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시스트의 수동공격 파악하기

나르시시스트는 희생양을 수동공격해서 자존감을 얻는다

입장과 상황에 따라 누구든지 나르시시스트처럼 행동할 수 있다.


화창한 주말의 어느 날이었다.

시계바늘이 유난히 느리게 가는 듯한 오전 시간대.


A의 핸드폰 액정화면에 네모난 말풍선이 둥실 떠올랐다.

발신인은 낯설지 않았다.

그는 전 직장동료 B였다.


[잘 지내?]


그동안 개인적으로 연락하던 사이는 아니었다.

B는 이전 회사의 같은 팀이던 언니다.

A보다 몇 해 정도 늦게 들어왔지만 B는 반 년을 채우지 않고, 이직을 선택했다.

이별회를 하고, 이후 별다른 소식은 들은 바 없었다.

아, 한 번 연락온 적은 있었다.

B가 다시 이직한 회사에서 구인을 하는데 오겠냐는 전화가 왔었다.

A는 집과 회사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거절했었지만.


같은 팀이던 시절, A와 B의 관계는 순탄했다.

B는 성격이 무난해 보였고, 사람들과도 두루두루 잘 어울리는 듯했다.

이미 나이도 있고, 사회생활을 해온 경력이 있어서인지 회사에 빠르게 적응하고, 일도 곧잘 처리하곤 했다.


B가 A를 어떤 인물로 봤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그런데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B는 A가 신기하다는 듯 이렇게 말한 적은 있었다.


"여기 와서 놀랐던 게 A가 신경질을 한 번도 안 내는 거야."


그 말을 듣고, A는 속으로 무척 놀랐다.

B에게 신경질을 낸다는 가능성 자체를 염두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무엇을 근거로 감정적인 대우를 받을까 봐 염려했을까.


아무 일도 없었는데 특정한 상황을 염려하는 건, 현재가 아닌 과거에 그 원인이 있을 때가 다수다.

보통 앞으로 일어날 일을 걱정하는 근원은 과거에 받은 상처나 마음에 각인된 트라우마다.


B는 여러 회사를 전전하며 다양한 군상을 경험했다.

그리고 입사할 때마다 종종 기존 직원들의 텃세에 한동안 시달렸다.

난데없는 막말과 하대로 자존심에 종종 스크래치가 났다.

사회라는 정글에서 나이를 떠나 사회적 지위로 제단 당하기 일쑤였다.

먹고 먹히는 관계의 먹이사슬 속에서 대다수의 직장인들이 그러하듯 그 또한 인격체로 존중받지 못하고, 단체의 부품으로 대상화되곤 했다.

하지만 그런 자연스러운 소원마저 간간이 간과당했을 것이다.


A는 B보다 이 회사를 더 오래 다녔다는 이유로 인수인계를 맡았다.

B보다 동생이지만 본의 아니게 가르치는 입장에 놓인 것이다.

물론 A가 B의 선배 격의 위치는 아니었다.

이 과정에서도 그리고 이후에도 B의 말처럼 A는 감정적인 분출을 한 적이 없다.

그럴 생각이 없었고, 오히려 팀에 B가 와서 좋아했는데.

잘 지내려고 노력해왔지만, B는 과거의 상처를 떠올리며 초반에 주춤했던 것 같다.


B는 상대의 웃는 얼굴을 보고서도, 같이 밥을 먹고, 얘기를 즐겁게 나누면서도경계심을 늦추지 못했다.

하지만 B의 기대(?)와 달리 A의 태도는 지속적이고, 일관적이었다.

그래서 나중에 마음의 빗장을 어느 정도 열어서 A가 좀 편해졌을지도 모르겠다.


5개월 정도 지난 시점에서 B는 갑작스럽게 이직을 통보했다.


사실 A는 예상했던 일이었다.


초반부터 B는 팀원들만 들어가 있는 단톡방에서 회사의 불만사항을 간간이 토로했다.

그때 A는 그 대화에 일절 끼어들지 않았다.

대신 끝없이 올라오는 말풍선들을 말없이 관망했다.

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일을 많이 시킨다는 종류의 불만이었던 것 같다.


B는 비싼 물품을 구매해서 회사에 청구한 적이 있었다.

회사 일을 할 때 필요하다면서.

그리고 덧붙였다.

여기에서 뽑아먹을 건 최대한 뽑아먹어야겠다고.


A는 그 말이 살짝 낯설었다.

