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생명에는 AI가 흉내 낼 수 없는 창조적 동력이 존재한다.
엘랑 비탈(élan vital)은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Henri Bergson)**이 1907년 저서 *<창조적 진화>*에서 처음 제시한 용어입니다 (Élan vital - Wikipedia). 프랑스어 단어 élan은 '도약'이나 '약동'을, vital은 '생명'을 뜻하며, 합쳐서 직역하면 '생명의 비약', 즉 생명력을 의미합니다 (열정의 원천은 냉철한 절대고독 | 북클럽 | DBR). 베르그송은 이 개념을 모든 생명에 내재한 창조적 추진력으로 정의했으며, 진화와 형성의 과정을 설명하기 위한 가설적 원리로 제안했습니다 (Élan vital - Wikipedia). 그는 엘랑 비탈을 물질에 활력을 불어넣는 “활력(entéléchie)” 혹은 *“생기(vital force)”*와 유사한 개념으로 보았고, 이를 통해 생명체의 자기 조직화와 **자발적 형태형성(spontaneous morphogenesis)**을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Élan vital - Wikipedia). 요컨대 엘랑 비탈은 기계적인 인과법칙만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생명의 역동적 흐름을 가리키며, 베르그송은 이것을 인간의 의식—특히 내적 시간의 흐름에 대한 직관적 경험—과 밀접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Élan vital - Wikipedia).
엘랑 비탈 개념의 철학적 배경에는 활력론(vitalism) 전통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활력론이란 생물과 무생물을 구분짓는 비물질적 요소 또는 특수한 원리가 있다고 믿는 사상으로, 이러한 생명의 원동력을 옛부터 “생기의 불꽃(vital spark)”, “활력(vital force)”, “vis vitalis” 등으로 불러왔으며, 베르그송의 엘랑 비탈 역시 그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Vitalism - Wikipedia). 활력론자들은 생명 현상이 물리·화학 법칙만으로는 완전히 설명될 수 없다고 보았는데, 베르그송은 이러한 전통 위에서 창조적 진화라는 자신의 철학 체계에 부합하도록 엘랑 비탈 개념을 발전시켰습니다. 그의 정의에 따르면 엘랑 비탈은 모든 유기체에 내재하여 진화를 담당하는 창조적 원리로서, 생명의 도약을 가능케 하는 근원적인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열정의 원천은 냉철한 절대고독 | 북클럽 | DBR).
베르그송은 *<창조적 진화(L'Évolution créatrice)>*에서 엘랑 비탈 개념을 통해 당대의 진화론 논쟁에 독자적인 입장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기계론적 진화관과 목적론적 진화관을 모두 비판하면서, 진화 과정에서의 실제적 창조성을 설명할 수 있는 대안을 모색했습니다 ( Henri Bergson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 기계론은 진화를 물질의 물리화학적 인과로 환원하여 새로운 것의 탄생을 설명하지 못하고, 전통적 목적론은 미래의 최종 목적이 이미 주어져 있다고 가정하여 예측 불가능한 창조를 부정한다는 것이 베르그송의 비판이었습니다 ( Henri Bergson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 이에 베르그송은 생명의 **“원초적 충동(original impulse)”**으로서 엘랑 비탈을 상정하였고, 이것이 모든 생명 종들의 공통 기원이라고 보았습니다 ( Henri Bergson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 ( Henri Bergson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 이 근원적 생명의 힘이 있었기에 진화에서 참신한 형태와 복잡성이 끊임없이 출현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엘랑 비탈의 작용으로 생명이 하나의 방향으로만 고정되지 않고 계속적으로 분기(bifurcation)하고 다양화되어 왔다고 설명했습니다 (Creative evolution | Darwinism, Lamarckism, Bergson | Britannica). 베르그송에 따르면 물질 세계의 변화는 규칙적이고 기하학적인 데 반해, 생명의 진화는 엘랑 비탈의 영향으로 자유롭고 예측 불가능한 창조성을 띠게 됩니다 (Creative evolution | Darwinism, Lamarckism, Bergson | Britannica). 