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는 발악했다. "어, 그래. 내가 인간쓰레기다. 됐어?"
A와 B는 가끔 전화통화를 했었다.
언젠가 B가 억울하다는 듯이 격양된 맡투로 겪은 일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그 교역자가 그러는 거야. 우리가 선교지에 온다는 게 부담스러웠다고
얼마 전 그가 교회가 주최하는 선교에 다녀왔다.
그리고 저녁에 다 같이 모여 이야기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때 목회자는 B가 참석한 게 부담스럽다고 말했단다.
예상보다 많은 인원이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그랬어. 나도 일이 많아서 여기 오는 게 부.담.스.러.웠.다.고
이성을 살짝 잃어버린 그는 길거리에 침을 뱉듯이 끈적거리는 패드립을 뱉어냈다.
예전에 그러더라? 군대 있었을 때 가족 중에 OOO가 돌아가셨대. 그런데 아무도 위로를 안 해주더라는 거야. 이제 보니까 사람들이 왜 그랬는지 알겠더라고.
A는 품위를 잃은 채 급발진하는 B가 몹시 거북하고 불쾌했다.
왜 그렇다고 생각하는데?
속으로 반문하며 느끼해진 속을 달랬다.
평소 B는 사람들에 대한 불만을 자주 말하면서 스트레스를 풀곤 했다.
그래도 가족 험담을 한 적은 거의 없었는데.
이 발언은 선을 넘었다.
부담스럽다는 게 그렇게까지 상처가 되나.
어쩌면 이전부터 트라우마가 있었을지 모른다.
거절당하는 걸 가장 어려워하는 그였다.
내가 말했잖아. 난 고칠 점만 본다고
B가 스스로를 표현했던 수식어다.
하지만 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사실 고칠 점만 본다는 것은 부정적인 감정을 자주 느낀다는 뜻이다.
가까이에서 보니 B의 정신세계는 어두웠다.
넘어갈 법한 말도 날카롭게 반응해서 상대에게 무안을 줬다.
상황을 부정적으로 바라봐서 지나치게 남 탓만 한다거나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타박하는 말 등을 자주 했다.
하지만 그런 그가 자기 자신에게만큼은 관대했다.
이런 유형은 기분에 따라 같은 상황도 다르게 해석한다.
해석의 기준마저 자기중심적인 것이다.
다른 사람이 조언하면 꼰대라고 주장한다.
자기가 조언하면 꼰대처럼 들리는 거라고 변명한다.
그렇게 '들릴 뿐'이라고 하면서 슬쩍 빠지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문제점을 지적하면 착각했거나 망상했다고 주장한다.
자신이 문제점을 지적하면 객관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말했다고 주장한다.
감정적으로 해석하고 과도하게 의미 부여한 거라도 무조건 틀리지 않았다는 거다.
설령 본인은 잘못했다고 해도 다른 사람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주장한다.
사과하라고 하면 도망가거나 그런 적이 없다고 발뺌한다.
다른 사람이 기분 나빠하면 감정 자체를 부정하면소 그럴 만한 일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자신이 기분이 나쁘면 남이 원인을 제공했기에 무조건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본인의 책임은 없고 오로지 피해자라는 주장이다.
그는 과민하고 상처를 깊이 받는다는 특징을 고칠 점만 본다는 말로 둔갑시켰다.
나르시시스트가 이렇게 왜곡된 세계관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B도 그런 유형과 비슷했다.
정의나 양심에 기대 판단하는 게 아니라 부정적 감정에 못 이겨 충동적으로 발언할 때가 많았다.
그는 이런 말을 한 적도 있다.
OO가 강의하는데 지난주 강의 내용이랑 겹치는 거야. 그래서 내가 막 뭐라고 혼냈어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서브 텍스트를 읽을 수 있다.
첫째, 난 지난주 강의 내용을 잘 기억하고 있다.
둘째, OO를 구박할 정도로 난 서열이 낮지 않다.
A는 저 주장을 신뢰하지 않았다.
말의 뉘앙스나 분위기만 보면 OO가 실수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B는 어떤 내용이 어떤 내용과 같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못했다.
내용이 겹친다는 것도 B가 가공한 견해에 불과하다.
객관적으로 판단할 만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그저 생각의 결과만 단순하게 나열한 것이다.
강의 내용이 겹쳤다는 게 중요하지 않다.
이 상황에서 그가 강조하고 싶은 주체는 자기 자신이었다.
지난주에 들었던 내용을 '기억'했기에 잘못된 점을 '지적'했다는 게 핵심이었다.
