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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스트의 모순 화법 무너뜨리기

나르시시스트의 사고력은 단순하고 추상적이라 허점이 너무 많다

B는 교회 수련회에 갔는데 어떤 교역자의 말로 상처를 받았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그 교역자가 권사님들이랑 학생들이랑 우리(부부 동반)가 너무 많이 와서 부담스럽다는 거야.

그런데 우리도 원래 다른 일정으로 바빴는데 일부러 시간 내서 왔거든.   

그래서 내가 그랬지.

우리도 마찬가지로 부. 담. 스. 럽. 다. 고.


B가 자신도 부담스러웠다는 말을 유난히 강조했다.

교인이 많이 올수록 교역자의 책임감은 막중해진다.

공동체를 이끄는 사람으로서 느낄 법한 감정이었다.   

그래도 성도가 적게 오는 것보다 많이 오는 게 낫지 않나.


딱히 나쁜 의도는 아니었다.

교인이 많아서 싫다는 불평도 아니었다.

단지 리더로서의 소회를 허심탄회하게 나눈 것 같았다.

   

하지만 B는 이를 심각하게 문제 삼았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 된 것 같아 거절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래서 교역자처럼 나도 부담스러웠고, 이전의 일정이 얼마나 바빴는지 정성스럽게 설명했다.

 상대가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B의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행동이었기에 A는 맞장구치지 않았다.

타인에게 상처받은 말을 ‘손민수’해서 요리조리 비꼬고 조리 돌림하는 것은 B의 오래된 습관이었다.          

공격받았다고 느낄 때, 그가 스스로를 방어하고 아작 난 자존심을 셀프 치료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우리한테 부담스럽다고 하다니.

나도 부담된다고 말하면 교역자가 민망하겠지?

그럼 나랑 같은 입장이 되니까 내가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알겠지?

아이, 고소해라.


이는 널리 퍼진 처세술이다.

특정 말에 타격을 받은 사람이 복수하겠다는 의도를 원인 제공자에게 소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예전에 A가 지방에 있는 현장으로 출장을 나간 적이 있다.

2주일 전부터 그곳에서 근무하던 F는 막 도착한 A에게 인수인계를 했다.   


이후 그들은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둘 외엔 아무도 없었다.

서로 말도 없었다.  

적막한 공기만이 감돌았다.


A는 F와 동석한 게 어색했다.

그와 친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동안 F가 살짝 배타적이라고 느껴왔다.  


F는 비슷한 시기에 입사한 동기들과 어울릴 뿐 다른 사람들과 친해지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아직 회사에 적응이 안 돼서 회사 사람들을 외부인으로 인지해 경계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동기들과 함께하니 다른 이들과는 두루두루 친하게 지낼 까닭이 없었을지 모른다.


어떤 이유로든 나와 심리적으로 거리를 뒀던 사람과 갑자기 얘기하는 것은 무리였다.

딱히 말할 주제가 없다면 침묵하는 게 낫다.

억지로 화제를 끌어올리다가 말실수를 해서 불필요하게 오해 사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경직된 상태로 생각을 표현하면 본의 아니게 얘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를 때가 있다.    

물론 신변잡기적인 소재로 가볍고 단순한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스몰토크로 분위기가 풀리기도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무난한 주제가 떠오를 때만 그래야 한다.


분위기를 풀어보겠다고 상황에 걸맞지 않은 주제로 서두를 열면 본인의 이미지만 깎인다.

그럼 수습하는데 애를 먹고, 수습해도 여파가 남는다.


부정적인 이미지를 바꾸려면 시간이 걸린다.

닫혀버린 마음의 문을 여는 것은 서로에게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스스로를 갈아서 타자를 배려하고 친절함을 보여도 떠난 버스에 손을 흔드는 격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진심 어린 노력으로 오해와 편견이 풀려도 막상 실익이 없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서로 멀지만 동등한 위치에 있었던 관계가 갑과 을의 관계로 변질되기도 한다.

한 명이 다른 한 명을 일방적으로 하대하는 분위기가 형성될 수 있다.

친하게 지내는 것은 좋지만 이러면 득 보다 실이 많다.  

무엇보다 좋은 사람이 된다는 것이 힘들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기적이면서 연약하다.

성선설보다 성악설이 현실에 더 부합한다는 것을 우리는 살면서 깨닫는다.


게다가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 알아 겸허해지기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린다.

부족함을 깨달아야 고치는데, 고치는 시작점에 서기까지가 벌써 어려운 것이다.


좋은 사람은 본인이 좋은 사람이라고 주장한다고 좋은 사람이 되는 게 아니다.

타인이 좋은 사람이라고 명명해야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쁜 사람도 타인이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인식하면 좋은 사람이 된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에게는 관대하나 타인에게는 엄격하다.

남에게 높은 기대를 가졌다가 그 기대에 어긋난 결과를 맞이하면 모진 힐난을 퍼붓는다.

하지만 반대의 입장이 되면 너는 한 번도 잘못한 적이 없냐고 큰소리친다.


사실 타자의 기대를 일일이 충족시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리고 기대에 부응할수록 더 많은 요구를 받기도 한다.

결국 상대의 기대치에 맞추기만 하다 지쳐버린다.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높은 기대치를 갖는 것도 건강한 심리가 아니다.

기대가 높다는 것은 남에게 의존적이라는 뜻이다.

의존적인 유형은 작은 일에 쉽게 무너진다.

그들은 사람에게 상처받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그러면서 본인이 상처 준 것은 제대로 인지도 못 한다.


설령 누군가가 기분이 상했거나 상처받았다고 항변해도 그들은 오해받았다거나 나쁜 의도가 아니었다고 주장할 뿐이다.

늘 자신은 잘했고, 남은 잘못했다.  

모든 상황에서 본인만 피해자인 것이다.


결국 좋은 사람이 되려고 일방적으로 노력하다가는 서로 소진되기만 한다.

 

좋은 사람에 대한 정의도 사람마다 다르게 내린다.

어떤 이는 본인의 요구를 군말 없이 다 들어주면 인간성이 좋다고 해석한다.

자기주장이 없거나 비판에 맹렬하게 반박하지 못하는 사람을 착하다고 인식하기도 한다.


평판이 좋은 사람이 나에게만 유독 못되게 굴기도 한다.

좋은 사람도 모두에게 좋은 사람은 아니다.

누군가에게는 나쁜 사람이다.  

그리고 사람은 다양한 개성과 가치관을 가졌다.

각자의 세계가 다른데 누구에게나 좋은 반응만 얻을 수는 없다.

같은 행동도 누구는 좋게 보고, 누구는 나쁘게 본다.

