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부의 균열
우리는 흔히 '위험'이라고 하면 눈에 보이는 것들을 먼저 떠올린다. 경제 불황, 금리 인상, 기후 재해, 전쟁처럼 수치와 장면으로 포착되는 것들 말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훨씬 뿌리 깊고 근본적인 위험이 있다. 바로 거버넌스 리스크(Governance Risk)이다. 거버넌스 리스크란, 조직의 결정 과정의 원칙이 흔들릴 때 발생하는 구조적 위험으로, 정책이 일관성을 잃고, 권한과 책임의 경계가 흐려지며, 서로 다른 이해관계자들의 의견이 조정되지 못한 채 갈등의 폭만 넓히는 상황을 말한다. 제도가 그대로 유지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기둥이 조금씩 틀어지고, 보이지 않는 금이 벽 안쪽에서부터 퍼져 나간다. 문제는 이런 위험이 느리게, 조용히 진행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심각성을 뒤늦게 깨닫는다.
최근 캐나다의 BC주–Alberta주–연방정부가 부딪힌 송유관 확장 논쟁은 거버넌스 리스크의 전형적인 사례를 보여준다. 같은 사안에 대해 정부가 입장을 바꾸고, 지역 간 합의는 느슨하며, 환경·경제·원주민 권리라는 세 축이 서로 다른 언어를 말하는 상황의 복합적 충돌은 단순한 정책 분쟁을 넘어 거버넌스 구조의 취약성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물론 정책은 상황에 따라 방향이 바뀔 수 있지만, 납득할 만한 설명 없이 바뀌는 정책은 신뢰를 갉아먹는다. 환경 보호와 경제 성장의 균형, 지역사회와 국가 이익의 균형을 어떻게 맞출 것인지에 대한 프로세스의 일관성이 사라지는 순간, 사회에는 불확실성이라는 그림자가 드리우게 된다. 거버넌스 리스크는 바로 이 불확실성의 확대에서 시작된다.
제도와 권력이 흔들릴 때 사회가 불안해지는 것처럼, 사업체나 기업도 같은 원리 위에서 움직인다. 조직의 의사결정이 매번 달라지고, 기준이 상황 따라 바뀌고, 책임이 불분명해지는 순간 회사는 방향성을 잃는다. 그때 직원들은 성과보다 눈치를 보게 되고, 장기 전략보다 당장의 분위기를 살피게 되며, 결국 조직 전체가 예측 불가능성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국가의 제도가 흔들릴 때 시민이 가장 큰 피해를 보듯, 회사 내에서 기준이 흐려지면 가장 먼저 흔들리는 사람도 결국 그 안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구성원들이다. 그래서 기업에서의 거버넌스 리스크는 곧 신뢰의 상실로 이어지며, 신뢰가 무너지는 순간 경쟁력도 함께 무너진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작은 균열은 동일한 방식으로 시작된다. 가족이나 친구 사이에서도 설명 없는 태도 변화, 지켜지지 않는 약속, 책임을 뒤로 미루는 말들이 반복되면 관계에 보이지 않는 균열이 생긴다. “이번 한 번만 넘어가자”, “말 안 해도 알잖아”, “이 문제는 그냥 덮어두자” 같은 말들은 겉보기에는 큰일이 아닌 듯 보이지만, 사실은 관계의 바닥을 조금씩 약하게 만드는 균열의 시작이 된다. 일상의 작은 불신이 쌓이면 사소한 오해도 관계 전체를 흔들어 놓는다.
결국 중요한 것은 완벽한 시스템이나 복잡한 장치가 아니라 원칙을 대하는 태도다. 정부나 기업은 의사결정을 투명하게 공유하고, 기준을 일관되게 적용할 때 비로소 생산성과 신뢰를 얻는다. 가정에서는 부모가 자신들이 한 말과 일치하게 행동할 때 아이가 지속 가능한 안전함을 느끼고, 인간관계에서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설명하려는 노력이 서로를 지탱하게 된다. 원칙은 나를 구속하려는 틀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지탱해 주는 구조물이기 때문이다.
거버넌스 리스크가 남기는 메시지는 결국 명료하다. 스스로 세운 작은 원칙을 지키는 사람은 삶의 방향이 흔들리지 않고,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을 수 있다. 공동체든 회사든 인간관계든, 우리가 지켜야 하는 것은 거창한 개혁이 아니라 오늘을 위한 원칙에 근거한 작은 선택들이다. 불편해도 설명하는 정직함, 상황이 달라져도 지켜내는 일관성, 책임을 미루지 않는 태도, 이해관계를 조율하려는 노력 같은 사소한 행동들이 쌓여 시스템을 단단하게 만들고, 조직을 안전하게 하며, 인간관계를 깊게 만든다. 보이지 않는 균열을 막는 힘은 언제나 거대한 변화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작은 원칙을 지키려는 사람들에게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