그는 나의 의견을 상대가 반대하는 상황을 경계했다.
OO가 내가 한 말이 틀렸다고 막 반박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화를 냈지. 그런데 나중에 미안하다면서 울더라고. 걔도 마음이 어려웠던 거야
OO이가 그의 의견을 강하게 반대한 적이 있다.
생각이 일치하지 않아서 감정이 상하는 상황은 종종 일어난다.
B는 의견을 반대하는 것은 자신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화를 냈단다.
자존심에 상처를 받은 그는 '나는 화를 냈고, 상대는 마음을 어려웠다'라고 정리했다.
스스로가 상처를 받았다거나 마음이 어려웠다는 표현을 쓰지는 않았다.
대신 OO이가 나로 인해 마음이 어려웠다고 말했다.
그는 외부세계에 대한 적개심이 강했다.
타인의 말 한마디에도 마음이 급속도로 불편해지고, 그걸 견디지를 못했다.
감정에 휩쓸려 남을 충동적으로 비난할 때가 많았던 것이다.
그도 그런 면을 자각하는 듯했다.
제멋대로 실컷 욕한 다음에 이렇게 덧붙였다.
아, 그런데 OO이가 싫어서 그런 말을 하는 건 아니야.
말은 그럴싸하다.
하지만 특정인을 조롱하는 뉘앙스나 감정의 격렬한 출렁임 등을 살피면 당연히 싫은 마음이 있다는 걸 알 수밖에 없다.
싫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건 좋아서 하는 말도 아니라는 게 된다.
저건 일종의 말장난이다.
그는 굳이 좋다는 말은 안 하면서도 싫다는 것도 아니라는 이상한 입장을 취했다.
그는 상대를 싫어하는 걸 표현하고 싶었다.
하지만 뒷담화하는 이미지는 가져가기 싫었다.
이런 상충된 감정이 내면에서 충돌했다.
그래서 저런 궤변이 나왔던 것이다.
그가 잔잔하게 웃으면서 말한 일화가 있다.
그에게는 나이 차이가 꽤 나는 후배인 C를 알았다.
그런데 C가 B에게 의도적으로 인사를 하지 않았단다.
B가 인사해도 C는 모른 척하며 지나가기 바빴다.
학기가 시작되고, 동아리에 들어오라고 한 다음부터 시작된 태도였다.
그 말이 부담이 된 모양이었다.
그런데 결국 C는 그 동아리에 들어가게 됐다.
그리고 그 일이 미안했다고 울면서 사과를 했단다.
그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나는 사실 아무렇지 않았거든
인사는 대인관계의 기본이다.
나이차이도 꽤 나는 상대는 B의 인사를 무시했다.
또 인사도 받지 않았다.
그게 아무렇지 않았다는 건 비상식적인 일이었다.
마음에 아무 변화가 없었다면 그것이야말로 문제다.
그 일은 B의 마음에 흉터로 남았다.
자신이 대단한 권위를 가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을 무시하는 대상이 생겼다.
그런 일에 상처받은 자기 자신이 창피해서 진짜 감정을 숨기는 데 급급했던 것이다.
좋은 사람이고 싶었지만 실제로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 괴리감을 인정하기 못하고, 진짜 감정을 회피하다 보니 저런 말이 나왔던 것이다.
그는 종종 노골적으로 비교를 감행했다.
파워 블로거 모임을 갔는데 사람들이 나한테 말을 안 거는 거야.
별로더라. 그래서 나는 다음 모임에 여러 사람들한테 말을 걸었어
객관적 정보의 나열 같다.
하지만 B는 자신의 감정을 말한 거다.
상대적으로 내가 우월하다는 과시이기도 했다.
누구와는 달리 나만큼은 도덕적인 면에서 깨어 있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런데 과연 B가 그들과 다를까?
실전에 부딪히자 그는 금세 내실 없는 교양을 길바닥에 버리고, 본색을 드러냈다.
특히 가족을 언급하는 장면에서 살짝 경악했다면 서운하려나.
얼마 전 B는 모 교회에서 추진하는 선교에 참여했다.
하루 일정을 마치고 저녁에 다 같이 도란도란 속마음을 나누는 시간이 있었다.
모 교역자가 소회를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으며 B를 비롯해 사람들이 너무 많이 와서 부담스러웠다고 발언했던 것이다.
통솔할 인원이 많아질수록 교역자의 책임감은 막중해진다.
그는 리더로서 진솔하게 소회를 토로했을 뿐이었다.
B가 와서 싫다는 소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B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목회자가 자신을 불필요한 존재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었던 것이다.