업무를 잘 수행하는 데 필요한 물건을 구매하고, 그 값을 청구하는 건 합리적이다.

다만 ’뽑아먹는다 ‘라는 표현은 듣기 민망했다.

퇴사하고 그가 그 물품을 두고 갔는지 가져갔는지는 모른다.

그래도 아마 두고 갔겠지?


어느 날, B는 오전 연차를 냈다.

그리고 점심시간에 맞춰 면접을 보고 돌아왔다.

합격 이후에 소식을 전했다.

사람들의 축하를 받으며 그는 홀연히 회사를 떠났다.

이후로는 연락하지는 않았다.

그저 잘 지내겠거니 하면서 가끔 떠올릴 뿐이었다.


[잘 지내?]


연락 없던 전 직장 동료가 갑자기 이렇게 인사하는 건 보통 용건을 말하기 위한 쿠션어다.

예상대로 B는 안부만 궁금해한 건 아니었다.

그는 통상적인 인사치레를 서둘러 마쳤다.

그리고 연달아 문자를 보냈다.

[네가 전 직장에서 겪었던 일 말이야.

내 글에 써도 될까?

물론 이니셜로 나갈 거라서 네가 누군지는 사람들이 모를 거야.]


글쓰기 플랫폼에서 B는 직장인의 애환을 담은 에세이를 연재하고 있었다.

모 신문사에서는 직장의 인권침해에 관한 글을 기고 중이었다.

그가 이 분야에서 활동을 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몇 년 전, B는 회사에서 인권을 침해당하는 일을 겪었다.

그때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회사에서 입지를 잃었다는 것은 자본주의사회에서 생존을 위협받는 일이다.

이후 그는 투지의 용사로 거듭나려고 나름대로 분투했다.

비영리단체에서 직지장인의 인권과 권리에 관한 활동도 시작했다.

글쓰기는 그 활동의 연장선상이었다.


A는 B의 제안을 거절하고 싶었다.

부담스러웠다.

얼마 전, 건강에 이상이 생겨 직장을 그만뒀었다.

좋은 일도 아닌데 글까지 써서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것도 남의 글에.


하지만 단박에 거절한다면, 용기를 낸 B에게 상처를 줄 것만 같았다.

A는 살짝 고민하다가 제안을 수락하고 말았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까지 배려하지 않아도 괜찮을 일이다.

어차피 부탁하는 사람은 거절당할 가능성을 고려한다.

B는 이미 여러 명의 후보를 골라뒀고, 그중에 한 명이 A일 뿐이었다.

거절해도 또 다른 후보에게 연락하면 그만일 터이다.

A는 원래 거절을 잘하는 성격이 아니다.

특히 친한 사이라면 되도록 부탁을 들어주는 게 마음이 더 편했다.

거절한다면 사이가 서먹해질 것 같았다.

B와의 관계가 더 소중했다, 그때는.

B의 관점에서는 A가 흔쾌히 수락한 걸로 보일 것이다.

그는 데드라인에 맞춰서 글을 보내줬다.

다음 날이 밝았다.

B가 카톡을 보내왔다.

벌써 글을 다 썼단다.

한 번 봐달라며 그는 플랫폼 링크까지 보냈다.

친절한 인간 알람 역할을 자처한 그는 결연한 의지가 담긴 메시지를 덧붙였다.


[우리 더 이상 참지 말자]


A는 그 문자를 읽고, 살짝 당황스러웠다.

물론 그 메시지의 의도는 나쁘지 않았다.

대략 부당한 대우에 항의하자는 취지는 공감한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들었다.

데면데면하게 지내던 지인에게 예고 없이 옷을 선물 받은 것 같았다.

물론 선물을 받은 입장에서는 고맙다고 해야 마땅하다.

그런데 그 옷이 본인이 추구하는 스타일이 아니라면?

옷 자체는 예쁘고, 비싸지만 한 번도 입어본 적이 없는 스타일이고 심지어 사이즈까지 안 맞는다면?

옷도 좋고, 축하한다는 의미도 좋은데, 결론적으로 내가 입기 불편하다면?


물론 고맙다.

하지만 요청하지 않았고, 원하지도 않았던 물질 공세라 당황스럽다.

교환하거나 환불해야 하는 과정이 추가돼 더욱더 곤혹스럽다.

떨떠름하다.


섣부르게 조언하는 사람들은 조언을 다짜고짜 듣는 입장에서 당황스러워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그리고 사실 조언의 내용은 조언하는 당사자의 내면을 반영한다.

