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곳에서 주인공일 필요는 없으니까

기꺼이 조연을 자처하다

by 차림식


15% 배터리 인생, 사회적 조연을 자처하다


에너지 가계부를 쓰며 내 배터리를 잠식하는 주범을 찾아냈다. 원해서 선택한 적 없으나 살면서 저절로 주어져 버린 '주연'의 역할들이었다. 큰딸, 언니, 보호자. 15%의 배터리로 이 모든 역할에서 주인공 노릇을 하려니 과부하가 걸리는 건 당연했다. 그래서 결단을 내렸다. 삶의 핵심적인 일들을 제외한 나머지 영역에서는 기꺼이 조연으로 내려앉기로 말이다.



1. 든든한 큰딸을 조연으로 내리다

상실과 이사를 겪으며 가족의 지지대 역할을 해야 한다는 압박이 잠시 나를 눌렀다. 부모님을 챙기고 복잡한 행정 절차를 처리하는 실무는 내 몫이 맞지만, 그들의 감정까지 온전히 다 받아내며 '든든한 장녀'라는 배역까지 수행할 에너지는 없었다.


내 역할을 '실무 대행'으로 한정 지었다. 가족의 슬픔에 깊이 개입해 감정을 소모하는 대신, 내가 할 수 있는 이성적인 일들에만 집중했다. 내가 무너지지 않는 것이 결국 우리 가족 모두에게 가장 이득이라는 판단이었다. 기대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강박을 지우고 나면, 비로소 내가 처리해야 할 진짜 일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2. '엄마 서비스'의 사양 조절

현재 내 에너지 배터리 사양으로는 아이의 모든 요구에 즉각적으로 반응하거나 남들의 기준에 맞춘 육아를 해낼 재간이 없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다. 내 상황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나면 아이에 대한 미안함도 조금은 사라진다.


엄마로서 아이에게 제공하는 서비스는 '필수 항목' 위주로 재편했다. 직접 만든 간식, 엄마표 놀이는 더 이상은 제공할 수 없는 서비스가 되었다. 공룡 이름을 외우고 아이와 눈을 맞추는 핵심적인 시간은 사수하되, 그 외에 에너지를 과하게 잡아먹는 부수적인 노력은 덜어냈다. 대신 오전 9시부터 2시까지는 철저히 '나'로 존재하는 시간에 집중하려 한다. 이도저도 못하고 미안해하며 에너지를 갉아먹기보다, 내 삶을 제대로 차려내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이에게도 훨씬 안정적인 환경이라 믿기로 했다.


3. 조연으로 내려간 자리에 들어선 것들

역할들을 덜어내고 나니 비로소 내 몫의 에너지가 확보됐다. 이 소중한 잔여 전력을 두 가지 핵심 프로젝트에 전량 투입한다. 하나는 3월까지 수익 창출을 목표로 하는 AI를 활용한 채널의 운영이고, 다른 하나는 이 아수라장 속에서도 나를 지탱해 준 시스템, ‘차림식'을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일이다.


사회적 관계 속에서 조연을 자처하는 건 이기적인 게 아니라, 목표한 성과를 내기 위한 나의 전략이다. 나를 지키고 내 미래를 차려내는 일보다 더 중요한 업무는 없기 때문이다.

확보한 에너지를 내 시간으로 전환하기 위해 가장 먼저 정돈한 공간은 식탁이었다. 다음 화에서는 정갈하게 차려진 식탁이 의사결정과 성과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이야기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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