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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우칠 줄 모르는 나르시시스트와 심리전하기

나르시시스트는 교묘하게 타인을 논리를 흉내 내면서 자신을 보호한다

평생 함께 갈 것 같았던 친구도 과거의 점 같은 존재로 남겨지곤 한다.   


학생일 때 우리가 겪는 상황은 대부분 비슷했다.

그래서 공통점이 많았다.

얘기가 잘 통했다.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하지만 성인이 되면서는 차이점이 많아지는 경험을 한다.

취업 시기, 직업, 나를 둘러싼 사람들 등 환경이 변화하는 것이다.

또 누군가는 독신으로 살고, 누군가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린다.


똑같은 ‘나’이지만 살아가는 환경이 달라지니 상대와 나눌 만한 공감대가 흐려진다.

또 자아가 성장하면서 가치관이 뚜렷해지니 친구라 여겼던 그 사람에게서 용인하기 힘든 면을 발견하기도 한다.      


한때 침묵조차 편했던 사람과 시시껄렁한 농담을 주고받기도 조심스러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듣기 좋은 말만 하고, 표면적으로 대한다.


예전에는 속마음을 가감 없이 나눴다.

의견이 다르면 얼굴을 붉히며 비판의 칼날을 세웠다.

며칠 동안 말도 안 섞고, 냉전을 유지하면서 자존심 싸움까지 했다.  

그래도 새살이 돋는 것처럼 어느덧 관계가 회복됐었다.


지금은 대화가 참 유려하다.

마음에 걸리는 뚜렷한 문제가 없다.

하지만 헤어진 후에 뒤돌아서면 마음이 공허하다.

티격태격하면서 계산하지 않고 약점을 보였던 때가 차라리 더 윤택한 대인관계라는 생각마저 든다.

불편한 순간이 켜켜이 쌓인다.

조금만 참으면 편한 사이로 돌아갈 거라고 낙관했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씁쓸하게도.

누적된 이질감으로 친밀했던 얼굴을 보기가 어색해졌다.   

핸드폰에서 이름을 검색하다가 이내 취소 버튼을 누른다.

일주일에 몇 번씩 전화하고 문자 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연락하기도 망설여지는 것이다.


친구는 더 이상 예전의 그가 아니다.

그에게도 예전의 내가 아닐 것이다.

우연히 눈을 마두 친 행인처럼 상대가 생경하다.     

각별했던 우정이 빛바랜 편지지처럼 남겨진 것이다.           

누구나 겪을 법한 일이다.


가치관이나 성격이 극단적으로 달라도 인연이 정리된다.      

다름은 틀림이 아니다.

이런 경우 나를 자책하거나 상대를 탓할 필요 없다.


N극과 S극은 서로를 격렬하게 밀어낸다.

성질 자체가 반대라서 본질적으로 편안하게 붙을 수 없다.   

친해지려고 지속적으로 노력해도 어색한 타인, 선의로 대화해도 설명하기 어려운 지점에서 자꾸 핀트가 어긋나는 상대가 있다면 그 관계를 재고해 보자.


또 한쪽의 잘못으로 한쪽이 실망해서 연락을 일방적으로 끊기도 한다.

우리는 타인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상처를 받기도 한다.

인간은 참 부족한 존재다.  

하지만 나르시시스트와의 손절은 이러한 보편적인 양상과 확연히 다르다.  


십여 년 전, A는 모 동아리에서 활동한 적이 있다.

당시 동아리에서 회원을 모집하고 있었다.

그때 다른 회원인 C는 B에게 A를 소개했다.

사람들과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는 걸 좋아하는 특성은 동아리에 참여하기 좋은 연결고리다.

그렇게 A는 동아리의 크루가 됐다.   


당시 A는 여러가지 안 좋은 상황들이 겹쳐져 마음이 힘든 상황이었다.

동네 교회에서 우연히 청년부 임원을 맡게 됐던 것이다. 

청년부에서 기존에 활동하던 일부 사람들의 텃세가 문제였다.

특히 A보다 나이가 한 살 많은 D의 품행은 그의 고민거리였다. 


D는 몇몇 특정 교인들에게만 무례하고 고압적으로 굴었다.

이십대 초반인 그는 사소한 일에도 명령조의 말투를 써서 서열을 정리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사소한 일에도 사람들을 원망하거나 짜증을 냈다.

그가 유일하게 과도한 친절을 베푸는 사람들은 따로 있었다. 

사람을 노골적으로 차별대우하면서 자존감을 챙겼던 것이다.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한 D는 이십 대 초반에 일찌감치 취직했다.

어린 나이에 막내로 입사해 회사 생활이 녹록치 않았다. 

언젠가 그는 본인이 상사 앞에서 작아진다며 웃은 적이 있다.

아마 진짜 웃고 싶었던 건 아닐 것이다.  

그랬던 D가 교회에서만큼은 달랐다.

그는 교회라는 작은 사회 속에서 나름대로 군림하려고 노력했다.

D의 자존감을 살려주는 곳은 그나마 교회였다.

그는 교회의 행사나 모임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일일이 사람들에게 불필요하게 잔소리하는 것으로 자신이 괜찮은 존재임을 입증받으려고 했다.

엇나간 자기 사랑이었다.


그는 교회에 처음 나온 E에게 다짜고짜 면박을 줬다.

자기 소개할 때 네가 이름을 먼저 말했어야지.


방금 E를 환영하는 시간을 가졌었다.

당사자가 앞으로 나와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D는 삐딱하게 나왔다.

상대가 이름보다 나이를 먼저 말했다고 충고조의 말투로 트집을 잡은 것이다.

순서가 뭐가 중요한가.

이름을 먼저 말해야 한다고 어디 법에 써져 있기라도 하나.

너무 허접하고 하찮은 말이었다, D의 말은.  

무엇보다 교회에 처음 나온 초신자에게 무턱대고 지적하는 것은 상식이 부족한 행동이다.

D는 그를 배려할 대상이 아니라 훈계하고 견제할 대상으로 인지했던 것이다.


그는 매사에 이런 식이었다.

이상야릇한 방식으로 스스로 찍은 몇몇 사람들에게 얄미운 잽을 날리며 부실한 자존감을 얻었다.   


D는 여러 사람 앞에서 A를 의도적으로 망신 준 적이 있다.

주말에 교회에서 모임이 있던 날이었다.

D가 나름대로 화려한 샌들을 신었다.

그래서 A는 예쁘다고 웃으면서 말했다.

어디에서 샀냐며 질문까지 했다.  

사실 궁금하지 않지만 어색함을 해소하려고 대충 말을 던진 거다.

그런데 D는 그 말을 듣고, 불쾌해하며 얼굴을 찡그렸다.

A는 경계심을 드러내는 D의 태도가 의아했다.


그리고 약 10분 후 모든 교인이 모인 자리에서 그 이유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D가 A가 들으란 듯이 경박하게 떠들어댔던 것이다.

A는 본인이 닮고 싶은 사람을 따라 한대요.

이렇게.


A는 D를 쳐다보았다.

D는 A의 시선을 피했다.

대신 다른 사람들을 쳐다보면서 A가 이 상황에 무관하다는 메시지를 주려고 노력했다.

제삼자를 방패막이로 타인을 조롱하는 처세술이다.

사회생활에서 흔히 접하는 수동적인 공격이다.

자신이 공격하는 대상에게 역공을 당하는 걸 걱정할 때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저런 방법을 쓴다.  


A는 황당했다.

그리고 D에게 인사치레처럼 했던 질문을 떠올렸다.

설마 아까 샌들 어디서 샀냐고 물어봐서 삐졌던 거야?

A는 D와 친하지 않았다.

다만 그때 A는 교회 임원이었다.

만나기 싫어도 D를 모임에서 만나야 했다.

A는 어색하고 낯설었다.

상대와 친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접점이 없어서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침묵하면 더 어색해질까 봐 억지로 소재를 끌어냈다.

게다가 따라 할 정도로 그의 샌들은 예쁘지 않았다.

유행에 민감한 D는 다른 사람들도 많이 신던 모양의 샌들을 신었다.

한껏 꾸미는 걸 좋아하는 그의 특성을 고려해 기분 좋으라고 한 질문이었다.


D는 A의 질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하지만 그는 상대가 의도적으로 질문했다고 착각했다.

그런 자의적인 결론을 철썩 같이 믿었다.

평소 D는 본인의 나이가 한 살이나 많다고 A를 만날 때마다 인자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런 태도가 금방 무너졌다.

수박 겉 핡기 식으로 타인을 대했기 때문이었다.

위기에 봉착할 때 사람은 실체를 드러낸다.

마찬가지로 기분이 나쁠 때 사람은 내밀한 진심을 드러내는 법이다.


A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난감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해주지는 않았다.

어차피 말해도 안 믿을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서로 잘 모르는 사이니까 한 번 친해져 보려고 말 걸었다 하기도 민망했다.

B는 그런 에피소드를 들을 때마다 본인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고 맞장구를 쳤다.

공감한다고 적극적으로 어필하면서 대화의 무게 중심을 스리슬쩍 옮겼다, 본인에게로.


처음에는 그런 모습마저 타인을 적극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느껴졌다.

B는 타인에게 마음이 상당히 열린 것처럼 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런데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A는 B의 반응에 의구심을 품었다.

타인이 매번 나와 비슷한 일을 겪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지 말이다.

한두 번도 아니고, 그의 반응은 늘 비슷했다.


나도 마찬가지야.

나도 그랬어.

나도 너처럼 그랬어.

너도 나처럼 그랬구나.

나와 너를 동일시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면서 자신의 이야기로 대화의 무게 중심을 바로 옮겨버렸다.

또 찜찜했던 지점은 B는 묘하게 상대와 입장을 바꾸는 것이었다.

A가 자신의 얘기로 10분을 말한다.

B도 자신의 얘기로 10분을 말한다.

항상 대화의 마무리가 B의 이야기를 듣는 걸로 끝났다.

그러니까 B는 무슨 이야기를 듣는지 그것을 ‘자기화’해서 본인의 에피소드를 나열했다.