충고는 타인에게 하는 말이지만 결국 자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여러 가지 사태를 겪으며 B는 깨달았던 것이다.

참기만 하면 안 된다는 걸.

이 말은 그동안 부당한 일에 그가 많이 참았지만 딱히 득을 보지 못했다는 걸 암시한다.


사회는 평등하지 못하다.

사람들은 편견에 쉽게 휘둘린다.

서열을 매겨서 사람들을 차별하고, 차별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부당한 일로 가득하지만 부당함에 저항하는 이들은 지극히 소수다.

대다수의 직장인들은 사회적 위치상 혹은 입장상 불합리한 일을 당해도 소리를 내지 못할 때가 많다.


그동안 B는 불합리한 대우에도 반기를 쉽게 들지 못했다.

뒤에서 동료들끼리 얘기하며 마음을 풀거나 조용히 일기를 썼다.

사회생활은 원래 그런 거라며 스스로를 위안했겠지.

무조건 인내하는 게 어른스럽다고 여기며.


그런데 웬 걸.

솔직한 마음을 꾹꾹 눌렀더니 결과가 참담했다.

노동자로서 모욕적인 대우를 받고, 큰 상처를 받게 됐다.

그리고 뒤늦게 깨달았다.

회사의 부품이었다는 걸 말이다.

B는 진심을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그는 냉혹한 현실에 무력감을 느꼈다.


[더 이상 참지 말자.]


이 말은 B가 과거의 자신에게 들려주고 싶은 얘기였다.


이전에도 B는 이런저런 일이 생기면 위로를 건네거나 조언을 했다.

그런데 A는 B의 말이 와닿지 않았다.

당시 그 이유를 설명하기 힘들었다.


B는 평범하고 잔잔한 성향을 지닌 보통 사람이다.

그에게 특별한 문제가 있어 거부감을 느낀 게 아니었다.

다만 진정성에 의심이 올라왔다.

나의 마음에 진심으로 공감하지 못하는 듯했다.

표면적으로 반응하는 것 같았다.

사회생활 차원에서 적절한 리액션을 하는 쪽에 가까워 보였다.


물론 타인의 입장에 진짜 공감하기란 쉽지 않다.

각자 삶이 있는데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건 의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편견의 장벽을 제거하고, 중립적 입장에서 경청하는 것도 쉽지 않다.


좌우지간 B는 과거의 일이 큰 트라우마로 남은 듯했다.

노동자로서 권리를 보호받지 못하는 건 마음 아픈 일이다.


A는 글을 죽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아쉬움을 느꼈다.

A의 입장을 살짝 왜곡된 관점으로 풀어놓았던 것이다.

수정을 제안하고 싶었다.

하지만 곧 단념했다.

직장에서 봐온 B의 태도 때문이었다.

그는 정당한 피드백도 감정적으로 해석할 것만 같았다.


A는 계속 글을 읽어 내려갔다.

사례글 위에 파스텔 톤의 일러스트도 살폈다.

하얀 옷을 입은 소녀가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무심결에 삽화 밑에 작은 글자로 적힌 문구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런 문장이 써져 있었던 것이다.


[후배들아, 더 이상 참지 말자.]


참지 말자는 건 방금 B가 보낸 문자랑 같은 내용이었다.

그리고 후배들?

A는 B의 후배가 아니다.

선배도 아니다.

B도 같은 입장이다.


한국 사회에서 호칭은 뇌관과 같다.


자신보다 나이 많은 대상에게 'OO 씨'라고 호칭하지 않는다.

그런 호칭은 상대적으로 나이가 적은 대상에게만 쓰는 게 사회적 통념이다.

연락처와 이메일을 기입할 때도 나이와 직급을 고려해 순서를 정한다.

그런 걸로도 사람들은 본인의 위치를 가늠한다.

B도 사회성이 있기에 호칭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있다.

'후배'라고 지칭한 이들은 구체적으로 누구였을까.

일러스트 위치로 미루어 추측할 수 있었다.


'참지 말자'는 결단 따위는 좋다.

참기만 할 필요 없다.

분노해야 할 때도 있으니까 말이다.

A도 안다.


그런데 저 말을 굳이 후배에게만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B는 '후배들'이라고 대상을 콕 집었다.

의도가 없었을까, 과연?


A는 B가 도발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 호칭을 보고, B를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던 것이다.


