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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례한 사람 대하기-테니스공이 날아오면 받아쳐야 한다

'4구 캐리어 있나요?' 나의 질문에 주인장은 경멸 어린 제스처를 취했다

얼마 전 나는 가족과 함께 카페에 커피를 사러 갔다.  


키오스크로 주문을 넣었다.

카페 주인장 옆에서 직원이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만들기 시작했다.

거기까지는 다른 카페들처럼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나는 총 4잔의 커피를 시켰다. 테이크아웃이었다.

원래 3잔만 시켰는데 상황상 부리나케 1잔을 추가했다.

주인장은 단단한 종이로 만들어진 캐리어가 아닌 트렌디한 무늬가 새겨진 테이크아웃용 비닐에 커피를 2잔씩 담기 시작했다.

(비닐은 최대 2잔까지 담을 수 있는 크기다)


3잔이면 2잔이 담긴 비닐을 들고 나머지 1잔은 손에 들면 된다.

그런데 추가로 1잔을 시켰으니 총 2개의 비닐을 들어야 했다.


그게 작은 일의 도화선이었다.  


4잔을 한꺼번에 담을 만한 용기는 없을까.


우리는 조금 먼 곳에 갈 예정이라 손에 든 짐이 많았다.

최대한 품을 줄어야 했다.


게다가 차를 타고 이동해야 했다.    

비닐에 담긴 종이컵은 움직이는 차 안에서 고정이 안 될 듯했다.   

바닥에 커피가 주르륵 흐르는 참사를 막으려면, 컵을 잡아 줄 단단한 캐리어가 필요했다.

그래서 나는 묻기로 했다.

카페에 4구 캐리어가 있는지를.


나의 맞은편에 직원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필 주인장이 있었다.


나는 물었다.


- 혹시 캐리어가 있나요?


주인장은 나를 보지 않은 채 비닐에 종이컵을 담으며 말했다.


- 비닐에 담아드릴게요.


캐리어가 있는데 모종의 이유로 줄 수 없다는 건가.

원래 이 카페는 비닐만 있다는 건가.

 

나는 캐리어의 존재 유무를 물었는데 주인장은 아리송한 답변만 했다.  

나는 좀 더 구체적으로 질문했다.

주인장이 질문을 오독하지 않았나 싶어서였다.


- 혹시 4잔을 한꺼번에 담을 만한 캐리어가 있나요?


주인장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여전히 그는 코 앞에 서 있는 나를 한 번도 쳐다보지 않았다.


카운터는 폭이 좁고 크기가 작았다.

주인장이 나의 질문을 정확하게 들을 수 있는 거리였다.


그러나 그는 추가적인 질문을 듣고도 캐리어의 유무를 말하지 않았다.   

누가 봐도 의도적인 묵살이었다.


심지어 그는 나의 시야에서 벗어나버렸다.

나는 덩그러니 남겨졌다.

주인장이 사라진 공간에 나무 벽만 보였다.


- 왜 아무런 대답이 없지?


나는 혼잣말을 했다.

그때 다시 주인장이 내 시야에 나타났다.

혼잣말을 주인장이 들었던 걸까.


카페는 조용하지 않았다.


커피 기계에서 커피콩이 갈리는 소음이 배경음악처럼 흐르고 있었다.

창문이고 문이고 활짝 열려 있어 카페 안은 온갖 소리들로 넘쳐났다.


그래서 나의 목소리가 소음에 묻혔는지, 소음을 뚫고 정확하게 주인장의 귀에 꽂혔는지는 모른다.

'왜 저 사람은 내 말에 답이 없지?'라고 속으로만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주인장이 의도적으로 내 물음을 무시하는 게 당황스러웠다.


커피를 가져갈 당사자가 캐리어가 있는지 묻는 게 잘못된 건가.

충분히 물어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인장은 마치 내가 해서는 안 되는 질문을 한 것처럼 불쾌해했다.


주인장은 나를 빤히 쳐다봤다.

정확히 말하면 그는 나를 노려봤다.

카운터는 얼굴을 마주 보면 민망할 만큼 좁았다.

아까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더니.


나의 눈빛과 주인장의 눈빛이 부딪혔다.

1초, 2초, 3초, 4초, 5초.....

나의 동공이 커졌다.

나는 캐리어가 있는지 물었다. 간단한 질문이었다.

물론 답도 간단했다.  

답은 O 아니면 X다.

3초 이하면 마무리할 수 있는 일인데, 주인장은 일체 말이 없었다.


캐리어가 없다면 나는 당연히 비닐째 커피를 가져갔을 거다.

캐리어가 없어도 상관없었다.

나의 질문은 사무적인 종류였다.

종이 캐리어도 없냐고 따진 게 절대 아니었다.   


주인장은 여전히 캐리어의 존재를 말하지 않고 있었다.

