 용납할 수 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할 수 있기에 보태지도 빼지도 않고 감정을 나누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솔직하게 감정을 토로할 때 누군가가 나약하다는 프레임을 함부로 씌운다면 단호하게 거절하자.
대신 타인을 이해하려 노력하지도 않으면서 경솔하게 판단하는 그들의 나약한 이면을 보자.
수박 겉핡기 식의 처세만 익힌 사람들은 힘들 때 내면을 진중하게 들여다보지 않고 부리나케 도망친다.
의지와 상관없이 불현듯 부표처럼 올라오는 감정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라 방황한다.
그리고 혼돈에 빠진 자신을 애써 모른 척한다.
그들은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면 유약해 보일 거라고 믿는다.
그래서 기분을 고양시키려고 의도적으로 큰소리를 내며 자아를 부풀린다.
마음이 흔들릴수록 본인은 굳건하다고 너스레를 떤다.
아마 처음부터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때 그들도 직선적으로 생각과 감정을 표현했을 것이다.
다만 나름대로 용기를 내서 말했을 때 그 감정을 타인에게 인정받기보다 하찮은 취급을 당하지 않았을까.
속마음을 말한 대가로 예상치 못한 수치심을 경험하자 그들은 흑화 했을 것이다.
이후 세상은 원래 차가운 거라고 자조하면서 마음을 닫았을 것이다.
그리고 어른은 원래 그런 거라며 씩씩해 보이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좀비에 물린 사람이 좀비가 된다.
마찬가지로 감정의 존재를 거절당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감정을 거절하며 이전의 상처를 극복하려 애쓴다.
심리적으로 타격을 준 사람의 행태를 그대로 흉내 내면 초라했던 자존심을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것이다.
남이 나를 낮게 평가할까 봐 미리 위축되어 표정관리에만 힘쓴다면 자아를 잃어버릴 텐데 말이다.
마음은 딱딱한 아스팔트가 아니라 물렁거리는 슬라임 같다.
외부의 충격에 잘 변형되고, 환경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게 인간 내면의 특징이다.
굳이 감정의 일렁임을 부정하고 감추면서 아닌 척할 것까지 없다.
꼿꼿한 대나무는 쉽게 부러진다.
차라리 돌과 풀 사이를 가로지르는 시냇물처럼 외부의 자극에 자연스럽게 반응하며 지낸다면, 장애물 앞에서 더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세상에 더 힘든 일도 많으니 내가 겪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핀잔을 준다.
하지만 내가 힘들면 힘든 것이다.
내가 제일 힘들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그저 힘든 마음을 정직하게 표현하는 거다.
힘든 걸 극복하려고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을 떠올릴 필요가 있을까.
나의 괴로움을 남의 불행과 비교하며 위안을 얻는 방식은 건강하지 않다.
타인의 불행을 통해 내가 저 사람보다 형편이 낫다고 생각하란 거잖아?
너무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해석이 아닌가.
누군가가 나의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그나마 본인은 이 정도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평안을 얻는다면 끔찍할 것 같다.
인간에 대한 존중 어린 마음이 있다면, 너와 너의 고통을 쉽게 비교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힘들어한다는 사실 자체에 집중해서 그를 진정으로 위로할 것이다.
그리고 나보다 더 힘든 사례를 갖다 붙여서 고난을 덮을 타당한 이유도 없다.
흔들리고 좌절하며 일어서길 반복할 때 인간은 강인해진다.
그런 과정에서 겪는 힘듦은 옳다.
대인관계에서 부대낄 때, 나르시시스트는 이런 종류의 고민을 하지 않는다.
영화를 4DX가 아닌 2D로 보는 것처럼 그는 타인을 평면적인 사고방식으로 인지한다.
나르시시스트에게 인간은 지배와 통제의 대상이다.
그는 상대의 인격, 가치관, 성격, 취미 등을 궁금해하지 않는다.
대신 본인을 뒷받침할 하녀 노릇을 할지 진심으로 궁금해한다.
나르시시스트는 상대를 손바닥에 올려두고 쥐락펴락하고 싶어 한다.
사람을 통제할 때 그는 자신의 존재가 우월해진다고 믿는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에 가치판단을 보류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인간 유형을 찾는다.
타인과 대립하기보다 조화를 이루는 사람은 나르시시스트의 모난 돌 같은 성격을 받아줄지 모른다.
나르시시스트가 나르시시스트답게 행동하려면 소위 ‘착한 아이 증후군’을 앓고 있는 인물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는 타인이 내 말에 순종하는지 알아보려고 의도적으로 상황을 연출한다.
작은 일로 과도하게 면박을 준다.
허점이라고 여기는 면을 일부러 들춰내며 조롱한다.
타인을 가르친다는 명분 뒤에 숨어서 감정적으로 분풀이한다.
나르시시스트는 상대가 지적과 비난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유심히 관찰한다.
만약 그가 반격하지 않고 수동적으로 처신한다면?
나르시시스트는 더 강도 높게 구박할 것이다.
책상을 탁탁 치면서 나는 이걸 아는데 너는 왜 모르냐며 따질 것이다.
내가 무례해도 상대가 웃는가?
내가 하대해도 상대가 제지하지 않는가?
내가 트집을 잡아도 상대가 부당하다고 항변하지 않는가?
나르시시스트는 이런 질문에 긍정적인 답을 얻으려 애쓴다.
그러니까 나르시시스트에게 관대해지지 마라.
다른 사람이 관용을 베풀어도 그는 무감하다.
우리가 친절해도 나르시시스트는 고마워하거나 감동받지 않는다.
오히려 상대방이 드디어(?) 자신의 특별함을 알아봐 우대해준다고 착각한다.
만약 누군가가 인간적인 호의로 나르시시스트를 칭찬한다면, 그는 기고만장해져서 본색을 드러낼 것이다.
사심 없이 미소 짓는 사람을 조그마한 상자에 가두고 발로 툭툭 찰 것이다.
왜 그런 것도 몰라?
내가 일일이 가르쳐줘야 네가 아는 거야?
왜 그런 말을 써?
왜 그런 행동을 해?
왜 그런 생각을 해?
왜 그런 옷을 입어?
나르시시스트야, 너는 왜 그래?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이 뛰어난 면모를 지녔다고 과시한다.
본인이 무엇이든 잘 알기 때문에 타인을 배려해서 조언해주겠다고 허풍을 떤다.