결국 대화의 중심에 B는 자신을 세웠다.

대화의 맥락을 거시적으로 살피면 결국 B는 상대가 겪은 모든 일화를 본인의 일화를 풀기 위한 징검다리처럼 삼았던 것이다.


B는 간헐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규정하는 말을 하곤 했다.

나는 권위적인 걸 싫어해.

이 말도 B가 늘 강조했던 내용이다.


A는 권위를 주제로 얘기한 적은 없다.

하지만 B는 틈나는 대로 스스로를 ‘권위를 싫어하는 힙한 사람’으로 정의했다.

그는 상대와 친밀해지려고 처세술을 발휘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중에 돌변한 B의 태도를 보면 그 말조차 자기중심적이었다.

B 자신이 매우 권위를 중시했기 때문이다.

나를 권위적으로 대하는 사람은 싫어하지만 내가 권위적으로 행동하는 건 좋아한다.

결국 B는 이런 속뜻을 내포했던 건 아닐지.  

사회생활을 시작한 A는 생각날 때마다 B에게 간헐적으로 연락했었다.  

직장생활은 재밌고도 힘들었다.

그곳에서 만난 상당수의 사람들은 마음을 잘 열지 않았다.

특히 신입사원은 경계와 배척의 대상이었다.


A는 가끔씩 B가 떠오를 때마다 지체 없이 연락했다.

위로받고 싶었다.

B가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당연히 전화하면 반가워할 줄 알았다.

친했으니까.


A가 직장에 자리를 잡았을 때였다.

B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B가 말도 없고, 시큰둥했다.

냉기마저 흘렀다.

상대에게 거리를 두고, 마음을 꾹 닫은 모양새였다.

직장에서 부딪혔던 그 사람들처럼.

그리고 B는 작심한 듯이 사사건건 A를 비난하기 시작했다.


너는 우기는 게 있어.

그날 통화에서 B는 빈정거렸다.

확신에 찬 말투에 비웃음이 담겨 있었다.


A는 당혹스러웠다.

그동안 대화의 분위기는 우호적이었다.

B는 말을 툭툭 뱉거나 야박하게 깐족대지 않았다.

매너가 있었다.


나중에 이 에피소드를 언급하자 B는 정색했다.

나는 네가 우긴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어.

우기는 건 내 스타일인데?

너는 우기는 성격은 아니야.

내가 우기는 성격이지.

내가 우기는 성격이라니까.


예전에 우긴다고 했다.

정말 그랬다.

B가 기억하지 못했을 뿐이다.

이제 와서 우긴다고 생각한 적이 없단다.    

그리고 우긴다고 생각하는 근거에 대해서는 함구했다.

상대의 어떤 면을 보고 발언했는지 아무도 모른다.  

B 자신조차도.

나르시시스트는 되도록 타인을 비난하려고 애쓴다.


누구나 긍정적인 평가만 받지는 못한다.

특히 부정적인 평가를 많이 받는 유형 중 하나가 나르시시스트다.

그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안 좋은 평가를 받는다.


누구나 단점이 있다.

그래서 지적받기도 하고, 지적하기도 한다.


그 와중에도 자존심에 상처가 되지만 진심 어린 조언인 경우도 있다.

하지만 나르시시스트의 비판은 알맹이가 없다.

그의 지적은 비판이 아닌 비난에 불과하다.

정말 의미 있는 비판은 나름대로 합리적이다.

하지만 나르시시스트는 부정적인 정서로 인해 타인을 부정적으로 해석하기에 비판에 논리적인 연결성이 없다.  

어떤 위치에 있든지 상관없이 평가를 가장한 비난을 일삼는다.

그리고 살포시 덧붙인다.

너를 위해서 하는 말이야.


거짓말이다.

나르시시스트는 타인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는다.  

나르시시스트는 자기 자신을 위해서 남을 비하한다.

그가 비판의 단두대에 오른 이유는 딱 하나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남에게 희생을 요구한다.

타인을 조롱하고 지적해서 자존감을 강탈하려고 노력한다.

그것도 나르시시스트에게 호감을 표시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말이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는 질적으로 나쁘다.   


그는 상대의 모든 것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걸 진심으로 좋아한다.

부정적으로 반응하기로 결정한 다음 말을 갖다 붙이는 거다.

그러니까 우긴다는 것에 대한 생각의 근거는 없다.

막상 비난당한 당사자가 나르시시스트에게 이의를 제기한다.

그럼 나르시시스스트는 주장을 뒷받침할 설득력 있는 근거가 없다.

그러니까 나르시시스트가 근엄하게 말하는 평가 내용을 딱히 귀 기울여 들지 말자.


그의 주장은 소위 부실공사로 지어진 건물과 같다.

객관적인 근거가 없거나 그 근거를 자신감 있게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B는 자폭한 거다.

스스로 우기는 성격이라고 고백하면서까지 말이다.


게다가 지금 B는 스스로 본인이 우기는 성격이라고 당당하게 커밍아웃하고 있었다.

남에게 말할 때는 우기는 건 잘못된 거라는 뉘앙스로 말했다.

그런데 B가 자신이 우기는 성격이라고 설명할 때는 너무 기세등등했다.

심지어 그 성격을 설명하는 행위 자체를 즐거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정직하게 생각하면 A는 B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판단했던 적이 있었다.

B가 별로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직감을 느꼈던 것이다.

다만 당사자가 직감 자체가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초반에 카페에 A는 B와 둘이 앉아 있었다.

나이 차이도 많이 나고, 딱히 할 말은 없었다.

그런데 B가 이런 말을 했다.


있잖아.

이전에 내가 알던 E가 있었거든.

그런데 걔가 나한테 자꾸 반말을 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나는 반말이 불편하다고 말했어.

그 뒤로 날 어려워하더라고.


A가 이전에 말했던 일상적인 주제와 무관한 주제였다.

대화의 맥락상 모난 돌처럼 툭 튀어나온 B의 말.

그는 뭘 말하고 싶었던 걸까.


그건 뻔하다.

A는 B에게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B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B는 그렇게 적개심을 드러냈을까.

B의 마음은 겉모습과는 살짝 달랐다.

A가 친해지자고 적극적으로 다가오자 B는 이전의 상처가 떠올랐다.


B는 동아리 사람들과 나이 차이도 꽤 난다.

동아리의 특성상 나름대로 타이틀도 있다.

팀장 혹은 간사 같은 명함이 있었다.  


E는 활달했고 솔직했다.

처음에는 그런 모습이 좋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마음이 너무 편해졌는지 E는 반말을 시전 했나 보다.

B는 무시당한다고 느꼈다.

아무리 친해진다고 해도 그건 선을 넘는 거였다.

본질적으로 상대와 동등해지기 힘든 위치라고 느꼈다, B는.

차라리 자존심을 보호하려면 상대와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게 나았다.

A가 친밀하게 다가오자 사실 B는 웃으면서 대응했다.

하지만 슬금슬금 과거의 기억이 소환되면서 근심이 고개를 들었다.


밝은 표정을 짓고, 스스럼없이 다가오던 사람들은 B의 자존심에 상처를 줄 때가 많았다.

재밌는 말을 하겠다면서 존댓말 속에 반말을 섞는다든가.

B에게 서운하다면서 B의 실수나 잘못을 가감 없이 말한다든가.

민망하면서도 난처하고, 화가 나면서도 무작정 화내기는 또 애매했다.


그런 순간들이 쌓이다 보니 해맑게 대하는 사람을 보면 오히려 적개심이 들었던 것이다.

이 사람도 예전의 그 사람처럼 웃으면서 마음에 비수를 꽂는 게 아닐지 하는 의심도 짙어지고 말이다.


B는 본인을 어려워하지 않고, 주저하지 않고 자기표현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고민에 빠졌다.


과거에 상처를 준 사람들이 떠올랐던 것이다.

A의 웃음을 보고, B는 트라우가 올라왔다.

어, A가 나한테 반말을 하면 어떡하지.

난 상처받을 텐데.

B는 그런 걱정을 했던 것이다.

A도 알았다.

B가 E를 빗대어 말하지만 사실 나에게 하는 말이라는 걸.

A는 존댓말을 하고 있었다.

B는 미리 경계태세를 취했다.  

그리고 제삼자를 끌어들였다.

사실 그런

말하다는 것도 생경했다.

도대체 B는 무엇이 두려워서 본인의 속마음을 돌리고 돌려서 말할까.

설마 내가 공격할까 봐 선제적으로 방어하는 건가.

A는 B의 처세가 우스웠다.  


하지만 B는 A의 마음을 잘 몰랐다.

이후에도 B는 간접적인 화법으로 남을 비난하곤 했다.

A가 B와 약속을 B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B가 기도하는 모습을 희화화했다.


A가 기도할 때 어법이 웃기다며 다른 사람들 앞에서 앞담화를 했던 것이다.

경박하고 유치한 행동이었다.

누가 봐도 의도가 뻔했다.


그동안 A는 별 말을 하지 않았다.

지적하지도 않고, 똑같이 되갚아주지도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때는.

A는 B의 공격을 방어하지 않고, 그대로 흡수했다, 마치 없었던 일처럼 말이다.

A는 B와 잘 지내고 싶었다.

하지만 B는 매사에 상당히 공격적이고 적개심을 드러냈다.

그럴 때마다 나쁜 의도가 아니라고 일일이 설명하면서 달래야 하는 건지 넘어가야 하는 건지  살짝 갈등이 일곤 했다.

A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망설여졌다.

만약 그런 행동을 말하고, 제재하면 상대는 상처를 받을 것이다.

그 점이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부인하고 싶었다.

상대가 악의를 드러낸다는 걸.

A는 일관성 있는 태도를 보이고, 선의로 대하면 상대가 언젠간 마음을 열거라고 믿었었다.


B는 A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번 더 도발했다.

상대가 공격을 눈치채서 당황하길 바랐을지 모른다.

그랬다면 A의 덤덤한 반응에 약 올랐을 것이다.