이해관계와 입장에 따라서 같은 상황도 다르게 받아들인다.

그래서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듣고 도대체 어떤 말이 옳은지 헷갈리는 경험을 하곤 한다.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면 나의 언행을 엄격하게 검열하게 된다.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볼지가 나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정체성을 남에게 맡기는 꼴이다.

결국 자아를 서서히 잃어가는 과정에 서 있게 된다.  


나를 잃을 만큼 타인이 중요한 존재인가.

자신이 실종되는 관계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  


세상이 존재하는 것은 내가 세상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내가 죽으면 세상은 있어도 없는 것이다.  

내가 존재하기에 세상도 존재한다.

고로 나는 세계다.

나는 나의 전부다.

전부인 나를 세상의 일부인 남에게 맡기지 말자.

자기 자신에게 먼저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자.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은 힘들다.

그러니까 안 좋은 이미지를 쇄신하려고 시도하는 것 자체가 이미 불리한 싸움이다.


인간은 이성보다 감정이 앞설 때가 많다.  

한 번 요주의 인물로 찍히면 무엇을 하든 일단 손가락질부터 받는 게 대표적인 예다.  

똑같이 행동하는 누군가는 아무런 비판도 받지 않는데 말이다.

불공정한 잣대를 들이대면서 비판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객관적으로 사안을 판단했다고 자부한다.


또 상대는 나와 친해지고 싶지 않아서 의도적으로 말을 아낄 수도 있다.

멀리하고 싶은 이유가 오해일지라도 그 오해를 푸느니 오해를 푸는 힘으로 다른 사람과 잘 지내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인간의 마음은 조금만 가열하면 녹아버리는 마쉬 멜로우가 아니다.

딱딱해서 웬만한 충격으로는 깨지지 않는 바위와 같다.

굳게 닫힌 높다란 성벽의 문과 같다.

마음을 열기란 힘든 일이다.

시간과 정성이 필요하다.  


잘 지내보겠다고 섣불리 농담을 던지거나 속 깊은 얘기를 꺼내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스스럼없는 다가감에 타인은 거부감을 느껴 더 멀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좋은 의도로 말을 걸었는데 관계만 악화된다면 그것도 괴롭다.

 

현장에서 F는 침울해 보였다.  

회사에서는 못 봤던 모습이었다.  


현장이 힘든 곳이니까 지쳤던 걸까.

어쩌면 F는 별 생각이 없었을 수도 있다.  

원래 차분한 편이고, 저녁이 되자 단지 피로했을 수 있다.  

  

A는 표정이...라고 말하며 말끝을 흐렸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F는 자존심이 상했다.

‘표정’ 뒤에 붙은 말줄임표에 지적하거나 비꼬는 의도가 숨어 있다고 추측했을까.


아니면 친하지도 않은 사람이 본인의 사적인 감정을 멋대로 들췄다고 인지해서 불쾌했나.


아니면 원래 A를 탐탁지 않게 생각해서 그의 언행에 예민하게 반응했나.


아니면 A가 자신의 입장에 걸맞지 않게 F를 ‘평가’해서 기분이 나빴을까.


F는 A보다 현장에 먼저 온 사람이었다.

그것도 2주일씩이나.


지금까지 F는 현장에서 활동했다.

현장에 막 도착한 A가 인수인계를 받는 입장이다.

F의 입장에서는 A가 아쉬워하면서 현장에 대해 하나라도 더 물어봐야 옳았다.    


하지만 A가 격 없이(?) F의 감정을 턱 하니 짚었다.

F가 A의 감정을 평가할 수 있지만 A가 F의 감정을 평가하고 말로 발설한 것은 ‘선 넘기’ 일 수 있다.

이 지점에서 F는 A에게 주도권을 뺏겼다고 느껴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던 게 아닐지.  


다음 날도 둘은 같이 밥을 먹었다.

어제와 같은 풍경이었다.  

F는 A에게 들었던 말을 흉내 냈다.

표정이... 라면서.

그리고 덧붙였다.

나는 이 현장에 적응했지만 A는 여기 적응하기 힘들걸?


그는 ‘현장에 적응하느냐, 못 하느냐’로 상대에게 노골적으로 선을 좍 그었다.

심지어 남과 나를 의도적으로 ‘비교’했다.

스스로 현장에 적응을 잘했다고 교묘하게 자랑하면서까지 말이다.

 

F는 척박한 환경에서 적응하느라 나름대로 고생했다.

그는 바통 터치받는 사람이 본인의 노고를 알아주길 바랐다.

알아준다는 것은 적어도 기분을 짚는 행동은 아니었다.


A는 F가 드러내고 싶지 않은 영역을 건드렸다.

그래서 그는 어제 겪었던 설욕(?)을 갚고자 갈고닦은 무기를 사용한 것이다.  

 

A가 현장에 잘 적응해도 F는 그를 인정하지 못할 것이다.


애초에 F는 중립적인 입장에서 본인의 생각을 전달한 게 아니다.

현장에 막 도착한 사람이 적응을 못할까 봐 걱정한 것도 아니다.

다만 그는 상대를 깎아내리고 싶어 했다.


현장에 적응하기란 주제로 연막작전을 펼쳐 본심을 감췄을 뿐이다.

사실 상대가 적응을 못할지 잘할지 F가 무슨 수로 알겠나.      

우리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그들에게 생각의 근거를 구체적으로 물으면 전세가 역전될 때가 많다.


거들먹거리면서 판단하던 오만함이 자취를 감춘다.  

갑자기 그들의 얼굴 근육이 굳는다.

대답에 뜸을 들인다.  

앞, 뒤가 안 맞는 해명을 한다.

화제를 다른 데로 돌리면서 횡설수설한다.   

 

우리가 정확한 답변을 요구하면 그들은 당혹스러워하며 마냥 회피하기 바쁘다.   

어떤 이는 누군가를 실컷 비난해 놓고 막상 설명을 요구받으니 설명을 못하겠다고 말했다.

얼마나 할 말이 없었으면 불에 덴 사람처럼 깜짝 놀라면서 답변 자체를 자진해서 포기해 버릴까.


그들이 머리를 쥐어짜서 만든 변명이라곤 비논리적이고 추상적이어서 반박거리가 많다.

그대로 믿기엔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은 것이다.


그들이 진실을 말하는 게 아니라서 생기는 현상이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상대의 말 때문에 상처받았다거나 자존심이 상해서 트집을 잡는 거라는 등 개인적인 서운함이나 분노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기에 그들은 자존심에 이미 타격을 받은 상태다.


결국 그들은 질문으로 역공을 받으면 본인이 놓은 덫에 스스로 걸려들어 밑바닥을 드러낸다.  

