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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르시시스트 옆에 있으면 생기는 일

"나는 타인보다 우월해" 나르시시스트는 살찐 자아를 이렇게 표현한다

어딜 가든 지뢰 같은 유형은 존재한다.  

그들은 상대를 무시한다. 

비난한다. 

조롱한다. 

폭언한다. 

인간을 도구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과 교류하면 기분이 불쾌하다. 

마음에 상해를 입는다.

  

이런 일을 방지하려면 지뢰를 멀리서 알아보고 둘러가야 한다.
밟으면 터질 뿐이니까.


영지는 타 부서 직원인 C의 일을 도와준 적이 있다.

효율적인 의사소통을 하려고 자리도 C의 옆으로 옮겼다. 

짐을 정리하는데 문자가 왔다. 


[안녕하세요. 저는 C입니다. 이따 사무실에서 뵐게요.^^]

  

가끔씩 복도에서 마두치면 인사하곤 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평범해 보였다.   

  

점심 시간이 됐다. 

영지는 C, C의 후배 D와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아직 서로 잘 몰랐다. 

분위기가 서먹했다.    

C는 침묵을 깨야 한다고 느꼈을까.

갑작스럽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하루에 신문은 몇 종이나 보세요?"


영지는 처음 듣는 질문이었다.  

신문을 보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몇 종을 읽는지 세어 본 적은 없다. 

게다가 아이템에 따라 매번 보는 신문이 다르다. 

'하루'에 '몇 종'을 보는지 정량화할 수 없는 영역이다. 


신문을 '본다'는 기준도 애매했다. 

예를 들자.  

한 언론사의 종이 신문을 정독한다. 

초록창에 뜬 헤드라인 기사 제목을 훑어본다. 

둘 다 신문을 '보는' 행위다.   

C가 의도한 '본다'의 정확한 정의는 무엇일까? 

그는 잘 모를 것이다. 


C는 궁금해서 질문한 게 아니었다. 

그의 표정과 말투는 면접관과 흡사했다. 

상대를 테스트하는 질문이었다. 


영지는 타 부서에서 잠깐 파견나왔다. 

신문을 몇 종 읽는지 성실하게 대꾸해 줄 이유가 없었다.  


옆에서 조용히 밥만 먹던 D는 이상한 분위기가 만들어진 게 민망한 듯했다.  

정색할 만한 상황이라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모르는 척하는 건지 C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매일 저는 신문을 수십 종이나 봐요."

C는 남을 궁금해하지 않는다. 다만 타 부서에서 와서 낯선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사람 혹은 인턴에게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리고 싶어 던진 질문이었다

아무도 묻지 않았다.

그가 신문을 얼마나 읽는지 궁금할 정도로 사람들은 한가하지 않다. 

(설마 아이스브레이킹한답시고 저런 말 던진 건 아니지?)   


C도 상대가 신문 보는 습관이 궁금한 건 아니었다. 

다만 그는 많은 종류의 신문을 본다고 말하고 싶어 했다.   

그래서 징검다리용 질문을 던진 것 뿐이었다. 


하루에 수십 종의 신문을 읽는다고 해석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종이신문을 첫 면부터 마지막 면까지 정독한다는 걸까?

온라인 신문은?

영상 뉴스는?

어떤 종류의 신문을 어떤 방식으로 읽는다는 걸까?

훑어보는 건 읽는 편에 속할까, 과연?

초록창 메인에 걸린 헤드라인을 다 살펴본다는 걸까?

그것만으로 수십 종의 신문을 본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매일' '수십 종'의 신문을 읽는다고 주장하는 객관적 근거는 뭐지?


C의 주장은 추상적이라 신뢰할 필요가 없었다.

신문을 그렇게 많이 읽는다면 일은 언제 하는데?

나르시시스트는 자기자랑을 거리낌없이 많이 한다. 

그런데 내용이 추상적이고, 관념적이다. 

구체성이 부족하고, 실질적인 내용이 없다. 

C의 사례처럼 논리적으로 허술하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기세 등등 하게 몸집을 부풀린다면 거리를 두고 실체를 의심해야 한다. 

자기 자랑이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한껏 고개를 든 오만함은 진짜 모습을 감추려는 눈속임일 수 있다. 

한 명만 일방적으로 말하면 다른 사람들이 어떤 기분을 느끼는지 알까? 그리고 그가 말하는 내용은 자신과 상대를 무의식적으로 비교하는 거였다

"저는 (인 서울인) OO대학교를 나왔어요. 제가 B부서에 오랫동안 있었거든요. 다른 부서로 배정돼도 결국 B부서로 되돌아왔어요. 본부장이 저를 다시 불렀거든요." 