남이 요청하지도 않은 훈수를 두면서 성숙한 인물을 흉내 낸다.
나르시시스트는 실제 자신의 모습과 상관없는 이상적인 캐릭터를 만든다.
그리고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라고 거짓말하면서 타인을 길들이려 한다.
나는 비판할 점만 봐.
본인을 이렇게 소개하는 나르시시스트가 있다고 가정하자.
이 말은 ‘비판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얻고 싶다는 뜻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장래희망란에 무작정 대통령을 적는 아이처럼 행동한다.
멋있고 센 사람이 되고자 하지만 훌륭한 위인이라는 소망을 성취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대신 이상에 다다르고 싶은 욕심을 말로 다 흘려보낸다.
내가 원래 뭘 무서워하지 않아.
내가 권위적인 사람이야.
내가 이런 사람이야.
내가 저런 사람이야.
에이. 다 거짓말.
나르시시스트는 본인의 관점에서 멋진 사람을 연기한다.
이 모습이 진짜 ‘나’라고 허위 광고하는 셈이다.
나르시시스트의 일인극에는 그를 칭송하는 역할을 할 제물이 필요하다.
그는 제물 후보들 중에서 가장 착해 보이고 공격성이 낮은 사람을 고른다.
그리고 때가 되면 상대를 본격적으로 무시하기 시작한다.
나르시시스트가 특정인을 제물로 찍기 전에 의식처럼 치르는 행동이 있다.
바로 그를 자신과 ‘비교'하는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는 본인이 남보다 우월하다는 결론을 미리 정해둔다.
그리고 그 결론을 뒷받침할 증거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런 행위는 회사나 학교에서 합격자를 내정하고, 요식행위로 면접자들을 모아 면접을 보는 것과 같다.
그러니 당연히 비교대상이 누구인지는 무의미하다.
그저 나르시시스트의 기이한 비난을 크게 문제 삼지 않는지가 중요하다.
나르시시스트가 본인을 가족, 연인, 친구와 비교하는 동인은 불안감에 있다.
잘난 척의 대가인 나르시시스트는 실상 낮은 자존감으로 고통받고 있다.
그는 못나고 초라한 내면을 들키면 상대가 무시당할까 봐 늘 초조해한다.
그래서 만만한 사람에게 까칠하고 예민하게 굴면서 방어막을 친다.
자신의 삶에 자신감이 없는 사람일수록 사사로운 일에도 타인에게 충고나 훈계를 남발하곤 한다.
선 넘는 행동을 반복하면서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의 언행을 인간적인 실수로 치부해 봐줄 필요가 없다.
당신의 따뜻함을 발견한 나르시시스트는 본인에게 더 숙여보라고 노골적으로 거들먹거릴 것이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상처받지 않으려고 일부러 오만방자하게 행동한다.
그는 회복탄력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스트는 비판을 받으면 자아가 산산이 부서진다.
건강한 사람보다 상처에 대한 회복이 현저히 느리다.
그래서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잘못이 없다고 버틴다.
과오를 인정하면 그의 자존감이 젠가 게임의 나무토막처럼 무너지기 때문이다.
뭉개진 마음을 재건하는 것은 나르시시스트가 힘들어하는 일 중 하나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칭 완벽주의자다.
하지만 그의 실체는 완벽주의자와 거리가 멀다.
그는 실수가 없는 사람이 아니다.
다만 실수한 걸 타인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고군분투한다.
비판에 대한 두려움이 커서 지적당하면 큰 모욕감을 느낀다.
나르시시스트는 실수나 악의적인 행동을 시인하는 순간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비판을 받을 때, 본인의 밑바닥을 감추려고 궤변을 펼치며 반박한다.
나르시시스트는 본인의 약점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능력이 부재하다.
명백히 자신이 책임져야 할 상황일수록 대화의 소재를 다른 데로 돌려버린다.
오히려 다른 사람을 탓한다.
그는 남이 원인을 제공해서 본인이 화를 낼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타인이 화를 낼 때 그는 정색한다.
화를 내는 상대의 태도가 무조건 잘못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비판하는 걸 즐기면서 비판받는 것을 거부하는 모순덩어리가 나르시시스트다.
사과하고 책임져야 할 경우에 상대 탓을 하면서 슬금슬금 뒷걸음치는 게 그의 특기다.
네가 나를 오해했어.
네가 내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게 아닐까.
나쁜 의도가 아니었어.
나는 기억이 안 나니까 네가 잘못 기억한 거야.
너는 한 번도 나처럼 행동한 적 없어?
네가 너한테 못되게만 군 건 아니잖아.
이게 나르시시스트의 전형적인 면피성 처세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는 이렇게 자기 검열하는 질문을 던지지도 않으면서 웃기게도 남한테만 저런다.
나르시시스트는 네가 지적할 만한 자격이 있냐고 따진다.
그러면서 정작 본인은 비난할 특권이 있다고 여긴다.
이렇게 나르시시스트는 생각의 오류를 범한다.
아니면 나르시시스트는 나를 비판하는 너도 똑같지 않냐며 잘못을 반사한다.
물론 진짜 그런 경우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르시시스트보다 더한 사람이 나르시시스트를 비판할 일이 있을까?
꾸준하게 내로남불을 실천하는 사람은 나르시시스트인데 본인만 그걸 모른다.
아니, 모르는 척하는 걸까?
사실 나르시시스트는 거짓말하는 데 도가 텄다.
평소에도 그는 사소한 뻥을 많이 친다.
나르시시스트는 사람이 두려울 때마다 무섭지 않다고 거짓말한다.
그는 상처받을 때마다 아무렇지 않다고 거짓말한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의 지적 능력에 의심이 올라오면 화들짝 놀란다.
그는 현실을 직시할 때 큰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스스로를 검열하면서 느껴지는 자괴감이 깊을수록 그런 현상을 거부한다.
본인이 객관적인 판단력을 지녔고 기억력도 좋다면서 자기 자랑을 한다.
당연히 실체를 확인하기 힘든 허언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에 대해 비판적인 마음을 인정하는 대신 거꾸로 말한다.
못났다고 생각하면 잘났다고 표현한다.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반대급부로 선생 노릇을 하려고 사람들을 가르치거나 빈정거리면서 조소를 날린다.
그는 불편한 감정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오히려 고민을 묵살하고 불쾌감을 타인에게 전가한다.