남을 비하한다고 자신이 높은 위치에 오르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

남을 수시로 지적하는 사람이 알고 보니 누구보다 인성이 부족하고 실력이 모자란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A가 정색하고 까닭을 묻는다면 F는 횡설수설하며 궤변을 늘어놓았을 것이다.

F의 화법이 바로 가스라이팅이다.


가스라이팅은 현실을 객관적으로 판단해서 말하는 화법이 아니다.

나르시시스트의 주관적인 소망을 주문처럼 외우는 화법이다.


나르시시스트는 희생양에게서 보고 싶은 모습을 희생양의 진짜 모습인 것처럼 꾸며서 말한다.

그러니까 가스라이팅은 거짓말이다.

나르시시스트는 타인의 자존감을 훔치려고 거짓말의 씨앗을 뿌린다.

훔친 자존감을 자신의 낮은 자존감을 높이는 데 사용한다.  

  

F는 A가 현장에 적응하길 바라지 않았다.

A는 F의 기분을 평가해서 무안을 줬다.

그래서 F는 반감이 생겼다.

보복하고 싶었다.


나는 이 현장에 적응했지만 A는 여기에 적응하기 힘들걸?

이 말은 어제 A가 뺏어간 주도권을 되찾겠다는 투지가 담긴 것이었다.


A는 현장에서 잘 일하다 무사히 귀환했다.

F는 A가 사고라도 치고, 위급한 상황이 생겨서 도움이라도 청하길 바랐을지 모른다.

그럼 F가 거들먹거리면서 핀잔할 기회라도 생기는데 말이다.

A는 F의 기대를 본의 아니게 또 한 번 져버렸다.

나르시시스트는 존재의 추락으로 희열감을 느낀다.

나르시시스트는 의존적이기에 남을 괴롭혀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한다.


나르시시스트의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나르시시스트여야만 한다.

다른 사람이 그보다 더 능력 있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현실을 보라.

세상에 잘난 사람은 많다.


나르시시스트는 최고가 되고 싶다.

그런데 뛰어난 인물은 어디선가 혜성처럼 등장하기 마련이다.

나르시시스트는 그 누구도 자신보다 낫다고 인정하지 못한다.

나르시시스트 특유의 인지 부조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서열의 먹이사슬에서 윗단계에 있는 사람에게만 힘없이 굴복한다.

하지만 경쟁자나 아랫단계로 여겨지는 사람 앞에서는 거만한 태도로 돌변한다.

인정받지 못해서 상처받은 자아가 적절한 순간에 고개를 드는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는 동물적인 감각으로 본인이 덤벼도 타격 없을 것 같은 대상을 찾아낸다.

그 대상은 유한 성격을 지녔거나 잘 웃는 사람들이다.

그들을 통해 나르시시스트는 인정 욕구를 채운다.

그래서 사사건건 일을 만들어 적극적으로 비난하는 것이다.

가장 쉽게 괴롭히는 방법이 거짓말 즉 가스라이팅이다.


상대가 가스라이팅에 함몰돼 자아를 잃어가는 것.

자존감이 내려가서 결국 스스로의 능력을 의심하는 것.

그래서 악랄한 말만 골라하는 나르시시스트의 병든 정신에 기대는 것.


이게 온갖 감언이설로 악의적 의도를 포장하는 나르시시스트의 목표다.

사실 ‘타인의 말을 복사해서 되갚기 화법’은 다른 사람들도 사용하는 처세술이다.  

하지만 B가 그 수법을 쓰는 빈도는 너무 잦았다.

남을 말을 따라 하지 않으면 금단증상이라도 생기는지 그는 강박적으로 들은 말을 흉내 내고, 또 흉내 냈다.

 

A는 대화할 때 주객이 전도되는 것 같았다.

그가 말을 주고받는 대화를 하는 건지 타인의 말을 녹음기처럼 따라 하려고 대화하는 건지 그 경계가 모호했다.

나중에 B의 이미지가 ‘남의 말 흉내 내는 사람’으로 굳어질 지경이었다.


상대방 : 부담스러워.

B: 나도 부담스러워.


상대방: 내가 힘들어.

B: 내가 더 힘들었어, 더 힘든 일도 많아.


상대방: 나는 아무렇지 않았어.

B: 그 사람들도 너처럼 아무렇지 않았을 거야.

B와 같은 유형은 일상 자체가 상처다.

그들은 타인의 언어를 대화의 전체적인 맥락과 연관 짓지 않는다.

이 말이 상처가 되는지 여부에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모든 상황을 남보다 훨씬 더 예민하게 받아들인다.  

결과적으로 상처를 더 많이 받게 된다.

겉으로는 본인의 성격이 욱한다고 자진납세를 하는 것 같다.

실상은 진실의 절반만 말하는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상처받기 싫어서 혹은 상처받았기에 타인에게 으르렁거리는 것뿐이다.


그들은 매일 분노하면서 분노의 원인이 자신이라고 판단하지 못한다.

늘 상황이 잘못됐고, 본인은 고쳐야 할 점을 객관적으로 판단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B와 같은 유형은 빨간 버튼이 언제 눌릴지 모른다.

무엇을 기분 나빠할지 예측하기 힘들다.

그의 민감함을 감지한 사람들이 배려해서 부드럽게 말해도 소용없다.

결국 그들은 상처받을 요소를 기어코 찾아내고야 만다.

나르시시스트는 타인이 지켜야 하는 자잘한 규칙을 무수하게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회의실에서 문서를 달라고 하는데, 직원이 회의하기 직전에 문서를 자리에 갖다 줬다.

그런 상황에도 그들은 상처를 받는다.


왜 회의실에 가서 문서를 주지 않고, 회의 직전에 자리에 찾아와서 문서를 줬냐는 식이다.

피식 웃고 넘기기에는 나르시시스트의 병적인 심리가 드러나는 에피소드다.


나르시시스트는 본인이 제시한 규칙을 남이 지키는지 일일이 점검하느라 중요한 일에 쏟을 에너지가 없다.

불필요한 일에 과도하게 의미를 부여하느라 장거리 레이스를 달리기가 힘에 부치는 것이다.

 남들이 거들떠보지도 않은 소소한 영역에 유난히 집착해서 작은 일로도 불화가 일어난다.

그리고 규칙을 정한 나르시시스트도 그 규칙을 다 못 지킨다.

개인의 주관으로 정한 수많은 규칙은 사실 지킬 필요 없는 것들이 대다수다.  


나르시시스트는 기분 나빠할 만한 요소를 꾸역꾸역 찾아내서 따지고 빈정거린다.  