C 회사에 다닐 때, 기존 직원들이 나가고 새로운 인물들이 들어오는 시기가 있었다.

마지막 열차 칸에 오른 사람이 B였다.


B는 기혼자였다.

그는 남편을 따라 서울에서 포항으로 터전을 옮겼었다.

그리고 작년에 남편이 본사로 올라오면서 서울로 돌아왔던 것이다.


B는 팀에서 연장자였다.

A는 반가웠다.

언니라서 든든하달까.


그런데 입사한 날에 B의 집에 안 좋은 일이 생겼다.

그는 부득이하게 며칠간 자리를 비워야 했다.

그래서 3일 후에 A가 별도로 인수인계를 하게 됐던 것이다.

그때 에피소드가 발생했다.


A는 호칭정리를 위해 물었다.

“혹시 저를 뭐라고 부르실 건가요?”


A는 호칭을 정해달라고 요청했다.

B의 판단에 전적으로 따르겠다는 의미였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인수인계를 하려니 조심스러웠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B의 안색이 변했다.

그는 좁은 어깨를 웅크렸다.

고개를 땅으로 떨궜다.

상대의 눈도 마두 치지 못했다.

누가 봐도 위축된 자세였다.

B는 뜸을 들이다 속삭였다.

“선배라고...”

목소리가 땅바닥에 데구루루 떨어졌다.


A는 당황했다.

경직된 분위기를 예상하지 않았다.

연장자에게 호칭을 정해달라고 말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 말은 나를 선배라고 부르라는 유도신문으로 둔갑해 버렸다.

B는 A가 서열을 정리하려고 기싸움을 건다고 해석했다.


B는 생각했겠지.

'내가 사회생활 몇 년 차인데.

너 같은 사람을 한두 번 본 줄 알아?

조심스럽게 얘기하면 의도를 모를까 봐?'


A는 상황이 묘하게 비틀리는 걸 알았다.

수습해야 할지 넘겨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원래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전달됐다는 걸 설명하기 힘들었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아, 저를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그런데 분위기상 이 말도 선배라고 불러야 마땅한데 선심 써서 이름을 부르라고 지시하는 게 돼버렸다.

A의 너그러움(?)으로 B는 선배(?)를 이름으로 부르는 걸 허락(?) 받은 셈이었다.


이 팀은 서열을 가르는 분위기가 없었다.

모두 프리랜서다.

얽힌 이해관계도 없다.

B는 프리하고 또 프리한 분위기를 아직 몰랐다.


B의 오해는 이전 사회생활에서 겪었던 상처를 반영한 결과였다.


B는 라디오 팀에서 메인작가로 일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고민 끝에 그 자리를 포기했다.

조건 때문이었다.


입봉 하자마자 자신의 글을 쓰는 구조가 아니었다.

메인작가의 보조 역할을 일정 기간 감당하면 자리를 내주는 구조였다.

그는 아랫사람의 포지션을 수행해야 했다.

선배인 메인작가에게 하대를 받을 각오가 필요했던 것이다.

나이도 있는데 그런 걸 견디고 싶지 않았다.

사회생활 한 두 번 해보냐는 거다.

고생길이 훤히 그려지는 자리에 차마 들어가기가 힘들었다.

라디오를 좋아하는 그에게 두고두고 아쉬운 결정이었다.


자신의 위치를 감안해 냉대를 예상한 것은 B도 서열의 역학관계에 익숙하다는 거다.

서열의 거미줄에 걸려 모욕적이고, 불합리한 일을 당해왔다는 뜻이기도 하다.


B는 A의 직설적인 말을 우회적인 설의법으로 인지했다.

그리고 그게 트리거가 돼 손톱만 한 권력으로 상처 줬던 이들을 떠올렸다.

과거의 상처를 현재 상황에 덧씌워 저의를 오독했던 것이다.


A는 속내를 자세하게 말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으면 남은 모를 텐데 말이다.


B는 A를 '후배'라고 불렀다.

B의 인식에서 여전히 A는 선배라는 의미다.

그는 텍스트상으로라도 선배를 후배라고 불렀다.

그는 통쾌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왕 원하는 호칭으로 부를 거면, 누구나 대번에 알아볼 수 있게 대문짝만 한 글자로 적어놓을 것이지, 왜 작디작은 글자로 적었을까.

B의 타고난 성격이 반영된 결과일 것이다.

B는 스스로를 '약자'의 프레임으로만 바라봤다.