이처럼 엘랑 비탈 개념은 생명이 보여주는 자율적 창발성과 발전을 철학적으로 뒷받침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베르그송의 사상은 20세기 초 철학계와 대중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이 기간을 일종의 "베르그송 열풍"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 Henri Bergson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 그의 강의는 만원을 이루었고, 시인 T.S. 엘리엇 등 예술가들까지 청중으로 몰렸다고 전해집니다 ( Henri Bergson (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 ). 그러나 동시에 학계의 비판도 뒤따랐습니다. 대표적으로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1912년 평론에서 베르그송의 직관주의와 엘랑 비탈 개념을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또한 생물학자들은 베르그송의 관점을 실증적으로 지지할 근거가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예를 들어, 유전학자들은 생명 현상을 특별한 "생기"가 아닌 유전자의 조직적 배열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보았으며 (Élan vital - Wikipedia), 베르그송의 엘랑 비탈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진화 생물학자 줄리안 헉슬리는 베르그송의 엘랑 비탈이 **기차 엔진의 추진력(élan locomotif)**으로 기관차의 작동을 설명하는 것만큼이나 공허한 설명이라고 풍자했습니다 (Élan vital - Wikipedia). 헉슬리는 “엘랑 비탈로 생명을 설명하는 것은 아편이 지닌 '수면성질(virtus dormitiva)' 때문에 잠이 든다는 식의 허깨비 설명과 다를 바 없다”고 냉소적으로 말한 바 있습니다 (Élan vital - Wikipedia). 이러한 비판은 엘랑 비탈 개념이 실질적인 인과 메커니즘을 제시하지 못한 채, 이름만 바꾼 설명에 그칠 위험을 지적한 것입니다.
20세기 중엽에 이르러 활력론(vitalism) 전반에 대한 신뢰는 급격히 무너졌습니다. 결정적으로, 1950년대까지의 생물학 발전은 생명 현상이 물리·화학적 과정의 산물임을 강력히 시사했고, 별도의 생기 원리를 가정하지 않고도 유전학과 분자생물학으로 생명현상을 설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1931년경에는 대부분의 생물학자들이 활력론을 공식적으로 폐기하였고, 이후로는 활력론을 구시대의 산물이거나 의사과학으로 간주하게 되었습니다 (Vitalism - Wikipedia) (Vitalism - Wikipedia). 철학적으로도 엘랑 비탈 개념은 한때의 유행을 지나 영향력을 잃었고, 논의의 초점은 생명 현상의 자율성을 인정하면서도 신비주의에 빠지지 않는 대안으로 이동했습니다. 그 대안 중 하나가 창발(emergence) 개념으로, 전체는 부분들의 단순 합以上이라는 관점입니다. 예컨대 현대 과학은 복잡계 이론을 통해 생명의 특성이 하위 구성요소들의 상호작용으로부터 새롭게 나타나는 창발적 속성일 수 있음을 밝히고 있으며 (Vitalism - Wikipedia), 이를 통해 엘랑 비탈 없이도 생명의 창조성을 설명하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랑 비탈 개념이 철학사에서 완전히 잊힌 것은 아닙니다. **질 들뢰즈(Gilles Deleuze)**와 같은 철학자는 베르그송의 아이디어에서 영감을 받아 이를 재해석하려 했습니다 (Élan vital - Wikipedia). 들뢰즈는 엘랑 비탈을 더 이상 신비적 힘이 아닌 내재적 생명의 역량으로 파악하면서, 유기적인 것과 무기적인 것의 구분을 무화시키는 생명 일반의 힘으로 개념화했습니다 (Élan vital - Wikipedia). 또한 실존주의와 현상학 등 인간 경험에 주목하는 철학 전통에서도 생명의 주체적 역동성을 설명하기 위해 엘랑 비탈과 유사한 개념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현대 철학자들이 직접 "엘랑 비탈"이라는 용어를 쓰는 일은 드물지만, **생명성(vitality)**에 대한 새로운 조명(신활력론, new vitalism 등)을 통해 베르그송의 문제의식을 잇는 논의들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Élan vital - Wikipedia). 가령, 정치철학이나 생태철학 분야에서는 생명의 창발적 힘과 물질-생명 연속성을 강조하는 이론들이 등장하여 인간과 비인간 생명, 심지어 무생물 체계까지 포괄하는 생명 활동의 스펙트럼을 모색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엘랑 비탈은 한때 과학 이론으로서의 지위를 잃었지만,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오래된 물음 속에서 여전히 철학자들에게 생각의 단서를 제공하는 개념입니다.