상대에게 타격을 주고 싶었으니 말이다.  


아니면 B는  A가 상대의 의중을 몰라서 가만히 있는다고 오해했을 수도 있다.

E를 빗대어 자신을 공격하는 B의 태도가 A는 어이가 없었지만 침묵했다.
상당히 신박한 방법으로 공격한다고 판단해서 대응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어쩌면 B는 A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고, 남을 잘 공격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안심하고 한 술 더 떠서 또 다른 이야기를 끌어왔을지도 모른다.

B는 A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그저 상황을 나눌 뿐이라는 듯이 천연덕스럽게 말을 꺼냈다.

F라는 얘가 있어.

그런데 걔는 우리 동아리를 되게 비판적으로 보더라고.

그래서 내가 F한테 우리 동아리랑 잘 안 맞으니까 안 들어오는 게 좋겠다고 말했어.


A는 동아리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됐다.

굳이 내가 동아리에 들어오지 말라고 한 사람을 화두에 꺼낸 것은 의도성을 충분히 의심해 볼 수 있다.  

만약 A가 정색하고 그런 얘기를 하는 진짜 이유가 뭐냐고 묻는다면?

그는 손사래를 치며 이렇게 답할 것이다.

아, 너에 대한 이야기로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아니야.


나르시시스트는 속마음을 담백하게 있는 그대로 말하지를 못한다.

대신 속마음을 꾸민다.

진실에 뭔가를 더하거나 뭔가를 뺀다.

그래서 본인도 본인 마음이 뭔지 모른다.

그저 '나는 네가 묘사한 것처럼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은 아니다'라고 둘러댄다.

'그렇게까지'의 기준이 모호하지만 말이다.

B가 A 앞에서 타인을 끌어와서 이런 말을 한 셈이다.

네가 이 동아리를 선택한 것 같지만 나도 너를 선택한 거야.

그러니까 내가 고마워하거나 아쉬워해야 하는 입장은 아닌 거야.


A도 아니라고 믿고 싶다.

그런데 아무런 의도가 없다고 믿기에는 대화의 분위기가 상당히 저돌적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도 B는 당사자를 직접적으로 욕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는 꼭 이 상황과 관계없는 누군가를 끌어들여서 방어막을 만들어놓고 비난했다.

A의 앞에서 A에 대한 험담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한다거나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면서 A를 비난하는 식으로 말이다.  


A는 B의 입장이 어떻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B의 심리 상태가 걱정됐다.

내가 동아리에 들어왔다는 이유만으로 그가 자신을 방어해야 한다고 느낄 줄 몰랐다.

B의 과민반응이자 피해의식이었다.


A가 기도하는 게 웃기다며 모욕을 준 그다음 날, B는 먼저 A에게 연락해 울면서 사과했다.

B가 못되게 군 이유는 있었다.

약 일주일 전에 A가 모종의 이유로 약속을 파투 냈다.

그게 서운했다는 것이다.


A는 그런 이유로 B가 보복을 했다는 게 살짝 낯설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나를 의도적으로 망신 줬다는 것도 불쾌했다.

상대는 내가 알던 그 사람이 아닐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A는 전적으로 자신을 탓했다.

내가 잘못해서 착한 상대에게 상처를 줬다고 여겼다.

이후 A는 B에게 더 잘해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B가 특수한 상황에서 돌발행동을 한 건 아니었다.

점차 그의 태도가 불순해졌던 것이다.


직장 내에서 A가 모 선배와 갈등이 생겼었다.

모 선배는 수시로 명령조의 말투로 구박하고, 먹다 남은 과자를 줬다.

본인이 셀카를 찍다가 뒤에 A가 나오니까 비키라고 함부로 핀잔을 주곤 했다.

그래서 A는 결국 화를 냈고, 모 선배는 상처를 받았다.


이 일을 말하자 B는 짜증을 냈다.

네가 너무 바가지(싸가지)가 없잖아.


그리고 기세등등한 말투로 덧붙였다.

(명령조로) 알아서 선배한테 기어.
 

그때부터 B는 본격적으로 신경질을 부렸다.

A의 감정과 생각을 무조건 부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상대의 판단력을 의심하고 조롱하는 뉘앙스로) 네가 상상력이 풍부해서 그런가?

너는 참 주관적이다. 나는 객관적인데. 그런 사람들이 있어, 호호호.

이런 말들로 상대에게 도발했다.


나중에는 A가 몸이 무척 아파서 괴롭다고 하소연을 하니 이렇게 말했다.

너는 초등학생 같다.


나중에 전화통화를 할 때 그는 소리 질렀다.

(느닷없이 소리 지르면서) 진짜 짜증 나게 하네.


심지어 그는 어떤 교회의 교역자에게 서운함을 느꼈을 때 이런 말까지 했다.

그 교역자가 군대에 있을 때 어머님이 돌아가셨대. 그런데 아무도 아는 척을 안 했다는 거야. 그런데 그 교역자 행실을 보니까 그 사람들이 왜 그랬는지 알겠더라.


패드립이었다.

그는 자신이 이렇게까지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듯했다.

시간이 흐르고 A는 B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간에 B의 만행을 설명했다.

그리고 사과를 요구했다.

사과할 거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의 반복되는 무례함을 그대로 넘긴다면 얻을 게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B는 기억이 안 난다며 없던 일이라고 박박 우겼다.

오히려 A가 혼동을 하고 있다며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시간이 흘러 A는 다시 한번 B에게 연락했다.

제대로 된 사과도 없었기에.

A: 내 기억이 왜곡된 게 아니라 사실이라고 하니까 막판에 B가 물음표라고 했잖아. 그 태도가 좀 그랬어. 내가 시간을 들여서 이렇게까지 이야기했는데 결국 인정하지 않는구나 싶어서 마음이 찜찜하더라고.


B: 그랬겠지. 그런데 인정을 안 했다기보다 그때 나는 네가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싶었어.


B는 ‘인정을 안 했다기보다’라고 말하며 조심스럽게 반격했다.

A의 기억을 인정했다고 완곡하게 전달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거짓이다.

B는 본인이 했던 말들을 꾸역꾸역 부정했다.

그의 말을 복기하자.


나는 그렇게 이야기한 적 없어.

나는 그런 말을 쓰지도 않는데?

다른 사람이 말한 걸 내가 말했다고 착각하는 것 아니야?

그때 우리 옆에 D도 있었잖아. 그럼 D가 아니라고 해도 내가 그런 말을 했다는 거지?


네 기억이 혼재됐나 봐.

아하, 네가 혼동이 있나 보다.


그런데 네 기억이 섞여 있어.

나는 기억이 안 나는데 진짜 일어났던 일로 인정하고, 사과할 수는 없어.  


나는 네가 기억하는 말들을 한 적이 없다고 결백했었다.

인정을 안 한 게 아니라는 말속에 부정이 두 번 들어갔다.

부정을 부정하는 것은 긍정이다.

인정했다는 거다.

하지만 거짓이다.

이어서 그는 ‘네가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싶었어’라고 덧붙였다.

적어도 A가 말한 내용을 몰랐다는 의미는 아니다.

꽤 오랜 시간 통화했다.

내용을 모를 수가 없다.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도 아니다.

그는 상대의 기억을 강경하게 부인했다.

부정했다는 것 자체가 부정한 대상을 이해했음을 전제로 한다.

그러니까 이 말은 당시 B가 A의 기억을 부정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B의 대답은 논리적으로 앞, 뒤가 맞지 않는다.

한 문장에 두 개의 상반된 내용이 혼재돼 있다.

대화의 맥락으로 B의 의도를 파악해 보자.  


A: B가 내 기억을 인정하지 않았다.


B: 인정을 안 했다기보다(A의 기억을 인정했고), 네가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싶었다(A의 기억을 인정하지 못했다).


다시 정리하자.


B: 나는 A의 기억을 인정했지만, A의 기억을 인정하지 못했어.


이 상황에서 B는 불리하다.

본인이 했던 말들을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이 안 나니까 없던 일이라고 우겼었다.

A는 그 부분을 지적하고 있다.


기억이 안 나는 것은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기억이 안 나니까 없던 일이라는 논리는 비상식적이다.


사과하든가.

해명하든가.

B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하지만 둘 다 이행하기 싫다.

B는 사실 미안하지 않다.

억울할 뿐이다.  

상대편에게 지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나르시시스트에게 대인관계란 게임이다.  

그는 남보다 우위에 서지 못하면 불안해한다.

그래서 주도권 빼앗이 쟁탈전을 벌이는 것이다.


게임은 누군가가 이기면 누군가는 져야 한다.

이 게임에서 나르시시스트는 이기고 싶다.

그래서 타인을 무시하고 비웃으면서 자신은 특별하다고 주장해 왔다.

사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B는 이 게임에서 지고 있는 게 모욕직이고 수치스럽다.  

갈피를 못 잡고, 마음이 콩팥에 있으니 인정하는데 인정하지 못했다는 엉뚱한 대답이 나왔던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는 비판받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B도 남을 고칠 점만 본다고 자랑하곤 했다.

하지만 입장이 바뀌자 그는 기억이 안 나니까 없던 일이라고 둘러대며 도망쳤다.


현재 B는 자신을 보호할 히든카드가 다 떨어졌다.

초반에 그는 결백했다.


너랑 통화하면서 부정적인 감정을 느낀 적이 없어.


대화하면서 부정적인 감정을 느낀 적이 없었다고 항변했다.

심지어 본인은 짜증 나게 하네 혹은 바가지(싸가지)가 없다는 나쁜 말(?)을 쓰지 않는다고 단언했었다.


 지난번 대화에서 B의 말들을 살피자.

나는 사람들한테 짜증 나네 이런 말을 안 쓴다고.

네가 그렇게 혼자 생각해 온 것 아냐?

내가 짜증 나더라도 네가 힘들어하는데 짜증 나게 하네 이렇게 말을 하겠냐?


짜증 나는 상황이 있어야 짜증 난다고 말을 하지.

네가 힘들다고 하는데 내가 짜증 나서 짜증 나게 한다고... 하하하!