나르시시스트의 마음속에서 부정적인 생각이 지옥 불처럼 끊임없이 올라오는 것이다.

그들은 상대가 호의를 보여도 공격성이 숨어 있다고 해석한다.

그래서 사시사철 분노하느라 정신이 없다.  

본인의 의견을 반대하는 인물은 전부 적이다.

그래서 남을 괴롭힐 궁리를 하느라 여념이 없다.


B는 언제 뚜껑이 날아갈지 모르는 샴페인 병과 같았다.   

그는 기회를 봤다가 톡 쏘아붙이듯이 타인의 언어를 거울처럼 반사했다.

우연히 상대와 생각이 일치했다는 듯이 천연덕스럽게 연기를 하면서 말이다.  

부담스럽지 않아도 부담스럽다고 말할 사람이었다.

다음 날에도 B는 교역자와 미묘한 갈등이 생겼다.  
   

오전에 다 같이 봉사활동을 하려고 만나기로 했단다.

그런데 B와 학생들이 약속시간보다 더 늦게 장소에 도착했다.

이 일이 도화선이 됐던 것이다.


B가 말했다.

아침에 지붕에 페인트칠을 하기로 했는데, 우리가 10분 정도 늦은 거야.

그런데 교역자가 늦게 왔다고 막 뭐라고 하더라.

화가 나더라고.


그래서 내가 얘들한테 3시간 동안 페인트칠 할 거 2시간 안에 끝내자고 했어.

결국 2시간 만에 페인트칠 다 하고 푹 쉬었지, 뭐.


B는 교역자에게 한 소리를 들어서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예정보다 빨리 페인트칠을 마치고 쉬었단다.  


그는 작심한 듯 덧붙였다.


예전에 그 교역자가 군대에 있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대.

그때 군대 선임이랑 후임들이 다 알면서도 상황을 물어보지도 않고, 걱정도 안 하더라는 거야.

그런데 지금 행동을 보니까 왜 사람들이 무심했는지 알겠더라고.   


A는 멈칫했다.

가족 얘기를 하는 거야?


B는 교역자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일을 언급했다.

그가 상처받은 것과 별개로 가족의 사망을 끌어들여서 자신을 방어하는 것은 도의적으로 선을 넘는 발언이었다.  


A는 B가 생각보다 훨씬 더 모자란 성품을 지녔다는 걸 알았다.

평소 B는 다른 사람들을 도덕성의 잣대로 판단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B는 실전에서 그들보다 더 못한 모습을 보였다.

A는 그 점이 실망스러웠다.


B는 타인의 눈에 본인이 어떻게 비치는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A는 그 점이 살짝 우스꽝스러웠다.


A가 힘들어하면 B는 줄곧 말해왔다.

그 정도의 일은 아닌데.


B는 그것, 그렇게, 그 정도, 그런, 저런 등 대명사를 많이 쓴다.

그래서 맥락으로 유추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서 ‘그 정도의 일’이라는 것은 힘들어할 정도가 아니거나 과하게 힘들어한다는 의미다.

B는 비웃음인지 실소인지 판단하기 애매한 제스처를 취하며 A의 일에 심리적으로 거리를 뒀다.

B는 자신과 알고 지낸 사람들을 구박하는 경향이 짙었다.

사소한 일에 핀잔을 주거나 그것도 모르냐고 기세등등하게 말하곤 했다.    

 

처음에 A는 B의 행동에 별로 이질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가 걱정해 주는 척하면서 나쁜 말을 하거나 염려한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무시했기 때문이다.


남이 맞아서 아프다고 하면 더 세게 맞은 사람도 있다면서 가소롭다는 식으로 반응했다.

상대의 힘든 경험을 내려다보는 듯한 자세를 취하면서 스스로를 치켜세웠다.

자신은 남들에 비해 잘했다고 셀프 칭찬하기까지 했다.  

  

B는 타인의 고통을 묵살하는 게 성숙한 태도라고 착각했다.

그래서 너보다 힘든 사람들이 더 많다고 강조했다.

의문은 그가 어려울 때는 울고 불고 난리를 치며 비련의 주인공 행세를 했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일을 겪든 항상 나보다 힘든 사람은 존재할 것이다, 앞으로도.

그런데 힘든 상황 자체를 말하고 싶은 거지 내가 제일 힘들다는 게 주제는 아니다.

다른 사람의 괴로움을 남들과 비교하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타인을 인격적으로 헤아리지 않는 행동이다.

실의에 빠진 사람에게 불필요한 마음의 짐을 얹는 셈이다.  


나의 아픔을 하찮게 여기는 이들에겐 사람들이 더 이상 속내를 말하지 않는다.

나를 이해할 거라는 신뢰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힘들다고 하면 역지사지할 줄 알아야 한다.

상대의 마음을 헤어린 후 답하는 겸손함이 필요한다.

상대를 인격체로 인정한다면 말이다.


B는 교역자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를 응징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복수에 눈이 멀어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예의를 쉽게 저버렸다.    

교역자가 부담스럽다, 왜 늦게 왔냐고 했다 한들 가족까지 말하며 비난할 만큼의 일은 아니다.


A는 침묵했다.

속내가 빤히 보이는데 굳이 그의 편을 들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그의 처세가 너무한다고 생각했다.  

 

A는 B가 교역자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을 언급하면서 험담한 행태가 잘못됐다고 말했다.  

그러자 B는 A의 기억이 섞여 있다고 반박했다.


기억이 섞여 있다.

아까 꺼냈던 방어 카드다.

그 말이 추상적이고 막연하다.

무슨 기억과 무슨 기억이 섞였다는 건지 설명이 모호하다.

구체적인 언어로 다시 풀어야 한다.

A: 무슨 이야기와 무슨 이야기가 섞여 있어?


B: 부담스러웠다고 말한 것도 맞고, 페인트칠 얘기도 맞아. 그런데 그 교역자가 군대 있을 때 부모님 돌아가신 건 들어 본 적 없어. 그리고 그걸 알 정도로 관계가 깊지 않았어. 그러면(만약 교역자가 얘기했다면) 내가 기억을 못 할 수가 없잖아.


기억을 못 할 수가 없다는 것은 기억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현실적이지 못한 주장이다.

기억을 못 할 수 있다, 사람이니까.

사람은 발생한 모든 일들을 모조리 기억하고 살지 않는다.

얘기를 들었지만 나중에 잊어버렸을 가능성은 농후하다.

들은 얘기를 기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억지다.

지금 B도 상대가 기억 못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무언가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방어적인 표현이다.

본인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잘못이나 부족한 행동에 대한 책임을 면피할 명분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관계가 깊지 않아도 과거의 이야기 정도는 들을 수 있다.

