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살 가난한 사랑의 민낯
W와 나는 소위 좋은 대학에서 만났지만 사실 가난한 집안 출신들이었다. 둘 다 학창 시절 내내 그 흔한 과외 한 번 받아본 적이 없었고, 나는 고등학교 시절 등록금, 급식비가 없어 항상 쩔쩔맸고 W는 재수를 했지만 돈이 없어 재수 학원을 다니질 못했다고 한다. 사실 그렇게까지 가난하다는 것을 몰랐을 동네 출신들이라 대학에서의 충격이 더 심했다. 내가 중산층이라고 생각했던 내 고등학생 시절 친구들은 사실은 서민이었고, '진짜' 중산층과 그 이상 계층의 아이들이 대학교엔 가득했다.
W와 내가 사귀게 된 것은 어쩌면 이런 열등감을 나눌 수 있다는 데에서 오는 묘한 동질감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들끼리는 구질구질한 현실을 공유할 수 있었으니까. 처음엔 그 이유로 우리가 잘 통한다고 생각했지만 3년 이상의 연애 기간이 지나며 그것은 동시에 W와 나의 연애를 너무도 쓴 맛으로 만들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된다는 걸 깨달았다.
내 어린 시절 아버지는 직원 한 명을 둔 작은 가게의 사장이었고 어머니는 전업주부였으며, 가족은 80~90년대 모두가 버블 경제의 덕을 보던 시기에 꽤 윤택한 생활을 했다. IMF 경제위기 사태 이전에는 사립 초등학교에 다닐 수 있을 정도로 형편이 괜찮았고 여름마다 여기저기 미식 여행도 다녔다.
W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평생 일을 하셨고 자신도 어릴 때부터 고생을 많이 했다고 했다. 그는 어릴 때 겨울에 부모님이 하던 횟집 일을 돕다가 수조에 몸이 젖고 손이 동상에 걸릴 듯 추웠던 기억이 아직도 난다고 했다.
나는 집안이 갑자기 가난해진 경우였고 W는 가난한 가정에서 자란 경우였다. 그래서 그랬을까? 나는 그래도 가끔 돈을 쓰며 기분을 내고 싶었고, W는 항상 돈을 아끼고 싶어 했다.
처음에는 돈이 없어 청계천을 끝없이 걷고 천 원짜리 김밥이나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데이트를 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하지만 그가 좋아하던 2,500원짜리 짬뽕을 먹는 것도 점차 지겨워졌다. 나는 20살이었고 다른 커플들이 하는 것도 당연히 하고 싶었다.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아웃백이 있었는데 거기까지는 조금 미안하니 이렇게 말했다.
"나도 오므토 토마토에서 밥 먹고 싶어. 다른 애들처럼 우리도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그런 곳에서 밥 먹자."
"그깟 오므라이스 돈 만원씩 주고 먹기 싫어."
내가 20대였을 때는 오므토 토마토는 평범한 음식점보다는 좋게 쳐주는 곳이지만 그렇다고 고급 음식점도 아니었다. 그 당시 W와 나는 더치페이를 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난 이런 말을 해도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W는 그 말에 크게 자존심이 상한다고 했고 우리는 심하게 싸웠다. 어떻게든 화해를 하고 난 후 그는 내 말에 너무 자존심이 상해서 나랑 헤어져야겠다고까지 생각했다고 했다.
가끔 좋은 곳에서 밥을 먹고 데이트하고 싶다는 것이 심지어 더치페이를 하는 입장에서 그렇게까지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다가온 것인지 아직도 잘 이해되진 않는다. 그는 좋은 음식이 먹는 것이 어떨 때는 문화적 행위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잘 몰랐다.
그와 나는 동기들이 해외여행을 떠나는 방학 때도 아르바이트를 해야 했고, 데이트랍시고 만나도 힘들다는 푸념을 늘어놓길 반복했다. 둘 다 전공과 관련이 있음에도 그는 외국으로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고, 나는 언젠가는 떠나리라 항상 다짐을 했다. (그리고 나는 정말 돈을 모아 교환학생을 갔고 지금도 외국에 살고 있다)
그는 카페에서 먹는 커피 값이 비싸다며 카페에 가길 싫어했다. 그나마 가격이 합리적인 배스킨라빈스에만 들락거린 것을 생각해보면 몇 년의 연애를 통틀어 카페를 간 것은 10번 이하일 것이다. 그 당시엔 칵테일 바가 유행을 했는데 그는 한사코 가길 거절했다. 나는 학교 친구들과 카페에 가서 아메리카노나 카페라테를 마시고 칵테일 바에서 베일리스 밀크, 데킬라 선라이즈를 마셨다. W는 그걸 나중에 알고선 싫어하고 나는 다시 하길 반복했다.
그는 아르바이트를 한 거의 모든 금액을 부모님의 생활비로 드렸고, 그래서 돈이 없었던 것을 난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남들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데이트 코스조차 사치로 여기는 그에게 나는 돈을 쓰길 좋아하는 사람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또는 조금은 자괴감을 느꼈을 테지.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그는 연애를 할 만한 상황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고 항상 내가 더 좋아해서 사귄다는 마음이 있었으니 그나마 힘든 아르바이트로 번 그 돈을 나에게 쓰는 것이 아까웠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모아서 커플티도 사고 선물도 사고 했던 것을 보면 비교해 보면 말이다.
가난이 문제인 이유는 가난 자체 때문이 아니다. 내 경우엔 문제는 그로 인해 생기는 심적 불안이었다. 자기가 몸이라도 다쳐 일을 못하게 되면 부모님이 도와줄 사정이 못 되는 사람은 벼랑 끝에 서 있는 듯 마음이 항상 위태로우니 심적 여유가 없고 대개 화도 자주 난다. 또 모든 행동이 돈 위주로 돌아가게 되며, 돈을 쓸 줄도 모른다. 그래서 W와 나의 가난한 사랑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듯 낭만적이지 못했다.
내가 조금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다면 나와 W는 가난과 가난이 더해진 쓴맛을 덜 느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