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onic> Michel Franco, 2015
첫 번째 쇼트가 시작되면 카메라는 어떤 집 앞을 보고 있다. 그러다 한 여자가 집에서 나와 차에 타고 움직이기 시작하면 카메라는 팬pan(→)한다. 그렇게 여자가 탄 차 꽁무니를 바라보던 카메라는 이내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려(←) 운전석에 앉아 있는 한 남자를 본다. 그리고 잠시 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팬(→), 다시 차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크로닉>의 첫 번째 쇼트. 이 지독한 답답함. 자동차와 자동차. (곧 우리가 알게 될 이름,) 나디아와 나디아. (그리고 좀 더 뒤에서 우리가 알게 될 그녀의 정체,) 딸과 딸. 그것에 갇힌 한 남자. 답답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심지어 답답함이라는 말로도 부족하다는 것을 느낀다. 이 답답함은 고립과 매몰을 동반한 답답함이다. 다시 한번 반복해서 입 밖으로 뱉어본다. ‘갇힌' 한 남자. 두 번째 쇼트, 불 꺼진 방에 홀로 앉아 무언가 보고 있는 남자. 세 번째 쇼트는 지금 그가 보고 있는 게 무엇인지, 좀 전에 그가 좇아가던 차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려준다. 나디아 윌슨. 그리고 타이틀이 등장한다. ‘Chronic’. 우리가 지금껏 본 것이라고는 단 세 개의 쇼트, 두 번에 걸쳐 각각 다른 방법으로 나디아 윌슨이라는 여자를 엿보는 한 남자를 보여주는 단 세 개의 쇼트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만성적 환자일 수 있는 건 데이비드 한 명 밖에 없다.
네 번째 쇼트에서 데이비드는 세라를 씻기고 있다. 그리고 다음 쇼트에서 옷을 입힌다. 그런데 여섯 번째 쇼트는 조금 이상하다. 잘 보이지도 않을 만큼 어두컴컴한 와중에 병원과 통화 중인 데이비드가 잠깐 열어서 약병을 꺼내 사라지는 동안 가만히 앉아 냉장고를 보고 있는 카메라. 이 쇼트는 뭘까? 이어지는 일곱 번째 쇼트에서 세라는 동생네 가족들과 함께 있다. 그러다 데이비드가 나타나서 말한다. “I'm gonna steal Saere.” 그러자 (데이비드가 뒤에 웅얼거리듯 “for a second”라고 덧붙였음에도 불구하고) 동생 가족은 서둘러 자리를 비킨다. 마치 가족인 그들이 데이비드에게 잠시 세라를 빌리고 있었던 것처럼. 모두가 떠나간 뒤 데이비드가 세라를 일으키자 카메라는 그제야 관심이 생겼다는 듯이 고개를 들며(tilt-up) 일어서는 두 사람을 바라본다. 그동안 불청객들의 존재가 언짢았나 보다. 여덟 번째 쇼트에서 부엌으로 간 두 사람은 음식을 준비한다. 여기에 여섯 번째 쇼트에 대한 힌트가 있다. 데이비드가 세라의 집 냉장고 문을 열 때 우리는 거기에 조금 전 냉장고 문에는 없던 손잡이가 달려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데이비드는 조금 전의 냉장고에는 없던 토마토와 채소를 꺼내 든다. 즉 조금 전의 냉장고는 세라의 냉장고가 아니다. 그렇다면 그 주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 밖에 없다. 약병으로 가득 찬 그 냉장고는 데이비드의 냉장고다. 노란 병에 든 그 수많은 처방약들이 환자들을 위해 혹시 모를 비상시에 대비해 챙겨 놓은 약이라 하더라도 그는 냉장고에서 (노란 병이 아닌) 또 다른 약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어두컴컴한 방에 앉아 나디아의 사진을 넘겨보던 두 번째 쇼트와 호응하는 이 쇼트의 암흑은 그곳이 데이비드의 집이라는 걸 말해준다. 그는 자신의 냉장고에서 자기 약을 꺼내 든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데이비드에게는 어떤 만성적인 병이 있다.