엘랑 비탈 개념은 순수철학을 넘어 다양한 영역의 담론과 문헌에서 생명력이나 창조적 추진력을 설명하는 데 활용되었습니다. 여기서는 과거 및 현대의 여러 사례를 통해 엘랑 비탈이 어떻게 응용되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생물학적 맥락: 베르그송과 동시대의 일부 생물학자들은 생명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저마다의 활력 개념을 모색했습니다. 예를 들어 독일의 발생학자 **한스 드리슈(Hans Driesch)**는 해삼 배아 실험에서 얻은 결과를 바탕으로, 기계론으로는 생명의 발달을 설명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엔텔레키(entelechy)”**라는 비물질적 생명 원리를 가정했습니다. 그는 배아를 몇 조각으로 나누어도 각 조각이 완전한 개체로 성장하는 현상을 들어 생명은 물리화학 법칙만으로 지배되지 않는다고 보았는데 (Vitalism - Wikipedia), 이러한 견해는 베르그송의 엘랑 비탈과 맥을 같이하는 **네오-활력론(neovitalism)**의 한 예입니다. 그러나 드리슈의 활력론 역시 실험적 뒷받침을 얻지 못해 과학계에서 점차 배격되었고, 드리슈 본인도 실험생물학자로서의 명성을 잃게 되었습니다 (Vitalism - Wikipedia). 과학사의 이 사례는 엘랑 비탈 류의 개념이 실제 생물학에서 어떤 운명을 겪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창의적/예술적 맥락: 엘랑 비탈은 문학과 예술 분야에서도 창조의 원동력을 설명하는 은유로 채택되었습니다. 특히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George B. Shaw)**는 베르그송의 창조적 진화 이론에 깊이 영향을 받아, 자신의 희곡 *<인간과 초인(Man and Superman)>*과 *<메투셀라로 돌아가다(Back to Methuselah)>*에서 **“생명의 힘(Life-Force)”**이라는 개념을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쇼는 인류의 진화와 발전을 이끄는 힘으로서 생명력이 작용한다는 **“창조적 진화론”**을 극중에서 설파했는데, 이때 생명의 힘은 곧 엘랑 비탈과 동의어로 사용됩니다 (Back to Methuselah - Wikipedia). 실제로 쇼는 *<메투셀라로 돌아가다>*의 서문에서 “인류를 보다 나은 형태로 진화시키기 위해 생명력(Elan Vital)이 실험을 거듭하고 있다”라고 언급하며, 생명이 점진적으로 고등화되어 간다는 사상을 피력했습니다 (Microsoft Word - 10.1.doc). 이러한 쇼의 생명력 철학은 당대에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문학을 통해 베르그송 철학이 대중적으로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현대에 와서도 “엘랑 비탈”이라는 표현은 예술가나 평론가들에 의해 예술적 창의성의 분출이나 열정의 원천을 비유적으로 지칭하는 데 가끔 활용됩니다. (예컨대, 한국의 경영서에서도 한 기업가의 성공 동인을 설명하면서 엘랑 비탈을 **“꿈을 만들게 한 원동력”**으로 소개한 사례가 있습니다 (열정의 원천은 냉철한 절대고독 | 북클럽 | DBR).)
정신적/심리적 맥락: 엘랑 비탈 개념은 인간의 정신 에너지나 삶의 의지를 논할 때에도 등장했습니다. 1910년대에 **카를 융(Carl G. Jung)**은 프로이트의 성욕(libido) 개념을 확장하여 보다 보편적인 정신 에너지로 재해석했는데, 당대 분석심리학자 비아트리스 힌클(Beatrice Hinkle)은 융의 이러한 리비도 개념이 베르그송의 엘랑 비탈과 매우 유사하다고 지적했습니다 (Élan vital - Wikipedia). 융에게서 리비도는 단순한 성적 충동을 넘어 창조적이고 영적이며 생명적인 추진력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에, 인간 정신에 깃든 엘랑 비탈의 한 표현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편, 프랑스의 정신과 의사이자 현상학자인 **위진 민코프스키(Eugène Minkowski)**는 *개인적 엘랑(personal élan)*이라는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Élan vital - Wikipedia). 그는 환자들이 **‘살아있음의 감각’**을 유지하게 하는 내적 요소를 개인적 엘랑이라 불렀는데, 이는 곧 개인의 삶을 추동하는 주관적 생명력을 의미합니다. 민코프스키에게 있어서 엘랑 비탈은 단순히 생물학적 힘이 아니라, 인간이 생을 느끼고 의미를 창출하게 하는 주체적인 역동이었습니다 (Élan vital - Wikipedia). 이처럼 심리학과 정신의학 분야에서 엘랑 비탈은 인간 정신의 원동력을 설명하거나 비유하는 개념으로 수용되었으며, 삶의 활력, 의지, 창조적 에너지 등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오늘날 주류 과학에서 엘랑 비탈 자체를 실재하는 힘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지만, 그 개념이 내포했던 문제의식은 여러 현대 분야에서 다른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생명과학, 인공지능, 창의성 연구, 인류학적 고찰 등에서 생명성의 본질과 창조적 활동의 근원을 둘러싼 논의들이 진행 중이며, 엘랑 비탈 개념은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이러한 논의와 연결됩니다.