대신 그는 실례가 될 정도로 상대를 오랫동안 노려보며 불만을 표시했다.

주인장은 실컷 나를 째려본 다음 퉁명스럽게 말을 꺼냈다.

- 뭘 말하시는 건데요?


뭘 말하는 거냐고?


커피 4잔을 담을 만한 두꺼운 종이박스.

카페에서 차를 테이크 아웃할 때 담아주는 손잡이가 달린 용기.

누구나 다 아는 흔한 캐리어 말이다.


설마 진짜로 주인장은 '캐리어'가 뭔지 모르는 걸까.

주인장이 내가 말하는 바를 몰라서 불퉁거리는 건 아닌 듯했다.


- 캐리어 모르세요?

나는 반신반의하며 물어봤다.

물음의 뉘앙스에 '정말 몰라서 물어보는 거 맞나요?'라는 의구심이 섞여 있었다.


아까부터 나는 테이크아웃용으로 커피 4잔 주문한 뒤, 그것들을 담을 캐리어가 있냐고 물어봤었다.

주인장도 그 상황을 알고 있었다.


내가 4잔 담을 캐리어가 있냐고 물어본다면 부연설명을 하지 않아도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는 알았을 것이다.

설령 주인장이 캐리어라는 단어를 몰라도 말이다.


드디어 주인장이 응답했다. 퉁명스러운 말투에 짜증이 묻어 있었다.   


- 그건 없어요.

그래. 없구나.


캐리어가 있냐는 질문의 대가는 그것이었다.


주인장의 싸늘한 눈빛 공격.

신경질이 덕지덕지 묻어나는 주인장의 표정 공격.

'캐리어는 없어요.'라는 신경질적인 그의 대답.  


주인장은 잔뜩 찡그린 채 커피 1잔을 마저 제조했다.

나는 커피가 담긴 비닐을 가져가며 천천히 말했다.


- 아까 나쁜 의도로 물어본 건 아니었어요.

주인장이 나를 쳐다봤다. 그리고 짜증 섞인 단말마를 냈다.


- 네?


나는 말을 이어갔다.


- 아까 기분 상하신 것 같아서...


나는 말끝을 흐렸다.

꺼낸 말에 마침표를 찍지 못했다.

(반말로 오해받을 수 있는 '말끝 흐리기'를 하다니)

내가 말을 중단한 이유는 주인장의 반응 때문이었다.

주인장은 고개를 들어 한참 동안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 눈빛은 상대를 향한 경멸의 집합체였다.  

 

부정적인 감정에 저항하길 포기한 주인장의 표정은 덤이었다.

그는 할 수 있는 한 성심성의껏 긁어모은 혐오를 눈빛에 가득 담았다.


나는 주인장의 눈빛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의 속을 가늠해 보았다.

일면식도 없는 나를 이렇게까지 대하는 그의 진짜 속내를.

한참 동안 나를 노려 본 주인장은 카운터 옆쪽으로 가버렸다.  

주인장은 혐오가 넘실거리는 눈빛을 거둔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아까와 달리 내 얼굴을 보지도 않은 채 그는 되뇌듯 말했다.  


- 장사하는 사람들은 그런 거 상관없어요.


애매한 답이었다.

그리고 그 대답은 주인장의 속내와 반대되는 내용이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그런 거'에 신경 쓰고 있었다.


주인장은 자신의 감정을 눈치채 듯한 상대의 반응에 심리적으로 거리를 두고 있었다.

나는 주인장에게 도의적으로 미안했다.

 

생각해보니 내가 재차 질문한 게 주인장에게는 대답을 강요하는 뉘앙스로 들릴 수도 있었다.  

그리고 주인장이 나의 혼잣말을 들었다면 기분이 나빴을 터였다.


게다가 나는 주인장의 일그러진 표정을 본 다음 화해(?)의 제스처를 마무리하지 못했다.

내가 말을 마치지 못한 게 주인장에게는 반말로 치부될 수 있었다.


어쩌면 주인장은 캐리어가 있냐는 질문을 다른 손님들에게도 수도 없이 들었을 수도 있다.

그랬다면 그도 사람인데 캐리어에 관한 질문 자체가 지겨웠을 수도 있었다.

본의 아니게 나의 질문이 주인장의 '빨간 버튼'을 누른 격이 되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끝까지 대답을 들으려는 나에게 그가 신경질이 날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는 주인장의 태도가 불편하다고 표현했다.

'캐리어 모르세요?'라는 질문의 뉘앙스는 정말 캐리어를 그가 모르는지 아는지 묻는 게 아니었다.

나는 이런 의도를 전달한 셈이었다.  


'카페를 운영한다면 캐리어가 뭔지 알 거라 생각합니다.