힘들게 왔는데 아쉬운 입장으로 전락하자 그는 폭주했다.
그는 평판에 유독 민감했다.
타인의 눈에 하찮은 존재로 비칠까 봐 전전긍긍하는 유형이었다.
교역자는 의도치 않게 상대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린 셈이다.
원래 B는 남의 의심할 때가 많았다.
누군가가 나쁜 의도를 감춘 채 뻔뻔하게 아닌 척한다고 지레짐작할 때가 많았다.
본인이 의심이 많은 성격이라고 시인할 정도였다.
문제는 그가 의심하는 것을 이상증상이라고 여기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합리적으로 의심할 만한 정황이 없어도 자신만의 주관적인 의심을 확신으로 둔갑시키곤 했다.
하지만 본인이 과민하다는 자각 자체가 없었다.
병적인 사고체계라고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거다.
그는 의심하는 성향이 불만이라고 말한 적이 없다.
오히려 중립적인 특성이자 장점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 딴에는 남들보다 눈치도 빠르고, 핵심을 간파하는 성격이라고 착각했다.
듣는 사람이 B가 오역을 했다고 원래 의도를 설명해도 소용없었다.
어차피 그는 상대가 본래 의도를 들켜서 둘러댄다고 재해석하기 때문이었다.
이미 타인의 마음이 이렇다고 확신했다면 누구의 말도 듣지 않았다.
논리적으로 설득해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였다.
다시 이야기가 원점으로 돌아가곤 했다.
B는 편집증적인 시각으로 대부분의 상황을 바라봤다.
선의로 말해도 공격했다고 해석했다.
중립적으로 상황 설명을 해도 원래 다른 의도를 감추고 둘러서 말한다고 확신했다.
고칠 점만 본다는 주장은 의심하는 증세를 보인다는 말이었다.
그가 대화 도중에 난데없이 짜증을 내거나 그래서 네가 듣고 싶은 말이 뭐냐고 따질 때가 있었다.
이 역시 특정 말이 의심의 촉을 건드렸기 때문이었다.
말하는 사람은 의도가 없다.
하지만 B는 의도가 있는 것처럼 가장한 채 따져 묻는다.
상당히 난감한 상황이다.
그래서 그와 말할 때 좀 더 신경을 써야 했다.
물론 신경을 써도 비슷한 상황이 반복됐지만 말이다.
나는 욱하는 편이야.
B는 이렇게 자신을 설명했다.
하지만 이는 절반의 진실이다.
저 말의 다른 뜻은 마음을 잘 다친다는 것이다.
부정적인 감정을 자주 경험한다는 의미다.
나는 고칠 점만 봐.
이 또한 그가 자주 강조하던 내용이었다.
다른 사람의 어긋남을 바로잡는 역할을 잘한다고 인식했던 것이다.
사실 진짜 상대가 엇나간 게 아니라 부정적인 감정을 잘 느끼는 그가 부정적으로 반응한 것에 불과할 때도 많은데 말이다.
나는 의심이 많아
언젠가 그가 한 말이었다.
실제로 의심이 많았다.
마음의 흐름이 의심 쪽으로 종종 기울어지니 상황을 왜곡해서 인지하곤 했다.
그래서 가까운 이들과 갈등을 일으켰다.
자신은 피해자라고 주장하며 억울함에 홀로 시달릴 때가 많았다.
B는 그런 순간을 잘 이겨내지 못했다.
도망가거나 감정적으로 폭언하며 사람을 괴롭혔다.
평소 그는 표정변화도 별로 없었다.
잘 긴장하고, 불안에 크게 영향받는다면 일상에서도 얼어있다.
기분이 안 좋을 때가 많으니 근육이 자연스럽게 영향받는 것이다.
B는 외부세계에 상당히 배타적이었다.
특징 없는 상황에서도 남을 경계하고, 스스로 움츠려 들 때가 많았다.
매사를 편집증적으로 바라보니 적개심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는 통제하는 듯한 말을 자주 썼다.
남들이 사소한 장난을 쳐도 확 물러섰다.
불안도를 낯추려고 통제하는 언어를 썼다.
그만해. 그만
혹은
너무 과해
이런 말들 말이다.
과하다는 평가는 과연 객관적일까?
아니면 혼자 그렇게 받아들인 걸까?
제삼자는 판단하기 모호하다.
그런데 외부 자극에 민감한 B는 과하다고 느낄 만한 상황이 많았을 수도 있다.
그의 관점에서는 세상이 과한 말로 도배돼 있다.