액자 같은 문틀에 갇혀 각자의 채소를 썰고 있는 두 사람을 비춘 뒤 아홉 번째 쇼트에서 카메라는 운동 중인 데이비드 앞에 있다. 그런데 운동하는 모습을 보는 건 아니다. 데이비드의 고통스러운 표정을 보고 있다. 데이비드는 세라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얼굴을 한 채 러닝머신 위를 달리고 또 달린다. 열 번째 쇼트에서 다시 세라의 집으로 돌아간 카메라는 정원을 밖에 두고 실내에 갇혀 있는 두 사람을 보여준다. 부엌의 문틀 대신 이번에는 아치형으로 구멍이 뚫린 벽이다. 갇힘-러닝머신-갇힘. 열한 번째 쇼트에서 카메라는 다시 데이비드의 공간으로 돌아온다. 또다시 어둠 속에서, 그러니까 아마도 자기 방에서 빛나는 무언가를 보고 있는 데이비드. 열두 번째 쇼트는 날이 밝은 뒤 그의 방을 보여준다. 테이블에 놓여 있는 노트북 PC는 바로 전 쇼트에서 그가 나디아의 페이스북을 보고 있었을 거라 추측케 한다. 창밖에는 밝은 햇빛, 바람을 맞고 있는 야자수가 보인다. 쇼트 8-9-10의 갇힘-러닝머신-갇힘으로부터 무엇을 읽어낼 수 있는가. 갇혀있던 데이비드가 러닝머신 운동을 하고 난 뒤에도 갇혀있다는 게 무슨 뜻이겠는가. 고통스러운 달리기는 결국 무용한 노력이다. 아무리 달려 봐도 여전히 제자리에 있을 뿐이니까. 쇼트 10-11-12도 같은 패턴을 이어가고 있다. 생기 가득한 세라의 집 정원은 세라와 데이비드가 있는 공간과 구분되어 그들 바깥에 위치한다. 마찬가지로, 쇼트 12에서 데이비드는 창밖 풍경과 대비되어 삭막하기만 한 방 안에 잠들어 있다. 즉 데이비드에게 쇼트 11에 위치하는 행동, 다시 말해 나디아 윌슨의 페이스북을 염탐하는 것은 생기 없이 죽어 있는 삶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면서 러닝머신 위의 달리기처럼 무용한 몸부림이다.
열세 번째 쇼트, 차에서 내리는 데이비드. 그리고 열네 번째 쇼트에서 우리는 <크로닉>에서 처음으로 핸드헬드를 마주하게 된다. 한 순간도 그를 놓치지 않고 좇아가는 카메라는 데이비드가 세라의 죽음을 인지하는 과정을 보고 있다. 그러다 그가 세라의 방에 들어가면 카메라는 문밖에 남겨진다. 선반 위에는 영정처럼 흑백으로 찍힌 세라의 사진이 놓여 있다. 세라의 시신을 닦아주는 열다섯 번째 쇼트, 장례식의 열여섯 번째 쇼트를 지나면 이번에는 <크로닉>의 첫 번째 트래킹 쇼트가 이어진다. 나는 여기서 한 가지 의문과 그것으로부터 이어지는 추측을 제시하려고 한다. 먼저, 카메라는 지금까지 두 번 고개를 움직였고 또 두 번 몸을 움직였는데 이것들 사이에 성립하는 이상한 부등식에 대한 해명이 필요하다. 부등식은 어떻게 성립하는가, 라는 증명.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크로닉>의 카메라는 매우 ‘얌전’하다. 그래서 그 얌전한 녀석이 문득 움직이기 시작할 때 관객은 긴장하거나, 동요하거나, 놀라거나, 아무튼 어떤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왜 첫 번째 고갯짓, 그러니까 나디아의 차를 좇아가는 데이비드의 옆자리에서 가만히 시선을 돌리는 그 고갯짓이 두 번의 몸짓 각각보다 더 무겁냐는 것이다. 