제가 무엇이 필요한지 충분히 설명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성의하고 짜증스러운 당신의 반응에 저는 당황스럽고 불쾌합니다. 저에게 왜 그러시는 거죠? 그러지 마세요.'


나와 주인장 사이에 작은 신경전이 오갔었다.

나는 타인의 무례를 거절했다.

주인장은 무례를 참지 않는 나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 고맙습니다.

- 고맙습니다.


서로 고맙다는 인사를 나눈 채 그 일은 마무리되었다.

나는 마음이 찜찜했다.

나 때문에 주인장이 기분이 상했고, 나도 주인장 때문에 기분이 상했다.


내가 누군가를 기분 나쁘게 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또 예상치 못한 일로 나의 기분이 상한 게 마음에 걸렸다.


왠지 주인장에 대한 말이 나왔을 거란 생각에 맵으로 그 카페를 찾았다.   

예상은 들어맞았다.

[여기 주인 되시는 분이 너무 미숙하고 불친절해요.]


[주인 되시는 분인가요?

제가 텀블러에 커피 담아달라고 한 게 잘못인가요?

왜 그렇게 짜증 난 표정으로 보는지.

그리고 얼음 더 달라고 했는데, 주인장이 커피 한 잔에 얼마 남지도 않는데 더 달라고 하냐고 뭐라고 하더라고요.

텀블러 가져왔잖아요. 종이컵 값은 생각 안 하나요.

기분 나빠서 다시는 안 가요.]


모르겠다.

주인장은 기분이 나빠서 대응한 것뿐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캐리어가 있냐고 묻는 것, 텀블러에 커피를 담아달라고 한 것도 주인장이 짜증스럽게 받아들인다면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카페에서 일하면서 얼마나 다양한 손님 군상을 맞이하겠는가.

손님이 특별한 잘못을 하지 않아도 장사하면서 사람 때문에 기분 나빴던 경험이 쌓여 주인장은 아무한테나 방어적으로 나올 수 있다.


나는 손님이 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당연히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손님은 동등한 관계라고 여긴다.

각자 필요에 의해 잠시 만난 거다.

거기에 서열은 없고 다만 서로 배려하면 된다고 본다.  

그리고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나는 수많은 고객 중 한 명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주인장의 친절을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주인장이 적당히 사무적으로 대하는 게 더 편하다.


또 나는 가게에 가면 직원에게 작은 오해라고 살까 싶어 더 신경 써서 행동하는 편이었다.

이번 일은 내가 남에게 대우를 받고 싶어 했다는 얘기가 아니다.


캐리어가 있냐는 중립적인 질문에 주인장은 불쾌해하며 의도적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주인장은 나를 노골적으로 노려봤다.

그는 대놓고 나에게 싸움을 건 것이다.  


그 지점이 나는 불쾌했다.


그래서 나는 주인장의 무례를 받아쳤다.

거기에서 주인장은 기분이 더욱 상했을 것이다.

누군가가 무례하게 나올 때 적절하게 대응해야 한다.


테니스공이 날아오면 테니스채로 받아쳐야 한다.

라켓을 휘두르지 않으면 내가 그 공에 맞아 다칠 수 있다.


그리고 테니스 경기의 규칙은 상대가 던진 공을 되받아치는 것 아닌가.

나에게 날아오는 공을 퍽 소리가 나게 쳐서 상대에게 되돌려 줘야 한다.


그렇게 공을 받아쳐야 경기가 정상적으로 굴러간다.


적절한 대응 방식 중 하나는 나의 감정을 당사자 앞에서 표현하는 것이다.

내가 기분이 나쁜데 티 내지 않으면, 상대는 자신의 무례함에 경각심을 갖지 않는다.


자신이 함부로 행동해도 불이익을 받지 않으면 사람은 안일해지기 쉽다.


그들은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서 타인을 존중하지 않는 걸 당연히 여길 수 있다.

 

만약 주인장의 태도가 부당하다고 느꼈음에도 내가 가만히 있었다면, 주인장은 카페에 오는 사람들을 함부로 째려보고 그들에게 노골적으로 싸움을 걸어도 괜찮다고 인식할 수 있다.

상대가 대책 없이 무례할 때, 의도적으로 원인 제공자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뾰족한 무례가 나를 비롯해 다른 사람들의 권리를 더 이상 침범하지 않는다.  


사람은 로봇이 아니다.

누구든지 늘 자로 잰 듯 반듯하게 행동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사람이다.

따라서 누구든지 누구에게나 무례한 캐릭터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적당한 관용을 가지되, 당신의 언행 때문에 나의 감정이 상했다고 간단명료하게 표현해야 한다.  

당사자가 자신의 행동을 제삼자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돌아보게 말이다.

타인이 자신의 무례함을 어떻게 느낄지 원인 제공자는 잘 모를 수 있다.

