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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스트의 약점인 OOO을 공략해서 무너뜨리기

B는 또다시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나르시시스트는 나르시시스트적으로 말하기 시작한다.

얇은 포장지에 감춰왔던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때 우리의 깊숙한 내면에서 어떤 이야기가 올라온다.


이 사람은 자화자찬이 심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병적으로 자기만 칭찬하네.


완전 내로남불이잖아?


허구한 날 남 탓만 하네.


어쩔 수 없었다고만 하면서 잘못한 걸 쉽게 합리화하는구나.   


저 인간은 공감능력이 없어서 내가 하는 말마다 쳐내기 바쁘군.  

 

이전에는 나르시시스트와 나름대로 화기애애했다.

물론 그가 부정적인 표현을 간간이 쓰기는 했었다.

하지만 그 대상은 내가 아니었다.

그때까지는 말이다.

 

그런데 상황이 변했다.  

그와 대화하거나 만나고 돌아온 이후에 기분이 찜찜하다.

편하고 유쾌하게 시간을 보낸 적이 더 많았는데 말이다.


그가 스쳐 지나가듯이 한 말들이 유난히 뾰족하다고 느껴진다.

점차 마음에 남는 것들이 많아지고, 그런 순간들이 반복된다.  

불쾌감이 얇은 페스츄리처럼 쌓이는 것이다.


이제야 희생양은 이 상황이 뭔가 잘못됐다고 직감한다.

동시에 상대에게 문제가 있다고 여기는 자기 자신의 건강한 판단력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동안 그에 대해 몰랐던 면을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된 건가.

혹시 그가 나에게 마음을 활짝 열어서 편해진 나머지 오작동하는 건가.

둘 중 어떤 경우라도 딱히 반갑지 않다.   


하지만 어제 일을 까먹은 듯 실실 웃는 나르시시스트를 추궁하기는 망설여진다.

지난번에 한 말의 의미가 뭐냐고 묻는다면 분위기가 더 얼어붙을 것 같다.


그리고 진솔하게 얘기해도 잘 안 들을 것 같다.

그런 적이 없다고 하거나 나쁜 의도가 아니라고 하거나 오해받았다면서 피상적으로 반응할 것 같다.  

나르시시스트의 방어벽이 너무 두껍다는 걸 여러 행동으로 추론했기에 저런 결론도 가능하다.

어정쩡한 내 마음과 달리 그는 해맑게 까끌거린다.


화선지에 물을 떨어뜨리면 서서히 번지는 것처럼 나르시시스트의 독 묻은 화살은 결국 희생양이라는 과녁을 향하게 된다.


드디어 나르시시스트와 손절을 준비할 시기가 다가온 것이다.   


그즈음에는 우라 머릿속에 두 가지 페르소나가 떠오른다.

예전 그가 연출한 가짜 페르소나와 까탈스러운 불평쟁이로 변한 현재 모습이 겹치는 것이다.


이때가 중요하다.

우리가 어떤 쪽에 방점을 찍느냐에 따라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펼쳐질지가 결정되는 것이다.  


서서히 어그러져 가는 관계를 지속한다면 우리의 입장은 지금보다 훨씬 더 곤란해질 것이다.

나르시시스트가 이성을 상실한 채 마구잡이로 달릴 것이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스트는 불평을 끊임없이 토해내도록 프로그래밍된 AI 같다.


부정적 언변이 올라오는 근원은 그의 어두운 내면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인간이란 존재 자체를 불쾌해한다.  

그런데 그가 가장 불쾌해하는 대상은 사실 따로 있다.

바로 나르시시스트 자기 자신이다.  

그는 거울에 비친 본연의 모습을 보면서 짙은 어두움과 습한 감정을 가장 진하게 느낀다.  


나르시시스트는 기고만장하다.

하지만 겉모습은 속마음과 무관한 껍데기에 불과하다.  

그의 내면은 아무도 오지 않는 폐허처럼 스산하고 을씨년스럽다.

자신을 향한 분노와 수치심으로 얼룩져 있지만 그가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드러내지 않았을 뿐이다.


주인이 없어 돌봄을 받지 못한 정원에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나는 법이다.