핸드헬드 쇼트에서 화들짝 놀라며, ‘어, 안 움직이는 거 아니었어? 움직이네?’ 한 건 사실이지만 시종 가만히 앉아 있던 녀석이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는데 거기엔 이상하리만치 비장함이 없다. 트래킹 쇼트도 마찬가지다. 그냥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이 데이비드가 차도를 건너길 기다렸다가 그와 나란히 걷기 시작한다. 더 크게 움직이는데 더 가벼운 이유, 더 적게 움직이는데 더 무거운 이유. 그건 몸을 움직이는 두 쇼트의 밀도가 고개를 돌리는 쇼트의 밀도보다 낮기 때문이다. 부피는 크지만 밀도가 더 낮다. 감정의 밀도가. 그렇다면 두 번째로 설명해야 할 질문은 왜 밀도가 낮은가, 하는 것이다. 그 답은 두 쇼트의 공통점, 그리고 나머지 쇼트의 공통점에 있다. 핸드헬드 쇼트는 데이비드의 출근길, 트래킹 쇼트는 장례식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나머지 쇼트는 데이비드의 장소 이동이 아니다. 그러니 두 쇼트에서 데이비드가 움직일 때 카메라는 사실 움직이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불가피한 장소의 이동이 일어나고 있을 뿐, 관심의 이동이나 의미의 이동은 일어나지 않는다. 카메라의 관심, 카메라에게 유의미한 대상, 데이비드는 앵글 속 같은 위치에 가만히 고정되어 있다. 물리적인 이동보다 마음의 이동에서 감정의 밀도가 더 높은 건 당연하다. 이것이 이상한 부등식의 증명이다. 이제 추측이 남았다. 알고 있는 사실로부터 새로운 가설. 왜 카메라는 데이비드를 따라 출근하고, 데이비드를 따라 집으로 돌아가는가? 왜 출근하는 데이비드의 뒤에서 따라가고 집으로 가는 데이비드의 옆에서 걷는가? 나는 트래킹 쇼트에서 카메라가 마치 데이비드의 아이가 된 것 같다고 느꼈다. 아빠 손을 잡고 걸으며 차에서 말 걸어온 여자를 쳐다보는 아이. 일터에 나가는 아빠를 따라나선 아이. 새로운 가설이란, ‘지금 카메라는 데이비드의 아이, 정확하게 말하면 어린 자식의 위치에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세라 조카의 부탁을 거절한 데이비드는 무덤으로 걸어간다. 카메라는 차 안에 남는다. 아이가 보지 못한 것은 아마도 아버지의 눈물일 것이다. 스무 번째 쇼트에서 바에 간 데이비드는 옆자리 손님들에게 세라가 아내인 것처럼 말한다. 그가 조카를 거절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는 세라를 아내라고 생각했는데 조카와 세라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는 아내로서의 세라를 잃는다. 깊은 슬픔을 잃는다. 그는 세라의 죽음을 환자의 죽음이 아닌 아내의 죽음으로 여기며 슬퍼하고 싶은 것이다. 다음 쇼트에서 차에 탄 데이비드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지만 상대방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스물두 번째 쇼트는 나디아의 페이스북 페이지를 다시 보여줌으로써 통화 상대가 나디아였음을 알려준다.