의도적으로 무례를 저지른 사람일지라도 상대가 그 불친절을 받아쳤다면, 다음부터는 무의식적으로나마 그가 행동거지를 조심할 수도 있다.


훅 날아오는 무례함을 거절해서 자기 자신을 지키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건강하게 선을 그어야 한다.

물론 이해관계에 따라 솔직한 감정을 표현하기 힘든 경우도 있다.

또 예기치 않은 상대의 공격에 제대로 일격 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럴 때는 일기장에 구체적으로 그날의 일을 기록하자.

그래서 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 그 행동이 왜 기분 나빴는지 자기 검열하지 말고 가감 없이 적어보자.


핵심은 누군가 나를 함부로 대했다는 사실을 스스로 직시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타인이 나의 권리를 멋대로 침해했고, 그 불쾌한 침범을 내가 인지했다는 걸 도장 찍는 것이다.  


그때의 상황과 감정을 글로 써서 가시화하자. 그 일만큼은 분명히 하자.

그래서 원인 제공자가 모를 망정, 나름대로 그에게 옐로카드를 날리는 것이다.

글을 쓰다 보면 분노가 가라앉고 마음의 여유가 생기기도 한다.


부당한 대우에 대응하지 못한 자신에게 너그러워지면서 수치심을 지워나갈 수도 있다.

심지어 간혹 가다 내가 미워하던 상대를 이해하게 될 때도 있다.


물론 거두절미하고 무례한 행동 자체는 잘못된 것이다.


상대를 이해하기도 한다는 건 무조건적인 이해를 뜻하진 않는다.

상대가 함부로 행동한 이면에 숨겨진 상처가 존재할 때도 있다.

또 상대의 못된 자아가 작동했을 수도 있다.

이렇게 나만의 관점으로 상대의 태도를 해석한다는 의미이다.


지나치게 교훈적인 이야기는 하기 싫지만, 나 또한 감정에 충실해 내키는 대로 타인을 대한 적은 없었나 돌아봐야 할 것이다.

다시 돌아가 그날의 일을 구체적으로 기록하면 상황을 더 명료하게 기억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만에 하나 상대에게 그날의 일을 터놓고 말할 기회가 생길 수도 있다.

(지나간 일을 이제 와 다시 꺼낸다고 쭈뼛거릴 필요 없다. 내가 기분 나빠한 건 잘못이 아니다. 상대의 무례함이 잘못이다. 시간이 지나도 기분 나쁜 건 기분 나쁜 거다)


그렇다면 글로 상황과 감정을 써둔 덕분에 더 수월하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불편하다고 표현할 때 원인 제공자는 나의 감정을 안 받아들일 수도 있다.

 

경험상 내가 상대에게 사과를 요구했을 때,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나를 그들은 싫어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적이 없다고 발뺌했다.


아니면 내가 잘못 기억한 것 같다며 그들은 무턱대고 비아냥거렸다.

내 기억이 구체적이고 탄탄했어도 말이다.

그래도 표현하지 않는 것보다는 표현하는 게 낫다.


그들이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나를 탓하며 반격해도 좋다.

그들은 자존심 때문에 겉으로는 구시렁거린다.

카페 주인장처럼 나를 째려보거나 경멸하는 제스처를 취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반성하지 않았어도 내가 말한 이후로 행동을 바꾸기도 했다.

결국 내가 기분 나쁘다고 직접적으로 표현한 다음에야 그들은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태도를 버린 것이다.


물론 지적을 받은 당사자는 자존심이 상했기에 보복하려 할 수도 있다.

그 또한 사람이니까 가질 수 있는 감정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조금씩 마음을 표현해야 한다.


표현하지 않으면 안 좋은 감정이 쌓인다.

부정적인 감정이 쌓이기만 하면 언제 터질지 모른다.

방심하면 쌓인 감정을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사람에게 표출할 수 있다.


우리는 너무 현자가 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나의 감정을 적절히 표현하는 건 죄가 아니다.

오히려 나의 마음을 돌보고 타인과의 경계선을 설정하는 건강한 행동이다.

타인의 무례를 억지로 이해하기보다 용기를 내어 억지로라도 불편함을 표현하자.


말로 하기 힘든 입장이라면, 무례한 이와 거리감을 조성해 심리적인 긴장감을 끌어내자.


예를 들면 그가 묻는 말에만 대답하고 내가 먼저 말을 시키지 않는 것이다.

그를 사무적으로 대하자.

무표정한 얼굴로 의례적인 인사를 하자.

무례한 이를 대할 때만 내 마음의 온도를 확 내리자.

온기 없이 대하는 것이다.  


예의는 갖추되 점차 멀어진다는 인상을 줘서 타인이 자신의 행동을 알아서 신경 쓰게 하는 것이다.


불편한 감정을 표현하는 걸 연습하다 보면, 실전에서 점차 더 빠르게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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