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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스트의 수동공격 파악하기

나르시시스트는 희생양을 수동공격해서 자존감을 얻는다

누구나 일시적으로 나르시시스트처럼 행동할 수 있다.


어느 날 A는 B의 문자를 받았다.

몇 년 만의 연락이었다.

[잘 지내?]


B는 전 직장의 동료다.

퇴사 이후 개인적으로 연락하는 사이는 아니었다.

느낌상 안부인사는 아닌 듯했다.

예상대로 그는 용건이 있었다.


B는 이직한 직장에서 안 좋은 일을 겪었다.

이후 인권과 권리에 관련된 활동을 하게 됐단다.  


그는 직장인의 애환을 담은 에세이를 글쓰기 플랫폼에서 연재하는 중이라고 운을 띄웠다.

그러면서 A가 회사에서 겪었던 일을 사례로 게재해도 되냐고 묻는 것이었다.  

이니셜로 표시할 거고, 너인 건 나만 아니까 괜찮다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단순히 허락만 구하는 건 아니었다.

B는 A가 손수 글을 써 주길 바랐다.

받은 글을 올리겠다는 취지였다.   


A는 솔직히 거절하고 싶었다.

그는 건강에 살짝 문제가 생겨 일을 그만뒀었다.  

좋은 일도 아닌데 굳이 글로 알려야 하나 싶었던 거다.

그것도 남의 글에 말이다.   


하지만 면전에서 거절하기가 민망했다.

마음이 불편하다며 단칼에 거절한다면 B는 상처를 받을 터였다.

A는 그게 싫었다.


그런데 B는 당연히 거절당할 가능성도 고려하지 않았을까.

만약을 대비해 몇몇 후보를 정해뒀을 것이다.

어차피 A가 거절해도 또 다른 후보에게 연락하면 그만이다.


A는 살짝 찜찜했지만 제안을 수락하고 말았다.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     


며칠 뒤 B에게 연락이 왔다.

드디어 글을 올렸단다.

그는 친절하게 플랫폼의 주소까지 보냈다.


그리고 덧붙였다.

[우리 더 이상 참지 말자]

결연한 의지가 담긴 문자였다.


그런데 A는 그 말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내가 그런 말을 들을 정도로 참았을까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B는 전 직장에서 겪은 일이 큰 트라우마로 남은 듯했다.   

노동자로서 권리를 보호받지 못한다는 게 마음 아픈 일이다.


꽤 긴 글에는 A 말고도 몇 명이 더 등장했다.


그런데 A는 글을 읽다가 무심코 고개를 갸웃거렸다.

A의 사례글 가까이에 파스텔 톤의 일러스트가 들어가 있었다.

하얀 옷을 입은 소녀가 창밖을 바라보는 평범한 그림이었다.

거기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싸함을 느낀 지점은 삽화 밑에 작은 글자로 적힌 설명란이었다.

거기에는 이런 문구가 써져 있었다.  

‘후배들아, 더 이상 참지 말자.‘


후배들?

A는 B의 후배가 아니다.

그렇다고 선배도 아니다.

물론 B도 같은 입장이다.


무엇보다 그 호칭을 보고 A는 B와 처음으로 만나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리고 아무래도 그때 B가 상처를 받았다고 판단했다.


전 회사에서 기존 사람들이 나가고, 새로운 사람이 들어오는 시기가 있었다.

가장 마지막에 들어온 사람이 B였다.


기혼자인 B는 포항에서 지내다가 남편의 이직으로 서울로 올라왔다.

그리고 A보다 몇 살 더 나이가 많았다.


A는 오히려 좋았다.  

든든한 느낌이었다.

내심 반가웠지만 감정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일단 A는 기존 팀원으로서 인수인계를 해야 했다.  

통성명부터 했다.

그리고 호칭정리를 하려고 물었다.

“혹시 저를 뭐라고 부르실 건가요?”


A의 의도는 B가 연장자이니 그의 판단에 전적으로 따르겠다는 거였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B의 안색이 변했다.

그는 어깨를 웅크렸다.   

고개를 땅으로 떨궜다.

A의 눈을 마두 치지 못했다.

누가 봐도 위축된 자세였다.  

이내 B는 속삭이듯이 말했다.

“선배라고...”

그의 목소리가 땅바닥에 데구루루 떨어졌다.


A는 당황했다.

이런 분위기를 예상하지 않았다.

나이가 더 많은 사람에게 호칭을 정해 달라는 요청이 나를 선배라고 부르라는 유도신문으로 둔갑해 버렸다.

그는 이 질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이면이 있다고 해석했다.


하지만 A는 상황이 묘하게 비틀리는 걸 알면서도 명확하게 해명하지를 못했다.

대신 이렇게 말했단다.

“아, 저를 이름으로 불러주세요."

그런데 이 말도 원래 선배라고 불러야 마땅한데 선심 써서 이름을 부르라고 지시하는 게 돼버렸다.