나는 전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나는 그렇게 말할 이유가 없어.


내가 너한테 싸가지(바가지)가 없다고 했다고?

나는 그런 말을 쓰지도 않는데?


내가 너한테 초등학생 같다고 얘기했다고?

(비꼬듯이) 앞으로 통화할 때 녹취를 해야 하나.


네가 우긴다고 생각하지 않아.

우긴다기보다 오해를 한다고 해야 하나?

A는 B의 반격에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 분노하면서 몰아붙였다.

나중에 힘이 빠진 B는 쑥스러워하며 양해를 구하듯이 말했다.


B의 말이다.     


나도 사소한 것까지 잘 기억하는 편이야.

그런데 네가 말한 일들은 기억나지 않아.

그렇다면 (자칭 기억력이 좋은) 내가 기억을 못 한 게 아니라 네가 착각한 게 아닐까.


기억력이 좋다면 왜 A에게 한 말들이 머릿속에 남아 있지 않을까.

자존심 때문에 막무가내로 버티는 걸까.


B는 최후의 방어책으로 기억력을 내세웠다.  

하지만 설득력이 없는 주장이다.


A의 기억은 구체적이고, 일관적이다.

B는 대부분의 에피소드들을 망각했고, 심지어 없던 일을 만들어낸다고 주장했다.  

기억력의 질을 놓고 따지자면 A가 월등하다.


B가 본인의 기억력을 치켜세우는 것은 허무맹랑한 자기 과시였다.

또한 타인의 기억이 허상일 수도 있다는 주장이기도 했다.

물론 허상이라는 주장이 허상이다.


좌우지간 B가 함부로 말해놓고, 막상 지적을 받으니 오리발을 내미는 꼴이다.

무엇보다 다수의 에피소드들을 머리의 뒤편으로 넘겨버린 당사자가 기억력이 좋다고 자화자찬을 해대니 분위기가 얼마나 이상해졌겠는가.  


B: 너는 그 일들을 계속 생각하다가 전화한 거잖아. 처음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누가 쓰러지셔서 응급실에 가는 중이어서 경황도 없었어.


B는 외부 환경을 탓했다.

본인의 판단력에는 문제가 없다고 간접적으로 항변한 것이다.


A는 B의 판단력이 부족하다고 말해왔다.

부인한 게 비합리적인 생각이라고 비판했다.

이 부분에서 B는 내상을 입었다.

본인의 지적 능력을 의심받은 것이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응급실에 가고 있던 상황을 강조한 것이다.

과연 집에서 편하게 있다가 A의 연락을 받았다면 달랐을까?


대화의 첫 시작은 A의 기억을 B가 없던 일이라고 우겼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지금 방향이 다른 데로 흘러갔다.

당시 B가 처했던 상황이 어떠한지가 핵심이 아니다.

잘못을 지적당할 때, 나르시시스트는 대화의 논점을 흐린다.

A는 다시 B가 나의 기억을 인정했는지 여부에 초점을 맞췄다.


A: 그런 외부적인 상황을 뺀다면 인정을 했을까?


B:... 그러니까 나는 생각이 안 나니까 사실 그래서 인정을 못한 건데.


A는 인정을 안 했다는 것을 전제로 질문을 던졌다.

B는 그 전제를 인지했지만 반박하지 못했다.

대신 기억이 안 나서 인정하지 못했다고 솔직하게 고백해 버렸다.

나르시시스트는 교묘하게 입장을 번복한다.

B의 말에는 일관성이 없다.

맨 처음에는 기억이 안 나니까 없던 일이라고 확신했다.

그다음은 경황이 없어서 상대의 기억을 부정했단다.

그 전제를 빼고 다시 물으니 기억이 안 나서 인정을 못 했다고 말을 바꿨다.     


B가 A의 기억을 인정했다는 주장은 폐기됐다.

B에게 불리한 상황이다.

다른 사람이 패를 갖게 될 때,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에게 유리한 영역으로 대화의 주제를 바꾼다.


B: 너랑 얘기하고 집에 와서 생각했는데. 네가 말했잖아. 내가 따듯한 사람인 줄 알았다고. 그런데 사실 나는 되게-


A: 따듯하고? 뭐가?


A는 반문했다.

B가 대화의 핸들을 꺾어서 성격을 거론했다.

그 점이 인위적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B: 처음에는 나를 좋게 봤는데. 이제 보니 내가 따뜻한 사람이 아닌 것 같다고 했잖아. 사실 나는 되게 시니컬한 사람이야.


B가 스스로를 시니컬하다고 정의하는 게 귀엽다.

A는 웃음이 나왔다.

그럼 이 사태의 원인이 시니컬한(?) 성격이라는 건가.


지금 대화의 화두는 B의 언행이 경박하고 무례했다는 점이다.

그런 태도를 지적하니 B는 성격이라는 프레임을 앞세웠다.

본인이 행동거지를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도덕적 잣대를 들이대면 B는 불리하다.

잘못했으니까.

그래서 성격 얘기를 꺼냈다.


성격은 중립적인 개념이다.

대화의 맥락상 성격이 안 좋다는 의미로 읽힐 수는 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을 자책하는 뉘앙스는 아니다.  

자부심과 거들먹거림이 섞인 뉘앙스였다.   

비판받을 때,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생각하는 프레임을 내건다.

성격이라는 프레임을 걷어내자.   

그리고 프레임을 건 행위 자체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자.


A: 왜 자꾸 시니컬하다고 해?


A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물어봤다.

건너편의 B가 급속도로 몸이 굳는 게 느껴졌다.

그가 예상을 못한 질문이라 당황한 듯했다.

웃음을 머금고 편하게 물어보는 것에 어찌할 바 모르는 것 같았다.


A: 시니컬하다는 얘기는 지난번에도 말했잖아. 내가 생각하는 것과 B의 실체는 다르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잖아.


왜 자꾸 시니컬하다고 해?

그들이 제시한 프레임을 가볍게 치워버리면 상황은 반전될 수 있다.


A는 시니컬하다고 느끼는 근거를 물었다.

B의 주장이 얼마나 탄탄한지 알아보기 위해서다.


그들이 자신들이 제시한 프레임 안으로 우리가 저항 없이 들어오길 바란다.

그 안에서 놀아야 나르시시스트가 유리하다.

희생양이 프레임으로 발걸음을 디뎠을 때, 그들은 이미 준비된 답변을 줄줄 읊을 것이다.


B는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 시니컬한 거다.

그러니 네가 나를 받아줘라.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A는 어이가 없었다.

성격 설명회도 아닌데 B는 다만 이상한 허풍을 부리고 있었다.

그래서 흐름을 끊어냈다.

그다음 할 일은 프레임의 내용을 재해석하는 것이다.  

나르시시스트의 주관적인 판단이 개입된 프레임을 걷어내야 대화가 수월해진다.


성격이 시니컬하다는 것은 B의 해석이지 A의 생각은 아니다.

그리고 프레임의 구체성을 확보하는 질문을 던지면 좋다.

시니컬하다는 것은 포괄적이니까 예시를 들어서 자세하게 설명하라고 요구하자.    


A: 시니컬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뭐야? 예를 들면?


B: 되게 좀 비판적이고, 냉랭한 편인 거지.


B가 질문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면 직접적인 답을 피하고 싶어서 대충 둘러대려고 알맹이 없는 답변을 했다.  


시니컬은 냉소적 혹은 냉랭하다는 뜻의 영단어다.

누구나 다 안다.  

A는 영어의 뜻을 물어본 게 아니다.

스스로를 시니컬하다고 규정한 구체적인 근거를 말해보라고 요구한 것이다.  


A: (B가 부정적인 말을 한다는 건 결국 상대에게 B가 상처를 받았고, 불만이 많다는 거니까) 사람한테 마음을 잘 안 여는 거지.


B: 마음을 안 여는 거랑 조금 다르겠지. 표현법의 뭐... 그런 거지.


그는 문장을 마치지 못했다.

표현법이라고 단어로 문장을 마치는 것과 표현법의 그런 거지라고 서술어까지 붙인 문장은 의미상 차이가 없다.

저 말을 붙여도 그만이고, 안 붙여도 그만인 것이다.

아직 그의 대답에 구체성이 부족하다.


나르시시스트는 궁지에 몰렸을 때 주로 모호한 표현을 사용한다.

끝에 말줄임표가 많고, 서술어로 대답을 맺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그 말은 나르시시스트가 상대의 말을 반박하고 싶을 뿐 논리적으로 그 비판의 근거를 정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지가 불분명하다.

스스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니까 얼버무리게 되는 것이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 표현의 미숙함일 수도 있다.

B는 성인 치고는 다양한 단어를 구사하지 못했다.

화술에 문제가 있던 것이다.

그는 그런 것, 그렇게, 저렇게, 그런 뜻이 아니야 등 대명사를 많이 사용했다.   

다양한 상황에서 같은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했고, 획일적인 답만 내놨다.

각기 다른 상황과 감정도 한 단어로만 정리한다.  

그래서 생각의 전달력이 떨어진다.

A: 표현법? 글쎄...


그래서 A는 갸우뚱하며 다시 반문했다.

냉랭하다고 잘못을 흐리니 더 자세하게 말해보라는 무언의 압박이기도 했다.


B: 어쨌든, 야야-


A는 시큰둥하게 답했다.

B는 ‘어쨌든’이란 접속사를 써서 다른 주제로 전환하려고 노력했다.

이 주제가 본인에게 불리해질 수 있다고 판단한 거다.

B가 스스로를 냉랭한 사람이라고 표현한 것은 일종의 ‘프레임 만들기’다.

하지만 A는 그 프레임 바깥에 있다.

B의 프레임에 반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B의 의도대로 대화가 흘러가지 않는다.

도리어 A는 B는 마음을 안 연다고 프레임을 재해석했다.

시니컬이라는 것은 자기 포장에 불과하다.

그러니 스스로를 꾸며서 말하지 말라는 얘기였다.


자, 나르시시스트의 말은 비판할 여지가 많다.


