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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스트끼리 만나면 벌어지는 일

"햇병아리 주제에!" B는 자신을 방어하려고 마구 소리를 질렀다

나르시시스트와 나르시시스트가 만나면 어떤 파국이 벌어질까. 


B는 C교회 청년부 교역자다.

그의 첫인상은 말끔했다.

어릴 때부터 한 번도 엇나가지 않고, 공부만 열심히 한 모범생 이미지였다.    


C교회는 장년층 위주의 사역이 활발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청년부가 스포트라이트를 많이 받지 못했다.


당시 청년부는 문화생활하듯이 종교 행사를 체험하고 가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신앙의 열기가 조금 부족했다. 


새로 부임한 교역자와 올해 뽑힌 교회 임원들은 장기 미출석자와 얼굴만 비추고 돌아가는 사람들에게 동기를 부여해야 했다.

일단 B는 청년부에 오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고 다녔다. 

첫 부임지라 열정이 넘쳤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교역자를 만나고 대화하던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B가 오기 전 일을 도맡던 멤버들이 앞 다퉈 나가기 시작했다.   


A는 이십 년 가까이 다녔지만 처음 겪는 일이었다.

매주 얼굴을 보는 게 익숙했던 이들이 낯선 표정을 지은 채 떠났다.  


어느 날, B가 A에게 누구한테 전화를 걸어보라고 말했다. 

그는 약 일년 전 새신자로 교회활동을 시작했다. 

그리고 마음을 붙였는지 찬양팀에서 싱어를 맡기까지 했다. 

오래 된 교회에서 적응한다는 게 쉽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래도 마음 맞는 몇 사람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A가 자초지경을 물었을 때, 그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B가 초반의 모습과 너무 다르다고 말이다.

인간적으로 실망했다는 거다.

실망한 상황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A는 뭔지 알 것 같았다.


언젠가부터 B의 언행은 교인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토요일마다 B가 리더 모임을 주관했다.

주일 전체 모임을 준비하고, 임원 회의도 한다.

그 전에 아이스브레이킹 차원에서 소소한 이야기를 나눈다.


그런데 언젠가 B가 말실수를 하고 말았다.

모임 멤버 D의 외모를 과하게 평가한 것이다.

“D는 몸매가 이렇잖아.”

그는 ‘이렇잖아’라는 말에 맞춰서 손으로 호리병 모양을 그렸다.

미소를 지으면서 말이다.


이십 대 초반인 D는 민망해하며 고개를 숙였다.

모임 멤버들도 당황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이후에도 B의 문제적 막말 퍼레이드는 계속됐다.


A와의 통화하던 중에 감정에 못 이겨 비하발언을 했던 것이다.


B는 토요일에 가끔씩 전화를 걸었다. 

내일 여러 가지 행사를 주관해야 하니 서로 으쌰으쌰하자는 안부 전화였다. 


그런데 언젠가 B가 상처를 받았단다.

A는 무심결에 뭔가를 물어봤단다. 

그런데 그 말을 B가 오해했단다. 

구체적으로 무슨 오해인지는 모르겠다. 

그가 속마음을 말하지 않으니 다 알기가 힘들었다. 


어쨌든 B는 공격당했다고 결론내렸다. 

그는 호흡을 가다듬으려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전투태세로 무장했다.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소리를 지르며 상대를 깔보는 폭언을 쏟아냈다.

“햇병아리 주제에!”


A는 이십 대 초반 성도였다.

B는 이십 대 후반 전도사였다.

저 단어를 쓰는 게 적절한가?


사실 이 표현에는 B의 여러 가지 감정이 담겨 있었다.

당시 B는 교회에서 마음고생을 많이 하고 있었다.


기존 핵심 멤버들이 우수수 나간 게 타격이 컸다. 

그들은 B와 대척점에 섰었다. 

한동안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그들은 단체로 나가면서 B를 향한 분노와 실망감을 가차없이 드러냈다. 

B도 상처를 많이 받았을 것이다. 

모두가 자신을 공격하는 대상으로만 여겨졌을 것이다. 

그 시기에는 그도 상당히 방어적이었다. 


드럼을 치던 E도 B로 인해 교회를 떠났다. 

그는 무대에서 마이크에 대고 말했다.

“교회의 비전과 저의 비전이 맞지 않아서 떠나겠습니다.”


그동안 잘 나왔으면서 갑자기 교회 비전과 안 맞는다니.

그는 비전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꺼내 들었다.

하지만 B가 청년부를 대하는 방식에 상처를 받았다는 걸 모두 알고 있었다.


E가 말하는 동안 예배실 뒤편에 B가 서 있었다.  

그 발언은 B를 겨냥한 화살이었다.