이렇게 일이 끝나버린 것이었다.


A의 너그러움(?)으로 B는 반말을 쓰고, 이름을 불러도 된다고 허락받은 모양새가 됐다.

B가 이 팀의 분위기를 모르고 있어서 벌어진 해프닝이었다.

딱히 서열이 없고, 서로 잘 지내면 그만이라는 암묵적 룰이 있는데 말이다.


이전에 B는 라디오 팀에서 작가로 일할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고민 끝에 그 자리를 포기했다.

조건 때문이었다.


그 자리는 내 글을 바로 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일정 기간 동안 메인작가의 보조 역할을 감당하면 기회가 주어지는 거였다.  

서열상 사람들의 하대와 구박을 예상하니 고사했던 것이다.

라디오를 좋아하는 그에게 두고두고 아쉬운 결정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위치 때문에 냉대를 예상한다는 것 자체가 서열의 역학관계를 익숙하게 생각한다는 거다.

서열이라는 거미줄에 걸려 모욕적이고 불합리한 일을 겪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B는 A와의 대화도 우열을 가르는 연장선상으로 생각했다.

A의 직선적인 질문을 우회적인 설의법으로 해석했다.

그게 트리거가 되어 손톱만 한 권력으로 자신에게 상처 줬던 사람들을 떠올렸던 것이다.

과거에 겪었던 사회생활을 현재 상황에 덧씌워 오독을 한 셈이다.   


말하지 않으면 상대는 잘 모른다.

A가 오해를 풀지 않았다.


그리고 이로써 A는 B의 마음을 확실하게 알았다.

아직도 B가 A를 선배로 생각한다는 걸 말이다.

그리고 지금도 후배인 본인(B)이 선배인 상대(A)에게 텍스트상으로라도 ‘후배’라고 불러봤다고 생각한다는 걸 말이다.

또 그걸 은근히 통쾌하게 느꼈다는 것도.

A는 본의 아니게 B의 세계에서 '선배'라는 정체성으로 규정되었다.


그럼 B는 A에게 받은 상처를 되갚아주려고 글을 청탁한 걸까.

아니면 글을 쓰다 보니 상처가 되살아나서 충동적으로 호칭을 바꿔 불렀나.

어떤 경우이든 둘 다 별로다.

특히 전자라면 B의 행동은 질이 나쁘다.


A는 B에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해서 요청에 응했던 거다.  

철저하게 사람 대 사람으로서 정에 의해 결정한 일이었다.

하지만 B는 서열을 정리하고 싶어서 A에게 친절하게 접근했고, 목적을 달성한 뒤에 태도를 바꿨다.

B는 A의 선의를 이용한 것이다.


A는 B가 그렇게까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회사에서 한 팀이었을 때 봤던 그의 몇 가지 행동 때문이었다.


팀에서 밥을 먹으면 더치페이를 한다.

한 명이 돈을 내면 나머지 사람들이 그에게 돈을 보내는 방식이었다.

그런데 B는 한 번도 계산대에서 먼저 계산을 한 적이 없다.

A와 D만 번갈아가면서 결재했다.


물론 결론적으로 더치페이니까 누가 내든 상관없다.

하지만 A가 신경을 쓰였던 것은 B의 마음이었다.

당연히 다른 사람이 수고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항상 계산대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있던 모습이 살짝 얄미웠었다.


그리고 이왕 돈을 보내줄 거면 돈을 받는 입장을 먼저 고려하는 게 맞다고 본다.

B는 A에게 돈을 보내주겠다며 특정 앱을 깔아보라고 했다.

단지 본인이 그 앱을 사용한다는 이유로.

그래서 A는 그 자리에서 앱을 다 깔고, 회원가입까지 마친 후에야 돈을 받을 수 있었다.


언젠가 다른 팀 사람들과 함께 회식을 한 적이 있다.

자리상 A 맞은편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A의 옆에 앉은 E가 A를 위해서 한 칸만 옆으로 가라고 했다.

그런데 B가 A와 E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안 가겠다고 말하는 거다.

왜냐면 지금 앉은 위치가 사람들과 더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 정도의 배려도 하고 싶지 않았던 거다.

딱 한 칸만 옆으로 가면 되는데 말이다(A 앞에 앉는 게 그렇게 싫었어?).


A는 B가 약간의 이기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와 가까워지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이다.  


어쩌면 B는 나이가 적어도 선배라고 느끼게 되는 특정인을 속으로 배척하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는 표현하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서열관계에 신경을 쓰고 있었을지 모른다.

A를 정말 선배라고 생각했다면 그를 불편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좀 더 이기적으로 행동했을 수도 있다. 

A는 가끔 B에게서 느꼈던 이질감은 그런 마음이 전달됐던 것일까.   


그런데 이처럼 나르시시스트는 희생양에게 수동공격을 자주 한다.