처음에 A는 B가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편인 줄 알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미묘하게 대화 패턴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B가 전형적인 매뉴얼을 따라가는 듯한 무미건조한 반응을 반복했던 것이다.
누군가가 가정불화로 힘들어해서 사연을 털어놓는다.
그럼 B는 말한다.
그런데 네가 겪은 건 아무것도 아니야. 누구는 다툼이 심해서 동생이랑 집을 나왔다고 하네
누군가가 몸이 아프다고 한다.
그럼 B는 살짝 맞장구를 치다가 코너를 확 꺾는다.
너보다 더 힘든 사람들도 있어
누군가가 직장생활의 고충을 털어놓는다.
그럼 B는 본인이 더 힘들었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내 선배들은 날 사람 취급도 안 했어
누군가가 죄책감을 잘 느낀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B는 자신의 얘기로만 받는다.
와, 나는 못돼서 그런 생각을 잘 안 하는데
B는 듣기는 듣는다.
그런데 강박적으로 부정적인 답변만 내놓았다.
무슨 말을 하든지 대립되는 내용을 읊는 것이다.
또 타인의 이야기를 징검다리 삼아 자신의 이야기를 훌쩍 넘어갔다.
그에게 듣기란 본인의 얘기를 말하려는 요식 행위였다.
아주 긴 시간을 할애해서 본인의 상황을 상세하게 말했다.
B가 남에게 관심이 없다.
어쩔 수 없이 이야기를 듣게 된 입장에 처해서 영혼 없는 리액션을 했다.
너그럽게 보자면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고질적으로 혹은 강박적으로 이런 대화 패턴을 반복한다는 것이다.
B는 겉으로는 듣는데 속으로는 자기 위주의 사고방식에 갇혀 있었다.
시간은 흐를수록 도금된 겉면은 풍파에 벗겨지기 마련이다.
친해질수록 그의 이면이 보였다.
가까이서 본 B는 방어기제가 너무 두꺼웠다.
이를 테면 그가 스스로를 어필할 때 종종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고칠 점만 봐.
A는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그 말에서 오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고칠 점’은 상대를 향한 2차적 해석이다.
객관적 사실이라고 못 박아 둘 여지가 별로 없다.
다만 B가 고칠 점이라고 규정하는 순간부터 그의 세계에서는 고칠 점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판단이 틀릴 여지를 고려하지 않았다.
B는 자신의 판단에 높은 신뢰성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을 자랑스러워하며 이렇게 표현했기 때문이다.
나는 객관적으로 판단해.
‘객관성’을 들어가며 의견을 피력하는 사람을 주의해야 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누르려고 의도적으로 자신의 생각에만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
이견을 조율해서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게 가장 건강하다.
그래야 서로 발전할 수 있다.
하지만 나르시시스트는 의견이 대립되는 상황을 혐오한다.
나를 상대가 인신공격한다고만 해석한다.
그래서 스스로를 방어하고자 ‘객관성’이라는 감투를 씌우는 것이다.
주장에 설득력을 불어넣으려고 객관적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나는 원래 객관적이다'는 다소 실체 없는 말로 저항한다.
객관적이란 말 자체를 객관적으로 검증하기 힘들기 때문에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
나는 고칠 점만 봐.
난 비판할 점만 본다고 했잖아.
B는 누가 묻지 않았는데도 저런 말로 자신을 강조했다.
처음에 A는 그런 그가 독특하고 신선했다.
주변 사람들 중에 ‘고칠 점만 보는 사람’이라고 콕 집어 자신을 설명하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그 말에 가치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다만 이런 유형도 있구나 싶었다.
A는 B와 잘 지내고 싶어서 무슨 말을 하든지 그러려니 하고 좋게 넘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B가 가족의 사망까지 말하면서 누군가를 욕하는 걸 보니 그만 정이 떨어졌다.
당사자가 듣지 않는 자리라고 아무 말이나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저렇게까지 격분할 만한 상황도 아니다.
그의 행동이 너무 과했다.
B는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고, 실상 인품이 꽝이구나.
내가 사람을 잘못 봤네.
A는 B와 심리적으로 멀어지는 계기가 됐다.
가족의 사망은 당사자에게 매우 큰 아픔이다.
위로받아야 마땅하지만 아무런 말도 듣지 못했다.
그런데 교역자의 말에 기분이 상한 B는 왜 그랬는지 알겠단다.
B가 군대에서 외면받았던 이유를 어떻게 알겠는가.
안다고 주장할 수는 있어도 결국 주관적 추측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는 확신 어린 태도로 부정적인 뉘앙스를 흘렸다.
