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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주성 May 21. 2020

지금도 잘 지냅니다.

<행복한 라짜로>와 네오리얼리즘에 대한 긴 글

 2017년작 <행복한 라짜로>는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 영화들을 닮았다. 이탈리아 시골의 작은 농장 인비올라타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는, 주인공 라짜로와 농장 사람들의 일상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네오리얼리즘 기조를 대표하는 영화인 <자전거 도둑>이 부자의 주말을 세세하게 묘사하듯, <행복한 라짜로> 역시 농장의 하루를 전부 담고 있다. 영화는 농부들이 담뱃잎을 수확하기부터 담뱃잎을 가공하고 태우기까지의 과정을 그대로 따라간다. 또한 마을 청년의 사랑고백과 일상의 대화까지도 스크린에 담으며, 그들의 일상을 이루는 요소들을 모두 담으려 시도한다.


 나아가 <행복한 라짜로>는 순박한 주인공 라짜로를 내세워 자본주의의 착취구조를 비판하고 있다. 영화는 농장주인 데 루나 가문과 농장 사람들의 대립을 축으로 하여, 자본주의 사회에 만연한 착취구조에 대한 고찰을 담고 있다. 이는 <행복한 라짜로>가 네오리얼리즘의 표현기법뿐만 아니라 주제의식까지도 재현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네오리얼리즘과 2017년의 영화 사이에는 어떤 연결고리가 작동하고 있는 것일까. 이를 위해서 <행복한 라짜로>가 네오리얼리즘을 통해 말하려 하는 바는 무엇이며, 네오리얼리즘의 기법을 빌린 연출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아보려 한다.


네오리얼리즘의 재현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는 로케이션 촬영과 비전문 배우를 고용함으로써 현실을 재현한다. 네오리얼리즘 기조를 대표하는 로베르토 로셀리니 감독은 ‘사람들이 창가에서 노래를 하거나 소리를 지르며, 촬영 중인 우리 주위에서 물건을 팔거나 훔쳐가려고 하는 끓고 있는 냄비 같은 곳에서’ 영화를 촬영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내가 무엇을 말하고 싶은지 알고 있고 그것을 말하기 위해 가장 직접적인 수단을 찾아낸다.’는 말로 비전문 배우의 고용 이유를 설명한다.


 <행복한 라짜로>는 로케이션 촬영과 비전문 배우의 고용이라는 점에서 네오리얼리즘의 기조를 따른다. 탄크레디 역을 맡아 연기한 루카 키코바니는 연기 경험이 없는 가수이자 모델이었는데, 알리체 로르바케르 감독은 MTV에서 그의 뮤직비디오를 보고 그를 캐스팅했다. 감독이 비전문 배우를 고용한 까닭은 그의 인터뷰를 통해 드러난다. ‘감독님은 우리에게 어떤 식의 연기를 하라고 설명하지 않았다’는 그의 회상에서, 네오리얼리즘의 기조를 따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고자 했던 감독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또한 ‘우리가 촬영한 마을은 호텔이 하나, 식당이 두 개밖에 없는 작은 마을이었다.’라는 말에서, 감독이 현실을 재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로케이션을 선정했음을 알 수 있다.


 <행복한 라짜로>는 내용 면에서도 이야기가 심리에 의해 전개된다는 점에서 리얼리즘 영화들과 결을 같이한다. 특히 심리에 의한 전개가 두드러지는 부분은 라짜로와 농장 사람들이 탄크레디를 다시 만나는 순간이다. 라짜로와 농장 사람들을 우연히 다시 만난 탄크레디는 농장에서의 시간을 떠올린 뒤, 점심을 함께 하자며 사람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다. 그리고 탄크레디는 다음날 그의 집을 찾아온 사람들을 아무런 이유 없이 내쫓는다. 그렇게 쫓겨난 농장 사람들은 고장난 차를 끌고 가다가 성당에서 들리는 음악소리를 우연히 듣게 되고 성당으로 향하지만, 성당은 허락된 이들이 아니면 들어올 수 없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내쫓는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성당에서 들리던 음악소리가 라짜로와 농장 사람들을 뒤따라오고, 성당에서는 오르간을 연주해도 소리가 나지 않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그러나 이를 라짜로가 능력을 발휘한 것으로, 혹은 라짜로가 성당과 어떤 연관을 맺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라짜로가 음악소리를 듣고 우두커니 멈춰 서는데, 이 장면에서 영화는 이야기를 인과관계에 따라 진행시키지 않을 것임을 명백히 한다. 우두커니 멈춰선 라짜로를 바라보며 “원래 그랬잖아”라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의 반응은 라짜로의 행위가 우연일 뿐,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려준다.