C는 권력이 있는 누군가가 자신을 좋게 보고 있다고 주장했다.   


영지는 C가 빌런이라고 거의 확신했다. 

심리적 거리에 맞지 않는 질문과 뜬금없는 자기자랑은 이상한 사람이라는 신호였다.

그래도 한 달 정도는 같이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한다. 

그 동안만이라도 잘 지내고 싶었다. 


그래서 자신이 속한 E부서에서도 일했는지 물었다.

E팀은 모든 직원이 통과의례처럼 거쳐가는 부서다. 

인원도 가장 많다. 

그래서 당연히 근무했을 거라고 예상했다.

접점이 있으면 경직된 분위기가 풀어질 것 같았다.


그런데 C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다. 

그는 예리한 송곳으로 옆구리를 찔린 사람처럼 당황했다.

그리고 잘못을 들켜서 구구절절 변명하듯이 작은 목소리로 급하게 말했다.  


"E팀에는 잠깐 있었어요. 그런데 F국가에서는 한국처럼 E팀 인원이 많지 않아요. 그 정도로 많은 사람이 필요하지 않거든요(우리나라만 유별난 거예요)."


E팀의 인원이 많아서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알고보니 C는 E부서에 있던 기간이 다른 이들에 비해 희한하게 짧았다.

그는 이를 약점으로 받아들이는 듯했다. 

이번에도 묻지도 않는 말을 했다. 

상대의 반응을 걱정하는 듯한 방어적인 태세였다.  

그는 이런 마음을 밝힌 셈이다. 


"혹시 제가 E팀 경력이 별로 없다고 무시할 건 아니죠? 잘 몰라서 무시할 수도 있죠. 하지만 저는 그런 대우 받을 사람은 아니에요. 사실 거기 많은 사람들이 갈 필요 없는 부서에요. 그러니까 그쪽 경력이 부족한 건 제 탓이 아니에요."

평이한 질문이었는데 C는 과도하게 반응했다. 무표정인데 눈만 커진 고양이 같았다. 내 질문에 자신을 방어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이야기를 딴 데로 돌렸다

영지는 타 부서에서 건너 온 사람이다. 

인턴 D는 대학교를 갓 졸업한 신입사원이다.


나르시시스트의 관점에서 타 부서 직원이나 인턴은 희생양 후보다. 

사회에서 받은 스트레스와 억울함을 분풀이할 수 있는 대상이다. 


본인이 일에 능숙하고 노련하다는 인상을 주고 싶어 했다.

하지만 E팀에서의 짧은 경력을 실토해버렸다. 

구축하려던 이미지에 금이 갔다고 느꼈다. 

그래서 C는 그토록 당황했던 것이다. 

그래서 대화의 프레임을 급하게 바꿨다.

거창하게 외국 사례까지 들먹였다. 

E팀이 하는 일에 비해 몸집이 크다고 은근슬쩍 비하한 것이다. 

회사에서 E팀이 뉴스의 지분을 가장 많이 차지하는데 말이다. 

그는 짧은 경력이 흠이 아니라고 강조하다 E팀을 무시하는 실언을 해버렸다.

나르시시스트와 사기꾼의 공통점은 엄청난 자신감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지나치게 확신 어린 태도로 비판을 일삼는다면 자신을 부풀려 환심을 얻으려는 의도일 수 있다

나르시시스트는 남보다 내가 낫다고 느껴야 비로소 안심한다.  

스스로가 남보다 못나 보이는 순간을 견디지 못한다.

그래서 험담과 비방으로 경쟁자를 깎아내린다. 

밑진다 싶으면 '내려치기' 어법을 쓰는 것이다.


나르시시스트의 비판은 근거 없는 비난일 때가 많다. 

앞으로는 그의 비난을 해부해 반대의견을 내보자.

그는 당황해서 횡설수설하면서 도망갈지도 모른다. 

 

이디야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C의 이상한 도발과 수동 공격으로 분위기가 더 어색해졌다. 

그는 그런 분위기를 아는지 모르는지 내밀한 자기 고백을 했다.  

저는 이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엄청나요. 그런데 제 자존감은 바닥이에요. “

친한 사람들도 '자존감'은 조심스러운 주제다. 통성명한 지 얼마 안 된 사이에 '자존감'을 말하는 건 부자연스럽다. 인간관계의 폭이 좁은 사람들 중 일부가 이런 실수를 한다

C는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라고 인지했다. 