오만이라는 갑옷으로 열등감을 감추고 억지를 쓴다.
난 다 잘했어.
사람들이 날 잘 몰라서 그래.
다른 사람들은 실수하니까 내 실수를 지적하는 건 내로남불이야.
이렇게 말이다.
나르시시스트가 가족, 연인, 친구에게 불평과 불만을 일삼는 까닭은 타인의 반응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서 자신의 가치를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의 의존적인 성향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따로 있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에 대한 신뢰가 없을 때 불안감을 해소하려고 사람을 이용한다.
잘 지내는 사람을 끌어다가 냅다 문제가 있다고 손가락질한다.
남에게 민폐를 끼치는 방법으로 자신의 존재를 재확인하려 든다.
그러니 나르시시스트가 핀잔을 줄 때 명명백백하게 근거를 대라고 몰아붙여라.
그가 조금이라도 버벅 대면 가차 없이 논리적인 잣대로 응징하라.
그에게 틈을 주지 말아라.
나르시시스트의 오만과 위선을 직설적으로 말해줘라.
성정상 다른 이들에게 잘 웃고 친절하더라도 나르시시스트에게만큼은 냉정해져라.
나르시시스트에게 곁을 주면 오히려 먹잇감으로 찍히고 괴로운 일을 겪을 수 있다.
호인은 그의 모난 점을 품어줄 확률이 높기 때문에 서로 친구가 될 확률이 높다.
또 자기 권리감이 부족하거나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낮은 이들이 나르시시스트와 가까워진다.
나르시시스트의 이상 행동에 주목하기보다 악의적인 충고를 무마하려는 칭찬에 그들은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대립과 경쟁보다는 조화와 평화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촉이 와도 나르시시스트의 악의를 모른 척할 수도 있다.
아니면 정말 모르거나.
초반에 나르시시스트도 좋은 사람을 코스프레한다.
그러면서 상대가 고민을 털어놓고 의지하길 유도한다.
나르시시스트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무조건 우위에 서려고 애쓴다.
남이 고민을 말하면 그는 조언자의 위치를 획득할 수 있다.
상담자라는 가면을 쓰고 사람을 생각해주는 척하면서 타인을 발아래 둘 기회를 찾는 것이다.
자신이 정의롭고 대단하다고 망설임 없이 말하는 사람은 이미 그런 사람이 아니다.
나르시시스트는 스스로 바른 인성과 분별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러다가 조금만 상대의 언행이 마음에 안 들면 가차 없이 안색을 바꾼다.
그는 나의 바른 기준에서 볼 때 네가 너무 잘못했다는 논리로 모욕을 주다시피 한 다음 친절함을 살짝 흘린다.
마치 사람을 실컷 때려놓고 꽃다발을 선물해주는 것처럼 나르시시스트는 패악을 떨고 난 후 그 사람이 떠날까 봐 밑밥을 깐다, 야비하게.
그러면서 자신의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나는 네가 싫어서 못되게 군 게 아니야.
너의 성장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말한 거야.
내가 원래 성격이 불같아서 그런 거지 원래 나쁜 사람 아니야.
내가 너에게 감정적으로 분풀이한 게 아니야.
다만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잘못된 상황을 바로잡으려고 했던 거야.
예전에 나는 선배들한테 사람 취급도 못 받았어, 나는 부드럽게 말한 거야.
나르시시스트야, 너 진짜 웃기는 얘구나.
나르시시스트가 우리가 느끼는 불쾌감이 합당하지 않다고 가스라이팅한다.
그런데 사실 그는 본인의 무례한 태도에 불편해하는 반응을 즐거워한다.
그와 대화할 때 마음이 상했다면 나르시시스트의 악의를 경험한 것이다.
두더지를 잡듯이 망치로 그의 머리를 쾅 때리자.
자만한 나르시시스트가 다시 굴 안으로 쏙 들어가게 충격을 주자.
나르시시스트의 영업용 멘트는 다 거짓말이고 변명이다.
그가 진지하게 말할수록 진실과 어긋난 내용을 읊는 것이다.
동물이 무는 본능이 있는 것처럼 나르시시스트도 본능대로 행동했다.
거기에 자신만의 철학이나 가치관이 작동한 게 아니다.
조언하면서 상대를 깎아내리고, 충고를 명분삼아 상대를 공격한다.
이런 나르시시스트가 남의 미래를 걱정해서 쓴소리한다는 게 앞과 뒤가 안 맞는 얘기다.
상대의 표정이나 말의 뉘앙스를 보면 단순하게 짜증내는 것에 불과하다.
나중에 걱정해서 말한 거라고 사탕발린 말만 해대면 누가 믿겠는가.
때와 장소를 못 가리는 훈계는 이기적인 잔소리이자 본인을 높이기 위한 장치일 뿐이다.
나르시시스트는 멋대로 굴다가 상대가 지적하면 그제야 염려해서 한 말이다, 본인이 문제 해결책 위주로 말하는 성격이다 이런 사족을 붙인다.
달리려고 오토바이에 시동거는 것처럼 그는 상대를 가스라이팅할 때 빈 껍데기뿐인 말을 던져본 것이다.
근엄한 표정의 나르시시스트가 말하는 내용을 들어보면 은근히 기분이 나빠진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의 성격적 결함 탓에 사람을 혐오한다.
다만 그는 통제욕과 지배욕을 충족받으려고 대인관계를 구축한다.
그래서 그의 훈계는 이타성이 없다.
대신 상대를 낮게 평가해서 비방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
이러니 나르시시스트의 막말이 섞인 조언 비슷한 말이 불쾌할 수밖에 없다.
그는 어떤 이유를 대서라도 남을 못난이로 만들고 싶어 한다.
그래서 타인의 언행을 관찰해 지적할 면을 찾아낸다.
물론 나르시시스트가 지목한 단점은 납득이 힘든 면이 많다.
나르시시스트는 누가 뭘 잘해도 문제라며 비난하고, 뭘 못하면 못해서 문제라고 비난한다.
결국 자신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이 문제투성이 인간으로 비치길 바란다.
그러니 그가 친한 사람들과 불화를 일으키는 것은 예고된 수순이다.
나르시시스트처럼 자아가 불안정한 사람은 외부환경에 쉽게 흔들린다.
언뜻 보면 그는 화난 표정을 지은 채 심각한 말투로 사람을 가르치는 꼰대다.