A가 구체적으로 말하는데, 단지 친하지 않다거나 기억할 수밖에 없는데 기억이 안 나니 없던 일이라는 게 도통 믿기 힘든 주장이다.


B는 상대가 기억을 못 하면 단지 기억을 못 하는 거라고 믿는다.

그런데 본인이 기억을 못 하면, 얘기를 들었다면 당연히 기억할 거라고 믿었다.

똑같은 상황인데 해석이 달랐다.

나르시시스트는 자기중심적이다.

모든 상황을 본인에게 유리한 대로 해석한다.


예를 들어 누군가의 설명을 나르시시스트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럼 나르시시스트는 상대가 설명을 못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나르시시스트의 설명을 상대가 못 알아들으면 얘기가 달라진다.

상대의 이해력이 문제라는 것이다, 나르시시스트의 관점에서는.


그러니까 나르시시스트와 이치를 따지거나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주고받기란 힘들다.

남 탓 전문가인 그와 아무리 얘기를 해봤자 돌림노래가 될 가능성이 크다.

B: 그 교역자가 군대 있을 때 부모님 돌아가신 건 들어 본 적 없어.


나르시시스트와 대화할 때면 사소한 부분도 짚어서 고쳐야 한다.


A: 부모님이 아니고 어머님만.  


B: 그런 이야기는 들어 본 적 없어. 그런데 그 앞에 말한 것들은 확실해.


A는 가족 얘기를 핵심으로 말했다.

그런데 B는 A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부분만 집어서 확실하다고 말했다.

얘기의 초점이 어긋났다.

초점을 가족으로 다시 돌려야 한다.

일단 A는 부담스럽다는 이야기를 다시 확인했다.


A: 그랬지. 그래서 부담 느낀다고 들어서 B가 기분 나빠했다. 맞지?


B: 그렇지. 수련회 갔는데 우리가 오는 걸 부담스럽다고 하니까.


A: B가 자기 보호를 한 거지. 부담스럽다는 말을 받아친 거지.


B: 아니. 받아친 적은 없어. 그런 적 없어. 하하하


A: 받아친 거지. 기분 나쁘니까 B도 똑같이 부담스럽다고 말한 거지.


 B: 아니, 내가 같이 부담스럽다고 이야기한 적은 없어.  


A: 그렇게 얘기했어 B가.


B: 그런데 어쨌든 그분이 부담스럽다고 – 아니, 그런데 교역자가 우리랑 권사님들이랑 너무 많이 온다고 해서 부담스러웠다고 했어.

B는 ‘어쨌든’이라고 화제를 돌렸다.

부담스럽다는 말이 기분 나빴다면서 본인도 똑같이 부담스럽다고 말한 것은 B에게 불리한 내용이다.


나르시시스트는 교묘하게 대화의 화제를 바꾼다.


‘어쨌든’ 교역자가 부담스럽다고 말했단다.

이는 이미 짚은 내용이다.

화제를 돌린 것은 A의 반박을 다시 반박하기 힘들다는 뜻이다.  

대신 B는 교역자가 부담스럽다고 말한 것을 다시 강조했다.


B: 우리도 교회 수련회까지 가기가 부담스러운 상황이었어. 그래서 부담스럽다고 이야기한 건데. 그게 받아쳤다고 느낀 거면 내가 기분이 안 좋았다고 해서 그랬을 수도 있는데. 그 이야기는 받아치려고 한 건 아니야.


B는 아까 ‘같이 부담스럽다고 한 적은 없다’고 말했다.

여기에서 부담스럽다고 말한 적이 없다는 건지, ‘같이’ 부담스럽다고 말한 적이 없다는 건지 애매하다.

그리고 ‘같이’ 부담스럽다고 말한 적이 없다는 뜻도 풀기 애매하다.

뒤의 말을 들어보면 받아치려고 한 말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A: (받아친 게 아니라면 그 말을 한 의도가 뭐야) 무슨 이야기야, 그럼?


B: 그러니까 우리도 일정 때문에 사실 오는 게 그렇게 편하게 온 건 아니고, 우리도 조금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는 이야기를 한 거지.


A는 말의 내용에 대한 의도를 물었다.

B는 A의 질문을 평서문으로 바꾼 답변인데, 질문의 취지와 맞는 방향이 아니다.

하지만 B는 원래 의도가 무엇인지 설명 못 하고, 다시 내용만 강조했다.  

A는 넌지시 질문했다.


A: 그럼 그 사람도 기분 나쁠 걸 예상했겠네?


B: 그 사람이 기분 나쁠 건 없지.


A: 왜?


B:.... 그러니까 우리도 우리 일정 때문에 우리도 막 너무 오고 싶어서 이런 상황으로 온 건 아니라고 말한 거니까.


B는 잠시 망설이다가 내용만 다시 강조했다.

같은 말을 반복한 것이다.

할 말이 없거나 얘기를 그만하고 싶을 때 쓰는 처세술이다.  


A는 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

B가 교역자와 마찬가지로 부담스럽다고 말한 이유는 무엇인가?

B는 교역자가 부담스럽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 나쁠 걸 알았나?


질문의 내용은 달랐다.


하지만 각기 다른 질문에 B의 답은 똑같았다.


교역자와 마찬가지로 부담스럽다고 말한 이유는 우리도 바쁜 일정이 있어서 부담스럽기 때문이야.


교역자가 기분 나쁠 필요가 없는 이유는 우리도 바쁜 일정이 있어서 부담스럽기 때문이야.


질문의 취지와 어긋나고, 대화의 맥락과 겉도는 응답이다.


그리고 우리가 막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니라고 말한 거니까 교역자가 기분 나쁠 이유가 없다는 것은 B의 궤변이다.

이전에 B는 말했다.


교역자가 우리랑 권사님들이랑 너무 많이 온다고 해서 부담스러웠다고 했어.

수련회 갔는데 우리가 오는 걸 부담스럽다고 하니까 (기분이 나빴어)


그의 궤변을 정리하자.  


교역자가 수련회에 우리가 많이 와서 부담스럽다고 하니까 기분 나빠.

 

나도 다른 일정이 있는데 무리해서 교회 수련회 왔어.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니야. 그래서 부담스럽다고 했어. 그런데 교역자가 그게 왜 기분 나빠?


만약 B가 이 수련회를 책임지는 교역자의 입장이고, 참석한 사람들이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니라 바쁜 일정을 쪼개서 왔다고 말한다면 어떨까?


B는 상처받았다고 난리를 칠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서.


이미 수련회까지 와 놓고, 눈치 없이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니라고 말하는 행동은 너무 경우가 없잖아?