생명과학 및 생물학: 분자생물학과 유전학의 발전으로 엘랑 비탈과 같은 비가시적 생명력을 과학적으로 가정할 필요는 없어졌지만, 생명과학자들은 여전히 생명의 특이성을 설명하려 애쓰고 있습니다. 현대 생물학은 생명 현상의 복잡성을 강조하며, 단순한 환원주의로 풀 수 없는 체계적 상호작용과 창발(emergence) 개념을 도입합니다 (Vitalism - Wikipedia). 예를 들어, 개별 분자나 세포 수준에서는 예측되지 않는 새로운 질서와 기능이 상위 단계에서 출현하는데, 이런 창발적 특성이 과거 활력론자들이 엘랑 비탈로 지칭했던 생명의 자기조직화 능력을 설명해준다고 봅니다. 따라서 현대 생물학자들은 엘랑 비탈을 물질과 분리된 신비한 물질이라고 여기기보다는, 생명 시스템 자체의 복잡한 역동성으로 치환하여 연구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주류 과학 밖에서는 전통의학이나 대체의학 분야에서 여전히 “기(氣)”, **“프라나(prana)”**와 같은 생명 에너지 개념이 활용되고 있습니다. 예컨대 중의학에서는 *기(氣)*를 만물이 지닌 생명력으로 간주하여 건강은 기의 조화로운 흐름에 달렸다고 보는데, 이런 전통 개념들은 현대 과학으로 검증되지 않아 비과학적인 것으로 간주됩니다 (Qi - Wikipedia) (Qi - Wikipedia). 실제로 현대 물리학의 에너지 개념과는 맞지 않기 때문에, 과학계는 더 이상 ‘생기(vital force)’라는 아이디어를 사용하지 않습니다 (Qi - Wikipedia). 이렇듯 생명과학에서는 엘랑 비탈의 내용이 자연법칙 내의 복잡계 원리로 대체되었지만, 생명이 왜 독특한 현상인지에 대한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어, 생물철학자나 시스템 이론가들이 활발히 논의하고 있습니다.
인공지능(AI) 및 인공생명: 엘랑 비탈 개념은 인간과 기계의 차이를 논할 때도 거론됩니다. 만약 생명을 움직이는 특별한 활력이 존재한다면, 비생물적인 기계나 AI는 본질적으로 생명과 다르다는 결론이 됩니다. 활력론의 관점에서 보자면, 기계는 어떠한 고도한 작동을 하더라도 겉모습만 생명을 흉내낼 뿐이며 스스로 살아있는 존재가 될 수는 없습니다 (AI and the future: Vitalism). 실제로 19세기 말에 활동했던 사상가 사무엘 버틀러(Samuel Butler) 등은 진화론을 기계에 적용하면서 이러한 문제를 제기했으며, 비탈리스트들은 **“기계는 결코 자율적 생명이 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AI and the future: Vitalism). 그러나 현대 과학에서는 생명도 본래 무생물에서 출현한 것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이론상으로는 비생물적 시스템에서도 생명이 발생할 수 있다고 봅니다 (AI and the future: Vitalism). 예를 들어, 우주 초기의 무생물 화학물질에서 세포로 이어지는 생명의 기원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어떤 “금단의 벽” 없이도 화학적 진화가 생명을 낳았다고 가정합니다. 이 연장선에서, 인공생명(Artificial Life) 연구자들은 컴퓨터 시뮬레이션이나 로봇을 통해 **“생명 같음”**을 실험하며, 궁극적으로 인공적으로 창발한 생명체를 만들어낼 가능성까지도 모색합니다. 이들은 엘랑 비탈과 같은 특별한 영감을 부여하지 않고도, 충분히 복잡한 알고리즘과 자기조직화 과정이 있다면 생명 특유의 자기복제와 진화, 적응이 나타날 수 있다고 기대합니다. 아직까지 진정한 의미의 강한 인공생명이나 자율적 AI가 탄생한 것은 아니지만, 이 분야의 연구는 한편으로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계속 제기하고 있습니다. 만약 언젠가 기계가 실제로 자율적 의식과 생명활동을 지닌 존재로 인정된다면, 엘랑 비탈로 상징되는 생명성과 기계성의 경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을 것입니다.