다름아닌 그의 직업 때문이었다. 

일에 자괴감을 느끼기보다 자신감을 느끼는 게 정신건강에 좋다.      

그런데 C가 느끼는 자부심은 오만에 가까웠다.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하다고 오해하는 게 문제였다. 

더 큰 문제는 오만함 밑에 깔린 낮은 자존감이었다.

그리고 낮은 자존감으로 열등감을 느낄 때 감정을 털어내는 방식이었다.

C는 다른 사람들을 고의적으로 건드려서 우월감을 느끼려고 노력했다.

C는 열등감과 우월감 사이에서 배회하곤 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다른 사람에게 풀었다

C는 늘 혼자 다녔다.

회사에 수백 명의 선배와 동기와 후배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군중 속에서 고독만을 씹을 뿐이었다.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친구가 없는 근본적인 이유는 C의 태도 때문이었다.


그는 회사에서 본인을 능력만큼 인정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불만을 갖고 있었다.

C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도 명석하다고 스스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런데 회사가 멋진 자신을 몰라준다고 여겼다.

지금보다 더 높은 위치에 올라가야 마땅한 사람을 하대한다고 느꼈던 것이다.


하지만 진짜 모습은 거울 안이 아니라 거울 바깥에 존재한다.  

거울에 비친 그는 허구의 인물이다.

C만 진실을 몰랐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을 평범한 사람 취급할 때마다 상처를 받아 마음을 열지 못했다.


나르시시스트는 백설공주의 의붓어머니 마녀 같다.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이 말은 나르시시스트가 자기 자신과 타인에게 수시로 던지는 질문이다.


나르시시스트는 딱딱하고 매정한 현실을 지우고 이상적인 자아를 세워둔다.

그리고 그게 진짜 모습이라며 스스로 세뇌하기 시작한다.  

C는 ‘선배’가 어렵다.
C는 자신이 그들보다 더 나은 사람인데, 그들은 자신의 위대함을 모른다고 생각한다.

C는 '동료'가 어렵다.
C는 자신이 그들보다 더 나은 사람인데, 그들은 자신의 위대함을 모른다고 생각한다.

C는 ‘후배’가 어렵다.
C는 자신이 그들보다 더 나은 사람인데, 그들은 자신의 위대함을 모른다고 생각한다.
"나는 참 특별한 사람인데, 왜 평범한 사람들과 비슷한 대우를 받는 것 같지?" 나르시시스트의 큰 착각이자 불만이다

그나마 C가 말 붙이는 대상은 후배들이었다.

하지만 대화법에 문제가 있었다.

툭하면 그는 흥분해서 상대의 말이 틀렸다고 몰아붙이거나 무언가가 잘못됐다며 빈정거렸다.  


C: F는 G야.

D: F는 H입니다.

C: 야, 뭐가 맞는지 나랑 내기할래?


남이 반대의견을 내면 그는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다.

그래서 과도하게 흥분해 '내기'라는 유치한 단어를 끄집어내며 자신을 방어했다.


C는 남을 지적하고 훈계하는 걸 즐겼지만 누군가가 그의 판단이 틀렸다고 말하면 충격을 받았다.  

네가 감히 나의 의견을 반대해? C는 무엇이든 틀렸다고 하는 걸 좋아하면서 본인이 그런 말을 듣는 건 질색팔색 했다

언젠가 C가 타 부서 후배인 J, K와 대화하는 걸 봤다.

J는 K가 카메라 앞에서 멘트를 씹지 않고 차분하게 진행했다고 칭찬했다.

그런데 그 말에 C가 태클을 걸었다.


C: K야. 당연히 그런 상황에서 틀리면 안 되지!

J: C는 일하면서 지금까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나요?

K:....


잘못이 없는데 면박을 들은 신입사원 K가 난처해하며 고개를 숙였다.

주목할 점은 그런 K를 쳐다보는 C의 표정이었다.

나르시시스트에게는 상대의 반응이 너무나 중요하다. 내 말을 듣고 타격을 받는 걸 보면 나르시시스트는 기분이 좋아진다. 그 순간에 자아가 팽창하기에 지적하고 면박 주는 상황을 즐긴다

K가 민망해하는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그는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C의 만행을 보다 못한 J가 한 마디 했지만 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아마 그는 이런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내가 바로 이런 사람이야
K가 내 말 때문에 기죽는 거 봤지?
내가 꽤 괜찮은 사람 같지 않아?
나는 타인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인물이라고

사소한 순간에도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똑똑한 사람으로 바라보길 원했다.  

