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프랑스 남부지방의 절경을 찾아서

베르동 협곡 상류, 무스티에 생트 마리

by 샬롯H



나는 프리랜서이기에 휴가에 노는 만큼 돈을 잃는 것과 다름없기에 휴가라고 4박 5일 내내 놀 수가 없어서 모든 업무는 15일로 몰아 잡았다. 그래서 오전에는 일하고 오후에는 근처 '어디론가' 가서 놀기로 했다.


몇 가지의 후보지 중 우리는 숙소 기준 2시간 정도 달리면 갈 수 있는 엑상프로방스(프랑스에선 그냥 엑스 Aix라고 많이 한다)에 가보기로 했다. 사실 중간에 발랑솔에 들렀으나 그쪽 라벤더가 유난히 많이 피지 않아서, 정작 사진은 다른 곳에서 찍었다.





15일엔 엑스에 들러 시내를 구경하다 37도 더위가 살인적이라 카페에 앉아 아이스 아이스티를 마시고, 엄청나게 비싸고 불친절한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고 돌아왔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멀리 갈 것이 아니라 근처 작은 도시를 하나 더 보고 오는 것이 좋았을 텐데 좀 후회가 되었다.


나는 엑상프로방스 출신의 프랑스 작가를 전공했고 엑상프로방스 출신의 화가 세잔(Cézanne)도 좋아해서 엑스에 대해선 관심이 있는데 꼭 갈 때마다 별로 좋지 못한 경험으로 돌아오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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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x-en-Provence


나는 대략 2015년 정도 즈음에도 전 남자 친구 친할머니 댁에 왔다가 엑스에 한 번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도 지난 크리스마스와 마찬가지로 배탈을 유발하는 바이러스가 가족 사이에 돌았고, 배가 아파 죽다 살아나는 바람에 일정을 짧게 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할머니랑 나름 죽이 잘 맞았는데, 지금은 잘 지내실까?


본래 여행의 포인트는 정신승리다 보니, 이번 엑상프로방스 방문은 예전 남자 친구와 관련된 기억을 재 채색했다는 것에 의미를 두자고 생각했다.


떠나기 하루 전, 우리는 다시 한번 베르동 계곡 상류를 가기 전 프랑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중 하나로 뽑히는 무스티에 생트 마리(Moustiers-Sainte-Marie)에 들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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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객으로 인한 수입으로 살아가는 듯한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 2015년 집계 기준으로 이 마을 인구는 693명이다.


지금 프랑스는 역대 최악의 가뭄을 경험하는 중이라 수량이 매우 적은 것이라고 한다. 프랑스에서 아름답다고 손꼽히는 마을에 가보면 항상 마을은 꽃으로 잘 장식이 되어 있다. 무스티에 생트 마리도 명성에 걸맞게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산길이 너무 굽이치는 베르동 근처 지형 때문에 접근성은 최악이다.)


사진엔 제대로 안 보이는데, 이 마을의 산등성이에는 별이 하나 있는데 이 별에는 전설이 함께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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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commons.wikimedia.org



Étoile de Moustier
D'après la légende de Frédéric Mistral, l'étoile est un ex-voto dédié à la Vierge Marie, installé selon le vœu du chevalier Blacas, un croisé emprisonné par les Sarrasins en 1210, qui avait promis, s'il revenait dans son village, d'y suspendre une étoile et sa chaîne en hommage à Marie.


무스티에의 별
프레데릭 미스트랄의 전설에 따르면, 이 별은 성모 마리아에게 바치는 봉헌물로, 1210년 사라센에 의해 수감된 십자군 기사 블라카스(Blacas)의 소원에 따라 설치되었는데, 그는 마을로 돌아온다면 마리아에게 경의를 표하며 별과 사슬을 매달겠다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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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친구에게 친구들이 없어서 1년 넘게 찍은 사진이 너무 없다고 하니 이번 여행에는 마치 충실히 임무를 수행하는 로봇처럼 열심히 찍어주었다. 사진을 열심히 찍고 다시 베르동으로 향했다.