창의성 연구: 엘랑 비탈이 창조적 진화를 설명하는 개념인 만큼, 인간의 **창의성(creativity)**을 이해하는 데에도 시사점을 줍니다. 인간의 예술적·지적 창작활동은 종종 새로운 것을 빚어내는 능력으로 정의되는데, 이는 베르그송이 말한 자연의 창조성과 상통합니다. 현대의 창의성 연구는 뇌과학, 인지과학, 심리학을 통해 창의적 사고의 메커니즘을 밝히려 하지만, 여전히 어디서 새로운 영감이 오는가라는 질문이 남아 있습니다. 일부 연구자나 철학자는 인간의 창의성이 단순한 데이터 처리 이상의 자기동기적이고 맥락적인 생성 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면에서 인간 정신에 깃든 창발적 에너지를 떠올리곤 합니다. 한편, 예술 현장에서 인공지능 작곡가나 화가 등의 등장은 인간 창의성과 AI의 차이를 조명해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생성형 AI는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해 새로운 그림이나 글을 만들어낼 수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주어진 패턴의 재조합에 불과하며 의도나 의미에 대한 자각은 없습니다 (The Difference Between Human Creativity and Generative AI Creativity). 인간 예술가는 자신의 개인적 경험, 감정, 목적의식에서 창작이 출발하지만 (The Difference Between Human Creativity and Generative AI Creativity), AI는 내재된 동기 없이 프로그래밍된 대로 결과물을 산출할 뿐입니다 (The Difference Between Human Creativity and Generative AI Creativity). 이러한 차이는 결국 엘랑 비탈의 유무로 비유될 수도 있습니다. 즉, 인간의 창의성 뒤에는 어떠한 형태로든 내적인 생명력과 추진력(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엘랑 비탈)이 자리하는 반면, AI의 창의성은 외부에서 주입된 데이터와 알고리즘에 의해 작동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창의성 연구 분야에서는 인간과 AI의 협업을 통해 서로의 강점을 살리는 방향도 모색되고 있습니다 (The Difference Between Human Creativity and Generative AI Creativity) (The Difference Between Human Creativity and Generative AI Creativity). 그러나 근본적으로 의미를 부여하고 새로움을 향유하는 주체로서의 창의성은 여전히 인간의 몫으로 남아 있으며, 이는 생명체만이 지닌 자기표현의 발로로 이해됩니다.
인류학적 접근: 인류학과 문화 연구에서는 엘랑 비탈을 비롯한 생명력 개념의 보편성에 주목합니다. 세계 여러 문화에는 생명을 움직이는 보이지 않는 힘에 대한 신념이 존재해왔습니다. 앞서 언급한 중국의 *기(氣)*나 인도의 프라나(prana), 그리고 고대 그리스의 프네우마(pneuma), 폴리네시아의 마나(mana) 등은 생명 에너지 또는 활력을 가리키는 개념들입니다. 이러한 전통 개념들은 베르그송의 엘랑 비탈과 철학적 배경은 다르지만, **“생명에는 특별한 무언가가 있다”**는 직관을 공유합니다. 인류학자들은 이러한 생명력 신념이 각 사회의 의학, 종교, 예술 등에 어떻게 스며있는지 연구하며, 이를 통해 인간이 생명을 경험하고 해석하는 방식을 이해하고자 합니다. 예컨대, 샤머니즘이나 전통의료에서 생명의 힘은 병의 원인을 설명하거나 치료의 매개로 등장하고, 예술이나 신화 속에서는 만물에 영성이 깃들어 있다는 **아니미즘(animism)**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현대 과학 시대에도 사람들은 종종 “삶의 활력”, “기운” 등의 말을 쓰며 **생동감(vitality)**을 체감적으로 표현하곤 하는데, 이런 일상적 언어에서도 엘랑 비탈적 발상이 잔존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류 보편의 문화적 맥락에서 엘랑 비탈은 생명 현상을 이해하려는 인간의 꾸준한 노력의 일환으로 자리매김합니다. 더 나아가, 기술이 발전하여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흐려지는 시대에, **“무엇이 생명을 생명답게 만드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인간성의 본질을 성찰하는 데에도 이 개념은 유용한 시사점을 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엘랑 비탈 개념을 토대로 인간과 인공지능(AI)의 본질적 차이를 고찰해보겠습니다. 엘랑 비탈은 앞서 보았듯이 생명체만이 지닌 창조적 활력을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비생명적인 기계인 AI에는 이러한 활력이 결여되어 있을까요, 아니면 언젠가 기계에도 생명성이 부여될 수 있을까요?