부담스럽다고 말하는 진짜 의도가 뭐야?

나한테 어떤 반응을 얻고 싶어서 바빴다고 말하는 건데?

설마 내가 아쉬운 입장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너희들이 안 와도 이 수련회에 아무런 지장 없어.

나는 하나도 안 아쉬워.


자기들이 바쁜데 시간 쪼개서 수련회에 행차하신 거라고 지금 생색내는 거야?

나도 바쁜 사람이야, 자기들만 바빠?

솔직히 말하면 나도 사람들이 많이 와서 부. 담. 스. 러. 워.


나중에 B는 당당하게 자신을 표현했다.


나는 우기는 스타일이야.

나는 우기는 성격이라고.

맞다.

나르시시스트는 잘 우긴다.


특히 잘못했다는 평가를 들었을 때 잘 우긴다.

나르시시스트는 지적받는 것을 굉장히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거짓말도 잘한다.   

부모님께 혼날까 봐 부뚜막으로 숨는 어린아이의 심정인 것이다.

 

A: 그런데 전도사가 부담스럽다고 말을 안 했으면 B도 그런 말을 안 했겠네?


교역자가 부담스럽다고 하니까 그도 똑같이 부담스럽다고 말한 게 아니냐고 되묻는 거다.

그런데 B는 다르게 알아들었다.

다른 사람이 원인을 제공해서 자신이 어쩔 수 없이 그런 거라고 말할 기회로 여겼다.

‘남 탓’할 숨구멍이 생겼다고 인지한 것이다.


B: 그렇지. 왜냐면 그건 서로 그런 이야기를 하게 됐으니까 얘기를 한 거지. 꼭 기분 나빠서 한 게 아니야.


서로 부담스럽다고 말해서 부담스럽다고 얘기했다는 것은 비논리적이다.   


서로 부담스럽다고 말한 게 아니다.

먼저 교역자가 부담스럽다고 얘기한 것을 듣고 난 이후에 B가 응수한 것이다.  


그러니까 교역자와 B가 동시에 부담스럽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B는 묘하게 원인과 결과의 순서를 바꿨다.


B는 부담스럽다고 말한 것은 교역자가 같은 말을 하니까 ‘어쩔 수 없이’ 꺼낸 거라고 변명했다.

문제가 될 만한 발언을 한 것은 교역자 때문이라고 책임을 떠넘긴 것이다.  


그는 속내를 밝히는 걸 꺼려했다.

그래서 말을 빙빙 돌리고 같은 말만 주야장천 반복했다.

A는 그가 군대 이야기를 한 게 맞다고 반박했다.


A: 기억이 섞여 있는 건 아니야. 그런데 그렇게 (군대 관련) 이야기한 건 맞아. 다른 사람들한테 그런 이야기를 들은 기억은 아예 없고. 왜 그걸 왜 기억하냐면 -


B: 그런 이야기한 적 없어.


B는 상대의 말을 끊었다.  


A: 그걸 들었다니까. 들은 나는 뭐야?


B: 하......


들은 사람은 있다는 것은 말한 사람이 있다는 거다.

말하는 사람이 없다면 들은 사람은 도대체 어떻게 듣게 된 것인가.

B는 A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그날 B는 전화상으로 열불을 내면서 교역자를 욕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렇게 상세한 기억이 있는데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니.


A: B가 기억 못 하는 걸 내가 기억하면 나를 잘못된 사람으로 단정하는 게 불편해. B의 기억이 오류날 수도 있잖아. 그런데 왜 무조건 기억이 혼재됐다고 하는 거야?


무조건 다른 사람 탓만 하지 말고, 자신은 허술함이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하라는 거다.

다른 사람이 혼동해서 기억을 잘못하고 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다.

본인이 기억이 없으니까 다른 사람의 기억이 잘못됐다는 것은 논리적인 비약이자 비현실적인 억지에 불과하다.

 

B: 내가 기억이 안 나는데 인정하긴 좀 그래. 나도 한 번 들은 이야기는 잘 기억해. 사소한 것까지 잘 기억하는 편이잖아. 나는 기억이 없으니까 애매한 거야.


B는 새로운 방어 카드를 꺼냈다.

자신의 기억력이 좋다는 주장이다.  

기억력은 제삼자가 객관적으로 측정하기 힘든 영역이다.

그리고 실제로 B는 많은 것들을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력이 좋다는 것은 그의 주관적인 느낌이지 객관적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나르시시스트는 현실감각이 떨어진다.

그는 과도한 자신감을 보이는 것도 방어적인 이유가 크다.

자신을 포장해야만 험한 세상에서 생존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다치지 않으려고 나르시시스트는 밑밥을 많이 깐다.   

그는 우월감과 열등감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데, 타인보다 능력 있다고 자부할 때는 오히려 열등감을 느낄 때다.


그러니까 나르시시스트의 자신감은 실체가 없다.

아까 B가 기억력에 대해 커다란 자부심은 표출할 때처럼 말이다.


나르시시스트가 주장하는 것처럼 그가 대단한 실력이 가진 경우는 극히 드물다.

아예 없다고 하면 나르시시스트가 서운할 테니까 드물다고 치자.


무엇보다 우리는 이 사실만큼은 다 알고 있다.

정말 능력 있는 사람은 겸허하다.

스스로 남들보다 부족하다고 여겨 더 열심히 산다.

A가 모 회사에서 모 선배가 은근히 괴롭힌 적이 있다.

명령조로 지시하고, 먹다 남은 과자를 주는 식으로 야비하게 나왔다.

어느 날, A는 몹시 화를 냈고, 선배는 상처를 받았다.


그 일화를 말하자 B는 선배에게 감정이입이 됐는지 이렇게 말했다.

네가 너무 바가지(싸가지)가 없잖아.

알아서 기어.


A: 직장 다니면서 사람들이랑 갈등할 때 -


 B: 그런데 난 직장생활 안 해서.


직장생활을 했느냐 안 했느냐가 핵심이 아닌데.

평소 B는 자신의 경험이 풍부하고 나이도 많아서 누군가를 가르쳐주고 싶다고 했다.

사실 가르치는 자기 자신에 대해 취해 있으면서 이타적인 면모를 지녔다고 포장한 것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는 경험의 부족을 내세웠다.  

그 주제를 논하면 지금 현시점에서 불리할 것 같으니 한 발 물러서고 싶다는 거다.


하지만 당시 B는 기세등등했다.

A가 직장에서 힘든 일을 겪으면 B는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직장을 안 다녀봐서 모른다고 소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그 대화에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그는 마치 대단한 사실을 말하는 것 마냥 세상에 더 힘든 일도 많다고 거들먹거렸다.   