데이비드는 새로운 환자 존을 만난다. 스물여섯 번째 쇼트, 서점에서 존인 척하며 책을 산다. 스물일곱 번째 쇼트에서 존은 포르노를 본다. 스물여덟 번째 쇼트, 이번에는 존의 동생인 척 존이 설계했다는 집에 찾아간다. 그리고 스물아홉 번째 쇼트는 집 안에 들어간 데이비드를, 집 안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보여준다. 서른 번째 쇼트에서 존과 함께 포르노를 보던 중 교대 간호사가 도착한다. 그리고 두 번째 러닝머신 쇼트가 이어진다. 이번에는 카메라가 측면에서 데이비드를 찍고 있다. 카메라의 위치 때문에 아까는 볼 수 없었던 한 가지. 러닝머신 위에 놓여 있는 수건. 이때 수건은 비닐백 안에 들어있다. 다음 쇼트에서 데이비드는 사용한 수건을 한 손에 들고 나타난다. 방금 전 켜져 있던 TV가 꺼져있고 데이비드는 땀에 젖어 있다. 방금 전 가지고 있던 수건이 비닐백에 들어있던 것으로 미루어 보건대 지금 근무 중인 직원은 아까 데이비드에게 첫 번째 수건을 건네줬던 사람이 아니다. 최소한 한 번 교대가 이루어진 것이다. 지금 나열한 사실들은 모두 시간이 흘렀음을 시사하는 것들이다. 데이비드는 수건을 하나 더 가져간다. 그는 더 뛰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러닝머신은 죽은 삶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무용한 몸부림이다. 존이 등장한 후, 바로 전 쇼트들에서 세라 때와는 달리 쇼트 넘어가는 속도가 급격히 증가했다. 그리고 한 번 걸러 한 번 씩 포르노를 보는 쇼트가 반복된다. 생기를 갈망하는 존의 발버둥조차 권태로운 일상이 되어버린, 죽어있는 삶. 생의 문턱을 오가는 일조차 권태로 집어삼켜버리는 삶. 그는 지금 더욱 열심히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다. 다음 쇼트에서 데이비드는 존에게 줄 선물의 포장을 자신의 손으로 뜯어 건넨다. 직원 과는 대조적으로 그가 존을 가깝게 여긴다는 뜻이다. 선물은 그가 방문했던, 존이 디자인한 집의 사진이다. 스물아홉 번째 쇼트에서 구태여 보여준 그 내부의 광경이 담겨있다. 흑백으로. 흑백? 세라의 집 선반에도 흑백 사진이 있었다. 그렇다. 세라와 마찬가지로 그 사진은 존의 영정사진이며 환자들에게 흑백사진을 선물하는 것은 데이비드만의 의식이다. 동시에 그것은 존의 생일 선물이다. 데이비드는 생일선물로 죽음의 의식을 치렀다. 어쩌면 그는 존이 죽기를 바라고 있는 건 아닐까? 왜냐고? 그래야 자신이 또 고통받을 수 있으니까. 세라를 아내라고 생각하며 슬픔에 스스로를 매몰시키던 것처럼, 이번에는 형을 잃은 슬픔에 빠질 수 있으니까.
TV를 보고 있다가 새로 온 교대 간호사를 돌려보내고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앉는 데이비드. 그다음, 서른일곱 번째 쇼트에서는 데이비드가 존의 몸을 닦는 중에 존의 아들이 들어온다. 또 하룻밤이 지나고 서른아홉 번째 쇼트, 왜인지 데이비드에게 안겨 울고 있는 존. 딸 린다가 들어와 아버지를 안아 달래려고 하지만 존은 딸을 밀어내려 한다. 다음 쇼트에서 린다는 일층으로 내려가 방금 전 일을 전하고 그다음 쇼트에서 존의 아내 밀드레드가 방문을 열어 놓고 간다. 그렇게 존이 자신들과 같은 공간에 함께 할 수 있도록. 세 타임을 연속으로 근무한 데이비드는 앉아 있기도 힘들 만큼 피곤하지만 소파에 누워서라도 어두컴컴한 방 안에서 또 노트북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다음 날 회사에 나간 데이비드는 마흔네 번째 쇼트에서 자신이 고소당했다는 사실을 전해 듣는다. 격해진 감정으로 차를 몰고 간 곳, 존의 집. 데이비드가 린다에게 문전박대당하는 마흔여섯 번째 쇼트는 스물여덟 번째 쇼트에서 존의 작품을 찾아 생판 모르는 남의 집 문을 두드리던 모습과 똑같은 앵글로 촬영됐다. 존의 가족들에게 데이비드는 남이 되어버린 것이다. 집으로 돌아와 축 쳐져 있던 데이비드는 이내 다시 도로를 달린다. 밤새도록 달려 그가 도착한 곳은 나디아의 집 앞이다.