그러면서도 남이 칭찬받는 상황을 견디지 못했다.

늘 누군가를 지적하고 과소평가해야만 그의 자존감이 올라갔다.


나르시시스트의 자존감은 상황에 쉽게 좌지우지된다.

누가 조금만 지적해도 자존심이 팍 상하고, 누가 조금만 칭찬하면 자존심이 높이 올라간다.

 

K가 돋보이는 것 같자 C는 본능적으로 자존감이 내려앉았다.  

그래서 괜히 멘트를 틀리지 않는 게 당연한 거라고 어깃장을 놓았다.  

C는 그렇게 말하면 그 칭찬은 흐지부지되고, K에게 몰린 관심이 자신에게 돌아올 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에게 공격받은 상대의 반응을 관찰한다. 상대가 타격을 받아 괴로워하는 걸 보고 싶어 한다. 그래야 그들이 기분이 좋아진다

C가 바라는 것은 자신에게 손가락질당한 누군가가 반격하지 못하고 자존심에 상처 입는 거다.

누군가가 비난을 듣고 실망하는 것을 C는 즐겼다.


상대가 펀치에 맞아 휘청거리면, C는 본인이 힘센 존재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는 상대가 지적을 듣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자 애걸복걸했다.

C에게 후배는 'C를 올려치기 하는 연극'에 출연하기 적절한 조연이었다.  

C는 자신이 그 누구보다도 특별한 계란이길 원했다. 그런데 정말 그가 그렇게 특별한 계란이었을까? 아니었다

남에게 굴종을 강요하는 C는 선배들에게 순종적인 후배였다. 

부서 사람들끼리 여러 잔의 차를 사서 들고 온 적이 있다.

카페에서 회사 정문까지 C는 양손이 빈 채 털레털레 걸어왔다.


회사 안 1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C는 선심 쓰듯이 내가 들고 있던 캐리어를 채갔다.

그 캐리어에는 B부서의 수장이 마실 차가 들어 있었다.


그는 사무실에 가자마자 상사에게 공손히 두 손으로 차를 대령했다.
결론적으로 C가 처음부터 끝까지 상사의 차를 사수하는 모양새가 됐다.
그 먼 카페에서 회사까지 차를 들고 온 사람은 따로 있는데 말이다.


그가 의도한 연출이었다.

감독도 주인공도 C가 도맡은 한 편의 모노드라마였다.


그는 윗사람에게 잘 보이고 싶지만 힘들이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잔꾀를 낸 게 치사하게 엘리베이터에 타기 전 캐리어를 가져가는 거였다.

그는 상사가 자신을 충실한 심복으로 봐주길 바랐다.  

길을 걸어올 때도 그의 표정은 나같이 대단한 사람이 차를 들면 안 된다는 무언의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C가 남들과 교류하는 목적은 자신이 빛나는 것이다.


그는 상대에게 자꾸만 물어본다.


이거 알아요?
저거 알아요?


남이 뭘 아는지 모르는지 확인하는 것은 내가 무언가를 많이 안다는 걸 알리고 싶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조금이라도 모르는 것 같으면 C는 황홀해한다.

그리고 학원강사처럼 주야장천 아는 것들을 모조리 읊어댄다.


물론 C가 정말 엄청난 걸 아는 건 아니다.

남들도 아는 걸 본인만 아는 것처럼 으스대며 설명할 뿐이다.

대화가 자기 위주로만 돌아가야만 그는 직성이 풀렸다. 

"하하, 이거 모르죠? 저거 모르죠? 하하, 모르면 언제든지 말해요. 내가 설명할 수 있으니. 그런데 내가 설명할 수 있는 걸 아나요? 하하." 나르시시스트의 대화법이다

그러던 C가 갑자기 결혼발표를 해버렸다.


C는 행복해하며 말했다.


예비 배우자는 제가 최고라고, 뭐든지 잘한다고 말해줘요


예비 배우자가 자신을 좋은 사람으로 봐줘서 고맙단다.  

결혼을 앞둔 사람이라면 충분히 말할 법한 통상적인 소감이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C가 그렇게 말하니 평이하게 들리지 않았다.


C와 예비 배우자가 나눴던 대화의 흐름이 뻔했다.


한껏 어깨를 젖힌 그는 사회현상과 자신이 알고 있는 자잘한 것들을 강의한다.

그러면 상대가 말없이 고개를 끄떡거리며 호응해 준다.


대화는 상호작용이 필요한데 그는 타인의 의견에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신이 할 말만 생각했다.