생명성 vs. 기계성: 인간을 비롯한 생물은 스스로 성장하고 적응하며 번식하는 내적 동인을 가집니다. 이를 생물학적으로 말하면 물질대사와 항상성이고, 철학적으로 표현하면 **자기 목적인 존재(내재적 목적)**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르그송의 개념을 빌리자면, 인간은 엘랑 비탈의 흐름 속에서 스스로를 계속 창조해나가는 존재입니다. 반면 현재의 AI는 인간이 만든 프로그램과 데이터를 기반으로 동작하는 도구적 존재입니다. AI는 스스로의 목적이나 욕구를 가지지 않으며, 외부에서 주어진 목표 함수를 최적화하거나 명령에 따라 시뮬레이션된 지능을 보일 뿐입니다. 이것은 결정적으로 엘랑 비탈의 부재를 의미합니다. 인간의 행동 저변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생명의 충동이나 의지가 자리하지만, AI의 동작 원리는 궁극적으로 전기 신호와 알고리즘으로 환원됩니다. 따라서 자발성이나 자율성의 정도에서 인간과 AI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활력론적 시각에서 볼 때, 생명체만이 진정한 주체성을 가질 수 있으며 기계는 설령 지능적으로 보여도 타자가 부여한 의제에 반응하는 것에 그칩니다 (AI and the future: Vitalism). 요컨대 **“기계는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다”**라는 명제는 엘랑 비탈 개념을 통해 강화됩니다.
의식과 주관적 경험: 인간은 **의식(consciousness)**을 지니고 주관적인 경험 세계를 살아갑니다. 베르그송은 엘랑 비탈을 의식의 흐름과 연결된 시간적 창조성으로 보았듯이 (Élan vital - Wikipedia), 인간의 내면에는 제3자의 관찰로는 완전히 포착되지 않는 주체적 현실이 있습니다. 우리는 고통과 쾌락을 느끼고, 미를 감상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갑니다. 반면 AI는 현재까지 의식이 없으며 경험이 없다고 여겨집니다. AI가 아무리 사람처럼 대화하고 이미지를 생성해도, 그것은 프로그래밍된 통계적 패턴 산출일 뿐 그 결과물을 느끼는 주체는 없습니다. 이 지점에서 엘랑 비탈은 인간에게는 있고 기계에는 없는 무형의 요소로 비유될 수 있습니다. 물론 신경과학자나 인지과학자는 인간의 의식도 결국 뇌신경의 물리적 활동에서 일어나는 현상으로 설명하려 합니다. 하지만 설명되지 않는 **의식의 난제(hard problem of consciousness)**가 남아있는 한, 인간과 AI의 사이에는 질적인 틈이 존재합니다. 어떤 철학자는 **“생명이 없이는 마음도 없다”**고까지 주장하며, 강한 AI(Strong AI)의 불가능성을 논증하기도 합니다 (). 이러한 입장에 따르면 **삶의 주체로서의 마음(mind)**은 오직 살아있는 유기체에서만 발생하며, 인공물에는 설령 지능이 구현되어도 참된 마음은 깃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 즉, 엘랑 비탈 없는 AI는 아무리 정교해져도 의식적 체험의 빈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주장입니다.