더 이상 참지 말자는 건 자신보다 상대적으로 강자인 대상에게 할 말을 하자는 취지였다.

선배를 후배로 부른 자신처럼 말이다.


A는 뭘 얻으려고 청탁을 들어준 게 아니었다.

다만 철저하게 정에 의해서 부탁을 들어준 것 뿐이었다.

하지만 B는 아니었다.

그는 뒤늦게나마 나름대로 억울함을 하소연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왠지 자신이 밀린 것만 같았던 그 놈의 서열을 정리하고 싶어 했다.

B는 서열을 가르는 게 싫으면서도 정작 위에 있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친절함을 가장해 접근했다.

그리고 목적을 달성하고, 가면을 슬며시 벗은 뒤 안면을 확 바꿨다.

상대의 선의를 이용한 셈이다.

어리석은 B 같으니라고.


그런데 A는 큰 배신감을 느끼지 않았다.

C 회사에서 B가 보인 행실을 생각하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팀 회식 때는 더치페이를 했다.

한 명이 전체 금액을 계산하면 다른 사람들이 송금했다.

그런데 B는 앞장서서 계산한 적이 한 번도 없다.

A와 D만 번갈아가면서 결재했다.


더치페이니까 누가 내든 결과론적으로 상관없다.

하지만 A는 B가 빼는 듯한 태도가 신경 쓰였다.

그는 다른 사람이 수고하길 바라는 듯했다.

회식 자체는 빼지는 않는다.

그런데 계산하는 순간만큼은 소극적이다.

계산대에서 몸이 멀리 떨어져 있던 모습이 살짝 얄미웠다면 그가 서운하려나.


그리고 돈을 내는 방식도 마음에 걸렸다.

이왕이면 돈을 받는 입장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게 맞다.

하지만 B는 A에게 특정 앱을 깔라고 요구했다.

B가 즐겨 사용하는 앱이었다.

A는 앱을 깔고, 회원가입까지 하고 나서야 돈을 돌려받을 수 있었다.


언젠가 다른 팀 사람들과 회식한 적이 있다.

공교롭게도 A가 앉은자리의 맞은편에 아무도 없었다.

A 옆에 앉은 E는 B에게 한 칸만 옆으로 가라고 말했다.


그런데 B는 A와 E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고,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었다.

안 가겠다는 뜻으로 말이다.

B가 앉은 위치는 다른 사람들과 가까웠다.

자리를 옮기면 살짝 멀어지는 감은 있었다.

그래도 겨우 한 칸인데.

B는 그마저도 배려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소소한 상황에서 B는 이기적인 선택을 반복했다.


회사 사람들과 점심을 먹으러 중화요리점에 간 적이 있다.

메인 요리를 먹고서 각각 단품을 시켜 먹기로 했다.

그런데 B는 배가 불렀었는지 A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우리 마파두부 하나 시켜서 나눠 먹을래?"


A는 당황했다.

잘못된 상황 같았다.


일단 B는 마파두부를 먹자고 물어보기 전에 한 가지 음식을 나눠먹으면 어떨지 물어봤어야 했다.

그리고 상대가 그렇게 하자는 전제 하에 어떤 메뉴를 먹고 싶은지 허례허식으로나마 물어보는 게 당연했다.

합의의 두 단계를 건너뛰고, 무작정 마파두부를 먹자니.


A는 난처해했다.


마침 맞은편에 앉은 상사가 A의 표정을 보고, 웃으면서 한 마디 했다.

"표정이 안 좋은데?"


그 말을 듣고 나서야 B는 말했다.

"아, 미안."


그런데 B는 A의 선택이 불만이었나 보다.


A는 짬뽕을 시켰었다.

맛있었지만 살짝 남겼다.

그걸 본 B가 회사로 돌아가는 길에 이렇게 말하는 거다.


"거 봐, 마파두부 시킬 걸 그랬지?"


B는 A를 마음속으로 배척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저를 뭐라고 부르실 건가요?"


이렇게 질문한 선배(?)를 경계했을 것이다.

하지만 감정을 드러내지는 못했겠지.

그래서 결정적인 순간에 자꾸 자기중심적인 모습을 드러냈을 수 있다.


그렇다고 B는 뾰족하게 굴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A는 언뜻언뜻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B는 A가 나이도 적은데, 선배라고 인식하는 것 자체가 불편했을 것이다.

A는 전혀 몰랐지만.

어쩌면 B의 속내가 전달됐던 것일까.