나르시시스트는 부정적인 말만 토해내는 자아를 갈고닦지 않은 채 그대로 방치했다.

스스로 얼마나 부족한 사람인지 깨닫는 순간마다 희생양을 막무가내로 비난했다. 

그렇게 나르시시스트는 돌멩이에 맞은 호수가 떨듯이 불안에 떠는 자신을 일시적으로 위로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나르시시스트의 내면은 파괴되었다.

멀쩡한 겉모습은 망가진 속사람을 감추려는 위장술에 불과하다.  

나르시시스트가 유난히 타인의 평가에 민감한 것도 자기 확신이 없지만 인정 욕구가 크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잘 모른다.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뭘 알거나 모른다는 것에 민감한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잘 아는 척한다.

불안에 떨면서 말이다.


그에게는 스스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평가할 만한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기준이 없다.

그저 이상적인 모습을 설정해 두고, 거기에 본인이 맞는 사람이라고 막연히 상상한다.  


하지만 이상적인 모습이 진짜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는 걸 가끔씩 의식한다.

자아가 없고, 자기 확신이 없기에 그는 남의 평가에 쉽게 자존감이 낮아진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는 조금만 지적이 들어와도 어쩔 줄 몰라하며 도망치는 것이다.

간헐적으로 직면했던 텅 빈 자아와 대면하는 게 두렵기 때문이다.

 

그러니 매사에 불안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진짜 모습을 가리고, 가짜 모습으로 살아가니 신경이 날카롭다.


인간은 외부세계와 섞여 살아간다.

특히 내가 아닌 타인은 잘 통제하지 못하는 요인이다.

늘 내 마음에 드는 말만 듣기란 힘들다.

하지만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을 높게 치켜세우는 말을 들어야만 직성이 풀린다.


그런데 문제는 현실과 나르시시스트의 기대치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실제로 그가 설명하는 것처럼 능력이나 성품이 대단하지 못하다.

오히려 상대적으로 많이 부족하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는 자주 짜증을 낸다.

본인이 원하는 것만큼 상대는 반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도한 칭송과 칭찬을 해주지 않는 사람을 적으로 돌리고, 오해받았다고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도 결국 상대의 반응에 실망했다는 뜻이다.


나르시시스트는 불안정한 속내를 들키고 싶지 않아 한다.


어떤 이들은 기분이 안 좋다는 사실을 남이 알까 싶어 의식적으로 크게 웃는다.

보는 사람은 감정을 허겁지겁 참아내는 모습에 신경이 쓰이는데 말이다.  


나르시시스트는 희생양의 작은 몸짓이나 말 한마디에도 조롱을 가한다.  

그런데 그런 오만방자한 행동이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굉장히 부자연스럽고, 어색하게 보인다.

왜냐면 나르시시스트가 자신의 내면과 다른 행동을 의도적으로 연출하기 때문이다.

B는 총구 앞에 서 있는 총알처럼 예민하고, 너무 쉽게 감정을 드러낸다.  

남들이 말하는 단어 하나에도 큰 의미를 부여하고, 분노하는 편이다.


A는 사람들을 웃기는 걸 좋아한다.

그래서 광대가 자처한다.  

다 같이 즐겁게 이야기하면서 긍정적 감정을 나누는 걸 중요한 가치로 여겼다.


B와 지낼 때도 같은 마음가짐이었다.

함께 보내는 시간이 그저 재밌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B의 마음은 A와는 좀 달랐던 것 같다.

소소한 이야기에도 B는 맥락과 큰 상관없이 발끈하는 순간이 많아졌던 것이다.


그래서 네가 듣고 싶은 말이 뭐야?

언젠가 A의 말을 듣고 있던 B가 날카롭게 쏘아붙인 적이 있다.

A는 G과 같이 있었을 때 에피소드를 풀어놓고 있을 때였다.  

그때 갑자기 B가 말을 끊었던 것이다.

그리고 저렇게 다짜고짜 따졌다.


A는 당혹스러웠다.

세월이 흐른 후에 도대체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하지 않을 정도로 지극히 사소한 에피소드였다.

하지만 B는 불쾌감을 드러냈다.