인정 여부도 제쳤다.

성격 얘기도 제쳤다.

이제 대화의 주도권을 가져오자.


A: 나는 B가 시니컬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고. 그냥 B가 다른 사람들보다 부정적인 감정을 훨씬 많이 느낀다고 생각해.


A는 B가 제시한 프레임을 치웠다.

그리고 프레임을 치운 빈자리에 부정적인 성격을 전시했다.  


B: 어. 맞아. 나는 그런 면도 있지. 부정적인 편이지.


‘그런 면도’ 있는 게 아니라 ‘그런 면만’ 있는 거다.


A: 그러니까 남들이 평이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B는 자꾸 뭐가 문제라고 이야기하니까.


B: 어, 맞아. 맞아.


B가 A의 지적을 곧바로 수용했다.

맞장구치면서까지 말이다.


B는 자신의 부정적인 성격이 아직 흠이라고 판단하지 않았다.  

비판과 부정은 서로 연결되는 개념이라고 인지하고 있다.

그래서 A의 해석을 인정해도 스스로 손해 볼 게 없다고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A의 의도는 좀 달랐다.

부정적인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은 부정적인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이다.

그럴 수 있다.

부정적인 성향은 세상에 필요하다.


하지만 B의 관점은 불균형했다.

모든 상황을 낙관적으로 보는 것도 문제지만 모든 상황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도 문제다.


B가 부정적인 것은 넘어갈 만했다.

하지만 진짜 화가 났던 것은 B가 타인에게만 비관적으로 반응한다는 점이었다.

B는 신기할 정도로 자신만큼은 당연하다는 듯이 긍정적으로만 해석했다.

그는 틈나는 대로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설명하기 바빴다.

다른 사람이 기도하는 방식을 비웃으면서 그는 자신이 기도가 너무 잘 될 때면 두려웠다고 고백하기까지 했다.

기도가 ‘잘 된다’는 게 무슨 상황을 보고 평가한 말일까.

그의 주관적인 해석일 뿐이다.


A: 일반적인 사람들은 부정적인 말 위주로 얘기하지는 않아. 나처럼 상황에 따라서 특정한 일이 있었을 때 이야기하는 거지, 항상 B는 부정적인 논조로 말하잖아.  

B: 어. 맞아.


A: 항상 관점이 부정적인 거지. 객관적이지는 않아.

예전에 B가 A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주관적이야.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도 말하지 않았다.

일상적인 대화를 하다가 뜬금없이 튀어나온 말이었다.

A는 황당해하며 되물었다.

B는 객관적이야?

B는 자랑스러워하면서 곧바로 대답했다.

응, 나는 객관적이지. 그런 사람들이 있어.


B는 A에게 너와 나는 다르다고 주장했다.

스스로를 치켜세우는 B는 건방졌다.

하지만 한편으론 귀여웠다.

B가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에 실언을 한다고 생각했다.


B: 그 객관적이라는 얘기는-


나중에 B는 자신을 객관적이라고 말했던 상황을 다시 해명했다.

본인이 객관적이라고 했던 것은 객관적인 사실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은 객관적인 사실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산다.

모든 사람의 특징을 자신만 가지고 있는 특징이라고 해석한 것이다.


A: B가 자꾸 기분 나쁘다고 이야기를 하니까. 상대는 호의로 다가갔는데 B는 내가 너로 인해 불편해, 내가 너로 인해서 마음이 상했어 이런 신호를 보내잖아.


그동안 B는


그러니까 B도 상대를 편하게 하는 성격이 아니라고 했지만 B도 상대가 편하지 않은 거지. 그러니까 B는 상대에 대해서 친밀감을 잘 못 느끼는 편이야.


B: 응....

여기서부터는 B가 소극적으로 반응하기 시작했다.

A가 B의 속마음을 해석한 내용이 언짢았을 것이다.


B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적개심과 불편함을 느꼈다.

웃으며 다가오는 A에게도 정색하며 앞담화를 하거나 제삼자에게 이야기하는 척하면서 상대를 저격하곤 했다.

모든 사람을 적으로 규정하니 말이 곱게 나올 리 없었다.


그리고 부정적으로 말하는 이면에는 상대의 언행으로 감정이 상했다는 사실이 존재한다.  

그저 개인의 감정을 분풀이하려는 쪽에 가까웠다, B의 경우는.  


A: B가 잘 대해주셨고, 서로 이야기하면서 위로가 됐었어. 그래서 호의를 느꼈지. 물론 실제보다 더 좋게 봤겠지만. 그런데 친절에 유통기한이 있더라. 처음과 끝이 다르다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상했지.


B: 응. 처음과 끝이 다르다는 것도 뭐 어느 정도는 맞는 이야기일 것 같고. 그것보다는 내가 너를 처음 만났을 때 우리가 자주 얼굴 보고 얘기했잖아.


B는 ‘그것보다도’라고 말하면서 다시 화제를 바꿨다.

대화의 맥락 안에서 A가 제시한 주제에 단순하게 반응하고 빠르게 다른 주제로 건너뛰려고 시도했다.


너의 기억을 인정하지 않았다기보다 블라블라.

이렇게 상대의 해석을 간접적으로 반박한다든가.


처음과 끝이 다른 것도 맞는데 그것보다도 블라블라.

상대의 말이 맞다고 하면서도 다른 주제를 꺼내든다는가.  


B는 자신이 유리한 주제를 대화에 배치하려고 애썼다.

그래서 대충 리액션을 한 다음에 새로운 화두를 자꾸 제시하는 것이다.


B: 그런데 언젠가부터 우리가 만나지 못하고 주로 전화통화만 가끔 했잖아. 입장이나 생각을 충분히 주고받을 수 있는... 그리고 표정이나 사람의 어떤 몸짓으로 전달되는 의사도 있잖아.


바디 랭귀지가 포함된다고 의미가 달라지는 말은 없었다.

예전 직장에서 A는 모 선배로 인해 고충을 겪었다.

A의 선배는 A를 매사에 푸대접했다.

사진을 찍는데 A가 보이면 저리 가라고 말하고, 먹다 남은 과자 봉지를 줬다.

자기가 만든 쓰레기를 대신 처리해 달라고 아이처럼 어리광을 부렸던 것이다.


당시 A는 그 의도를 명확히 몰랐다.

옆 사람이 나는 찌꺼기 안 먹는다고 말해서 그나마 상대의 악의를 파악했다.

그렇게 치졸하게 사람을 괴롭혔다.

물론 본인은 스스로 괜찮은 선배라고 생각했을 것이지만.


결국 A는 화를 냈고, 선배는 상처를 받았다.

A가 화를 낸 게 너무 예상 밖이라는 태도였다.

A는 그게 더 황당했다.

본인은 그렇게 쉽게 상처받으면서 나를 그렇게 막 대했단 말인가.


그런데 B는 그 선배에게 감정이입이 됐었나 보다.

B는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진심을 담았다.

그리고 뱉었다.

네가 바가지(싸가지)가 없잖아.

이 말에 무슨 바디 랭귀지가 포함되면 의미가 달라지나.

혹시 싹수없다고 말하면서 손으로 하트모양이라도 그렸나.


지금 생각하면 A의 에피소드에 B는 본인의 상처가 되살아났던 것 같다.

B도 누군가의 선배니까 말이다.

아마 상처를 준 특정 후배가 떠올랐을지도 모른다.

B는 다시 외부적인 상황을 탓했다.

가끔씩 전화통화만 하니 입장을 충분히 주고받을 수 없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역시 모호하다.

긴 시간 통화하면서 서로 끊임없이 말을 주고받았다.

생각을 주고받는 상황에서 B가 막말을 한 거다.

충분히 생각을 듣고 난 후에 B가 말했다.

그 과정에서 충돌이 생겼었다.  


B: 그런데 이후 나는 아프고 여러 가지 문제가 겹치면서 일도 그만뒀어. 혼자 있게 됐거든.


B는 또 다른 이유를 열거했다.

초반에 B는 성격적으로 시니컬해서(?) 타인의 기분이 상했을 거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또 달랐다.

상황이 안 좋아서 일시적으로 예민해졌다는 거다.

원래 나는 네가 묘사하는 것처럼 이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거다.  


그럼 B가 건강하고, 집안에 별 일도 없고, 직장도 그만두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려 지냈다면 안 그랬을 거라고?

과연 그럴까?

그럼 성격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상황이 사태를 키웠다는 건가.

아까는 성격이 시니컬해서 그랬다며?   


B: 몇 년이 지나서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 네가 전화하니까 계속 볼 때만큼의 관계성이 좀 되지는 않았던 것 같아.


그럼 A가 자주 전화했다면 B가 친절하고 배려있게 말했을 거라는 건가.

관계성이 되지 않았다는 속뜻이 상대에게 심리적 거리감을 느꼈다는 건가.

보통 거리감을 느끼면 더 조심스럽게 대한다.

친밀함이 사라졌다면 어색해하거나 사무적으로 대하는 게 자연스럽다.

그런데 B는 조심성이 너무 없었다.


얼굴을 자주 볼 때는 오히려 매너가 있었다.

그 매너로 인해 인간적으로 호의를 가지게 됐다.

그런데 이후에 B의 행동은 매너가 없고 무례했다.  


하지만 A가 직장생활을 시작해서 얼굴을 못 본 시점부터 B는 친절을 서서히 거뒀다.

지금 생각하면 그에게 언뜻언뜻 싸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그는 고삐 풀린 것처럼 막 나가기 시작했다.


처음에 A는 생각했다.

B가 설마 나에게 그런 의도로 말했겠어.

적나라하게 배타적으로 나와도 애써 자신을 설득했다.

동시에 B가 상당히 미성숙한 사람이라는 걸 눈치챘다.

제멋대로 말하거나 내키는 대로 짜증을 내는 게 낯설고 불쾌했다.

그 행동을 넘겼던 것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화를 내야 마땅한데 말이다.

나르시시스트가 실체를 드러내면 상대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갈린다.