나르시시스트는 무엇이든 잘 아니까 모르거나 궁금한 걸 물어보라는 신호를 준다.
전혀 그럴 필요 없는데 말이다.
수요 없는 공급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진짜 똑똑한 사람은 오히려 스스로를 부족하다고 여긴다.
그러니 나르시시스트가 사람들 앞에서 본인을 치켜세우는 행동은 얼마나 아둔한 것인가.
그가 주체적인 사람을 가장 경계한다.
매사에 주도적으로 가치 판단하는 사람의 삶에서는 나르시시스트가 간섭할 자리가 없기에 그렇다.
그는 타인이 자신의 눈치를 살살 보면서 바위를 맞춰주며 조언을 구하길 소망한다.
하지만 자유롭게 생각을 표현하고 당사자가 오히려 나르시시스트의 고압적인 태도가 의문을 품는다면?
나르시시스트는 심한 모멸감을 느낀다.
그는 진솔하고 당당하게 손을 내미는 타인을 낯선 존재로 느낀다.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당황하고, 심지어 자신에게 도전(?)한다고 생각해 경계한다.
동등하고 자연스럽게 인간관계를 맺는 과정은 나르시시스트의 열등감을 건드리는 역린일 뿐이다.
그런 수직적인 관계를 선호하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그는 탁월한 자신이 누군가를 가르쳐야 마땅하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의 대인관계가 파탄 나는 것이다.
일방적인 의사소통을 하는 나르시시스트에게 비판을 가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니 자기 보호본능이 강한 나르시시스트가 그의 말과 행동을 가치 판단하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인정하는 인물을 원하는 것이다.
와, 나르시시스트는 정말 대단해.
어쩜 저렇게 똑똑하고 유능할까?
이렇게 나르시시스트를 향해 수동적인 지지를 보낼 사람을 찾는다.
자처해서 왕 노릇하는 나르시시스트가 진짜 왕이 되려면 신하가 필요하다.
왕 앞에서 고개와 허리를 숙인 그들을 보면, 나르시시스트의 마음이 얼마나 흐뭇하겠는가.
내가 소중히 여기는 물건을 잃어버리면 허전함과 아쉬움을 느낀다.
하지만 물건을 잃어버린 ‘나’의 처지를 생각해서 슬퍼할 뿐이다.
지금 어딘가에서 물건이 외롭고 쓸쓸해할까 봐 염려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에게 사물의 감정과 생각은 중요하지 않다.
아니, 사물이 주체적으로 사안을 판단한다는 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르시시스트는 편협하고 단순한 관점에서 세상과 사람을 일종의 사물이라는 기호로 받아들인다.
사물이 희로애락을 느끼거나 비판하는 것은 사람의 입장에서 비현실적인 일이다.
그래서 우리가 나르시시스트의 문제 행동을 지적할 때, 그가 충격을 받는 것이다.
사물이 생각하고 평가하는 주체라는 게 나르시시스트의 세계관을 박살 낸 만한 진실이다.
우리는 잔디를 깎을 때 깊고 심오한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
마당을 정돈해야겠다는 소소한 목적을 무감하게 떠올릴 뿐이다.
누군가의 고민을 듣고 나르시시스트가 시시껄렁한 말을 할 때의 심리도 비슷하다.
자신의 영역에 속한 부속품을 관리하는 차원에서 그는 찡그리며 조언하고 웃으며 훈계한다.
나르시시스트는 호통치고 잔소리해서 남의 자존심에 스크래치 내는 것을 즐긴다.
그래서 위기에 봉착했을 때 우리는 나르시시스트에게 내밀한 얘기를 하지 말아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을 공격할 수 있다고 믿는 나르시시스트는 공감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누군가가 고통을 호소하면 그는 불법 마사지사로 변신한다.
그래서 안 그래도 아픈 척추를 발로 꾹꾹 밟으며 걱정하는 연기를 시작한다.
여기가 아파? 더 밟아줄까?
네가 비명이라도 지르면 내가 기분이 더 좋아질 텐데.
나르시시스트가 대화하는 목적은 남을 쓰러뜨리는 데 있다.
그가 시도 때도 없이 남을 향해 공격성을 보이는 것도 타인의 자존감이 낮아져 위축되고 생각과 감정에 확신이 없어지길 기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의 조언은 진실함과 구체성이 부족하다.
진짜 타인을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니까 현실에서 붕 떠 있는 원론적인 충고만 주야장천 나열한다.
왜냐면 그 방법이 나르시시스트가 납작한 자존감을 뻥튀기처럼 부풀리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결국 나르시시스트는 상대가 자기 권리감도 잃어버려 정서적 학대에 항의하지 못하길 바란다.
자기주장도 못하는 인간으로 전락해 오로지 나르시시스트만을 칭송하기 원한다.
만약 내 말을 무조건 부정하고 작은 일에도 호들갑을 떨며 타박하는 사람이 있다면 주시하라.
그는 나르시시스트일 수 있다.
나르시시스트는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 안달 나 있다.
누군가 고민상담을 한다면, 나르시시스트는 놀이동산에 간 기분을 만끽한다.
상대의 처지에 공감하기는커녕 이 상황에서 어떻게 타인을 짓누를지 고민하는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사회성이 떨어져서 공감에 무능하다.
사람과 상호작용하는 게 아니라 일방적으로 훈계를 전달하기에 타인의 감정에 오롯이 집중했던 경험이 부족하다.
그러다 보니 궁극적으로 정보전달보다 감정의 공감이 핵심인 대인관계에서 나르시시스트의 처세는 빈축을 산다.
그의 어쭙잖은 충고에 자존심이 상한 사람들이 그를 손절하고, 결국 나르시시스트는 혼자가 된다.
정서적으로 고립된 나르시시스트는 더욱더 자신만의 세계로 침잠한다.
정서의 퇴보를 겪으면 나르시시스트의 자아는 더욱 병들어간다.
나르시시스트가 근엄한 표정을 지을수록 자존감을 높이려고 연기하는 것임을 잊지 말자.
아침 일찍부터 회사 상사 B가 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내 핸드폰 너머에서 그는 격하게 소리쳤다.
- 왜 어제 쪽지에 ‘회의시간에 참여가 어려우시면 연락 부탁드립니다’라고 안 적었어요?
이게 무슨 소리지?
적어도 일주일 뒤에 내가 맡은 아이템 회의를 열어야 했다.