오늘은 베르동 협곡 상류(Hautes gorges du Verdon)로 갔고, 이번에는 페달로(Pédalo)라고 부르는 페달로 가는 보트를 빌렸다. 오리 배의 고급 버전 같은 보트이다. 나는 키가 작아서 페달을 밟기 위해선 몸을 거의 눕혀야 했고, 덩치와 키가 큰 남자 친구는 거꾸로 무릎과 등이 자꾸 쓸려서 아프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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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utes gorges du Verdon



베르동 상류 쪽은 유명한 관광지라서 며칠 만에 드디어 동양인들을 많이 마주칠 수 있었다. 대개는 중국인이었고 일본인 커플도 봤다.


그러다 우리 앞에 페달로 로 가고 있는 아시안 커플을 봤는데 남자의 옷차림과 머리 스타일을 보고 한국인임을 직감한 순간 고개를 돌린 그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 남자는 옆에 앉은 자기 여자 친구를 툭툭 쳐서 여자 친구까지 나를 돌아보았다.


2~3m 거리였으니 이쯤이면 '안녕하세요' 인사를 해야 할 정도인 것 같았는데, 둘이 나를 몇 초 빤히 보고 말이 없길래 나도 페달만 밟았다. 나는 수영은 못해도 수영복을 입어야 하는 상황에서는 한국식으로 옷을 걸쳐 가리거나 하는 행동을 원래 안 한다. 확실히 한국인같이 생겼는데 너무 비키니'만' 입고 있어서 쳐다봤던 걸까?


베르동 강도 가뭄 때문에 평소에 비해 거의 4~5m 수심이 얕아진 상태이다. 그래서 물이 많이 무서운 나도 호수 빼곤 딱히 무섭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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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물놀이를 한 뒤에는 어제 엑스에서 돌아가다 우연히 알게 된 작은 마을 그레우 데 방(Gréoux-des-Bains)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나는 체력이 방전되어서 레드불을 원샷하고 나서야 겨우 기운을 차릴 수 있었다. 다행히 어제의 엑상프로방스에서의 열받음을 잊을 수 있을 정도로 음식은 맛있었다.


여행의 마지막 밤은 숙소 바깥에 설치된 테이블에서 맥주를 한 잔 하기로 했다. 그때 한 아이가 수영장에서 놀고 싶은지 문을 열려고 했지만 잘 열리지 않아 낑낑거리고 있었고, 마침 그 근처 테이블에 앉아 있었기에 남자 친구가 문을 열어주고 왔다.



IMG_4438.jpeg 수영장 사진



난 원래 남의 얼굴 빤히 안 봐서 모르고 주인장이랑 영어 쓰는 것만 들었는데, 그 아이는 우리 옆방을 빌린 커플은 동양계 독일인 커플의 아들이라고 한다. 그들은 하루 늦게 아들을 데리고 왔는데 그 아들은 말도 통하지 않는 나라에, 혼자 부모를 따라 바캉스를 온 것이다.


남자 친구는 어릴 때 비슷한 경험이 있다고 하면서 그 아이가 얼마나 지루하고 외로울지 이해가 되어서 수영장 문도 얼른 가서 열어주었다고 했다. 한참 우리가 이야기하던 중에 그 아이는 수건과 수영복을 입고 와서 잠시 물장구를 치다가 갔다.


나는 연년생 동생이 있어 거의 쌍둥이처럼 자랐다. 그래서 적어도 심한 외로움이라는 것은 딱히 느끼지 못하고 자랐다. 반면 남자 친구는 나이 터울이 많이 나는 형제자매 때문에 외동아들처럼 자라서 혼자서 노는 것에 도가 튼 타입이다. 시골에서 자란 사람이라 자연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동물을 많이 좋아한다. 그는 베르동에서 여러 번의 여름을 보냈고, 동양에 별로 알려지지 않은 휴양지이기 때문에 나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오후 9시가 되어도 해가 지지 않는 남부 프랑스의 외딴 마을에서 우리는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한참 나누다 숙소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