하나는 나르시시스트의 세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는 타인을 조종하길 바란다.

그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그만의 방식이다.

그래서 지적과 비판으로 어떻게든 상대를 아래로 끌어내리려 한다.


처음에는 이상하다고 느끼지만 계속 곁에 있으면 결국 하대에 익숙해질 수 있다..

나르시시스트의 유치한 길들이기에 놀아나게 되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나르시시스트의 고압적인 태도에 반감을 느끼고, 불쾌감을 표출해 그와 멀어지는 것이다.


관계성이 안 돼서 그렇게 남의 지적 능력을 의심하고 무시했나.
 무시한다는 것은 인성의 부족일 뿐인데.

그럼 지금 본인의 품성이 미숙했다고 고백하는 건가.


그런 고백 치고는 B의 태도가 너무 기고만장하다.

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설명해 줄게, 잘 들어봐. 이런 뉘앙스다.

역시 이 말도 앞, 뒤가 맞지 않는다.

B는 못되게 굴었고, 그 행동을 지적받자 급하게 포장하느라 정신이 없을 뿐이다.  

B: 그리고 나도 집에 와서 내가 그런 말을 했을까 생각했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부분 중에서 내가 화가 나면 막 아무 이야기나 하면서 화를 푸는 이런 게 있어.


다시 성격으로 돌아왔다.

B의 성격은 대화의 주제가 아니다.

역시 화제를 돌리려고 꺼낸 말이다.


그리고 아무 말이나 한다는 것은 막말을 한다는 거겠지?

할 말 못 할 말 안 가린다는 거다.

그게 자랑인가.


그리고 그는 조건을 달았다.

화가 날 때만 그런다는 거다.

이 말의 전제는 A가 B의 심기를 거스르는 행동을 했다는 것이다.

상대에 대한 우회적인 비난이다.


네가 원인을 제공해서 내가 화가 난 거야.

내가 화를 내서 너는 기분이 나빴겠지.

하지만 너에게도 일말의 책임은 있어.

그러니까 너무 나한테 뭐라고 하지 마.

뭐, 이런 의미를 담고 있는 거다.  


A: 그런데 누구나 그래. 누구나 화가 나면-


B: 그러니까. 그래서 나는-


A: 그런데 아무 말을 하는 것도 사실 모두에게 그러지는 않잖아.


나르시시스트가 제시한 프레임을 수용하면 안 된다.

그에게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이 말싸움에서 이기려고 가공한 프레임이다.

A는 프레임을 차별로 바꿨다.

그래, 화나면 막말하는 성격이 B의 특징이라고 인정하마.

그런데 B도 내가 잘 웃으니까 그러는 거잖아?

사람 봐가면서 성격 드러내지?

이런 질책을 담아 이 말을 건넸다.  


B: 아, 그러니까 전화 통화를-


A: 화가 난다고 B보다 서열이 높다고 생각하는 사람한테 B가 그렇게 안 하잖아.


A는 직접적으로 서열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B의 약점을 언급한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유독 서열에 민감하다.

그는 동등한 관계를 부당하게 여긴다.

자신이 능력만큼 인정받지 못해서 하대 받는다고 인지한다.


이런 사람들은 윗사람이라고 인식하는 대상에게 괴롭힘을 당하면 아랫사람으로 인식하는 대상에게 스트레스를 푼다.

그러면서 본인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너를 생각해서 그랬다고.

본인이 생각해도 못된 게 맞으니까 무의식적으로 방어하는 것이다.


나쁘게 굴고 싶지만 나쁜 사람이 되면 비판받을 수 있다.

나르시시스트는 그게 두렵다.

비판받는 것.

내 약점을 들키는 것.

그래서 속 보이는 거짓말을 하면서 남이 속아주길 기대하는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는 못된 이미지를 구축하려고 노력한다.

그게 강하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친절하고 부드러운 태도를 약하다고 여긴다.

그래서 그들은 친절한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싫어한다.


친절한 대우를 받으면 존중받는 것 같다.

그러니 싫어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나르시시스트가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이 바로 따뜻한 모습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친절을 혐오한다.

친절해지는 것은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적대시하는 행동양식이다.


나르시시스트는 무시당하는 게 두려워서 못되게 군다.

자신만의 생존방식인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의식적으로 멀리하는 행동을 누군가가 반복한다면?

나르시시스트는 상처를 받는다.

수치심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르시시스트에게 친절해지지 마라.

그의 공격성을 건드리는 격이다.

나르시시스트에게 공격은 최대의 방어다.

우리가 배려한다고 부드럽게 대하면 나르시시스트는 상처받을 것이다.  


B:....... 일단


아까에 이어 또 ‘일단’이라는 말을 꺼냈다.

A의 주장에 직접적으로 반박하기 어렵다는 거다.


혹은 A의 주장을 반박하려면 좀 더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다.

어차피 A가 꺼낸 주제로 이야기해 봤자 B에게 실익이 없다.

불리한 주제로 이야기하는 것은 자멸이다.

B는 일단이라는 말로 화제를 돌리려 했다.


A: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B: 나보다 그렇게 그런 사람이 나한테 전화를 해서 막 소리를 지르거나 이런 일을 내가 겪어본 적은 별로 없으니까.


B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이어갔다.

평소 그는 정의를 부르짖고, 도덕적인 흠이 있는 사람들을 비난해 왔다.

하지만 A가 말하는 B의 이미지는 그동안 그가 비난해 온 사람들과 다를 바 없었다.

A의 해석에 B는 저항해야 했다.

그래서 A를 탓했다.

서열이 높은 사람이 본인에게 소리를 지른 적이 ‘별로’ 없었단다.


그런 일이 있긴 있었나 보다. A가 직장에서 힘든 일이 생겼을 때, B는 과거 선배들에게 사람 취급도 못 받았다고 억울해했다. 선배들에게 B가 하대를 받았고, 그 대우를 부당하게 여겼지만 화내지 못했다는 것을 암시했다. 하대의 영역 안에 소리 지르는 일은 별로 없었던 걸까. 사람 취급도 못 받았다는 수위는 어느 정도였던 걸까.


A: 아니지. 소리를 지른다는 건 특정 상황이고, 나는 원론적인 이야기를 하는 거야.


B: 내 얘기를 조금 들어봐 줘. 그래서 그날 너랑 나랑 얘기하면서 서로 감정이 안 좋았잖아. 너는 막 소리를 지르고. 나도 전화받는 게 버거워졌어. 그래서 내가 너한테 짜증 난다고 말했다기보다는 사실 전화를 끊으면서 성질낸 것 같아.


A: 그날 전화가 어떤 날 전화 말하는 거야?


B: 내가 너한테 짜증 나게 하네라고 말했다는 그날 말이야. 네가 전화해서 소리 질렀잖아.


A: 내가 뭐라고 했는데? 소리를 질렀다고? 내가 B에게 소리를 지른 건 아니겠지. 당연히.


B: 어쨌든 전화해서 소리 지르면 안 되는데 하고 생각했어.


‘어쨌든’이라는 접속사가 또 나왔다. A의 말에 반응하고 싶지 않다는 거다.


B: 네가 소리 지르니까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그리고 10분 동안 소리 지르는 걸 듣다 보니까 힘들어졌어. 그래서 나도 모르겠다, 어떻게 이야기를 해줘야 될지 모르겠다. 어떤 이야기를 해도 도움이 안 될 것 같고. 내가 어떻게 해야 될지를 모르니까. 그래서 내가 전화를 끊으면서, 나도 너무 화가 나니까.


대신 A가 소리를 질렀다고 재차 언급했다.

상대가 소리 질러서 기분 나빴다는 게 진짜 하고 싶은 말이었다.

B의 감정 흐름이 자연스럽지 못하다.

상대를 돕고 싶지만 방법을 모른다면 보통 안타까워하거나 난처해한다.

그런데 B는 그저 화가 났단다.

그것도 너무 화가 났단다.

결국 A의 태도로 모욕감을 느꼈다는 게 핵심이다.


어떤 도움을 줘야 할지 몰라서 ‘짜증 나게 하네’라고 말했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

B는 이미지를 관리하려고 억지로 이유를 갖다 붙였을 수도 있다.

평소 그는 스스로 바른 사람임을 강조했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선하다고 은연중에 자기 과시를 했었다.

그런데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짜증 나게 한다고 말한 것은 선한 행동은 아니다.

어쩌면 B는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을 수 있다.

A: 그럼 내가 소리를 질러서 화가 났다는 거야? 네가 나한테 왜 소리를 질러 그런 마음이었던 거야?


B: 아니. 왜 소리를 질러뿐만이 아니라 그 전날-


소리 질러서 화가 났냐고 되묻는 말에 B는 아니라고 답했다.

그리고 뒤에는 소리 지른 것도 포함한다고 다시 말을 번복했다.

B는 A의 말이 합당해도 억지를 부리며 부정한다.

A는 B가 소리 질렀다고 인식하는지 몰랐다.

그래서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하지만 막상 그 말을 한 당사자는 그게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뒤이어 A가 말한 내용과 똑같이 말한다.

그럼 아닌 게 아니라 맞는 거다.  


A: 어, 그러니까 그것도 포함되는 거지. 내가 B한테 소리를 지르는 것이 불쾌해했다는 거잖아.


A는 답답했다.

B와 주고받는 대화가 잘 되지 않는다.

왜 내 말을 부정한 다음에 다시 부정한 말이 맞다고 하는 거지.


B: 어, 그것도 어느 정도는 있지.


A가 B이 말을 다시 한번 정리했다.

B는 A의 말을 인정하는 것 같지만 교묘하게 뉘앙스를 바꿨다.

지금까지 A가 소리 질러서 자존심이 상했고, 상처받았다는 식으로 말해왔다.


그때 A는 몸이 몹시 힘들었다.

그래서 B에게 전화를 걸어 괴롭다고 하소연한 적이 있다.

그 상황에서 B는 상대에게 짜증 나게 한다고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막상 A가 그때 상황이 불쾌했냐고 묻자 B의 말이 달라졌다.