그가 희생양에게 공격당한다고 인지하기 때문이다.

상대의 중립적인 행동에 나쁜 의도를 숨어 있다고 믿을 때가 많다는 것이다.


C는 종종 이렇게 말했다.  

“난 고칠 점만 봐.”

“나는 비판하는 성격이야.”


그런데 얘기를 하다 보니 대화하기 까다로운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그가 간헐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급발진을 했던 것이다.


A가 무슨 말만 하면 C는 이렇게 쏘아붙였다.

“그래서 네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방금 다 한 건데.

무슨 말이지? 

처음 듣는 유형의 질문이었다. 

B야말로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되묻는 것인지 궁금했다. 


결국 C의 얘기는 이거였다.

“너는 특정한 말을 듣고 싶어서 의도적으로 에둘러 말하는 것 아니야?”

C는 A가 자신에게 대답을 유도한다고 느꼈단다.

A의 얘기에 나온 누군가가 A를 좋아한다고 C가 답하길 A가 기대했다는 거다.

도대체 어느 지점에서?

뜬금포 같은 말이었다. 


알고보니 C는 자신만의 특유한 해석의 틀이 있었다. 

논리나 이성 쪽이 아니라 의도를 의심하는 쪽에 가까웠다. 

그런데 의심을 한다는 게 딱히 근거가 없다. 

그러니까 망상에 가까운 추측을 한다는 뜻이다.   

재밌게도 C는 본인의 생각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당사자는 어이가 없지만 말이다.  


이후에도 A는 아주 작고 사소한 일까지도 일일이 C의 의심을 받아야 했다.

무슨 말만 들으면 C는 상대가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나는 상황을 다 파악했다는 뉘앙스로 따지는 거다.


"너는 객관적으로 말하는 것 같지만 사실 걔가 싫어서 그러는 것 아니니?"

"네가 걔한테 그렇게 행동한 건 다른 이유 때문이잖아?"


너는 나에게 솔직하게 말하지 않지만 난 속지 않을 것이며 이면을 안다는 뉘앙스였다.

뭘 그렇게 안다는 건지 A는 지금도 의문이다.

 

C가 고칠 점을 본다는 것은 특유의 시선으로 타인의 의도를 상상한다는 맥락도 포함돼 있었다.

비판하는 성격이라고 말한 이면에는 근거 없이 의심하는 편집증적 증상이 녹아 있었다.


진짜 문제는 C가 자신의 성격적 결함을 인지하지 못한다는 거였다.

그리고 왜곡된 렌즈로 인지한 세상을 전부라고 주장하는 걸 넘어서서 확신한다는 사실이었다.

또 그런 확신을 남들에게 강요하고, 퍼트리는 걸 당연하게 생각한다는 점이었다.

 

상대가 아니라고 말해도 이미 그가 확신한 후에는 소용없었다.

그는 상대가 시치미를 뗀다고 단정했다.

그리고 오히려 확신을 강화시켰다.

B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정황적 근거 같은 것도 없다.

다만 그는 감정에 근거해 현실성 없는 예측을 했다.


사실 A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은 B와 사이가 안 좋았다.

이것도 그의 망상에 한몫했으려나.


그러니까 나르시시스트의 공격성은 방어에 가깝다.

B가 A를 선배라고 인식했지만 반동형성처럼 후배로 불렀듯이 말이다.

이를 뒤집어 보면 B가 A를 선배라고 인식한다는 사실을 읽을 수 있다.


수동공격하는 나르시시스트의 저의를 읽는 방식도 이런 맥락과 흡사하다.

희생양을 하대하고 비난하는 태도를 뒤집어 보자.

그는 위로하는 척하면서 깎아내린다.

안타까워하고 말하면서 은근히 능력을 폄훼한다.


나르시시스트가 타인을 적으로 규정할 때 저런 술수를 쓴다.

물리쳐야 할 대상에게 경계심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작은 움직임에도 큰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그는 공격당했다고 인지할 때가 많다.

공격당할지도 모른다고 걱정할 때가 많다.

그러다 보니 나르시시스트적 무의식이 발동하는 것이다.

수동공격은 나르시시스트의 무의식을 반영한다.


또 나르시시스트는 서열을 확실하게 정할 때 수동공격을 시전 한다.

그는 대인관계에서 타인을 동등하게 본다는 인식이 없다.

그래서 우열을 가리려고 의도적으로 시비를 건다.


나르시시스트가 칭찬과 비난을 섞어 쓰는 것도 수동 공격의 일환인 경우가 많다.

그는 남을 띄워주는 척하면서 밑으로 깔아버리고 시도한다.

그러면서 겉으로는 희생양을 위해서 말하는 거라고 주장한다.

그의 칭찬은 비난하는 악의를 미화하는 위장술과 비슷한데 말이다.

좋은 이미지를 얻고 싶으면서도 공격하고 싶을 때 수동 공격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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