호기로운 태도와 달리 자신 있게 ‘이유’를 말하지도 못했으면서 말이다.
다만 듣는 이가 이유를 모호하게 추측하게끔 분위기만 조성했다.
지금 B는 우기고 있다.
부담스럽다는 말은 나쁜 의도 혹은 공격하려는 의도가 없이 '그냥' 상황 설명을 한 거란다.
내가 부담스럽다고?
내가 힘들게 온 건데 나란 가치를 낮게 보는구나.
그렇다면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사실 나도 부담스러웠어.
너란 그런 거 아니거든?
흥!
B는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 돌리고 돌려서 말했다.
마치 교역자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저렇게 말한 것처럼 꾸며댔다.
B는 교역자의 이미지를 최대한 훼손하고 싶어 했다.
앙꼬 없는 찐빵처럼 알맹이 없는 험담만 한 셈이다.
그가 속마음을 실질적인 언어로 구현하지 못하고, 실체 없는 이미지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을 감춘 이유는 험담이 도덕적이지 못한 부류의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신의 평판을 고려해서 상대방이 말의 맥락으로 ‘추측’하게끔 상황을 교묘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A는 B의 악의가 느끼고, 오히려 마음으로부터 멀리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A는 B의 험담에 동참해주고 싶지 않았다.
가족 이야기는 정말 선 넘는 패드립에 가까웠다.
그리고 무슨 부담스럽다는 말을 들었다고 가족의 사망 이야기까지 꺼내냐는 말이다.
A는 내심 살짝 놀랐다.
상대방 가족의 사망까지 들먹거리는 모습에 이질감을 느꼈다.
평소 B가 바르고 도덕적인 삶을 말로 강조해 왔다.
하지만 실전에서 높다란 레고가 무너지듯 가감 없이 망가지는 게 예사롭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인간이 말로는 누구나 성인군자 흉내는 낼 수 있다.
말은 그저 말에 불과하지 그 사람의 진심을 반영하지는 않을 수 있다.
B는 교역자를 공격했다.
너도 부담스럽니.
나도 부담스럽다.
대화의 흐름상 B가 감정이 상해서 한 말에 불과하다.
B: 그러니까 우리도 일정 때문에 사실 오는 게 그렇게 편하게 온 건 아니고 우리도 조금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는 이야기를 한 거지.
부담스럽다고 말한 의도를 솔직하게 설명하라고 한 거지 내용 자체를 다시 말하는 게 아니었다.
B는 아쉬운 입장이 된 게 분했다.
그래서 사실 이 자리에 오고 싶지 않았고, 당신은 내가 부담스럽다고 했지만 나도 같은 입장이다고 굳이 콕 집어 말한 것이다.
감정적으로 상처받은 말을 똑같이 되돌려줘서 그 상처를 극복하고 싶었던 것이다.
A: 그럼 그 사람도 기분 나쁠 걸 예상했겠네?
B: 그 사람이 기분 나쁠 건 없지.
방금 교역자에게 부담스럽다는 말을 들은 게 기분 나쁘다며?
A: 왜?
그는 무슨 답변을 할지 궁금해서 물었다.
B:....
B는 한참을 망설였다.
A에게 흠을 잡히지 않으려고 대답을 고르는 듯했다.
그리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답했다.
B: 그러니까 우리도 우리 일정 때문에 우리도 막 너무 오고 싶어서 이런 상황으로 온 건 아니라고 말한 거니까.
그 내용을 말한 의도를 물었는데 내용 자체만 말했다.
교묘하게 답변을 피한 것이다.
A:... 그런데 전도사가 부담스럽다고 말을 안 했으면 B도 그런 말을 안 했겠네?
B가 같은 말로 돌려 막기만 하자 변화구를 던져 본다.
그런자 아까와는 달리 그는 잽싸게 답변했다.
B: 그렇지. 왜냐면 그건 서로 그런 이야기를 하게 됐으니까 얘기를 한 거지.
그는 귀엽게도 자신의 탓이 아니라고 말할 기회라고 여겼던 것이다.
질문의 의도를 잘못 파악한 거다.
B: 꼭 기분 나빠서 한 게 아니야.
'꼭' 기분 나빠서 말한 건 아니란다.
그러니까 기분이 상해서 말한 이유도 포함이 된다는 말이다.
그는 아까 한 말을 또 다시 반복하기 시작했다.
B: 네가 그런데 여러 상황 때문에 가기 어려운 데 갔어. 아무것도 없이...
A는 같은 말을 듣는 게 피곤했다.