A는 세상에서 제일 힘들다고 말한 적도 없는데 B는 괜히 설레발을 쳤다.


그는 본인은 상대보다 더 힘든 일을 겪었다고 말했다.

선배들한테 사람 취급도 못 받았다고 하소연까지 했었다.

그런데 B가 A를 대하는 태도를 감안하면, B도 사람취급 못 받았다고 서러워할 것은 못 된다.

세상에 더 힘든 일도 많은데 나보다 더 힘든 사람을 생각하며 참아야 하는 게 아닌가.


그는 그 누구보다 아는 척을 했다.

그런데 지금 괜히 역공당할까 봐 잘 모른다고 어리숙하게 답변하는 것이다.  


A는 실소가 나왔다.


A: 내가 인간관계에 갈등이 있으니까 다른 사람도 너 때문에 그랬을 거라고 말한다든가. 기분 나쁘잖아. B가 누군가 때문에 힘든데 그 누군가도 B 때문에 기분 나빴을 거라고 하면 좀 그렇잖아. 내가 기분 나빠할 걸 알면서 왜 못되게 말하지 생각했어. 내가 힘든 상황을 역이용한 거잖아(악의적이야). 나를 어떤 사람으로 봤던 걸까. 진심으로 대했더니 하대하나 생각했지.


B:.................................
     

B는 침묵했다.

침묵의 의미는 여러 개다.


첫째는 동조다.

맞는 말이라서 침묵한다.

아니면 인정하기 껄끄러울 때 침묵한다.


둘째는 동조하지 않는다.

반박하고 싶은데 뭐라고 답할지 모를 때 침묵한다.


A: B가 둥글둥글한 성격 아니야.


B: 그럼. 절대 아니지. 성격이 좀 그렇지.


‘절대’라는 수식어를 덧붙은 이유는 그 뒤에 붙은 말을 강조하고 싶다는 뜻이다.

그리고 ‘절대’ 뒤에 나오는 내용이 자신에게 유리할 때 그런다.

B는 스스로 할 말은 하는 센 성격이라고 자부하곤 했다.

남들이 그걸 인정해 주길 바랐다.

그래서 여러 차례 자신의 성격을 상세하게 설명하며 긍정적인 반응을 얻으려 애썼다.  


하지만 그는 센 성격이라고 자신을 포장했던 것뿐이다.

센 사람은 스스로 센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공부를 굉장히 잘하는 사람이 자신은 늘 부족해서 더 열심히 공부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비슷한 심리다.


오히려 B는 약함이 드러나는 걸 두려워하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친절한 사람들을 공격하고 군림하고 싶어서 안달을 했던 거였다.

약함이 드러날까 봐.


A: 너무 나한테 뾰족뾰족하게 이야기를 하니까.


B: 응.


A: 그런데 처음부터 그랬으면 저분은 원래 저런 스타일로 알았을 텐데. 예전엔 나한테 그런 모습을 안 보였는데 -


B: 아마 그때는 이런 일로 부딪힐 일이 없었겠지.


B는 태도를 바꿨다는 걸 부인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는 교묘하게 태도를 바꾼 원인을 상황 탓으로 돌린다.

A는 동조하는 척했다.


A: 그럴 수도 있겠네.


B: 나는 이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하면 말하잖아. 예전엔 그런 식으로 부딪히거나 이거는 이게 아니지 않냐라고 말할 일이 없었는데.


B는 자신을 포장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계속 지적하던 A가 살짝 부드럽게 동의하자 B는 기운을 내서 자기 어필을 했다.    


그는 못 되게 군 것을 남에게 책임을 떠넘긴다.

본인의 성격을 ‘할 말을 하는 사람’이라고 규정했다.

할 말을 하는 사람이라는 프레임으로 씌워서 태도의 변질을 미화하는 것이다.


아니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흔히 들어본 주장이다.

아니면 아니라고 말하는 A 앞에서 B는 어쩔 줄 몰라하며 방어하는 중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이 선택한 말과 행동에 책임지는 걸 두려워한다.

그래서 잘하는 것은 부풀리고, 잘못한 것은 축소하거나 없던 일이라고 둘러대는 것이다.


B: 직장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 얘기를... 그렇지... 자주 보는 것도 아니고, 통화하면서 그런 부분이 생겼겠지. 나도 여러 상황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지는 기간이 길기도 했고.


다시 외부환경을 탓한다.


B: 너무 이런 쪽으로 생각하지 말고 다른 방향으로... 꼰대스러운 게.. 결국 그게 그 사람도 그렇지 않았겠냐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하니까.. 결국 힘들어서 전화한 건데 -

B는 선의를 강조했다.

그런데 정말 선의였을까.


B는 그냥 신경질을 내거나 빈정거렸다.  


네가 그러면 너무 바가지(싸가지)가 없잖아.

너로 다른 사람 때문에 힘들지만 다른 사람도 너 때문에 힘들었을 걸?

너는 왜 그런 것도 몰라?


이런 종류의 말이 과연 선의였냐는 거다.

핀잔과 구박이었다, 그건.


A: 그런데 다른 사람도 그랬을 거라는 게 그런 결의 이야기는 아니잖아. 너도 다른 사람한테 그런 사람이야 이런 뉘앙스였지. 내가 누구 때문에 힘들다고 하면 다른 사람도 너로 인해 힘들었을 거야 그런 뉘앙스로 말했지. 힘들다고 했더니 내가 들은 이야기는 그런 거잖아. 무시당하는 기분이 들었어. 내가 힘든 게 재밌는 건가 싶기도 하고. 은근히 잘 됐다고 생각하는 건지.  


B: 내가 여자들의 화법으로 이야기를 안 하고 -


A: 여자들의 화법?


B: 그렇지. 힘들다고 말하는데 쓸데없이 답을 주려고 하는 것처럼 얘기를 한 거지. 내가.


A: 그런데 답을 주는 건 아니지. 구박을 한 거지. 이건 남자와 여자 화법의 차이가 아니야.


B: 아, 어쨌든 내가 너를 구박했다고 느꼈... 그렇게. 응.

나르시시스트는 타인을 공격적으로 대한다.

그러다가 상대가 태도를 문제 삼으면 그제야 해결책을 주거나 가르쳐주려고 했다며 자신을 포장한다.


A가 화법의 차이가 아니라 구박이라고 프레임을 벗겨냈다.

B는 반박하지 못하고 화제를 돌리려고 했다.  

‘어쨌든’이라고 하면서.

B가 A와 대화하면서 가장 많이 언급한 말이 ‘어쨌든’이다.

