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동 협곡(Gorges du Verdon) 하류
프랑스는 7월 14일이 혁명 기념일(국경일)이기 때문에 이 기간 많은 사람들이 바캉스를 떠난다. 우리도 4박 5일 일정으로 프랑스 남동부인 베르동 협곡 근처로 짧은 바캉스를 떠나기로 했다.
작년 7월에는 내가 프랑스에 도착하고 얼마 되지 않기도 했고, 남자 친구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경제적으로 그리 넉넉한 상태가 아니라서 아무 곳도 못 갔지만 이번엔 4, 5월부터 미리 여행지 예약을 했다.
얼마 전 새로 뽑은 (중고)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달려 4시간 반 만에 리에스(Riez)에 도착했다. 마찬가지로 시골이긴 하지만 우리 한국인들은 라벤더 밭의 대명사로 이 근처의 발랑솔(Valensole)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라벤더는 프랑스 남부 많은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편이라 딱히 발랑솔 특산품은 아니다.)
잡은 숙소가 베르동 협곡 바로 옆이 아니라는 것은 가서야 깨달았지만, 호텔은 과거 어느 지역 유지의 여름 별장이라도 되었던 것처럼 오랜 역사를 간직한 듯 보였다. 지젤(Gisèle)이라는 이름의 중년 여인이 주로 혼자 관리하는 곳이었고, 우리가 도착하자 체크인 목록을 숙지하고 있는 듯이 종이도 없는데 남자 친구의 이름을 바로 확인했다.
이번 숙소가 내가 우리가 여행할 때 선택한 숙소 중에 유일하게 실수를 면한 곳이었다. 혼자 다니면 실수가 없는 편인데 꼭 둘이 갈 곳을 예약할 때는 이상한 곳이 걸리곤 했다. 이번에는 최근 적힌 숙소 리뷰를 죄다 읽어보고, 가격대가 평균보다 조금 높은 곳을 선택하는 전략을 취했는데 그 덕이었는지 우리가 머문 주말은 처음 이틀은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조용했다. 물론 사람이 몇 명 더 들어와도 장소 자체가 매우 조용하긴 했다.
첫날은 도착하고 늦기도 하고 피곤하기도 해서 장을 보고 오고 쉬었고, 다음 날부터 본격적으로 여행을 하기로 했다.
도착하기 전에 미리미리 말을 해줬으면 좀 더 진지하게 찾아봤을 것을 남자 친구가 내일 전동 보트로 협곡을 좀 보고 싶다고 하는 게 아닌가? 그래서 부랴부랴 6시 넘어 연락이 되는 곳을 찾아 다음 날 오전 10시로 예약을 잡았다.
여기서 내가 하나 몰랐던 점은 베르동 협곡은 중간에 댐(barrage)이 있어서 하류(Basses gorges du Verdon)와 상류(Hautes gorges du Verdon)로 나뉘고 더 아름다운 쪽은 상류 쪽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예약한 쪽은 하류라서 그랬는지 7월 14일 당일이었는데도 사람이 많지 않았다. 결론적으로는 상류도 보러 갔기 때문에 나는 양쪽 다 경험할 수 있었다.
문제는 우리가 빌린 보트는 좀 저렴한 전동 보트라 핸들 조작이 굉장히 까다롭다는 점이었다. 내가 운전대를 잡아보기도 했지만 도저히 저 좁은 곳을 벗어나기엔 미약한 실력이라 남자 친구가 보트 운전은 전담했다. 카약을 타는 사람도 많았는데 그 사람들을 구경하다 내가 '노 젓는 실력이 꽝일 것'이라고 하자 카약도 고민했지만 전동 보트를 선택했다는 남자 친구... 그래서 상류에서는 페달을 밟는 식의 수동 보트를 타기로 했다.
남자 친구는 베르동에서 여러 번의 여름을 보냈고, 동양인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은 휴양지이기 때문에 나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베르동 협곡 같은 경우 프랑스의 그랜드캐니언이라고도 한다고 한다. 베르동 강 옆 양쪽의 석회암 절벽은 빙하가 녹은 물이 알프스에서 흘러내려 석회암 고원을 깎으면서 만들어진 거대한 협곡이라고 하고, 약 1억 4천만 년 전에 만들어졌다고 한다. 따라서 베르동은 석회암 성분이 녹아 장소에 따라 물이 아름다운 코발트색, 에메랄드 색을 띠고 있어 유명하다고도 한다.
열심히 3시간 동안 햇볕을 받고 나니 너무 피곤해서 숙소에서 3시간을 뻗었다가 저녁에서야 밥을 먹으러 나왔다. 베르동 강에 있는 호수 중 가장 아름답기로 유명한 생트-크화 호수(Lac de Sainte-Croix)를 마주한 마을이었다.
국내여행, 해외여행 꽤 많이 다니기도 했고, 성격 자체가 자연경관에 대해 크게 감흥이 없는 편인데 여기는 정말로 아름다워서 언젠가 아파트를 빌려서 한 달 정도 머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저녁을 먹기 위해 레스토랑을 검색하다 우연의 산물로 오게 된 마을이었는데, 바다 경치가 잘 보이는 바가 특히 마음에 들었다. 경치도 예쁘고, 고양이도 엄청 많이 돌아다니다니 정말 완벽했다. 가끔은 우연에 몸을 맡기는 것이 여행의 미덕이라고 생각하고, 아무리 완벽한 계획을 세웠다 생각해도 예상치 못한 요소로 인해 절대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때문에 본래 계획적 성향이지만 여행은 꽤 무계획적으로 다니는 편이다.
한국의 군부 정권이 아직 끝나기도 전인 그 옛날(?) 80년대 서울에서 태어난 내가 이런 남부 프랑스의 관광지에서 옆자리 프랑스인 부부와 덕담을 나누며 맥주와 아이스크림을 먹을 수 있다니, 인생이 참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여행은 요행에 맡길지언정, 나는 인생에서 요행을 믿지 않기에 어느 것도 우연에 맡긴 적이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