소리 질러서 기분이 나쁜 것도 ‘어느 정도’ 있다는 거다.

소리 지른 게 B의 감정이 상한 여러 개의 원인 중 하나라는 식이다.


하지만 아까부터 B는 A가 소리를 질렀다는 것을 다른 요인들보다 유난히 강조했다.

상대가 목소리를 높인 상황이 B가 분노한 발화점이었다.  

다른 이유들은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낮았다.  

A: 그러니까 그걸 얘기했던 거야.


B: 그러니까 그전 날도 우리가 직접 만나서 한참 이야기를 했고, 만나서 이야기하기 전에도 거의 일주일을 넘게 계속 통화했잖아.


A: 그러니까 B는 내가 자주 전화했고, 계속 힘들다고 말하고, 소리를 지르니까 이제 점점 버거워졌다, 그래서 아무 말이나 했다. 이거인 거지?


B: 아무 말이나 한 게 아니라-


A: 아무 말이나 했다고 방금 나한테 그랬잖아.


B: 지금 그 이야기가 아니야.


A: 그 이야기가 아닌 게 아니라 맞는 말이지.


A는 B의 말을 기억해서 다시 되물었다.

그런데 또 B는 그게 아니란다.

아닌 게 아니다.

A의 말이 맞다.

이전의 대화를 복기하자.

대화의 맥락과 흐름을 위주로 살피면 된다.


B: 그리고 나도 집에 와서 내가 그런 말을 했을까 생각했는데. 내가 가지고 있는 부분 중에서 내가 화가 나면 막 아무 이야기나 하면서 화를 푸는 이런 게 있어.


A: 화가 난다고 B보다 서열이 높다고 생각하는 사람한테 B가 그렇게 안 하잖아.


B: 나보다 그렇게 그런 사람이 나한테 전화를 해서 막 소리를 지르거나 이런 일을 내가 겪어본 적은 별로 없으니까.


B는 화나면 말을 못 가린다는 뉘앙스로 성격을 설명한다.

A가 서열이 높은 대상에게는 B가 화내지 못한다고 역공했다.  


B: 내가 너한테 짜증 나게 하네라고 말을 했다는 그날 말이야. 네가 전화해서 소리 질렀잖아. 나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화가 나면 아무 말이나 한다고 말한 다음 저 에피소드를 언급한 거다.

그럼 A가 정리한 내용이 맞다.

왜 아니라고 했을까, B는?

사실 아까부터 A가 B가 말한 걸 정리해서 되묻기만 해도 계속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지금 B는 지적당하고 있다.

주도권을 뺏긴 기분이다.


주도권을 쥐는 가장 쉬운 방법은 주도권을 쥔 사람을 흉내 내는 것이다.

지금 B는 A의 비판에 상처받고 있다.

현재 자신이 약자처럼 느껴진다.

상대가 강자처럼 느껴진다.


그럼 B가 그나마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은 강자를 따라 하는 것이다.

A가 B의 행동을 지적하는 것처럼 B도 똑같이 상대를 지적해야 동등해질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A가 맞는 말을 해도 B가 막무가내로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B: 계속 상황이 그러니까. 나도 더 뭘 어떻게 해야 될지도 모르겠고. 서로 이야기가 잘 되지 않는 상황이잖아. 그리고 일방적으로 계속 이야기를 듣는 것이 나에게 힘이 부치기도 했고. 그러니까 내가-


A: 그렇지. 힘들지.


B: 어, 어쨌든 전화를 그날은 감정적으로.... 시간을 들여 이야기를 해도 달라지지 않는 상황과 나한테 계속 소리를 지르지 하는 마음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마음이었어.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A가 긍정적으로 반응해도 B는 어쨌든이라고 말하면서 말을 다 넘긴다.

나르시시스트는 다른 사람이 동의하는 것조차도 주도권을 뺏긴다고 생각한다.

이해해 주는 상대를 강자처럼 느끼기 때문이다.

그는 상대가 자신의 행동을 수용해 주는 것조차 자존심 상해한다.


B: 내가 아무 말이나 했다는 건- 그러니까 내가 너무 내 속에 화가 나니까.. 나는 전화를 끊었다고 생각했겠지. 전화 끊고 나서 짜증 나네 이런 이야기를 한 거야. 그러니까 난 사실 정확히 생각이 안 나.


‘시간을 들여 이야기를 해도 달라지지 않는 상황’이라고 말한 게 기시감이 있다.

아까 A의 말 중 뒷부분을 읽자.


A: 내가 시간을 들여서 이렇게까지 이야기했는데 결국 인정하지 않는구나 싶어서 마음이 찜찜하더라고.


B는 이 대목에서 상처를 받았을 수도 있다.

시간을 들여 얘기했다는데 B가 적절한 반응을 보이지 못했다는 거니까 말이다.

A가 B를 한심하게 본다는 느낌을 받았을 수도 있다.

이에 상처를 극복하려고 기회를 보다가 A의 말투를 따라 했을지 모른다.


A가 아까 내가 소리 질러서 아무 말이나 한 거냐고 되묻자 B는 그 얘기가 아니라고 반박했다.

그런데 그 뒤에 ‘아무 말이나 했다는 건 화가 나니까 전화를 끊고 짜증 난다고 한 거야’라고 말했다.


그럼 아무 말이나 했다는 얘기를 하는 게 아니라고 하고, 그다음에 바로 아무 말이나 했던 예시를 설명했다.

다시 말해 A가 정리한 내용이 맞다.

B는 말만 아니라고 하지 그 뒤에 들어보면 A가 정리한 내용대로 행동한다.  

A의 말을 복기하자.


A: 그러니까 B는 내가 자주 전화했고, 계속 힘들다고 말하고, 소리를 지르니까 이제 점점 버거워졌다, 그래서 아무 말이나 했다. 이거인 거지?


B의 말을 복기하자.


B: 일방적으로 계속 이야기를 듣는 것이 힘이 부쳤어. 시간을 들여 얘기해도 달라지지 않고, 계속 소리를 지르지 하는 마음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마음이었어. 내가 아무 말이나 했다는 건 화가 나니까 전화 끊고 나서 짜증 나네라고 한 거야. 나는 전화를 끊었다고 생각했겠지. 사실 정확하게 기억이 안 나.  


A가 B의 말을 정리한 것과 B의 말은 내용이 같다.

B가 계속 아니라고 하는 건 궤변이었다.


B의 궤변을 정리하면 이런 거다.

‘나는 화가 나면 아무 말이나 하는 성격이야. 그런데 지금 아무 얘기나 했다고 말하는 게 아니야. 아무 말이나 했다는 것은 내가 너무 화가 나니까 전화를 끊고 아 짜증 나게 했네라고 말한 거야.’

그게 아무 말이나 한다는 거잖아. 결국.


그리고 B는 짜증 나게 한다고 말한 기억이 ‘정확히’ 안 난다고 했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B는 그 일에 관해서 기억을 ‘전혀’ 못 하고 있다.


A: 짜증 나게 하네라고 한 건 맞네.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 그렇지?


B: 어?

A의 질문에 B는 갑자기 멈칫하면서 놀랐다.

아까와 같은 상황이다.

A는 B의 말을 정리해서 되물었다.

본인이 한 말인데 왜 놀랄까.


B는 아직 본인이 그런 말을 했다고 인정할 마음의 준비가 덜 됐다.

막상 코 앞에서 인정하려니 거부감이 들었던 것이다.

지적을 당했고, 지적이 맞다는 말까지 하고, 사과하게 생겼으니까 말이다.

자기 보호본능이 발동한 것이다.


A: 짜증 나게 하네라고 하신 건 맞네. 그렇지?


B: 아니, 그러니까 나는 그게 생각이 안 나. 내가 짜증 난다고 말한 걸 네가 들었다고 하니까. 그러면 내가 전화를 끊으면서 짜증이 나니까 짜증 나게 하네라고 말한 게 아닐까. 나는 전화를 끊었다고 생각했는데. 끊고 내 화를 삭이기 위해서 그렇게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때 네가 듣게 됐을 수도 있겠다는...


B는 또 ‘아니’라는 접속사를 붙였다.

스무고개 하는 것도 아니고.


A는 B의 말을 간추려서 핵심만 되묻는다.

그럼 B는 일단 아니라고 한다.

그다음 A와 똑같은 내용을 말한다.

잘못했다고 인정하기 싫다.

그런데 상대의 말을 맞다고 하면 잘못을 인정하는 셈이다.

잘못했다고 생각하면서도 사과하기 싫다.

그런 마음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궤변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A는 전화를 끊고 난 이후에 B가 짜증 나게 하네라고 말했다고 설명하지 않았다.


A의 말을 복기하자.

A: 내가 계속 얘기하는데 B가 자꾸 전화를 끊고 싶어 하는 것 같더라. 끊고 싶은데 내가 계속 말하니까 B는 짜증이 났겠지. 아, 진짜 짜증 나게 하네 크게 말해서 내가 깜짝 놀랐어. 그 말에 대해서 내가 반응하지는 않았고.


B: 내가 너랑 통화할 때 -


A: 그게 너무 마음에 남아서 가족한테 말했어. B가 나한테 짜증 나게 하네라고 말하면서 신경질 냈다고. 그런데 내가 자꾸 전화하니까 그럴 수 있다고 하더라. 내가 생각해도 짜증 났을 것 같아. 짜증 난 것 이해해. 그런데 앞에서 무시하니까 좀 그랬어. 단정적으로 B가 그런 적이 없다고 말하니 의왼데


B: 어. 아니, 왜냐면 나는 그런 말을 나는 안 하니까.


A: 나는 그런 말을 들었으니까. 혼선이 있다는 그건 B가 오해를 하는 것 같아.


B: 오해를 하는 게 아니고 -


A: 혼선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뭘 이야기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내가 그날 어떤 상태였는지, 오전 오후였는지, 그 말을 들을 때 그 방에서 서 있었는지 앉아 있었는지 명확히 기억하니까. 혼선은 절대 아니고. B가 했던 말은 맞아.


