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시스트의 괴롭힘을 받아 줄 필요가 없는 이유

나르시시스트는 불안을 해소하려고 희생양을 구박한다

모든 생명체 중에서 인간이 가장 뛰어나다.


인간만이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은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는 무형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실존하고 있다.

그래서 현실에 실시간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인간만이 양심을 가지고 있다.

물론 윤리의식은 개인마다 천차만별이다.

어딜 가든 양심에 화인맞은 빌런이 서식하기 마련이니까.


그래도 대다수의 마음 한 켠에는 도덕성이란 작은 촛불이 늘 일렁이고 있다.

인간은 신이 선물한 자유의지로 그 불을 더 활활 타오르게 할 수 있고, 한낱 한숨으로 꺼버릴 수도 있다.

양심 따위가 애초에 없었던 것처럼.


인간만이 문제 앞에서 이렇게 행동하는 게 옳은지 저렇게 행동하는 게 그른지 가치판단을 한다.

청기를 들지 백기를 들지 내적으로 갈등하는 존재는 신을 닮은 인간이 유일하다.


오로지 인간만이 고차원적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생각의 집합체가 정체성이다.

내가 누구인지 궁금한다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돌아보면 된다.

상대의 본모습을 알려면 그가 자주 하는 생각을 관찰하면 된다.


자신에게 질문하라.

그리고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타인에게 본인의 생각을 말할 수밖에 없는 질문을 던져보라.

그리고 답변에 귀 기울여 보라.

그의 눈빛을 중간중간 살피면서 태도를 점검하라.


가치관은 언어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무의식적으로 진짜 모습을 투영한다.

특히 생각을 표현할 때 쓰는 단어를 잘 살펴야 한다.

단어에는 신념이 담기기 마련이다.

물론 꾸며낸 답이 아닌 진솔한 응답이어야 할 것이다.


긍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긍정적인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부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은 부정적인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어떤 생각을 하는지에 따라서 인생의 색과 방향이 정해진다.

만사가 생각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 생각의 기능을 활용하지 못하는 부류가 있다.

바로 나르시시스트다.


나르시시스트는 깊이 생각하는 걸 꺼린다.

고민하는 상황 자체를 피한다.

그에게 성찰이란 질서 없는 내면을 한 번 더 뒤흔드는 지진과 같다.


나르시시스트의 도덕성은 오래 전 지은 폐건물 안에 누운 낡은 기계와 같다.

컨베이어 벨트가 녹슨 나머지 끼익끼익 소음만 내면서 헛돌아가는 것처럼, 그의 양심은 제 기능을 잃은 지 오래다.


대신 그의 마음은 방어기제로 가득 차 있다.

적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홀몸인 자신을 보호해야 한다는 신념에 골몰한다.

그는 세상 자체를 불신한다.

그래도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는 있어야 대인관계가 굴러간다.

하지만 나르시시스트는 눈 앞에 보이는 인격체를 공격해야 하는 대상 혹은 본인을 위협할지도 모르는 대상으로 인식한다.

그래서 그는 타인의 고통에 진심으로 공감하지 못한다.

공감을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다.


누군가가 내 옆에서 괴로워하면 그 아픔이 전이되어 나까지 힘들어지는 게 공감능력

이다.

상대의 아픔을 내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도덕적 역치가 평균 이상이거나 높은 사람은 나쁘게 행동하는 걸 본능

적으로 꺼린다.

양심에 찔리어 먼저 스스로가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딘 양심을 가진 나르시시스트는 희생양이 찡그리면 구겨진 마음이 펼쳐진다.

심지어 자신의 막말로 상대가 당혹감에 시달릴 때 묘한 안정감과 가쁨을 만끽한다.

나르시시스트는 만성적인 애정결핍으로 마음에 큰 구멍을 가지고 있다.

그 구멍이 일시적으로 메워진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공허해진 마음을 위로하려고 희생양에게 온갖 스트레스를 전가한다.