 

A: 그렇지. B가 누구 때문에 힘들다고 하는데 내가 B도 다른 사람한테는 (누군가처럼 남을 힘들게 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면 그건 완전 (상대의 감정을) 무시하는 거지. 남자 여자 화법은 상관없고. 그거는 B가 (악의적으로) 노리고 했다. 이렇게 받아들였지.


B: 아~~~~


B가 무언가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이 과장스럽게 감탄사를 내뿜었다.


A: 그거 기분 나쁠 걸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어. 나 기분 나쁘라고 한 말이잖아.


B: 응.


A: 나를 뾰족뾰족하게 구박하듯이 대하니까. 어린 사람을 쉽게 대하는 사람인가 싶었어. 나를 잘근잘근 밟는 건가 싶기도 하고.  


B:.....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B는 본래 어떤 마음이었는지 설명하지는 못했다.

다만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는 말만 했다.  

A가 화가 났던 것은 B가 사람에 따라 태도를 바꾼다는 거였다.

A: B가 모두에게 똑같이 대하는 건 아니잖아. 그렇게 대하는 사람이 있고 안 대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나를 무시하게 됐나 보다 생각이 들었지. B가 본색을 드러내고 나를 막 대하는 건가. 나이가 어리면 쉽게 대하는 사람들이 있잖아. B는 그런 스타일로 날 대하는 거야? 나를 대상으로 선배 놀이 하고 싶은 건가? 나 때는 더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기분이 나빴지. 배신감이 들었지.


B:.........................................


B는 대꾸하지 않는다.

A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몇 가지 가능성을 추리겠다.

그는 A의 말이 맞다고 생각해서 반박할 거리가 없었다.

아니면 나쁜 사람이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은데 아니라고 말할 근거를 못 찾았다.


A: B가 김밥집에서 (만났을 때) 말이 안 통한다고 하면서 웃었잖아. 나를 무시한 거지. 그런 행동 보면서 예전 일들이 다시 생각났어.


B: 응.


A: 내가 잘못 기억했다고 단정하는 건 아닌 거지? B가 기억 못 하는 거지 내가 잘못 기억하거나 왜곡된 기억을 하는 건 아니야.


B: 나한테는 어쨌든 물음표의 영역이야.


‘어쨌든’이라고 말하며 기억을 인정하냐는 질문을 회피했다.

상대의 주장을 재반박하기가 껄끄럽다는 뜻이다.

대신 물음표라는 단어를 끄집어냈다.

A의 기억을 여전히 부정한다는 뜻인가.


물음표가 모르겠다는 의미라면 더 이상 이 상황을 해결할 의지가 없다는 뜻이다.

이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이 상황을 판단의 영역에 집어넣으면 본인에게 유리할 게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과하고 싶지도 않고, 인정하고 싶지도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A: 왜 (물음표야)?

B: 뭐.. 뭐 어떡해. 하하하하.


어떡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A에게 묻는 건가.

문제를 해결하는 화법은 아니다.


아까와 비슷한 심리로 상황을 해결하고 싶지 않다는 뜻일 수 있다.  

어떡하냐는 것은 수동적인 반응이다.

상대의 처분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면 이 상황에서 일단 도망치고 싶다는 뜻일 수 있다.


A:.... 아무도 B한테 이런 이야기를 안 한 거야?


B: 어........... 일단 나는 연락하고 지내는 사람이 없어


질문의 취지에 비껴간 답변이다.

A는 연락하는 사람이 있냐고 묻지 않았다.

이전에도 이런 종류의 충고를 들었는지 물었다.


그런데 B는 일단 연락하는 사람이 없단다.

A처럼 말해주는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답변을 미루려고, ‘일단’ 주변에 사람이 없다고 답했다.


이러면 A의 의도에 맞게 대답할 가능성을 차단하는 게 된다.  

그에게는 답변하기 싫은 질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아예 자신의 성격을 판단할 사람 자체가 없다고 답변한 것이다.


B도 A를 하대한다는 걸 인지 못하진 않았다.

왜냐면 그가 신경질을 낸 이후에 갑자기 친절해졌기 때문이다.

이전의 행동을 기억하고 신경 썼기에 의도적으로 살가운 척 과장스럽게 행동한 것이다.


B는 A의 기억 대부분을 전면 부정했다.

부인하는 이유는 간단명료하다.


기억이 안 난다는 거였다.

기억이 없으니까 없던 일이라는 거다.

A의 기억이 구체적이었음에도 B는 추상적인 추측만 내놓고 거기에 따른 설득력 있는 근거도 대지 못했다.


그럼 A가 내 기억의 실체가 뭐냐고 묻자 B는 이런 답을 내놨다.

누구 다른 사람과의 대화를 착각한 것 아니야?


한 두 가지도 아니고. 여러 가지의 기억이고 구체성을 띈 내용인데 B가 아닌 다른 사람의 행동이라는 거다.  

B는 비상식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르시시스트가 원래 비상식적이다.

그는 모든 상황을 남 탓으로 돌리는 걸 보면 유추할 수 있다.

현실적이지 못한 사고력을 지니면 모든 상황에서 남 탓만 한다.

나르시시스트는 남의 의견에 반대하는 걸 좋아한다.

반대의 내용에 관심이 없고, 반대하는 행위 자체에 관심이 있다.

그래서 그가 하는 말엔 내용이 없다.

실체가 없다.

실체가 없다는 것은 반대의 근거가 설득력이 없고 허황될 때가 많다는 거다.


나르시시스트는 식은땀을 흘리며 타인의 주장에 반대하고, 타인이 반대하는 것도 반대한다.

반대를 위한 반대다.


너는 욱하는구나.

B가 누군가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이 나중에 그 기억을 떠올리면 B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

네가 욱하는 성격은 아니지.


욱한다고 해 놓고, 다시 욱하는 게 아니란다.


너는 우기는구나.

B가 누군가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 사람이 나중에 그 기억을 떠올리면 B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너를 우긴다고 생각한 적이 없어.

우기는 건 내 스타일인데, 하하하.


내 구체적인 기억이 없던 일이라면 도대체 그 기억의 실체가 뭐냐고 질문한다.

그럼 B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기억력이 좋은데 기억이 안 나서 그래.

기억력이 좋은 내가 기억이 안 나면 기억이 안 나는 게 아닐 수도 있잖아.


설득력도 없는 이런 근거를 대면서 기세등등하게 타인의 기억을 거부했던 것이다.


바로 이런 게 실체가 없다는 거다.


나르시시스트가 도대체 말하고 싶은 게 뭔지 사실 나르시시스트 자신도 모른다.

그저 불편하고 두려운 감정을 재빨리 처리하고 싶어서 얄팍한 처세술을 발휘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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