성도들은 그를 위해 찬양을 불렀다.

떠남을 아쉬워하고, 떠나는 사람을 위로하는 찬양이었다.


A는 B가 신경이 쓰여 자꾸 뒤를 돌아봤다.

B는 아무말 없이 앞을 주시하고 있었다.

씁쓸했을 것이다.


햇병아리.

이제 막 목회를 시작한 B는 아주 혹독한 신고식을 치르고 있었다.

의도도 좋고, 열정도 좋았다.

하지만 마음을 담아내는 태도가 너무 급진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의 공격적인 어투에 당황했다.

한심해하는 제스처를 보면서 상처를 받았다.

그래서 똑같이 화를 내거나 교회를 떠나버렸다.


B가 이 모든 행위에 사회성을 첨가했다면 결과가 달랐을 것이다.

성품도 성숙하게 가다듬었어야 옳았다.

그는 부족함을 깨닫지 못했다.

교인의 진심어린 피드백을 경청할 마음도 없어 보였다.

B의 세계에서 B의 생각은 다 옳으니 말이다.

하지만 특정인의 의견이 다 맞는 상황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건 현실감각이 떨어지는 생각이다.


B는 성도를 인격체로 인식하지 못했다.

나의 의견을 무조건 따르는 대상으로 이해했다.

아니면 통제하는 대상으로 간주했다.

그리고 성도는 그의 비현실적인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 사태에 그의 실책도 한몫했다.


교회도 새로 온 교역자를 잘 따르고, 리더로서 인정했어야 마땅했다.  

하지만 교회에 오래 다닌 일부 성도들은 쓸데없이 자존심을 부렸다.

B의 순수한 의도를 의심하고, 함부로 험담을 했다.

상처받게 말이다.


청년부의 실세였던 사람들과 교역자의 나이대는 비슷했다.

그래서 리더십을 발휘하기 녹록치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한국사회에서 나이는 민감한 영역이다.

리더가 아닌 경쟁자나 물리칠 대상으로 인식될 수 있기 때문이다.


B는 기존 리더십을 데면데면하게 대하거나 멀리했다.

그도 어려웠을 것이다.  


청년부 대다수는 B에게 친밀감보다는 거리감을 느꼈다.

초반부터 B는 나름대로 이 교회에서 무엇이 부족한지를 파악했다.

그리고 매번 무엇이 잘못됐는지 설명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듣다 보니 상대도 너무 힘들었던 거다.


교회의 부족한 점이 보이면 서로 독려하면서 서서히 바꿔나가면 된다.

그리고 의미있는 변화는 단번에 일어나지 않는다.

단계적이고 점진적일 때가 많다.  

또 변화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단시간에 많은 부분을 B의 말대로만 바꾸는 건 물리적으로 힘들었다.


무엇보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프로그램에 명령어를 입력해서 새로운 시스템을 짜는 식으로 사람을 대하면 좋은 결과를 얻기 힘들다.

성별과 나이, 지위를 떠나 누구든지 전인격적으로 대하는 게 가장 건강한 태도다.


희한하게 권위를 가진 사람이 권위를 휘두를수록 그 권위는 멋없이 추락할 때가 많다.권위는 신기루 같은 거다.  

주인이 없기 때문이다.

권위는 정해진 시간에 한 장소에 머무르다 때가 되면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방랑자 같은 존재다.


자신만을 내세우지 말고, 성도와 동등한 입장으로 다가가는 건 그의 자존심상 용납하지 못할 자세였을까.

꼭 누군가를 공격하고, 무찔러서 입지를 다져야만 했던 걸까.

그렇게 다져진 입지는 위태롭고 불편한 자리밖에 안 될 텐데 말이다.


당시 B는 불안해하는 것 같았다.

그 불안은 인정받지 못하는 데서 오는 좌절감 같은 거였다.

그는 더 목소리를 높이고, 고압적으로 행동하는 게 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여겼다.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가 자기 자신의 힘이 부족한 데서 온다고 느꼈기 때문에.


하지만 과도하게 몸집을 부풀린다고 남보다 더 나은 존재가 되는 게 아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힘을 과시하는 누군가를 멀리한다.

힘을 과시하는 이면에는 인간에 대한 경계심이 깔려 있다는 걸 직감해서다.

경계심이 많은 사람은 상대가 조금만 거슬리게 행동하면 돌변한다.

자신이 그어놓은 선을 넘으면 위협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안감을 해소하려고 상대를 공격하는 것이다.

나를 경계하는 사람을 가까이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그리고 다들 성인인지라 각자의 가치관이 있다.

그런데 B는 성도를 어린아이라고 오독한 건지 팔을 걷어붙인 채 매사에 훈계조로 비난하기 시작했다.