삶은 널빤지를 붙잡고, 파도를 타는 것과 닮아 있다.

인생에서 누구나 위태로운 순간을 맞이한다.

파도가 언제 몰려올지 다 모른다.

어떤 수위로 다가올지 예측하기 힘들다.

그래서 미래는 불안함을 자극한다.


그럼에도 최대한 긍정적인 방향으로 사고하는 게 이롭다.

되도록 낙천성을 발휘하는 게 정신 건강에 좋다.

부정적인 생각은 간헐적으로 첨가하면 된다.


비관적인 사상에만 젖어있다면 인생이 너무 우울하다.

동력이 없기에 삶의 목적을 설정하는 것부터 힘에 부친다.

목표를 정해도 완수할 힘이 부족하다.

어차피 목적지에 도달할 거라고 믿지 않기 때문이다.

선장이 목적지를 알지만 키를 내버려 둔다면 배는 난파될 것이다.


희망이 없는 것은 정전된 집과 같다.

캄캄한 공간에서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물론 숨만 쉬고 바닥에 누워있는 건 가능하겠다.


하지만 그건 생존에 불과하다.

인간은 단지 목숨을 보존하려고 살아가는 건 아니다.

역동적으로 살려면 더 고차원적이고 위대한 포부가 있어야 한다.


물론 부정적인 관점도 어느정도 필요하다.


예로 우리는 횡단보도 앞에서 기다리다가 신호등에 파란 불이 들어오면 건너간다.

하지만 파란 불이어도 차가 무단으로 지나간다는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그러니까 할 수만 있다면 건너가면서도 시야를 넓혀서 주변 상황을 봐야 한다.

부정적인 관점이란 이런 걸 말하는 거다.

그러니까 인생을 시뮬레이션해 보는 거다.

안정감 있는 자세로 혹독한 시련을 맞이할 준비운동을 하는 거다.

마음에 근육을 붙여야 한다.

고난이 성큼 내 인생을 발을 디뎌도 크게 다치지 않게끔.


좋은 결과와 안 좋은 결과를 둘 다 예상해서 앞날을 대비하자.

마음은 고생스럽지만 훗날 풍족한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현실을 직시하되 이상적인 희망을 키워내자.


그런데 더 나은 미래를 향해 건설적으로 살기보다 현실을 비관적으로 바라보며 불평만 일삼는 유형이 있다.

바로 나르시시스트다.

그는 비관적인 관념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부정적인 말들만 배출한다.

쓸데없는 생산성이다.

수요 없는 공급이다.


초반에는 나르시시스트가 매사에 입을 비쭉 내미는 게 나쁘지 않다고 평가할 수 있다.


참 솔직하네.

저 말은 공감이 되네.

진지한 성격이구나.


이렇게 긍정적으로도 봐줄 수도 있다.


물론 나르시시스트가 나에게 친절을 전시하는 기간 동안 그렇다는 거다.

그가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건 봐줄 만하다.

누구나 긍정적인 말만 하지 못한다.

불만을 가지는 건 자연스러운 심리다.

우리가 마주한 상황은 대다수가 불완전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인류애를 발휘해서 나르시시스트를 이해해 보자면 약간의 불평 정도는 용납할 수 있다.

그런데 나르시시스트가 매일, 매사에, 수시로 부정적인 말만 남발한다면?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느닷없이 고나리가 튀어나오듯이 나르시시스트의 부정적인 말이 자꾸 튀어나온다면?

아주 가끔씩 말하는 건 괜찮다.

그런데 매사에 어두운 생각만 떠올리는 나르시시스트를 좋게 봐주기란 참 힘든 법이다.


나르시시스트도 이 점을 알고 있다.

그래서 처음에 그도 사회성을 발휘한다.

가까워지려고 나름대로 신경 쓰는 거다.

무엇보다 나를 배려하고 있다는 것은 나르시시스트가 마음을 열기 전이라는 뜻이다.