그래서 네가 듣고 싶은 말이 뭐야?


고슴도치처럼 뾰족한 말투가 상대를 살짝 찔렀다.


A는 내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어리둥절해졌다.


내가 듣고 싶은 말이 있었나?

내가 무슨 말을 들으려고 했지?


하지만 곧 B의 태도에 문제가 있다는 마음이 들었다.

B가 낯선 누군가처럼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지금 B는 내가 듣고 싶은 말을 유도한다고 넘겨짚는 거야, 지금?


A는 그렇게 확신 어린 태도로 의심하는 질문을 받은 적이 처음이었다.

그것도 이렇게 즐거운 분위기에서 말이다.

B가 짜증이 난 발화점이 어디였을까.

A는 길을 걷다가 낯선 사람에게 갑자기 찬물을 맞는 기분이었다.    


의도가 없었다.

누군가와 재밌게 놀았던 걸 복기했었다.  

같이 웃자고 말이다.

굳이 저런 공격적인 질문에 친절히 대답해 주자면 이런 말을 듣고 싶었다.

이 이야기 참 재밌다.


그런데 B는 A가 꿍꿍이가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어떤 포인트에서 감정이 상했는지 A는 자신이 한 말속에서는 찾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난처해하다가 B가 쏘아붙이는 몇 마디만 더 듣게 됐다.

A는 자신을 변호하지 않았다.

그래서 B의 오해는 풀리지 않았다.


사실 A의 에피소드에 등장한 G에게 B는 상처를 받은 적이 있었다.  

몇 년 전에 B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대립했던 사이였다.

시간은 흘렀지만 여전히 B는 마음에 그 일을 담아두고 있었다.  

어쩌면 그에게 받은 상처가 커서 불필요하게 과민반응을 한 것일 수도 있겠다.


이후 A는 그 사람을 화두로 삼지 않게 되었다.

지나간 상처를 건드리는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그가 유일하게 지나친 낙천주의를 발휘할 때가 있다.

누군가가 그를 비판할 때다.   

나르시시스트의 부정적인 언변을 누군가가 비판할 때다.


갑자기 그는 태세전환을 한다.

우기는 게 있다고 비난하더니 우기는 성격이 아니라고 손사래를 친다.


나르시시스트에게 지적은 형벌이다.

누구나 벌 받는 걸 싫어한다.

그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는 고칠 점만 본다고 떵떵거린다.

하지만 막상 상대가 고쳐야 할 점을 말해준다면 나르시시스트는 정색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부정하기 시작한다.


나르시시스트는 부정적이다.


B는 A가 말한 모든 걸 부정하려고 애썼다.

대부분의 일을 A의 망상이자 착각이라고 몰아갔던 것이다.


그게 가능한 일일까.

그렇게 한 명만 유난히 망상을 많이 하고, 한 명만 완전히 기억이 없다는 게 과연 자연스러운 현상인지 말이다.

나르시시스트의 시각이 불균형하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나르시시스트의 주장은 비현실적이고, 비논리적일 때가 많다.


나르시시스트가 잘못한 게 맞다.

그러니 억울함을 쌓아두지 말자.


나르시시스트의 서툰 언어를 잘게 쪼개자.

그의 논리적 허점을 발견하고, 세세하게 비판해야 한다.

고칠 점을 본다고 떵떵거리는 그에게 고칠 점이 무엇인지 자세하게 알려주자.

A: 그런데 뭐 목회자 얘기도 B가 분명히-

B: 어, 그래.


A: 군대 이야기를 했었어. 그래서 그때 B가 그 목회자를 안 좋게 봤던 것 같은데-

B: 그래. 내가 이야기했겠지. 뭐.


B가 모 목회자에 대해 열변을 토해낸 적이 있었다.


예전에 B는 목회자와 성도들과 함께 선교에 간 적이 있다.

그리고 다 같이 모인 자리가 있었다.

돌아가면서 마음을 털어놓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그때 그가 B가 오는 게 부담스러웠다고 토로했다는 거다.

이 지점에서 B는 일차적으로 상처를 받았다.

환영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고 문제는 또 발생했다.