B가 잘못을 인정하기 싫을 때는 꼭 남을 끌어들였다.
너도 그랬을 걸?
너도 나처럼 그랬을 걸?
이런 우기기 화법이다.
하지만 이 말은 틀렸다.
진짜 그 상황에 맞닥뜨리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같은 행동을 할 거라고 확신하냐는 거다.
결국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로 남에게 초점을 돌리고 살짝 도망가는 형태다.
A: 군대에서 있었던 일도 B가 이야기한 게 맞고. 그때 B를 안 좋게 보게 된 것도 있지. 솔직히 부담스럽다는 이야기가- (그렇게 욕할 정도로 기분 나쁜 일은 아니잖아)
B: (다급하게 말을 끊으며) 그렇지. 그렇게 얘기했으면 이상하게 보이.. 이상한 거지. 그건.
그는 ‘이상하게 보이겠지’라고 말하려다가 ‘이상한 거지’라고 조심스럽게 단어를 변경했다.
이 대화 내내 B는 ‘~보인다’ 혹은 ‘~들렸다’라는 말에 과도하게 신경 쓰고 있었다.
혼자만의 세계에서 이 두 가지 서술어에 큰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듣는 사람은 그 용어에 가치도 매기지 않았는데 말이다.
그런데 B의 세계에서는 이 표현을 쓰는 게 진짜 의도를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이었다.
나는 잘못하지 않았어.
B는 지금 이런 말을 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대놓고 말한다면 반격당할 확률이 높다.
그럼 또 방어를 하고, 상대의 말에 상처를 받을 것이다.
이런 상황을 최대한 피해보고 싶지만 동시에 억울하다고 주장하고 싶다.
그래서 우회로를 택했다.
‘상대의 의견에 동조하는 척하면서 뉘앙스만 살짝 바꾸기’ 스킬을 썼던 것이다.
B의 관점에서는 '이상하게 보인다'는 표현과 '이상한 거지'라는 표현은 서로 반대되는 의미다.
'이상하게 보인다'라고 표현하면 '원래 이상한 게 아닌데 상대에게만 그렇게 보였다'는 뜻으로 말하는 거다.
반면에 '이상한 거지'라고 표현하면 정말 이상한 거다.
그래서 그는 말을 그 서술어에 주목하느라 말을 더 조심스럽게 했다.
A: 부담스럽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이야 나쁘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그렇게 목회자가-
B: (또 다시 말을 급하게 끊으며) 이 이야기가 지금 또 해야 될 이야기는 아니잖아.
B가 이런 대화를 피하고 싶은 이유는 자신에게 불리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대신 그런 말을 할 시점은 아니라고 방어했다.
그런데 이 말은 궤변이다.
A가 이야기를 또 꺼낸 건 맞다.
하지만 B가 패드립한 적이 없다고 말한 게 배경이다.
만약 그가 양심껏 인정하고, 자숙하는 시늉이라고 했다면 다시는 안 나올 내용이었다.
그리고 진위여부를 가리려면 다시 같은 주제로 말할 수밖에 없다.
또 이야기를 해야만 B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칠 기회가 생기는 거다.
그건 잘못한 사람에게도 좋은 것이다.
자연스러운 일인데 B가 당연한 상황을 못 받아들이는 거다.
그리고 그는 왜 그러면 안 되는지 부연설명을 못했다.
대신 이 시점부터 눈에 띄게 초조해했다.
A: 목화자가 기분이 나쁘라고-
B: 이 이야기는 지난 통화 때도 했잖아.
맞다.
지난번 통화 때 말한 내용이다.
하지만 이 상황을 입체적으로 보면 A는 같은 말을 한 게 아니다.
지난번에 B가 말한 것들 중에 틀린 부분이 있다고 설명한 거다.
소주제만 같을 뿐 이야기의 방향이 다르다.
B는 A의 기억이 섞여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그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었다.
사실이 아니라는 걸 B도 알아야 한다.
그러려면 말해야 한다.
나르시시스트는 타당한 근거가 없는 주장을 종종 펼친다.
논리적이지 못한 주장을 할 때가 많다.
이런 경우 보통 그가 비판을 받을 때가 많다.
A: 나쁘다고-
B: 어. 맞아.
A: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B: 그게-
A: 그리고 B는 받아친 것도 아니고 기분이 전혀 안 나빴다고 했지만 사실 받아친 것은 맞지. 그 지점도 자꾸 아니라고 하는데-
B: 아니라고 한 게 아니라-
B는 내가 받아친 적 없다고 주장했었다.
그런데 받아친 적이 없다고 말한 게 아니란다.
