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모 콤플렉스와 가스 라이팅
누가 첫사랑은 아름답다고 했던가? 나에게 첫사랑은 전쟁의 동의어였다.
내 첫사랑은 동갑내기 남자 친구 W이었다. 거의 대학 생활 내내 교제했기 때문에 연애 기간도 꽤 길었다.
성격상 좋아하면 직설적으로 보여주길 선호하는 나는 그에게 적극적으로 관심을 표현했고 그와 나는 '썸'을 타게 되었으며 몇 달의 밀당 끝에 결국 우리는 사귀게 되었다. 나는 고백받았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도 않다.
그는 자신이 먼저 말을 꺼내고도 이렇게 말했다.
"네가 날 좋아하는 걸 알고 있는데 난 어떻게 할지 잘 모르겠어. 내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어?"
"음... 네가 나랑 사귀었으면 좋겠어."
친구들은 결론적으론 내가 고백한 것이라며 웃었다. 그런데 그 시작부터가 잘못이었던 걸까? 그는 연애 내내 '네가 날 더 많이 좋아하잖아'라는 말을 자주 했다.
그에게 나는 '네 외모가 내 스타일은 아니지만 네가 날 좋아하니까 만나는 거야'라고 밥 먹듯이 말했다. 지금의 나로선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전형적 가스 라이팅 발언이지만 20대 초반의 자존감이 낮은 젊은 처자에겐 그런 말이 당연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노릇이다.
한 번은 크게 싸운 일이 있었다. 어느 날 W가 나에게 '넌 바지만 입은 게 나아'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 발언의 뉘앙스가 너무도 이상해서 캐물으니 그는 내 다리 모양이 이상해서 치마를 입으면 예쁘지 않다고 했다. 크게 싸웠지만 그 이후로는 정말로 치마를 입기가 힘들어졌다.
"아이라이너 그리지 마. 아이라이너를 그리면 술집 여자 같아."
"호피 무늬 입지 마. 물방울무늬 무늬 입지 마. 난 그런 거 싫어해."
"너 같이 똑똑한 여자들은 남자한테 인기가 없어. 나니까 너랑 사귀어 주는 거야."
물론 그가 매일 같이 이런 발언을 했던 것은 아니다. 결론적으론 재밌는 점도 있었기 때문에 사귀긴 했을 테니까. 하지만 우리는 동갑내기임에도 장난이라고 무마하면서 계속 '오빠'라고 불러달라, 애교를 부려달라고 하는 그의 지속적인 요구에 나는 여자 친구로서의 자격 미달인 사람인 것처럼 느끼게 되었다. 그 시절은 더더욱 애교 없는 여자는 매력이 전혀 없는 여자로 치부되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런 얘기만 하면 내가 순종적인 타입 같이 보일 수 있겠지만, 나는 자기주장이 꽤 확실한 편이고 감정 표현에 직설적인 편이다. 그의 요구에 매번 '알았어'라고 순종한 것도 아니다. 다만 연애 관계 속에서 나의 의견을 어떻게 똑바로 표현하고 당당하게 내 권리를 요구하는지 몰랐을 뿐이다. 마음속 외모 콤플렉스는 더욱더 커져갔고, 나는 점점 더 작아져 갔다.
그와 나 모두 20대 초반으로 어리숙했기에 일어난 일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그때는 사랑한다면 나를 그의 이상형에 맞춰야 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 있었음도 역시 인정한다. 바닥까지 내려간 자존감을 회복하는 데에는 그와 사귄 기간 이상만큼의 시간이 걸렸다.
그와 헤어지고 얼마 후 그의 흔적을 찌질하게 찾아 헤매다 나는 한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말았다. 나와 사귈 때 작성한 글 중 하나였는데, 내용인즉슨 '여자 친구의 외모가 마음에 들지는 않는데, 나에게 정말 잘해줘서 사귄다'였다. 댓글창엔 '네가 나쁜 놈이다. 그럴 거면 헤어져라', '여자 친구가 무슨 잘못이냐' 등 그를 타박하는 답변이 꽤 많이 달려 있던 것이다. 지금에 와서도 나는 거의 확신한다. 그는 나와 보낸 수년을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리란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