 특별한 의미가 부여되지 않은 라짜로의 행동은 비극적인 결말로 이어진다. 라짜로는 탄크레디의 돈을 뺏어갔다는 은행을 찾아가 돈을 돌려달라고 이야기하는데, 라짜로를 은행 강도로 오인한 사람들이 공격해 라짜로는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라짜로의 행위에 의미가 부여되었고 은행을 찾아가 돈을 돌려달라고 말하는 행위가 인과관계에 의한 것이었다면, 라짜로의 행위는 행동에 의한 대안으로써 이해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행동에 의한 대안 혹은 구원의 가능성은 사전에 차단된다. 탄크레디가 도둑맞았다는 돈은 근본적으로 농장 사람들을 착취하여 모은 돈이다. 또한 탄크레디가 돈을 돌려받는다 하더라도, 농장 사람들을 대하는 탄크레디의 태도를 미루어볼 때 농장 사람들이 구원을 받을 가능성은 극히 낮다.


 심리에 의한 이야기의 진행과, 출구가 없는 농장 사람들의 삶을 보여줌으로써 <행복한 라짜로>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재현하고 있다. 궁핍한 현실을 이겨내지 못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하게 되는 <자전거 도둑>과 비교했을 때, <행복한 라짜로>는 이야기가 진행되는 양상이 더욱 복합적이고 비극적이다. 주인공 라짜로는 자본주의 논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라짜로 주변의 모든 인물들은 라짜로가 돈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그를 이용한다. 라짜로를 대하는 태도를 기준으로 했을 때, 표면적인 선악구도를 이루는 농장주와 농장 사람들의 구분은 무의미해진다. ‘농부들은 라짜로를 착취하고, 라짜로도 누군가를 착취할 것’이라는 농장주의 말은, 자본주의 사회에 만연한 착취 구조에서 벗어나는 것이 그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시공간의 대물림이라는 비극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는 표현 기법에 있어 사실주의 영화 스타일에 그 토대를 둔다. 사실주의 영화의 대표적인 특징은 시공간의 연속성이다. 사실주의 영화들은 시공간의 연속성을 드러내기 위해 딥 포커스와 롱테이크 촬영을 이용했다. 이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기 위한 시도였다. 사실주의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인 장 르누아르는 딥 포커스라는 새로운 형식적 시도를 통해, 현실을 강화하는 동시에 화면 내의 요소들이 상호 밀접한 연관을 지니면서 의미를 극대화하도록 했다.


 시공간의 연속성은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묘사하려는 영화의 표현인 동시에, 그 자체로 의미를 창출하는 설정이다. <행복한 라짜로> 역시 시공간의 연결을 통해 의미를 창출하는데, 그 양상은 르누아르의 그것과 조금 다르다. 영화는 비현실적인 시공간으로 묘사되는 인비올라타 농장을 벗어난 사람들이 우연에 의해 지배되는 현실 공간으로 이동하는 이야기를 통해 두 공간을 대비한다. 또한 인비올라타 농장에서의 이야기와, 농장을 벗어난 사람들의 이야기 사이에 수십 년의 간격을 두어 관객이 분명히 두 이야기가 별개의 이야기임을 인지하게 한다. 그 후 영화는 전혀 변하지 않은 모습의 라짜로를 등장시켜 분리된 시공간을 다시 연결한다.


 특히 라짜로를 매개로 농장 사람들과 탄크레디가 만나게 되면서 분리된 두 개의 시공간은 완전히 합쳐진다. 안토니아는 농장주 일가에 대한 증오를 품고 있지만 여전히 탄크레디를 도련님으로 부른다. 인비올라타 농장에서 가지고 나온 물건은 탄크레디의 신분을 확인하는 징표로 사용된다. 그렇게 농장에서의 생활을 회상하던 인물들은 잠시 어렸을 때의 모습으로 돌아갔다가 현재로 돌아온다. 시간을 오가는 초현실적인 회상씬은 농장을 떠올리는 인물들의 내면을 묘사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농장 사람들의 처지가 전혀 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에 가깝다. 탄크레디는 농장 사람들을 점심식사에 초대하면서 ‘격 있는 집안의 초대이니 좋은 옷을 입고 오세요’라는 말을 덧붙이는데, 이는 탄크레디가 재산을 몰수당한 뒤에도 여전히 당시의 권력구조를 재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는 분리된 시공간에 연속성을 부여하는 작업을 통해 농부들의 처지가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두 이야기 모두 현실의 영역에서 일어난 것임을 강조한다. 영화는 인비올라타의 이야기를 다룬 신문기사를 통해 인비올라타 농장의 사건을 경험한 주체가 그들이라는 사실과, 인비올라타 농장에서의 착취가 현실의 영역에 위치한 이야기임을 밝힌다. 영화의 비극은 시공간이 달라졌음에도 그들의 처지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고, 인비올라타 농장의 사람들이 농장을 탈출한 것이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기사의 제목이 ‘대사기극’이라는 점에서도 알 수 있지만, 사람들이 인비올라타를 탈출한 사건은 역사적 사실로만 존재할 뿐이다. 농장의 사람들에게 인비올라타의 시공간이 대물림된다는 것은 비극의 연장을 의미한다.