이건 B의 말실수이다.
지금 저렇게 말하면 본인이 한 말을 본인이 뒤집는 게 된다.
방금 본인이 한 말을 제대로 잊었을까.
아니다.
B는 단지 A의 말에 막무가내로 아니라고 하는 경향이 있었다.
물론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슷하게 대우했을 것이다.
B는 A의 말을 일단 부정하고 본다.
그다음 A가 했던 말을 똑같이 따라 한다.
이는 B가 공동체 속에서 서열을 앞자리를 차지하려고 선택한 방법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의 말을 의도적으로 부정하면 상대가 궁지에 몰릴 거라고 그는 예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부정형 언변은 건강하지 못하다.
그는 앞뒤를 재지 않고, 일단 부정하기 때문에 나중에 논리 정연하게 이야기를 풀지 못하면 오히려 궁지에 몰릴 수 있다.
약간의 리스크가 있다는 거다.
그리고 만약 그 뒤에 한 말이 타당성이 없다면 권위가 더 내려간다.
말의 맥락과 상관없이 부정적으로 나오면 시비를 거는 것밖에 안 된다.
그럼 사람들이 B의 사고체계를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발언권의 입지가 줄어든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는 애초에 권위가 없었다.
스스로에게 권위를 부여한 것뿐이다.
B: 어쨌든 네가 그 상황에 있지 않았고, 이야기가 오고 가는 중간에서 정확하게 음...
B는 아니라고 말을 하다가 멈칫했다.
그는 말을 얼버무리더니 다시 마법의 역접어 ‘어쨌든’을 꺼내 들었다.
아까 호탕하게 웃으면서 받아친 게 아니라고 말했던 순간이 떠올라버린 걸까.
본인이 한 말을 본인이 틀렸다고 자백한 게 될까 봐 그는 신경을 썼다.
그리고 A가 그 상황에 없어서 모른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은 B가 목회자에게 들어야 할 말이다.
군대에 있을 때 외면한 사람들이 무슨 심정으로 그랬는지 알 것 같다면서?
그것이야말로 그가 어떻게 아느냐는 거다.
A: 중간이랑 상관이 없고-
B: 어쨌든 그렇게 네가 들었고 생각했다. 그러면 그렇게 생각했겠지.
다시 역접어의 등장이다.
그는 할 말이 없으면 화제를 돌린다.
지시대명사를 뱉어낸다.
대충 마무리지으려고 하는 것이다.
A: 그러니까 포인트는 B가 솔직하지 않은 것 같아.
B: 어, 그래.
A: 예를 들면 부담스럽다는 얘기도 받아친 게 맞지. 입장을 바꿔서 B가 누군가에게 부담스럽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그 상대가 ‘어, 나랑 똑같네. 저도 B가 부담스러워.’라고 이야기를 하면 의도가 있다고 느껴지지. 의도가 있는 거라고 느끼지.
B: 받아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고 했잖아. 이 이야기를 왜 또 해야 돼?
정황상 B가 교역자를 공격하려고 부담스럽다고 말한 것 맞다.
B는 의도가 없다고 말하지는 못했다.
다만 앵무새처럼 받아치려는 건 아니라고 했다.
그도 무척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나르시시스트의 세계에서는 남을 공격해서 우위를 얻는 게 당연하다.
도덕적 역치가 낮아서 생존을 위해서라면 가릴 게 없다.
그런데 누군가가 지금 그게 잘못됐다고 비판했다.
B는 잘못한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말로는 이상하다고 어쩔 수 없이 인정했지만 마음으로는 인정을 못한 거다.
늘 살아왔던 익숙한 방식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때 일이 많았다고는 하지만 다른 사람들도 바쁘다.
그러니까 유별나게 B만 바빴던 건 아니다.
선교지에 오기 부담스러웠다는 것은 선교에 참여한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배려하지 못한 말일 수도 있다.
다른 사람들도 다 마찬가지인데 말이다.
A: 아니. B가 솔직하게 이야기를 안 하는 것 같아.
B: 단기선교에 교회 청년들만 온 게 아니고 간사가 따라와서 부담스럽다고 이야기를 했다고 목사님이.
그건 아까부터 했던 말이다.
A는 대화의 맥락이 엇나간다고 판단하고 되물었다.
A: 그래서?
B: 어?
B가 움찔했다.
그래, 한번 더 말해 봐.
어떻게 말하나 어디 보자.
A: (판을 깔아줄 테니 말을 이어서 해) 네.