그다음 날 아침 모임에 B가 지각을 했다.

그때 교역자가 왜 늦게 왔냐고 타박을 했다는 것이다.

물론 B의 입장에서 상황을 해석한 거라 상대의 입장은 다를 수가 있겠다.

이 지점에서 B는 한번 더 감정이 상하고 말았다.


그래서 B는 나름대로 반격을 꾀했단다.

지붕에 페인트칠하는 봉사를 하는데 예상시간보다 상당히 일찍 끝냈단다.

목회자가 늦게 왔다고 뭐라고 했지만 일을 일찍 끝냈다는 요지였다.


여기까지는 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 뒤에 B가 덧붙인 말이 문제였다.


B의 말이다.


그 교역자가 군대에 있을 때 가족 중에 OOO이 돌아가셨대. 그런데 군대에서 아무도 위로를 안 해주더라는 거야. 그런데 나한테 하는 거 보니까 왜 그 사람들이 그랬는지 알겠더라고.


B는 상대의 불합리한 행동에 심리적으로 피해를 받았다고 여겼다.

그래서 과거에 목회자가 겪었던 어려움을 생각해 냈다.


선교지에 와서 그런 말을 듣기 전에 이런 사연이 안타깝다고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상처를 받고 난 후 태도를 바꾸었다.

같은 상황을 정반대의 관점에서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A가 B의 인성이 별로라는 걸 가시적으로 확인하게 됐다.

과거에 가족 중 누군가 사망한 사건을 언급하는 것은 큰 실례다.

조심스러운 일이며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야 침묵하는 게 도덕적인 태도다.

B도 그 정도는 알았으면 한다.


아무리 상처를 받았다고 해도 그 정도 수위의 말을 할 정도로 큰 일은 아니었다.

그냥 B는 기분 내키는 대로 막말을 퍼부어댄 거였다.  

그리고 그게 B의 진짜 모습이었다.


A는 화가 났다.

실망했다.

성인군자인 척은 다 하더니 기분이 상했다고 패드립하는 것은 인성이 부족한 것밖에 안 된다.


그런데 나중에 그 일에 대해 B는 정색을 했다.

금시초문이라는 것이다.

 

대화를 복기하자.  


B: 그런데 이상하게.. 내가 너한테 저기 하는 건 아니야. 그런데 내가 볼 때 이야기가 섞여 있어.


‘내가 볼 때’ 이야기가 섞여 있단다. 조건을 단 것이다. 이어 할 얘기에 확신이 없기에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한 것이다. 이후 틀린 말이라고 판정이 나면 '내가 볼 때' 없었던 일이었다고 해명하면 되니까 말이다.


게다가 이야기가 섞여 있다는 것은 모호한 표현이다. 구체적으로 다시 물어보자.  


A: 무슨 이야기와 무슨 이야기가 섞여 있어?

B: 부담스러웠다고 들은 건 맞고. 페인트칠 맞아.


앞에 두 에피소드는 인정한단다. 두 가지는 B의 입장을 대변해 줄 이야기들이다. 실제로 있던 일이라는 걸 자백해도 크게 손해 볼 건 없을 거다.


B: 그런데 교역자가 군대 있을 때 가족 중에 OOO이 돌아가신 건 들어 본 적 없는 얘기야. 그리고 그렇게 알 정도로 관계가 깊지 않았어.


저 방어논리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친하지 않아서 속 깊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을 거란다. 그런데 만약 그 목회자가 사람들이 다 같이 모인 자리에서 말했다면 어떤 논리로 방어할 텐가?


B: 그러면 그거를 내가 기억을 못 할 수가 없잖아.


역시 저 말도 틀렸다. 사람이니까 기억을 못 할 수 있다. 기억을 못 할 수가 없다는 것은 억지 주장이다. 그가 자신만만하게 기억을 못 할 거라고 주장하는 근거라는 건 단지 자신의 주관이다. 듣는 사람은 납득이 안 가지만 B는 스스로 기억력이 좋다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개인의 감상에 불과하다. 감정에 치우친 사견이었다.    

지금까지 A와 B의 대화가 길어진 원인은 B가 과거의 일들을 기억하지 못해서였다. 심지어 기억이 없으니 없던 일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건데 말이다.