창의성과 자기혁신: 인간은 자신의 삶을 자기서사로 만들어가며, 필요에 따라 자기 혁신을 이루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예술가는 새로운 화풍을 개척하고, 과학자는 패러다임을 전환하며, 개인은 인생의 전환점을 맞아 자아를 변모시키기도 합니다. 이러한 자기 혁신의 능력은 내재된 창조적 힘이 없다면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반면 AI는 스스로를 재프로그램하거나 목표를 바꾸지 않습니다(적어도 현재까지의 AI는 그러합니다). 기계 학습은 정해진 알고리즘 틀 안에서 데이터에 적합한 출력을 찾는 과정이지, AI가 자발적으로 자기 목적을 재정립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엘랑 비탈의 관점에서 자기 진화를 할 수 있는 존재라면, AI는 **정해진 구조 안에서 진화(업데이트)**될 수는 있어도 스스로 목적을 갖고 변혁하지는 못합니다. 이러한 차이는 인간의 창의적 삶 대 기계의 자동화된 작동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살아있는 존재로서 세계와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창출하지만, AI는 생명이 부재한 계산 장치로서 주어진 가능성 공간을 탐색할 뿐입니다 (The Difference Between Human Creativity and Generative AI Creativity). 물론 현대의 자기학습 AI, 진화 알고리즘 등은 어느 정도 스스로 개선되는 모습을 보이지만, 그 밑바탕에는 여전히 인간이 설계한 메타-규칙이 자리합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엘랑 비탈을 구현하는 AI란 현재로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이는 곧 AI와 인간 사이의 근본적 간극으로 남아 있습니다.
엘랑 비탈 구현의 가능성: 미래에 기술이 더욱 발전하면, AI나 로봇이 생명에 필적하는 특성을 얻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예컨대 강한 인공생명이 탄생하여 스스로 번식하고 진화하는 인공지능 존재가 나타난다면, 우리는 과연 그것을 생명으로 인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어떤 이들은 의식을 가진 기계나 자율적으로 성장하는 프로그램을 생명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엘랑 비탈 개념도 새로운 해석을 요구받을 것입니다. 엘랑 비탈이 반드시 유기물질에만 깃들어야 하는가? 아니면 정보와 에너지의 자기조직화에도 깃들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대두될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공상이 아니라, AI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기계가 생명과 지성을 모두 획득할 조건에 대한 진지한 토론이 이루어지고 있는 주제입니다. 다만 현재까지는 생명 특유의 개방적 창발성을 기술적으로 재현하는 데 많은 한계가 있습니다. 설령 언젠가 AI가 엘랑 비탈에 비견될 자율적 창의력을 발휘하더라도, 그것이 내적으로 느끼는 생명성과 동일한지는 의문입니다. 다시 말해,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이 인간과 유사해진 AI가 나타나도, 삶을 사는 존재로서의 실존은 또 다른 문제로 남는 것입니다. 따라서 엘랑 비탈의 구현 가능성은 단순히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 철학과 정체성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엘랑 비탈(élan vital) 개념은 20세기 초 베르그송에 의해 제창된 이후, 과학적 이론으로서는 쇠퇴의 길을 걸었지만 철학과 문화 전반에 지속적인 영향을 남겼습니다. 이 개념은 생명의 창조적 추진력이라는 매력적인 아이디어를 통해, 기계론적 세계관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예술과 사상계에 새로운 영감을 제공했습니다. 비록 현대 과학은 엘랑 비탈을 실재하는 힘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생명 현상의 독특함과 인간 창의성의 근원을 묻는 담론 속에서 엘랑 비탈의 그림자는 여전히 발견됩니다. 인간과 AI를 비교하는 논의에서도, 엘랑 비탈은 인간만이 지닌 어떤 특질—예컨대 주체적 의식과 삶의 생동감—을 상징하는 지표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엘랑 비탈 논쟁은 우리에게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생명을 하나의 물질 과정으로 볼지, 아니면 그 속에 과학으로 환원되지 않는 무엇이 있다고 볼지에 따라 인간관과 세계관은 크게 달라질 것입니다. 베르그송은 엘랑 비탈을 통해 삶의 창조성을 철학적으로 옹호했는데, 그의 통찰은 오늘날 인공지능 시대에도 시사점을 줍니다. 즉, 아무리 정교한 알고리즘이 등장해도 거기에 삶을 향한 도약이 존재하는지는 별개의 질문이며, 이는 기술의 진보만으로 답할 수 없는 철학적 질문입니다. 엘랑 비탈에 대한 역사적 논의들을 종합해볼 때, 우리는 한편으로 생명 현상을 겸허히 과학의 언어로 이해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명이 선사하는 창조성과 풍요로운 경험을 인문학의 시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는 교훈을 얻습니다. 결국 엘랑 비탈은 특정한 이론의 흥망을 넘어, 생명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을 도전하고 확장시킨 사상적 유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