B: 그래서 우리가 따라온 것에 대해서 부담스럽다고 이야기해서 사실 우리도 사실 일정이 많아서 여기 오는 게 부담스러웠는데. 우리도 상황 때문에 얘들이 또 오자고 했으니까. 그래서 그것 때문에 우리도 왔다고 이야기를 한 거라고.
뭐, 의미 없는 말이다.
저 상황을 전제로 지금 다투는 거다.
전제를 강조하면 대화의 속도가 잘 안 붙는다.
한편으로는 B가 나름대로 자기 보호를 하는 거다.
상황상 나는 어쩔 수 없이 참여했는데 환영받지 못했던 피해자라는 주장이다.
나는 잘못한 게 없고, 말을 나쁘게 했지만 목회자 때문이라는 변명이다.
A: 네. (방금 내가 상황설명을 다 한걸 반복하기만 하네) 목사님이 무안했겠네.
B: 그러니까 나는 네가 부담스러워 나도 네가 부담스러워 이 이야기가 아니었다고.
B는 무안했겠다는 말에는 반응하지 않았다.
대신 궤변을 늘어놓았다.
너도 부담스럽니 나도 부담스럽다 이런 맥락으로 말한 게 맞다.
이제 와서 아니라고 말하다니.
사실 B도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하게 모른다.
저 말을 다시 풀면 이런 말이다.
나는 목회자가 부담스럽다고 말해서 상처받았어.
그래서 나도 부담스럽다고 말했어.
그런데 기분 나빠서 부담스럽다고 한 건 절대 아니야.
그래도 기분 나빠서 말한 건 맞아.
이런 말이니까 궤변이라는 거다.
A: 그러니까 예를 든 거고. 부담스럽다 나도 같은-
B: 그런데 이 이야기를 지금 너랑 왜 해야 하냐고.
B는 이 주제를 그만 말하자고 애걸복걸했다.
저렇게 노심초사하는 것은 이것이 그의 약점이기 때문이다.
본인도 저 말한 게 이상하다고 인정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아무 의도 없이 말했다고 한다는 건 본인도 좀 이상한 거다.
A: 같은 마음이었다.. 그러니까 이 지점도-
B: 어, 내가 인간쓰레기다. 됐어?
B는 자신을 인간쓰레기라고 지칭했다.
너무 극단적인 표현이다.
평소 남들에게 너무 과하다는 표현을 써왔던 그가 이번엔 너무 과하다.
A는 그 정도의 강도로 말하지도 않았다.
이는 현재 상황에서 B가 느끼는 두려움을 반영한다.
그는 스스로 고칠 점만 보는 사람이라고 자화자찬을 했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비판받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 역시 방금 쓰레기 발언과 근원지가 같다.
그는 자신이 못났다는 말을 듣는 게 두려우니 오히려 더 기세등등하게 저런 말을 해버리는 거다.
나르시시스트는 두려움에 쉽게 굴복한다.
두려움을 병적인 방법으로 해소하는 것이다.
오히려 그 두려움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자신을 코스프레하는 것이다.
비판받는 게 두려우니까 비판을 잘하는 사람인 척한다.
도덕적으로 나쁜 사람이 되는 게 두려우니까 스스로를 인간쓰레기라고 말해버린다.
이개 굉장히 꼬이고 꼬인 심리다.
사실 나르시시스트의 마음 상태가 꼬여 있다.
그는 도무지 그 감정을 풀 생각을 하지를 못한다.
B는 잘못한 거라고 인정하면 된다.
말실수한 거라고 시인하면 된다.
가족 이야기한 것은 과한 표현이었다고 깔끔하게 인정하면 끝난다.
하지만 그는 그걸 못하고 지지부진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나르시시스트는 잘못했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잘못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상하지만 이상한 게 아니라고 주장한다.
내가 너를 우긴다고 말한 것은 맞지만 우긴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고 주장한다.
내가 너에게 못된 말을 했지만 못된 의도로 말한 건 아니라고 주장한다.
다 이런 식이다.
한마디로 궤변이다.
그러니 나르시시스트와 다툼을 할 때는 이미 그의 궤변을 예상해 두는 게 편하다.
그가 반성한다거나 죄를 뉘우친다거나 그런 상황을 기대할 이유는 없다.
나르시시스트의 이상한 심리가 마구 튀어나올 뿐이니까 말이다.
나르시시스트는 궁지에 몰렸을 때 이렇게 소리칠지 모른다.
그래, 내가 인간쓰레기다, 됐냐?
이는 그가 가장 듣기 두려워하는 말이기도 하다.
네가 별로라는 평가 말이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했을 때 나르시시스트는 이성을 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