쉰한 번째 쇼트는 첫 번째 쇼트와 같은 앵글로 시작하는데 이번에는 카메라가 팬 하기 전에 쇼트가 끝난다. 눈을 질끈, 감는다. 지금 카메라는 겁이 난 것이다. 데이비드를 걱정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쇼트에서 데이비드는 주차장에 차를 세운다. 멈춘 차 안에서 어딘가를 쳐다보는가 싶더니 갑자기 키를 뽑아 차에서 내린다. 이때 뒷 자석에 앉아 있는 카메라는 어딘가로 걸어가는 데이비드를 멍하니 바라본다. 너무 놀란 나머지 바로 따라 나가지도 못 한다. 린다의 오해와 문전박대 때문인지, 존의 죽음과 함께 예정되어 있던 고통의 순간이 연기되었다는 사실 때문인지, 그 무엇 때문에 감정이 격해진 데이비드의 행동은 예상치 못 한 것이었다. 쉰세 번째 쇼트에서 지금껏 지켜오던 나디아와의 거리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데이비드가 그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갈 때 (아직 그녀가 데이비드의 딸이라는 걸 모르는) 관객은 존의 가족들처럼 데이비드를 의심하며 서스펜스를 맛보았을지도 모른다. 범죄를 저지를 것만 같은 격한 감정이 그의 걸음걸이에서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쉰네 번째 쇼트는 말해준다. 나디아가 데이비드의 딸이고 그에게는 아들이 있었다는 것을. 카메라는 자연스럽게 데이비드 아들의 자리가 된다. 옷과 신발을 새로 사 입고 새로운 직장을 찾아 옛 지인 아이작을 찾아간 데이비드는 그를 통해 마지막 환자, 마사를 소개받는다.
쉰아홉 번째 쇼트에서 나디아와 만난 데이비드는 묻는다. “내가 잘못한 것 같니?” 마침내 우리는 진단서를 쓸 수 있게 됐다. 죄책감. 그것이 데이비드의 완치될 수 없는 병이다. 그렇다면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 지금까지 데이비드 아들의 자리라고 생각했던 카메라, 그 카메라의 시선이 정말 아들의 것일까? 아들의 유령의 것일까? 어쩌면 지금껏 데이비드를 쫓아다니고 그를 가두었던 카메라의 앵글은 죄책감의 시선이 아니었을까? 데이비드는 아들에게 죄를 지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대가로 끊임없이 스스로를 고통 속으로 밀어 넣어왔다. 죽음을 앞둔 환자들을 찾아가 병시중을 들고, 그들의 죽음을 기다리고, 그들을 가족으로 만들어 죽음 이후에 올 슬픔과 고통을 할 수 있는 한 가장 크게 부풀린 것이다. 끊임없이 가족들을 떠나보내는 삶. 그 안에 자신을 가둔 것이다. 그러므로 <크로닉>의 앵글은 데이비드의 죄책감이 그 자신에게 던지는 감시와 추궁의 시선이며 지옥 같지만 벗어날 수 없는 감옥이다. ‘삶(life)’이라는 이름의 감옥. 그렇다면 잠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쉰일곱 번째 쇼트. 마사를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데이비드는 서둘러 자리를 떠난다. 카메라를 마사의 집에 두고 앵글 밖으로 나가버린다. 데이비드는 이제 벗어나려는 것이다. 그가 존을 성추행했다고 오해받았던 이유가 무엇이었나? 존을 환자 이상으로 가깝게 대했기 때문이다. 불편해할 존을 위해 연장근무도 마다하지 않고, 그가 원하는 방식으로 시간을 보냈던 건 그가 데이비드에게 가족이었기 때문이다. 죽어가는 이들을 자신의 삶에 끌어들이고 그 사람들의 죽음을 이용해 과거의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는 삶으로부터 이제 벗어나려는 데이비드에게 마사는 꼭 살아야만 하는 첫 번째 환자다. 그러므로 그녀와 함께 있을 때 데이비드는 편안하다. 거기에 더 이상 고통은 없다. 세라와 존과 함께 했던 씬들을 떠올려 보자. 카메라는 쇼트가 바뀔 때마다 데이비드와 환자의 앞뒤, 좌우를 오가며 방 안 이쪽저쪽을 돌아다녔다. 카메라, 즉 스스로를 바라보는 데이비드의 시선이 그렇게 방 안을 쏘다닌 이유는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참을 수 없는 고통에 방바닥을 구르는 것처럼 안절부절 정신없이. 나디아를 마사의 집에 데려와 함께 식사를 하는 예순일곱 번째 쇼트는 이를 증명한다. 마사를 자신의 가족으로 만들려면 실제 가족인 나디아를 그 안에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 실제 현실과 충돌이 발생하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사와 나디아를 서로 소개해줬다는 건 마사가 전의 환자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증명한다.