그는 마음을 진심으로 여는 순간부터 달라진다.

나르시시즘적 사고를 여과 없이 드러내고, 어두운 기운을 상대에게 흘려보내기 시작한다.

만약 나르시시스트가 희생양 후보에게 좋은 말을 많이 한다면 아직 상대를 탐색 중인 거다.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확정 짓는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그는 사포처럼 까칠해진다.

작은 일에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한다.

수시로 불평과 불만을 쏟아내기 시작하는 거다.


이때부터 희생양은 자존심 상하는 순간이 많아진다.

사포가 맨살에 닿으면 어떻겠는가.


예전에는 나르시시스트를 만나면 기분이 괜찮았다.

서로 잘 맞는 것 같았다.

그래서 가감 없이 속마음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희생양은 내밀한 이야기를 하기가 꺼려진다.


나르시시스트의 과잉 반응 때문이다.

어느 날 영지는 식당에서 돈가스를 시켰다.

많이 못 먹어서 싸가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동석했던 나르시시스트가 팍 짜증을 낸다.

아, 그럴 거면 뭐 하러 시켰어?


그대는 음식 싸간 적 없나.

이건 평범한 에피소드다.

내 선택은 정당하다고 부연설명하는 게 우스울 정도다.

그런데 나르시시스트는 영지가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한 것처럼 흥분했다.


영지가 꽃다발을 선물 받은 적이 있다.

모임이 파한 뒤 그는 꽃을 들고,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런데 멀리서 그 장면을 본 나르시시스트가 외쳤다.

야, 어느 여자가 어떻게 저런 자세로 꽃다발을 들어.

타박 섞인 말투였다.


영지는 꽃다발을 가방처럼 들고 있었다.

별 거 아니었다.

꽃다발 드는 공식은 없다.

단지 꽃이 흘러내리지 않게 잘 들면 된다.

게다가 여자가 그러면 안 된다는 주장도 다소 갸우뚱한 말이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야.

널 자라게 하려고 하는 말이야.


묻지도 않았는데 나르시시스트는 이렇게 자신을 변호한다.

방어적인 태도다.


나르시시스트도 은연중에 알고 있다.

스스로 상식적인 까칠함을 넘어섰다는 걸 말이다.

자신의 막말에 상대가 불쾌해하는 것도 눈치채고 있다.


사실 나르시시스트는 희생양이 기분 나빠하길 바라고 있다.

그래서 막 나가는 거다.

그리고 나르시시스트의 목표는 남의 기분을 건드려서 자존감을 채우기다.


상식을 가진 사람은 나르시시스트의 목표가 이상하다고 판단한다.

기분 나빠하는 걸 보려고 기회를 노린다는 게 찜찜하다.

그런데 나르시시스트의 심리가 그렇다.

그는 그렇게 못됐다.

이런 못된 시도는 나르시시스트의 삐뚤어진 자아 때문이다.

그의 자아는 매우 빈곤하다.

그는 자기 자신을 불쾌해한다.

스스로 별로라고 여긴다.


그래서 남을 비난하고, 괴롭힌다.

나르시시스트 스스로를 별로라고 여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괴롭혀서 자아를 획득하는 것이다.


하지만 병적인 방법으로 얻은 자아는 인스턴트 음식처럼 영양가가 없다.

남을 의존해서 얻은 자존감은 수증기처럼 증발되기 마련이다.

나르시시스트도 결국 이전보다 더 허전한 자아를 가지게 된다.

그렇게 나르시시스트는 방황하는 존재로 살아간다.


나르시시스트가 괴롭힌다면 스스로 약점을 여과 없이 노출하는 것이다.

그가 심적으로 불안정하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희생양이 괴로워하는 걸 보려고 의도적으로 덫을 치는 것이야말로 나르시시스트의 심리가 잘못됐다는 걸 증명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르시시스트의 괴롭힘을 굳이 받아 줄 필요가 없다.

결과적으로 어느 누구에게도 유익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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