퀼트를 아시나요?
몇 년 전이었더라. 손바느질로 한 땀 한 땀 작품을 만들어가는 퀼트가 유행했었다. 내 기억으론 그랬다. 물론 우리 엄마 세대에서.
조그마한 동네에 퀼트 전문집이 한 두 개 문을 열었었고, 우리 엄마도 몇 군데 돌아다니며 열심히 도안을 따라 바느질을 했다. 단언컨대 엄마는 손재주가 있다. 딸 키우는 재미를 보려고 처음 만들었던 손바닥만 한 파우치가 어디 내놔도 손색없어 보였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더니 그런 측면일 수도 있으려나.
고등학생 때였나, 대학생 때였나. 러시아 전통 인형마트료시카를 닮은 필통이 내게 왔다. 그 뒤로 필통을 산 기억은 없다. 나는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필통을 갖고 있었으니까.
튼튼한 갈색 실이 일정한 간격으로 박음질되어있고, 퀼팅이라 부르는 그 바느질을 끝내면 다리미로 꾹꾹 눌러 천에 각을 잡는다. 일부러 퀼팅을 해서 모양을 내는 천도 있고, 일부러 안 해서 천 그대로의 질감을 살려두는 면도 있다. 내가 퀼트를 해봤다거나 조사를 해봐서 아는 게 아니라, 엄마가 신난 표정으로 내게 설명해줘서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고 보면 이 퀼트는 참 재미있는 취미 생활이다. 같은 도안이라도 어떤 천을 쓰느냐에 따라 다른 작품이 나오고, 저마다의 솜씨에 따라 바느질 각도가 달라지면 또 다른 작품이 튀어나온다. 비슷한 사람은 있을지언정 똑같은 사람은 없는 이 세상의 당연한 이치와도 맞아떨어진다. 그래서 이건 내게 꽤 소중한 물건이었다.
사실 엄마가 내게 만들어준 작품은 이 필통 말고도 몇 가지 더 있다. 처음 언급했던 소녀 파우치, 작년처음 도어록을 달기 전까지 썼던 집 열쇠의 고리 겸 열쇠집, 다른 소품을 넣을 수 있는 더 큰 파우치, 금전운을 높여준다는 부엉이 열쇠고리까지.
나는 뿌듯해서 언젠가 한 번 열쇠고리를 친구에게 선물한 적이 있다. 그거 나한텐 엄청 귀한 거였는데, 그 친구가 알려나 모르겠다. 줄 때도 생색냈던 기억은 물론 있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엄마가 만들어준 물건이라 주관적으로 매우 귀한 거였던 것 같은데. 어쨌든 내게 소중한 거라면 그 친구도 소중하게 여겨줄 거라 믿었다.
언제더라, 아무튼 몇 년전까지만 해도 집에 가면 티브이 앞에 앉아 한참 동안 바느질을 하는 엄마를 볼 수 있었다. 고된 일을 하고 와서도 바늘을 잡을 만큼 엄마는 열정적이었다.
엄마만 알아보는 도안을 열심히 들여다보며 작게 잘린 천을 하나하나 이어 붙였다. 이 작업은 꽤 정교해 보였다. 모든 무늬를 오직 천 몇 개를 덧대거나 바느질로 표현하고, 때로는 비즈처럼 생긴 단추를 달아 장식하기도 했다. 심지어 겉만 퀼팅 하는 게 아니라 안쪽 면까지 모두 정성이 들어가는 고급 취미였다. 그래서 모든 작업을 다 마치면 그렇게 환한 표정으로 내게 자랑을 했던 게 아닐까.
지퍼 디자인 하나까지 골라 섬세한 손길로 바느질을 한다. 작거나 큰 가방이 탄생하거나 옷이 완성되기도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취미를 즐기며 만들어진 작품들을 선물하곤 했던 엄마가 대단하다.
퀼트 바늘은 꽤 작은 편이다. 엄마 손도 작은 편이지만, 사람 손 크기에 비해 작은 바늘은 오랜 시간 작업을 하기엔 적당치 못하다. 필히 마디가 여기저기 쑤시고 같은 각도로 수백, 수천번이 넘는 팔 운동을 반복해야 하는 일이다.
천조각을 이어 붙이고, 그러다 잘못 이어 붙이면 정성스럽게 했던 바느질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이토록 많은 과정을 반복해도 끝이 아니다. 적당하게 모양이 잡히면 다림질을 하고 얇은 솜을 덧대어 뒤판 작업까지 한다. 솜이 마음대로 도망가지 못하도록 퀼트를 하는 동시에 겉에 보이는 모양엔 지장이 가지 않도록 살금살금 바느질을 한다. 그리고 다시 다림질. 무한 반복.
이렇듯 하나의 집합체로 보이는 퀼트 작품의 단면을 들여다보면 세 겹으로 이루어져 있다. 작품을 받는 입장에서는 한 번에 와 닿지 않을 정성이 적어도 세 배는 들어간다는 뜻이다.
도서관에 출근하는 기분으로 자리를 잡고 앉으면 이 필통이 등장한다. 이 친구와 최소 10년은 함께한 기분인데, 어제 들여다보다 문득 '때가 탔나'싶은 생각이 들면서 '그럴 때가 됐지.'라는 결론까지 이르렀다.
빨아도 튼튼한 천이라며 퀼트의 장점을 줄줄이 이어놓던 엄마의 말이 귀를 맴돌았다. 그 생각을 한 지 24시간이 채 되지도 않았는데, 가방에 함께 엉켜있던 틴트가 일을 저질렀다. 빨갛게 물든 리본을 보고 있으니 괜히 마음이 아파왔다. 내가 아끼는 소중한 건데. 잘 관리하지 못해서 흠집이 난 기분.
조물조물 손빨래를 해봐야겠다. 조심스레 묵은 때를 벗기고 잘 말려줘야지. 이걸 보고 있으면 엄마가 떠오른다.
"엄마 이거 팔아도 되겠다. 팔자." 하면 "팔긴 뭘 파노? 이걸 누가 사노. 재미로 하는 거지. 일로 하면 힘들어서 못 한다." 하던 엄마.
그 말에 담긴 다른 뜻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릴 땐 몰랐는데, 지금은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엄마와 오롯이 함께 살았던 20년. 그 이후엔 자의 겸 타의로 타지에 있었는데, 벌써 시간이 많이 흘렀다.
함께 살다 보면 애와 증이 함께 찾아올 때도 많았지만, 엄마는 엄마다. 엄마를 사랑하니까. 이 정성을 내게 줘서 고마워. 내가 어제 전화할 때도 말했는데, 사랑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