하지만 이야기는 데이비드의 바람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마사는 오히려 전이 진단을 받는다. 그리고 일흔한 번째 쇼트에서 뒷좌석의 마사를 바라보던 카메라는 그녀의 다급한 요청과 함께 다시 데이비드를 향해 팬(→)한다. 이토록 억장이 무너지는 팬이 또 있을까? 결국 다음 쇼트에서 데이비드는 마사와 함께 문틀 안에 갇힌다. 세라와 함께 그랬던 것처럼. 일흔세 번째 쇼트에서 마사는 자신을 침대에 눕히는 데이비드에게 “아들한테” 해준 일을 해달라고, 자기를 “도와”달라고 말한다. 데이비드는 자신의 아들을 죽인 것이다. 당황한 데이비드는 다시 한번 황급히 앵글 밖으로 달아난다. ‘무슨 소리예요, 나는 이제 그런 삶에서 벗어날 거예요.’ 그런 대사가 들리는 것만 같다. 그러나 다음 쇼트에서 마사가 혼자 자살을 시도하고 데이비드가 그녀의 방으로 달려 들어가자 영화는 ‘아니, 그럴 순 없어.’라고 말하기라도 하듯이 그를 놓치지 않고 앵글에 담는다. 이어지는 일흔다섯 번째 쇼트에서 데이비드는 헬스클럽이 아닌 실외에서 달리기를 하고 있다. 아무리 달려도 제자리인 러닝머신에서 그만 내려오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영화는 그의 바람을 들어줄 생각이 없다. 그는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후진 트래킹하는 카메라는 여지없이 그를 앵글 안 같은 위치에 고정시킨다. 결국 데이비드는 자신의 아들을 떠올리며 결심한다. 그는 마사를 죽인다. 여든일곱 번째 쇼트, 앉아서 울고 있는 데이비드 옆으로 서랍장 안에서 울리는 마사의 휴대전화가 보인다. 그녀의 딸일 것이다. 이번에도 환자의 가족은 뒤늦게 자신의 역할을 회복하려 한다. 세라의 조카가, 존의 딸 린다가 그랬던 것처럼. 데이비드는 댄에게 해주고 싶어도 해줄 수 없었던 그 가족의 역할을.
데이비드는 새로운 환자를 만난다. 소년. 마치 댄의 유령인 것만 같은 어린 소년. 아흔한 번째 쇼트에서 데이비드는 유령소년과 공원에 앉아 있다. 자신을 죽인 아버지에게 “꺼져.”라고 말하는 댄, 도무지 아들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데이비드. 둘은 그렇게 생기 가득한 공원에 둘러싸여 있다. T.S. 엘리엇의 말처럼 세라의 집 정원, 데이비드의 방 창밖 풍경 그리고 지금 이 공원은 두 사람에게 잔인할 뿐이다. 그들은 황무지에 있다. 그리고 아흔두 번째 쇼트. <크로닉>의 마지막 쇼트이자 마지막 달리기. 이번에도 카메라는 집요하게 데이비드를 가둔다. 계속해서 뒷걸음치는 카메라 때문에 햇살 아래 길은 러닝머신과 다를 바 없다. 몇 번인가 자신의 왼편에서 나오는 차들을 힐끔거리던 데이비드. ‘쾅!’ 그렇게 그는 앵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삶이라는 감옥, 죄책감의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여기엔 더 이상 만성적인 것도 병도 없다. 그러므로 엔딩크레딧 그 어디에도 ‘Chronic'이라는 제목은 등장하지 않는다. <크로닉>은 말한다. 삶이란 얼마나 만성적이냐고. 단 한 걸음도 앵글 밖으로, 영화 밖으로, 아니 삶 밖으로 내딛을 수 없을 때 구원이 찾아온다면 무엇일 수밖에 없겠냐고. 자살이라는 해방. 이것은 죽음에 대한 재평가다. 삶이 지옥이라면 죽음은 구원이 될 수 있다.
2015. 10. 15