B: 네가 계속 그렇게 생각을 해온 건 아니고?


A: 응. 아니지.  


전화를 끊고 혼잣말을 했다는 건 B가 스스로 생각해 낸 설정인 건가.

아니면 저 대화를 할 때 A의 말을 B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이전의 대화에서 B는 짜증 나게 하네라는 말을 안 한다고 못 박았다.

이 말이 그렇게 심한 말은 아닌데, 사실.

‘그런 말을 안 한다’고 할 정도의 과한 욕은 아니다.

다만 본인의 심정을 드러낸 말일뿐이다.


그리고 이번엔 본인이 화가 나면 아무 말이나 하는 편이라며?

짜증 나게 하네 라는 그런 종류의 말은 안 한다.

하지만 화가 나면 아무 말이나 한단다.

이렇게 나르시시스트의 말을 앞, 뒤가 안 맞는다.

그의 모순과 궤변이 드러난다.

논리적이지 못하다.

당연하다.

저 말은 진심이 아니다.

그저 처세술에 불과하다.


A: 잠깐만. 말을 헷갈리게.. 그러니까 짜증 난다는 이야기를 했던 건 사실이지?


사실이다 아니다 둘 중 하나의 답변만 하면 된다. 이게 어렵나?


B:... 그러니까 나는 그게 생각이 안 난다고.


생각나는지 여부를 묻지 않았다.

답답하군.

생각이 안 나는 것은 이미 다 알고 있다.

왜 자꾸 A가 아는 얘기만 반복하나.

A: 생각이 안 나면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B는 모르는 거네. 지금 말하는 건 B의 주관적인 추측이잖아.


B: 너는 들었다고 하니까.


A:.... 아니, 그럼 지금 말하는 건 B의 상상이지.


B: 상상이라기보다는-


짜증 나게 하네라고 말을 한 게 기억이 안 난다며?

기억이 안 나는데 저렇게 말하는 것은 상상한 거다.

기억이 안 나는데 설명할 수 없다.  

지금 B는 A의 진술에 기대어 상상력을 덧붙였을 뿐이다.   


A: 그리고 그 뒤에도 대화를 이어 갔어. 짜증 나게 하네라고 말하고 대화가 끝이 아니었어. 그런데 중요한 건-


B: 아니, 내가 그렇게 하고 전화를 끊어서 네가 말을 했다며-


A는 B가 짜증 나게 하네라고 말한 다음에 전화를 끊었다고 한 적이 없다.

B가 A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A가 말한 것을 B가 그대로 읊는 건 의미가 없다.


이 내용이 기억나나요?

네, 기억이 납니다.

혹은 아니요, 기억이 안 납니다.


대화가 그렇게 흘러가야 한다.

그런데 B는 이렇게 말하는 셈이다.


A가 묻는다.

이 내용이 기억나나요?


B가 따진다.

네가 그 내용이라고 말했다며?


그래, 맞다. 그렇게 A가 말했다.

그래서 어쩌란 건가.

지금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지 않고, 남의 내놓은 답지를 뺏어서 활용하는 거다.


A의 요지는 B가 짜증 나게 하네라고 말했다는 걸 스스로 인정하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B는 그 간단한 대답도 못하고 있다.

대신 말을 빙빙 돌렸다.

네가 짜증 나게 하네라고 말했다며?

되묻는 저의는 자신이 답해야 할 책임을 상대에게 떠넘기는 것이다.


A가 말했다.

B가 나한테 짜증 나게 한다라고 말했다고.


이미 알고 있다.

그걸 왜 다시 따지듯이 묻는 걸까.

대화의 흐름에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


그럼 A가 내가 그렇게 말한 게 맞다고 대답했다 치자.

그럼 그다음 B가 무슨 말을 할 건데?

의미가 없는 대화다.


A는 B에게 내가 말한 사실을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지금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은 B다.

그런데 대뜸 ‘내가 짜증 나게 하네라고 말했다고 한 사람은 너잖아?’ 이런 뉘앙스로 따지듯이 반문하고 있다.  


그래. 그렇게 말한 사람은 A 지.

그게 질문의 요지가 뭐야?

내 말을 흉내만 내지 말고, 본인의 기억대로 이야기해.

앵무새처럼 내 말만 따라 하다니 말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A는 속으로 화를 냈다.

B는 본인이 했던 말을 깔끔하게 인정하지 못하고, 엉뚱한 질문을 하고 있다.  

나르시시스트는 잘못을 인정하는 것을 못 견뎌한다.

그는 사과하는 것만큼은 정말 수치스러워한다.

자신의 빛나는 명예가 떨어졌다고 생각한다.

사과하는 게 그렇게 싫으면 도덕적인 선을 지키면 된다.

하지만 나르시시스트의 성정장 또 그러지는 못한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는 늘 기분이 안 좋다.

지적당할 만한 행동을 하면서도 사과하기는 싫어한다.

그러니 누군가의 비판을 들으면 나르시시스트는 도망 다니느라 정신이 없다.

도망자의 마음이 개운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A: 그건 내가-


B: 블라 블라


A: 네? 여보세요? 겹쳐 들려서 앞 말을 못 들었어.


B: 하........


A: 그런데 상상으로 이야기를 하실 게 아니라-


B: 그래서 어쨌든– 그래. 미안하다. 내가 그것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해서. 일단.


다시 한번 말하지만 기억이 부정확한 게 아니다.

B의 머릿속에 그 일이 아예 없다.

아예 삭제 처리됐다.

B는 기억을 못 하면서도 기억을 ‘정확하게’ 못했다고 주장한다.

아까는 또 기억이 안 난다고 해 놓고는.   


A: B가 기억을 못 할 수 있다고 생각해. B가 기억을 못 하는 부분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 게 아니야.


이 말은 B는 대화의 우선순위를 다시 생각해 보라는 거다.

핵심은 기억의 여부가 아니다.


B가 기억을 못 한다고 미안할 필요는 없다.

미안할 일은 따로 있다.

짜증 나게 하네라고 면전에서 감정적으로 면박 준 것을 미안해해야 한다.


B: 그러니까 너한테는 힘들었을 일인데 나는 기억도 못하고 있다는 게-


힘들다기보다 분노했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그리고 A는 기억 안 나는 건 상관없다고 분명히 밝혔다.

그런데 B는 자기 말만 하고 있다.

타인을 말을 새겨듣지 않는다는 증거다.  


A: 아니야. 그게 아니야. 기억을 못 할 수 있어. 기억 못 하는 건 문제가 아니야.


 A는 다시 반박했다.

답답했다.

기억을 못 하는 건 괜찮다.

기억이 안 난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B가 펼쳤던 논리 구조가 이상했다.


A: 문제는 B가 기억이 없다는 이유로 나를 이상한 사람 만들었던 거지. 내가 생사람 잡는다는 식으로 말했던 거지. 나는 생각을 죽 하다가 참다가 전화한 건데.


B: 그래서 내가 그래서 그랬나 보다 생각한 거야. 사실 나는 생각이 안 나고-


A: 생각이 안 나면 생각이 안 나는 거지 기억의 혼재라고 말했잖아. 내가 다른 사람한테 들은 얘기를 B가 말한 걸로 착각한 거라고 했잖아. 나를 이상한 사람 만들려고 했잖아.


B: 그러니까-


A: 그리고 상식적으로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한 게 기억이 안 나면 적어도 사람은 ‘내가? 내가 그랬다고?’ 하면서 시간을 두고 조금이라도 생각을 한 다음에 말하잖아. 그런데 B은 그것도 아니고 내 말이 끝나자마자 ‘그런 일이 절대 없다, 그런 말을 난 안 해’ 이런 식으로 하면 내가 당황스러워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내가 분명히 듣고 생각하다 전화한 건데.


B: 너는 오랜 시간 그걸 생각하다가 전화를 한 거지.


생각하다가 전화했다는 말은 방금 A가 한 말이다.

B는 방금 전 들었던 말을 그대로 흉내 냈다.

B의 대화 패턴은 지난번과 동일하다.

대꾸할 말이 없고 수세에 몰린다 싶으면 A가 했던 언어를 모방한다.

이 상황도 역시 B가 할 말이 없는 상황이라는 의미다.  


A: 그런 말을 안 한다고 하면(나는 어이가 없지)... B가 1인 2역을 하는 것도 아니고.


B: 그래. 그래서 전화를 처음 받았을 때 사실 되게 당황스러웠어.


다시 B는 A가 자신의 감정을 설명한 것을 따라 했다.

당황스럽다는 것은 방금 A가 한 말이다.

B는 A의 말을 인정하고 미안해하는 척하면서 수동적으로 공격하고 있다.

B의 사과가 가식적이라는 뜻이다.     


나르시시스트는 힘 있는 자 앞에서는 유난히 약해진다.

A는 B를 코너로 몰았다.

B는 약자로 전락했다.


B는 A의 지적으로 상처를 받고, 상대가 힘이 있는 존재라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A의 비판에 변명하는 태도로 일관하는 자기 자신이 수치스러웠다.

잘못했다고 실토했으니 반격할 말이 별로 없다.

하지만 약자의 위치에서 탈출하고 싶다.

불리한 입장을 벗어나는 가장 쉬운 방법은 강자의 행동을 모방하는 것이다.


B가 A를 모방하는 것은 불쾌감을 드러내는 행동이다.

약자가 됐고, 할 말이 없어서 위축된 자신을 보호하려는 것이다.

A의 말에 상처받았다는 항변이기도 하다.

자신의 비합리적인 행동으로 타인이 부정적인 감정을 느꼈다니.

그 장면에서 B는 스스로 부족함을 드러낸 것 같아 창피했을 것이다.  


A: 그건 당연하지. 내가 이렇게 말할 줄 몰랐겠지.


이 말을 듣고, B는 무척 당황했다.

A의 동의는  B의 예상 밖의 일이었던 것이다.

나르시시스트의 심리 상태는 보편적인 관점에서 보지 말고, 나르시시스트의 특유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해석이 빠르다.


다음 화에서는 B가 동요한 이유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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