그래서 대표이사와 타 부서 사람들에게 특정 날짜에 회의 참석이 가능한지 물어야 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나도 사내 시스템을 통해 회의 날짜와 내용을 기입한 단체 쪽지를 돌렸다.
통상적인 절차였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특별한 일이 없는 이상 회의에 참석해 왔다.
만약 누군가가 그 시간에 참석이 어렵다면 일정을 조율하면 그만이다.
딱히 문제 삼을 포인트가 없는 단순한 작업이었다.
그런데, 잠깐만.
방금 B가 뭐라고 했더라?
- 왜 어제 쪽지에 ‘회의시간에 참여가 어려우시면 연락 부탁드립니다’라고 안 적었어요?
이렇게 말했지?
장사 하루 이틀 한 것도 아니고, 회의 시간이 안 되면 말해달라는 얘기를 덧붙일 필요가 없었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생각할 수 있는 상식적인 처세일 뿐인데 굳이 꾸역꾸역 적어야 할까.
그리고 이런 게 따질 일인가.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나는 단체 쪽지를 처음 돌려봤다.
나를 배려한 차장이 평소에 본인이 쓰던 쪽지를 참고하라며 보내줬다.
결론적으로 기존과 똑같은 양식에 내용만 바꾼 쪽지였다.
거기에 ‘회의시간에 참여가 어려우시면 연락 부탁드립니다.’라는 멘트는 없었다.
쪽지에 그 문장이 없어도 그동안 B는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차장이 일을 얼마나 잘하는지 칭찬했다.
심봉사가 개안을 한 것도 아닌데 B가 늘 보던 쪽지의 내용이 갑자기 잘못됐다고 주장하는 게 부자연스러웠다.
사실 그가 딴지를 거는 이유는 그 쪽지를 쓴 주체가 나였기 때문이었다.
평소에도 그는 신입인 나에게 사소한 걸로 트집을 잡으며 공격적인 언사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미 B는 갓 입사한 사람들에게 텃세를 부리고 괴롭히는 사람으로 유명했다.
다들 겉으로 티 내지 않을 뿐 회사 직원들은 그의 경거망동함에 피로를 느껴 최대한 엮이지 않으려 했다.
무슨 일이 있나 싶을 정도로 사무실이 조용했던 원인 중 하나는 B의 기괴한 성격 탓도 있었다.
나이도 있고 직급도 갖춘 B가 그 위신에 걸맞게 처신했으면 좋으련만, 그는 못된 심성을 절제하지 못했다.
엄마를 졸라 기어코 사고 싶은 장난감을 갖게 된 아이를 떠올리자.
그 아이는 다른 놀이를 다 제쳐 두고, 어딜 가든 그 장난감을 손에 꼭 쥐고 있을 것이다.
드디어 원하던 물건이 내 소유가 됐다는 만족감에 하루 종일 들뜰 것이다.
B는 ‘권위’를 갖게 되자, 그동안 억눌러왔던 인정 욕구가 폭발했다.
가까이서 보니 그는 남이 조금만 뭐라고 해도 앙심을 품는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과 즐겁게 어울릴 기회가 별로 없었다.
그는 인간에게 다가가면 스스로 상처받아 물러나는 경험을 반복했다.
나중에는 그런 상처가 쌓여 대인관계에 결벽증적인 태도가 생겼다.
B는 남에게 끊임없이 상처받고 서운해하고 보복하는 악순환을 반복하고 있었다.
또 그는 자신의 서운함을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게 마음에 상처로 남았다.
하지만 직장생활에서 그는 일시적으로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었다.
남들의 관심을 갈구하다가 갑자기 직급을 얻고 나니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진 것이다.
그래서 그는 ‘권위’라는 무기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감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직급이 낮은 이들에게 힘겨루기 놀이를 신청했다.
눈에 보이는 물건을 닥치는 대로 집어던지는 것처럼 B는 타인의 말과 행동은 물론 작은 일까지도 싸잡아 비난하면서 감정을 분출했다.
매사에 기분이 나쁘다고 툴툴거리는 B의 오버액션을 보고 사람들이 지적하지 않을 때, 그는 본인이 괜찮은 사람으로 변신했다고 믿었다.
B는 툭하면 인상을 찡그리면서 과거에 초라하게 지냈던 자기 자신과 결별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거에 자신감 없이 고개를 숙이며 지냈던 나날에 대한 보상심리가 그의 행동에 내재되어 있었다.
그는 생각과 감정을 표현할 때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B의 자세부터 말투와 제스처가 너무 ‘계산된 연기’ 같았던 것이다.
그는 자신보다 나이가 적은 대표이사를 언급할 때만큼은 지나치게 공손한 말투를 썼다.
평이하게 말해도 되는데 마치 큰 인물을 소개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대표이사를 윗사람으로 인지했고,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그의 비위를 맞춰야 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다른 직원들 앞에서 말할 때의 태도는 판이하게 달랐다.
B는 본인을 일개 직원과 다른 차원의 사람이라고 규정했다.
항상 다리를 꼬고 팔짱을 낀 채 턱을 치켜들었다.
그런 태도에서 상대를 깔아보는 듯한 냄새가 났다.
B는 자신이 직원을 평가하는 위치에 있다는 것에 자부심이 강했다.
그래서 '본인에게 잘 보이지 않으면 불이익이 있다'며 인터넷 소설에 나올 것 같은 말까지 자랑스럽게 덧붙였다.
그렇게 손발이 오그라드는 멘트를 치면 멋지고 세 보일 거라고 예상했던 것이다, 징그럽게 귀엽기는.
외서를 담당하던 B는 영어를 못해서 파파*를 쓴다고 말했다.
물론 나도 초록창에 번역기 기능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필요할 때 다른 곳을 활용했었다.
그런데 언젠가 내가 초록창 영어 번역기 이름이 ‘파파*’라는 것을 몰랐다는 이유로 B는 미치겠다며 소리를 지른 적이 있다.
그는 이러니까 신입을 뽑지 않는다면서 비실비실 웃기 시작했다.
그 웃음은 만족스러움과 비웃음이 섞인 기묘한 종류의 감정이었다.
B는 다른 사람은 파파*라는 이름을 몰랐는데, 자신은 그걸 알고 있었다는 것을 자랑스러웠다.
그래서 자부심과 쾌감을 느꼈고, 자기 만족감에 절로 웃음이 나왔던 것이다.