B는 고압적이고, 무례했다.

그 또한 일부 성도들 못지않게 배타적으로 나왔다.

 

타인에게 명령조로 구박하기.

누가 무슨 말만 하면 비난하고 반박하기.

공개적으로 특정인의 외모 비하하기.

작은 일에도 가차 없이 짜증내기.

여러 사람 있는 데서 고압적으로 소리 지르기.


목회자란 직분을 빼고도 누구든지 저렇게 행동하면 사람들의 원망을 산다.

기존 리더십들은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받고, 거부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의 원망과 질책을 받으면서도 B는 교회 사람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가 없었다.

그의 관점에서 성도는 내 말을 안 듣고 무시하는 존재로 느껴졌을 것이다.  

이런 일련의 감정들이 합쳐져 그는 절규하듯 말한 것이다.

“햇병아리 주제에!”


이는 A에게 하는 말이자 성도들 전체를 향한 원망이었다.


너희는 왜 내 말을 안 들어?

왜 내 의견에 반박해?

왜 내 말이 틀렸다고 해?

난 목회자가 되려고 대학교도 다시 가고, 공부도 열심히 했어.

괜히 이 자리에 온 줄 알아?

너희는 나보다 성경에 대해 더 잘 아니?

너희는 나보다 목회에 대해 잘 아니?

너희는 나보다 더 전문가니?

나는 알아.

나는 안다고.

그런데 왜 날 무시해?

너희가 뭔데?

너희가 뭔데?

너희는 나랑 동급이라고 생각하는 거니, 지금?

나 진짜 상처 많이 받았어.

이런 꼴을 보려고 여기 온 줄 알아?

나 그런 대접받을 사람 아니야.


B도 힘들었다.

새롭게 뽑힌 리더들은 교역자가 아니다.

심지어 학생도 있었다.

목회자이기에 리더들에게 현재의 심정을 툭 터놓고 말할 수 없었다.

그도 인간적으로 상실감과 외로움에 한동안 시달렸을 것이다.

분명 나는 다 옳은 소리를 했는데 사람들이 왜 찡그리는지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도 무너지면 안 된다고 스스로를 많이 다독거렸을 것이다.


B는 청년부를 급진적으로 변화시키고 싶어 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변화를 요구하는 B에게 변화를 요구했다.

되려 그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떠나갔다.


물론 B도 교회의 어떤 면은 어처구니가 없었을 거다.

예를 들면 F가 활개 치는 모습 같은 거 말이다.


F는 말괄량이 었다.

그는 중학교 때 조금 놀았단다.

일진은 아니었다.

노는 무리에서 서브 역할을 담당했다.  

그런 그가 어쩌다가 교회에 와서 또래들과 친해졌다.

공동체에 적응해 버린 것이다.

심지어 나중에 그는 총무까지 맡게 됐다.

이런 과정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그의 성격은 안 좋았다.


중고등부 수련회 때 일어난 일이다.

F는 당시 교회 임원이었다.


그는 수련회장에서 뭔가 준비가 미흡하다 싶으면 동생들을 불러냈다.

그는 동생들 앞에서 팔짱을 끼고, 짝다리로 엉거주춤하게 섰다.

그런 다음 이름을 차례대로 불렀다.

한명 한명에게 이렇게 묻는 거다.

“OO아, 지금 이 사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뒷골목에서 돈 좀 있냐고 물어보는 ***처럼 껄렁한 말투로 운을 띄웠던 것이다.

그는 어린 마음에 군기 따위를 잡겠다고 학교 선배들에게 배운 못된 관습을 어설프게 따라 했다.

같은 방식으로 군기를 잡혀 본 그가 경험을 살려 그걸 흉내 냈던 것이다.

(OO아, 그때 네가 한 짓에 대해서 지금은 어떻게 생각해? 이제 좀 창피하지?)


F가 호명한 사람들 중에 그의 친동생도 포함돼 있었다.

F의 바람잡이에 그 친동생은 눈물까지 흘렸다는 후임담이 전해졌다.

고등학생이 중학생을 윽박지르다니.

지금 생각하면 너무 웃기다.

하지만 어렸으니까.

그런데 어리다고 다 저러지는 않는데.


B는 교회 중고등학부 교사를 하던 F를 찾아갔었다.

그리고 얼굴을 보면서 대화를 나누다가 알았던 것이다.

어떤 사람인지.

아마 F의 호전적인 태도에 깜짝 놀랐을 것이다.

좋은 의도로 찾아간 사람에게 도리어 그는 배타적으로만 굴었다.

B는 F를 교회 분위기를 망치는 원흉이라고 생각했다.

요주의 인물로 찍어버린 거다.

결국 B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이렇게 말했단다.

