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펀치 드렁크 러브>와 "He Needs Me"
나는 장르를 가리지 않는 영호 취향을 가진 편이지만, 그 중에서도 로맨스는 왠지 조금 꺼리는 경향이 있다. 정확한 이유는 파악하지 못했지만 어쩌면 남녀 간의 절절한 사랑이 나에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나에게도 로맨스의 명작으로 꼽을만한 영화가 몇 편 있는데 바로 스파이크 존즈의 그녀와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비포 시리즈이다. 애틋한 사랑 이야기만으로는 부족하고 거기에 현실감을 한 스푼, 그리고 씁쓸함과 사캐즘을 두 스푼 추가한 것이 그나마 취향이라고 할까.
그렇게 쓸쓸한 로맨스를 사랑하던 나에게 <펀치 드렁크 러브>가 찾아왔다. 어쩌면 내가 사랑한 첫 번째 달달한 로맨스 영화라고 볼 수도 있겠다. 물론 마냥 달달하기만 한 건 아니다.
배리 이건은 불안정한 내면을 가진 사람이다. 언뜻 멀쩡한 사업장을 운영하고 있는 사업가로 보이지만, 일곱 명의 누나와 여동생에게 치여가며 살아서인지, 아니면 선천적인 문제인지 언행이 여간 부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거기다 소심하기까지 해서 여자 형제들의 등쌀에 이리저리 치이면서도 단호하게 거부하지 못하다가 갑자기 폭발하면 창문을 깬다던지, 주위의 기물을 파손하는 등의 폭력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치과의사인 매형에게 가끔 이유 없이 울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며 울음을 터트릴 때는 우울증인가 싶기도 하다. 이러한 배리의 불안한 정신 상태는 시종일관 영화를 괴팍스럽고 혼란스럽게 만든다.
하지만 배리에게 아주 특별한 사랑이 찾아오면서 영화의 분위기는 점차 사랑스럽게 변화한다. 그에게 사랑은 한 번도 시도해보지 못하고 꿈꿔보지 못한 일들을 결행하게 만드는 마법과도 같은 일이다. 여행을 다녀 본 적이 없지만 그녀를 만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그녀를 지키기 위해 악당을 물리치는 슈퍼 히어로가 되기도 한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다. 대단치도 않은 양아치들에게 벌벌 떨던 그가 그들의 보스를 찾아가서 당당하게 사랑 때문에 나는 네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강해졌다고 외치는 부분은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그렇지만, 정말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아서 펀치 드렁크 증후군에 걸리기라도 한 듯 이 모든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말이 되게 느껴지는 것이 이 영화가 가진 매력이다.
I have a love in my life. It makes me stronger than anything you can imagine.
그저 그렇고 뻔하기 짝이 없는 평범한 사랑 이야기를 가지고 보는 사람을 이토록 얼떨떨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은, 눈 앞에서 수천 개의 불빛이 점멸하는 것 같은 감각적인 연출로 정신이 불안정한 남자와 그가 사랑에 빠지는 찰나를 스크린에 그대로 옮겨낸 PTA의 천재적인 연출과 인물들의 내면을 그대로 들여다보는 듯한 사운드트랙 덕분일 것이다.
나는 그중에서도 특히 영화의 사운드트랙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배리의 불안정한 행동과 감정이 표출되는 장면과 함께 Hands and Feet과 같은 곡이 등장하면 나 또한 그와 같은 스트레스와 신경증을 겪었고, 그녀가 등장하고 Punch-Drunk Melody와 He Needs Me가 흘러나올 때면 나 역시 그와 그녀를 향한 참을 수 없는 사랑스러움을 느낄 정도로 말이다.
앨범을 통째로 들어보는 것을 가장 추천하고 싶지만 우선 위에 언급했던 두 개의 트랙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별다른 감정의 교류 없이 차갑고 텅 빈 사무실을 지키던 때의 배리와 그녀를 만나고 사랑에 빠진 후의 그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선명하게 드러나는 트랙을 골라 보았다.
Hands and Feet
음악이라기엔 소음에 가까울 정도인 이 트랙은 배리 이건의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 내면세계로 우리를 안내한다. 그의 심약하고 어지러운 정신 상태를 100%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지만 이 음악을 듣고 있자면 그에게 동화해서 신경증이 마구 뻗어 나는 것 같은 짜릿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He Needs Me
비행 마일리지 경품을 받기 위해 집착적으로 먹지도 않는 푸딩을 사 모으지만 정작 여행에는 큰 관심도, 실제로 어디론가 떠나본 적도 없는 배리가 그녀를 만나기 위해 비행기를 타고 하와이로 날아가던 순간에 삽입된 트랙이다. 그에게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에 등장해서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순간까지 함께한 이 곡만큼 사랑에 빠진 순간을 확실하게 담아낸 곡이 또 있을까.
He Needs Me는 원래 영화 뽀빠이의 삽입곡을 편곡한 것으로, 극 중 뽀빠이의 여자 친구인 올리브 역을 맡은 셜리 두발이 불렀다. 영화 초반까지만 해도 심리적으로 연약한 모습을 보여주며 시시한 불량배들에게 벌벌 떨던 배리가 사랑의 힘으로 마치 슈퍼 히어로라도 된 듯이 당당하게 악당을 물리치는 영화의 내용을 생각해 보면 시금치를 먹고 힘이 세지는 뽀빠이와 뭔가 맞아떨어지는 듯 해서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