그리고 이미 B는 전적이 있다. 몇 주 전에도 그가 했던 말도 부정했다. 기억을 못 할 리가 없다고 떵떵거렸던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B는 그럴 수도 있었을 거라고 모기만 한 소리로 답했다.  


B: 그런데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나는 들어본 적 없어. 군대에서 가족 중에 OOO이 돌아가셨던 건...


B는 몇 가지 단어만 한정적으로 사용했다.


기억이 없으니 없던 일이다. 그런 의도가 아닌데 남에게 그렇게 '들렸다'. 이 두 가지 패턴이 대표적이다. 카드 돌려 막기 하듯이 몇 가지 단어를 패턴화 해서 사용했던 것이다.  


B: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런 이야기는 들어 본 적 없어.


B는 말을 잇지 못하고 기존에 했던 말만 반복했다. '사람들이'라고 말한 다음에 뜸을 들였다. 서술어를 붙이지 못하고 말을 돌렸다. 이후 나오는 말들도 다 기시감이 있다. 동어반복이다.


B: 그런데 그 앞에 건 맞아. 그런 부분들은 그건 확실해.


역시 처음에 했던 말을 똑같이 반복하는 것이다. 영양가 없는 구간이다. 그런데 의아한 부분이 있다. 왜 하필 가장 불리한 기억만 기억에 없을까? 그게 가장 핵심인데 말이다.

그리고 앞에 두 가지 일이 확실한 건 A도 안다. 그리고 뒤의 이야기를 B가 들어본 적 없는 게 아니다. 들었는데 B가 기억을 못 하는 거다.  


A: 그랬지. 그래서 부담 느낀다고 한다고 해서 기분 나빠했다. 맞지?

B: 그렇지. 이미 같이 갔는데 우리가 오는 걸 부담스럽다.. 학생들이랑 와서... 같이... 그래서 부담스럽다고 이야기하니까.


A의 공감을 바랐을까? B는 상대의 말을 습관적으로 부정하고 말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이때만큼은 B는 재빠르게 기분 나빠한 것을 시인해 버렸다.


A: B가 자기 보호를 한 거지. 받아친 거지.


A의 평가를 들은 B는 자신의 예상이 틀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B가 어떤 식으로 자기부정을 하는지 살피자.


B: 아니. 받아친 적은 없어. 그런 적 없어. 하하하-


B는 웃었다. 이 웃음은 가짜다. 웃긴 상황은 아니다. 그런데 혼자 웃었다. 그리고 웃음이 짧았다. 당황했지만 그 감정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은 거다.


A: 받아친 거지.

B: 뭐가?


‘뭐가’라는 질문은 시간 끌기 용 질문이다. 받아친 적이 없다고 해놓고, 뭘 받아쳤다고 묻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몰라서 물어보는 게 아니라는 거다. 할 말이 궁색해지니 시간이나 벌어보자는 모양새다.  


A: 기분 나쁘니까 B도 똑같이 부담스럽다고 말한 거지.

B: 아니. 내가 같이 부담스럽다고 이야기한 적은 없어.


A: 그렇게 얘기했어, B가.

B: 아... 그런데 어쨌든 그분이 부담스럽다고.. 아니... 그런데 그런 건 있어.


‘어쨌든’이라는 접속사가 나왔다. 화제를 돌리고 싶다는 의지를 피력한 거다. 그는 상대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만약 나르시시스트 말의 진실성을 가늠하려면 그의 말을 부정해 보면 된다.


B는 같이 받아친 적이 없다고 했다.

A는 받아친 게 맞다고 했다.


그러자 오히려 B는 더 이상 부연설명을 하지 못하고, 한 발 물러섰다.

정확한 근거나 타당한 이유가 있다면 자세하게 근거를 말했을 것이다.

그에게 이 대화는 이기고 지는 싸움이란 프레임에 한정돼 있다.

승패가 걸려 있는데 꼬리를 내린 다는 것은 정말 할 말이 없었을 가능성이 크다.   

B는 명확하게 반대하면서 이유를 설명하는 대신에 우회해서 다른 말을 하는 걸 선택했다.