“너 같은 사람은 교회에 나오면 안 돼.”


맞다.

이상한 허세에 중독된 모습으로는 교회가 오지 않는 게 더 나은 선택지였을지 모른다.

억울한 피해자가 너무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 한 명 때문에 말이다.


실제로 그 말을 들은 F는 충격을 받고, 교회에 정말 안 나오기 시작했다.


이 에피소드로 A는 인간의 이면을 봤다.

이십 대 초반인 F는 친구들은 물론 대다수의 사람들을 막 대했다.

그는 상고를 나와서 취업을 빨리 했다.

어떻게 사회생활을 하는지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그런데 위기 속에서 상대의 진면목을 알 수 있다.

썰물로 인해 바다의 밑바닥이 드러나듯이 위기를 겪을 때 인간은 감추고 싶고, 외면하고 싶었던 연약한 자아가 튀어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고난을 통해 인간은 자기 자신을 알아간다.


지금까지 F가 보여준 모습이 그의 전부는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 누군가의 위에 올라서서 군림하려고 노력했다.

아무도 시키지 않았는데 불필요한 기싸움을 하면서 사람들과 마찰을 일으켰다.

나르시시스트 같은 행동을 꽤 많이 했다.


하지만 F는 보기보다 약했다.

목회자가 나오지 말라고 하니 그는 상처를 받았다며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같은 교인이 아닌 교역자가 나오지 말라고 한 것은 충격이었을 거다.


오랜만에 그가 청년부에 들린 적이 있다.

그때도 그는 쓸데없이 힘을 과시했다.

간식시간에 조용히 과자를 먹는 성도들을 한 명씩 지목하면서 껄렁하게 시비를 걸었던 것이다.


평소의 그를 떠올리면 B의 말을 받아쳤을 것만 같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못했다.

허풍만 센 종이 폭군이었던 것이다.


F는 질풍노도의 시기에 자아정체성을 찾으려고 일부러 사람들을 괴롭혔을지 모른다.

학교라는 좁은 세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다른 사람들과 싸워야 한다고 잘못 배웠을 수도 있다.

주변에 보고 배울 롤모델이 없어서 어설프게 어른을 흉내 내는 학교 선배들을 따라 했을 것이다.  


하지만 F의 방식은 틀렸다.

타인과 나와의 관계성으로 자아를 만들어가는 건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다.

진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폭군으로서의 생존 기간은 무척 짧다.

사람들이 그를 언제까지나 봐주지 않는다.


인간은 제자리에 머물지 않고, 각기 다른 속도로 성장하기 때문이다.

정신에 힘이 생기고, 자아가 확고해져 가치관이 정립되면 야만적인 폭언과 폭력에 잘 휘둘리지 않는다.

오히려 더 강하게 폭군을 응징한다.


착한 사람들은 나를 괴롭히는 타인을 역공격하지 못할 때가 많다.  

세상이 마냥 아름답지 않으며 타인을 해치려는 악인도 존재한다는 걸 체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설마 저렇게까지 나쁜 사람이 있으랴, 그래도 좋은 면도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악인은 실제로 존재한다.  

특히 나르시시스트 같은 악인은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남을 조롱하는 것.

악의적으로 놀리는 것.

무시하는 것.

싸움거는 것.

배척하는 것.

욕하는 것.

때리는 것.

나르시시스트의 괴롭힘은 살아있는 악 그 자체다.


선한 사람도 세상의 어두움과 냉혹함을 깨닫고 각성하면 새로운 인물로 재탄생한다.

정의감에 투철하게 악을 배격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선을 추구하면 남들보다 더 기민하게 악을 알아채는 법이다.


악행으로 얻은 자리는 결코 오랫동안 존속되지 않는다는 걸 악인들도 깨달았으면 한다.


그 사건 말고는 B가 상황이 맞지 않게 과도하게 반응한 건 맞다.


어떤 성도가 선교를 간다고 후원편지를 쓴 적이 있다.

그런데 B는 당사자가 있는 자리에서 마구 욕을 했다.

“거지근성이 있어!”

꾸준하게 헌금을 내고, 교회에서 봉사하는 성도에게 그런 막말을 하다니.

후원편지를 보낸 이유 하나만으로 그는 흥분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


B의 태도는 보편타당하지 않았다.


모두가 그를 멀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리더 모임에서 D가 회장으로 발탁됐다.

B가 선택한 임원이었다.

그는 투표가 아닌 목회자의 지명으로 임원을 선발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안목을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관찰해 보니 D는 나르시시스트적인 면모가 두드러지는 사람이었다.

뽑을 때만 해도 B는 D의 본모습을 잘 몰랐다.

그동안 D가 B에게는 우호적인 모습만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가시밭길은 시작됐다.


2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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