나르시시스트는 타인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소통한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와 소통하면 벽보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현대사회에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문제는 빈곤한 내면을 해결하는 방식이다.

정서적으로 독립하지 못하고 남을 착취해 생존하길 선택하면 C처럼 행동하게 된다.

 

나르시시스트의 피해자는 착하고 유한 사람이다.

쉽게 남을 비판하지 않는 둥근 성격의 소유자다.  


나르시시스트도 싸움보다 평화를 택하고 타인의 결점마저 최대한 수용하려는 이를 용케 알아본다.  


나르시시스트의 비정상적인 인정 욕구를 채워주는 사람.

나르시시스트가 자기만족을 위해 남을 평가하고 빈정거릴 때, 그 태도를 가치 판단하지 않는 사람.

그런 사람을 곁에 둘 때 나르시시스트의 자아가 팽창한다.  


그렇다면 나르시시스트를 어떻게 알아볼 수 있을까.

빼빼 마른 내면의 소유자인 나르시시스트를 멀리해야 한다. 그들은 텅 빈 내면에 새 살을 채우고자, 건강한 사람들에게 접근한다

대화할 때, 내가 묻지도 않은 자신의 신상을 세세하게 밝힌다면 의심해야 한다.

항상 얘기의 결론이 셀프칭찬이라면 그는 나르시시스트일 확률이 높다.


나는 이런 사람이니까 네가 알아서 생각하라는 뉘앙스로 으름장을 놓는 사람이 있다면 역시 의심해야 한다.  


초반에 C도 황당한 얘기를 했다.

" 제가 막 짜증을 내요. "


어쩌라는 건가.

짜증 낼 거라고 예고한 저의는 타인과 자신의 관계 설정을 확실하게 하고 싶어서다.

나르시시스트는 최대한 상처받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강자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았던 사람일수록 강자를 흉내 낸다. 다치지 않으려고 미리 남을 경계해 방어하는 것이다

C는 남보다 우위에 있지 않으면 심약해진다.

그가 서열의 위에 서야만 자신이 공격당하지 않고 버틸 수 있다고 여긴다.  


E팀 위주로만 활동했던 그는 낯선 분야에서 온 나와 어린 인턴 앞에서 자신의 존재를 급하게 확인하려고 했다.

남에게 무시당할까 봐 두려워하는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의 사회적 위치에 망상을 더해 실제보다 더 몸체를 부풀린다.  

 

그는 위축된 자아를 팽창시키느라 본인이 감정적으로 행동해도 봐달라는 제스처를 취했던 것이다.     


나르시시스트가 무례한 태도를 일삼는 비호감 캐릭터로 전락하는 이유는 지나친 방어기제로 자신을 감싸느라 타인의 감정에 무뎌지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스트도 남의 시선을 신경 써서 열심히 자신을 꾸민다.

하지만 자기중심적으로만 상황과 사람을 해석하기에 실제로 타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깨닫지 못한다.

나르시시스트는 가상세계에 산다. 자기중심적인 사람은 본인에게 가장 유리 한대로만 상황을 판단하기 때문에 진짜 현실을 깨닫지 못한다

초반에 나르시시스트도 멀쩡한 사람을 흉내내기에 얼마든지 친절한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가공된 친절의 유통기한은 짧다.


만약 누군가가 나르시시스트에게 빈틈을 보인다면, 곧바로 그는 본색을 드러낼 수 있다.

어쩌면 그는 상대가 허점을 보이는 순간을 간절히 기다려왔을지 모른다.  

비판과 비난으로 서열을 정리해 남보다 우위에 서는 게 나르시시스트가 인간관계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목표다.

나르시시스트는 강약약강의 논리에 저항 없이 스며든다

나르시시스트는 본능적으로 타인과 동등하게 지내기를 거부한다.

마치 인도의 카스트 제도처럼 계층이 있는 '서열'로만 타인을 구분한다.

그리고 그 제도 속에서 자신이 꼭대기 층에 있다고 상상한다.

현실감이 떨어지는 인식이지만, 나르시시스트에게는 당연한 것이다.


다채롭고 입체적인 인격체를 계급사회의 구성원이라는 프레임에서만 판단하니 나르시시스트의 인간관계가 얕고 좁을 수밖에 없다.  


회사 사람들은 C를 희한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뿐 친해지려고 다가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에게 딱 집어 표현하기 힘든 '벽'이 있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 벽의 실체란 C가 타인을 서열의 높낮이로만 보는 피상적인 태도였다.

 

다음 화부터는 그들의 잘못된 인식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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