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감정의 진폭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번역기 ‘이름’을 모른다는 게 보편적인 관점에서 볼 때 ‘미칠 일’ 정도인가?
번역기 이름을 몰라도 업무에 차질이 없다.
번역기 이름을 아는 것 따위를 회사가 경력직만 뽑는 현상과 연결할 합리적인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B는 신대륙을 발견한 사람처럼 흥분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
여러모로 그의 반응은 상식적인 범주를 넘어서고 있었다.
이런 B의 해괴망측한 행동의 밑바탕에는 열등의식이 존재한다고 해석한다.
예전에 회사에서 잠깐 알고 지내던 C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는 남이 아는 걸 자신이 모르면 재빨리 기죽고, 자신이 아는 걸 남이 모르면 쉽게 오만해졌다.
C는 스스로 자존감이 낮다고 쑥스럽게 고백하면서도 동시에 본인이 나온 대학교를 자랑하거나 매일 수십 종의 신문을 본다고 강조했다(내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그는 늘 남을 훈계하거나 가르치는 포지션을 취하고 싶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이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강박적으로 물어보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내가 사회부에서 특정 재난 장소에 다녀왔다고 하자 순식간에 C의 얼굴에 수심이 차올랐다.
나와 인턴이 그 소재로 얘기할 때, 갑자기 그의 말수가 확 줄었다.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 쳐다보니, 기가 팍 죽은 C가 시선을 땅바닥으로 떨어뜨린 채 불안해하고 있었다.
급격하게 자신감이 하락한 원인은 C가 그 분야를 잘 모르기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내가 그에게 질문이라도 하면 스스로 망신당할 거라고 생각했나.
하여튼 C는 박학다식한 이미지를 구축하려고 발 빠르게 지껄였는데 그 시도가 실패할까 봐 노심초사했다.
알고 보니 그는 다른 기자들과 달리 사회부에서 취재한 경력도 짧았다.
C는 사회부 경력이 미진하다는 게 알려지면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을 의심할 거라고 믿었다.
자신감을 넘어서 우월감을 가감 없이 드러냈던 이면에는 타인에게 모자란 존재로 비칠까 봐 과도하게 걱정하는 심리가 존재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한 인물이고 싶었다.
하지만 똑똑하고 탁월한 사람은 세상에 참 많다.
그래도 그는 특별함에 대한 욕구를 버릴 수 없었고, 완벽함을 추구했지만 거기에 도달하기엔 역량이 부족했다.
따라서 C가 궁여직책으로 택한 방법은 멋지고 이상적인 인물을 그냥 ‘흉내’ 내는 것이었다.
그는 본인의 관점에서 대단한 캐릭터를 설정하고, 그 조건에 맞게 ‘연기’하면서 심적으로 위로를 얻었다.
남에게 찬사를 받고 싶은 욕심 때문에 C는 내 앞에서 그토록 허풍을 떨었던 것이다.
혹시 신문을 몇 종이나 읽으세요?
저는 하루에 신문을 수십 종씩 봐요.
아, 제가 있는 부서가 사회부 사람들이 와도 힘들어하는 곳이에요.
OOO 부장이 자꾸 절 이 부서에 다시 데려왔어요(저는 고위직이 주목하는 특별한 사람이에요)
저는 OO대학교를 나왔어요.
‘나는 무엇이든 잘 알아요.’라는 허위 주장의 원천은 C가 자신의 약점을 들키는 것에 대한 불안이었다.
스스로를 잃어버릴 정도로 방어적인 그는 타인에게 지적 듣는 상황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같은 업무도 다른 사람들은 스무스하게 해내는데 C는 마치 국가고시를 치르는 사람처럼 하염없이 스트레스를 받으며 힘들어했다.
본인이 연기하는 캐릭터에 금이 갈까 봐 그는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 자체를 무서워했다.
C처럼 B도 인턴에게 툭하면 너는 그것도 모르냐고 함부로 거들먹거렸다.
나는 이것도 알고 저것도 안다며 호들갑스럽게 말하는 모습이 인위적이었다.
내가 그렇게 느끼는 결정적인 이유는 그의 마음가짐에 있었다.
C는 이 회사를 연극무대라고 인지했다.
이 무대에서 그는 능력도 출중하지만 성격도 센 사람으로 출연하길 원했다.
다른 이들이 C의 완벽함에 감탄하며 손뼉 치길 바랐던 것이다.
물론 그런 기대치는 현실에 동떨어진 것이다.
도달할 수 없는 완벽이라는 기준에 부합하고자 C는 자신을 몰아붙였다.
하지만 더 큰 절망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직장에서는 중요한 것만 깊이 신경 써도 일을 더 잘할 수 있다.
그런데 C는 상사에게 혼날까 봐 혹은 자신의 완전무결함(?)에 금이 갈까 봐 일의 모든 사안을 완벽하게 챙기려고 세세한 것까지 지나치게 신경 썼다.
그러니 C가 쉽게 지치고 자주 우울해졌다.
그는 스스로 복잡한 내면을 직시할 용기도 없고, 해석할 능력도 없었다.
그래서 감정을 잘 추스르지 못하고 감정에 끌려다니며 만만한 사람들에게 화풀이를 했다.
불쌍함과 야비함 사이에 C가 있었다.
C와 B는 서로 닮은 점이 많다.
남의 시선을 지나치게 신경 쓰는 바람에 B는 상황적 맥락에 맞지 않게 과잉 반응했다.
그는 솔직한 생각과 감정을 말하다가 오버 액션을 하는 게 아니었다.
단지 본인이 설정한 캐릭터대로 연기하다 보니 과한 표정이나 몸짓이 나왔다.
B는 사장이라는 직함을 제2의 페르소나로 인지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페르소나 뒤로 그는 열등감 가득한 자아가 감춰질 거라 믿었다.
처음으로 놀이터에 온 어린이가 미끄럼틀도 타고 시소도 타면서 한바탕 휘젓고 다니듯이 그는 권력이라는 족쇄를 차고 이리저리 쏘다니며 사람들과 충돌했다.
평소에도 그는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이 어떤 성격을 지닌 인물인지 틈틈이 소개하려고 노력했다.
본인의 성격과 취미 등을 자꾸 언급하는 사람은 보통 자기중심적인 성향이 있다.
B는 본인이 잘나고 멋진 사람처럼 보이는 게 가장 중요했다.