나르시시스트도 B와 비슷한 행동 패턴을 보인다.

그는 희생양을 수동공격한다.

선의의 얼굴을 하고, 잽을 날린다.

공격하지 않은 척 얼른 주먹을 뒤로 감추는 것이다.

이는 오히려 희생양이 자신을 공격당한다고 인지하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상대가 나쁜 의도를 숨긴다고 믿을 때가 많다.


C는 종종 말했다.


“난 고칠 점만 봐.”

“나는 성격이 비판적이야.”


처음 듣는 말이었다.

물론 이후에도 저렇게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얼마 안 가서 C에게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았다.

그가 납득하기 힘든 급발진을 하면서 수시로 쏘아붙였던 것이다.


“네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A는 이런 질문을 처음 받아봤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방금 다 한 건데.

B야말로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되묻는 것인지 궁금했다.


C는 A가 유도신문을 했다고 주장했다.

누군가가 A를 좋아한다고 C가 답하길 기대했다고 말이다.

도대체 어느 지점에서?

A는 B의 뜬금포 같은 추측이 황당하기만 했다.


나중에 보니 C는 나름대로 자신만의 해석의 틀이 있었다.

논리나 이성 쪽이 아니었다.

상대의 저의를 툭하면 의심하는 쪽에 가까웠다.

그런데 의심의 근거를 들어보면 다 터무니없거나 허무맹랑한 것들이 많았다.

망상에 가까울 정도로 과도하게 추측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C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에도 C의 의심은 계속됐다.

A는 아주 작고 사소한 일까지도 일일이 의심을 받아야 했다.

그가 무슨 말만 하면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그리고 상황을 파악했다는 뉘앙스로 따졌다.


"너는 객관적으로 말하는 것 같지만 사실 걔가 싫어서 그러는 것 아니니?"

"네가 걔한테 그렇게 행동한 건 사실 다른 이유 때문이잖아?"


네가 말하는 이유는 사실 진짜가 아니잖아?

난 속지 않을 거야.

너의 이면을 알거든.

간접적으로 이런 말을 던지고 있었다.

C가 고칠 점만 본다고 주장해 왔지만 객관적 근거가 없을 때가 많았다.

그는 아무 때나 상대를 의심하는 편집증적 증상을 앓았던 것이다.


하지만 C가 성격적 결함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는 왜곡된 렌즈로 세상을 해석했다.

그리고 그 세상이 전부라고 확신했다.

또 자신만의 감정적인 확신을 남들에게 강요했다.

이를 퍼트리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상대가 아니라고 말할수록 그는 확신을 강화시켰다.


사실 A의 얘기에 등장한 인물은 C와 사이가 안 좋았다.

그는 C와 대립각을 세운 적이 있었다.

그 일로 한참을 힘들어했던 전력이 있었다.

이것도 C의 망상에 한몫했으려나.


나르시시스트의 공격은 사실 방어에 가깝다.

B가 A를 선배라고 인식했지만 의도적으로 후배로 불렀다.

뒤집으면 B가 A를 선배라고 인식한다는 사실을 읽을 수 있다.

이것이 방어다.


수동공격하는 나르시시스트의 저의를 읽는 방식도 이런 맥락과 흡사하다.

희생양을 하대하고 비난하는 태도를 뒤집어 보자.


그는 위로하는 척하면서 깎아내린다.

안타까워하고 말하면서 은근히 능력을 폄훼한다.


나르시시스트가 적을 대할 때 저런 술수를 쓴다.

물리쳐야 할 대상에게 인간은 경계심을 느낀다.

작은 움직임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대책을 마련한다.


나르시시스트는 공격당했다고 느낄 때가 많다.

나르시시스트의 무의식에서는 공격에 대한 걱정이 넘쳐난다.


나르시시스트는 서열을 확실하게 정할 때 수동공격을 시전 한다.

그는 타인을 동등하게 인식하는 사고방식이 없다.

그래서 우열을 가리려고 시비를 건다.


나르시시스트가 칭찬과 비난을 섞어 쓰는 것도 수동 공격의 일환이다.

그는 남을 띄워주는 척하면서 밑으로 깔아버린다.

겉으로는 희생양을 위해서 말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칭찬은 악의를 미화하는 위장술이다.


좋은 이미지를 챙기고 싶다.

동시에 상대를 공격하고 싶다.

이 두 가지 마음이 충돌할 때, 나르시시스트는 수동 공격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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