그는 잘못했다는 말을 하고 싶지가 않다. 그래서 화제를 돌리거나 사정이 있었다는 식으로 구구절절 말하고 있다.  


B: 전도사는 우리랑 권사님들이랑 너무 많이 온다고 해서 부담스러웠다고 했고. 우리는 사역이 다른 것도 많이 있었잖아.


사역이 많았다는 게 사실인지 A의 입장에서는 확인하기 힘들다.


B: 그런데 교회 선교까지 또 가는 게 부담스러운 상황이었어. 그래서 우리도 오는 것에 있어서 부담스럽다고 이야기한 건데.


실제로 저런 상황일 수도 있다. 그리고 아닐 수도 있다. 그리고 사역이 다른 것도 많이 있었다는 것은 주관적 판단의 영역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코에 걸면 코걸이인 말일 수도 있는 거다. 바쁘다면 바쁘고, 사역이 적다면 적을 수도 있다. 사실 저 말의 근원은 B의 방어심리에서 나왔다. 부담스럽다는 말에 자신이 아쉬운 입장 혹은 불필요한 존재가 된다고 느껴서 둘러댄 거였다.


B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지금 B는 감정적이다.

 

B: 그게 받아쳤다고 느낀 거면... 어쩌면 내가 기분이 안 좋았다고 말하면서 그랬을 수도 있는데. 그 이야기는 받아치려고 한 건 아니야.


묘하게 이전의 대화가 엇갈린다. A는 B의 의도를 말한 거다. B가 말한 내용을 차치하고, B의 그 말을 꺼낸 의도 말이다.  


A: 무슨 이야기야 그럼?


A가 저 질문을 한 것은 반절은 설의법이었다.

그러니까 B가 자신도 부담스럽다고 발언한 진짜 의도는 교역자를 향한 공격이었다. B는 그 이야기를 하면서 패드립까지 했다. 과잉행동이었다. 기분이 안 좋았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상대의 말을 받아친 게 아니라는 것은 모순이다. 받아친 면도 있는 거다.


B는 지금 궁지에 몰렸다고 상황을 해석했다. 그래서 최대한 상대의 이야기를 억지로라도 부정하되 자신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항변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이미 그는 말을 다 뱉어버렸다.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다.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할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B는 교역자를 과도하게 공격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는 그가 피해자의 위치에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 대화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부담스럽다는 말이 기분 나빴지만 똑같이 부담스럽다고 한 말은 받아치려고 한 것은 아니라는 말은 회피성 발언이다. 결국 B가 '내가 상대를 의도적으로 공격했다'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면 대화에서 질 수 있기 때문에 버티려는 중이다.


나르시시스트는 도덕적으로 해이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잘못을 인정하지 못한다.


오히려 반대로 말한다. 잘못을 지적한 상대가 같은 잘못을 했기에 지적할 자격이 없다고 한다. 아니면 잘못을 지적한 사람이 상황을 잘 몰라서 오해하고 있다고 억지를 쓴다. 아니면 그런 적이 없다고 한다. 아니면 나쁜 의도가 아니었다고 한다. 상황상 그리고 맥락상 누가 봐도 안 좋은 의도로 말한 게 자명한데도 말이다.


그러니까 나르시시스트의 도덕성은 취약점이다. 도덕성의 큰 틈을 최대한 공략하자. 그래서 그의 가짜 자부심을 무너뜨리고, 도덕적 우월성에 취해있는 그의 잠든 영혼을 깨워주는 것이다.


그럼 일단 나르시시스트는 억지를 쓸 것이다. B처럼 앞 뒤가 안 맞는 소리를 하거나 궤변을 늘어놓을 것이다. 떠드는 말을 듣고 있다가 툭툭 잽을 날려라. 이때 과거의 그가 했던 말을 복기해 줘라.   


부담스럽다고 해서 기분이 안 좋았다며? 그런데도 받아친 게 아니라고? 그럼 뭔데?


기분이 안 좋은데 받아친 게 아니라는 궤변에 대해 어떤 궤변을 끌어올지 관찰해 보라.


그럼 우리는 또 다른 할 말이 생각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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