완벽하고 대단하다는 반응을 얻으려고 적극적으로 자신을 이미지 메이킹했던 것이다.
문제는 B가 실제로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예를 들면 B는 본인이 목소리가 크고, 말이 빠른 사람이라고 과시했다.
하지만 실제 그의 성량을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았다.
심지어 말하는 속도도 보통이었다.
다만 그는 괄괄하고 거침없는 사람처럼 보이려면 목소리가 크고 빠르게 말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현실을 의도적으로 확대 해석했다.
B는 골반이 비뚤어지도록 한껏 다리를 꼰 채 자신은 원래 기준이 높은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고개를 쳐들었다.
하지만 그는 사람들에게 상처받는 게 두려워서 외부인력을 만나는 직무를 아예 포기하고 내근만 자처하고 있었다.
커리어에 타격이 가는 걸 감수하고서라도 외부인과 접촉하지 않으려고 반쪽짜리 업무만 수행했던 것이다.
그는 사무실에서 누군가와 소소한 대화조차 안 하고, 자기 자리에서 조용히 일만 하다 퇴근할 때가 많았다.
사람과의 소통이 C에게는 너무 어렵고 버거운 과제였던 것이다.
모든 일에 엄격한 기준을 들이대며 완벽을 기하는 인물과 B는 애초부터 거리가 멀었다.
다만 대표이사보다도 나이가 많은 그는 이인자로서 윗사람에게는 숙이고, 아랫사람에게는 군림하는 포지션으로 회사에서 살아남으려 했다.
아무래도 B는 내가 보낸 쪽지에 ‘회의시간에 참여가 어려우시면 연락 부탁드립니다.’라는 문장이 없어서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저 문장을 안 쓰면 다른 사람들이 참석이 힘들어도 티를 못 내는 건가?
- 그런데 B가 차장한테 쪽지 어떻게 쓰는지 물어보라고 해서 그대로 한 겁니다.
이 말에 B는 한 마디 탄성을 질렀다.
- 아.....
흠칫 놀란 그는 무척 당황했다.
고압적인 태도가 누그러진 B는 민망해하면서도 내 말에 차마 반박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급기야 그는 대화의 화제를 바꿔버렸다.
정말 그는 차장에게 쪽지 쓰는 법을 인수받으라고 나에게 직접 말했다.
그래서 내가 보낸 쪽지는 B가 평소에 보던 것과 형식면에서 동일했다.
최근에 있던 일이라 그는 기억이 안 난다고 방어하기도 애매했을 것이다.
나중에 B는 이렇게 변명했다.
- 그렇게 안 적어서 잘못됐다는 게 아니에요.
B는 본인이 틀렸다고 인정하는 걸 쪽팔려했다.
자신의 어이없는 주장을 번복하고 싶지 않아 그는 없던 이유를 쥐어짰다.
- 친절하게 적어야 한다는 말을 하려고 했어요.
응?
전부 존댓말로 적었는데 불친절하다는 평가는 말이 안 되는 억지였다.
그리고 겨우 연락 부탁드린다는 말을 안 적었다고 불친절하다는 것도 무논리적인 주장이었다.
무엇보다 차장이 쓴 쪽지에 내용만 바꾼 거라고 말했음에도 B는 박박 우겨댔다.
몇 년 간 차장의 쪽지를 받으면서 불쾌해하기는커녕 일을 잘한다고 평가해놓고는.
게다가 방금 전화까지 해서 왜 그토록 중요한 문장을 제외했냐고 흥분하면서 따졌잖아.
그는 망가진 체면을 지키려고 궁색한 거짓말을 시전 했다.
나르시시스트는 별 것도 아닌 일에 시한폭탄 같은 분노를 쏟는다.
사실 그는 유약한 자아를 극복하려고 아랫사람이라고 불리는 사람들 앞에서 왜소한 몸집을 부풀린다.
나르시시스트는 고압적으로 행동하면서 강자에게 쌓였던 굴욕감과 수치심을 지워나간다.
타인을 무시하는 나르시시스트는 남을 도와주는 구원자가 되는 환상에 젖어 있다.
그런데 그가 상상하는 구원자란 다른 이의 유익을 구하는 선인이 아니다.
나르시시스트가 정의하는 구원자란 내가 더 나은 사람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수단이자 명분에 불과하다.
상대가 자유롭게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하면 그는 자존심이 상해 제동을 건다.
야, 너무 과한 감정이야.
야, 너무 생각이 많아.
사실 나르시시스트야말로 감정적으로 과잉 반응할 때가 잦은데 말이다.
그는 꼭 본인의 결점을 남의 결점처럼 말한다.
나르시시스트는 남의 시선에 그러려니 하면서 거침없이 감정 표현하는 사람을 보면 실패감마저 느낀다.
본인의 역할이 없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스트는 다른 사람들에게 문제 해결책을 열려주기 좋아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는 결코 남이 위기를 잘 헤쳐나가기를 바라지 않는다.
희생양이 강해지는 모습을 나르시시스트는 보기 싫어한다.
훈계하고 가르쳐야 하는 대상이 알아서 문제를 잘 해결하면 그는 무력감을 느낀다.
심지어 그 사람을 경쟁자로 인지하기도 한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의 비판은 구체성이 부족하고 진정성이 없다.
사람에 대한 진지한 관심이 없으니 그가 현실성 넘치고 설득력 있는 비판을 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내 속사정을 진지하게 말하는데, 사연을 듣던 D가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라고 한 적이 있다.
그는 내가 속상해하는 일이 대수롭지 않다고 기세 등등하게 말했다.
정말 나는 그 정도로 고민할 일이 아닌데, 홀로 진지했던 것인가.
지치고 힘들지만 마음을 붙들고 솔직하게 말했는데, 돌아온 대답이 영 시원치 않았다.
그렇다고 D에게 왜 그런 말을 해서 나를 더 힘들게 하냐고 묻기는 좀 그랬다.
마치 인생사를 다 통달한 듯한 그에게 내가 훈수를 두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돌아가는 상황이 묘하게 기분 나쁘면서도 무안했다.
상대의 무미건조하고 성의 없는 반응이 불쾌한데 어떻게 반응해야 맞을지 떨떠름했다.
반전은 그다음이었다.
이후 D는 내가 겪었던 일과 비슷한 경우를 겪었다.
물론 그 사정이란 인간적으로 서운할 법한 소소한 사건인 것만 동일하다.
