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리 이야기 Nov 05. 2015

거인의 정원

마음의 정원사

우리 아파트에는 각 동마다 화단이 있다.

내가 사는  동에도 화단이 있고, 그곳을 정성스럽게 가꾸는 할아버지가 계신다.

‘달걀가지’ 부터, 돌 취나물 까지, 이름도 생소한 꽃과 식물들을 정성들여 가꾸고 계신다.  

때론 화단을 자신만의 정원으로 가꾸고

계신다는 착각이 들 정도다.

그 때문인지, 동물이 화단근처에 가는 걸

극도로 싫어하신다.

우리 집 강아지는 그저 꽃향기를 맡을

뿐인데도 말이다.


이해는 한다. 모두가 애완견을 아껴주고,

좋아 할 순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정원에 배변을 볼까 염려 할 수도 있는 것이고, 그런 염려는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걸 가만하더라도, 강아지에게 돌멩이를 던져 쫓아내는 것은 내게 큰 상처를 준다.

화단에서 쫓겨난 강아지는 마리라는 이름을 가진 엄연한 내 가족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저 화단은 공용부지다.

개인 땅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동에 사는 모든주민의 공유 공간이다.



오늘 ‘거인의 정원’ 이라는 청소년

컬을 보았다.

오스카 와일드가 지은 동화를 원작으로 하는 작품으로 서로간의 어울림을 주제로 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자신의 정원에 찾아와 평화롭게 뛰노는 아이들의 행위를, 침입으로 간주해 아이들을 정원에서 쫓아내는 거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우리 아파트 정원 할아버지가 오버 랩 됐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되어가는 나도 발견했다.

나또한 마음에 정원을 가꾸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도 침범당하지 않는 공간 말이다.


내게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행위는 내 마음정원의 정원을 가꾸는 행위이다.

집으로 돌아온 나를 미친 듯이 반기는 강아지는, 내 내면의 정원을 가꾸는 정원사인 것이다.    


내 삶이라는 화단에서는 매일 여러 씨앗들의 아우성이 전쟁처럼 피어난다.

그런 무질서한 질서의 화단을 견뎌내고, 집으로 돌아오면 몸에는 땀과 흙으로 범벅이 돼있다.

깨끗하게 씻어 낸다 해도, 등 뒤에서 자라난

쓴 뿌리들은 미처 제거하지 못 할 때가 많다.


그래서 내겐 마음의 정원이 필요했다.

모든 종류의 아우성이 사라진 정원 말이다.    

문제는 등 뒤에서 자라난 쓴 뿌리들이다. 그것들은 내 마음의 정원 깊은 곳을 점령하고 만다.  

그 때문에 내 정원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손길을 공격으로 간주 할 때가 많다.

마음의 정원을 지키는 거인처럼 말이다.    

원작에서

아이들이 쫓겨난 거인의 정원은 봄이 오지 않았다. 아이들이 다시 찾아오기 전까지 말이다.

하지만 우리 아파트의 할아버지 정원에는 꽃이 피고, 봄이 찾아왔다.

동화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마음은 봄이 찾아오지 않았다. 현실에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그래도 소망은 있다. 정원과 마찬가지로 가꿀 수 있기 때문이다.


내 마음에는 여전히 거인이 존재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