왜 지금네오리얼리즘인가

 비토리오 데 시카 감독은 <자전거 도둑>을 통해 살아남기 위해서 개인이 자전거를 훔쳐야만 했던 당대 이탈리아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자전거 도둑>을 비롯한 1940년대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들의 목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이탈리아가 마주한 황폐한 현실을 묘사하는 것이었다. 데 시카 감독은 특히 전쟁 이후 개인들이 마주한 삶을 묘사하는 데 탁월했다. 영화적 관심의 시발점이 된 제2차 세계대전은 사람들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대사건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변한 사회의 모습, 특히 개인의 모습을 영화의 소재로 쓴다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변해버린 개인의 삶이 보편적인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특히 비전문 배우를 곧바로 영화 촬영에 투입하는 것은 그들의 삶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의 삶을 대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바탕에 깔린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행복한 라짜로>는 영화 종반부 인비올라타 농장으로 다시 돌아가길 소망하는 농부들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착취 구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소작농이 되길 원하는 비극적인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행복한 라짜로>가 어째서 지금 네오리얼리즘 영화의 기법을 빌려 농부들의 변화를 묘사하고 있는지 설명하는 사건을 현실에서 찾을 수는 없다. 영화 역시 농장 사람들이 어떤 연유로 농장주 일가에게 착취를 당하기 시작했는지 상세히 알려주지 않는다. 영화는 77년도에 일어난 대홍수로 인해 외부와의 연락이 끊어졌다는 사실만을 언급하고 지나간다. 즉, 영화 안팎을 연결하는 알레고리로서의 사건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행복한 라짜로>의 문제의식은 특정 사건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흐름으로써 계속되고 있는 착취의 구조를 향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특히 네오리얼리즘의 기조를 그대로 따르는 영화의 연출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변하지 않은 노동자들의 삶에 대한 문제의식의 발현으로 이해된다. 영화는 탄크레디의 실종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농장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를 조명한다. 경찰은 돈이 많은 사람들만 학교를 다니는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에, 자신들은 데 루나 후작 부인의 소작농이라는 말에 당혹스러워한다. 경찰은 그들에게 시대가 변했음을 알려주고 그들에게 변한 사회의 모습을 설명하지만 농부들은 알아듣지 못한다. 중세시대에나 가능한 착취의 구조가 지금도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네오리얼리즘의 기법으로 현재의 삶을 묘사할 수 있다는 사실과 궤를 같이한다.


끊을 수 있을까

 <자전거 도둑>의 주인공과, <행복한 라짜로>의 라짜로는 모두 결말부에 눈물을 흘린다. <자전거 도둑>의 아버지는 자전거를 훔치려다 붙잡혀 망신을 당한 뒤, 아들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 <행복한 라짜로>의 라짜로는 점심식사에 초대한 탄크레디에게 문전박대를 당한 뒤, 집으로 돌아가던 중 홀로 떨어져 눈물을 흘린다. 특히 라짜로의 눈물은 ‘인비올라타를 벗어나면 자신들이 노예임을 깨닫게 될 것’이라는 농장주의 예언이 ‘인비올라타로 돌아가고 싶다’는 농장 사람의 말로 실현되었다는 상징으로써, 이는 농부들의 눈물과 다르지 않다. 두 사람의 눈물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음에도 당장의 가난을 해결할 수 없다는 좌절의 눈물이다.


 시간이 지났음에도 현실은 여전히 이를 마주한 인물들을 좌절시킨다. 이때 두 사람이 좌절하는 까닭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행복한 라짜로>는 네오리얼리즘의 방식을 빌려 전혀 변하지 않은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현실이 변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위해 영화가 택한 방식은 분명 효과적이다. 두 영화의 인물들이 같은 이유로 좌절하고 있다는 사실이, 영화를 표현하는 기법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로써 드러나기 때문이다.


 동시에 인물들의 좌절은 더욱 깊은 쓴맛을 남긴다. <자전거 도둑>에서 부부는 자전거만 있으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계획을 세운다. <행복한 라짜로>에서 농장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면 농장에서 탈출해 원하는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는다. 이는 농장을 탈출한 이후에 인비올라타로 돌아가고 싶다는 소망과 연결된다. 실상 인물들의 삶에 출구가 없다는 사실보다 쓴맛을 남기는 것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가난을 탈출하기 위한 인물들의 계획이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당장 인물들의 삶에 출구가 없다는 사실은 현실을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만, 그들의 계획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미래까지 보여주는 것은 아닌지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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