그는 통화 도중 격분해 울고불고하며 사정을 털어놓았다.
파워블로거인 D는 본인의 블로그에 가전제품이나 가구에 대한 리뷰를 올렸다.
집을 꾸미는 걸 좋아해서 식탁이나 침대 같은 가구를 만드는 과정을 포스트 하기도 했다.
그런데 D의 지인들이 블로그를 보고, 그가 무척 잘 사는 것 같다고 수군거렸다는 것이다.
자신을 향한 질투로 받아들인 건지, 험담으로 받아들인 건지 그는 속상해서 나와 통화를 못할 정도로 울었다.
자신이 얼마나 힘들게 블로그를 꾸몄는데 알만한 사람들이 그걸 몰라준다며 억울해했다.
아니,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라며?
나의 고민거리를 가벼운 짐짝 취급하던 D의 거침없는 태세 전환이 조금 놀라웠다.
D는 유유자적하게 내가 괴로워하는 일보다 더 힘든 경우도 많다면서 너스레를 떨었다.
그리고 본인이 더 힘든 경험을 많이 했다는 뉘앙스로 자랑을 덧붙여 이미지 구축에 힘썼다.
그랬던 당사자가 친구들이 본인의 노고를 몰라준다면서 서러워했던 것이다.
남의 문제에 시큰둥하더니, 본인의 문제 앞에서만큼은 세세하게 설명하면서 성심성의껏 슬퍼했다.
세상사 힘든 건 가장 잘 안다고 자부했던 근본적인 이유는 그냥 D의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이토록 쉽게 무너지는 사람이 내 앞에서 오래 산 산신령처럼 행동했다니 처음에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한편으로는 인간미 넘치는 D가 실체가 안쓰러우면서도 귀여웠다.
이런 비슷한 경우를 여러 차례 겪었다.
이젠 타인의 불행에 무표정하게 반응하고, 말을 툭툭 던지며 가볍게 훈수 두는 사람을 거리를 둬야 할 인물로 본다.
그런 유형은 뭘 많이 알아서 그러는 게 아니다.
그들은 자기중심적인 성향이 강해서 타인에게 애착이 없다.
다만 대인관계에서 진솔한 마음을 나누기보다 연극무대에서 연기하듯이 멋진 사람을 코스프레하기에 심취해 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무슨 일을 겪든지 희로애락이라는 감정을 겪지 못한다.
남을 향한 센서가 없기에 무슨 고민을 듣든지 유의미한 반응이 없을 뿐이었다.
다양한 경험을 해서 만사를 통달해 초연한 게 아니었다.
그들의 조언이나 훈계는 특정 프로그램이 입력된 로봇이 뱉어내는 말과 비슷하다.
그들은 자라면서 학습된 '감정을 멀리하면서 강한 척하기' 어법을 시전 한다.
감정 자체를 터부시 하는 그들은 자신은 이성적이라서 잘 흔들리지 않는다고 진심을 감춘다.
그리고 덧붙인다.
더 힘든 일도 많아.
어른이 되면 알게 될 거야.
원래 다 그런 거야.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본인이 무슨 의미로 그러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들은 서열을 중요시해 타인에게 공감하면 자신이 한 단계 내려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악착같이 다른 사람의 고민에 반대의견을 낸다.
오히려 구박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과시한다.
그리고 왜 그런 말들을 본인의 사연에는 적용하지 않는가.
E가 가족 간 불화로 죽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물론 진짜 죽고 싶다는 말은 아니었고, 감정적인 고통을 호소했던 거였다.
그 말을 듣던 F는 갑자기 정신을 똑바로 차리라며 고압적으로 큰소리쳤다.
E가 그 말을 듣고 얼마나 황당했겠는가.
F가 상대편의 입장을 배려하지 못하고 불필요한 오버액션을 했다.
그리고 F도 형제와 사이가 안 좋아서 심한 마음고생을 했었다.
본인은 그 일로 순수하게 괴로워하고 위로를 구했으면서, 남이 비슷한 문제로 힘들다고 하소연하니 경솔하게 말을 뱉었다.
인간의 본능은 이기적이어서 역지사지가 잘 안 될 수 있다.
남이 겪는 일은 작아 보이고, 내가 겪은 일이 더 커 보이기 마련이다.
다른 사람이 마주한 큰 일보다, 내가 감당하는 작은 일이 더 괴로운 법이다.
그러니까 이런 인간의 특성을 기민하게 인지하고, 타인의 괴로움을 하찮게 여기는 태도는 지양해야 한다.
친구가 힘들어하는 고민을 평가절하하고 축소한다면, 훗날 본인이 같은 입장에 처하게 될 때 예기치 않은 부끄러움을 느낄지 모른다.
과연 그들이 그런 종류의 감정을 경험할 수 있는 유형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타인에게는 야멸차면서 자신에게 한없이 관대하다면 결국 친한 사람들에게 원망을 듣는다.
친구가 겪은 불행을 은근히 고소하게 생각하고, 인생의 짐이 무거워 고통받는 사람에게 쓸데없는 불호령이나 내린다면 원한을 사게 된다.
내가 힘들 때 들은 모진 말이 더 사무치고, 심지어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다.
속마음을 말하는 것도 타인을 어느 정도 신뢰할 때 가능하다.
나는 상대를 믿고 말한 건데, 오히려 그가 비웃거나 경멸하듯이 반응한다면 그 태도는 영영 용서받지 못할 수 있다.
인정머리 없이 구는 면을 지적받아도 그들은 피상적인 변명만 할 뿐 진지한 반성이 없다.
그런 사람이 미안하다고 사과한들 타인의 비판을 피하려는 얄팍한 처세술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니 사람들은 불쾌한 순간을 말없이 넘기고 속으로 그를 멀리해야 할 인간 유형으로 분류해버린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곤경에 처한 사람을 향한 그의 불친절함과 냉대가 기본 인성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타인의 고통을 불구경하듯이 즐기는 사람은 자신이 곤경에 처했을 때 아무도 돕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면 평소에 사람들은 그의 행동거지를 보고, 이미 마음에서 존재 자체를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얼굴만 알 뿐 나와 상관없는 인물이라고 인지하는 것이다.
본인은 문제 해결책을 말한다면서 비대한 자아를 섣불리 흔들지 말고, 진정으로 상대의 문제가 해결되기 바라는지 스스로를 돌아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