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일기 vs 엄마일기
1980년생 여자가 쓴 80년대. 90년대. 2000년대. 2010년대 일기 속에서 공통된 스토리를 뽑다.
017 핸드폰
1999년 2월 7일
TM 알바. 지하4층 무인정산기. 오늘도 어렵게 흐르는 시간. 핸드폰 017 사다. 017-000-0000 너무 피곤하다.
2010년 7월 7일
나는 017을 쓴다. 99년 핸드폰을 개통했고 여태 같은 번호를 유지하고 있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쉽게 번호를 바꾸기 시작했다. 너나 할 것 없이 010으로 갈아타고, 한번 갈아탄 010 번호는 밥 먹듯 변경 된다.
이젠 누구의 번호도 외울 수 없게 되었다.
99년 처음 만나 오래도록 연인 관계를 유지했던 사람은 017 번호를 쓰는 사람이었다. 여태 그 번호를 쓰는지 확인해보고 싶은 호기심도 들지만 왠지 바뀌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2004년에 강제규 영화모니터에서 만난 친구 G도 017 번호를 쓰는 사람이었다.
G는 통신 회사에 입사하며 어쩔 수 없이 010으로 갈아탔고 나는 그 사실이 너무 아쉽고 섭섭해서 몇번이나 슬프다고 이야기해주었다.
"먹고 살아야되는데 핸드폰 번호가 뭐그리 대수겠냐" G의 절규가 아직도 들려오는 듯 하다.
예전엔 017번호를 쓰는 사람을 만나면 무척이나 반가웠다. 지금은 011,016,018.019 번호만 만나도 동창을 만난 것처럼 가슴이 뜨거워진다.
그 많은 유혹을 이기고 촌스러운 사람 취급을 받으며 옛 번호를 지켜간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통신회사는 툭하면 우리를 협박한다.
사업을 폐지한다는 둥...
3년 전에 처음 만난 남편은 019 번호를 쓰는 사람이었다. 소개팅을 주선한 친구에게서 번호 정보를 넘겨받고 웃었던 기억이 난다.
남편은 여태 019를 쓴다. 왠지 착한 기분이 들게 하는 019 번호 풀넘버 10자리........
그 어떤 압력이 들어와도 우리부부는 바르고 꼿꼿하게 017과 019의 길을 갈 것이다.
2011년 10월 11일
오늘은 13년째 쓰고 있던 017-000-000 번호를 과감히 바꿨다. 충동적으로 핸드폰 가게에 들어가 나 017 번호 쓰는 사람인데 이제 갤럭시 s가 쓰고 싶다고 말해버렸다.
017번호.
고등학교 졸업하고 처음 가입한 번호라 애정이 참 컸다. 요즘 꽝꽝 터지는 집안 대소사가 나의 뇌에 어떤 작용을 했는지 느닷없이 화풀이처럼 갤럭시를 지르고 말았다. 차라리 자질구레한 쇼핑으로 스트레스를 풀 걸....
더 열 받는 건 집에 오니까 잘 안터져서 근무 중인 남편이랑 통화가 자꾸 끊어지더란 것임. 아흑. 내 017번호 돌려줘!
017번호를 다시 쓰시겠습니까?
편리하고 똑똑한 스마트폰을 버려야하는데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2015년 나의 대답은 yes입니다.
핸드폰 번호만으로 저마다의 개성을 표현하던 시절.
오늘이라도 017번호 부활 환영.....
작게 보면 저의 일기지만 크게 보면 우리가 살아온 이야기이기에 케케묵은 일기장을 펼쳤습니다. 오늘도 고맙습니다. 문창그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